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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 국왕였던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군주였던 경종의 모친이다. 1689년(숙종 15년)부터 1694년(숙종 20년)까지 왕비로 있었지만 폐비였던 전임 왕비 인현왕후가 삼불거로 복위하게 되면서 중혼법에 따라 다시 후궁으로 강등해 돌아갔다. 정식 명호는 1722년(경종 2년)에 새로이 창안된 작위인 '부대빈(府大嬪)'을 쓴 옥산부대빈 장씨이지만 1725년(영조 즉위년)에 세워진 구호에 따라 다시 '희빈'이란 강칭으로 널리 이용됐기에 현대인에겐 '희빈 장씨', '장희빈', 혹은 그녀의 이름이었던 '장옥정(張玉貞)'으로 익숙하다.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11월 1일 병진 1번째기사 1680년 청 강희(康熙) 19년

혜성과 같은 흰 기운이 서쪽으로부터 중천에 뻗치고, 혜성이 두 달 동안 나타나다

날씨가 침침하였다. 흰 기운이 서쪽으로부터 중천에 뻗쳐서 그 모양이 혜성(彗星)과 같았고 여러 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관상감(觀象監)에서 문신(文臣) 측후관(測候官)을 차출하여 윤번(輪番)으로 수직(守直)하면서 관찰할 것을 청했다 그후로 혜성이 우성(牛星)·두성(斗星)·삼성(參星)·허성(虛星)·위성(危星)·실성(室星)·벽성(壁星)·규성(奎星)·누성(婁星)·위성(胃星) 위에 출몰, 두 달 동안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였다. 당시 국상(國喪)은 혜성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났으므로, 이러한 이변(異變)의 출현 조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에 장녀(張女)590) 가 일개 폐희(嬖姬)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필경에는 왕비의 지위를 빼앗아 왕후에 승진 하기에 이르러 화란(禍亂)을 끼치고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그녀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으니,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 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1월 15일 계미 3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삼다

소의(昭儀) 장씨(張氏) 희빈(禧嬪)으로 삼았다. 당시에 장씨(張氏)에 대한 총애가 날로 성하였는데, 이항(李杭) 장희재(張希載)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 등과 체결(締結)해 관통(關通)하여 모의(謀議)함에 못하는 바가 없었으니, 국가(國家)의 화(禍)가 장차 조석(朝夕)에 있어,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서 떨었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윤3월 7일 갑진 1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이사명과 홍치상을 추국하다

이사명(李師命) 홍치상(洪致祥)을 추국(推鞫)하였다. 이사명은 처참(處斬)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고, 홍치상은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켰으며, 박정영(朴挺英) 박정영이 끌어들인 정구망(鄭久望)은 절도에 정배(定配)하였다. 박정영 홍치상이 끌어들인 장희재는 한 번 국문하고 나서 방면하였고, 장희재가 끌어들인 김만직(金萬直)은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였다. 당초 국청(鞫廳)에서 박정영의 말에 의거하여 이사명을 국문하니, 이사명이 대답하기를,

"장희재 동평군(東平君)에 대한 이야기는 박정영에게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장희재는 와서 한 번 만났고, 홍치상은 두세 번 만났을 뿐입니다."

하고, 또 기찰(譏察) 때문에 의심을 받는 데 대한 억울함을 극구 변명하였다. 국청에서 또 박정영의 말에 의거하여 홍치상을 국문하니, 홍치상이 대답하기를,

"박정영은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정묘년158) 겨울 처음으로 와서 이사명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동평군이 짐새[鴆鳥]를 사왔다는 말은 김석연(金錫衍)에게서 들었습니다."

하고, 이어 이사명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극구 변명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모두 면질(面質)하게 하소서."

하였다. 박정영에게 자신이 대답한 내용을 가지고 이사명에게 질문하게 하니, 이사명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나로서는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박정영 정구망(鄭久望)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또 자기가 대답한 내용과 정구망이 참여하며 안 정상을 가지고 홍치상에게 질문하니, 홍치상은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기찰(譏察)에 대한 일만은 유득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다. 국청에서 드디어 정구망을 국문하니, 정구망이 대답하기를,

"이사명이 저를 시켜 박정영을 부르게 하고 또 박정영에게 권고하며 장희재에게 가서 그와 교결(交結)함으로써 장희재에게 국가에 걱정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습니다만, 역시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 끝내 이사명의 집에 가지 않았으며, 장희재와는 서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박정영이 대답한 공사(供辭)가 상세하지 못하다고 다시 국문하니, 박정영이 대답하기를,

"제가 장희재에게 말하기를, ‘홍치상이 국가의 흥망이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더라.’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가 동평군과 함께 음흉(陰凶)한 일을 모의한다고 하더라.’ 하니, 장희재가 말하기를, ‘이 말의 출처가 어디인가?’ 하였습니다. 이사명 홍치상은 단지 단서만 발론(發論)하고서 경솔히 말하지 말라고 경계했기 때문에 일체 그들의 지휘(指揮)에 따라 장희재에게 말한 것입니다. 하루는 장희재와 함께 홍치상의 집에 갔는데, 장희재가 그 말의 출처를 명백히 말해 달라고 하니, 홍치상의 대답도 제가 전한 말과 같았습니다. 장희재가 말하기를, ‘내가 첩(妾)을 내쫓으려 한다.’ 하니, 홍치상이 말하기를, ‘모두를 의심하고 있으니 그대가 첩을 쫓아낸들 누가 석연히 의심을 풀겠는가? 그대는 어째서 대내(大內)에 통하여 밀지(密旨)를 얻어 기찰(譏察)하지 않는가? 경신년159) 에도 상지(上旨)를 품하여 기찰했었으니, 지금도 품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장희재가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나와서 말하기를, ‘홍치상이 강요했지만 나는 할 수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이사명이 패망하고 나서 저와 장희재는 다시 홍치상의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정구망과 함께 이사명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사명이 말하기를, ‘동평군 선묘(宣廟)의 어필(御筆)을 위에 바쳐 간행(刊行)하였지만, 실은 어필이 아니었다. 이런 죄는 사형죄(死刑罪)이다.’ 하였습니다. 지난해 여름 정구망 이사명의 편지를 보여주었는데 언문(諺文)이었습니다. 그 내용의 대략은 ‘홍주부(洪主簿)만 믿고 있으니 기필코 나를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홍치상을 만났는데 홍치상 이사명의 편지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장희재(張希載)를 잡아다 국문하니, 대답하기를,

"김만직(金萬直) 이사명을 만나보러 가자고 권하였기 때문에 가서 만나보았습니다. 또 박정영(朴挺英)과 함께 가서 홍치상을 만나 보았는데, 홍치상이 나에게 은밀히 위에 아뢰어 기찰 밀지(譏察密旨)를 얻도록 요청하였습니다만 감히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홍치상이 또 말하기를, ‘동평군이 짐약(鴆藥)을 사 가지고 왔다더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말은 박정영의 초사(招辭)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국청에서 장희재를 방면하자고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이사명 홍치상에게 엄형(嚴刑)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고 명하였다. 이때 국청에서 박정영이 대답한 공사(供辭)에 의거하여 이사명을 국문(鞫問)하면서 전일의 옥안(獄案)을 가져다 아울러 국문하지 않았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국문에 참여한 승지(承旨)가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박정영의 말에만 의거하여 국문하였으니, 이는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전일의 옥안을 가져다 아울러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드디어 전의 옥안과 박정영이 한 말에 의하여 이사명에게 형신(刑訊)을 가하니, 장(杖)이 수에 차기 전에 이사명이 대답하기를,

"조사석(趙師錫)을 무함하는 비방은 처음 홍치상에게서 나왔는데, 제가 조사석과 본디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김만길(金萬吉)·김만중(金萬重)에게 전하였습니다.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환관(宦官) 신담(申潭)은 추솔(麤率)하여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박빈(朴斌)·남두북(南斗北)을 통하여 김현(金鉉)과 교통하고 세시(歲時)에 문안하였습니다. 영전(令箭)과 행진(行陣)에 대한 일은 비록 달리 먹은 마음은 없었으나 법을 어긴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호영(湖營)의 투서(投書)에 대한 일은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시(傳示)한 것이 죄가 된다면 진실로 할 말이 없습니다. 상가(相家)의 투서에 대해서는, 조사석에게 가서 만나본 일이 없을 뿐더러 오랜 뒤에 조사석이 저에게 말하기를, ‘투서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공(公)에게 의심을 두고 있다.’ 하였습니다. 홍치상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였고 그의 아내의 소상(小祥) 때 한 번 가서 만났는데, 홍치상이 말하기를, ‘동평군(東平君)의 일이 우려스럽다.’고 하기에, 답하기를, ‘어째서 종용(從容)히 밀찬(密贊)하여 이런 걱정이 없게 하지 않았는가?’ 하니, 홍치상이 말하기를, ‘나도 그런 의사가 있어서 후궁(後宮)의 집과 교결(交結)하여 동평군과 서로 친밀하게 지내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일조(一助)가 된다.’하였습니다.

정묘년160) 겨울 박정영(朴挺英)을 불러 홍치상을 만나게 하였는데, 그 뒤 정구망(鄭久望) 박정영이 과연 와서 말하기를, ‘장희재(張希載)와 은밀히 사귀어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동평군의 어필(御筆)에 대한 일도 과연 박정영에게서 전설(傳說)된 것이 있습니다. 홍치상을 만나던 날 그가 묻기를, ‘근일 동평군을 기찰(譏察)한다는 말이 성행(盛行)하고 있는데 사실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기찰은 밀지(密旨)를 받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임금의 명이 있으면 절로 봉행(奉行)하게 될 것이다.’ 하였더니, 홍치상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 정구망(鄭久望)이 와서 말하기를, ‘장희재를 시켜 기찰 밀지(譏察密旨)를 얻으려 도모하고 있다.’ 하였고, 10일이 지나서 박정영 등이 또 와서 말하기를, ‘장희재가 따르려 하지 않는다.’ 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이 뒤로도 다시 그와 친하게 지내면서 경솔히 끊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습니다. 김만직(金萬直)을 시켜 장희재를 불러서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동평군의 교만 방자한 형적(形迹)을 보고 중신(重臣)이 된 몸으로서 성상(聖上)께 바로 진달하였다면 남구만(南九萬)·여성제(呂聖齊)의 경우에 불과했을 것인데, 혼미하고 못난 탓으로 곡경(曲逕)을 통하여 밀지(密旨)를 얻어내서 사찰(司察)하려 했던 계책에 호응한 결과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 들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에 의거해서 결안(結案)하여 무고율(誣告律)을 적용,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이사명(李師命)은 고(故) 재상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다. 젊어서 장옥(場屋)에 노닐면서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을 얻었고, 또 치변(治辨)의 재주가 있는데다가 공신(功臣)이라는 것으로 본병(本兵)을 주관하기에 이른 것이다. 장씨(張氏)161) 가 임금의 총행(寵幸)을 받게 되자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장희재 (張禧載)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 등 제적(諸賊)과 교결하여 당인(黨人)이 다시 진출할 형세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때 임금이 주가(主家)들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 있었는데, 이사명 홍치상과 결합하여 은밀히 장희재를 패퇴(敗退)시키려 모의했기 때문에 임금이 매우 증오하여 드디어 복주(伏誅)하기에 이른 것이다. 장희재를 통하여 기찰하고자 무고(誣告)한 것 때문에 사형(死刑)에 처하는 것은 정당한 율(律)이 아니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사명 홍치상의 말을 듣고 기뻐하여 김만길(金萬吉)·김만중(金萬重)에게 전하였다고 하는데, 김만중 이흥조(李興朝)에게 미루면서 끝내 고하려 하지 않은 채 죽기를 한하고 기망(欺罔)하고 있으니, 엄히 국문하여 따져 물으라."

하였다. 장(杖)을 치려 하자, 김만중이 아뢰기를,

"전일 엄한 하문(下問)이 있을 적에 이흥조(李興朝)가 한 말로만 대답한 것은 들은 것이 상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명에게서 전해 들은 것은 이미 이흥조보다 뒤졌고 또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지적하여 진달(陳達)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비로소 고합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논하기를,

"김만중이 이미 자복(自服)했으니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국청에서 박정영(朴挺英) 등이 한 말에 의거하여 홍치상에게 1차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홍치상이 자복하지 않았다. 다시 형신을 가하자 이에 말하기를,

"이사명과는 본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만년(金萬年)이 늘상 찾아와서는 둘 사이를 화해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정묘년(丁卯年) 겨울 이사명과 서로 만났고, 그 자리에서 동평군이 교만 방자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뒤 진신(縉紳)들 사이에 크게 전파되었습니다. 구일(具鎰)·윤계(尹堦) 등이 동평군의 집에 출입하며, 조사석(趙師錫)과도 서로 친밀하다는 【동평군과 서로 친밀하다는 뜻임.】 말과, 연경(燕京)의 사행(使行)에서 짐약(鴆藥)을 사가지고 왔다는 말도 정구망(鄭久望)이 전한 것입니다. 이 말이 이미 이사명의 집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장희재와 교결하여 곡경(曲逕)을 인연, 밀지를 얻어내어 이사명으로 기찰(譏察)하게 하려 한 것은 진실로 이사명 장희재가 대답한 공사(供辭)와 같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율(律)에 의거하여 처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판비(判批)하기를,

"홍치상이 유언 비어를 날조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미혹시킨 것은 동조(東朝)께서 해괴하게 여기시는 바이고, 과인(寡人)이 통한해 마지않는 바이다. 매일 한밤중에 천장을 우러러 ‘지친(至親)이 적(敵)으로 변하였으니 세상 일이 진실로 애통한다.’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 홍치상의 죄가 여지없이 다 드러남으로 인하여 생각건대, 지난날 대신(臺臣)들이 김수항(金壽恒)의 죄상(罪狀)을 나열할 적에, 족척(族戚)이 궁액(宮掖)과 연통(連通)하여 위의 동정(動靜)을 살핀다고 한 그 귀절이 매우 명백한 논설이었다. 동평군 장희재 등은 본디 저들처럼 귀가(貴家)에 아첨하여 위의 동정을 살피려는 작태를 본받지 않았기 때문에 홍치상의 무리가 마침내 혐의를 품고 원수처럼 미워한 것이다. 이미 ‘인연하여 정승에 제배(除拜)되었다.’고 하였고, 또 ‘불궤(不軌)를 도모한다.’고 하였고, 또 ‘장희재 동평군의 당여(黨與)에 들어갔다.’고 하는 등 백방으로 날조하여 무함하여 기필코 장살(戕殺)한 다음에야 그만두려 하였다. 그리고 지난 겨울 나라에 큰 경사(慶事)가 있었는데도 지친(至親) 사이에 기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으니, 송시열(宋時烈)의 무장(無將)의 상소(上疏) 같은 것은 오히려 그 다음 일인 것이다. 홍치상이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용서하는 전교를 내렸으므로 이제 갑자기 실신(失信)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특별히 사죄(死罪)를 감하여 안치(安置)시키고 엄히 천극(栫棘)을 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에 대해 의논하라."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홍치상은 주가(主家)의 자제로 훈귀(勳貴)와 교결하여 유언 비어를 날조, 이미 성상(聖上)을 무함하였고, 또 동조(東朝)를 무함하여 위협하고 공동(恐動)시켰으니, 밀지(密旨)를 얻어내 사람을 악역죄(惡疫罪)에 얽어 넣으려 한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명(罪名)을 지고 형장(刑章)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법리상(法理上)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성상께서는 귀주(貴主)가 연로(年老)하고 과거(寡居)하는데다가 독자(獨子)라는 것을 이유로 차마 주벌(誅罰)을 가하시지 못하고, 처음 명하신 대로 사죄(死罪)를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평의(平議)함에 있어 누군들 친친(親親)의 의리를 우러르지 않겠습니다만, 죄는 매우 중하고 법은 지극히 엄한 것이어서 군하(群下)의 입장에서는 법대로 집행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율(律)대로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판부(判付)하기를,

"이미 사죄는 용서한다고 명하였으니 차마 실신(失信)할 수는 없다. 전의 하비(下批)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국청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니, 제신이 모두 함께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뢰었다.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궁인(宮人)과 교결하여 조정(朝廷)의 논의에 참예한 그것만으로도 사죄인 것입니다. 지금 법을 굽혀 은혜를 베푼다면 뒷사람을 징계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권대운(權大運)은 아뢰기를,

"민암의 말은 원려(遠慮)에서 나온 것이니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은 본디 별다른 사람이었다. 원자(元子)가 처음 탄생했을 적에 원근(遠近) 친척이 모두 칭하(稱賀)하는데도 홍치상은 도리어 불만스런 기색이 있었으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를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민암이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춘추 30에 비로소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므로 원근의 신민(臣民)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홍치상은 척속(戚屬)으로서 당인(黨人)에게 빌붙기에 급급하여 장살(戕殺)할 계책만 품고 조금도 국가를 위한 성심(誠心)이 없었으니, 홍치상을 죽이지 않으면 이 무리의 음흉한 행위를 막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원자께서 탄생했을 적에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것이 역적(逆賊)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의 죄는 만 번 죽여도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다. 사죄(死罪)를 용서하려는 것은 사은(私恩)이고 경들의 말은 공법(公法)이다. 그러나 당초 용서하려 하였기 때문에 차마 참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현기(李玄紀)·장령(掌令) 성진(成瑨)이 함께 발계(發啓)162) 하여 율에 따라 처치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차마 홍치상을 참하지 못하지만 양사(兩司)의 안법론(按法論)은 옳다."

하였다. 박정영(朴挺英)·정구망(鄭久望)·김만직(金萬直) 이사명(李師命)과 서로 친하다는 이유로 아울러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였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윤3월 13일 경술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권대운이 고 상신 김육의 제사에 대해 상소하다

대신(大臣)과 비변사(備邊司)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김도연(金道淵)이 자살하였기 때문에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으니, 조정(朝廷)에서 유념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계(品啓)하게 한 뒤 예조(禮曹)의 말에 따라 김석연(金錫衍)에게 그 제사를 주관하도록 명하였다. 권대운이 또 아뢰기를,

"찰방(察訪) 이동표(李東標)·참봉(參奉) 권두인(權斗寅)은 경학(經學)과 사장(詞章)이 영남(嶺南)에서 제일이고, 찰방 김문하(金文夏)는 인품이 단아한데다가 문예(文藝)가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아까운 인재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6품에 서임(叙任)하도록 명하였다.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청(淸)나라 사람이 내각(內閣)에 비장(秘藏)했던 문서(文書)를 얻어 왔으니, 그 공이 당연히 품계(品階)를 올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숭록(崇祿)의 품계를 다시 가자(加資)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사(下賜)하는 것으로 그쳤으니, 격려 권장하는 의의에 매우 벗어난 조처였습니다."

하고, 권대운은 아뢰기를,

"말을 하사하는 것으로는 그의 공을 보상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大臣)이 공이 있으면 그 자손의 녹용(錄用)을 허락합니다."

하고, 목내선은 아뢰기를,

"장현(張炫)이 모치(募致)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전일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고, 권대운은 아뢰기를,

"이제 6백 금(金)을 들여 문서(文書)를 구입하였으니,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자손에게 한 자급(資給)을 가자(加資)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하사한 말은 도로 거두어 오고 이조(吏曹)에 명하여 그 자손을 수용(收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현에게 물어서 조처하라."

