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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정실이며 2대 황제 순종의 친모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사망하였다.

훗날 왕비가 되는 민자영은 1851년(철종 2년) 음 9월 25일 자시에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에서 아버지 민치록(閔致祿)과 어머니 한창부 부인 한산 이 씨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원래 민자영을 포함 남매가 1남 3녀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거의 외동딸로 컸다. 1858년(철종 9년), 아버지 민치록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는 유복한 생활을 했다. 왕비 간택 당시 고아였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모친 '감고당 이 씨'는 명성황후가 간택된 지 한참 뒤인 1874년(고종 11년), 민승호 암살 사건에 휘말려서 같이 죽었다.
민자영의 가계는 인현왕후의 큰오빠 민진후의 직계로 할아버지 민기현(閔耆顯)은 1800년(정조 24년), 별시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하여# 종2품 이조 참판에 올랐으며, 아버지 민치록은 음보로 종 4품 덕천군수·영천군수, 장악원 첨정(掌樂院 僉正)에까지 올랐다. 대과를 안 본 사람으로서는 꽤 높은 관직이다.
1866년(고종 3년), 민자영이 14세이던 해에 고종의 양어머니이자 대왕대비였던 대왕대비 조씨는 고종의 왕비를 정할 간택령을 내린다. 대왕대비 조씨는 간택령에 따라 고종과 나이가 비슷한 나이 대에 전부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 단자 2월 25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초간택을 했는데 민자영이 후보 5명 중 한 명에 들었다. 재간택을 거쳐 3월 8일 삼간택 때 마침내 고종의 왕비로 선정되었다. 이후 3월 21일 13세의 고종과 혼례를 올렸다.
당시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대왕대비 조씨와 실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깊은 뿌리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은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가 아닌 관리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고, 그런 상황에 민자영의 여흥 민씨는 남연군 - 흥선대원군 2대에 걸친 혼맥으로서 충분히 강력한 아군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아내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집안 격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부친은 물론 친형제가 없어 외척 걱정도 덜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는 민승호도 대원군의 처남이었다.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어머니, 부인, 며느리, 손자며느리가 모두 일가친척, 남연군 - 흥선대원군 - 고종 - 순종 직계 4대가 모두 여흥 민씨 일가친척들과 결혼한 것이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성인이 된 시점부터 사이가 점점 틀어졌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 설이 있지만, 첫아이와 관련된 설이 유명하다. 1871년(고종 8년) 11월 4일 출산했지만 아기가 항문 없이 태어나 4일 뒤 죽는다.
곧바로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궁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했고 이때부터 사이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야사에는 흥선대원군이 아기에게 산삼을 달여 먹였는데 죽고 중전 민씨는 이를 완화군을 책봉하기 위한 고의라고 의심해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됐다고도 한다.
1873년(고종 10년), 명성황후는 남편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게끔 흥인군 이최응, 조성하, 조영하 등 왕실 및 친족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리고 최익현 등을 포섭하였다.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퇴진을 요구하는 소(訴)를 지속적으로 올리도록 하여 결국 대원군의 퇴진과 고종의 친정을 이끌어냈다.
1875년(고종 12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의 국서 문제로 개항을 하느냐 마느냐 갑론을박한 끝에 고종은 개항을 결정해 근대적이고 불평등적인 강화도 조약이 강화도에서 정식 체결된다. 그리고 이어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영수호통상조약, 조독수호통상조약 등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서양 국가들과도 차례로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개항 후 외국인과 외국 문물이 밀려들면서 척화를 주장하는 이나 외래상권에 밀려난 이들의 불만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고종은 왕권의 강화와 국방을 위해 근대적인 서양식 군대를 창설할 필요를 느꼈다. 원래 있던 오군영에서 80명을 차출해 별기군을 새로 창설하고 기관포를 수입해 배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국방비를 증액한 게 아니고 기존에 있던 것들에서 빼와서 편성했기 때문에 오군영 운영비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882년(고종 19년)에 견디다 못한 오군영(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추대했고, 그는 장남 이재면과 부인을 대동해 입궁했다. 이들은 제일 먼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주살(誅殺)하고 왕비를 죽이려 했다. 왕비는 궁녀로 변장해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충청도 충주(장호원)까지 도망갔다.
중전이 충주로 피난을 간 당시, 임오군란을 일으킨 오군영 병사들은 중전과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전엔 해산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흥선대원군은 중전이 난리 중에 죽었다고 임의로 선언하고 국모로서 국장(國葬)을 선포하고 병사들을 해산시킨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명성황후와 측근들은 밀사 윤태준을 고종에게 보내 자신들의 생존을 알린다. 이들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장에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는 한성부 왕십리 근처에 모여있던 오군영 병사들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서울 전체를 장악했다. 민씨들은 조정으로 바로 복귀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기습 납치되어 톈진(天津)으로 끌려간다. 위기는 곧 기회. 민씨들은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개화파들에게도 약간 자리를 허락한다. 이들은 청나라 식의 근대화인 양무운동 모델을 따라 국정을 개조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근대화를 책임지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남편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그동안 대원군 섭정시기 종친 무관 남인 등의 세력을 등용했기 때문에 고종과 왕비 민씨는 자기 지지세력이 필요했다. 당연히 믿을 사람은 민씨 척족과 기존 대원군 정권 시절 찬밥이던 기존 세도정치 시절 안동 김씨를 비롯한 원로 관료들과 척사파들이었다. 즉, 척화파가 다시 힘을 얻었다.
조정에서는 개화파의 리더격인 우의정 박규수가 1877년(고종 14년)에 사망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서 스스로 사직하고 물러나자 위정척사파가 더욱 힘을 얻었는데, 개항한 지 5년이 지난 1881년(고종 18년)에 고종이 다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선포하는 지경이었다. 이때 청나라와 이홍장의 압력으로 일본과 근대적인 수교 이후 서양열강과의 수교를 강권하였기에 1882년(고종 19년)에 가서야 개화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이는 명성황후나 고종의 본뜻이 아니라, 임오군란을 강경 진압하고 서울을 장악한 청나라의 압력이 크게 작용한 것에 가깝다.
온건개화파로 분류되는 김기수나 김홍집은 수신사로 파견되었을때도 모든 서양사절 접견 권유를 격렬하게 거부하고, 일본이 제공한 공장 병영 철도 전신국등의 시찰기회를 갖은 핑계로 번번히 거부 하였다. 김홍집이 이홍장과 청나라의 공식 정책을 설명한 《조선책략》을 들여오자 그제야 위정척사와 단절하고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동양의 우월한 정신문명은 그대로 두고 철갑선과 화포 정도 등 물건만 사서 쓰자'는 동도서기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보빙사의 대표이며 중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을 온건 개화파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으나, 민영익은 민씨 척족과 조정의 여론대로 친청파였으며 개화에 어느 정도 선을 그어 급진개화파에게 숙청 1호로 꼽힌 사람이었고, 보빙사로 파견되었을 때 시찰보다 경전 독서에 힘썼다. 뱃멀미가 난다는 이유로 미국 대통령이 태워준 해군함정에서 프랑스 민간선박으로 도망가려다가(...) 나라망신 시키지 말라는 보빙사 통역 포크 소위의 경고를 받을 정도였다.
개화를 추진하기 전에 대원군 때 쌓아놓은 재정은 고종 친정 6개월만에 탕진해서 자금이 필요했다. (여기엔 디플레이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청전을 금지시킨 탓고 있다.) 매관매직도 모자라 조선왕조 최초로 매과 즉 과거 합격증까지 팔아치웠을 정도. 그럼에도 재정은 항상 모자라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는데 당시 군사들 월급을 줘야 할 선혜청 당상이 중전 민씨의 친정오라버니 민겸호였으니 고종과 왕비 민씨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임오군란이 마무리되고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 내정간섭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파견했다. 이 때 내한한 재정고문 묄렌도르프가 새로운 화폐 주조 안건을 고종에게 올렸다. 일본 화폐(엔화)를 도입해 영향력을 높이려던 급진개화파는 흥선대원군 때 당백전의 발행으로 비정상적인 물가상승을 겪었던 부작용을 들어 일본의 차관을 얻고 금본위제를 주장했다. 둘 다 장단점이 있었고 고종은 둘다 실시해서 당오전을 발행하게 하는 한편 차관도입을 약속한 김옥균을 일본으로 보내 차관을 받아오게 했으나 차관 문제에 대한 일본 측과의 합의된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협상 결렬로 결국 실패한다.
청나라식(양무운동)이 아니라 일본식(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개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급진개화파는 좁아진 입지를 벗어나기 위해 갑신정변을 벌이지만 정변 개시 3일 만에 청군의 진압으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1894년(고종 31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온건개화파 치하의 조선은 기존 체제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재외 공사관도 설치했다. 주미 공사관, 주일 공사관을 시작으로 주요 10개 국에 정식으로 외교 사절을 보냈다. 민씨 척족 등을 비롯한 온건개화파는 전신 설치, 발전기 도입, 경인선 부설 및 지하 자원 조사 등에 나섰고 나름 성과도 있었다. 교육도 개혁했다. 성균관 개설 과목에 초보적인 경제학, 영어, 과학 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젊은 관료들을 서구식으로 재교육하는 육영공원도 만들어 가르쳤다. 남녀 가리지 않고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중전에겐 여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고종 부부에게 커피를 처음 소개한 마리 손탁 등 외국인 친구들까지 생겼다.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 등은 덕수궁과 인천 제물포 등에 서구식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울 정동에 손탁호텔이 문을 연 것도 이 때다.
그러나 신분제, 양반 면세 제도 등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조선의 서구 근대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아울러 갑신정변 건도 있어 과감한 정책 제안이나 시도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동안 '영약삼단' 등 청나라의 내정간섭은 날로 심해졌고, 일본도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었지만 뒤에서는 딴 짓을 했다. 일본이 갑신정변 주모자들(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을 숨겨주고 있는 것도 끊임없이 작고 큰 외교 마찰을 일으켰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개화정책으로 재정이 빈약해지며 관리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지못했고 이들은 착복으로 이어진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행이 원인이었다. 진압하러 간 관군이 전투에서 연일 패배하며 동학군이 서울로 차츰차츰 북상하자 청군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 이에 응한 청나라 군은 아산만으로 상륙하고 요청하지 않았던 일본군은 텐진 조약을 빌미로 인천으로 기습 상륙한다. 일본군까지 상륙하는 걸 보고 놀란 정부는 우리 영토에서 전쟁이 날까봐 급히 동학군과 화약을 맺어서 해산을 유도해 주둔 명분을 없애고 양군에게 철수하라 권고하지만 일본군은 오히려 톈진 조약을 무시한 채로 고종과 중전 민씨가 거주하고 있는 경복궁을 불법으로 점령하고는 아산에서 청군을 공격해 청일 전쟁을 기어코 일으킨다. 이후 김홍집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이들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을 추진한다.
1895년(고종 32년), 일본이 끝내는 이겨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타이완 섬을 일본에 할양하고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따라 들어온 급진개화파들이 내각에 참여, 온건개화파와 함께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한편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합세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하게 하는 삼국간섭이 일어난다. 고종 부부는 러시아를 매우 주목하게 됐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수시로 접촉을 가졌다. 이때 온건개화파 주요 인사들을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서울 정동으로 다니다보니 정동파라고 불리기도 했다. 러시아 역시 온건개화파 인물들은 물론 중전에게까지도 갖가지 선물을 보내며 환심을 샀다. 명성황후의 사치에 대해 말이 많은데, 이때 받은 선물들도 상당히 있어 사치벽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일본 정부에서는 러시아에게 조선을 완전히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반러 여론을 조성한다. 일례로 청일 전쟁 몇 년 전인 1891년(고종 28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교토에서 일본 순사인 츠다 산조(津田三蔵,1855~1891)의 암살 시도로 중상을 입는 일이 있었고 이에 따라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 내각은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일본군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죽임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자 한다.
이에 당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고종과 중전 민씨가 나름 일본과 거리를 두려하자, 자신의 후임 공사로 온 前 일본군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면서 시해할 음모를 꾸민다.
고종은 일본 교관들이 양성한 훈련대의 충성심을 의심해 해산 방침을 통보하자 일본은 그 결정의 배후로 지목된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 등을 동원해 경복궁을 새벽에 공격한다. 일본군과 경찰이 시위대를 몰아내고 같이 온 일본 낭인들이 건청궁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불태워버린다.
12년 전 임오군란 때 중전 민씨를 업고 서울 탈출을 도왔던 홍계훈은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장(연대장급)이었는데 이 때 광화문에서 전사했고 시위대는 연대장 현흥택과 미국인 군사 고문 다이의 지휘 하에 일본 측과 맞서 싸웠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일본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은 처음엔 조선인들의 내부 소행이라 개소리를 시전했지만, 러시아 기술자 사바틴, 미국 교관 다이를 비롯해 외국인 목격자도 많았다. 그들은 곧 미우라 공사와 낭인들을 체포해서 법정에 세웠다가 증거불충분+춘생문 사건을 빌미로 방면했다. 물론 일본은 이 사건 자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며, 발생 당시 세간의 관심도 그리 받지 못했다. 또한 2009년 전까진 일본의 모든 언론기관이 을미사변에 대해선 함구하고 거론하지 않았다.

*출처: 나무위키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 12월 13일 을유 2번째기사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고종실록》 총서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황제(皇帝)의 휘(諱)는 희(㷩)이고, 자(字)는 성림(聖臨)이고, 호(號)는 주연(珠淵)이다. 처음의 휘는 재황(載晃)이고, 자는 명부(明夫)였다. 흥선 헌의 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의 적실의 둘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여흥 순목 대원비(驪興純穆大院妃) 민씨(閔氏)이다. 【본향(本鄕)은 여흥이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증 영의정(贈領議政) 민치구(閔致久)의 딸이다.】 임자년(1852) 【철종(哲宗) 3년】 7월 25일 계유일(癸酉日)에 정선방(貞善坊) 사제(私第) 【흥선 대원왕의 사제이다.】 에서 탄생하였으며, 계해년(1863) 【철종 14년】 12월 8일 경진일(庚辰日)에 철종이 승하(昇遐)하자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의 명으로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뒤를 이어 철종 장황제(哲宗章皇帝)의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였다.

아버지는 문조 익황제이고 어머니는 신정 익황후 조씨(趙氏) 【본향은 풍양(豐壤)이다.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이다.】 이다. 처음에는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졌고, 12일 갑신일(甲申日)에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13일 을유일(乙酉日)에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34년 정유년(1897) 9월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문무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한 결과 17일 계묘일(癸卯日)에는 천지에 제사를 지내어 고한 다음에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11년 7월 19일 무신일(戊申日)에 황태자(皇太子)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었고, 대정(大正) 8년 1월 21일 【무오년(1918) 12월 20일 계유일(癸酉日)】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44년이고, 나이는 67세이었다. 홍릉(洪陵)에 합장(合葬)하였다. 【양주군(楊州郡) 미금면(渼金面) 금곡리(金谷里)에 있으니, 을좌 신향(乙坐辛向)이다. 대정 8년 3월 4일에 장사를 지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황후(皇后)는 효자 원성 정화 합천 홍공 성덕 명성 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明成太皇后) 민씨(閔氏)로, 【본향은 여흥(驪興)이다.】 증 영의정(贈領議政)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신해년(1851) 【철종 2년】 9월 25일 정축일(丁丑日)에 탄생하였고, 병인년(1866) 【고종(高宗) 3년】 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을미년(1895) 8월 20일 무자일(戊子日)에 경복궁(景福宮) 곤녕합(坤寧閤)에서 승하하였으니, 나이는 45세이었다.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12일 【정유년(1897) 9월 17일】 에 황후(皇后)로 추봉(追封)하였다. 홍릉(洪陵)이다. 【광무 원년 11월 22일에 처음 양주군(楊州郡) 청량리(淸涼里)에 장사를 지냈다가 대정(大正) 8년 2월 16일에 이곳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8월 30일 정묘 2번째기사 1890년 조선 개국(開國) 499년

대행 대왕대비의 지문

대행 대왕대비(大行大王大妃)의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아! 우리 대행 대왕대비께서는 태임(太姙)과 같은 성인(聖人)으로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할 때 공을 종묘 사직(宗廟社稷)에 남겼고, 덕이 온 나라에 미쳤으며, 위태하던 나라를 바꾸어 반석같이 다져놓으셨다. 장락궁(長樂宮)에 한가히 있으면서 부귀는 해와 달 같았고, 오래 장수한 것이나 훌륭한 덕과 업적은 거의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 전하의 지극한 정성이 바다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하늘이 순응하고 사람이 믿어서 자애로운 덕행은 더욱 훌륭해지고 효성은 더욱 빛나, 이 세상에 생을 누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억만년 무궁토록 길이 장수하기를 빌었다.

경인년(1890) 봄에 왕후께서 병으로 편찮으시다가 이튿날 나았으나 여름 4월에는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전하가 병을 간호하며 애태우다 신하들에게 직숙하며 약시중을 하도록 명했지만 의술의 효과가 없었으므로, 또 종묘 사직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빌었으나, 끝내 17일 병진일(丙辰日) 미시(未時)에 경복궁(景福宮) 흥복전(興福殿)에서 승하(昇遐)하였으니, 나이는 83세이었다.