하였다. 장현은 오랫동안 수역관(首譯官)을 지냈기 때문에 온 나라에 부자로 소문이 났다. 그 사람에게 과연 일컬을 만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사대부(士大夫)로서는 입에 올리기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몰래 문서(文書)를 구입하여 공상(功賞)을 노린 것이어서 본디 숭장(崇奬)하기에 부족한 것은 물론 말을 내린 것도 외람되다 하겠다. 그런데도 목내선(睦來善) 권대운(權大運)이 그의 공로를 성대히 일컫고 심지어 대신(大臣)의 은례(恩例)로까지 대우하려 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때 장현 장씨(張氏)180) 의 족부(族父)로 장희재(張希載)와 그 모의를 아래 위에서 도왔으므로, 임금이 바야흐로 후정(後庭)의 총애 때문에 기필코 중곤(中壼)181) 을 기울어뜨린 뒤에야 그만두려 하고 있었는데, 이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목내선 권대운이 진실로 인심(人心)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장현을 위하여 말할 수가 있으며, 또한 어떻게 차마 대신의 은혜를 들어 증거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는 임금의 마음을 받들어 아첨하는 것으로써, 진신(搢紳)의 수치일 뿐만이 아니라 실은 궁위(宮闈)의 변(變)을 은밀히 도와 성사시키려는 작태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살을 저며내는 형벌로도 보상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는데도 끝까지 목숨을 보존하여 창문 아래서 늙어 죽었으니, 통한스런 일이다.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이사명(李師命)이 말하기를, ‘호남(湖南)의 왜서(倭書)는 군관(軍官) 신범(辛範)이 취득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사명은 죽었으나 신범을 체포해다가 국문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신범을 국문하니, 신범이 자복(自服)하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임술년182) 9월 이사명과 함께 호영(湖營)에 갔었지만, 그해 겨울 죄 때문에 파출(罷黜)당하여 돌아왔으니, 어떻게 이른바 익명서(匿名書)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3차의 형신(刑訊)을 가하였는데도 전에 한 말을 고집하였다. 임금이 비로소 의논하여 처치하라고 명하니, 드디어 도배(徒配)로 감정(勘定)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현기(李玄紀)가 전에 아뢰었던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논란의 대상인 한범제(韓范齊) 등 7인의 죄를 입시한 제신(諸臣)에게 하문하였으나, 모두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신여철(申汝哲)이 말하기를, ‘그들은 모두 억울한데 이혜주(李惠疇)만은 이사명과 매우 친밀하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신여철에게 하문하였다. 신여철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사실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이혜주를 먼 변방에 정배(定配)시키자는 청을 따랐다. 이현기(李玄紀)가 또 논하여 아뢰기를,

"홍주 목사(洪州牧使) 김호(金灝)의 치사하고 더러운 행실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타기(唾棄)하고 있습니다. 호읍(湖邑)의 수재(守宰)로 있을 적에는 탐욕이 너무도 심하여 멋대로 관곡(官穀)을 인출, 인적(印籍)까지 있었으니, 파직(罷職)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권해(權瑎)·이현기(李玄紀)와 부응교(副應敎) 심단(沈檀)이 다 함께 송시열(宋時烈)을 법에 의해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신(諸臣)이 송시열을 논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다. 원자(元子)가 이미 명호(名號)를 정하였는데도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려 한 그 상소 하나만으로도 사형에 처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처음에 이미 용서하였으니 지금 다시 법으로 다스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대사헌 목창명 등이 송시열의 처벌을 상소하다

대사헌(大司憲) 목창명(睦昌明), 응교(應敎) 이식(李湜), 지평(持平) 정선명(鄭善鳴)·배정휘(裵正徽), 헌납(獻納) 이만원(李萬元), 교리(校理) 강선(姜銑)·이윤수(李允修), 부교리(副校理) 권규(權珪), 정언(正言) 성관(成瓘)·조식(趙湜), 수찬(修撰) 심계량(沈季良)·심벌(沈橃)이 청대(請對)하여,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하고 잡아다가 엄히 국문(鞫問)해서 빨리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룰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송시열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궁위(宮闈) 사이에도 변괴(變愧)가 있으니, 대간(臺諫)이 다 논진(論陳)한 다음 말하겠다."

하니, 목창명(睦昌明) 등이 또 홍치상(洪致祥)을 율(律)에 의거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다. 이만원(李萬元)이 아뢰기를,

"홍치상은 위를 무함하는 부도(不道)를 범하였고, 송시열은 위복(威福)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런데도 베지 않는다면 조정의 법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하고, 목창명은 아뢰기를,

"송시열 효묘(孝廟)242) 의 죄인이고, 홍치상은 동조(東朝)의 죄인입니다.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극력 요청하였다. 이식(李湜)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기미년243) 에 대론(臺論)에 따라 송시열을 죄주었다면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지금처럼 함닉(陷溺)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배정휘(裵正徽)는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 공주의 아들은 사죄(死罪)를 속바치는 은전(恩典)이 있었지만 임금은 오히려 법을 굽히는 것을 어렵게 여겨 결국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교만 방자한 죄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거늘, 더구나 홍치상은 동조(東朝)를 무함하고 사류(士類)를 모해(謀害)했는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이만원(李萬元)이 아뢰기를,

"선왕(先王)께서 온천(溫泉)에 행행(行幸)한 것은 부득이해서였던 것인데, 송시열이 해마다 온천에 행행하면서도 한 번도 능침(陵寢)을 배알(拜謁)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을 사서(私書)에 기재하여 마치 수죄(數罪)하듯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고, 승지(承旨) 이시만(李蓍晩)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나이 많은 귀주(貴主)를 생각하시어 즉시 홍치상을 베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치상은 전하께서 주가(主家)를 대우함에 있어 후박(厚薄)이 있다는 것을 김석연(金錫衍)에게 말하였으니, 이러한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성관(成瓘)은 아뢰기를,

"송시열 홍치상의 죄를 용서한다면 하늘에 계신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신령(神靈)을 위로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하께서도 천하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심계량(沈季良)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처음 홍치상에게 사형에 처하지 않을 것을 허락하고 그에게 사실대로 고하게 하였는데도 숨겼습니다. 그러다가 이사명(李師命)과 대질(對質)하여 변석(辨釋)할 때에서야 비로소 말이 궁하고 안색이 저상되어 그 사실을 다 진술하였으니, 이는 홍치상이 스스로 전하를 끊은 것이요, 전하께서 실신(失信)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세(末世)로 올수록 인심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이 있겠는가? 경들에게 발본 색원(拔本塞源)할 뜻이 있으니, 나도 말하고 들은 것이 있다. 궁위(宮闈)에 【중궁(中宮)을 가리킴이다.】 관저(關雎)의 덕풍(德風)244) 은 없고 투기(妬忌)의 습관이 있어서 병인년245) 희빈(禧嬪)이 처음 숙원(淑媛)이 될 때부터 귀인(貴人)에게 당부(黨付)하였으며, 분을 터뜨리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內殿)과 귀인(貴人)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淑媛)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액정(掖庭)에 있게 되면 경신년246) 에 실각(失脚)한 사람들에게 당부(黨付)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부인(婦人)의 투기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선왕·선후의 말을 가탁(假托)하여 공동(恐動)시킬 계책을 세운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투기가 통하지 않게 되자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말을 만들었는데 삼척 동자인들 어찌 이 말을 믿겠는가? 간교한 정상이 폐부(肺腑)를 들여다보듯 환하다. 이런 사람은 고금(古今)에 다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숙원에게 아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원자(元子)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 거짓된 작태가 여기에서 더욱 증험되었다."

하였다. 이시만(李蓍晩)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들을 자식처럼 여기시고 신들은 전하를 아버지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여염(閭閻)의 가정으로 말하면, 부모가 불화(不和)한데 자식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궁위(宮闈) 사이에 미안(未安)한 일이 있더라도 서서히 진정하시면 될 것인데, 이와같이 드러내어 말하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실로 이는 뜻밖이다.’ 하였다. 일찍 국본(國本)247) 을 정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목창명 (睦暢明)이 아뢰기를,

"신들이 내전(內殿)을 어머니처럼 우러르고 있는데 이러한 하교(下敎)를 듣고 어찌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궁인(宮人)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어찌하여 대내에서 처분하지 않으시고 외신(外臣)에게 말씀하시십니까?"

하고, 이시만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家長)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범인(凡人)도 이러한데 더구나 군주(君主)야 말할게 무어 있겠습니까? 장공예(張公藝)248) 는 참을 인(忍)자 하나로 9대(代)가 한 집에 동거할 수 있었습니다. 필부(匹夫)가 가정에 살면서도 오히려 용납하려고 힘쓰는데, 군주야 말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여염집으로 말하건대 부인이 어떻게 일마다 사리에 합당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전(內殿)께서도 여염집에서 생장(生長)하셨는데 여염집 부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직 용납하고 참음으로써 진정시켜야 합니다."

하고, 이식(李湜)은 아뢰기를,

"이시만의 말은 충심으로 전하를 사랑하는 데서 나온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조식(趙湜)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들에게 아버지이시고 내전께서는 신들에게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바라는 바는 더욱 정가(正家)에 힘쓰고 화평(和平)에 힘을 다하여 주시라는 것뿐입니다."

하고, 강선(姜銑)은 아뢰기를,

"중궁(中宮)께서 일국의 국모(國母)로 군림하여 온 지가 우금 10년인데, 무슨 실덕(失德)이 있었기에 용납하여 참으려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단 신료(臣僚)들만 차마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전해지면 실로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일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 한 몸을 아껴 전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이 말은 중궁(中宮)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로 전하를 위한 것입니다."

하고, 이시만은 아뢰기를,

"부인들은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으레 편색(褊嗇)한 이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너그러이 참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신데 어찌 이를 헤아리지 못하십니까?"

하고, 이만원은 아뢰기를,

"정가(正家)하는 방법은 상하가 모두 같습니다. 부인의 성품이 편색할지라도 반드시 교회(敎誨)를 받게 되어 무사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하교는 삼가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것인가 합니다."

하고, 이윤수(李允修)는 아뢰기를,

"고사(古史)를 살펴보더라도 태평한 세상에는 진실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제가(齊家)하는 방법에 힘을 기울이신다면, 이 어찌 신민(臣民)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심벌(沈橃)은 아뢰기를,

"신들은 매양 문왕(文王) 주남(周南)의 덕화249) 를 우리 전하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이런 분부를 받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강선(姜銑)은 아뢰기를,

"중궁께서 원자에 대해 곧 자신이 낳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사랑하는 마음이 전하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노여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제가(齊家)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투기할 뿐만이 아니라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말이라고 속이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외인(外人)으로 말하더라도 구고(舅姑)의 선령(先靈)을 가탁하여 근리(近理)하지 않은 말을 칭도(稱道)한다면, 그 심술(心術)이 어떠하겠는가? 그의 마음이 이러하니 원자를 자기가 낳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시만(李蓍晩)이 아뢰기를,

"궁위(宮闈)를 모시고 있는 자들에게 혹 불선(不善)한 점이 있더라도 전하의 성명(聖明)함으로 어찌 포용하여 참을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이 이른바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것은 진실로 격언(格言)입니다. 옛사람이 통곡할 만한 것이 있고, 눈물 흘릴 만한 것이 있다250) 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오늘의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외(內外)를 교결(交結)하여 임금의 동정(動靜)을 살핀 것이 김수항(金壽恒)이 죽게 된 이유이다. 이 사람을 그에 비기면 어떠한가?"

하였다. 임금의 의도는 귀인(貴人) 김씨(金氏)를 가리킨 것인데, 척언(斥言)하지는 않았다. 이시만이 아뢰기를,

"이는 김수항의 죄입니다. 그러나 부인(婦人)은 지식(知識)이 없으니 책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하고 이윤수(李允修)는 아뢰기를,

"이시만(李蓍晩)의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어머니로 섬겨야 할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는 진실로 극력 간쟁(諫爭)해야 되는 것이요, 그 나머지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윤수의 말은 그 의도가 무엇인가?"

하자, 목창명(睦昌明)이 아뢰기를,

"이시만이 전하의 분부를 모르고 언단(言端)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윤수가 아뢰기를,

"어머니로 섬겨야 할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는 극력 간쟁해야 되는 것이지만, 그 나머지 궁위(宮闈) 사이의 일은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진노하여 말하기를,

"내간(內間)의 일에 대해서 이시만과 나 사이에 누가 더 상세히 알겠는가?"

하였다. 이시만이 아뢰기를,

"부인에게는 삼종(三從)의 의(義)251) 가 있습니다. 진실로 성덕(盛德)이 있는 분이 아니면 으레 조그만 과실을 저지르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인에게 관계된 일은 비록 미안한 점이 있더라도 깊이 책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성상(聖上)께서 화평하게 처분하시기를 바란 것뿐입니다. 어찌 감히 귀인(貴人)을 비호할 계책에서 그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洪致祥) 김수항(金壽恒)이 서로 교통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다. 속담에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홍치상이 혼자서 한 일이겠는가? 하루는 빈청(賓廳)에서 인견(引見)할 때 그 연석(筵席)에서의 이야기를 소지(小紙)에 직접 기록하여 좌석(座席) 곁에다 놓아두었는데 곧바로 잃어버렸다. 귀인(貴人)이 마침 건즐(巾櫛)252) 을 받들면서 소매 속에 숨겨 놓은 것이다. 철저히 수색을 하자 비로소 마지 못하여 환납(還納)하였다. 그 이유를 하문하니, 쓸데없는 휴지(休紙)인 줄 잘못 알았다고 했다. 이것은 한때에 우연히 저지른 일이 아닌 것으로, 유언 비어를 날조한 것은 홍치상 뿐이 아니다. 국가에 대환(大患)이 발생하게 되었으므로 내가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인데, 이시만이 어떻게 감히 구해(救解)하려 한단 말인가? 이윤수(李允修)의 말이 옳다."

하였다. 제신(諸臣)들이 이시만을 위하여 구해(救解)하는 이가 많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시만은 무례(無禮)하기 그지 없다. 통곡할 만하고 눈물 흘릴 만하다는 말까지 하여 마치 절의(節義)를 세우려는 자처럼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다.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이시만이 결단코 다른 뜻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신(大臣)들이 입시(入侍)하지 않았는데 이런 분부가 계시니, 신들은 실로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궁위(宮闈) 사이의 일은 중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반드시 대신들과 상세히 의논하여 조처하셔야 합니다."

하고, 심계량(沈季良)은 아뢰기를,

"신들은 전하를 아버지처럼 우러르고 중궁을 어머니처럼 우러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과실(過失)을 자식에게 말하였을 경우 그 자식이 어떻게 감히 시비(是非)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년 2년 하다가 이미 난감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말하겠는가? 속담에 부인은 교화(敎化)시키기 어렵다고 하던데,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제신들이 이시만(李蓍晩)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도 가볍다."

하였다. 이만원(李萬元)이 환수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다른 승지(承旨)를 부르니 승지 김해일(金海一)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합사(合司)로 논계(論啓)한 의논을 따랐다. 임금이 이어 말하기를,

"재차 하교했는데도 【귀인(貴人)의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삼사(三司)가 한마디도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목창명(睦昌明)이 아뢰기를,

"어머니로 섬기는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 감히 다른 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어찌 일을 처리해 갈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경솔히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교가 이미 상세하였는데 경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해조(該曹)에 명하여 전례(前例)를 고찰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드디어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귀인(貴人) 김씨(金氏) 김수항(金壽恒)과 내외에서 교통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으므로 궁위(宮闈)의 일이 누설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주가(主家)와 교결하여 유언 비어를 날조하고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처치(處置)할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또 목창명 등의 아룀을 따라 가을헌(加乙憲)을 정형(正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만원이 아뢰기를,

"조정(朝廷)에서는 오로지 당론(黨論)에만 뜻을 두고 있을 뿐 백성들의 일은 돌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병폐(病弊)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기 전에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이 나쁜 데로 빠져들어 당여(黨與)를 비호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다. 김만중(金萬重)이 자기 사위를 비호하기 위해 아들에게 형(刑)을 받게 하였고, 저 자신도 누차 엄한 형신(刑訊)을 받고도 끝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사명(李師命)이 자복(自服)함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다 드러난 것이다. 내간(內間)에서도 당여를 비호한 일이 있으니, 세도(世道)가 너무도 괴이하다."

하였다. 이만원이 아뢰기를,

"을묘년253) 에 제도(諸道)에 명을 내려 양민(良民)을 조사하게 하였다가 곧이어 정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충홍도(忠洪道)만은 이미 조사하였기 때문에 양민을 양여정(良餘丁)이라 하고, 서얼(庶孽)을 유음여정(有蔭餘丁)이라 하여 해마다 군포(軍布)를 거두어 들이므로 이들의 원망이 극심하니, 마땅히 그 법을 혁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왕(大王)의 6대손(代孫) 이하를 군정(軍丁)에 충정(充定)하였기 때문에 이름은 선보(璿譜)에 있지만 몸은 천례(賤隸)에 편입되어 있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묘당(廟堂)에서 의논하도록 명하여 혁파하였다. 임금이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분부를 내렸으면 마땅히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극력 간쟁(諫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제신(諸臣)들이 진달(進達)한 것이 거개가 범연하여 체면치레로 마지 못하여 한 것이라는 것이 언사(言辭)에 저절로 드러났다. 심지어 이만원(李萬元) 목창명(睦昌明)은 또 널리 한만(閑漫)한 일에까지 언급하였으니 그 마음에 조금도 경동(驚動)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죄가 하늘에까지 사무쳤다고 할 수 있겠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6일 임진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영의정 권대운과 좌의정 목내선이 정청을 정지하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과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정청(庭請)을 정지하였고, 대사헌 목창명(睦昌明)과 대사간 유명현(柳命賢) 등이 복합(伏閤)을 정지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후비(后妃)를 폐치(廢置)하는 것은 국가의 큰 변고이고, 정청과 복합은 조정의 대대적인 거사이다. 국가의 큰 변고를 당하여 조정의 대대적인 거사를 함에 있어 이틀 사이에 시작했다가는 곧 그침으로써 마침내 국모(國母)를 폐출(廢黜)되게 하였고, 끝내는 군부(君父)의 잘못된 거조(擧措)를 완성시켜 주었다. 그러니 지위가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요, 벼슬이 양사(兩司)의 장관인 자들이 어떻게 그 죄를 피할 수가 있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대 역대(歷代)의 제왕(帝王)이 후비를 폐출시킨 것은 언제나 후궁(後宮)의 총애(寵愛)와 참소(讒訴)하고 이간하는 말에서 연유했기 때문에 군신(君臣)들이 반드시 극력 간쟁(諫爭)하였던 것이다. 임금의 신하요 국모의 아들인 입장에서는 그 의(義)에 있어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질운(郅惲)272) 은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임금의 마음을 헤아렸고, 여이간(呂吏簡)은 군부(君父)의 뜻을 따라 국모(國母)를 폐출하였지만, 후궁(後宮)을 인연(因緣)하여 참간(讒間)을 행한 것이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 등과 같은 짓을 한 경우는 없다. 민암·민종도·이의징 등이 음모(陰謀)와 비계(秘計)로 이륜(彛倫)을 무너뜨린 죄는 진실로 주벌(誅罰)을 가할 가치조차 없다. 권대운(權大運) 이하 조정에 가득한 군소배(群小輩)가 모두 민암(閔黯) 등과 모의(謀議)를 관통(關通)했다고 기필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장희재(張希載)의 권세에 의지하여 부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중궁(中宮)이 사제(私第)로 손위(遜位)하는 것이 바로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므로 빨리 하지 못할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아! 이런데 그들에게 극언(極言)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간쟁하라는 의(義)를 책임지울 수가 있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임금이 처음 이 일을 언급하였을 적에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전혀 경동(警動)하거나 애통 박절해 하는 뜻은 없이 그저 ‘화평(和平)하게 진정시켜 지당(至當)하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내용으로 건성건성 말하며 억지로 책임만 메운 것이 마치 글을 지을 적에 자수(字數)만 채우듯이 하였다. 나아가 정청(庭請)하고 복합(伏閤)하여 간쟁한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한 것이니, 누구를 속일 수 있겠는가? 성상(聖上)은 총명이 전고(前古)에 없이 뛰어나고 또 영단(英斷)이 있는데, 단지 한때의 사적인 총애에 빠져 위호(位號)를 폐치(廢置)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빨리 결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군소배들을 진용(進用)하고 또 수개월이 지났어도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차마 갑자기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권대운(權大運) 등이 사사로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은 중국과 달라서 열성(列聖)들께서 비필(妃匹)을 중히 여겨 반드시 명문 귀족(名門貴族) 가운데서 대대로 부덕(婦德)이 출중한 사람을 선발해 왔다. 임금이 어렵게 여기고 있는 것은 희빈(禧嬪)의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권대운 등이 장현(張炫)에게 상을 내릴 것을 청하면서 대신의 은례(恩例)에 따르게 하였고, 또 장희재(張希載)를 무신(武臣)의 극선(極選)인 무고(武庫)273)  태복(太僕)274) 의 자리에 올려 놓았으며, 이에 계속 제수(除授)하여 순월(旬月) 사이에 마구 뛰어 올랐다. 아, 정사(政事)275) 에 주의(注擬)가 있음으로부터 어찌 후궁(後宮)의 형이요 여항(閭巷)의 미천한 자가 이 직임에 제수된 적이 있었겠는가? 그들 마음의 소재를 환히 알 수 있으며, 조사기(趙嗣基)의 반목설(反目說)과 민암(閔黯)이 사중가(四重歌)로 선비들을 시험보인 것으로도 그 의지(意旨)를 알 수 있다. 임금의 마음이 이 때문에 더욱 공고하여져 비로소 처분(處分)을 내리게 되었으니, 이는 권대운(權大運) 등이 능히 간쟁하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은밀히 독촉한 것이다. 이런데도 오히려 ‘임금이 하려고 한 것이니 제신(諸臣)의 죄가 아니다.’ 하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민암(閔黯) 등이 스스로 어머니로 섬기는 의(義)를 끊고 나서는 교문(敎文)을 반포할 적에 흉패스런 말을 마구 하였는데 목내선(睦來善)의 경우에는 ‘불공 불경(不恭不敬)이라.’ 하고, 이현일(李玄逸)의 경우는 ‘곤이(壼彛)가 불순(不順)하였다.’ 하는 등 헐뜯는 말에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3백 년 동안 이어 온 예의(禮義)의 나라가 민암(閔黯) 등 제적(諸賊)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5월 6일 신축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희빈 장씨로 왕비를 삼겠다는 전지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 예조 참판(禮曹參判) 유명현(柳命賢), 참의(參議) 유하겸(柳夏謙)이 명을 받들고 빈청(賓廳)에 모였는데, 임금이 중관(中官)을 보내어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주역(周易)》은 건곤(乾坤)을 기본으로 하였고, 《시경(詩經)》은 관저(關雎)를 첫머리로 하였으니, 대저 풍속을 바르게 하고 비필(妃匹)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주곤(主壼)325) 을 아직 세우지 못하여 음교(陰敎)가 통달하지 아니하니, 위호(位號)를 정하는 것을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희빈(禧嬪) 장씨(張氏)는 좋은 집에 태어나서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서 인효 공검(人孝恭儉)하여 덕이 후궁(後宮)에 드러나 일국의 모의(母儀)가 될 만하니, 함께 종묘(宗廟)를 받들고 영구히 하늘의 상서로움을 받을 것이다. 이에 올려서 왕비를 삼노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일체 예절(禮節)에 따라 즉각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권대운이 받들어 읽기를 마치자, 서로 돌아보며 잠자코 있다가 이어서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고, 유명현(柳命賢) 등도 또한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엎드려 전지(傳旨)를 보건대, 곤위(壼位)가 이미 비었고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밑에 있는 사람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중대한 일이므로 신과 예관(禮官) 두 사람으로 하여금 초초(草草)하게 의논해 정하도록 하여 관료(官僚)를 제배(除拜)하는 행위와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사체(事體)가 도리어 가벼워지니, 2품 이상을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의 기색이 자못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수의(收議)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유명현이 말하기를,

"권대운의 말은 그 일을 중하게 하려고 할 뿐입니다. 순문(詢問)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전대의 역사를 보건대, 단지 승상(丞相)·어사(御史)만 불렀고 아조(我朝) 비빈(妃嬪)을 간택(揀擇)할 때에도 단지 삼공(三公)과 예관(禮官)만 불렀기 때문에 경들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유명현이 말하기를,

"비록 고례(古例)는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러 신하로 하여금 모두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2품 이상과 삼사(三司)를 즉시 패초(牌招)하라고 명하였다. 선인문(宣仁問)으로부터 와서 시강원(侍講院)에 모였는데, 무릇 시민당(時敏堂)과 가까움을 취하여 시각을 늦추지 아니하려고 한 것이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장차 택일(擇日)할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역서(曆書)를 보았는데, 오늘 바로 길일(吉日)이다."

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일체 예절(禮節)은 해조(該曹)에서 곧 마땅히 거행할 것이나, 전부터 세자빈(世子嬪)이 승위(陞位)할 때의 책례(冊禮)는 3년 후에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한 마침 국휼(國恤)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빈이 승위할 때의 책례는 비록 3년을 기다린다고 하나, 명호(名號)를 정하는 것은 성복(成服) 전에 행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먼저 명호를 정하여 고묘(告廟)와 반교(頒敎)를 하고, 책례는 3년 후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명현이 말하기를,

"전부터 책례는 비록 3년을 기다릴지라도 진상(進上) 등의 일은 먼저 거행하였고, 고묘와 반교는 전례(前例)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상은 진실로 마땅히 거행할 것이지만, 고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마땅히 예조(禮曹)로 하여금 예(例)를 상고하여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하고, 권대운이 이어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임금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제 만약 교서(敎書)를 반포하면 책례(冊禮) 때의 교서 반포와 중복될 듯하니, 이 전지(傳旨) 가운데,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한다.’는 뜻을 아래에 보태어 넣어서 팔도(八道)에 유시(諭示)를 내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당일 정사를 열어서 왕비의 부모에게 봉작(封爵)·증직(贈職)할 것을 명하니, 권대운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큰 일을 정할 적에 위엄과 노여움을 가하지 아니한 예가 드뭅니다. 인조(仁祖)께서 원종(元宗)을 추숭(迫崇)할 때에도 여러 신하가 힘써 다투다가 귀양가고 쫓겨난 경우가 많았는데, 일이 지난 뒤에는 모두 석방되었으니, 이것은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열(權說)·이윤수(李允修)·심계량(沈季良)·이만원(李萬元) 등은 모두 그 죄벌(罪罰)을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뒤에 이시만(李蓍晩)에게도 파직의 명을 도로 거두었는데, 연신(筵臣)이 ‘권대운이 잊고 아뢰지 아니하였다.’고 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김덕원(金德遠)은 죄가 없습니다. 신과 목내선(睦來善)이 모두 늙었으니, 위임할 만한 사람은 김덕원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로소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권대운이 다시 말하니, 드디어 앞의 전지(傳旨)를 정지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힘써 나오게 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이상진(李尙眞)은 말이 비록 어긋날지라도 삼조(三朝)의 옛신하입니다. 너그럽게 용서를 내리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어렵게 여겼는데, 권대운이 다시 말하니 이에 그 도내(道內)에서 가까운 땅으로 이배(移配)하라고 명하였다. 권대운 등이 물러가서 시강원(侍講院)에 나아갔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암(閔黯), 좌참찬(左參贊) 이관징(李觀徵), 우참찬 유명천(柳命天), 이조 판서 심재(沈梓), 호조 판서 오시복(吳始復), 공조 판서 유하익(兪夏益), 판윤(判尹) 윤이제(尹以濟),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집(李鏶), 부호군(副護軍) 정후량(鄭後亮), 행 사직(行司直) 이간(李旰), 사간(司諫) 이태귀(李泰龜), 교리(校理) 이윤수(李允修), 부교리 권흠(權歆), 수찬(修撰) 심벌(沈橃)·심계량(沈季良)이 함께 모였다. 임금이 처음 내린 비지(批旨) 가운데 ‘역령정원포고중외(亦令政院布告中外)’의 여덟 글자를 덧붙여 써서 내리니, 여러 신하가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 10월 22일 기묘 1번째기사 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다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지난해에 이 명이 있었으나,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상제(祥祭)·담제(禫祭)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책례(冊禮)를 치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도감(都監)을 두어 거행하였다. 그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하늘과 땅의 덕이 모여서 만물이 힘입어 비로소 살듯이 부부의 윤리가 이루어지고, 낮과 밤이 나뉘어 해와 달이 번갈아 밝히듯이 안팎의 교화가 갖추어지므로, 임금의 다스림은 반드시 왕비의 어짊을 힘입어야 한다. 후궁에서 세자를 기르매 노경(魯經)178) 에는 귀하게 된 어머니의 표상을 전하였고, 왕실(王室)에 효순(孝順)하매 주아(周雅)179) 에는 잘 다스린 신하의 아름다움을 실었다. 이제 다행히 궁 안에서 덕이 있는 사람을 가리매 자나깨나 구하던 짝에 합당하니, 아름다운 위호(位號)를 바루고 절차를 갖춘 의례(儀禮)를 거행한다.

아! 너 장씨는 일찍부터 아름다운 자태를 타고나고 훌륭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상서(祥瑞)가 몽일(夢日)180) 에서 조짐을 보이매 요옹(姚翁)은 천하(天下)의 귀인(貴人)이라 감탄하고, 사책(史冊)에 사록(沙麓)이 무너진 것이 적혀 있으매 건공(建公)은 원성(元城)의 성녀(聖女)를 점쳤다.181) 오직 그 의도(儀度)가 법칙에 맞으므로 명성이 향기를 드날리니, 계명(鷄鳴)182) 에서 경계(儆戒)를 더욱 밝히면 이보다 덕(德)이 더 나타남이 없고, 인지(麟趾)183) 에서 풍악을 울리면 하늘에서 녹(祿)을 받을 것이다.

왕비의 자리가 겨우 비게 된 이때에 큰 명(命)이 허락됨을 보니, 귀장(龜章)184) ·적불(翟茀)185) ·상복(象服)186) 이 빛나고, 일진이 좋은 때에 대례(大禮)는 거행된다. 이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권대운(權大運)·행 병조 판서(行兵曹判書) 민암(閔黯)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예를 갖추어 왕비로 책명(冊命)한다. 아아, 자손이 백세(百世)에 번영하고 교화가 사방에 터잡으려면 교만하고 사치한 것을 염려하여야 하니, 늘 쉽게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절검(節儉)이 아니면 어찌 충만함을 유지하겠는가? 숭고(崇高)에 처할수록 겸외(謙畏)를 더하여 자신의 수양을 삼가고, 종묘(宗廟)를 받들어 제수(祭需)를 주관하여 내 효리(孝理)를 도와, 임금을 돕는 큰 길상(吉祥)을 힘써 보전하고, 동관(彤管)의 칭예(稱譽)를 길이 끼치라,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민암(閔黯)이 지어 바쳤다.】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임금은 이르노라, 대궐에서 원자(元子)를 길러 세자를 책봉하는 전례(典禮)를 치르자, 중궁의 위호(位號)를 밝혀 왕비를 세우는 의례(儀禮)를 거행하니, 음공(陰功)을 도우려면 참으로 교화에 근본하여야 한다. 아! 너 장씨는 늘 내칙(內則)을 따라서 덕이 후궁 중에서 으뜸이니, 성품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주(周)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고, 몸소 문안하여 대비(大妃)를 섬기게 되더니, 어찌 다행히도 시중들던 끝에 과연 이처럼 단장을 마치는 경사가 있게 되었는가? 중대한 종사(宗社)를 부탁할 데가 있게 되는 것은 하늘이 나라를 돕는 것이고, 《춘추(春秋)》의 의리에서 상고할 것은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여지는 것인데, 마침 중궁 자리가 비었을 때에 존귀한 중전 자리에 합당하다. 생각하면 성종(成宗) 때의 옛 일이 있어서 징험할 만하고, 상 고종(商高宗)이 상제(喪制)가 끝나기를 기다린 일187) 에 비추어도 예(禮)에 있어서 당연하므로, 10월의 좋은 날을 가려서 중궁의 자리를 바룬다.

이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권대운(權大運)·행 병조 판서(行兵曹判書) 민암(閔黯)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예를 갖추어 왕비로 책명(冊命)하게 하니, 귀장(龜章)·적불(翟茀)은 전책(典冊)에 갖추어서 빛을 내고, 옥갑(玉匣)·주유(珠襦)는 물채(物采)를 융성히 하여 더욱 환하다. 아! 자리를 지키되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경계하며, 다스림을 돕되 능히 검소하고 능히 부지런하라. 인지(麟趾)와 같이 자손을 번성하게 하면 나라의 형세가 반석처럼 튼튼할 것이고, 계명(鷄鳴)과 같이 경계를 아뢰면 궁에 들어갔을 때에 간언(諫言)은 듣게 될 것이니, 태임(太姙)·태사(太姒)의 아름다운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고 조종(祖宗)의 훌륭한 공열(功烈)을 길이 이어받으라.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한다."

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유명천(柳命天)이 지어 바쳤다.】 대사(大赦)하고,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였다. 팔방에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임금은 이르노라, 천도(天道)가 지극히 크나 땅이 아니면 만물을 생성하는 공이 없으며, 인륜이 터잡고서 집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교화를 가져오니, 이 성대한 의례를 마치매 온 백성과 함께 기쁨을 같이하여야 마땅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기업(基業)을 이어받은 이래로 중궁이 중간에 자리를 비우니, 성녀(聖女)를 구하여 얻어서 자나 깨나 찾는 생각에 응하지 못하면 어찌 공경히 제사를 받들어 종묘(宗廟)의 일을 주관하게 할 수 있으랴마는, 다행히 하늘의 돌봄을 힘입어 후궁에서 원자(元子)를 얻는 상서를 크게 열었다. 덕을 숭상하는 것은 태임·태사의 아름다운 명성을 이어받아 으레 법도를 따르고, 귀한 것으로는 《춘추》의 대의(大義)에 맞아 원량(元良)을 길렀으니, 상복을 벗은 때에 맨 먼저 길일을 가려서 위호를 바룬다.

생각하건대, 예전에 내조(內助)의 보탬은 처음을 삼가서 마지막까지 꾀하려는 것이려니와, 그래서 임헌(臨軒)하는 옛 법을 강구하여 의물(儀物)을 갖춘 성대한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니, 완염(琬琰)188) 이 빛나고 적불(翟茀)이 빛났다. 경계는 계명(鷄鳴)에 두매 밤낮으로 삼가는 아름다움이요, 경사는 인지(麟趾)에 맞으매 참으로 종사(宗社)와 백성의 복이니, 큰 은혜가 두루 미치게 하는 뜻에 붙여 대명(大命)을 선포하여 사유(赦宥)한다. 이달 22일 매상(昧爽) 이전부터 사죄(死罪) 이하의 잡범(雜犯)을 모두 용서한다.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리되 자궁(資窮)인 자는 대가(代加)한다. 아아, 십란(十亂)189) 에 의지하여 후손을 길이 넉넉하게 하기를 바라거니와, 일월(日月)이 함께 밝으매 신인(神人)이 모두 기뻐함을 보았고, 뇌우(雷雨)가 일어나서 풀어 주니 백성이 다 새로워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민암(閔黯)이 지어 바쳤다.】

 

 

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윤7월 14일 정묘 2번째기사 1691년 청 강희(康熙) 30년

옥산 부원군의 시호를 빨리 의논하여 정하라고 하교하다

하교(下敎)하기를,

"국구(國舅)를 절혜(節惠)하는 법을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사체(事體)가 미안하다. 옥산 부원군(玉山府院君)122) 의 시호(諡號)를 빨리 의논하여 정하라."

하였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아뢰기를,

"이미 지난 가을에 의논하여 시망(諡望)123) 을 정하였으나, 회좌(會坐) 때에 동벽(東壁)124) 이 없으므로 태상(太常)125) 과 합의를 거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정원(政院)에서 드디어 개정(開政)하여 차출할 것을 청하였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4월 12일 기묘 3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왕비 민씨가 서궁의 경복당에 입어하는 과정

왕비(王妃) 민씨(閔氏)가 서궁(西宮)의 경복당(景福堂)에 입어(入御)하기 하루 전에 정원(政院)에서 말하기를,

"옛날 신하의 정례(情禮)로서는 문안하는 절차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으므로, 이때에 상례(常例)대로 문안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해풍 부부인(海豊府夫人) 이씨(李氏)·은성 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宋氏)·풍창 부부인(豊昌府夫人) 조씨(趙氏)의 작호(爵號)를 회복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비(妃)에게 명하여 별궁(別宮)에 이처(移處)하게 하고, 이어서 액예(掖隷)를 보내어 본가(本家)에 알리고, 이어서 수찰(手札)을 내렸다. 이어진 백여 마디 말이 죄다 뉘우치는 뜻이고 생각하는 말이었는데, 거기에 대략,

"처음에 권간(權奸)에게 조롱당하여 잘못 처분하였으나, 곧 깨달아서 그 심사를 환히 알고 그 억울한 정상을 깊이 알았다. 그립고 답답한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깊어져, 때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니, 깨어서 그 일을 생각하면 하루가 다하도록 안정하지 못하거니와, 이때의 정경(情境)을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시인(時人)이 임금을 속이고 공도(公道)를 저버리는 것을 보게 되니, 지난날 경신년116) 의 여당(餘黨)에 연결된 말이 참으로 나라를 위한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고, 조금도 사의(私意)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더욱 알았다. 옛 인연을 다시 이으려는 것은 자나깨나 잊지 않으나, 국가의 처사는 또한 용이하지 않으므로, 참고 머뭇거린 지 이제 6년이 되었는데, 어쩌면 다행히도 암적(黯賊)117) 이 진신(搢紳)을 도륙(屠戮)하려는 생각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므로, 비로소 뭇 흉악한 자를 내치고 구신(舊臣)을 거두어 쓰고, 이어서 별궁에 이처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 뒤에 어찌 다시 만날 기약이 없겠는가?"

하였다. 비(妃)가 청사(廳事)에 나와 한 탁자를 설치하고 어찰(御札)을 받들어 그 위에 올려 놓고 꿇어앉아서 보고, 이어서 상답(上答)하기를,

"첩(妾)의 죄는 죽어도 남는 책망이 있는데 오히려 목숨을 보전한 것은 또한 성은(聖恩)에서 나왔습니다. 스스로 반성할 때마다 오히려 이 죄명을 지고도 곧 죽지 않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낯을 들고 사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오직 엄주(嚴誅)가 빨리 가하여져서 마음 편히 죽기를 기다릴 뿐인데, 천만 뜻밖에 옥찰(玉札)이 내려지고 이어진 사의(辭意)는 모두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받들어 보고 감격하여 눈물만 흘릴 뿐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사제(私第)에서 편히 사는 것도 이미 스스로 분수에 지나치거니와, 별궁에 이처하라는 명은 더욱이 천신(賤臣)이 받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천은(天恩)에 감축(感祝)하며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10일(정축)에 중사(中使)가 임금의 명으로 본제(本第)의 외문(外門)을 열려고 와서 열쇠를 청하니, 처음에 하교(下敎)하기를,

"이 문을 폐쇄한 것은 처음부터 임금의 명이 아니었으나, 여염집이 천로(淺露)하여 혹 외인(外人)의 출입이 있을세라 염려되므로 이렇게 봉쇄하였는데, 천로한 걱정은 오늘도 그러하니, 어찌 열 수 있겠는가? 명이 있더라도 감히 봉행할 수 없다."

하매, 중사가 두세 번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중사가 곧 달려가서 임금에게 아뢰고 한참 만에 또 와서 임금의 명을 전하기를,

"호위(扈衛)가 있을 것이니, 천로는 걱정할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서 임금이 반드시 문을 열기를 바라는 뜻을 알리니, 비(妃)가 여러 번 뜻을 어기는 것을 황공하게 여겨서 열쇠를 주었다. 중사가 문을 열고 마당을 보니, 풀이 빽빽히 덮여 인적(人迹)이 없으므로 절로 목이 메어 액예·군졸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수위군(守衛軍)이 문을 지키고 중사가 계청(啓請)하여 방민(坊民)을 징발하여 마당의 풀을 뽑아 없앴다. 명하여 경복당(景福堂)에 들어가 살게 할 때에 유사(有司)의 공상(供上)을 모두 법대로 봉진(封進)하니, 비가 사양하여 받지 않고 말하기를,

"이것은 미분(微分)이 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공상이란 이름을 죄인이 어찌 감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또 상궁(尙宮) 【여관(女官)을 칭하는 것이다.】 두 사람과 시녀(侍女) 세 사람을 시켜 의대(衣襨)를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비(妃)가 또 사양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 중의 한 옷은 참람한 데에 가까우니, 더욱이 감히 입을 수 없다."

하였다. 상궁이 이 뜻을 임금에게 여쭈니, 또 수찰(手札)을 내려,

"어제 답찰(答札)을 보니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 없어, 기쁘고 위로되는 것이 후련하여 열 번이나 펴 보고 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경복당에 들어가 살고 공상을 상례대로 하는 것은 내 회한(悔恨)이 그지없어 특별히 지극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조정의 공론도 다 이와 같으니, 행여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오늘 보낸 의대도 안심하고 입고서 옥교(玉轎)를 타고 들어가라. 내일 다시 서로 만날 것이므로 우선 말을 다하지 않겠으나, 내 뜻을 알아서 보낸 물건을 죄다 받고 또 몇 글자로 회답하기 바란다."

하였다. 비가 답서(答書)를 올려,

"하루 안에 공상하는 물건을 내리고 나서 또 상궁을 보내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옷을 내리셨으므로 황공하고 조심스러워 나갈 바를 모르는데, 옥찰(玉札)이 또 내려와 사지(辭旨)가 간절하시니, 천은(天恩)이 망극하여 땅에 엎드려 느껴 웁니다. 성교(聖敎)가 이렇게 돈면(敦勉)하신데도 감히 당돌하게 사양하면, 성의(聖意)를 어겨서 그 죄가 더욱 커지는 줄 본디 압니다마는, 옥교·의복의 의장 절목(儀章節目)을 생각하옵건대, 다 분수에 넘쳐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므로 끝내 받기 어려우니, 성상께서 실정을 굽어 살펴 모두 도로 거두시면, 죄를 지은 천신(賤臣)이 하늘과 같은 성덕(聖德)을 입어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을 편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수찰을 내려,

"수자(手字)를 잇달아 보고 덕용(德容)을 대한 듯하니, 어찌 기쁘고 후련함을 견디겠는가? 경고(更鼓)가 이미 깊었는데 이렇게 다시 번거롭히는구나. 반드시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이 길진(吉辰)에 좋게 들어와야 한다. 또 몇 글자로 회답하기 바란다."