아! 슬프다! 어찌 이른바 신령으로서도 참으로 밝히기 어렵고 이치로도 추측할 수 없단 말인가? 우리 전하는 슬피 울었으나 미치지 못하여 이에 여러 신하들에게 옛날 시호법(諡號法)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백성이 이름 할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하고, 큰 생각을 능히 성취한 것을 ‘정(貞)’이라 하니, 삼가 ‘신정(神貞)’이라는 존호(尊號)와 ‘경훈 철범(景勳哲範)’이라는 휘호(徽號), ‘효모(孝慕)’라는 전호(殿號)를 올렸으며, 산릉의 길지(吉地)를 수릉(綏陵)과 같은 언덕에 정하고 이해 8월 30일 정묘일(丁卯日)에 그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임금이 신에게 유궁(幽宮)의 지문을 지으라고 명했는데, 신이 혼미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어 상소를 올려서 사양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면서 순서에 따라 이 글을 지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왕후의 성(姓)은 조씨(趙氏)이다.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조맹(趙孟)이 처음으로 풍양(豐壤)에 본관(本貫)을 두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한평군(漢平君) 조익정(趙益貞)이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죽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았고 시호(諡號)는 공숙공(恭肅公)이다. 5대를 내려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풍안군(豐安君) 조흡(趙潝) 인조(仁祖)를 도와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 책훈(策勳)되었는데, 좌참찬(左參贊)을 추증 받았고 시호는 경목공(景穆公)이다. 3대를 내려와서는 바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을 추증 받은 경헌공(景獻公) 조상경(趙尙絅) 영조 때의 이름 있는 신하였다. 신축년(1781)·임인년(1782)에 큰 의리를 확고히 견지하여, 금상(今上)이 특별히 명하여 대대로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왕후의 고조부(高祖父)가 된다. 증조부(曾祖父)의 이름은 조엄(趙曮)인데, 이조 판서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 받았으며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다. 조부(祖父)의 이름은 조진관(趙鎭寬)인데, 행실이 아주 착했고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효문공(孝文公)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조만영(趙萬永)인데, 일찍이 이조 판서를 지냈고 왕후가 정식 대비(大妃)로 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으로 봉하고 후에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경공(忠敬公)이고 순조(純祖)의 묘정(廟廷)에 배식(配食)하였다. 어머니는 덕안 부부인(德安府夫人)으로 추증된 은진(恩津) 송씨(宋氏)이다. 목사(牧使)로 찬성(贊成)을 추증 받은 송시연(宋時淵)의 딸이고 찬선(贊善) 문원공(文元公) 송명흠(宋明欽)의 손녀이며 판서(判書)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다.

왕후는 순조 무진년(1808) 12월 6일 정유일(丁酉日)에 두포(荳浦) 쌍호정(雙湖亭)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이에 앞서 증조모(曾祖母) 홍부인(洪夫人)이 꿈에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서 이상한 호랑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었는데, 출생하고 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아 상서로운 빛이 방을 둘러싸 새벽녘과 같이 밝으니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왕후의 효성과 형제애는 타고난 성품이어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부모보다 먼저 먹는 일이 없었으며, 형제간에도 쉬운 일은 사양하고 힘든 일은 자신이 하였다.

12세 때인 기묘년(1819)에 선발되어 겨울 10월에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고 이어 혼례를 거행하였다. 효의 왕후(孝懿王后) 순조 대왕(純祖大王) 순원 왕후(純元王后)를 섬겼는데 유순하고 화락하기 이를 데 없었고 언제나 삼가하고 조심했기에 두 전하가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였다.

정해년(1827)에 익종(翼宗)이 복잡한 정사를 대신 처리할 때 왕후는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돌아간 임금이 이룩한 너그럽고 인자하며 공손하고 검소한 정사를 안에서 도운 공이 지극하였다.

이해 가을 7월에 하늘이 준 복을 크게 받아 헌종(憲宗)이 탄생했으니 한 집안에 세 성인이 오래도록 복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좋지 못하여 경인년(1830) 5월에 익종이 훙서(薨逝)하니 왕후가 음식도 들지 않고 슬피 울어 곁에서 감히 볼 수가 없었다. 갑오년(1834) 11월에 순조(純祖)가 등하(登遐)하니 왕후는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피 곡하였다.

헌종(憲宗)이 왕위를 잇자 익종을 추존하여 왕으로 삼고 왕후를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았으며 정유년(1837)에 거상이 끝나자 ‘효유(孝裕)’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무신년(1848)에 ‘헌성(獻聖)’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기유년(1849) 6월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哲宗) 신해년(1851)에 거상이 끝나자 ‘선경(宣敬)’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계축년(1853)에 ‘정인(正仁)’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정사년(1857)에 순원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大王大妃)라는 칭호를 올리고, 기미년(1859)에 자혜(慈惠), 계해년(1863)에 ‘홍덕(弘德)’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 귀신과 사람이 의탁할 데가 없으므로 나라의 위기가 경각에 처하였다. 왕후가 큰 계책을 정하고 금상(今上)을 잠저(潛邸)에서 맞아들여 익종의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끌어대어 대비에게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청하니, 왕후는 어린 왕이 임금 자리에 있으므로 정사가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고 마지못해서 윤허하였다. 을축년(1865)에 정아(正衙)를 다시 세우고, 병인년(1866) 2월에는 수렴청정을 거두도록 명하였다.

이 해에 거상이 끝나자 ‘순화(純化)’라는 존호를 올리고 ‘문광(文光)’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정묘년(1867)·무진년(1868)·기사년(1869)·계유년(1873) 연간(年間)에 ‘원성 숙열 명수 협천(元成肅烈明粹協天)’이라는 존호를 더 올리고, 을해년(1875)·정축년(1877)·무인년(1879)·기묘년(1880) 연간에 ‘융목 수녕 희강 현정(隆穆壽寧禧康顯定)’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계미년(1883)·병술년(1886)·정해년(1887) 연간(年間)에 ‘휘안 흠륜 홍경(徽安欽倫洪慶)’이라는 존호를 더 올리고, 무자년(1888)에 연이어 ‘태운 창복(泰運昌福)’이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경인년(1890)에 ‘희상(熙祥)’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왕후가 수렴청정 하던 초기에 임금에게 하교하기를,

"지금 망극한 가운데 500년 전해오는 종묘 사직이 다행히 의탁할 데가 있게 되었습니다. 주상은 곧 우리 인조(仁祖)의 혈통을 이은 후손이고 영조(英祖)의 방계 자손입니다. 조종(祖宗)의 왕통을 잇고 조종이 하던 일을 하는 만큼 마땅히 조종을 본받아야 하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곧 조종이 전해준 심법(心法)이며 조심하고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는 것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비록 어린 나이에 슬프고 경황없는 때이지만 자주 신하들을 만나서 경서(經書)와 역사를 강론하여 다스리는 방법과 정사하는 계책을 밝게 익히며, 위로는 조종이 중히 여긴다는 것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비록 높다 하더라도 본래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는 법이 없으며, 더구나 대신들이 조종의 법을 받들어 돕고 인도하는 것도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예로 대하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하였다. 예조(禮曹)의 관리가 종묘(宗廟)에 축문(祝文)쓰는 격식을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니, 왕후가 중앙과 지방에 유시하기를,

"계책을 정하여 전교한 가운데 대통(大統)이라고 한 것은 큰 윤리를 말한 것이다. 만일 나라를 전한 계통을 논한다면 정조(正祖)·순조·익종·헌종의 계통이 전해져 대행 대왕에 이르고 주상께서 이어받았으니, 어찌 두 계통이라고 의심을 가지겠는가? 그러므로 익종은 황고(皇考)라 칭하고 헌종은 황형(皇兄)이라 칭하며, 대행 대왕은 황숙고(皇叔考)·효종자(孝從子)라고 칭하라."

하였다. 일찍이 임금을 연회에 모신 자리에서 하교하기를,

"지금 백성은 당요(唐堯) 우순(虞舜)의 백성이므로 임금은 마땅히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주상은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 백성은 임금의 백성이므로 부세(賦稅)를 줄이고 요역(徭役)을 덜어주며 사치를 제거하여 널리 미치게 한다면, 백성들은 자연히 늘어날 것이고 재정은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우리의 백성인데 그들이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는가? 덕이 아래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인가, 수령이 적임자가 못 되어 그러는 것인가? 그들은 필시 일 년 내내 힘들여 노동하지만 한 오라기의 실, 반 알의 낟알까지도 모조리 삼세(三稅)와 탐관오리의 주머니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쌍한 저 백성들 중에는 굶주림과 추위에 몰려 이렇게 기어 다니다가 우물에 빠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원인을 찾는다면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상에게 거듭 강조하는 것은 다 백성과 나라에 절실한 문제이니,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당요의 흙섬돌〔土階〕과 떼이엉〔茅茨〕, 하우(夏禹)의 변변치 않은 음식과 궁실이 그들을 만고의 성군(聖君)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와서 사치가 점점 성해져 진귀한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으니 한정된 재정을 절제 없이 쓰게 되어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옛 성인의 교훈에 흠집을 남긴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비단 옷과 훌륭한 음식도 달갑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은 바로 자모(慈母)의 책임이고 임금의 학문을 돕고 인도하는 것은 오직 경들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권강관(勸講官)을 두고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며, 산림(山林)의 유현(儒賢)을 자주 불러 한 가지 정사나 한 가지 일에 대한 명령에 이르기까지 순수하게 공명정대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백성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더욱 충실하도록 하라."

하였다. 탄신일에 진상하는 물건들과 수렴청정 할 때에 응당 공급하기로 된 것도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은 다 그만두게 하였다. 각 공물을 바치는 계〔貢契〕에서 그 전에 바치지 못한 것은 사실 오래 쌓인 부족량으로 되는데 바칠 물건에 대해서는 규례대로 값을 받고 있었다. 왕후는 이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공물을 바치는 각계(各契)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도민(都民)들이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인데, 경비가 고갈되어 개혁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3분의 1을 감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주저하자, 하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가난하면 나라가 위태로운 것이다. 지금 어린 왕이 위에 있는데 어찌 그렇게 아까워할 수 있겠는가? 각 공계에서 바치지 못한 것을 모두 탕감하여 전례 없는 은덕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이제부터 나라의 재정이 넉넉하게 되고 부족하게 되는 것은 다 중앙과 지방의 해당 관리들에게 위임하겠다.’라고 하였는데, 탕감한 것은 쌀이 39만 9,200석(石), 돈〔錢〕이 4만 900냥(兩) 남짓이었다.

평안도(平安道)에 군량곡을 더 주어 낮은 이자로 준 돈을 여러 해 동안 물지 못하고 끌어오는데 대하여 감사(監司)를 시켜 조사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많이 축난 것을 독촉하여 받으면 가난한 백성에게 해가 미치어 모두 망하여 흩어지기 쉬우니, 마땅히 먼저 돌보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감면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각 궁방(宮房)에서 사사로이 도장(導掌)을 보내어 황해도(黃海道) 각 고을에서 남은 결세(結稅)를 모두 받아들이면서 함부로 잡아다가 포악하게 구는 바람에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내수사(內需司)에서는 행주(幸州)에서 명목이 없는 세를 만들어 내어 여러모로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 배가 통하지 못하게 되니, 그 폐단이 모두 극도에 달하였다. 하교하기를,

"궁방이나 내수사뿐만 아니라 심지어 재상의 집에서까지 함부로 사들여 보(洑)를 열고 제언(提堰)을 쌓으며 광석을 캐고 푸줏간을 만드는 등 폐단이 많으니, 서러운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고, 의정부에 명하여 각도(各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궁차(宮差)를 일일이 쫓아버리게 하였다.

또한 재물을 가지고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거듭 금지하고, 도민(都民)들의 좌경법(坐更法)007) 을 폐지했으며, 거듭 화재를 당한 시전(市廛)에 돈 5만 냥과 무명 50동(同)을 특별히 내려주어 집을 짓게 하고, 이어 각 아문(衙門)에서 공금을 시전(市廛)에 꾸어준 것을 면제하는 등 무릇 백성들의 힘을 펴주기 위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었다.

영남(嶺南) 호남(湖南)에 수재가 나자 특별히 본 도의 일을 맡아보는 가까운 신하를 파견하고 윤음(綸音)을 내려 이재민을 위로하였으며 구휼하는 것을 정상적인 규례보다 더 하였다.

제주도(濟州道)가 멀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 있기 때문에 특별히 염려하여 탕장(帑藏)의 재물을 내어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해당 목사(牧使)의 임기를 연장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을 덜게 하였다.

형옥(刑獄)을 신중히 처결하도록 하교하기를,

"종친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 흉악한 무리들에게 걸려들어 가끔 불행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도 억울한 사정을 풀지 못하여 사건이 애매하고 명백하지 못한 것이 반드시 없지 않을 것이다. 의리에 관계되고 충성과 반역이 명백한 것 외에는 모두 놓아주는 것이 어찌 화목으로 이끌고 생명을 구하는 기본이 아니겠는가?"

하고, 대신과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에게 신칙하여 모여 앉아서 조사하게 하였다. 또 중앙과 지방의 옥안(獄案)에 대해 심리하라고 명하면서, 《상서(尙書)》 〈여형편(呂刑編)〉의 ‘불쌍히 여기며 조심하라.’는 글을 인용하여, 유사(有司)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이 백성에게 미치도록 판결하되, 죄 있는 사람은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고 스스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유시하였다.

전 승지(前承旨) 남종삼(南鍾三) 등이 불순한 마음을 품고 몰래 외국과 내통하여 사학(邪學)을 배웠는데, 그것이 요원(燎原)의 불길같이 전파되니, 왕후는 크게 우려하여 속히 국문(鞠問)하고 아울러 주벌(誅罰)하도록 명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신칙하여 그 무리들을 모두 잡아들이게 하여서 온 나라를 깨끗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왕후가 유교를 지키고 이단을 물리친 큰 정사였다.

신하들에게 신칙하는 경우에는 명분과 지조를 숭상하며 청렴한 마음을 장려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학식이 많은 선비나 충성스러운 신하로 왕실에 복무한 사람에게는 혹은 벼슬을 주거나 시호(諡號)를 주고 혹은 제사를 지내주거나 후손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며, 인재를 쓰는 경우에는 앞길이 막혀 벼슬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되 소원하다고 해서 차이를 두지 않았고, 탐오하는 관리를 징계하는 경우에는 벼락 같은 위엄으로 처벌하고 귀양 보냈으며, 수령의 훌륭한 정사를 권면하는 경우에는 새서(璽書)를 내려주는 은전으로 총애를 베풀고 특별히 표창하였다. 수령으로 처음 벼슬자리에 들어온 사람을 인견(引見)하여 대면하고 거듭 유시하기를,

"너희들에게 관직을 제수한 것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잘하면 상을 줄 것이고 잘못하면 처벌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어 시무(時務)를 조목별로 진술하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힘쓰면 무슨 일이든지 경계하고 살필 수 있는데, 어찌 보통 말이라고 해서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설사 간혹 왕후의 뜻에 맞지 않더라도 즉시 흘려보내었다. 과거 시험을 엄하게 하기 위해 주사(主司)를 골라서 임명하고 재예(才藝)를 시험하는 것을 세밀하고 명백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후에게 한때의 즐거움을 드리고자, 조씨(趙氏)로서 해액인(解額人)을 특별히 사마방목(司馬榜目)의 명단 끝에 넣으라고 명했는데, 왕후가 이르기를,

"어찌 선파(璿派)의 일가친척과 같이 비교하여 똑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여러 번 하교하였으므로 마침내 임금의 명을 취소하였다. 이것으로 평소에 왕후가 외척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않도록 경계한 것과 성상이 그 뜻에 순종하는 효성으로 자성(慈聖)의 덕을 빛내고 크게 드러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렴청정을 그만둘 때 대신과 재상들을 불러 하교하기를,

"내가 미망인(未亡人)으로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예로부터 왕비(王妃)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불행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옛날의 현명한 왕후들과 비슷이나 하겠는가? 그런데 온 나라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역대 임금의 사적을 들어 눈물을 흘리며 요청했고, 나도 종묘 사직이 큰 근본이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윤허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주상의 나이가 이미 장성했고, 성상의 성품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으로서 슬기로운 지혜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중요한 공무를 밝게 익히고 학문이 독실하니, 모든 정사를 직접 맡아 처리할 수 있는데,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나라의 체모를 존중하고 큰 법을 바로 세우는 데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 오늘부터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 처리하되,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대신을 예우하고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를 보전하며 우리 선대 임금의 가법(家法)을 지키도록 주상은 힘쓸 것입니다. 다 같이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인도하고 바로잡아 우리의 끝없는 국운을 견고하게 하도록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기대한다."

하고, 수렴청정을 그만두기로 한다고 명했으니, 아! 훌륭한 일이었다.