하매, 비가 답서를 올려,

"오늘 안에 거듭 옥찰을 받으니, 황공하고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전교(傳敎)의 사의(辭意)가 두 번 세 번 간절하신데도 여러 번 성의(聖意)를 어기는 것은 그 죄를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이므로 천첩의 사정(私情)을 감히 아뢸 수는 없으나, 이번에 입은 은수(恩數)는 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예(禮)이니, 황공하고 감격하여 나갈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상궁에게 하교하기를,

"어제 내린 의대를 입궁(入宮)할 때에 입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중죄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비가 마지못하여 한 벌의 웃옷을 여느 때에 입는 명주 옷 위에 걸치고 오시(午時)에 옥교를 타고 의장을 갖추고서 요금문(耀金門)으로부터 서궁(西宮)의 경복당에 들어갔다. 도성(都城) 안에서는 위로 사대부(士大夫)부터 아래로 종들까지 남녀 노소가 길을 메우고 뒤질세라 염려하듯이 분주히 용관(聳觀)하여, 강교(江郊) 사이는 동리가 다 비었고, 시골에서 온 자도 있었다. 혹 기뻐서 뛰기도 하고 느껴서 울기도 하는데, 전도(前導)가 비키라고 외쳐도 막을 수 없었다. 관학(館學) 및 외방(外方)의 유생(儒生)과 파산(罷散) 중인 조신(朝臣)은 길가에서 지영(袛迎)하였다. 여염의 부녀자는 6년 동안 살던 곳을 보려고 일제히 본제(本第)에 가서 여럿이 떼 지어 두루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갔는데, 며칠 동안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먼저 경복당에 이르러 기다리니, 옥교가 이르렀다. 임금이 옥교 앞에 서서 궁인(宮人)에게 명하여 발[廉]을 걷게 하니, 비가 옥교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 사죄하려 하였는데, 임금이 붙들어 일으키고 이어서 앞서 가서 경복당에 들어가니, 의물(儀物)과 제구(諸具)가 다 상례와 같았다. 임금이 비에게 자리에 오르도록 청하니, 비가 자리를 피하여 죄를 빌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다 내가 경솔하였던 허물이니, 회한(悔恨)이 그지없으나, 또한 다시 어찌 미치겠는가? 내가 번번이 충언(忠言)을 살피지 못한 것을 지극히 회한하는데, 그대에게 어찌 빌 만한 죄가 있겠으며, 또한 어찌하여 반드시 이렇게 겸양하여야 하겠는가?"

하였다. 비가 또 스스로 인퇴(引退)하는 말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애매한 정상을 환히 알고 지난 뉘우침을 많이 말하였거니와, 오늘의 일은 일마다 합당하여 다 이치에 순한데, 어찌하여 이토록 스스로 인퇴하는가? 다시는 그런 말을 내지 말기 바란다."

하고, 두세 번 타일러 정녕하게 반복하였다. 이어서 세자에게 명하여 와서 뵈게 하였는데, 비가 일어나려 하니, 임금이 말리며 말하기를,

"앉아 있어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반드시 일어나야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조정의 문안 단자(問安單子) 【문안할 때에는 으레 단자를 쓴다.】 를 들였는데, 비가 죄를 지은 사람이 감히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감히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비가 드디어 일어나므로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는데, 비가 대답하기를,

"조정의 문안은 결코 관례에 따라 받을 수 없으므로 말을 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말리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매, 비가 비로소 지도(知道)118) 【으레 내리는 말이다.】 라고 답하였다. 임금이 궁인(宮人)에게 명하여 성찬(盛饌)을 베풀게 하고, 임금이 비의 부모의 봉작(封爵)을 회복시키려고 돌아보고 비에게 말하기를,

"부원군(府院君)과 전후의 부부인(府夫人)의 봉작은 본디 기억하나, 지금 집에 있는 부부인의 작호는 어쩌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무엇이라 하는가?"

하였으나, 비가 대답하기를,

"늘 부르는 것이 아니므로, 신도 잊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참으로 모르겠는가?"

하고, 이어서 한참 중얼거린 뒤에 깨닫고 드디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니, 비가 또 사양하기를,

"첩의 죄가 지극히 중한데 6년 동안 징계가 없었으니, 결코 이 거조(擧措)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 성상께서 동궁(東宮)의 정리(情理)를 생각하신다면, 또한 어찌 차마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저 나라에 주문(奏文)할 때에도 반드시 난처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여 도로 거두시기를 다시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사제(私第)에 어렵고 괴로움을 갖추 맛본 것이 다 내 허물이다. 이제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여러 해 동안 답답하고 슬펐던 마음을 펼 수 있다. 더구나, 온 나라 신민이 누구인들 기뻐하지 않겠는가? 뭇사람의 뜻이 같이하는 것이고 내 마음도 편할 것인데, 어찌 그대의 한 마디 말 때문에 국가의 큰 일을 지레 고치겠는가? 그대는 안심하여야 한다."

하니, 비가 청사에 나가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 날 저녁에 궁인(宮人) 영숙(英淑)을 밖으로 내치고, 또 희빈(禧嬪)에게 명하여 별당(別堂)에 물러가 있게 하고, 이어서 비에게 함께 대내(大內)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비가 자리를 피하여 굳이 사양하며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았다. 임금이 먼저 가면서 상궁(尙宮)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중전(中殿)을 시위(侍衛)하여 침전(寢殿)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상궁에게 중죄가 있을 것이다."

하니, 궁인(宮人)이 좌우에서 시위하고 전후에서 부축하여 양심합(養心閤)에 침장(寢帳)을 마련하였다. 이튿날 정전(正殿)에 나아간 뒤에 임금이 비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경덕궁(慶德宮)에 이처(移處)하고 내가 몸소 가서 맞이하면, 바로 예(禮)에 맞고 경에게도 빛이 있을 것인데, 살펴 생각하지 못하여 큰일을 너무 갑작스레 처리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이때부터 비와 동궁의 자애와 효성은 양편이 극진하였으니, 참으로 종사(宗社)의 끝없는 복이다.

삼가 살피건대, 성인(聖人) 이하로는 허물이 없을 수 없으니, 그 허물을 능히 고치기만 한다면 허물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임금이 비를 폐출한 것은 참으로 큰 허물이니, 뉘우쳐서 고치지 않았다면, 나라가 장차 설 수 없어서 천리(天理)·인심(人心)이 끝내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개 우리 나라 규문(閨門)의 예(禮)는 한(漢)·당(唐) 이후의 것으로 견주어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존비(尊卑)·상하(上下)의 명의(名義)가 현격하므로, 한때 임금의 위엄으로 바꾼 것이 있더라도 인심이 억울한 것은 갈수록 심하여지니, 천리가 있는 바를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임금은 영예(英睿)하고 과단(果睿)하기가 견줄 데 없는데, 어찌 처음부터 그것이 잘못인줄 스스로 몰랐겠는가? 그러므로 박태보(朴泰輔) 등을 죽일 때에 문득 중궁(中宮)을 위하여 절의(節義)를 세운다고 꾸짖었으니, 대개 이미 그 소행을 의롭게 여겨서 그런 것인데, 곧 고치지 못한 것은 성색(盛色)이 마음을 현혹하여 안에서 마음을 가리고 간사한 참소가 종용하여 밖에서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일 뿐이니, 이를테면 해의 청명(淸明)이 마침 구름·안개에 가렸던 것과 같다. 명지(明旨)가 내려진 것은 왕비를 복위시킨 날에 있었을지라도, 뉘우치는 마음이 일어난 것은 왕비를 폐출한 뒤에 이미 나타났으니, 아! 성대하다. 밝은 임금의 덕이 허물이 없는데로 나아간 것이 한(漢) 광무(光武)·송(宋) 인종(仁宗)·명(明) 선종(宣宗)의 짝이 아님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왕비가 정일(貞一)한 덕을 지키고 유가(柔嘉)의 법칙을 실천하며 환난(患難)에 처하고 궁액(窮厄)을 겪어도 옥도(玉度)에 끝내 흠이 없었으므로, 중곤(中壼)에 다시 임어(臨御)하여 한 나라의 어머니로서의 모범이 되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폐후(廢后)의 복위는 예전에 이런 예(禮)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이를 처리하는 방도에 실착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간신(奸臣)을 내치던 날에 곧 먼저 분부를 내려 장씨(張氏)를 폐하여 희빈(禧嬪)으로 삼고, 이어서 왕비를 옛 지위에 회복하여 별궁에서 공봉하도록 명하고 국구(國舅)의 작호를 내린 뒤에, 의문(儀文)119) 을 극진히 갖추어서 정전(正殿)에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는 마땅할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본제(本第)에서 서궁(西宮)으로 들어가 있다가 서궁에서 정전으로 들어갔고, 국구의 작호도 이미 도로 내렸으나, 아직도 복위의 명이 없었다. 그 사이에 상고하여 의거할 만한 의문이 없었으니, 임금이 추한(追恨)하는 것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4월 12일 기묘 6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장씨의 왕후 새수를 거두고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려 주게 하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국운(國運)이 안태(安泰)를 회복하여 중곤(中壼)이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장씨(張氏)의 왕후 새수(王后璽綬)를 거두고, 이어서 희빈(禧嬪)의 옛 작호를 내려 주고 세자(世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禮)는 폐(廢)하지 않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앞으로 있을 책례(冊禮) 때에 으레 고묘(告廟)하고 반교(頒敎)하는 예가 있겠으나, 지금 곤위(壼位)를 회복하고 폐치(廢置)한 일은 먼저 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일이 있으면 고하는 의리이다. 해조(該曹)를 시켜 거행하되 고묘문(告廟文) 가운데에 충언(忠言)을 살피지 못하고 양좌(良佐)를 잘못 의심한 뜻으로 말을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서문중(徐文重) 등이 상소하여 간쟁(諫爭)하려고, 박태상(朴泰尙) 등 여러 사람과 대궐 밖 돈녕부(敦寧府)에 모여 송광연(宋光淵)에게 글을 보내어 그가 오도록 요구하며 ‘9년·6년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것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가?’ 하였는데, 대개 중궁(中宮)이 어위(御位)한 것과 장씨(張氏)가 왕비로 있던 것은 세월이 오래고 짧은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세자가 있으므로 장씨가 도리어 중하다는 뜻이다. 송광연이 답하기를, ‘장씨를 위하여 절의(節義)를 세우는 것은 그대들만이 하라.’ 하였고 또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서문중 등이 드디어 그만두고 돌아갔다. 아아, 세도(世道)가 떨어지고 의리가 어두워져서, 뒷날의 화복(禍福)만을 생각하고 윤리를 지키는 항성(恒性)을 아주 잃어, 재집(宰執) 사이에서도 이런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으니, 3백 년 예의의 나라가 아! 위태롭구나.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4월 13일 경진 2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정원의 청에 따라 중곤의 복위 등의 일을 삼사의 신하들을 불러 의논케 하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어제 비망기(備忘記)로 부원군(府院君)의 작호(爵號)를 회복시키고, 나서 이어서 여련(輿輦) 등 의장(儀仗)을 갖추라고 명하고, 또 예관(禮官)을 시켜 길일(吉日)을 가려 거행하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며, 이어서 중곤(中壼)의 지위가 회복되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으니 장씨의 왕후 새수(王后璽綬)를 거두고 희빈(禧嬪)의 옛 작호(爵號)를 내리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신(臣)들은 근밀(近密)에 있으면서 문득 이 변절(變節)을 만났으므로 머리를 모으고 놀라 어쩔 줄 모르며 당황됨을 형용할 수 없었으나, 일이 갑자기 나왔으므로 상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입직(入直)한 신하가 미처 복주(覆奏)하지 못하고 해조(該曹)의 관원이 지레 받들어서, 막중하고 막대한 예(禮)가 장차 소략하게 거행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저 곤위(壼位)의 승출(陞黜)을 대신(大臣)·조정(朝廷)이 일제히 의논하게 하지 않고 한 종이의 비망(備忘)을 정원에 내려서 마치 보통 절목(節目)을 관례에 따라 봉행하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이 처변(處變)을 신중하게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신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신이 오기를 천천히 기다려 조용히 강구하여 정하여야 대례(大禮)에 결함이 없고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은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졌고 의절(儀節)이 이미 정하여졌다고 얽매이지 말고, 빨리 대신·재신(宰臣)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불러 묘당(廟堂)에 모여서 의논하여 지극히 마땅하게 되도록 힘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말이 마땅하니, 모여서 의논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중곤이 복위하고 장씨의 새수를 거두는 것은 대례이나, 명이 내려진 날에 뭇 신하가 기뻐하여 분주히 거행하였으니, 다시 기다릴 것이 있을 수 없는데, 정원의 신하들이 다만 그 일을 신중하게 하려고 묘당에 모여 의논하기를 청하기까지 한 것은 본디 글렀거니와, 갑작스러워 놀라고 어쩔 줄 몰랐다고 한 것은 말이 잘못되었으니, 의논하는 자가 한탄하였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4월 17일 갑신 1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영의정 남구만이 배명하니, 인견하고 위유하다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이 배명(拜命)하니, 임금이 명하여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가 지극하였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신(臣)은 묘당(廟堂)에서 모여 의논하라는 분부에 대하여 지나치다고 생각하오며 정원(政院)에서 아뢴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희빈(禧嬪)이 곤위(壼位)에 오르려 할 때라면 신하가 된 자로서는 예경(禮經)으로 쟁집(爭執)하는 것이 옳겠으나, 대저 명호(名號)가 이미 정하여지고 곤극(坤極)에 정위(正位)하게 되어서는 신하가 된 자는 또한 이미 군모(君母)로 섬겼던 것인데, 이제 또 도로 낮추는 변절(變節)이 있게 되었으니, 신하의 마음에 있어서는 기사년122) 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하의 의리도 또한 어찌 죽음으로 쟁집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마는, 이제 중궁 전하께서 이미 복위(復位)하셨는데, 희빈의 강호(降號)에 대하여 다시 다툰다면, 이는 또 한 나라에 두 존위(尊位)가 있는 것이 될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신하가 이미 복위를 경축하고 또 강호를 슬퍼하여 당황함을 형용할 수 없고 놀라와서 안정하지 못하고 또 감히 아뢸 바가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제 전하의 처분을 살피고 삼가는 도리에 흠결이 있는 것으로 여겨 도리어 신하들을 시켜 모여서 의논하게 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아들이 어머니를 의논하는 것이고 신하가 임금을 의논하는 것이 될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모여 의논하는 일은 중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경하여지고 마땅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잘못되는 것만을 볼 것이니 신하가 감히 할 수 없는 것일 뿐더러, 전하께서도 신하에게 하문하셔야 할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하고, 승지(承旨) 박태순(朴泰淳)이 말하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신들은 묘당에서도 참여하여 듣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다시 의논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데, 갑작스러울 즈음에 잘못하여 회의(會議) 두 자를 썼습니다. 신들이 곧 그 잘못을 깨닫고 본의를 드러내려 하였으나, 번거롭게 아뢰는 것이 두려워서 감히 다시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원에서 아뢴 것은 묘당에서 전교를 친히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일을 신중히 하려 하였을 뿐이다.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모여 의논하는 것을 멈추라."

하였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이제 희빈의 강호는 중궁 전하께서 복위하심으로 말미암아 두 왕비가 있을 수 없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죄가 있어서 폐출(廢黜)된 것과 같지 않으니, 아마도 분수에 따라 스스로 안정할 것이고, 궁위(宮闈) 사이는 화목하여 화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원에서 아뢴 데에 ‘곤위(壼位)의 승출(陞黜)’이라 하였는데, 낮춘 것[降]을 내친 것[黜]이라 한 것은 그 사실에 크게 어그러집니다. 지극히 공경스럽고 지극히 엄한 곳에 이토록 부당하게 말을 썼으므로, 승지(承旨)들은 무겁게 책벌(責罰)을 가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나, 갑자기 변절을 만나 당황할 즈음에 문자를 가리지 못한 것은 또한 매우 허물하기 어려우니,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고, 이어서 선온(宣醞)하고 파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한 나라에 두 존위(尊位)가 없다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誼)이다. 남구만은 정원에서 회의를 청한 것을 그르다 하고, 또 ‘중궁이 복위하였는데 희빈의 강호에 대하여 다시 쟁집하면 이는 한 나라에 두 존위가 있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두 존위가 없다는 의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복위를 경축하고 강호를 슬퍼한다. 오늘날 신하의 마음이 기사년과 무엇이 다르냐?’ 하고, 죽음으로 쟁집한다고까지 말하였으니, 그 두 존위가 없다는 의리가 어디 있는가? 두 존위가 없다는 것은 대개 신하가 군모(君母)에 대하여 이미 높이는 이가 있으면 다시 함께 높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다시 함께 높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면 강호는 참으로 옳은 것인데, 또 어찌 슬플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기사년의 일은 존비(尊卑)가 지위를 바꾸고 윤리가 차서를 잃은 것이므로, 임금에게 있어서는 덕을 잃은 것이고 뭇 신하에게 있어서는 매우 통탄한 것이며, 중궁이 복위하고 장씨가 강호된 것은 임금에게 있어서는 성덕(盛德)이고 뭇 신하에게 있어서는 큰 경사이므로, 감히 견주어 논할 수 없을 것인데, 남구만이 바야흐로 또한 당황하고 놀라고 죽음으로 쟁집할 의리가 있다고 한 것은 거의 신하의 예(禮)가 없는 것이다. 아아, 남구만은 조정이 자주 변하고 당화(黨禍)가 이어져서 정권을 잡던 대신이 전후하여 죽은 것을 친히 보았는데, 경시(更始)하는 처음을 당하여 자신이 상상(上相)이 되어 나와서 국정(國政)을 맡았으니, 문득 두려워하여 스스로 꾀하기를, ‘뒷날 민암(閔黯)의 무리가 다시 득지(得志)하면 나도 다시 죽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면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느냐?’ 하고, 드디어 민암 등의 뜻을 잃지 않는 것을 근본 삼았으므로, 처음 입시(入侍)하여 그 말이 이러하였으니, 그것이 도리어 상리(常理)에 어그러지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아주 깨닫지 못하였다. 이어서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상에서 신을 뒷날에 죽일 사람으로 지목합니다. 【아래에 보인다.】 임금의 덕을 위하여 권면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진심이 있는 곳은 끝내 스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때문에 장희재(張希載)가 국모(國母)를 해치려 꾀한 죄에 대하여서도 힘을 다하여 감싸서, 공론을 막아 물리치고 뭇사람의 마음을 떨쳐 거슬려 흉역(兇逆)의 우두머리를 용서하여 천지 사이에서 편히 쉬게 하였으니, 아! 또한 통탄스럽다. 서문중(徐文重)이 상소하자는 의논에 앞장서고 윤지완(尹趾完)이 공봉(供奉)하자는 논의를 하여 【아래에 보인다.】 스스로 민암의 무리에게 아첨하였으나, 서문중은 거칠고 윤지완은 어리석어 모두 학식이 없으므로 본디 매우 책망할 것도 못된다. 오직 남구만은 늙었는데도 기지가 있으며 혼자 정승을 맡았으므로 심계(心計)를 다하여 화복(禍福)의 기미를 헤아리고 취사(取捨) 사이를 경영하되 상세함을 다하여 유책(遺策)이 없었는데, 윤지완·서문중의 무리가 서로 앞다투어 추중(推重)하여 그 세력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임금의 뜻도 남구만이 말하는 것을 모두 따랐으므로, 마침내 당당한 성조(聖朝)에서 죄를 치고 법을 바루는 대의(大義)가 버려지고 막혀서 거행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이루 주벌(誅罰)할 수 있겠는가?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5월 11일 무신 4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예조에서 사복시에 소장된 장 희빈의 물건을 불지를 것을 건의하다

예조에서 사복시(司僕寺)에 소장된 장 희빈(張禧嬪)이 옛날에 타던 연(輦)과 말안장 등 여러 가지 도구들을 불사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승락하였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윤5월 2일 무진 3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민암·장희재·최산해 등을 심문하다. 남구만이 장희재의 극형을 반대하다

이때 국청(鞫廳)에서 김인(金寅)의 말을 가지고 여러 사람에게 심문하니, 김해성(金海成)의 처모(妻母) 봉영(奉英)은 그런 일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김해성은 말하기를,

"본래 구걸이나 하던 사람으로서 숙원(淑媛)에 봉작(封爵)된 뒤로부터 의식(衣食)의 도움을 받게 되니 감사하기 그지 없었는데, 진실로 무슨 마음으로 도리어 모해하려는 계획을 꾸몄겠습니까? 비록 윤희(尹憘) 등과 왕래는 하였지마는 여기 대해서는 일찍이 한 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었으며, 연전에 총융청(摠戎廳)의 은(銀) 20냥(兩)은 대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삼달(李三達)이 제용감(濟用監)의 면주(綿紬) 공물(貢物)을 주도록 허락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감(本監)의 서원(書員)인 김시휘(金時輝)가 면포(綿布) 1백 필(匹)을 주었습니다. 어찌 사실을 숨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의 아내 구월(九月)은 말하기를,

"숙원(淑媛)이 출산할 임시에 저의 의모(義母) 【바로 봉영(奉英)이다.】 가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이미 왕자(王子)를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숙원의 생신 때 또 반찬을 장만하여 올리려고 하였는데 궐내에서 저지하여 결국 올리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의논하기를,

"김해성·구월·봉영 등이 독(毒)을 넣었다는 이야기는 인정과 사리에 가깝지 않은 것입니다. 윤희가 이미 승복(承服)을 하지 않고 죽었는데, 다만 김인(金寅)의 말만 가지고 이러한 큰 죄를 씌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남급(濫及)할 단서가 있으므로 석방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다만 김해성은 이미 윤희와 왕래가 있었는데 그 장모[妻母]가 치장(治裝)하고 대궐에 들어간 것과 반찬을 준비하여 올리려고 하다가 못한 일 등을 김인이 저절로 알았을 리는 만무하며 김해성 윤희에게 말을 전하여 김인이 들은 것 같습니다. 그 경솔히 말한 죄를 해당 관서로 하여금 참작해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이성기(李成夔)가 오랫동안 승복하지 않으니, 국청에서 또 묻기를,

"이른바 ‘남인(南人)에서 끝난다.’는 설을 김인 이성기에게 들었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숨기지 말라."

하였다. 이성기가 그래도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며, 형신(刑訊)이 10차에 이르렀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죽었다. 또 김인의 말을 가지고 민암(閔黯)·이의징(李義徵)·장희재(張希載)·이삼달(李三達)·윤대남(尹大男) 등에게 물으니, 민암이 말하기를,

"적서(嫡庶)를 분명히 하시라는 설로써 주상에게 진언을 하였다는 것은 대개 노유(老儒)의 상담(常談)일 뿐입니다. 그저 보통으로 들었을 뿐이며 누구에게도 말을 옮긴 적이 없습니다. 만일 이것을 가지고 주상의 의중을 알아보려고 했다면 저도 대신의 지위에 있었는데, 노유의 상담을 가지고 한 번 진달하기가 무엇이 어렵기에 반드시 이현일(李玄逸)의 입을 빌렸겠습니까? 그리고 또 주상께서 ‘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숙원의 은총이 경중(輕重)에 무슨 관계가 있어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서인(西人)을 중용하여 급히 거사(擧事)하라.’고 했다는 것은 또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김인을 국문할 때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윤희 성호빈이 이와 같은 사람을 얻어서 그에게 고변(告變)하도록 하여 공훈을 희망하는 계획을 하려고 하였으니, 두 사람은 죽여야 옳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부리(府吏)들이 다 같이 들은 바입니다."

하였다. 이의징은 말하기를,

"이현일이 상주한 것은 애초에 저는 모르는 일이며 또한 성호빈과 이야기한 적도 없습니다. 지난 해에 윤희가 ‘김인이 피를 바르며 동맹(同盟)한 일’을 이야기하기에 제가 그 흉칙하게 속임수를 쓰는 것을 배척했더니, 윤희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성호빈이 또 김인의 일을 말하기에 제가 호되게 꾸짖고 또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성호빈이 그래도 서로 절교를 하지 않기에 제가 드디어 그 죄상을 세어서 군관(軍官)의 칭호를 삭탈했으니, 이것은 장교(將校)들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윤희 김원섭(金元燮)·민장도(閔章道)에게 보낸 편지에 제 이름을 들어서 말했다는 것도 역시 허황된 것입니다. 제가 진실로 김인·윤희·성호빈 등과 공모를 하였다면 김인이 스스로 당연히 찾아와서 고하였을 것이니, 어찌 윤희의 편지를 기다렸겠습니까? 손바닥을 치면서 맹세를 하였다는 것은 더욱이 허위입니다. 어찌 대장(大將)과 편장(褊將)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맹세할 수가 있겠습니까? 호조에서 좁쌀의 부족으로 인하여 백관(百官)의 반록(頒祿)과 군병(軍兵)의 급료를 3분의 1을 입쌀로 대체하였는데, 이것은 본래 호조 판서 오시복(吳始復)이 상주한 것이니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강도(江都)에 성을 축조하는 일은 본래 이성표(李成豹)를 보내려고 했었는데 성을 쌓는 시기가 늦추어지자 자연히 가지 못하게 된 것이며, 일부로 보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성호빈이 집을 사기 위하여 은(銀)을 빌려갔고 김원섭이 또 돈을 빌려갔는데, 스스로 그 이름을 쓰는 것을 거북하게 여겼기 때문에 성호빈의 이름을 빌려서 서명했습니다. 미포(米布)·면주(綿紬)를 장교들이 빌려가기도 하고 갚기도 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규례인데, 어찌 유독 성호빈만을 의심하여 허가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성호빈이 과연 김인에게 뇌물을 주었다 하더라도 저는 이미 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고, 또 김인과 절교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호빈을 축출하였으니 제가 그들과 공모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불을 보듯이 환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장희재는 말하기를,

"김해성이 간혹 왕래는 하였지만 어찌 일찍이 모의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일찍이 한 푼도 돈을 준 일이 없는데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윤희가 언젠가 저를 초대하기에 갔더니 윤희 이성기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이내 김인이 나타나서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처음에 때를 놓친 사람들과 모의했는데 탄로날까 두려워 이내 도망쳤으니, 만일 은화(銀貨)를 얻으면 그 정황을 탐지해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크게 꾸짖고서 이내 서로 만나지 않았는데, 어찌 김인이 말한 것과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민장도는 말하기를,

"윤희의 편지는 진실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저희 부친이 국청에서 보시고 와서 말하기를, ‘지난 해에 윤희 김인의 말을 나한테 와서 하기에 내가 배척하였는데 이제 또 너에게 편지를 보내 김인의 일을 발설하려 한다. 요망스러움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화를 당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호빈은 서로 아는 바 없으니 김인의 말은 더욱이 거짓입니다. 남인에서 끝난다는 설은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반드시 저를 죽이려고 하여 이런 계획을 한 것이니 저는 정말로 원통합니다."

하였다. 이성표는 말하기를,

"지난 해에 훈련 도감의 장관(將官)으로 있을 때에 축성 패장(築城牌將)이 일을 끝마치고는 장차 논공 행상을 한다는 것을 들고 주장(主將)에게 이를 요청하였는데, 주장이 가을쯤에 가서 보낸다고 말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삼달은 말하기를,

"윤희가 지리[地術]를 약간 알기 때문에 제가 조부모(祖父母)의 무덤을 이장(移葬)하기 위하여 그와 서로 사귀었으며, 제가 의술(醫術)을 조금 알기 때문에 윤희가 병이 났을 때 그에게 찾아가 문병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때 마침 김인이 거기 온 것을 보았는데, 윤희가 그 충의(忠義)가 쓸만하다고 말하였지만, 저는 그저 웃고 돌아왔으니, 어찌 다른 일에 대한 언급이 있었겠습니까? 김해성이 제용감(濟用監)의 공물(貢物) 면주(綿紬)에 관한 일을 저에게 말하였는데, 그것은 저와 유명천(柳命天)이 종형제(從兄弟)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말은 하였는데, 유명천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주도록 허락한 것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김인과 대질시키니 윤희의 집에서 서로 만났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삼달이 시인하였지만 서로 손을 잡고서 병판(兵判)과 훈장(訓將)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이삼달이 ‘이것은 나를 모함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윤대남은 말하기를,

"김인 장 대장(張大將)을 보기 위하여 저의 부친이 계신 곳에 자주 온다고 말했으나, 일찍이 조명(造命) 등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최선(崔宣)은 진실로 저희의 옛날 비부(婢夫)이기는 합니다만 일찍이 쫓아낸 적은 없습니다."

하였다. 최선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제가 언젠가 윤희의 행랑(行廊) 【노비(奴婢)들을 거처시키는 곳이다.】 에 갔더니 김인 김 병사(金兵使)의 첩자(妾子)라고 말하며 윤희의 집에 와서 윤희 부자(父子)와 같이 앉아 서인(西人)·남인(南人)의 이야기를 하며 수작을 하였습니다. 제가 윤희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이 허생(虛生) 【허소(虛疎)란 말과 같다.】 한 사람들이 모두 이 집에 모였는게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더니, 윤희 윤대남이 성내어 꾸짖으며 이내 저를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국방(安國坊)으로 이사하여 살았습니다."

하였다. 윤대남과 대질시켜 보니 최선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최선을 석방하였다. 국청에서 또 의금부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민암에게 질문했던 것을 가지고 민암을 국문하기를,

"김정열(金廷說)의 옥사(獄事)는 이미 단련(鍛鍊)하였는데, 또 함이완(咸以完)의 일을 가지고 입고(入告)하여 처음에는 의금부에서 추핵(推覈)하기를 요청하고, 또 급급히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며 군부(君父)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아 제멋대로 기만하여 반드시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기사년190) 의 교문(敎文) 가운데 ‘후사(後嗣)에게 화(禍)를 끼친다.’는 설은 신하된 사람으로서 감히 생각조차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또한 경오년191) 겨울에는 말을 조작해 궁중(宮中)에 유입(流入)시키기를, ‘왕비가 본격에 있으면서 귀인(貴人)과 서로 은(銀)을 거출하여 액정(掖庭)과 결탁한다.’ 하였고, 장희재의 언찰(諺札)에는 ‘민암을 가서 만나보니 그 말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너의 부자(父子)가 장희재와 친밀한 실상은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일이니 바른대로 고하고 숨기지 말라."

하였다. 민암이 대답하기를,

"제가 일찍이 사신(使臣)으로써 천리(千里) 먼 길에 차자(箚子)를 올려 김정열의 죄가 분명하지 않음을 말하였고 석방을 요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언제 단련(鍛鍊)을 하였습니까? 처음에 함이완의 일로 진달할 때에는 무뢰(無賴)한 사람이 은(銀)을 모아서 시국을 바꾸려는 것으로 말씀을 드렸었는데, 함이완 최격(崔格)이 마주해 나눈 대질의 내용이 궁궐과 의금부의 신하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입대(入對)하여 국문을 청하였을 뿐입니다. 공사(供辭)가 조신(朝臣)에게도 연루되었는데, 구일(具鎰)·이빈(李穦)·홍이도(洪以度) 같은 이는 모두 잡아오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한구(韓構)는 바로 한중혁(韓重爀)의 부친이고 이언순(李彦純)은 서찰(書札)이 이시도(李時棹)의 고한 바와 같았기 때문에 잡아오기도 하고 형벌을 청하기도 하였던 것이며,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들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폐비(廢妃)할 당시에는 제가 임금의 위엄을 무릅쓰고 자세히 간언(諫言)을 진언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씀드렸는데, 성지(聖旨)가 워낙 엄하시어 허둥지둥 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교문(敎文)을 지음에 있어서는 오로지 전후의 비망기(備忘記)의 내용을 채용하였습니다. ‘이해(貽害)’라는 두 글자는 바로 비망기 속에 들어있는 문자인 듯합니다. 제가 임금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여 임금을 과오가 없도록 보좌하지 못한 만큼 형편상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제 자신의 처지만을 돌아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임금의 말씀을 기술하고, 임금의 뜻을 펼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저의 본의(本意)를 진술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신하로서 황공 복죄(惶恐服罪)하는 뜻이 아니니 지금 무어라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사년·경오년 사이에 성상께서 ‘위와 아래가 서로 수양하라.’는 뜻으로 신하들을 책망하고 격려하시므로 궁부(宮府)의 안팎이 조용했습니다. 여항(閭巷)의 사이에 조그마한 잡음도 없어 귀에 들리는 바가 없는데, 입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민정중(閔鼎重)의 계청(啓請)이 한 달이 넘도록 그치지 않아 성상께서 누차에 걸쳐 전석(前席)에서 은밀히 물으시기에 저는 끝내 불가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생각있어서 그랬던 것이니 어찌 아무 까닭도 없이 말을 만들어내어 그 사이에 침핍(侵逼)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사년에 조정의 의논이 한(漢)나라 재상(宰相)이 두광국(竇廣國)192) 을 처우한 것으로써 장희재를 대우하고자 하였습니다. 윤심(尹深)과 제가 서로 이어져 병조를 관장함에 있어서 연이어 장희재 내승(內乘)193) 과 총부(摠府)의 낭관에 제수하였습니다. 장희재는 무인(武人)이니 병판(兵判)과 서로 친분을 갖고자 하는 것은 으레 그런 것입니다. 저는 지위(地位)가 언제나 남보다 앞서 있었으니, 장희재에게 무엇이 아쉬운 것이 있다고 그와 친밀히 지내기를 요구하겠으며, 또 무엇 때문에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감히 모멸할 수 없는 곳에 돌렸겠습니까? 관고(貫高)194) 의 모의를 장오(張敖)195) 는 사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좌되지 않았습니다. 장희재가 비록 저를 거론(擧論)하였지마는 저는 사실 모르는 일이니 저의 죄가 아닙니다."

하였다. 민장도(閔章道)의 공사(供辭)도 민암과 대체로 동일하였다. 언찰(諺札)의 일을 가지고 장희재에게 물으니 까마득해서 기억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점병(點兵)196)  선대(繕帒)197) 의 일을 가지고 이의징에게 물으니,

"그런 일이 없었으며 당초에는 임금이 능(陵)에 거둥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군기(軍器)를 수리하려고 하였는데 또 관무재(觀武才)198) 로 인해서 드디어 그만두고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장교(將校)들에게 물어보고 문서(文書)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장교 고정원(高廷元)에게 물어보니 대답이 이의징과 같았으므로, 드디어 고정원을 석방하였다. 국청에서 함이완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가 공훈을 바라서 밀고(密告)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민암이 어째서 밤늦게 사람을 시켜 찾아와서 달래고 위협하기를 극히 치밀하게 하였겠습니까? 민암이 문서를 보이며 말하기를, ‘네가 만일 여기에 의거해서 하지 않으면 마땅히 상주(上奏)해서 죽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내 저더러 ‘이담(李譚)을 아느냐?’고 묻기에 제가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민암이 드디어 그 이름을 문서에서 빼내었습니다. 또 묻기를, ‘네가 홍기주(洪箕疇)와 주야로 서로 만나니 감히 속여서는 안된다.’고 하기에 제가 홍기주를 못본 지가 지금 10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더니, 민암이 또 그 이름을 빼버렸습니다. 제가 이내 문서 한 부를 요청하여 공대(供對)의 자료로 삼겠다고 하였더니 민암이 허락하였습니다. 문서가 이미 완성되자 민암이 또 그 밑에다가 첩자(妾子)로 하여금 몇 줄을 덧붙여 쓰도록 하였는데, 민장도가 말하기를, ‘이것은 이 사람에게 줄 수 없다.’고 하면서 드디어 도로 가져갔습니다. 선대(繕帒)·점병(點兵)·회사(會射)에 관한 일은 모두 이시도(李時棹)에게 들었는데, 이시도가 민한국(閔翰國)의 말이라고 하면서 전해 주었습니다."

하였다. 또 최산해(崔山海)에게 물으니, 최산해가 말하기를,

"민장도 함이완이 환국(換局)의 계획에 참여하는 문제를 가지고 반드시 서로 만나보려고 했으므로 이 말을 함이완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민암 함이완을 초대하여 서로 만났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 저를 오라고 부르기에 들어갔더니 민장도와 그 서제(庶弟)가 함께 자리에 있었습니다. 민장도가 문서를 꺼내 보이니 함이완이 고쳐야 할 곳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한 사람은 일찍이 면식(面識)이 없고 한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고쳤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민암이 말하기를, ‘너에게 보도록 하는 것은 바로 그 잘못된 곳을 고치려는 것이다. 면질(面質)할 때에 만일 착오가 생기면 다만 너만 허소(虛疎)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상주(上奏)한 사람으로서 좋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내 함이완으로 하여금 공사(供辭)를 만들도록 하여 이미 그 문서를 주었다가 민장도가 도로 가져갔습니다. 민암이 처음에 제 이름을 거론(擧論)하려고 하기에 제가 잘 모르는 상황을 힘써 설명했더니 민암이 마침내 직접 제 이름을 문서 속에서 빼내었는데, 상주할 때는 다시 써 넣었으니 실로 헤아리지 못했던 일입니다."

하였다. 민장도와 대질시키니 민장도가 말하기를,

"최격(崔格) 등의 일은 민암이 처음에 김덕원(金德遠)·장한상(張漢相)에게 들었는데, 단지 최산해 함이완의 매부(妹夫)가 되는 까닭에 불러다 물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최산해를 석방시켰다. 이시도가 말하기를,

"장만춘(張萬春)이 저로 하여금 민장도를 만나보도록 하였고, 민장도는 저에게 최격(崔格) 등의 은화(銀貨)를 모아 시국을 바꾸려는 모의를 탐지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장만춘은 말하기를,

"3대장(大將)이 이담명(李聃命)·김원섭(金元燮)과 명년 봄에 대사(大事)를 모의해 거행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민장도와 대질시키니, 이시도가 ‘장만춘의 집과 민장도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민장도도 시인을 하였으나, 좋은 벼슬로 꾀어서 환국(換局)의 모의를 정찰해 알아내도록 하였다는 것과 한중혁 (韓重赫)·김춘택(金春澤) 등이 세 공주(公主)와 결탁하여 모의(謀議)를 탐사(探査)한 상황에 대해서는 민장도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국청에서 김인(金寅)의 말로써 이현일(李玄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왕자가 탄생할 때에 마침 경연(經筵)에서 모시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아뢰기를, ‘종사(螽斯)199) 의 경사는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나 춘궁(春宮)이 이미 자리가 결정되었으니 적서(嫡庶)의 분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옛적에 왕세자(王世子)가 탄생하면 나라의 임금이 그것을 보는 예절이 있었고, 서자(庶子)가 태어나면 그것을 묻는데도 또한 예절이 있었습니다.’ 하였더니 주상의 말씀이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고의(古義)에 근거하여 진달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감히 남의 지시와 사주(使嗾)를 받아 주상의 의사를 떠볼 수가 있겠습니까? 민암·이의징과 더러 서로 만나기는 하였지만 본래 친밀한 사이는 아닙니다. 서로 상의하였다고 하는 것은 실로 매우 원통합니다."

하였다. 김인이 ‘이현일이 일찍이 김원섭(金元燮)의 집에 모여 이 일을 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현일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대신(臺臣)의 논핵한 바를 인하여 또 기사년에 올린 상소 가운데 이른바 ‘중전의 도리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하늘에 끊었다.’는 것과 ‘방위(防衛)를 설시하여 규찰(糾察)을 신중히 하라’고 한 말에 대해 물으니, 이현일이 대답하기를,

"기사년 9월에 교지에 응하여 소(疏)를 올림에 있어 중궁 전하(宮中殿下)를 별궁(別宮)으로 옮겨 거처케 하시고 그 늠료(廩料)를 계속 보내드릴 것을 요망하려고 하였는데, 주상의 위엄이 그치지 않아 감히 까닭도 없이 강출(降黜)한 것으로써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중궁께서 주상의 마음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바가 있으셨는데 성상은 바로 중궁의 하늘이십니다. 그러므로 감히 ‘하늘에 대하여 끊었다.’는 등의 말로써 완곡하게 돌려서 부드러운 표현을 쓰게 되었던 것이니, 어찌 화심(禍心)을 갖고서 국모(國母)를 침범하는 말을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방위를 설시해서 규금(糾禁)을 신중히 하라.’고 했던 것은 중궁께서 거처하시는 여염집이 황량하고 허술한데 방위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경비를 조금 신중히 하고 체모(體貌)를 조금이나마 높여드리고자 했던 것으로서 이는 모두가 중궁 전하를 경건하고 신중하게 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민장도가 옥중에서 언서(諺書)로써 장희재와 내통하였는데, 수졸(守卒)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그것은 장희재를 사주(使嗾)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할 수 없다고 공대(供對)하라 했던 것인데 애걸(哀乞)하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두 사람에게 물으니, 민장도는 말하기를,

"장희재가 사형이 감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의 부친도 살아나실 방도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약간 말한 바가 있었을 뿐입니다."