옛날 송(宋) 나라 사람들이 선인 고태후(宣仁高太后)를 칭송하여 여자 중의 당요이며 우순이라고 하였다. 그도 성인은 성인이지만 우리의 성모(聖母)가 용감하게 수렴청정을 그만둠으로써 그 끝을 바르게 한 것으로 말하면, 또한 선인 고태후도 능히 따르지 못할 것이다.

왕후는 성품이 단정하고 의지가 굳으며 인자하고 공경하며, 한평생 빠른 말을 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소학(小學)》을 마음에 두어 집안의 몸가짐에 도움이 많았으며, 즐겨 역대 임금들의 정사의 잘잘못과 옳고 그른 사적을 보고 재삼 교훈으로 삼았다.

순원 왕후가 병이 나자 밤낮으로 약시중을 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모를 받드는 정성이 끝이 없었다.

임신년(1872)에 태조(太祖) 원종(元宗)의 어진(御眞)을 옮겨 모사(摹寫)할 때, 그림족자와 장막으로 쓸 것은 다 궐내에서 내려 보내고 어진을 모셔놓은 진전(眞殿)의 제물과 장막을 고치는 것은 반드시 성복(盛服)하여 직접 점검하였다. 장사지내는 절차는 더욱 근엄하여 모든 내외 전(殿)과 궁(宮)들의 상사(喪事)와 염(斂)하고 수의를 갖추는 것을 직접 스스로 점검하여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였으니, 수빈(綏嬪)의 상사 때 몸에 종기가 생겼으나 역시 몸소 점검하였다.

갑오년(1834) 순조(純祖)의 상례(喪禮)와 인릉(仁陵)을 옮기는 봉비구(奉庀具)는 순원 왕후가 반드시 왕후에게 물어서 처리하였다. 기제사 때에는 반드시 정숙하게 하여 비록 나이는 많지만 혹시라도 해이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제사에 쓰는 은그릇을 훔친 자가 있었는데 사실이 발각되어 궁중에서 떨고 있었다. 왕후는 죄 없는 사람이 잘못 걸릴까 염려하여 임금에게 묻지 말도록 청하고 이에 그 모양대로 고쳐서 만들게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인자한 마음을 베푼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왕후는 일찍이 수릉의 묘소가 적당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헌종 병오년(1846)과 철종 을묘년(1855)에 천장하는 예를 거행하였는데, 모두 왕후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주상을 예로 높여, 나가서 만날 때마다 비록 80세의 노인으로 몸이 편치 않은 때라 하더라도 시녀를 시켜 반드시 부축하게 하고 일어나 앉았다. 음식과 행동하는 절차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못할까 늘 걱정하며 28년을 하루와 같이 하고, 매우 피곤하면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명온 공주(明溫公主)·복온 공주(福溫公主)·덕온 공주(德溫公主) 세 공주와는 정이 매우 두터워서, 그들이 죽자 자손들보다도 더 잘 돌보았다. 외척을 대하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만났으며, 사치한 것을 보면 옛일을 인용하며 깨우쳐주어서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치게 하였다.

왕후는 자기 몸을 봉양하는 데에는 검소하게 절약하여 붓과 벼루 외에는 씻은 듯이 아무런 물건도 없었다. 옷은 대부분 빨아 입었으며 적의(翟衣) 이외에는 비단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욱 겸손하여, 존호를 올리고 옥책문(玉冊文)을 드릴 때마다 더러 마지못해 받기는 했지만, 오히려 두려워하며 받지 못할 것처럼 하였다. 성대하게 벌이는 행사에 대해서 왕후가 이르기를,

"나라의 저축이 넉넉하지 못하고 백성의 힘이 또한 고달픈데, 어찌 경사를 화려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수렴청정을 거두고 빛나는 교화를 그만둔 다음부터는 위에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 같았다. 임오년(1882)과 갑신년(1884)의 변란에 위기에서 회복하고 안정되게 된 것은 왕후의 위엄에 힘입은 것이니,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운을 내게 하며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여 아픔이 자기에게 있는 것같이 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 성상이 유지를 받들어 장사지내는 모든 물품을 백성들과 시민(市民)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므로, 깊은 산 두메산골에서도 애도의 정을 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이르기를,

"성모께서 우리를 돌보아주고 우리를 다시 살려주었는데, 지금은 그만 가셨으니, 우리는 어찌하겠는가?"

하였으니, 아! 슬프다! 신이 삼가 《시경(詩經)》의 관저장(關雎章)에 있는 후비(后妃)의 덕에 대하여 들었는데, 그 시에서는 비록 후비만 칭송한 것 같으나 문왕(文王)에게 근본을 두지 않는다면 시의 뜻에 크게 어긋난다고 주부자(朱夫子)가 일찍이 말하였다. 지금 우리 성모가 몸소 뛰어난 덕을 갖추고, 큰 복을 누리셨으니, 어찌 우리 성고(聖考)가 몸을 바르게 하고 집안을 바로잡은 덕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노래와 시로 형상하는 사람이 없어, 사람들에게 슬픈 마음으로 그 덕스러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안에서 보고 기록한 것은 형상화해 보면, 하늘에 비할 만한 덕은 정희 왕후(貞熹王后)와 같고, 성취한 일이 많기는 정순 왕후(貞純王后)와 같으며, 현인(賢人)을 흠모한 말은 순원 왕후와 같다. 그리고 생각건대,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며 넓고 큰 훌륭한 규범과 아름다운 법도는 중천에 있는 해나 별 같으며, 훌륭한 임금이 만대에 태평할 세상을 열어 놓은 것은 대개 훌륭한 우리 성모가 사랑하고 보호한 덕이 여기에서 더욱 빛나는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지극히 고요하면서도 반듯하다."

하고, 전(傳)에 이르기를,

"자신의 행실은 일반 백성을 통하여 징험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큰 덕을 지닌 이는 반드시 큰 녹(祿)을 얻고 반드시 명예를 얻으며 반드시 장수를 얻는다.

하였는데, 왕후는 이것을 모두 소유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다. 아들 한 분을 두었는데 헌종 대왕(憲宗大王)이고, 그 왕비인 효현 왕후(孝顯王后)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이다. 계비(繼妃)인 숙경 예인 정목 홍성 장순 장소 단희 수현 명헌 왕대비(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莊昭端禧粹顯明憲王大妃) 전하(殿下) 홍씨(洪氏)는 영돈녕부사 익풍 부원군(益豐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이다. 지금 우리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 주상 전하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로 들어와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아들로 되었다. 비(妃)인 효자 원성 정화(孝慈元聖正化) 중궁 전하(中宮殿下) 민씨(閔氏)는 첨정(僉正)으로 영의정을 추증한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왕세자 저하를 낳았는데, 좌찬성(左贊成)으로 영의정을 추증한 민태호(閔台鎬)의 딸을 빈(嬪)으로 삼았다.

아! 왕후의 덕과 공은 역사의 기록에는 다 서술할 수 없는데, 신의 천박한 재간으로 어찌 감히 만의 하나라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가 엄한 여차(廬次)에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으로 행적에 대한 기록을 적어 내려 보냈으나, 서술이 미비한 점이 많고 궁중의 일을 실로 외부에서 다 알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이리하여 오늘날과 예전의 일을 굽어보고 우러르며 슬픔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줄거리를 개괄하여 간결하고 엄숙한 글체로 나타내고 경연(經筵)에서 한 윤음과 교령(敎令)으로서 선포하여 책에 쓰여 있는 것과 듣고 본 것을 널리 모아 편집하였다. 그런데 글을 만들 때 화려하게 하고 사실에 맞지 않으면 후대 사람들이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겸손하고 빛나던 자덕(慈德)에 어긋날 듯하여, 조심하며 차마 감히 지나치게 하지 않았으니, 천년 후에 가서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봉조하(奉朝賀) 김상현(金尙鉉)이 지었다.】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8월 30일 정묘 3번째기사 1890년 조선 개국(開國) 499년

대행 대왕대비의 행장

행장(行狀)은 다음과 같다.

왕후(王后)의 성(姓)은 조씨(趙氏)이고 본관(本貫)은 풍양(豐壤)이며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조맹(趙孟)이다. 여러 대를 지나 조신(趙愼)에 이르러 부사(府使)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우리 태종(太宗)이 잠저(潛邸)에서 글을 배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수총(守塚)의 직임을 주라고 명하였다. 그가 조안평(趙安平)을 낳았는데 본조(本朝)에서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벼슬하였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그가 조온지(趙溫之)를 낳았는데 그는 현령(縣令)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 한산군(漢山君)에 추증되었다. 그가 조익정(趙益貞)을 낳았는데 그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었고 한평군(漢平君)으로 봉해졌다.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공숙(恭肅)이다. 그가 진사(進士) 조팽(趙彭)을 낳았고, 또 그가 조종경(趙宗敬)을 낳았는데,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그가 조정기(趙廷機)를 낳았는데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으로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다. 그가 조수익(趙守翼)을 낳았는데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이조 참판과 풍녕군(豐寧君)에 추증되었다. 그가 조흡(趙潝)을 낳았는데 인조(仁祖)를 도와 정사 공신(靖社功臣)이 되었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풍안군(豐安君)으로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경목(景穆)이다. 그가 조중운(趙仲耘)을 낳았는데, 군수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가 조도보(趙道輔)를 낳았는데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그가 조상경(趙尙絅)을 낳았는데 이조 판서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경헌(景獻)이다. 영조(英祖)께서 늘 덕이 있는 재상이라고 칭찬하였다. 신축년(1781)에 세자(世子)를 정할 때 책문(策文)을 지었던 관계로 금상(今上)이 대대로 제사를 지내줄 것을 명하였으니 그가 바로 왕후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인 조엄(趙曮)은 이조 판서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조부(祖父) 조진관(趙鎭寬)은 이조 판서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아버지 조만영(趙萬永)은 일찍이 이조 판서를 지내다가 왕후가 정대비에 오르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으로 봉해졌고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순조묘(純祖廟)에 배향(配享)하였다. 어머니는 덕안 부부인(德安府夫人)에 추증된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목사(牧使)로서 좌찬성에 추증된 송시연(宋時淵)의 딸이고 문원공(文元公) 송명흠(宋明欽)의 손녀이며,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다. 충실하고 정숙하며, 시(詩)와 예(禮)에 뛰어나 내외에 빛났다.

왕후는 순조(純祖) 무진년(1808) 12월 6일 정유일(丁酉日)에 두포(荳浦) 쌍호정(雙湖亭)의 자기 집에서 출생하였다. 임신 중이었을 때 증조모 홍 부인(洪夫人)이 꿈에 이상한 범을 보았다. 출생하게 되자 과연 꿈이 맞아 상서로운 빛이 방을 둘러쌌는데 황홀한 기운이 새벽하늘과 같았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다. 왕후의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심은 타고난 성품이어서 부모가 식사를 하지 않으면 해가 기울어도 감히 먼저 식사를 하지 않았다. 형제간에는 쉬운 일은 사양하고 힘든 일은 자기가 했으며 노비들의 생활이 곤란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심지어 꽃 한 떨기, 새 한 마리 따위의 하찮은 물건에 이르기까지도 뿌리를 더 북돋아주고 둥지가 기울어지지 않게 했으니 물건에 대한 인자한 마음은 어렸을 때부터 그러하였다.

기묘년(1819)에 순조(純祖) 익종(翼宗)을 위해 배필을 선택했는데 왕후가 이때 12세로 선발이 되어 겨울 10월에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되고 혼례를 거행하였다.

왕후는 순조 대왕(純祖大王) 순원 성모(純元聖母)를 받들어 섬기며 곁에서 시중드는 일에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 번 문안하며 잠자리와 음식을 조심스레 돌보니 두 전하가 칭찬하여 효성스러운 며느리라고 하였다.

돌아가신 부왕(父王)인 익종이 정해년(1827)에 세자로 정사를 대리할 때에 그의 숨은 공적과 부드러운 덕화에는 왕후의 도움이 실로 컸다.

가을 7월에 헌종(憲宗)이 출생하니 가르치고 인도하는 데는 의리로써 하고 바야흐로 학문을 장려하고 덕을 기르게 하면서 늘 성인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헌종의 성덕(聖德)은 실로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지만 어릴 때 바르게 기른 것은 대개 왕후의 덕이었다.

경인년(1830) 5월에 익조(翼祖)가 훙서(薨逝)하자, 왕후는 상선(常膳)을 들지 않고 밤낮으로 슬피 우니 곁에서 차마 우러러볼 수 없었으나, 걱정스러운 한 가지 생각은 오직 두 전하를 받들어 위로하는 데 있었다.

갑오년(1834) 11월에 순조가 승하(昇遐)하니 규례에 벗어날 정도로 너무 슬퍼하였다. 헌종이 왕위를 잇자 익종을 추존(追尊)하여 왕후로 삼으니 왕대비(王大妃)에 올랐다.

기유년(1849) 6월에 헌종이 상빈(上賓)하니 왕후의 성덕(聖德)은 사리에 어긋날 정도로 슬픔이 더하여 하늘의 보답을 실로 헤아리기 어려웠다.

병진년(1856)에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병환이 오랫동안 낫지 않자 밤낮으로 시탕(侍湯)을 했는데, 마음을 태우고 근심에 싸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2년을 하루같이 하다가 정사년(1857)에 세상을 떠나니 갑오년(1834)에 순조가 돌아갔을 때처럼 슬퍼하였다. 이 해에 대왕대비(大王大妃)에 오르게 되었다.

계해년(1863) 12월에 철종(哲宗)이 빈천(賓天)하고 종묘 사직(宗廟社稷)이 의탁할 데가 없으니, 전교하기를,

"이 끝없이 슬픈 때를 당하여 나라의 운명은 한시가 급하다."

하고, 흥선군(興宣君)의 적처(嫡妻) 소생의 둘째 아들을 들이어 익종 대왕의 대통(大統)을 잇게 하였다. 금상(今上)을 잠저(潛邸)로부터 맞아들이니, 이 때 양부(兩府)의 대신들이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청하였다. 왕후는 어린 임금이 처음 정사(政事)를 하게 된 만큼 현재 어려운 일이 많다는 것을 걱정하여 마지못해 윤허하고, 여러 신하에게 전교하기를,

"오늘 이 거조를 어찌 차마 하겠는가? 순원 성모(純元聖母)를 추모하며 어전(御殿)의 시사(時事)에 임하니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다. 한 올 머리카락처럼 위험한 종사(宗社)의 형편은 옛날과 다름이 없는데 미망인(未亡人)인 내가 비록 성모(聖母)의 범절과 같이 하려고 한들 그 만분의 일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에도 주상(主上)의 천품(天品)이 영명(英明)한 것은 억만년 끝없는 행복이다. 오늘부터 안으로는 성상의 몸을 보호하고 밖으로는 성상의 학문을 도와 인도해야 할 것이니 오늘 제기되는 많은 일 중에서 어찌 이보다 앞서는 일이 있겠는가? 보호하는 것은 어머니의 책임이지만 돕고 인도하는 것은 오직 경들에게 기대하니, 마음을 다하고 성의를 다해 우리의 태평 성군(太平聖君)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상(上)에게 전교하기를,

"주상은 곧 인조(仁祖)의 혈통을 이은 후손이고, 영조(英祖)의 방계자(傍系子)이다. 조종(祖宗)의 왕통을 잇고 조종의 일을 행하는 만큼 마땅히 조종을 본받아야 할 것인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조종이 전수한 심법(心法)입니다. 예로부터 제왕(帝王)들 중에는 외부에서 나고 자라서 민간의 일을 잘 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상은 천품이 영명하니 지난날을 기억하여 옛것을 배우고 총명을 넓히며, 절약하고 근검하며, 학문에 힘써 위로는 조종이 중함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일반 백성의 기대에 맞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인군(人君)의 자리는 비록 높지만 본래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는 법은 없습니다. 더구나 대신으로 조종의 법을 받들어 인군을 돕고 인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예로 대하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조정에 임하여 민생을 구제하여 나라의 근본을 넉넉하게 하며,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기강을 세우며, 명예와 절개를 숭상하고 염치를 격려하라는 내용으로 중외(中外)에 거듭 하유(下諭)하였다.

예조(禮曹)의 신하가 태실(太室)의 축문(祝文)을 쓰는 격식을 의논하도록 청하니, 하교하기를,

"정책 전교(定策傳敎) 중에서 대통(大統)이라고 한 것은 큰 윤리를 말한 것이다. 만일 나라를 전한 계통을 논한다면 정조(正祖)·순조·익종·헌종 네 조정의 계통이 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에 이르렀고 주상이 있으니 어찌 두 계통이라고 의심을 가지겠는가? 그러므로 익종에 대해서는 ‘황고(皇考)’, 자신을 ‘효자(孝子)’라 칭하고, 헌종에 대해서는 ‘황형(皇兄)’, 자신을 ‘효사(孝嗣)’라 칭하며, 대행 대왕에 대해서는 ‘황숙고(皇叔考)’, 자신을 ‘효종자(孝從子)’라고 칭하라."