하고, 장희재는 말하기를,

"민장도의 편지가 출현한 것은 저의 범죄사실을 진술해 올린 이후에 있었던 일이니, 그의 사주를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전후의 의단(疑端)을 가지고서 민장도를 형신(刑訊)하니,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이에 국청의 여러 신하들이 임금께 뵙기를 청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장희재를 옥체(獄體)로써 논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형벌을 청해야 합니다. 다만, 장희재의 언문 편지는 주상께 그가 직접 드린 것이 아니고 반드시 경유하여 전달한 사람이 있을 터인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장희재를 심문한다면 그 형세가 어찌 희빈(禧嬪)에게 미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희빈의 오늘의 심정은 사람의 일반적인 정리로 추측해 본다면 분명 황공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동기(同氣)간 되는 사람이 감옥에서 형벌을 받고 사건이 자신에게까지 연류되어진다면 원앙(袁盎)의 무로(霧露)의 염려200) 가 어찌 꼭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희빈이 만일 불안하면 왕세자는 또한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기사년 이후로 존비(尊卑)의 위치가 바뀌어 인심이 오랫동안 울적해 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성상께서 깨달으시어 명분(名分)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종전의 온갖 일은 다 논의할 것이 없고, 단지 중궁 전하는 규목(樛木)201) 의 은혜가 있고 희빈 소성(小星)202) 의 예절을 다하기만을 기원하오며, 왕세자는 중궁에 대해 또한 한(漢)나라 장제(章帝) 마태후(馬太后)203) 에게 한 것처럼 하고, 송(宋)나라 인종(仁宗) 유 태후(劉太后)204) 에게 한 것처럼 하는 것이 바로 신자(臣子)들이 밤낮으로 바라는 바이옵니다. 지금 장희재로 인해서 불안을 초래한다면 일후에 궁궐의 안에 또한 어찌 감히 그 화평을 꼭 보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장희재에 대해서 법대로 할 것을 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이는 말하기를, ‘장희재가 저지른 죄는 바로 극죄(極罪)인데, 왕세자의 지친(至親)이라고 해서 용서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법을 준수하자는 논의이니, 신이 어찌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만, 국가를 위한 깊은 생각과 지나친 염려는 여기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장희재는 언문 편지 일에 대하여 누차 심문을 하여도 끝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민장도의 내통한 편지로써 살펴본다면, 분명 민장도 부자가 애걸하며 유인하여 그런 것인데 역시 그가 자백한 뒤에 파급되는 바 있을 것을 염려하는 듯합니다. 장희재가 비록 무식하다고는 하지만 그도 역시 심장(心膓)이 있는데 어찌 전연 생각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암 부자(父子)의 죄는 백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다. 더구나 장희재와 내통한 편지가 발견되어 민장도가 지금 형벌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않는 것인가?"

하였다. 남구만이 장희재의 일로써 여러 신하들에게 문의할 것을 청하니 판의금(判義禁) 신여철(申汝哲)이 아뢰기를,

"옥사의 시말(始末)은 모두 장희재에게 관계되어 있으니, 왕세자에게 의친(議親)이 되는 것은 사사로운 것이요 깊이 캐물어 법을 바로잡는 것은 공적인 일입니다. 신은 법령을 준수(遵守)하는 이외에 다른 논의를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지의금(知義禁) 이세백(李世白)은 아뢰기를,

"왕세자의 지친(至親)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주상으로부터 이미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하였다는 하교가 계셨으니 그 경중(輕重)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장령(掌令) 김홍정(金弘楨)·정언(正言) 유집일(兪集一)은 모두 형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승지 김구(金構)는 아뢰기를,

"죄인이 자백을 해야 바야흐로 죄상에 따라 처단할 수가 있는 것인데, 자백을 받아내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어떻게 경솔히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집일은 아뢰기를,

"민암 부자(父子)를 심문하려면 당연히 먼저 장희재를 심문하여야 하니, 장희재를 심문하지 않고서 단지 민암 부자만 심문하는 것은 아무래도 결론을 얻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령을 준수(遵守)해야 된다는 말을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대신이 국가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먼 장래를 염려하니, 나도 또한 이미 참작해 처리하려고 한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세자에게 종사(宗社) 만년(萬年)의 책임을 부여하시게 되니, 희빈(屭嬪)을 돌보지 않으실 수가 없으십니다. 지금 만일 전연 위안(慰安)함이 없는 의사로써 아래에 보이신다면, 궁중의 사람들도 반드시 엄경(嚴敬)하는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니, 앞으로 죄과(罪過)가 층층으로 나와 또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이 지경에 이른다면 전하께서 또한 어떻게 잘 처리하시겠습니까? 제왕가(帝王家)에는 의례 이런 염려가 있기 때문에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태자(太子)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는 바가 있자, 이필(李泌)이 좌우 근신들이 알도록 하지 말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이러한 일에 대하여 어찌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아 세밀히 방비하고 미리 대처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전하께서 등극하신 지 14, 5년만에 세자가 비로소 탄생하였으니 전하의 신하된 사람이 누군들 기뻐 뛰고 우러러 떠받드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원자(元子)의 정호(定號)를 너무 성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더러는 논란하는 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의(本意)는 성실하여 딴 뜻이 없었는데 한쪽 사람으로서 남을 참소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 이에 세자에게는 저들만이 홀로 마음이 쏠려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망측(罔測)한 화가 기사년 5월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만약 세자가 불안해하는 바가 있는데도 미리 대책을 세우지 못해 뒷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을 초래하게 된다면 한쪽의 사람들이 말한 것과 방불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또 오늘날 신하된 사람이 마땅히 사생(死生)·화복(禍福)을 돌아보지 않고 정성을 다해 힘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말한 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하고, 이내 장희재를 전일 판결한 비답에 따라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남구만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일찍이 차자(箚子)를 올려서 아뢰기를, ‘민암이 마땅히 오시수(吳始壽)의 고사(故事)에 의거해서 형벌을 시행할 수는 없다.’고 하였는데 나의 뜻도 결정된 바 있다. 모르긴 하지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가의(賈誼)의 반검(盤劒)의 설205) 은 본래 주발(周勃)을 위해 말한 것이니,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허적(許積)·오시수(吳始壽)의 사건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진언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정이 모두 장희재를 법대로 처단하지 못하는 데 대하여 분개하고 있는데, 민암에 대해서조차 또 형신(刑訊)을 가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여러 사람의 의논을 억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도 본래 그러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김인·이현일·민암·이의징 등 여러 사람은 신이 혼자서 조사 심문하였는데 지금껏 의주(議奏)하지 않는 것은 의금부의 여러 신하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윤5월 22일 무자 2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장희재가 언서 내용이 민암 부자에게서 나온 것을 들어 자신을 변명하다

이때에 승정원에서 기주(記注)를 맡은 자가 남구만이 입대(入對)했을 때 장희재를 논핵한 일을 기록해 국청(鞫廳)에 내려보냈는데, 알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남구만이 그전 말로 임금에게 나아가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을 지어낸 자는 민암(閔黯)이고 말을 전한 자는 장희재이니 경중(輕重)에 구별이 있다. 이제 비록 바른대로 말하더라도 조가(朝家)에서 죽음을 면제해 주는 뜻이야 전후가 어찌 다르겠는가? 이런 뜻으로 묻도록 하라."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장희재에게 그렇게 묻자 장희재가 비로소 대답하기를,

"언젠가 민암 부자를 찾아가 보았는데, 그때에 민종도(閔宗道)도 자리에 있어, 김정열(金廷說)의 옥사(獄事)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민종도가 말하기를, ‘항간에 떠도는 말로는 은화(銀貨)를 모아 환국(換局)을 꾀하는 자가 있는데, 폐비(廢妃)와 귀인(貴人)도 은화를 냈다고 한다.’ 하자, 민암의 부자가 하는 말이 ‘폐비나 귀인이 은화를 내려고 한다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미 이런 말을 지어낸 사람이 있으리라 의심하였고 희빈(禧嬪)이 항시 나라에 옥사(獄事)가 있을까 걱정하여 가끔 편지로 물어왔으므로, 과연 민암에게서 들은대로 써서 궁중에다 들여보냈습니다. 그것은 희빈에게 비록 이런 말을 듣더라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조심을 시킨 것뿐이었고, 실제로 한마디 말도 침핍(侵逼)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판결하기를,

"장희재의 말은 언서(諺書)의 내용과 다른 것이 없다. 당초에 판부(判付)하기를, ‘그 말을 전한 것이 장희재의 죄이니 「모해국모(謀害國母)」란 네 글자는 꼭 들어맞는 데 부족함이 있다.’고 했는데, 이제 만약 민암의 부자처럼 말을 만들어 모해한 자와 같이 논죄한다면 그 정상(情狀)을 참작함이 못된다. 감사(減死)하여 위리 안치(圍籬安置)토록 하라."

하였다. 헌납 윤성교(尹誠敎)와 정언 이정겸(李廷謙)이 논핵하기를,

"언서(諺書)의 내용이 비록 민암 등이 지어낸 데서 나왔다 하더라도 장희재가 또한 어찌 감히 이처럼 차마 듣거나 말할 수 없는 말을 글로 써서 예람(睿覽)에까지 오르게 한단 말입니까? 또 전하께서 당초에는 국모(國母)를 모해한 것이 장희재의 죄라고 하시고서는, 이제 와서 춘궁(春宮)246) 의 사속(私屬)이라 하여 갑자가 구별을 하시니, 아마도 춘궁의 효심이 불안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을 줄로 압니다. 이제 이미 사실대로 자백한 뒤에도 왕법을 시원하게 바로잡지 않으시면 이륜(彛倫)이 어두워지고 여정(輿情)이 답답하게 여길 것입니다. 청컨대 법대로 처단을 하소서."

하고, 장령 심극(沈極)도 또한 논핵했지만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을 이미 알렸으니 결단코 윤종(允從)할 수 없다."

하였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윤5월 27일 계사 2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우의정 윤지완이 희빈의 예우에 대하여 논하다. 적서의 구분을 들어 희빈의 예우를 논한 사론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이 성밖에 가마를 타고 와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남구만이 조정에 나올 당시에 즉시 글월을 보내 곤전(坤殿)께서 복위하심을 축하하고, 이어 말하기를, ‘희빈(禧嬪)은 원량(元良)을 낳아 길렀고, 여러 신하들도 여러 해 동안 모후(母后)로 섬겼으니, 이제 나라에 이존(二尊)이 있을 수 없다 하여 옛 지위(地位)로 내려가 있게 했지만 예우(禮遇)하는 도리와 공봉(供奉)하는 절차는 마땅히 전대의 일을 강구(講求)하여 모방해 행해야만 신자(臣子)의 도리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고 했는데, 영상(領相)이 오랫동안 이런 뜻을 발설하지 않은 것은, 신이 반드시 서문중(徐文重)이 당한 것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비방을 들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듣건대 서문중이 상소하려고 했던 내용은 다만 대신과 예관(禮官)들을 불러 절목(節目)을 논의하여 정하자는 것이었는데 미워하는 자들이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조작해내어 망측한 지경에까지 몰아넣었고, 스스로 그를 구제하겠다고 하는 자들도 오히려 무식하다고 지척(指斥)을 했으니, 서문중의 사정은 참으로 민망합니다. 신의 편지 뜻은 서문중의 소(疏)보다는 배나 중(重)한데 어찌 감히 영상(領相)이 덮어준 것을 다행으로 알고 조용히 자수(自首)하지 않고서 무치(無恥)한 비부(鄙夫)처럼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 타이르기를,

"경(卿)의 심사(心事)는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인(聖人)이 예절(禮節)을 제정할 적에 적처(嫡妻)와 첩(妾)을 군주(君主)와 신하처럼 같이하여 혐의(嫌疑)를 분별하고 등분(等分)을 신중히 하여 상하의 서열(序列)를 밝히고 존비(尊卑)의 지위(地位)를 정하여 거실(居室)이며 음식의 작은 것에서부터 명호(名號)나 의물(儀物)의 드러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법도가 있어 혹시라도 분수에 어김이 없도록 하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제왕이 흔히 후궁(後宮)의 자식으로써 적사(嫡嗣)를 삼아 정통(正統)을 계승시켰으나, 그 모친은 그대로 후궁으로 있어 여러 첩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어찌 일찍이 사자(嗣子) 때문에 그 예절(禮節)을 유독 다르게 한 일이 있었던가? 역사의 기록에서 상고해보면 역대의 군주가 혹시 자기의 소생모(所生母)란 이유로써 높이 받들려는 의논이 있게 되면 비록 그 일이 왕후와 나란히 서고 적처(嫡處)와 맞먹는 것이 아니더라도, 신하된 사람들은 문득 따르려 하지 않고 예제(禮制)를 들어 간쟁(諫爭)을 하며 혹시라도 여러 첩들과 다르게 할까 두려워하였다. 그 군주가 그 모친을 위하여 하려고 해도 그 신하가 오히려 다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 군주가 본시 후궁에게 베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그 신하가 도리어 ‘병후필적(並后匹嫡)’의 일로 유도했다면 그 죄가 더욱 어떠하겠는가? 이제 우리 왕비 전하께서 위호(位號)를 회복하여 바로잡았고 장씨(張氏)는 후궁으로 물러나 있게 되었으니, 6년 동안 무너졌던 이륜(彛倫)이 다시 펴졌고, 온 세상의 오랫동안 울적(鬱積)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위안하였으니 신중해야 할 것이 등분(等分)이요, 분별해야 할 것이 혐의(嫌疑)인데, 남구만은 ‘오늘의 일이 기사년의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고, 그래서 권대운(權大運)의 무리가 혼연히 일어나 ‘장씨(張氏)가 비록 강호(降號)가 되었어도 또한 국모(國母)이다.’ 하였고, 민암(閔黯)의 공사(供辭)에도 ‘한 모후(母后)를 위하여 한 모후를 해치겠느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윤지완(尹趾完)은 군신(君臣)과 적첩(嫡妾)의 의리를 구명(究明)하지도 않고서 감히 이런 상소를 올려 권대운·민암의 여러 당인(黨人)들에게 스스로 좋게 보이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장차 혐의가 분별되지 못하게 하고 등분(等分)을 살피지 못하게 하며, 상하가 밝혀지지 못하게 하고 존비가 정해지지 못하게 하여 예경(禮經)의 큰 한계(限界)를 무너뜨리고 말 작정인 것이다. 아! 통탄스럽도다.

이 뒤에 박만정(朴萬鼎)이란 자가 또 윤지완을 이어 상소했는데 더욱 도리에 어긋났으므로 온 세상에서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숙종실록 27권, 숙종 20년 7월 19일 을유 3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박세채가 입시하여 붕당을 경계하는 교서를 올리고 장희재 처리·현량의 천거 등을 건의하다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했다. 박세채가 붕당(朋黨)을 경계하는 교서(敎書)를 제진(製進)하니, 임금이 명백하고 적실하다고 칭찬했다. 이어 박세채가 당론(黨論)의 원위(源委)를 하나하나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이 글은 비록 문구(文具)에 가까운 것 같기는 합니다마는,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가지시고 용사(用舍)와 출척(黜陟)을 조금도 균평(均平)하지 않은 것이 없이 하시되, 이런 마음을 잡아 놓치지 마시고 오랫동안 해 가신다면 군신(群臣)들이 저절로 감동되고 편당의 풍습이 스스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박세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마음에 통쾌하게 결단하시고 중궁(中宮)을 복위(復位)하셨으니, 지난날의 조신(朝臣) 중에 혹시라도 중궁을 모함하는 짓을 한 사람이 있다면 의리상 마땅히 토죄(討罪)해야 할 것인데,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했었다는 말이 마침 성상의 분부 속에서 나왔습니다. 대저 위를 모해하려 한 역적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들과 같은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중궁께서 세자(世子)께 대하시기를 한(漢)나라의 마 황후(馬皇后) 장제(章帝)에게 송(宋)나라의 유 황후(劉皇后) 인종(仁宗)에게 한 것처럼 하시어,363) 지극한 인정이 진실로 차이가 없으십니다. 세자께서 영예(英睿)하고 숙성(夙成)하신데, 어찌 대간(臺諫)과 신민들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영상(領相)이 매양, ‘희적(希賊)364) 이 죽게 되면 희빈(禧嬪)이 불안하고 희빈이 불안하면 세자가 또한 불안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국가를 위해 깊이 근심하고 지나치게 염려했음은 여러 신하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마는, 의리로 말한다면 극진하지 못한 듯합니다. 국모를 모해하려 한 자가 죽지 않음을 불안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사척(私戚)들이 죄를 입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으니, 이는 세자에게 올바른 도리를 바라지 아니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영상에게 유시(諭示)하시기를, ‘천하의 일이란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있어, 혹은 앞날에 반드시 장차 창황(蒼黃)하여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참작하여 처리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신은 그윽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이 희적을 용서하려고 하여, 뒷날 처리하기 어렵게 될 것을 들어 말하였음은 진실로 충성을 다하려한 뜻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마땅히 분부하시기를, ‘설사 처리하기 어려울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합당하지 않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과히 근심할 것 없다.’고 하신다면, 대신이 또한 우러러보며 믿고서 근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대신이 처리하기 어려움을 말하자, 성상께서 답하신 말씀도 또한 그럴 것이라고 하셨으니,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온 나라 신민들의 주인이 되시어, 안으로는 궁중에서 밖으로는 신료(臣僚)들에게까지 진퇴(進退)를 뜻대로 하시니, 어찌 앞날에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비록 혹 있게 된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궁리(窮理)하고 수신(修身)한 학문을 가지고 처리하시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길래 미리 창황하게 어찌할 수 없을 것을 염려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성상의 마음에 또한 주장(主張)하시지 못할 바가 있어, 마치 딴 사람의 일을 말하듯이 하신 것이니, 방해가 될 것은 마땅히 어떠한 일이겠습니까? 만일 전하께서 성심(聖心)을 확고하게 정하시어 아래로 국가의 대체(大體)를 살펴보시고서, 수상(首相)에게 전날 실언(失言)했다는 뜻으로 깨우치고 이어 대간(臺諫)이 논계(論啓)한 대로 따르신다면, 중궁(中宮)·세자(世子)·희빈(禧嬪)이 모두 편하게 될 길이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의 말은 참으로 좋은 말이다. 다만 천하의 일이란 처음에 조심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는 법이다. 내가 장희재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 중시(重視)해야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또 장희재가 민암(閔黯)의 말을 듣고서 언서(諺書)를 만든 것이므로 조언(造言)을 한 자와는 차이가 있다."

하였다. 박세채가 이어 근독(謹獨)의 뜻을 자못 누누이 전달하고, 또 희로(喜怒)의 폭발(暴發)을 들어 경계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며 받아들였다. 또 아뢰기를,

"임영(林泳)은 학식과 인품이 조정 진신(搢紳)들 중에서 뛰어난데 병으로 일을 맡지 못하고 있고, 아망(雅望)이 있는 신익상(申翼相), 학식이 있는 김창협(金昌協), 문학(文學)에 능한 이여(李畬), 효우(孝友)가 있는 정시한(丁時翰), 재행(才行)이 있는 이동표(李東標), 식견(識見)이 있는 송광연(宋光淵), 간직(簡直)한 신양(申懹)이 모두 조정에 있지 않으니, 같이 권장하고 임용(任用)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또 자주 어사(御史)를 내보내 염문(廉問)하고, 또한 효종(孝宗)의 유의(遺意)를 본받아 군사(軍事)를 잘 살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마지막에는 또 정부(政府)·육조(六曹)·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태학(太學)·경조(京兆)와 팔도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경학(經學)에 밝고 행신이 닦아진 선비를 추천하게 하여, 초사(初仕)를 엄선(嚴選)하고 수령(守令)의 임용(任用)을 신중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박세채가 아뢴 대로 이미 초사(初仕)를 가리고 수령도 가리게 하려면, 마땅히 이미 6품에 올랐거나 일찍이 천장(薦章)에 들어 있어 조정에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추천하지 말도록 하고, 모든 관사(官司)의 장관(長官)은 각기 두 사람씩 추천하게 하고, 정부에서는 삼공(三公) 및 동서벽(東西壁)이 【찬성(贊成)과 참찬(參贊)으로 동서벽을 삼는다.】 모두 추천하게 하며, 외방(外方)의 여러 도(道) 중에 삼남(三南)은 본래 인재(人才)의 부고(府庫)라는 곳이니, 혹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수에 구애받지 말도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천목(薦目)이 ‘경명행수(經明行修)’이므로 반드시 그만한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이외에 다시 ‘경술정통(經術精通)’과 ‘행의순고(行誼純固)’로 두 가지의 천목을 만들어 겸하여 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숙종실록 27권, 숙종 20년 9월 13일 무인 2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문수 산성의 배속·희빈 장씨 예우 등을 논의하다. 어영 대장 신여철의 파직에 대한 사론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문수산(文殊山)에 성 쌓는 일이 이미 끝났다.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총융사(摠戎使)에 전속(專屬)시키고, 통진(通津)을 총융사의 관할 밑에 두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통진 관원들을 성 안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병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좁아서 용신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남구만이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이 산은 물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했는데, 성을 이미 쌓고 나서 천맥(泉脈)이 자못 많아지기는 했지만 땅은 진실로 협착합니다. 그러나 단지 관원이 있을 곳만 설치하는 것도 또한 하나의 방법이니, 총융사를 보내어 가서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그뒤에 총융사 이기하(李基夏)가 명을 받고 가서 보고 돌아와 아뢰기를,

"성 안에 단지 두 군데의 골[洞]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매우 작아 관거(官居)는 옮길 수 없을 듯합니다. 할 수 없다면 먼저 창고(倉庫)를 옮기고 이어 객사(客舍)를 【군현(郡縣)에서 사명(使命)을 띠고 온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설치하여 앞날의 주필(駐蹕)에 대비하도록 하고, 민가(民家)는 성 밖 북편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윤지선이 아뢰기를,

"진실로 관거를 옮겨 놓으려고 한다면 어찌 용납할 수 없겠습니까? 성의 밖은 지세(地勢)가 평탄하여 또한 백성들을 거주하게 할 만했습니다."

하고, 남구만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조사석(趙師錫)이 이 성을 쌓으려고 했고, 윤지완(尹趾完)이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되었을 적에 또한 구획(區劃)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윤지선은 관거(官居)를 옮겨 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기하는 옮길 수 없다고 하니,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성을 쌓은 본 뜻은 단지 적인(敵人)들이 점거하여 내려다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니, 땅을 넓게 차지하여 한갓 인력(人力)을 허비할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굳게 지키려고 한다면 관거는 의당 옮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다. 올해는 비록 옮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용히 해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이를 총융사에게 전속시키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강화(江華)를 보호하고자 하였으니, 마땅히 강화에 전속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강화에서 구관(句管)하도록 윤허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통진(通津)은 이 산성(山城)의 주인이니, 마땅히 고을 명칭을 승격(陞格)시켜 중요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현(縣)을 올려 부(府)로 만들고, 무신(武臣) 중에 품계(品階)가 통정 대부(通政大夫)인 사람을 가려 보내는 것을 일정한 규례로 삼으라."

하였다. 비국에서 이 일을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진주(閔鎭周)에게 물으니, 민진주가 아뢰기를,

"강화는 구관하는 데가 너무 많아 다시 이 성까지 총관(摠管)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주청(奏請)하기를,

"군문(軍門)에서는 기계(器械)를 관장하고 강화에서는 양향(量餉)429) 을 주관하게 하며, 통진 부사(通津府使)가 그 지휘를 받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조치하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의논이 결정되지 않아 빈 성만 우뚝하고, 마침내 한 사람의 백성도 살지 않고 하나의 물건을 저장하지도 않았으므로, 식견있는 사람들이 한탄했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일전에 박만정(朴萬鼎)이 상소하여, 희빈(禧嬪)을 특이한 예(禮)로 대우하고 또한 따로 궁호(宮號)를 내걸기 청하였는데, 그의 한 말이 지극히 미안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처음 조정에 나왔을 때 우상(右相)이 신에게 글발을 보냈는데 박만정의 말과 비슷하였습니다. 그 뜻이 대개 조가(朝家)에서 새로 폐치(廢置)는 했지만 군하(群下)들의 마음에는 의아스러워하는 생각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전대의 역사에 있는 것처럼 딴 궁(宮)에 폐치(廢置)했다면 법대로 공봉(供奉)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 희빈은 일찍이 홀로 있었던 일이 없고 함께 한 궁 안에 있으면서 왕후(王后)보다는 1등을 내렸을 뿐이니, 다시 특이한 예모를 차린다면 왕후와 함께 존숭함이 똑같아질 염려가 있을 것이니, 또한 어찌 따로 궁 이름을 내걸 것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논을 만약 통렬하게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롭고 의심스럽게 되고 국가의 체모가 손상될 것이니, 마땅히 군하(群下)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상의 사서(私書)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박만정은 처분이 이미 결정된 뒤에 그런 말을 하였으니, 자못 매우 옳지 못하다. 다시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중률(重律)로 논죄(論罪)할 것이니, 유시(諭示)를 반포하라."

하였다. 윤지선 남구만이 아뢰기를,

"제도(諸道)에서 무예(武藝)를 몰기(沒技)430) 로 계문(啓聞)하고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한 것은 모두 허위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 법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바야흐로 훈련 도감(訓鍊都監)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사 중에 글씨 잘쓰는 사람이 하나 있기에 신이 서자(書字)의 【이례(吏隸)의 명칭이다.】 소임으로 차출(差出)했더니, 대장 신여철(申汝哲)이 ‘그 사람이 사사로이 그 소임을 도모한 것이다.’고 하며, 즉시 그를 강등(降等)시켜 보인(保人)으로 삼았습니다. 신여철이 진실로 옳지 않게 여겼다면 신에게 말을 해야 옳을 것인데, 어찌 이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정승의 직책은 백관(百官)을 진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미 심하게 모욕을 받았으니, 신이 감히 사직합니다."

하니, 임금이 힘써 위로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 신여철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진실로 신여철의 죄를 청하고 싶었지만 자책하기에 겨를이 없었기에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성상께서 신의 몸을 배척하여 물리치신다 할지라도 신여철을 또한 그대로 대장으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저 군문(軍門)에 도제거(都制擧)를 둔 것은 곧 불어지권(不御之權)431) 을 맡기기 위한 것인데, 대장이 도제거를 이처럼 능멸했으니 아마도 체통이 설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신여철을 파직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상신(相臣)이 모든 군문을 거느림은 진실로 불어지권(不御之權)을 맡기기 위한 것으로서, 남구만이 말한 바와 같은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찌 일찍이 졸오(卒伍)에게 사정을 두며 대장을 위협하여 반드시 말을 듣게 하도록 한 것이겠는가? 마침내는 또한 자신의 말이 먹혀들지 않는 데 화를 내어 그만 대장의 파직을 청하고도 도리어 기강(紀綱)을 핑계로 삼았으니, 대체(大體)를 알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세선(李世選)이 아뢰기를,

"어영(御營)의 재력이 성 쌓기에 고갈되었으니, 청컨대, 돈을 주조(鑄造)하여 보충시켜 주소서."

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호조와 상평청(常平廳)에서 주조하는 돈도 또한 외람된 일이 많아 걱정이므로 다시 군문(軍門)에도 허락하기는 진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재력이 고갈된 것도 염려스러우니 여섯 달을 한도로 주조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숙종실록 28권, 숙종 21년 3월 30일 신묘 3번째기사 1695년 청 강희(康熙) 34년

영돈녕부사 윤지완을 돈유하다

승지를 보내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완(尹趾完)을 돈유(敦諭)하였으나, 윤지완이 병으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윤지완은 재지(才智)와 국량(局量)이 있어 내외(內外)의 관직에 두루 시험하였더니, 모두 성적(聲績)이 있었다. 다만 본래 학식(學識)이 모자라고 성품이 또 고집스러웠으므로, 스스로 당론(黨論)에 오염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대부(士大夫)로서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혹시 뒷날 나라를 그르칠까 우려하였다. 갑술년113) 에 곤성(坤聖)이 복위(復位)되었으나, 시골에서 꼼짝 않고 있으면서 달려와 축하를 드리는 일이 없었다. 임금이 발탁하여 삼사(三事)114) 에 두고 간절히 불러 마지 않으니, 비로소 명에 응하여 입대(入對)하였으나 끝내 축하드리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도리어 민암(閔黯)의 죄목(罪目) 가운데서 ‘무옥을 일으켰다.[起誣獄]’는 세 글자를 삭제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한 통의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희빈(禧嬪)은 세자[元良]를 탄생해 양육하였고, 신하와 백성들이 국모(國母)로 섬긴 지가 여러 해입니다. 지금 마땅히 널리 고사(古事)를 고증하여 특별한 대우를 더해야 할 것이며, 보통 비빈(妃嬪)으로 처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논의가 끝내 시행되지는 않았다. 남구만(南九萬)이 유소(儒疏)에 배척당하여 성(城)을 나갈 즈음에, 윤지완이 자신도 남구만과 의견이 서로 동일하다고 하며, 또한 곧바로 향리(鄕里)로 돌아갔었다. 그랬다가 뒤에 다시 조정에 돌아와 또 차자를 올려 권대운(權大運)의 석방을 청하였는데, 사간(司諫) 임원구(任元耉)가 상소하여 준엄하게 배척하니, 윤지완이 성내어 향리로 돌아갔다. 임금이 누차 돈독하게 불렀지만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

 

 

 

숙종실록 28권, 숙종 21년 5월 11일 임신 3번째기사 1695년 청 강희(康熙) 34년

우부승지 박태순이 물의 때문에 체직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태순(朴泰淳)이 물의(物議) 때문에 패초(牌招)를 어기고 체직(遞職)되어 취리(就理)하였다. 박태순은 바로 박태보(朴泰輔)의 종형(從兄)이다. 기사년156)  박태보가 상장(上章)하던 날 박태순이 새로 홍천 현감(洪川縣監)이 되어 미처 사폐(辭陛)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또한 따라서 참여하였다. 그런데 박태보가 장형(杖刑)을 당하여 죽게 되자, 일을 같이했던 다른 여러 사람들은 모두 벼슬을 버렸으나, 유독 박태순만은 의기양양하게 홍천읍(洪川邑)에 부임하였다. 뒤에는 또 장희재(張希載)를 아첨하여 섬겼고, 그가 정권을 잡자, 여러 소인들이 누차 제수한 벼슬을 모두 사양하지 않았으며, 춘방(春坊)157) 의 벼슬에까지 임명되었다. 최후에는 외직으로 나가서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는데, 장희재가 총융사(摠戎使)로서 순찰하는 길에 남양부에 들르니, 박태순이 동헌(東軒) 【바로 수재(守宰)가 사무를 보는 곳이다.】 에서 맞아들이며 사도(使道) 【바로 관하(管下)에서 주장(主將)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라 칭하며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였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중에 서로 깊은 정이 곡진하니 장희재의 장교(將校)들까지도 모두 침뱉으며 비루하게 여기었다. 갑술년158) 초기에 이르러 승지(承旨)로 발탁하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정에 만일 격탁 양청(激濁揚淸)159) 의 조처가 있었다면, 이동욱(李東郁)·박태순(朴泰淳)·오도일(吳道一)·유성운(柳成運)·이사상(李師尙)과 같이 권흉(權兇)을 붙좇아 이익이나 탐하며 염치없이 군 자들은 반드시 삭직(削職)의 대상에 포함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남구만(南九萬)의 무리가 말하기를,

"여태까지 주상(主上)께서 비록 큰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신하들이 벼슬하지 않을 의리는 없으니, 군(郡)·읍(邑)에서 벼슬살이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드디어 한결같은 뜻으로 부호(扶護)하니 사론(士論)이 모두 모두 몹시 분개하였다. 대사간 신양(申懹)이 비로소 이 일을 언급하였으나 역시 그 이름을 나타내지는 아니하였는데, 박태순 신양과 같이 시원(試院)에 들어갔다가 신양에게 묻기를,

"영공(令公)의 상소 가운데 있는 ‘실각 분추(失脚奔趨)’라는 말이 나를 지적해서 한 말이라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신양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시험(試驗)을 마친 후에 박태순이 부득이 인입(引入)했는데, 이때에 와서 패초(牌招)를 어긴 일로써 체직(遞職)되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기사년160) 에 폐비(廢妃)시킨 조처가 만일 주상(主上)의 우연한 사려(思慮)의 실수로써 의노(疑怒)를 지나치게 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 당시의 신자(臣子)들이 벼슬하지 않을 의리가 없다. 하지만 무진년161) 겨울 민종도(閔宗道)·민암(閔黯)·이담명(李聃命)·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이의징(李義徵) 등이 어두운 밤중에 장희재의 집에 출입하며 경영하고 모의한 것이, 다만 국모(國母)의 폐출(廢黜)과 그들이 다시 입궐(入闕)하는 데 있었고, 장희재는 드디어 희빈(禧嬪)과 함께 ‘중전(中殿)이 세자(世子)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등의 말로써 날마다 임금의 귀에 침윤(浸潤)162) 시켰다. 주상이 춘추(春秋) 30세에 비로소 아들 한 분을 두었으니, 이런 말을 듣고서 어찌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이에 옛 신하들을 모두 내쫓아 흉악한 무리들을 끌어들여 등용하고, 끝내는 왕비를 폐위(廢位)시키는 조처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대개 흉악한 무리들의 종용(慫慂)으로 말미암아 성립된 일이다. 그 당시 주상의 과오는 단지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한 일163) 에 불과할 뿐이었으나, 기사년의 당인(黨人)들은 모두가 이이첨(李爾瞻)이요 정인홍(鄭仁弘)인 것이다. 사대부(士大夫)로서 조금이나마 명절(名節)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이이첨·정인홍의 밑에 무릎을 꿇고 붙좇을 수가 있으며, 또한 어찌 차마 장씨(張氏)를 신하로 섬기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며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동욱 등은 다만 벼슬에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또 현저하게 아첨하여 들러붙은 자취가 있는데도 남구만 등이 이에 부호(扶護)하고 현용(顯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이는 장차 윤상(倫常)을 무너뜨리고 인리(人理)를 멸절(滅絶)되게 하고야 말려는 것이다. 맹자(孟子)와 같은 분을 얻어서 준엄한 말로 배척하여 사설(邪說)이 일어날 수 없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있겠는가?".

 

 

 

숙종실록 29권, 숙종 21년 8월 3일 임진 1번째기사 1695년 청 강희(康熙) 34년

여러 재신들과 흉년으로 인한 궁가의 절수 문제 등을 의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유상운(柳尙運)이 이 해가 흉년듦을 가지고 청하기를,

"경술년245) 의 전례에 의거하여 어공(御供)의 물건 및 종묘(宗廟)의 천신(薦新)에 쓰는 소목(燒木)과 각사(各司)의 공물의 값을 감하고, 경아문(京衙門) 및 외방(外方)의 각 영문(營門)의 저축(儲蓄)한 은(銀)·포(布)·미곡(米穀)의 수(數)를 실지대로 상문(上聞)케 하여 이를 취하여 씀에 대비(對備)하며, 경외(京外)의 영선(營繕) 및 무릇 백성을 소요(騷擾)케 하는 일은 일체 정지하소서.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창고(倉庫)의 역사(役事)와 낙선군(樂善君) 이축(李潚)의 묘소에 돌을 끄는 역사 및 경외의 추노(推奴)246) ·징채(徵債)247) 같은 것을 모두 정지하고 외방의 관원으로서 말미를 받는 자는 친병(親病) 외에는 일체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신익상(申翼相)이 새로 생긴 왕자(王子)의 궁(宮)을 영조(營造)하는 역사와 사행(使行) 때에 상방(尙方)248) 의 물건 무역(貿易)을 정지하기를 청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서문중(徐文重)은 강도(江都)의 영전(影殿) 보수(補修)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세화(李世華)가 내의원(內醫院)의 약재(藥材) 무역의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약재는 곧 일용(日用)의 물건이니, 그 중에서 긴요치 않은 것은 재감(裁減)하여도 가하다."

하였다. 유상운이, 양서(兩西)가 흉년듦을 가지고 삼남(三南)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의 신포(身布)를 민원(民願)의 어떠함을 물을 것 없이 그 값을 조금 감하여서 쌀로 대봉(代捧)하여 곡식을 모으는 터전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제신(諸臣)에게 물었는데, 제신이 모두 이것이 아니면 곡식을 모을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이를 허락하여 말하기를,

"난편(難便)의 형세(形勢)가 있다면 도신(道臣)이 마땅히 계문(啓聞)하여야 한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이세화(李世華)의 소 안에 진달한 두 건(件)의 일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맞습니다. 그 소의 비답(批答)에, ‘어의궁(於義宮)의 절수(折受)할 결수(結數)를 작정(酌定)해 주어야 하는데 혁파되었다.’는 하교(下敎)가 계셨으니, 성상께서 결수를 양정(量定)하시어 하교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진년249) 이후에 절수한 4천 결 중에서 1천 결을 획급(劃給)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무진년 이전에 절수한 것이 4백여 결이 있는데, 이것도 또한 1천 결의 수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다만 무진년 이후에 절수한 것을 가지고 1천 결을 획급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세 궁방(宮房)의 절수를 혁파하는 대신으로 은화(銀貨)와 미·두(米豆)를 양급(量給)하는 일을 이제 마땅히 품정(稟定)하여야 합니다. 모처(某處) 【장 희빈방(張禧嬪房)을 가리킨다.】 는 지금은 후궁(後宮)이지만 다른 궁방과 다른 까닭에 병인년250) 에 2백 결의 획급의 명이 있었는데, 2백 결은 곧 왕자방(王子房)과 옹주방(翁主房)의 절수의 수이니, 이를 왕자방과 같게 함은 성의(聖意)의 속셈이 있는 듯합니다. 무진년에 대신의 진달을 인하여 제궁가(諸宮家)의 직전(職田)의 대신으로 왕자방·옹주방은 은(銀) 4천 냥을 주는 일로 정탈(定奪)하였으니, 이번 세 궁방도 무진년의 정한 바에 의거하여 4천 냥으로 수를 정함이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설(新設)되는 궁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새로 생기는 왕자궁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마땅히 일체(一體)로 하여야 합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궁장(宮庄)을 아직 갖추기 전에는 마땅히 미·두를 주어야 하니, 그 석수(碩數)는 밑에서 작정(酌定)하겠지만 연한(年限)은 감히 함부로 정하지 못하오니, 마땅히 몇 년을 기한으로 하여야 할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5년을 기한으로 함이 가하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왕자궁에는 매년 선혜청(宣惠廳)에서 쌀 2백 석을, 군자감(軍資監)에서 콩 1백 석을 실어 보내고, 세 궁방도 또한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允許)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유상운은 지위가 대신(大臣)에 있으므로, 무릇 궁부(宮府)의 일에 관계되는 것은 다만 마땅히 소견을 곧게 진달하여서 성명(聖明)의 재처(裁處)를 기다려야만 하는데도, 이제 그렇지 아니하여 어의궁(於義宮)의 1천 4백 결이 지나침이 되는 줄 알면서도 감히 밝게 말하지 못하고, 곧 ‘무진년251) 이전의 4백 결이 또한 이 수에 들어갑니까?’라는 등의 말을 가지고 거짓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여서 임금의 낯빛을 기다리니, 임금이 어찌 능히 그 정상(情狀)을 살피지 못하겠는가? 또 희빈(禧嬪)의 칭호(稱號)를 무슨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 있기에, 곧 모처(某處)로써 일컬으며, 희빈이 비록 동궁(東宮)을 탄생하였지만 동궁은 중궁(中宮)의 아드님이 되었으니, 희빈은 또한 한 후궁일 뿐인데, 무엇을 가지고 다른 궁(宮)과 다르다고 말한단 말인가? 하물며 병인년은 아직 원량(元良)252) 을 탄생하기 전이니, 무엇을 가지고 2백 결의 획급이 성의(聖意)의 속셈이 있는 듯하다고 말한단 말인가? 하물며 두 궁방은 무슨 다른 궁과 다른 일이 있기에 또한 희빈으로 더불어 왕자방에 비례(比例)한단 말인가? 교묘하게 아첨하는 말을 꾸며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고자 하면서 그 말이 말을 이루지 못함과 그 뜻이 가리울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아! 비루(鄙陋)한 사나이와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임금의 새로 낳은 왕자의 궁방이 누락(漏落)당함을 염려하여 따로 제기(提起)하여 이를 묻는 것도 또한 조그만 사랑에 빠져 대체(大體)를 소홀히 함을 면치 못하니, 애석(哀惜)함을 금할 수 없다.".

유상운이 이어 이삼석(李三碩)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김진귀(金鎭龜)는 길이 폐(廢)할 수 없는 것이니, 이삼석의 말이 진실로 지나칩니다. 다만 사론(邪論)에 가담된 것은 실로 이삼석의 정실(情實) 밖입니다."

하고, 신익상이 이어 이를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곧 이삼석을 가지고 유명현(柳命賢)을 편들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때에 제주(濟州)에 있는 김진귀를 가지고 아무 일에 동참(同參)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렇다면 유명현을 죄준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였다. 신익상 대비과(大比科)253) 를 명년 가을로 물리어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상운이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을 신해년254) 의 전례에 의거하여 산료(散料)255) 로 분급(分給)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충신 중록(忠信重祿)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가, 유상운·신익상 등이 굳게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숙종실록 29권, 숙종 21년 9월 4일 계해 1번째기사 1695년 청 강희(康熙) 34년

희빈이 비빈의 지위에 물러나 원한을 품으니 궁인의 연로한 자가 근심하다

이때에 희빈(禧嬪)이 비빈(妃嬪)의 지위에 물러나 있어서 분수에 편안치 못하고 원독(怨毒)이 뼈에 사무쳐 양전(兩殿)297) 의 기거(起居)의 예(禮)를 일찍이 한 번도 행하지 않았고, 세자가 때때로 가서 살피면 문득 손을 잡고 체읍(涕泣)하였으며 세자는 한 말도 꺼내지 않고 물러나니, 궁중(宮中)의 시어(侍御)하는 사람들이 조정에서 또한 일후(日後)의 도모(圖謀)를 할 줄로 알아서 두려워하여 공경하여 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희빈의 심복(心腹) 시녀(侍女) 두 사람이 어두운 밤을 타서 대내(大內)의 침어(寢御)의 곳을 출입(出入)하면서 조금도 돌아보아 거리낌이 없는데도 감히 꾸짖어 금하는 자가 없었으니, 궁인(宮人)의 연로(年老)한 자가 혹은 이것으로써 그윽이 근심했다고 한다.