하였다. 갑자년(1864) 정월 해서(海西)의 각읍(各邑)에서는 서울의 도장(導掌)들이 궁결(宮結)이 남았다고 핑계를 대면서 백성에게서 포악하게 거두어 갔으며, 고양(高陽) 행주강(幸州江)에는 내수사(內需司)에서 명색 없는 세를 만들어 내어 덮어씌우는 바람에 배가 통하지 못하게 되니, 즉시 모두 혁파하라고 명하고 이어 묘당(廟堂)에 신칙하여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여 각 포구(浦口)의 잡세(雜稅) 및 재물을 가지고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여 백성들을 생업에 안착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좋은 말과 훌륭한 계책에 대해서는 표창하는 뜻을 보이려고 하지만 실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그저 말로만 표창하는 것은 신하를 대하는 도리가 아니니 모두 내가 힘써 표창하려는 뜻을 알고, ‘바른말이 들어오는 길을 연다.〔開言路〕’는 말이 빈말이 되지 말게 하라."

하였다.

2월에 전교하기를,

"강연(講筵)을 날마다 열어 임금에게 충성된 말을 올리는 데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하고, 산림(山林)에 묻혀 있는 명망이 높은 사람에 대해 별유(別諭)하여 돈소(敦召)하였다.

4월에 각전(各廛)이 화재를 당하자 특별히 전(錢) 5만 냥(兩)과 목(木) 50동(同)을 내려주어, 곧 집을 짓게 하고 그들이 재난을 당한 것을 불쌍히 여겨, 이어 시전(市廛)에 대하(貸下)한 공화(公貨)를 감해주었다.

선비를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것을 태평한 정사를 이룩하는 근본으로 삼아 특별히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충절공(忠節公) 길재(吉再),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의 사판(祠版)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5월에 전교하기를,

"간사한가 바른가, 착한가 사특한가 하는 데 대해서는 원래 백세(百世)를 두고 공론(公論)이 있기 마련이니, 법에 관계되는 것을 누가 감히 하루아침에 갑자기 의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억울한 사정을 풀지 못한 사람이 반드시 없지 않을 것이다. 종친의 가계에 속하는 사람이 가끔 불행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의리에 관계되거나 역적으로 판단된 사람 외에는 대신과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들이 모여 조사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심리(審理)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주상이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여름철에 화기(和氣)를 인도하고 명(命)을 비는 뜻이었다.

9월에 천둥이 치니, 전교하기를,

"계추(季秋)는 비록 겨울철은 아니지만 천둥 치는 것이 그칠 때인데, 철이 지나고 나서 천둥이 치니 조용히 생각건대 허물이 어찌 홀몸이 된 나에게 있지 않겠는가?"

하면서, 자신을 책망하여 감선(減膳)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잘못된 일에 대해 극언(極言)하도록 명하였다.

을축년(1865) 3월에 과거(科擧)에 대해 신칙하여 말하기를,

"이번의 이 감시(監試)는 성상이 왕위에 오른 후에 첫 번째 과거인 만큼 정확하고도 공정하게 선발하여 서울과 지방의 많은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왕후의 집안 본종(本宗)으로 발해(發解)한 사람을 모두 방말(榜末)에 부치라고 명한 일이 있었는데, 왕후가 스스로 마음이 편치 못해 여러 번 상에게 청하여 마침내 그만두게 하였다.

4월에 왕후가 이르기를,

"정전(正衙)을 중건(重建)하는 것은 익묘(翼廟) 헌묘(憲廟)께서 뜻을 두었으나 성취하지 못하셨는데, 마치 오늘을 기다린 것 같다."

하고, 이어 묘당(廟堂)에서 재력(財力)을 조치하고 획급하여 잘 헤아려서 영건(營建)하라고 명하였다. 도성 아래에서 좌경(坐更)하는 법을 폐지하였는데, 가난한 백성에게 이보다 더 심한 고역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관서(關西)의 첨향(添餉)을 낮은 이자로 불리다가 돈이 축이 난 장부(帳簿)를 조사하여 아뢰라고 하면서, 전교하기를,

"빗질하듯 긁어 들이는 것이야 방도가 없지 않지만, 죄 없는 백성에게까지 퍼져서 미치고 보니 그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고장을 떠나가는 일이 꼭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운 만큼 마땅히 돌보아주는 일을 앞세워야 할 것이다."

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모두 견감(蠲減)하여 없애라고 명하였다.

윤 5월에 전교하기를,

"오랫동안 부족분으로 쌓인 유재(遺在)를 오늘날 책납(責納)하는 것은 공인(貢人)에게는 억울하게 여길 단서가 될 뿐 아니라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응당 이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각종 공물의 유재는 모두 탕감(蕩減)하고 이제부터 나라의 재정이 넉넉하고 부족한 것은 다 중외(中外)의 유사(有司)인 신하들에게 맡긴다."

하였다. 각 공계(貢契)의 유재는 사실 오랫동안 쌓인 부족분으로, 미(米)가 39만 9,200석(石) 남짓, 전(錢)이 4만 900냥(兩) 남짓에 이르렀다. 그런데 진배(進排)할 물종(物種)에 대해 규례대로 값을 받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비록 연한을 정하여 나누어 계산하게 하더라도 은덕이 실로 전에 없는 일일 것인데, 왕후는 백성의 고통을 구해주기 위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었다.

수령으로 초사(初仕)하는 사람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너희들에게 벼슬을 준 것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잘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어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조심하여 직책을 수행하라."

하였다.

8월에 영남(嶺南) 호남(湖南)에서 물에 떠내려갔거나 잠긴 집이 수천 호(戶)에 이르니, 관리를 보내 위유(慰諭)하고 그 호구(戶口)에 대해 환곡(還穀)과 신역(身役)을 감해 주도록 하였다. 특별히 바닷가 어귀에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크게 죽은 사람들의 혼을 불러 제사를 지내주어서 나라에서 격려하는 뜻을 붙이라고 명하였다.

제주도(濟州道)에서 풍재(風災)가 있었는데, 또 내탕고(內帑庫)에 두었던 물건을 나누어 주어 먹이고 수령의 임기를 연장하여 그들을 보살펴 주라고 특별히 신칙하였다.

병인년(1866) 정월에 남종삼(南鍾三) 등이 다른 나라와 몰래 내통하여 사학(邪學)을 전하고 배우면서 백성의 윤리를 파괴하고 풍속과 교화를 더럽히니 마침내 곧 제거하여 다스렸다. 사학에 깊이 빠진 자는 죽이고 마음을 바꾸고 뉘우치는 자는 용서하여 천토(天討)가 행해지자 시원스럽게 제거되었다.

2월에 대신과 재상들을 불러 하교하기를,

"내가 홀몸으로 이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예로부터 왕비(王妃)가 조정에 나와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큰 불행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덕이 없고 식견이 좁은 사람이니 어찌 감히 옛날의 현명한 왕후들과 방불하겠는가마는 온 나라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열조(列朝)의 고사(古事)를 들어 눈물을 흘리며 요청하였고, 나 역시 종묘 사직을 위한 큰 계책을 생각하여 마지못해 억지로 허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주상(主上)의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다. 주상의 성품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고 슬기로운 지혜는 날로 발전하여 중요한 공무를 밝게 익히고, 학문이 독실하며 뭇 정사를 총찰하고 임금으로서의 일을 직접 맡아 처리하여 영원히 나라의 크나큰 운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장차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로 계속 주저앉아 있는 것은 나라의 체통을 보존하고 대경(大經)을 바로 세우는 방법이 전혀 아닐 것이다. 오늘부터 수렴청정을 철파하고,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하여 결단하라. 아!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대신을 예로 대우하고 세신(世臣)을 보전(保全)하며, 우리 선왕(先王)의 가법(家法)을 지키는 데에 주상은 힘쓰도록 하라. 다 같이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성상을 인도하고 도와 우리의 무궁한 국운을 튼튼히 하리라고 대신과 여러 신하에게 깊이 기대하는 바이다."

하였다.

경인년(1890) 봄 왕후가 몸이 편치 않아 임금과 신하들이 걱정하였으나 곧 다시 건강이 회복되었다가, 4월에 증상이 더 위독해지니 상이 관리를 보내 종묘 사직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두루 빌었다. 17일 병진일(丙辰日) 미시(未時)에 경복궁(景福宮) 흥복전(興福殿)에서 승하(昇遐)하시니, 향년(享年)은 83세이셨다.

우리 전하는 슬픈 정을 금할 수 없어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여 ‘신정(神貞)’이라는 시호(諡號)와 ‘경훈 철범(景勳哲範)’이라는 휘호(徽號), ‘효모(孝慕)’라는 전호(殿號)를 올렸다.

초하루가 무술일(戊戌日)인 8월 30일 정묘일(丁卯日)에 수릉(綏陵)과 같은 언덕에 부봉(祔奉)하였다. 이에 앞서 헌종 병오년(1846)과 철종(哲宗) 을묘년(1855)에 수릉을 옮겼는데 모두 왕후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좋은 자리로 정하고 부봉하였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왕후는 단정하고 곧은 성품을 타고났고 덕스럽게 행동했는데, 효성스럽고 엄숙하며 어질고 밝으며 근면하고 검박한 것이 더욱 큰 덕이었다.

왕후가 효의 왕후(孝懿王后)를 섬길 때에는 우선 즐겁게 해드리려고 생각하고, 원하는 물건을 갖추어 봉양했는데 털끝만치도 미진한 점이 없었다.

태조(太祖) 원종(元宗)의 어진(御眞)을 모사(摹寫)할 때에 그림 족자와 장막으로 쓸 것은 다 대내(大內)에서 내려 보내고, 진전(眞殿)의 제물은 음식 거드는 여자를 신칙하여 극히 깨끗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장막을 수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왕후는 반드시 성복(盛服)하고 직접 검열하고 늘그막에 와서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체 안팎의 전궁(殿宮)의 상례(喪禮)는 언제나 직접 자신이 검열하고, 크고 작은 일을 빠짐없이 반드시 진심으로 신중하게 처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이 없게 하였다.

임오년(1822) 경우궁(景祐宮)의 상사(喪事)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곡(哭)을 하고 제사 드리는 데 반드시 직접 참가하였다. 한 번은 종기를 앓아 주변 사람들이 상구(喪具) 곁에 있는 것을 경계하여 그만두기를 청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병진년(1856)에 인릉(仁陵)을 옮겼는데, 물품을 받들어 비치하는 것에 대해 순원 왕후(純元王后)는 늘 왕후에게 문의하여 왕후의 말대로 하였다.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기신(忌辰)에는 치재(致齋)를 예법대로 하고 그때의 일을 말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니 시중드는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 세 공주(公主)는 익종의 누이동생들인데 살아서는 애정이 지극했고, 죽은 뒤에는 더없이 슬퍼하며 자기 자손과 같이 여기고 차별 없이 사랑했다. 우애심을 깊이 하여 효성에 옮겼으니, 이것은 왕후의 효성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에 옷맵시를 정돈하고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지냈는데 고달픈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한 가지 생각하는 것은 하늘을 공경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었다. 세찬 바람이 불고 심한 우레가 울 때에는, 비록 보통 예사로운 말을 주고받는 경우에라도 반드시 상대방을 존경하고 감히 거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주상을 존대하고 예우하여 주상이 진현(進見)할 때마다 비록 뜻밖이더라도 반드시 일어나 앉았으며 80세 노인으로서 몸이 편안치 않은 중이라도 그렇게 했으니, 이것은 왕후의 공경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던 초기에 고맙게 길러주며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데는 멀고 가까움과 친하고 소원(疏遠)한 것으로 차이를 두지 않았다. 정사를 베푸는 데는 극진히 사랑하고 보호하였으며, 혹시 백성의 이해관계나 민간의 고통에 말이 미치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들었다. 비록 탄신(誕辰)에 진상(進上)하는 물종(物種) 및 응당 올리기로 되어 있는 여러 가지 물건도 그것이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면, 곧 그만두게 하였다.

막상 정사에서 손을 놓고 일을 거둔 후에는 음성이 병풍 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만일 사방에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와 기근에 대한 보고가 있으면 걱정하고 불안해하면서 마치 자신의 아픔과 같이 여겼다.

형옥(刑獄)을 신중히 처리하여 일찍이 기분에 따라서 죄를 가볍게 하거나 중하게 한 적이 없고 탐오죄를 범했으면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고심한 것은 실로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마침내 왕후의 대에는 대개 구애되는 일 때문에 벼슬길에 나서지 못한 집안이 없었다.

외척이 사치하면 언제나 더 경계하여 삼가도록 하였고, 문안할 때는 정색하고 임하여 옛일을 인용해서 하유하였다.

어진(御眞)을 모셔 놓은 전각에서 일찍이 은으로 만든 그릇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조사하여 법에 넘겨 처리하게 되었을 때, 혹시 죄 없는 사람이 잘못 걸려들기라도 할까 염려하여 상(上)에게 청하여 따지지 말도록 하고, 본래 모양대로 고쳐 만들어 갖추어 두었다. 이것이 왕후의 인자한 품성이다.

상이 연회에 모시니 왕후가 이르기를,

"오늘의 백성은 곧 당요(唐堯) 우순(虞舜)의 백성입니다. 인군(人君)은 마땅히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는 만큼 주상은 이 마음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 백성은 주상의 백성이니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여 부세(賦稅)를 줄이고, 요역(徭役)을 덜며 사치를 제거하여 널리 영향을 미친다면 백성들은 자연히 편안하게 될 것이고, 재정은 저절로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요역을 가벼이 하고 부세를 적게 할 생각이 언제나 마음속에 간절했으나 아직까지 시행하지 못한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도 또한 우리의 백성인데 그들이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가? 덕이 아래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수령을 적임자로 얻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은 보나마나 1년 내내 힘들게 일하지만 한 오라기의 실, 반 알의 낱알마저 세금과 탐관오리의 주머니에 모두 쏟아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저 백성들 중에는 굶주림과 추위에 몰려서 이렇게 기어 다니다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허물은 실로 내게 있으며 내가 주상에게 거듭 부탁하는 것은 다 백성과 나라에 절실한 문제인 만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당요의 궁전은 흙으로 만든 섬돌에 띠풀로 만든 이엉을 얹었고, 하우(夏禹)는 변변치 않은 음식에 낮은 궁실에서 지냈지만 만고에 훌륭한 임금이 되었습니다. 말세에 와서 사치가 점점 성하여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 진기한 음식과 화려한 옷으로 한정 있는 재정을 절도 없이 썼으니, 옛날 성인들이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칠 때면 언제나 좋은 옷에 맛난 음식도 달갑지가 않습니다."

하였다. 나라가 편안하던 끝에 나타난 임오년(1882)과 갑신년(1884)의 난국은 실로 전적(典籍)에서도 듣지 못한 일이었는데, 권도(權道)를 가지고 변란에 대처하여 조금도 용납하지 않은 것은 신령이 도운 것이고 나라 사람들이 그 덕에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왕후의 현명함이다.

연세가 더욱 많아졌어도 몸소 길쌈을 하고 어떤 때는 《소학(小學)》을 복습하며, 집안에서는 후비(后妃)로서의 규범에 더욱 주의를 두어 반복하였다. 또 역대의 사첩(史牒) 읽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정사의 잘잘못과 옳고 그른 것에 경계를 두어, 환관(宦官)이나 궁녀(宮女)들이 각각 자기 일을 갖고 바느질이나 집안 청소를 감히 성실히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은 왕후의 근면함이다.

거처하는 방을 화려하고 사치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단지 붓과 벼루뿐이었으며 일체 진귀한 물건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왕후의 예복은 제도에 따라 아름답게 하지만, 그밖에 날마다 입는 옷은 저백(苧帛)에 불과했으며, 때때로 빨아 꿰매 입기도 하였다. 절약을 제도로 삼아 비록 1두(斗)나 1척(尺), 저울눈만큼 사소한 것이라도 규정 밖으로 사사로이 주는 일은 없었으므로 궁중에서 감히 바라지 못할 것을 바라는 일이 없었다.

장수하신 성대한 사안은 열조(列朝) 이후로 처음 보는 경사인데, 존호(尊號)를 올리고 책문(冊文)을 받는 것은 더러 할 수 없이 받았지만 성대한 행사에 대해서는 언제나 백성들이 곤궁하다고 하면서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왕후의 검소함이다.

왕후께서 이렇게 여섯 가지 덕을 갖춘 것은 다 타고난 성품에서 나온 것이다. 천성에 따라 행하는 것이 도가 되는 것은 즉 오직 성실하게 할 따름인 것이니, 대개 성실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 하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철의 운행이며 만물이 생장하는 것이니, 우리 자전(慈殿)이 덮어주어 하늘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인가?

예로부터 후비(后妃)의 덕은 주(周) 나라 태임(太姙) 태사(太姒)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었고, 송(宋) 나라 선인 태후(宣仁太后)는 여자 중의 당요, 우순이라는 칭찬이 있었다. 왕후는 태임 태사 같은 훌륭한 행실과, 당요 우순 같은 정사를 행하여 그 공적은 사직(社稷)을 보존하였고, 그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었다. 그리하여 자손들에게 억만 년 무궁할 계책을 남기고 장락궁(長樂宮)에서 장수를 누렸으며, 훌륭한 자손들의 효성이 더욱 독실했으니 순한 것을 돕고 길한 것을 돕는 이치를 이것으로 징험할 수 있다. 심지어 신하들이 청하기도 전에 용단을 내려 수렴청정을 그만둔 공명정대한 처사는 또한 선인 태후도 능히 미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아! 훌륭하시다.

헌종 정유년(1837)과 무신년(1848)에 ‘효유(孝裕)’, ‘헌성(獻聖)’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철종 신해년(1851)·계축년(1853)·기미년(1859)·계해년(1863)에 ‘선경 정인 자혜 홍덕(宣敬正仁慈惠弘德)’이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였다. 성상(聖上)이 병인년(1866)·정묘년(1867)·무진년(1868)·기사년(1869)·계유년(1873)·을해년(1875)·정축년(1877)·무인년(1878)·기묘년(1879)·계미년(1883)·병술년(1886)·정해년(1887)·무자년(1888)·경인년(1896)에 ‘순화 문광 원성 숙렬 명수 협천 융목 수녕 희강 현정 휘안 흠윤 홍경 태운 창복 희상(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아들 한 분을 두었는데 헌종 대왕(憲宗大王)이고 그 왕비(王妃)인 효현 왕후(孝顯王后)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이다. 계비(繼妃)인 왕대비 전하(王大妃殿下) 홍씨(洪氏)는 영돈녕부사 익풍 부원군(益豐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이다. 지금의 우리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 주상 전하가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아들이 되었다. 비(妃)인 효자 원성 정화(孝慈元聖正化) 중궁 전하(中宮殿下) 민씨(閔氏)는 첨정(僉正)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세자 저하를 낳았다. 세자 저하는 좌찬성으로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민태호(閔台鎬)의 딸을 빈(嬪)으로 삼았다.

외람되이 신이 빈전(殯殿)을 돈장(敦匠)하는 종사(終事)를 주관하면서, 우리 전하가 말없이 걱정하고 불안하여 소리 내어 울면서 오늘과 옛날을 우러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또 덕행을 형상한 글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참으로 두렵기만 하다. 소견이 좁고 학식이 없어 만분의 일도 그려낼 수 없으나, 대내에서 내려 보낸 행록(行錄) 및 연석(筵席)에서 한 윤음(綸音)이나 교령(敎令)으로서 늘 듣고 본 것을 살펴서 모았으며, 스스로 간결하고 엄숙한 문체에 부쳐서 겸손하고 빛나는 덕을 밝혔다. 사관(史官)이 채택하는 데 갖추어 두어 반드시 명산(名山)의 석실(石室)에 보관하는 데 징험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신 조강하(趙康夏)가 지어 올렸다.】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9월 22일 기축 3번째기사 1890년 조선 개국(開國) 499년

세자가 왕비의 탄신일에 관리들을 거느리고 표리를 올리겠다고 아뢰다

왕세자가 올린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경사를 맞이하여 기쁨을 표시하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고, 부모의 장수를 칭송하고 축하를 드리는 것은 자식으로서 평범한 마음입니다.

올해는 곧 우리 효자 원성 정화(孝慈元聖正化) 중궁 전하(中宮殿下)의 보령(寶齡)이 만 40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인데, 어찌 그저 신이 자식으로서 부모를 위해 기뻐하고 축하할 뿐이겠습니까? 온 나라의 무지한 사람이나 동물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고무되어 인덕 있고 장수하는 나라의 덕화 속에서 모두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성상의 높은 덕업과 성대한 공렬은 지나간 옛날을 거슬러 살펴보아도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더욱 백성의 마음에 젖어 모두 감화되어 한 사람도 타고난 본성을 이루어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 경사를 장식하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위로는 하늘이 도운 뜻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맞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상고하건대, 순조조(純祖朝)에는 두 전하의 탄신에 모두 표리(表裏)를 올렸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 집안에서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규례입니다. 올해 우리 성상의 탄신에 이런 거조가 있었어야 하나 예법에 구애되어 경축하는 정성을 펴지 못했습니다. 우리 왕비 전하(王妃殿下)의 탄신이 또 며칠 남지 않았으니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고 장수를 비는 신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이 해 이 날을 경축하는 것이 어찌 상고할 만한 법이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본래 그만둘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왕비 전하는 당요(唐堯) 우순(虞舜) 같이 슬기롭고 태임(太姙) 태사(太姒)보다 덕이 높으며, 중전으로서의 덕화는 안으로 임금을 도운 데서 깊이 융성하였으며 숨은 공로는 이미 세상에 드러났으니 실로 거듭되는 경사이며 미더운 행복으로서 천년만년 장수할 징조가 이제 비로소 기반이 되는 것이니, 아, 훌륭한 일입니다.

신의 소원은 비록 성대하게 예식을 베풀어 크게 장식하려 하지만 그것이 어찌 변변치 않은 정성을 다하여 부모의 은덕에 보답하기에 충분하겠습니까?

이제 우러러 청하는 것은 애초에 굉장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신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입니다.

신은 변변치 않은 몸으로 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비록 두 전하께서 길러주고 가르쳐 주신 지극한 은혜와 사랑의 만 분의 하나도 보답하지 못하지만, 밤낮 생각하는 것은 오직 끝없이 장수하기를 빌면서 옛 법을 끌어다 그대로 따르려는 것뿐입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지극히 자애로우신 은덕으로 마땅히 굽어 살피시고 깊이 헤아리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이 그 날 공경히 백관을 거느리고 표리(表裏)를 두 전하께 올려 신의 구구한 심정을 풀 수 있도록 속히 윤허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이 말은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효성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내가 마음으로 가상히 여긴다. 또한 우리 집안에 이미 있어 온 의식이므로 요청을 애써 따르노라. 너는 그리 알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8월 22일 경인 1번째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중에 왕후(王后) 민씨(閔氏)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 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난해 12월에 종묘(宗廟)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오래된 악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 대신(國務大臣)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하여 변란을 격발시켰다.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하여 임오년(1882)의 지나간 일을 답습하였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가득차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할 수 없이 짐의 가문의 고사(故事)를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하였다. 【이때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으며 내부 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8월 23일 신묘 2번째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폐서인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사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은 왕태자(王太子)의 정성과 효성, 정리(情理)를 고려하여 폐서인(廢庶人) 민씨(閔氏)에게 빈(嬪)의 칭호를 특사(特賜)하노라."

하였다.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3월 2일 양력 5번째기사 1897년 대한 건양(建陽) 2년

대행 왕후의 시호를 명성으로 개망하다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諡號)를 ‘명성(明成)’으로 개망(改望)하였다. 【사방을 밝게 내리 비치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며 예법과 음악을 밝게 갖춘 것을 ‘성(成)’이라고 한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6일 양력 1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빈전에 시호를 올린 것에 대하여 조서를 반포하다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린 것에 대하여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를 내리기를,

"예로부터 어진 황후(皇后)가 하늘을 받들고 도(道)를 따라서 궁내(宮內)에서 바른 자리에 앉아 풍속과 교화의 기틀을 잡는 것을 시작으로 온 나라를 교화하여 아름다운 덕이 밝게 나타나 후세까지 가르침을 남기게 된다. 이에 반드시 행적과 공로를 표창하여 한번 시호를 올림으로써 백대에 증거를 남기는 것은 떳떳한 윤리이고 아름다운 법으로서 역대의 큰 전례(典禮)이다.

생각건대 황후 민씨(閔氏)는 영특하고 슬기로우며 착하고 온화하며 단정하고 엄숙한 자품으로 왕비에 간택되어 왕실의 빈(嬪)이 되었다. 아름다운 신정 왕후(神貞王后)를 계승하여 정성과 효도가 두터웠고 종묘(宗廟)를 공손히 받들어 엄숙하게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궁중에서는 새벽부터 정사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짐을 일깨웠고, 태자를 낳아 자손들이 번성하게 될 복이 깃들게 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 궁중 안을 다스림으로써 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때를 거듭 만나서 온갖 근심을 다 맛보았으며 사변에 대처하여서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합치되었고, 황후로서의 위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위태로운 상황을 편안한 데로 인도하여 태평의 기반을 다졌으니 어찌 거룩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2년이 되는 을미년(1895)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궁내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상복을 벗은 지금, 나의 슬픔과 동궁의 애통함은 끝이 없다.

생각건대 오늘날 큰 왕업을 중흥하여 자주 국권을 찾은 것은 실로 황후(皇后)가 도와준 성과이다.

하늘의 보살핌이 극진하고 조상들의 음덕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되고 황후도 따라서 높아졌으니, 새로운 천명을 이어받아 선대를 빛내고 후대에 은택을 끼치게 되었다. 훌륭한 공적이 드러났으니 진실로 시호를 올려 높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어 해당 관청에 신칙하여 자세히 법을 상고해서 공경히 천지, 종묘(宗廟), 태사(太社), 태직(太稷)에 고하도록 한다.

이 해 음력 10월 11일에 시호(諡號)를 명성 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예의와 정리에 부합되므로 큰 은택을 널리 베푸노라.

첫째, 재주를 가지고 숨어 있는 선비들로서 현재 쓸 만한 사람들과 무예와 지략이 출중하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들이 사는 곳은 해당 관찰사(觀察使)가 사실에 근거하여 추천하고 해부(該部)에서 다시 조사하여 발탁해서 쓰기에 편리하게 하라.

둘째, 사람의 목숨은 더없이 중하므로 역대로 모두 사형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는 세 번 심리(審理)하고 아뢰는 조목이 있었고, 처벌을 가볍게 하는 것으로 잘못 처리한 데 대한 벌이 중한 편으로 잘못 처리한 경우보다 가벼웠다. 대체로 형벌 맡은 관리들은 제 의견만을 고집하지 말고, 뇌물을 받거나 청탁을 따르지 말며, 사실을 알아내는 데만 힘쓰도록 하라.

셋째, 모반(謀叛), 강도, 살인, 간통, 사기, 절도 등 육범(六犯) 외에는 각각 1등(等)을 감(減)하라.

넷째. 각도(各道)의 백성들 중에서 외롭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로서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해당 지방 관리가 유의하여 돌보아 줌으로써 살 곳을 잃지 않도록 하라.

다섯째, 큰 산이나 큰 강의 신주를 두는 사당 중에서 무너진 것들은 해당 지방관이 비용을 계산해서 해부에 보고하여 제때에 수리함으로써 공경하는 도리를 밝힐 것이다.

아, 옥책문(玉冊文)에 훌륭한 존호(尊號)를 새겼으니 멀리 만국(萬國)에 알려질 것이며 역사 기록에 빛이 더해졌으니 영원히 먼 훗날에 가서도 할 말이 있게 되었다. 세상에 반포하여 다 듣고 알게 하라."

하였다. 【홍문관 태학사(弘文館太學士) 김영수(金永壽)가 지은 것이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10일 양력 1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심순택을 명성 황후의 인산 때의 식재 궁관에 임명하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 명성 황후(明成皇后) 인산(因山) 때의 식재 궁관(拭梓宮官)에 임용하였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14일 양력 3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태묘에 전배할 때 긴요하지 않은 시위를 그만둘 것을 명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인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서운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일 태묘(太廟)에 가서 전알(展謁)하겠다. 긴요하지 않은 시위(侍衛)는 그만두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발인(發引) 때와 하현궁(下玄宮) 때에 각 국의 공사(公使)와 영사(領事)들이 조문할 것이니,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윤정구(尹定求), 외부 협판(外部協辦) 유기환(兪箕煥), 학부 협판(學部協辦) 고영희(高永喜), 궁내부 고문관(宮內府顧問官) 르 장드르〔李善得 : Le Gendre, Charles William〕를 시켜 영접하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22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대행 황후의 지문의 어제 행록을 내리다

대행 황후(大行皇后) 지문(誌文)의 어제 행록(御製行錄)을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행 황후의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 향은 여흥(驪興)이다. 시조는 칭도(稱道)인데 고려(高麗) 때 상의 봉어(尙衣奉御)를 지냈다. 3대(三代)는 영모(令謨)인데 벼슬은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 상주국 대사(上柱國大師)이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었다. 4대는 종유(宗儒)인데 벼슬은 중대광 찬성사(重大匡贊成事)이고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문경 충순은 고려사(高麗史)에 전한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심언(審言)은 개성 부유수(開城副留守)이고, 충원(沖源)은 은일로 집의(執義)를 하였다. 3대(三代)인 제인(齊仁)에 이르러 호(號)는 입암(立巖)이고 좌찬성(左贊成)이었다. 또 4대인 광훈(光勳)에 이르러 관찰사(觀察使)로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다음 유중(維重)은 호를 둔촌(屯村)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낳았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을 봉하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로서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었으며 효종(孝宗)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냈다.

진후(鎭厚)의 호는 지재(趾齋)인데 좌참찬(左參贊)이고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사려가 깊고 계책이 많아 나라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 경종(景宗)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냈는데 이가 황후의 5대 조상이다.

고조(高祖) 익수(翼洙)는 은일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선비들에게 도를 강론하여 유림(儒林)의 종주(宗主)가 되었는데 학자(學者)는 숙야재(夙夜齋)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曾祖) 백분(百奮)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받았는데 강의하고 과감하여 바른 말을 하면서 흔들리지 않았다.

조부(祖父) 기현(耆顯)의 호는 이송(二松)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효우(孝友)와 청검(淸儉)으로 당대에 명망이 있었다.

아버지 치록(致祿)은 호가 서하(棲霞)인데 첨정(僉正) 벼슬을 지냈으며 여성부원군(麗城府院君) 영의정을 추증 받았고 시호는 순간(純簡)이었다. 학식(學識)이 많고 연원(淵源)이 있었다.

원배(元配)인 해령부부인(海寧府夫人) 오씨(吳氏)는 은일로서 찬선(贊善)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은 문원공(文元公) 희상(熙常)의 딸이었으며, 계배(繼配)인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이씨(李氏)는 이조 판서로 추증 받은 규년(圭年)의 딸인데 이조 판서로서 영의정을 추증 받은 충정공(忠貞公)으로서 호가 창곡(蒼谷) 현영(顯英)의 후손이다.

한창부부인이 신해년(1851) 9월 25일 정축일(丁丑日) 자시(子時)에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의 사제(私第)에서 황후를 낳았다. 이 날 밤에 붉은 빛이 비치면서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찼었다.

황후는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답고 총명하고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행동하는 것이 떳떳하였으며 과격하게 말하거나 웃는 일이 없었다. 처녀들이 꽃을 꺾어서 벌레를 희롱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벌레들이 새끼를 부리고 숨쉬게 하고 잘 기르는 것은 너희 부모가 너희를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보통 사람들보다 일찍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순간공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 심오한 뜻의 어려운 것도 분별해서 대답하였고 조목조목 통달하였다. 또 기억력이 비상하여 심상한 사물이라도 한 번만 듣거나 보면 빠짐없이 모두 알았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역대 정사에 대한 득실(得失)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환히 알았으며, 국가의 전고(典故)와 열성조(列聖朝)의 좋은 말과 아름다운 행실, 혹은 《사승(史乘)》이나 《보감(寶鑑)》에 실려 있지 않은 것까지도 황후는 능히 말하였는데 이것은 그 가정의 견문이 본래 있었기 때문이니 다른 집은 미칠 바가 못 되었다.

왕비(王妃)의 자리에 올라서 도운 것이 많은 것은 평상시에 공부한 힘이다. 9세 때 순간공의 초상을 당해 곡읍(哭泣)의 초상 범절은 마치 성인(成人)과 다름없었다. 염할 때에 집안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여 잠깐 피할 것을 권하자 정색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남의 지극한 인정을 빼앗으려 합니까?’라고 하였다. 양례(襄禮) 때에도 일을 끝마치고 곡을 실컷 한 다음에야 물러갔다. 부부인(府夫人)의 초상 때에도 장례와 관련한 모든 자재들을 집안에서 마련하였고 도가 넘도록 슬퍼하였으며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초상 때에도 마치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이 슬퍼하였다. 황후의 효성과 우애는 대체로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을축년(1865)에 안국동(安國洞) 사제에서 꿈을 꾸었는데 인현 성모가 옥규(玉圭) 하나를 주면서 하교하기를,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영원히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라.’고 하였다. 부부인의 꿈도 역시 같았다. 성모가 하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크게 기대한다.’라고 하였다.

가묘(家廟) 앞에 소나무가 한 그루 쓰러져 있었는데 이 해에 묵은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났고 옥매화가 다시 피었다. 황후의 집은 바로 인현 성모의 집이다. 대청이 있었는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하였다. 옛날 우리 영조(英祖)가 여기에 와서 우러러보고 절한 다음 친필로 현판을 써서 성모가 일찍이 있던 곳에다 걸어놓았다. 덕 있는 가문에 경사가 나고 상서로움을 보여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병인년(1866)에 선발되어 별관에 있으면서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등의 책을 공부하는데 밤이 깊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천성(天性)이었다.

3월 20일 기묘일(己卯日)에 왕비로 책봉되고 다음 날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왕후(王后)가 입궁하여 우리 신정 성모(神貞聖母)를 지성으로 섬겼고 크고 작은 일을 환히 알아서 반드시 먼저 문의한 다음 그 의견대로 하였다. 성모가 늘 말하기를, ‘곤전(坤殿)은 효성스럽다.’라고 하였다. 성모가 나이 많아지자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것 외에도 일상생활과 접대하는 절차를 반드시 적절하게 하였다.

경인년(1890) 환후(患候) 때에도 황후가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픈 부위를 손으로 안마하였다. 성모가 그의 수고를 생각하여 그만두고 돌아가 쉬라고 말하였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다. 침전(寢殿)의 탕제(湯劑)와 수라(水剌)를 황후가 권하고 올리는 것이 아니면 들지 않았다. 때문에 올리는 시간을 감히 어기지 않았다. 하루는 성모가 손을 잡고 하교하기를, ‘나는 늙고 또 병이 심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생각은 오직 백성들과 나라의 바깥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있고 안의 일에 대해서는 곤전에게 부탁했으니 내가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성모의 초상을 당하자 장례와 관련한 모든 일을 반드시 효성스럽게 하였고 궤전(饋奠)을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다. 또한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을 더없이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힘썼다. 일찍이 성모가 좋아하는 것을 얻었을 때에는 반드시 효모전(孝慕殿)에 올렸다. 부묘(祔廟) 때에 휘장도 황후 자신이 손수 만들었다.

늙은 궁인(宮人)들을 만날 때마다 문득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눈앞에 부딪히는 것은 모두가 슬프다.’라고 하였다. 황후는 성모를 종신토록 사모하였다. 묘궁(廟宮)과 능원(陵園), 여러 산천(山川)에 제기(祭器)가 모자라고 제수(祭需)가 넉넉하지 않으면 모두 내탕고(內帑庫)의 것을 내서 보충하였다. 기신제(忌辰祭)에도 반드시 성복(盛服)을 갖추고 밤을 지새웠으며 개인 제사에도 그렇게 하였다.

매해 음력 2월 달에는 북원(北苑)에서 친잠(親蠶)한 것을 제명(齊明)하여 바쳤다. 북원에 과일이 처음 익으면 햇것을 먼저 올려 제사에 쓰게 하였는데 이것은 황후가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친척들을 사랑하니 멀고 가까움이 없이 모두 다 기뻐하였다. 혹 은혜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하여 말하기를, ‘항상 억제하라. 그만해도 오히려 교만하고 사치할까봐 우려되는데 더구나 깃을 빌려주겠는가?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황후가 화목할 것을 숭상한 것이다.

계유년(1873)에 황후가 꿈을 꾸었는데 하늘이 자시에 열리더니 오색구름이 영롱하였다. 하늘에서 글을 내려 보내서 말하기를, ‘만년토록 태평하라.’고 하므로 황후는 절하고 받았다. 다음해 황태자(皇太子)가 태어났다. 황후는 황태자에게 온정과 사랑을 부지런히 베풀면서 옳은 방도로 가르치는 것이 엄하기가 스승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 하였기 때문에 책을 주었고 글을 터득할 나이가 되어서는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었다. 황후는 매번 강론한 문의(文義)를 물었으며 날마다 통상으로 행하는 일로써 비유를 설정하여 그 뜻을 명백히 깨닫게 하였다. 반드시 이해하고 분석하게 할 때에는 다시 그와 관련된 뜻을 더 찾아 토론하게 해서 되도록 자세히 알고 공고히 기억하기에 힘썼다. 오늘 훌륭한 학문을 성취하게 된 것은 황후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고 궁중을 인도하는 데 있어서 화목하고 임금을 도와주는 그 덕화는 애애하기가 봄날의 화기와 같았다. 자기 소생이 있게 되자 은혜가 갖추어져 더 지극하였다.

온 나라에 수재와 한재의 재변이 있을 때마다 얼굴에는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고 너그럽게 돌봐주기에 힘썼고, 무더운 여름과 혹한의 겨울에는 수도의 빈궁한 백성들을 돌봐주는 것을 해마다 떳떳한 일로 여겼다. 빈한하여 혼례(婚禮)와 상례(喪禮)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돌봐주었다.

병자년(1876)에 큰 흉년이 들자 조세를 감면해 주었고 경비가 궁색하면 돈과 곡식을 내주어 보충하도록 하였다. 호위 군사들이 고통을 겪고 밖에 나가 있는 군사들이 한지에서 지낼 때에는 특별히 호궤(犒饋)하여 수고로움을 위문하였는데, 사자(使者)가 연이으니 군사들이 모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여러 번 화재를 겪었기 때문에 늘 액례(掖隷)들에게 불을 조심하게 하였으며 진기한 물품이 없어져도 한 번도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진전(眞殿)과 남전(南殿) 은그릇을 잃어버렸는데도 곧 안에서 주조해 주도록 하고 사람들을 따져서 신문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무고한 사람이 걸려들까봐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데는 관대하면서도 엄하여 은혜와 위엄을 같이 보이니 궁중에서 감화되어 서로 경계하기를, ‘이 황후의 인자하고 두터운 혜택이 사람들에게 깊이 젖어 있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집안에서 대대로 의리를 강론하니 황후가 어려서부터 배운 점이 있어서 착하고 간사한 것을 판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내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치 못과 쇠를 쪼개는 듯이 하였고 슬기로운 지혜는 타고난 천성이어서 기미를 아는 것이 귀신같았다. 어려운 때를 만난 다음부터는 더욱 살뜰히 도왔으므로 짐의 기분이 언짢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침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었으며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짐을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하니 각 국에서 돌아온 사신들이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감복한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짐을 도와서 말한 것이 있는데 근년에 지내면서 보니 모두 황후가 일찍이 말한 것이 일마다 다 징험되어 딱딱 들어맞았다. 심원한 생각으로 미래에 대한 일을 잘 요량하는 황후의 통달한 지식은 고금에 따를 사람이 없으며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황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하였다. 환어(還御)하자 혹자가 아뢰기를 군란을 일으킨 군사에 대해서는 깡그리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 황후가 이르기를, ‘내가 덕이 없고 또한 운수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그 무리들이 한 짓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크게 포용하면 덕은 끝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황후의 덕이 그러한 것이다.

갑신년(1884) 적신(賊臣)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가 난리를 일으켜 변란이 일어났다 거짓말을 하여 전궁(殿宮)이 파천(播遷)하고 나라 형편이 위급하기가 호흡 사이에 있었다. 이보다 먼저 황후가 역적 박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는데 그 세력이 확대되자 여러 역적들이 각자 서로 서로 의심하며 도망쳤으므로 난리가 곧 평정되었다. 황후는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世子)를 보호하였는데 황급한 와중에도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황후가 평상시 은혜로 돌봐 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때를 당해서도 용감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갑오년(1894)에 외국 군사가 대궐에 들어오므로 짐이 황후와 태자에게 건청궁(乾淸宮)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도로 함화당(咸和堂)에 돌아와 말하기를, ‘한 궁궐 안에서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차라리 여기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안정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칼자루를 잃어서 이미 역적의 머리를 베지 못할 바에야 우선 포용해서 그 흉악한 칼날을 늦추어 놓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역적들이 이어 헌장(憲章)과 제도를 고치고 크고 작은 제사도 다 줄였다. 황후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줄이거나 늘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역적들은 이미 하늘과 귀신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가 가득하다.’고 하면서 진전(眞殿)에 제사지내는 물품을 한결같이 옛 규례대로 하였는데 황후가 액례를 신칙하여 여러 역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언급하여 거듭 신칙하면서 말하기를,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편안하고 위험에 처하는 것은 오직 인재를 잘 쓰는가 못쓰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전적으로 임명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그가 어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빨리 제거해야 한다. 대체로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하는 것 같으므로 이 때문에 요(堯) 순(舜)도 사람을 아는 것을 어려워하였으며 심지어 그 간사한 것을 의심하면서도 우선 임용(任用)하게 되면 이것은 화를 빚어내는 원인이다.’라고 하였다.

짐이 일찍이 황후의 말이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金弘集),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정병하(鄭秉夏) 네 역적을 제때에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외국 군사를 몰래 불러들이게 하였으며 훈련대를 남모르게 사주하여 을미년(1895) 만고천하(萬古天下)에 없었던 큰 변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아! 짐(朕)이 황후를 저버렸다. 황후는 짐에게 간절한 일념(一念)으로 받들었다. 비록 문안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대해서도 오직 빠짐이 있을까봐 근심하여 성실하게 하였으나 짐은 황후의 몸을 궁금(宮禁)에서 잘 보존하지 못하였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린 것이다. 지금 슬퍼하고 추모한들 후회와 여한을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황후는 경복궁(景福宮) 곤녕합(坤寧閤)에서 8월 20일 무자일(戊子日) 묘시(卯時)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45세이다. 이 날 새벽에 짐과 황후가 곤녕합 북쪽의 소헌(小軒)에 있을 때 흉악한 역적들이 대궐 안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니 황후가 개연히 짐에게 권하기를, ‘원컨대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중대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위급한 중에도 종묘 사직을 돌보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조금 후에 황후를 다시 볼 수 없었으니 오직 이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드디어 천고에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아! 슬프다.

이번 장례와 관련하여 의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물과 휘장 등속은 대내(大內)에서 마련하여 쓰고 탁지부(度支部)의 재물을 번거롭게 하지 말아서 황후가 그 전에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도록 한 지극한 뜻을 체득하게 하라.

김홍집 정병하 두 역적은 사형(死刑)을 하였으나 유길준 조희연 두 역적은 다 도망쳐서 아직까지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황태자가 복수하려는 심정이 참으로 보기 안타깝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명(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성(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명성(明成)’이라 하였고, 능호(陵號)는 ‘홍릉(洪陵)’이라고 하였으며, 전호(殿號)는 ‘경효(景孝)’라고 하였다.

무덤 자리는 양주(楊州) 천장산(天藏山) 아래 간방(艮方)의 언덕에 정하고 광무 원년(光武元年) 정유년(1897) 10월 28일 갑신일(甲申日) 진시(辰時)에 장례를 지냈다. 석물을 세우는 공사는 우선 오른쪽을 비워 놓는 제도를 쓰지 않았지만 짐의 의도가 있어서 한 것이다. 재궁(梓宮) 위의 글자는 황태자가 공경히 썼고 하현궁 명정(銘旌)은 짐이 직접 썼다. 이렇게 해서 효성스런 생각을 펴고 슬픔을 다소나마 풀 수 있을 것이다.

황후는 여러 차례 책봉하는 글을 받았다. 계유년에는 조신(朝臣)들이 존호(尊號)를 올려 ‘효자(孝慈)’라고 하였고 무자(1888), 경인(1890), 임진년(1892)에는 황태자가 존호(尊號)를 더 올려 ‘원성 정화 합천(元聖正化合天)’이라고 하였다. 정유년에는 대소 신하와 백성들이 나라가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한 것 때문에 명(明) 나라 이후에 천하의 예악(禮樂)이 다 우리나라에 있으니 마땅히 황제의 계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과 선비들, 백성들과 군사들, 저자 사람들이 일치한 말과 같은 목소리로 수십 통의 상소를 올리기에 짐이 사양을 여러 차례 하였으나 더 할 수가 없어서 바로 9월 계묘일(癸卯日)에 하늘땅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하였다. 이 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아 사직(社稷)을 태사 태직(太社太稷)으로 고쳐 쓰고 금보(金寶)와 금책문에 왕후(王后)를 황후로,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王太子妃)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쓰도록 명(命)하였다.

대체 황후가 훌륭한 공덕으로 짐의 곁에서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짐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나 황후는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황태자는 둘째 아들이다. 좌찬성으로서 영의정을 추증 받은 충문공 민태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 맏아들과 셋째 대군(大君), 넷째 대군, 그리고 딸 하나 공주(公主)는 모두 일찍 죽었다. 완화군 선(完和君瑄)은 장가도 못 들고 죽었고, 의화군 강(義和君堈)은 지금 군수(郡守) 김사준(金思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옹주(翁主) 둘이 있었으나 다 죽었다.

아! 황후가 대궐에 있으면서 정사를 도와준 것이 30년인데 실로 순리에 처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밟지 못한 관계로 도리어 간고하고 험난한 일만 하더니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중년 나이에 죽었다. 이것이 어찌 하늘 탓이겠는가? 보좌가 서로 이루어지고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 어질고 밝아서 만대(萬代)에 훈계로 삼을 만한 것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었건만 곤란한 일이 많고 지극히 비통한 와중이라 대체로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또 황태자가 지은 행록(行錄)이 있는데 거기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 백대(百代)를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황후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였더라면 숨은 공로와 부드러운 덕화가 나라를 빛나게 하여 책에 기록할 것이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짐이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고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아! 슬프다."

하였다.

황태자가 행록(行錄)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슬프고 슬프다. 사람으로서 누군들 부모가 없으며 부모로서 누군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마는 지극히 자애로운 은정은 어머니가 소자에게 베푼 것 만한 것이 없으며 지극히 비통한 슬픔은 소자가 어머니에 대한 것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소자가 이미 성장하였으나 여전히 어루만져 주는 것은 마치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하였다. 주리거나 배부르거나 춥거나 덥거나 할 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머니가 반드시 먼저 알았으며, 병이 있으면 음식을 들고 잠자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소자가 극심한 통증이 아니면 억지로 밥을 먹였으며 밤에는 풋잠을 자면서도 나의 근심어린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상생활을 몰래 살펴보면 밤에도 방 안의 불빛이 환희 비쳤고 말소리가 낭랑하였다.

소자가 천연두를 앓을 때에 어머니가 밤에 꼭꼭 밖에 나가 하늘에 빌었으므로 이내 다시 회복되었으며, 소자가 일찍이 옆구리의 담핵(痰核)으로 고통을 겪을 때 몹시 아프지는 않았지만 음식을 먹는 데에 방해되자 어머니는 오래되면 혹 종기가 터질 까 늘 걱정하면서 침을 바르라고 가르쳐 주어 딱딱했던 것이 가라앉아 마침내 평상시와 같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보지 못하였다. 소자가 겨우 젖니를 갈 때 어린 궁인(宮人)과 뜰에서 놀이를 하는데 어머니가 이르기를, ‘너는 이 놀이를 즐기는가?’라고 하고는 또 ‘이보다 즐거운 것이 있다.’라고 하면서 문득 글자를 써서 입으로 외우고 손으로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공부할 나이가 된 후부터 서연(書筵)에서 강론한 것을 어머니가 매번 그 문의(文義)를 찾아서 풀어 주었으며, 비근한 일을 들어 반복 비유하여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으며, 깨달아서 마음으로 기뻐할 때 비로소 다음에 배울 단계로 넘어 갔기 때문에 아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나라의 전고(典故)와 열성조(列聖朝)의 정교(政敎)와 모훈(謀訓)을 가르쳐 주기에 힘썼으므로 지금까지 귀에 쟁쟁하여 곁에서 듣는 것 같다.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잘 꾸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요령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체로 몸에 배고 골수에 젖어 몸소 체득하여 실행하기에 절실하였으며 더욱이 운수를 찾는데 힘을 써서 터득하였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효성스러워서 선조를 받드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외조부 순간공(純簡公)의 묘지를 옮길 때에 상지관(相地官)들이 아뢰기를, ‘아무 곳에 좋은 묘(墓) 자리가 있는데 남의 무덤을 옮겨야 합니다.’고 말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부모를 위하는 마음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같은데 어찌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남을 해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좋은 묘(墓) 자리를 보령(保寧)에 정했을 때 길이 너무 멀어서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데도 타산하지 않고 모두 내탕고(內帑庫)의 재력을 내서 마련하였으며 공물(公物)과 백성들의 노력은 하나도 참여시키지 않았다. 묘를 쓰는 지역 안의 백성들의 집을 철거하는 것과 영구가 지나가는 길의 논밭 곡식이 손상되는 것과 조각돌 하나, 흙 한 삽에 대해서도 반드시 다 해당한 값을 넉넉히 주었으니, 백성들의 생계를 돌보는 어머니의 훌륭한 생각은 어디에나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소자에게 가르치기를, ‘나라가 있는 것은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나라를 영위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혹시 위에서 백성을 돌보지 못한 관계로 곤궁해져서 살아갈 수 없다면 그 백성은 우리의 백성이 아니니 비록 백성이 없다고 말해도 옳을 것이다.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너에게 부탁하니, 너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오직 백성에 대한 문제로 마음을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어릴 때여서 그 뜻을 깨닫지 못했으나 그래도 가르친 말은 잊지 않았다. 지금 이 훈계를 더욱 깨닫게 되니 만대(萬代)의 귀감으로 여길 만하다.

어머니의 공로와 덕은 천지(天地)처럼 이름할 수 없으니 책봉하는 글로 찬양하고 성대한 의식을 빌려 기뻐하는 것은 우리 왕실의 떳떳한 법이다. 소자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곡히 청하였고 심지어 조정의 관리들을 인솔하고 삼가 요청하였으나 매번 백성들이 현재 곤궁하기 때문에 이런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었다. 겸손한 그 덕은 공경히 우러르게 되고 칭송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자식으로서 이 예식을 거행하지 못한 여한은 일생토록 끝이 없을 것이다. 늙은이를 봉양하는 것은 옛 규례이다. 소자가 일찍이 안에서 여러 차례 간곡하게 청하여 대체로 장수한 사람을 데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년 장수를 빌었다.

계사년(1893)에 영조(英祖)가 이미 실행한 전례를 따라 내외에 잔치를 차리고 노인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춤을 추며 만수를 축원하였다. 그 때 이 잔치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금도 모두 넓고 큰 은택을 입고 살아있는데 오직 우리 어머니만이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임오년(1882) 6월에 군졸들이 변란을 일으켜 창황한 가운데 행차가 길을 잃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지 한 달이 되었으나 의심과 위험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서 감히 이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서상조(徐相祖)가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누추한 곳에 숨어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충주(忠州) 장후원(長厚院)에 있는 충문공(忠文公) 민영위(閔泳緯)의 집에 가서 맞이하여 8월 1일에 환어(還御)하였다.

갑신년(1884) 역적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의 무리들이 변란이 있다고 거짓으로 말하니 거가(車駕)가 파천(播遷)하고 위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소자가 신정 왕후(神貞王后)와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동성(東城) 밖으로 피난 갔는데 어머니가 소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진실로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의심한다. 이 무리들을 죽이면 저절로 무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역적이 과연 평정되었다.

갑오년(1894)에 여러 흉적들이 조정을 뒤엎고 조종(祖宗)들이 이루어놓은 법을 다시 남겨두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제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줄였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때에 따라서 가감하는 것은 시대에 적절하게 하려는 것이며 일부러 바꾸어서 전과 다르게 하자는 것은 아닌데 지금 일체 변역하였으니 어찌 모두 실행하겠는가? 또한 제사는 천지(天地)와 조종을 섬기는 것이다. 흉악한 무리들의 악행이 이미 가득 찼다. 원통하고 원통하다.’라고 하였다.

을미년(1895) 8월 20일 사변은 만고천하(萬古天下)에 없었던 것이다. 아! 저 김홍집(金弘集)은 실로 우두머리 군흉(群凶)이며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은 한 패거리로서 결탁하여 흉악한 음모를 비밀리에 꾸몄는데 형적(形跡)이 상세히 폭로되었다. 어머니가 급히 피하려고 하니, 정병하가 길을 막으며 피하지 말 것을 주청하였다. 외국의 군대가 대궐에 난입하였는데 정병하가 이렇게 주청한 것은 우리의 난군(亂軍)을 중지시키려 한 것뿐이었다. 아! 네 흉적의 심보는 모두 한결같지만 그 중에서도 정병하는 더욱 극히 흉악하고 참혹한 자이다. 외국 군대가 와서 호위했다는 거짓 조서(詔書)를 22일에 자기가 써서 임금에게 강제로 반포하게 하였으니 조서는 다 네 역적이 만든 것이다. 네 역적의 죄는 그 잔당을 남김없이 씨를 말린다 한들 어찌 소자의 끝없는 통한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겠는가? 김홍집 정병하는 이미 처단하여 형률을 바로 적용하였지만 유길준 조희연은 법망에서 새어나갔다. 내가 거상 중에 있으면서 군사와 나라를 위하여 흉적을 처단하지 못했으니 감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다 같이 이에 종사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만약 혈기있는 사람이라면 그 의리도 같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황제 폐하의 높은 공훈과 훌륭한 덕은 하늘의 운수와 배합되어 능히 대업(大業)을 넓혔고 자주권(自主權)을 행사하였다. 모든 백관(白官)과 군민(軍民)들이 한 목소리로 황제 폐하에 오르기를 우러러 청하였는데 굳이 사양하다가 사람들의 여정을 막을 수 없어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빈전(殯殿)의 의장과 기물은 다 황색을 써서 법도대로 하였으나 황후 폐하 자신이 직접 볼 수가 없으니, 끝없는 나의 비통함은 더욱 망극함이 간절하다.

황제 폐하가 친히 지은 행록에서 지극하고 극진하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러나 어머니의 지극한 자애로움과 소자의 지극히 비통함을 더 자세히 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중복됨을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또한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역시 감히 그만둘 수 없었다. 생각건대, 우리 어머니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아! 슬프고 슬프다."

하였다.

묘지문의 행록(行錄)에,

"신 민영소(閔泳韶)는 삼가 대행 황후 지문 제술관(大行皇后誌文製述官)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황공하고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조지(詔旨)를 받드니, 이르기를, ‘행록을 짓고 이어 지문을 짓는 것은 명릉(明陵)은 신사년(1881), 홍릉(弘陵)은 정축년(1877)의 전례에 이미 있다. 지금 행록을 내려 보내니, 지문에는 동궁(東宮)이 몹시 슬퍼하는 것을 쓰겠지만, 또 다 기록하지 못한 것을 거두어 모아 더욱 상세하게 쓸 것이다. 백대(百代) 후에 가서도 반드시 그 뜻을 슬퍼하고 그 효성을 탄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일체를 지문의 뒤에다 새기도록 하고 역시 제술관을 시켜서 그 사실을 밑에다 첨부하여 자세히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히 받아 읽어보고 칭송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았으며 계속하여 눈물이 흘러 두 볼을 적셨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황제 폐하가 간곡히 돌보며 슬퍼하는 생각은 장례까지 극진하게 하려고 하는 데서 나타나며 심지어 광중에 들여 놓는 글에서까지 해와 별처럼 밝게 비쳐 주었습니다. 또 생각건대, 우리 황태자의 효성은 타고난 천성으로서 끝없는 비통한 생각을 품고 원통함을 생각하면서 격려하는 뜻이 글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 이미 짓고 또 지었으니 그 훌륭한 글이 간결하면서도 실속이 있어 마치 천지가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가까운 시일에 친밀하게 명령을 받은 것과 수십 년 동안 훌륭한 덕과 아름다운 모범이 장차 역사에 기록되고 내세에 명령이 될 것에 의하여 귀와 눈으로 직접 본 것만 해도 그 만 분의 일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때문에 신은 한 자(字) 한 구(句)가 친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감탄합니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큰 덕은 반드시 얻는다.〔大德必得者〕’라고 한 것은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성현(聖賢)이 정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황후의 인자하고 착한 공로와 덕은 마땅히 하늘이 도와주어 영원히 늙지 않도록 복을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 복록과 은택을 영원히 받게 해야 할 것인데 이어 위험한 구렁텅이에 빠져 간고한 시련과 위험한 고비를 겪더니 심지어 만고천하(萬古天下)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더없이 흉악한 참변까지 있었습니다. 대체로 이치라고 말하는 것은 이 마당에서 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치란 바로 하늘인데 하늘 역시 때에 따라서 비운과 암흑에 빠지는 것입니다. 일체 세상의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 재앙과 복을주재하지 못하고 괴이하고 간사한 것을 반드시 쳐 없애지 못하니 하늘도 과연 믿을 수 없습니다.

아! 슬픕니다. 예로부터 흉악한 역적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어찌 을미년(1895)의 여러 역적들과 같은 큰 역적이 있었겠습니까? 을미년의 변란은 갑신년에서 시작한 것으로서 구차하게 그럭저럭 살아가다보니 능히 같은 목소리로 일제히 성토하여 남김없이 처단하지 못한 까닭에 마침내 가장 흉악하고 포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서 서로 은밀히 결탁하여 선왕(先王)들의 법도를 변경시켜 하나의 큰 사변을 무르익게 하였습니다.

무릇 신하된 사람치고 누가 감히 그 죄에서 빠져 나가겠습니까? 두 역적은 이미 처단했지만 절대로 나라의 법을 통쾌하게 적용하고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괴수가 법의 그물에서 빠져 나가 아직도 천지간에 숨 쉬고 있으므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고 그의 피를 마시기를 원하는 것은 먼 데나 가까운 사람이 구별이 없고 낮은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오직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원한을 참고 견디면서 저 푸른 하늘을 함께 이고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치는 이미 없어졌고 의리도 또한 없어질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여 무시로 일을 하는 사람이 나라의 원수를 보복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나라의 규칙이 무너진 것이고 형벌에 관한 정사가 폐지된 것입니다. 설사 나라가 없다고 말해도 옳을 것입니다.

황태자가 일찍이 조정에서 신하들을 면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나라를 나라라고 하겠는가?’라고 하니 뜰에 가득 찼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몸 둘 바를 몰라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동안에 그 소문이 구역에 두루 퍼져서 거리의 아이들까지 무시로 일을 따르는 의리를 알게 되었으며 역시 《춘추》의 법을 능히 말하였습니다. 신은 반드시 여러 역적들을 앞으로 나라에서 처단하여 그 죄를 똑바로 밝히고 큰 의리를 천하에 펼 날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나라의 큰일이며 황태자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남긴 뜻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대행 황후는 평상시에 좋은 계책과 좋은 훈계로 충효(忠孝)를 숭상하여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마음과 골수에 젖어 있으니, 우리나라 만대의 왕업에 기본이 되어 있습니다. 황제는 용맹과 지략은 하늘이 내놓은 것으로서 큰 국난을 평정하고 비로소 자주권을 세웠으므로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왕위를 높이고 존호(尊號)를 올렸습니다. 황후는 실로 보배로운 존호를 받았으니 이것은 큰 덕을 지닌 분에게 하늘이 보답한 것입니다.

신이 이에 대해서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고 또 감히 외람되다고 해서 스스로 막고 나서면서 빠질 수도 없습니다. 신이 편벽되게 은혜를 입어 친필로 ‘한 마음으로 폐하(陛下)를 섬기라.’는 글을 써 주는 것을 받았습니다. 은총을 많이 입었으나 우러러 생각할 때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아! 슬픕니다."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민영소(閔泳韶)가 지어 올린 것이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22일 양력 6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일본국 특파공사 가토 마스오가 신임장을 봉정하다

일본국 특파공사(特派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신임장(信任狀)을 봉정(奉呈)하였다.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인봉(因封) 때문이었다. 그 전문(全文)에 이르기를,

"하늘의 도움을 받아 대대로 몰려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대일본국 대황제는 위엄과 덕이 높은 좋은 벗인 대한국(大韓國) 대황제 폐하에게 공손히 말씀드립니다. 짐(朕)은 폐하(陛下)가 대황후 폐하의 인산을 거행하는 때를 당해서 특별히 귀국에 주차(駐箚)하는 판리공사(辦理公使) 정5위(正五位) 훈5등(勳五等)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에게 특파공사로서 장의(葬儀)에 참가하라고 특별히 명하였습니다. 또한 짐이 가토 마스오를 특파공사로 임명한 것은 그를 통해서 짐의 더없이 슬픈 마음을 전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폐하는 이 뜻을 받아 주기 바라며 이런 때를 당해서 폐하께서도 강녕(康寧)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신무 천황(神武天皇)이 즉위한 기원 2557년 명치(明治) 30년 11월 8일 동경 궁성(東京宮城)에서 직접 서명하고 아울러 어명(御名)이 있는 국새(國璽)를 찍었으며 외무 대신(外務大臣) 남작(男爵) 사이토쿠 지로〔西德二郞〕가 검새(鈐璽)하였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2월 9일 양력 1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경효전에 나아가 고동가제를 행하다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였다. 이어 태묘(太廟)에 나아가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부알례(祔謁禮)를 행하였으며, 친제(親祭)를 같이 행하고 돌아왔다.

경효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함께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 1월 3일 양력 4번째기사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최웅이 현재 먼저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상소를 올리다

5품 최웅(崔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요즘 황천이 가만히 도와주고 조종이 보살펴서 우리 황제 폐하(皇帝陛下)가 천명(天命)을 받들고 존호(尊號)를 받게 된 것은 실로 우리나라 4,000년 역사에 처음 있는 훌륭한 일이며, 억만 년 무궁할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은 비록 병들고 파리한 사람일지라도 춤추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잠시나마 죽지 않고 살아서 덕화가 성대해지는 것을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는 생각을 가다듬고 선정(善政)을 베풀 것을 도모하시어 공로는 열조(烈祖)를 빛내고 업적이 후세에 미치도록 하심으로써 나라를 세우는 기초를 쌓도록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의 형편에서 나라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가운데서 시급하여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역적을 쳐서 원수를 갚는 것이고, 둘째로는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는 것이며, 셋째로는 군사 지휘 체계를 정하는 것이며, 넷째로는 재물을 절약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입니다.

아! 원통합니다. 일찍이 갑신년(1884) 변고로 명성 황후(明成皇后)와 각 전(殿)과 궁(宮)이 화란을 피해갈 때, 신은 가미메고 가면서 직접 그 황급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조상의 신령의 도움을 받아 옥체를 겨우 보존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되지 못하여 을미년(1895)의 변란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만고에 없는 큰 변고입니다. 신이 시종일관 왕후를 보호하지 못하여 이런 참화를 당하게 하였으니, 신과 같이 불충한 자는 응당 중한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폐하의 더없이 가까운 정의와 황태자(皇太子)의 지극한 효성으로써, 어찌 하루인들 역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덧없이 3년이 지나가고 인봉(因封)을 방금 지냈는데, 역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거사는 아직 이렇게 지체되고 있어 신은 은근히 분개하게 됩니다.

현재 역적들은 원수의 나라에 도망쳐 가서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 잔당들은 남모르게 결탁하고 있으니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을미년 8월의 변고보다도 더 심한 것이 있을까봐 염려됩니다.

폐하가 마땅히 안으로 반성하고 스스로 힘쓰시고 백성들을 교육하고 임금과 신하가 모두 원수를 갚자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둔다면, 이와 같은 나라와 이와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역적을 치는 데 복종하지 않겠으며 어떤 원수인들 처벌하지 못하겠습니까? 도망간 역적을 교환해 오고 잔당을 모조리 다스리며 원수의 나라에 죄를 묻는 것을 차례로 집행하게 될 것입니다. 역적을 치고 복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훌륭한 임금과 명철한 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어진 인재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버리지 않았으며 사람이 한미하다고 해서 그 원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옛날 은(殷) 나라 고종(高宗) 부열(傅說)을 공사장에서 맞이하여 재상으로 등용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업적을 이룩하였고, 진(秦) 나라 목공(穆公) 백리해(百里奚)를 소 먹이는 곳에서 데려다 재상으로 세움으로써 마침내 성대한 패업을 이룩하였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임금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어찌 귀하고 천한 것에 구애받겠습니까? 이후로,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밑으로는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재목을 얻어 임금의 덕을 백성들에게 펴게 하였고 백성들은 이 때문에 모두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에는 나라가 인재를 쓰는 데서 전적으로 지체와 문벌을 제일의 공의(共議)로 삼습니까? 내적으로는 의정부(議政府)에서부터 외적으로는 수령에 이르기까지 재주와 덕망이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고 단지 문벌이 높고 낮은 것만 비교합니다. 그들의 추천이 인척 관계나 족속 간이 아니면, 또한 겉치장만 좋게 꾸미고 말솜씨가 좋은 사람을 등용하는 데 불과하니, 이것이 과연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입니까?

또 지금 온 나라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마음이 황황하고 비적(匪賊) 무리의 징조가 간간이 있는데, 만약 청백하고 노련하며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사람을 수령으로 하지 않는다면, 흉년을 만난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없고 태평한 때에는 백성과 나라의 안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단지 벼슬길의 세력과 잇속만 탐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까봐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있고 소란스러울 때에는 몸을 빼서 자신을 보존하며 군부(君父)로 하여금 위험에 빠지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 속에 허덕이게 합니다.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 이래로 역적의 우두머리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은 제 마음대로 자기 심복을 차임(差任)하여, 아직도 중앙과 지방의 신하 반열에 버젓이 있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부끄러워도 하지 않고 속으로 흉한 생각을 감추고 있습니다. 임금에게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라건대 폐하는 잘 살피고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위로는 의정부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집사(執事)에 이르기까지 지체가 천하고 사람이 한미하다고 하여 버리지 말고, 재주와 덕망을 겸비하고 능력과 충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택하여 곁에 두소서. 이들로 하여금 연이어 천거하게 하여 등용한다면, 상하 내외에서 반드시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인재를 선택하여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군사란 나라의 울타리이고 임금의 손톱과 어금니입니다. 집에 울타리가 없으면 방어할 계책이 없으며, 사람에게 손톱과 어금니가 없으면 위엄을 보일 권력이 없습니다. 옛날에 군사를 잘 양성하는 사람은 비록 100만의 많은 군사가 있어도 몸으로 팔을 움직이고 팔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같이하여, 전쟁에서 적과 상대하여 죽을 고비에 나아가는 것도 한결같이 팔과 손톱이 마음에 복종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지휘 체계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대오를 편성하여 대관(隊官)을 정하고, 대장(大將)에게 총괄하여 거느리게 하되 차례를 나누어 영솔하게 하는 것은 쓰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비록 대오를 편성한 명칭은 있지만 병정(兵丁)들이 제 마음대로 대오를 옮기고 있는 것도 심상한 일로 보고 있으며, 그 우두머리로 된 사람들 역시 지휘 체계와 기율(紀律)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신년에 폐하가 도성(都城)을 떠나 변란을 피하여 갈 때 한 명의 호위 군사도 없었으며, 갑오년에 일본 군사들이 대궐을 침범하였을 때에도 한 명의 방어하는 군사가 없었으며, 을미년에 대궐에 침범한 역적의 군사들의 화가 황후(皇后)에게 미쳤으나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용단을 내리고 지휘 체계를 엄하게 정하여 장신(將臣) 이하 대장으로부터 편성한 대오의 군사에 이르기까지 일체 정한 제도를 따르게 하소서. 만일 군사 규율을 어길 것 같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마시고 위력으로 제압하고 은혜로 양성하소서. 이렇게 하여 적을 공격하면 승리하고, 이렇게 하여 업신여김을 막는다면 견고해질 것입니다. 군사 제도를 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재물을 절약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은 임금의 큰 정사입니다. 옛날의 제왕을 하나하나 들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를 놓고 보더라도 나라가 세워진 이래 백성에게서 거두는 세는 단지 해마다 바치는 전세(田稅)에 불과하였으나 나라의 재물은 항상 풍족하였습니다. 근래에 와서 몇 년 사이에 역토(驛土)와 궁장토(宮庄土)를 장부에 올린 것과 무명 잡세(無名雜稅)가 백성에게 폐해를 주는 것은 전보다 몇 갑절 되는데 재물이 늘 부족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절약해서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백성의 고통을 잘 보살펴 모든 각 형태의 잡세에서 백성에게 해를 주는 것이 심한 것은 일체 혁파함으로써 농민과 상인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없도록 한다면, 근본은 튼튼해질 것이고 나라도 편안해질 것입니다. 부세(賦稅)를 거두는 데서 적게 거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광산을 개발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산수(山水)의 빈 땅을 개발하는 것이므로 백성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 없으며, 나라의 재정에 도움주는 것은 큽니다. 그러나 광물을 캐내는 자에게 맡겨놓으면 전적으로 자기 잇속만 차리고 공납(公納)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름은 비록 광물을 캔다고 하지만 나라 비용에는 조금도 보탬을 주지 못하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전 관찰사(觀察使) 이용익(李容翊)이 광산을 감독할 때는 조금이나마 나라의 비용에 도움을 주었으니,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것은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신은 하찮은 사람으로서 변변치 못한 말을 감히 진술하여 함부로 주제넘은 행동을 하였으니 참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여 미천한 사람의 생각이라고 하여 버리지 말고 한 번 살펴주기 바랍니다. 삼가 폐하는 재택(裁擇)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중에서 채택할 만한 것이 없지 않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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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38권, 고종 35년 12월 13일 양력 2번째기사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최종록이 현재의 급선무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학교 교원(敎員) 최종록(崔鍾盝)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폐하는 중흥의 운수에 응하여 지존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추숭(追崇)하는 예식을 속히 거행하시어 태조(太祖)와 열성조(列聖朝)의 휘호(徽號)를 높이 받들도록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큰 예식을 거행한다면 정리(情理)로 보나 예의(禮儀)로 보나 합당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3주기도 이미 지나갔는데, 경효전(景孝殿)의 조상식(朝上食)과 석상식(夕上食)을 지금도 받들어 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동궁 전하의 애통하고도 절박한 심정으로 차마 갑자기 그만두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들이 제정한 예법은 감히 넘을 수 없는 만큼 억제해야 하니, 지금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은 어진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부류를 따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재능과 덕망의 유무만 따지고 그 문벌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부당하게 여겼습니다. 어진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고 유능한 사람이 직임에 포진해 있다면 나라가 어찌 부강해지지 않겠습니까? 문벌에 구애하지 말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와 형벌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 반드시 나라 사람들의 가부를 살펴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 시행한다면 좋아하는 바도 같고 논하는 바도 공정할 것이니, 이 또한 시의에 맞게 조처하는 데 일조하게 될 것입니다.

지방 군수는 한결같이 장정(章程)에 의거하여, 각부의 판임관(判任官)으로서 36개월간 계속 근무한 사람에 한하여 결원이 생기는 대로 충원한다면, 장정에 익숙하고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쓸데없이 번잡하게 될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한 먼 지방의 기이하고 교묘한 물건을 가져오지 말 것과 궁궐을 엄숙하고 깨끗이 하는 등의 일을 말미에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말한 내용이 받아들일 만한 점이 없지는 않다."

하였다.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4월 10일 양력 2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제사지낼 때의 관리 명단을 써서 들여올 것을 명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동궁(東宮)이 섭의(攝儀)로 제사를 지내니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신령이 기뻐하는 것을 보는 듯하다. 상하가 즐거워하는 경사는 실로 처음 있는 일이다. 아헌관(亞獻官) 이하를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황태자가 섭의로 제사지내는 예(禮)가 이루어졌으니 마땅히 뜻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황태자시강원(皇太子侍講院)과 익위사(翊衛司) 이하를 별단으로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또 친히 그 섭의로 관헌하는 의식을 보았으니 어찌 기쁜 마음을 이루 다 금할 수 있겠는가?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이하를 별단으로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8월 22일 양력 2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의정과 예조 당상을 인견하다

의정(議政)과 예조 당상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유승(李裕承), 소경(少卿) 이중하(李重夏)이다.】 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불러서 만나보는 것은 전례(典禮)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경모궁(景慕宮)을 추숭하는 예를 장차 거행하게 되므로 비통한 생각과 경축하려는 마음은 상하가 모두 같은 심정일 것이다. 아! 우리 정조 대왕(正祖大王)이 25년 동안에 이룩한 훌륭한 정사에 대한 아름다운 소문은 오늘날까지 잊지 못하고 있으니, 금과 옥에 새겨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찬양해야 될 것이다. 거룩한 뜻이 왕위에 있던 날에 굳게 결정됨으로써 그 효성스러운 생각을 극진히 하였으니, 누군들 여기에 깊은 뜻이 있는 것을 우러러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미묘한 의사는 자연히 교서(敎書)의 내용 가운데에서 발현되었었다. 오늘 경사스러운 날을 당하여 존호(尊號)를 추후로 올리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정례(情禮)상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삼가 폐하의 하교를 듣고 보니, 선대 임금의 뜻과 일을 계승하는 폐하의 효성과 덕성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므로 신들은 흠모하고 칭송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정조 대왕께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였으며 학문이 높고 밝으며 문화와 교화가 훌륭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지식이 해박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안정시킨 덕망이 25년 동안에 차고 넘쳤습니다. 악장에 올리고 그림으로 그려도 그 덕망의 만 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지만 마땅히 존호를 올리고 또 올려 계속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한 슬픔이 마음속에 있어서 왕위에 오른 것도 기뻐하지 않았고 존호를 올리자는 청도 굳게 거절하고 윤허하지 않았으니, 깊은 뜻이 있음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금 비궁(閟宮)을 추숭하는 거조를 당하여 정조의 존호를 추가하여 올리는 예도 거행한다면 현양하는 황제의 효성에 더욱 빛이 나고 신하와 백성들이 잊지 못해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밝은 명령을 내려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이유승이 아뢰기를,

"우리 정조 대왕의 훌륭한 덕은 밝고 빛나서 천고에 뛰어납니다. 그런데 존호를 받지 않았던 것은 비단 겸손한 덕에서 그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비궁을 추숭하는 전례를 거행하고 이어서 정조에게 존호를 추가로 올리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실로 하늘의 이치와 사람들의 마음에 맞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더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이중하가 아뢰기를,

"지금 경모궁을 추숭하는 날을 당하여 정조 대왕의 존호를 추가로 올리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선대 임금의 뜻과 일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폐하의 효성에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일은 바로 진전(眞殿)에 다례(茶禮)를 지내는 날이다. 이번에 큰 전례를 의논하여 정한 것이 마침 하루를 사이에 둔 것도 역시 기이한 일이다. 내일 진전에 사유를 고하려고 하는데 과연 어떠하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번의 큰 전례에 대하여 조종(祖宗)의 신령들이 오르내리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내일은 마침 진전에 다례를 지내는데 우선 고유제(告由祭)를 거행하는 것이 정례에 진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망묘루(望廟樓)를 처음으로 세운 것은 정조 때인데 누각의 이름에 대한 뜻을 혹시 상고할 수 있겠는가? 부디 옛 사적을 소급해 보도록 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삼가 상고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망묘루는 마땅히 선희궁(宣禧宮)에 옮겨 세워야 하며 망묘루의 이름도 이제 고쳐야 할 것이다. 성일헌(誠一軒)·냉천정(冷泉亭)·장보각(藏譜閣)이라는 이름은 모두 영조 정조 때에 지은 것이다. 경들은 옛 사적을 상고하여 다시 의논하여 정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경모궁의 어진(御眞)을 이미 이봉(移奉)하였으니 망묘루의 이름을 예전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다시 의논하여 이름을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殿)으로 부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영희전(永禧殿)의 전례대로 전으로 부르는 것이 또한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중하에게 이르기를,

"삼척(三陟)의 묘소(墓所) 공사에 경은 언제 길을 떠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생신날에 문안한 후 즉시 길을 떠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궁에 관한 일에 대하여 재상의 상소문 내용이 여러 사람의 의견과 같은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당시에 감히 의논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1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은 어찌 그때에는 차마 말할 수 없었고 감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추숭을 거행하는 것은 비단 신하들과 백성들의 공통된 의리에 위안이 될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나라의 더없이 큰 경사인 만큼 하늘에 계신 정조의 신령이 반드시 오르내리면서 기뻐하실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정조의 뛰어난 효성으로 당시에 미처 하지 못한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만, 오늘날 비궁을 추숭하는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비단 신하와 백성들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정조의 신령도 어찌 위에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등명간편(金縢銘肝篇)에서 영조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나 미처 의논을 의논을 제기하지 못한 것은 그때 변괴가 많았기 때문이니, 바로 문녀(文女) 정처(鄭妻) 때문이었다."

하니, 이유승이 아뢰기를,

"이때 문녀 정처는 안에서 참소하여 이간질을 하고 상로(尙魯) 계희(啓禧)는 밖에서 선동하여 없는 것을 있다고 거짓을 사실이라고 하면서 두 궁의 이간에 관하여 못하는 짓이 없던 끝에 마침내 아무 해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차천추(車千秋)·안금장(安金莊)과 같은 사람이 그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 한스럽다. 안금장은 배를 갈랐으나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어찌 열렬한 충성에 격동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안금장 당(唐) 나라 중종(中宗) 때의 일인데 그 충성이 매우 열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혜경궁(惠慶宮) 《한중만록(閒中漫錄)》은 언문(諺文)으로 사실을 직접 기록한 것이어서 실로 오늘날의 확증이 된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삼가 《한중만록》을 보니 정조 혜경궁에게 묻고 고한 것을 확증할 수 있는 문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중하가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대내(大內)에 《읍혈록(泣血錄)》이라는 전해오는 책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요즈음 《한중만록》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읍혈록》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간에서 전하는 바에 혜경궁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썼기 때문에 《읍혈록》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정조가 일찍이 이 글을 보고서 피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혜경궁이 이 글의 이름을 《읍혈록》이라고 하였다는 것이 옳다. 이때는 이것이 궁중의 평상시의 이야기였지만 외간에 전해진 바는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 책을 혜경궁 효의 왕후(孝懿王后)에게 전했고 효의 왕후 순원 왕후(純元王后)에게 전했으며, 순원 왕후는 신정 왕후(神貞王后)에게 전했는데 신정 왕후가 살아계셨을 때 나도 이 말씀을 직접 들었다. 신정 왕후는 젊었을 때 아무 해의 늙은 궁인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때의 일을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연조(年條)로 계산해볼 때 아무 해와의 거리는 참으로 멀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책은 경인년(1830) 화재에 없어졌는데 그 후 영성위(永城尉)의 집에서 나와 다시 대궐로 들어왔던 것이다."

하였다. 이중하가 아뢰기를,

"오늘 성상의 말슴을 듣고서 《읍혈록》이라는 이름은 사실 정조가 피눈물을 흘린 데에서 연유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자세히 알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조가 직접 쓴 금등(金縢)을 모든 신하들에게 한번 보이려고 하는데, 내일 공무를 볼 때 의정부(議政府)에 내보내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영조가 직접 쓴 금등의 글을 만약 보여주신다면 모든 신하들은 감격과 축하의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동나무여, 오동나무여! 피에 젖은 적삼이여, 피에 젖은 적삼이여!’라고 한 것은 우리 비궁의 효성에서 이루어진 말인데 결국 화변(禍變)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는 실로 영원한 한이 된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때의 사변은 사실 흉악한 무리들이 빚어낸 것으로서 곧 큰 운수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니, 이유승이 아뢰기를,

"그때 흉악한 무리들이 큰 변고를 빚어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선조에 대한 사실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유승이 아뢰기를,

"계유년(1753)에 문녀가 아이를 배는 바람에 장차 헤아릴 수 없는 변이 있게 되어 정월달에 신의 고조부가 탄핵을 받게 되었는데, 지난날에는 사정이 있을 때마다 매번 장단(長湍)에 돌아가 있었지만 이때는 강가의 정자를 빌려 석 달 동안을 서성거리다가 3월에 이르러 문녀가 딸을 낳은 다음에야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조 병신년(1776)에 문성국(文聖國)의 죄를 성토한 전교에 이르기를, ‘문녀가 아이를 배었을 때를 당하여 양인집의 아들을 몰래 구해서 나라의 근본을 바꾸려고 도모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일입니다. 그러므로 정조가 직접 지은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석 달 동안 교외에 살면서 누구를 위하여 지체하였던가? 중간에 한 번 도착한 것은 귀신만이 알리라고 하기에 제삿날을 당하면 왕궁에서는 소찬(素饌)을 들곤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혜경궁이 신의 고조부의 기일을 당하면 반드시 소찬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때 거의 큰 일이 생길 뻔하였다. 심지어는 옹주(翁主)가 태어난 것을 가지고 크게 경축하여 상소를 올린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니, 이유승이 아뢰기를,

"그후 무인년(1818)에 명정전(明政殿) 낙선당(樂善堂)에 입시(入侍)하였을 때에도 두 궁은 한 몸과 같다는 뜻에 대하여 훤히 말했기 때문에 정조가 직접 지은 제문에 이르기를, ‘계유년과 무인년에 한 손으로 양기(陽氣)를 떠받들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곧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때의 재상들은 사전에 잘 생각하였기에 나라 일을 위해서 반드시 이와 같이 깊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후 만약 경의 고조부처럼 기미에 앞서 예방했더라면 혹시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경의 고조부의 기일이 어느 날인가?"

하니, 이유승이 아뢰기를,

"기묘년(1879) 정월 12일인데, 아무 해보다 4년 전에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을미년(1895) 봄철에 이 일을 하려고 하다가 미처 하지 못하였는데, 매번 명성 황후(明成皇后)와 서로 이 문제를 의논하였었다. 오늘날에 이 성대한 예식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지만 저승과 이승이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내일 경효전(景孝殿)에 글을 지어 사유를 알리려고 한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하늘에서 오르내리는 명성 왕후의 신령도 기뻐할 것이니, 글을 지어 사유를 고하는 것은 정례에 진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상로(金尙魯)의 행위는 몹시 흉악하고 비통하여, 영조는 세손(世孫)에게 가르치기를,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까지 하였다. 당시에 안에는 문녀 정처가 있었고 밖에는 김상로가 있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김상로는 이미 벼슬을 추탈(追奪)하였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정조 때 이미 벼슬을 추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무 해에 충성하고 절개를 지킨 사람들은 누구누구였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윤숙(尹塾) 이이장(李彛章)은 모두 절개를 지킨 일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유승이 아뢰기를,

"한광조(韓光肇)·임성(任珹)·임덕제(林德躋)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당시에 절개를 지켰습니다."

하고, 이중하가 아뢰기를,

"현륭원(顯隆園)의 직접 지은 지문(誌文) 가운데 충성과 절개가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모두 기록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자손들은 오늘날 누구인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이장의 사손(祀孫)은 전 부사(前府使) 이희성(李羲性)입니다."

하고, 비서원 경(祕書院卿) 박용대(朴容大)가 아뢰기를,

"윤숙의 후손은 오늘날의 승지(承旨) 윤조영(尹祖榮)이며, 임성의 사손은 오늘날의 승지 임면호(任冕鎬)입니다."

하였고, 이유승이 아뢰기를,

"임덕제의 사손은 전 감역(前監役) 임희근(林喜根)인데 현재는 시골에 있습니다. 한광조의 후손은 지금 조정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과거 시험이 없었기 때문에 조신(朝臣)들 가운데 아무개 가문의 아무개 자손이라는 것을 알 수 없으니, 역시 탄식할 만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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