 

 

 

숙종실록 29권, 숙종 21년 11월 13일 신미 3번째기사 1695년 청 강희(康熙) 34년

동평군 이항을 사은 정사로 삼다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삼았다. 이항 정묘년401)  무진년402) 사이에 당하여, 그 어미 신씨(申氏)와 함께 희빈(禧嬪)장씨(張氏)를〉 아첨하여 섬긴 까닭에 임금의 권우(眷遇)를 입음이 거의 비할 이 없었으며, 밖으로 장희재(張希載)·민종도(閔宗道)의 무리와 결탁(結託)하여 심복(心腹)이 되었으니, 기사년403) 의 사화(士禍)가 모두 이 사람의 종용(慫慂)에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민종도의 무리가 뜻을 얻기에 미쳐, 그를 대우함이 도리어 이연(李㮒)404) 의 밑으로 나오고, 또 임금의 마음이 점점 뉘우쳐 깨닫는 단서(端緖)가 있음을 보자, 그 어미가 근심으로 병을 이루어 죽고, 이항(李杭)도 또 폐궁(廢宮)405) 에게 아첨하고자 하여 〈그 태도가〉 만단(萬端)일 뿐만 아니었다. 복위(復位)406) 의 뒤에 미쳐 그도 또한 스스로 반드시 주륙(誅戮)을 당할 줄로 알았으나, 남구만의 무리가 가리워 숨기고 묻지 아니하여 오히려 종재(宗宰)407) 의 숭반(崇班)에 참여하고 있으니, 나라 사람이 이를 갈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숙종실록 30권, 숙종 22년 2월 28일 갑인 1번째기사 1696년 청 강희(康熙) 35년

이정직의 죄를 가리는데 그 과정이 잘못되어 해조의 당상을 벌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정직(李廷稷)이 좌죄(坐罪)된 것은 성명(成命)을 업신여기고, 후사(喉司)를 강박(强迫)한 데에 있을 뿐이므로, 곧바로 조율(照律)하여 죄주어야 할 것인데, 해조(該曹)에서는 마치 죄수에게서 공초(供招)를 받고 추핵(推覈)하는 듯이 하였으니, 살피지 못한 것이 심하다. 해조의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방금 본 집의(執義) 정시한(丁時翰)의 소(疏)의 말 가운데에 취할 만한 것이 없지도 않다마는, 단지 일찍이 금령(禁令)이 있었는데 문득 무릅쓰고 아뢰었으니, 이것은 이미 지나쳤다. 민암(閔黯)이 죽은 것은 다만 진신(搢紳)을 함부로 죽인 일에 좌죄(坐罪)되었을 뿐이므로, 한중혁(韓重爀)의 일과 자연히 상관이 없는데, 이제 두 현신(賢臣)에 이르러서는, 내가 참으로 지난일을 뒤미쳐 뉘우치고 다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여 공론이 이미 정하여졌는데 다시 이렇게 거리낌 없이 헐뜯고, 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오로지 병향(並享)하는 한 가지 일만 지적할 뿐 아니라 평생의 일을 들추어 논단(論斷)하였으니, 이것은 곧 이제까지 구무(構誣)해 온 수단이다. 일이 매우 옳지 않으니, 정시한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그 소를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그 소에 말하기를,

"논어(論語)에, ‘자(子)가 정치를 하는 데에 어찌 죽이는 형벌을 쓰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 실정을 알아내었으면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제 전하께서는 크게 처분하실 때마다 반드시 유찬(流竄)의 벌을 베풀며 조금도 슬퍼하시는 뜻이 없으니, 조종(祖宗) 이래로 죽이고 귀양보내는 일이 전하의 조정처럼 많은 때가 있었습니까? 주벌(誅罰)과 포장(褒奬)이 갑자기 변하고 선과 악이 자주 바뀌며, 출척(黜斥)과 탁용(擢用)에 떳떳함이 없고 현명(賢明)과 영사(佞邪)가 서로 변한다면, 죄범(罪犯)의 유무(有無)와 경중(輕重)에 어찌 일정한 벌이 있겠으며, 사람들이 누구인들 믿겠습니까? 오로지 이러하기 때문에 신하들이 진용(進用)되는 시초에 이미 죽게 될지 모른다는 염려를 품고, 오직 죄망(罪網)을 널리 펴서 자기와 뜻이 다른 자를 배척하여 내쫓아 지위를 튼튼하게 하며, 자신을 보전할 생각만 합니다. 전하께서는 또 위복(威福)을 허용하고 한결같이 그 뜻을 따르시고, 그 사분(私忿)을 풀어 그 하고자 하는 것을 시원하게 할 수 있게 하시므로, 일을 담당할 때에는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배척받은 뒤에는 정상과 죄를 짐작하려는 뜻이 없으므로,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져 모양을 이루지 못하게 되니, 나라의 일이 마지막에는 과연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사년068) 처음에 곤성(坤聖)께서 사제(私第)에 나가 계실 때, 박태보(朴泰輔) 등이 감히 간쟁(諫諍)하다가 주륙(誅戮)되었는데, 이제 천심(天心)이 뉘우치고 깨달아 곤위(坤位)를 회복시켜 바로잡으셨으나, 그때에 신하들이 광구(匡救)하지 못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천둥 같은 위엄을 떨치고 마침내는 윤리를 무너뜨렸다는 죄를 돌리셨는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몸에 돌이켜 남에게 책망을 덜하셨다면 어찌 용서하실 도리가 없었겠습니까? 희빈(禧嬪)을 강호(降號)한 것은 나라에 이존(二尊)이 없다는 의리에서 나왔으므로 사리와 형세가 진실로 그러하나, 6년 동안 국모(國母)로 임하던 존귀한 몸을 도로 빈어(嬪御)069) 로 삼은 것은, 예전에도 증거가 없고 오늘날에도 증거가 없으므로, 공봉(供奉)하고 대우하는 예(禮)에 있어서 의거할만한 전례를 강구하여 알맞게 돌아가도록 힘쓴다면, 무슨 존귀를 대등하게 할 혐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나라의 금령(禁令)을 만들어 그 일을 말하는 것을 꺼리니 나라의 체모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갑술년070) 의 옥사(獄事)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죄다 석방하고, 안옥(按獄)한 신하들은 진신을 참살(斬殺)하였다는 것으로 죄목(罪目)을 삼아 죽이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도로 가두어 놓고 안치(按治)하니, 더러 이미 복법(伏法)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말미암아 말하면 안옥한 신하들에게 무슨 진신을 참살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명은 아직도 있으니, 신(臣)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은(銀)을 모아 뇌물을 쓴 무리가 불행하게도 사대부(士大夫)의 족속에서 나왔으므로, 거리에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것이 모두 다 조정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사대부는 태연하여 놀라와하지 않으며, 당세의 유현(儒賢)이라고 불리는 자들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구핵(究覈)할 것을 차자(箚子) 가운데에 아뢰지 않으므로, 끝내 분명히 핵실(覈實)하여 시원히 바로잡는 일이 없으니, 전하께서 천고에 없던 치욕을 받으시게 하였고, 사대부가 암담(黯黮)에 자처(自處)하는 것을 달가와하게 하였습니다. 예전에 노포(魯褒) 《전신론(錢神論)》을 지어 당로(當路)를 비평하였는데, 그때는 예의가 땅을 쓴 듯하여 마침내 오호(五胡)의 난(亂)을 가져왔으니, 오늘날의 일이 어찌 국가가 멸망하는 조짐이 되지 않겠습니까?

편당(偏黨)의 화(禍)와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계해년071) 개옥(改玉)한 이후로 차별하지 않고 지극히 공정하여 섞여 벼슬하였으나, 예론(禮論)이 일어난 이래로 경알(傾軋)072) 이 점점 극진하여지므로, 우리 전하께서 이 버릇을 매우 미워하여 차라리 한편을 오로지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셨는데, 폐단을 막기에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파란을 돕는데로 돌아가 경쟁이 무상(無常)하고, 원극(怨隙)073) 이 점점 깊어졌습니다. 나랏일을 맡은 대신(大臣)도 염려가 여기에 미치자, 먼저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교서(敎書)를 지어 바치고, 뒤에 용서하고 수습할 것을 상소하여 아뢰었으나, 끝내 법망을 늦추어 은택을 입히고 왕도(王道)를 넓혀서 탕평(蕩平)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알 수 없고 또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이이(李珥)·성혼(成渾)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한 것은 인조(仁祖) 때에 비롯하였으나, 존숭(尊崇)하는 것이 이미 그 사실보다 지나쳤으므로, 배척하는 자는 또 반드시 흠을 들 출 것이니, 열성(列聖)께서 끝내 허가하지 않으신 데에는 반드시 그 뜻을 두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당초에 그 내치고 높이는 것을 상세히 강구하지 않고, 조정이 바뀌는 것과 한 가지로 보시어 사향(祀享)하는 법이 존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이·성혼은 본디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이라 할 수 있으나, 이이가 이기(理氣)의 근원을 논한 것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과 서로 어그러질 뿐만 아니라, 입언(立言)·행사(行事)도 뜻을 공손히 하여 학문하는 기상이 매우 부족하며, 성혼은 뜻을 도탑게 하여 학문에 나아가고 이황의 설(說)을 삼가 지키려 하였지만, 견식(見識)이 못 미쳐서 분석(分析)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이에게 굽혔습니다. 아! 두 신하가 학업에 뜻한 것은 본디 천근(淺近)하지 않으니, 그 학문의 조예를 스스로 모르지 않을 것인데, 이제 존숭이 너무 지나쳐서 마땅히 있을 곳이 아닌 데에 승배(陞配)하였으니, 두 신하의 영(靈)이 아는 것이 있다면, 또한 어두운 가운데에서 머뭇거리고 쉴 곳이 없을 것입니다. 송시열은 임금을 폄박(貶薄)한 죄로 다스린다면 마땅하지 않을 듯하나, 집요한 성질과 부정(不正)한 학문으로 나라의 의례를 마음대로 결단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를 배척하고, 편당의 화를 빚어서 인심과 세도(世道)가 크게 무너지게 한 것도 또한 송시열이 그 책망을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여느 원우(院宇)에서 받드는 것도 인심에 만족되지 않는데, 이제 대현(大賢)에 종사(從祀)하여 함께 제사하니, 신은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전에 상소한 가운데에 있는 두 번째 조목의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고 척속(戚屬)을 막아야 한다는 것과, 네 번째 조목의 주살(誅殺)을 삼가고 편당을 없애야 한다는 것과, 여섯 번째 조목의 충간(忠諫)을 받아들이고 금령(禁令)을 베풀지 말아야 한다는 따위 말들은 가장 오늘날에 참고할 만하며, 국본(國本)을 길러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체념(體念)하여 억만 년 동안 한없는 경사를 터잡으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30권, 숙종 22년 4월 29일 갑인 1번째기사 1696년 청 강희(康熙) 35년

생원 강오장이 희빈 장씨의 비를 들어 상소하다

생원(生員) 강오장(姜五章)이 상소(上疏)하기를,

"듣건대,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선롱(先壠)이 연서(延曙)에 있는데, 갈(碣)이 있고 비(碑)가 있는 것을 지난해에 갑자기 변을 일으킨 자가 그 갈을 쳐부수고 또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었다는 것을 뭇사람이 떠들썩하게 말하므로, 귀가 있는 자는 다 들었습니다. 지난번 강민저(姜敏著)가 상소하여 그 비를 없애기를 청하였는데, 그 전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이미 장정을 내어 쓰러뜨려 묻었다 합니다. 신은 과연 조정(朝廷)의 명령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동궁(東宮)도 그 가운데에 들어 있으므로 이 비가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니, 이미 망령된 뜻으로 해명할 수 없거니와, 또 어찌 감히 경솔히 묻을 수 있겠습니까? 신리(神理)·인도(人道)는 그리 멀지 않아서 혈기(血氣)가 감응(感應)한다는 것은 사리가 분명한데, 장씨의 아버지 무덤에 흉변을 일으킨 자가 혹 사사로이 원수진 사람일지라도, 일부러 본가(本家)에서 화(禍)를 당하게 하려고 몰래 화를 빚었으니, 그것이 그 집에만 돌아갈지 어찌 알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동궁의 혈맥(血脈)도 그 무덤에 서로 이어졌으므로, 이번에 변을 일으킨 자는 틀림없이 국적(國賊)이니, 여느 요악(妖惡)의 죄로 죄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臣)이 듣건대, 신도(神道)가 편안하면 자손이 길(吉)하고, 신도가 어지러우면 자손이 위태하다 하니, 어찌 매우 두렵고도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이 말이 떠들썩하여 한 해가 지나도 그치지 않으므로, 오늘날의 정신(廷臣)도 충분히 들었을 것인데, 동궁을 위하여 놀라고 두려워서, 아뢰어 실상을 구명하여 알아내려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전하께서 허실(虛實)을 구핵(究覈)하여 그 사람을 찾아서 죽이고, 그 사토(莎土)를 고치고 제사하여 위안하셔서, 신도가 어지럽고 자손이 위태할 근심이 없게 하시면, 종사(宗社)가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이 어제 소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가 먼저 기성(騎省)093) 과 정원(政院)에 대개를 바쳤는데, 해가 저물었다는 핑계로 끝내 물리쳤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신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30권, 숙종 22년 6월 3일 정해 1번째기사 1696년 청 강희(康熙) 35년

부교리 박정이 편당의 화를 상소하다

부교리(副校理) 박정(朴涏)이 상소(上疏)하기를,

"아! 편당(偏黨)의 화(禍)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오늘날과 같은 경우가 있겠습니까? 동인(東人)·서인(西人)의 색목(色目)은 선조(宣祖) 때부터 있었으나, 반정(反正)한 처음에 이르러 위에는 성조(聖祖)께서 계시고 아래로는 명신(名臣)이 많았으므로, 자못 피차를 섞어서 어진 인재를 가려 쓸 수 있었습니다. 선왕(先王)께서 만년에 예(禮)를 의논한 것이, 잘못된 것을 깊이 깨닫고 바로잡으려 하다가 미처 못하셨는데,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시기에 이르러 이미 방례(邦禮)를 바로 잡고 이어서 출척(黜陟)을 행하셨으나,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주고 빼앗는 것이 너무 치우쳐서, 도리어 독임(獨任)119) 이라는 비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고 빼앗은 것은 관작(官爵)에만 있었고, 벌받은 것도 귀양가는 데에 그쳤으므로, 그래도 너무 심하지는 않았는데, 경신년120) 에 이르러서는 다만 요역(妖逆) 때문이었으나,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함정을 아울러 만들어서, 살육(殺戮)이 비로소 행하여지고 밀계(密啓)하고 기찰(譏察)하되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조지겸(趙持謙) 등이 의리를 창도(倡道)하여 막지 않았다면, 한편 사람들 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자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변혁이 있을 때마다, 문득 서로 보복하려고 생각하여 죽이고 귀양보내기를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하였습니다. 아! 당의(黨義)가 서로 다투어 나라의 일이 소란한 것이 이미 말할 수 없게 되었는데, 궁위(宮闈) 안에서는 폐립(廢立)하고 승강(陞降)하는 변이 있었으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기사년121) 초기에 뭇 의논을 물리치고 큰일을 독단하여, 은의(恩義)가 어그러지고 대륜(大倫)이 바르지 않게 하신 것은 진실로 과실이었으나, 마침내 다행히 과실을 고치고 어긋난 것을 회복하시어, 곤의(壼儀)가 다시 새로워져서 일월(日月)이 함께 빛나니, 이것은 또한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전대(前代)의 임금들 중에 짝을 바꾼 일은 있어도 한때에 두 후(后)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땅히 선처할 방도를 생각하여 지당하게 될 뜻을 찾아야 할 것인데, 다만 성교(聖敎) 때문에 그대로 희빈(禧嬪)의 구작(舊爵)을 내리는 명이 있었으니, 신(臣)은 미안하게 여깁니다. 일찍이 국모(國母)의 지위에서 지존(至尊)에 짝하여, 신민(臣民)에 임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첩어(妾御)와 동렬(同列)이 되었으니, 이것이 윤리에 어떠하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왕후에서 한 등급을 낮추면 절로 빈(嬪)이 되는데, 또 더 예(禮)를 높이면 왕후와 존귀(尊貴)함이 맞서게 되는 혐의가 있다.’ 하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른바 왕후와 존귀함이 맞서게 되는 것은 평소 경상(經常)을 지킨다는 말이고, 이제는 다만 예(禮)에 두 후(后)가 없다는 의리 때문에 그 위호(位號)를 낮추었으니, 어찌 상제(常制)만을 굳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널리 묻고 널리 상고하여, 예우(禮遇)하는 절차를 상례와 달리하여, 공봉(供奉)을 적당히 더하고, 따로 명호(名號)를 세워서 처변(處變)하는 방도에 모자람이 없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지난번 박만정(朴萬鼎)이 상소한 데에는 참으로 소견이 있었는데, 오로지 채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령(禁令)도 두셨습니다. 여러 해 동안 무사(無事)하던 끝에 문득 이런 변절(變節)을 만났으므로, 혹 처변(處變)하는 도리가 진선(盡善)하지 못할 수도 있을까 염려하여 운운하였을 것인데, 대저 무슨 다른 생각이 있었다고 이제 금령을 세워서 사람의 입을 막으십니까? 아마도 성조(聖朝)의 거조(擧措)가 아닐 듯하니, 빨리 이 금령을 없애고 널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마시기를 아울러 바랍니다."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품계(稟啓)하고 봉입(捧入)하니, 전교(傳敎)하기를,

"금령을 어기고 상소한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니,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4월 29일 무인 3번째기사 1697년 청 강희(康熙) 36년

집의 이정겸이 입시한 대관이 소결할 때 간쟁하지 않은 일로 배척하다

집의 이정겸(李廷謙)이 상소하여 소결(疏決)할 때 입시한 대관(臺官)이 간쟁(諫爭)하지 않은 것을 배척하고, 희빈(禧嬪)의 집을 건축하는 비용을 진휼청(賑恤廳)으로 옮겨 백성을 구제하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오도일(吳道一)의 문학(文學)과 재식(才識)은 많이 얻기가 쉽지 않지만, 술을 몹시 마시고 친구들에게 주정하며 욕을 하니, 이것은 그의 단점입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하는 자는 그의 장점까지도 없애려 하고, 그를 좋아하는 자들은 그의 단점까지 모두 비호하려고 하는데, 먼 지방에 있는 선비가 불확실한 이야기를 주워 모아 조정을 깔보고 말을 가려서 할 줄을 모르니, 아! 또한 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집을 건축하는 데 대한 말을 잘못 안 듯하다. 김덕원(金德遠) 등의 일에 대해서는 오늘날이 일반 사면과 달라 특별히 은전(恩典)을 베푸는 것이니, 불가할 게 없다. 오도일은 진실로 취할 만한 것이 있고, 병폐로 여길 것은 술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니, 이 때문에 장점을 아울러 버린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리저리 사리에 어긋나게 격동시켜 곧바로 권세 있는 간신으로 몰아붙이니, 더욱 근거가 없다. 소(疏)의 내용이 참으로 훌륭하므로,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4월 12일 기사 1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육릉의 참봉의 전직·봉화대 설치·절수의 폐단 등에 대한 대신들의 논의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받았다. 이조 판서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이사영(李思永)이 일찍이 함흥의 육릉(六陵) 참봉을 준원전(濬源殿) 참봉으로 전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관제(官制)를 변경시키는 일을 경솔하게 의논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재행(才行)이 현저한 이를 골라서 아뢰도록 하고, 이조(吏曹)로 하여금 다시 조사해 보게 하여 임명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여가 또 말하기를,

"희빈 궁방(禧嬪宮房)에서 덕산(德山)에다가 전지를 샀는데, 그 고을 백성과 송사가 있었습니다. 송관(訟官)이 궁차(宮差)076) 를 가두었는데 그 사건이 아직 끝나기 전에 내수사(內需司)에서 그 송사를 해궁(該宮)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라고 청하니, 여기에는 틀림없이 민원(民怨)이 있을 것입니다. 도신(道臣)에게 일임하여, 송관(訟官)을 특별히 뽑아서 공평하게 판결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병조 참의 김진규(金鎭圭)가 말하기를,

"신이 회양(淮陽) 대죄(待罪)077) 하고 있을 때에 북로(北路) 봉화(烽火)가 때때로 통보해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근래 병조에 있으면서는 아차산(峩嵯山)의 봉화는 한 번도 이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바다와 산이 가려 그렇다면 어찌 회양에는 전해지고 아차산에는 전해지지 않는단 말입니까? 거듭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구(金構)가 말하기를,

"관동(關東)과 관북(關北) 지방은 산세가 높고 험하여 구름과 안개가 늘 끼어 있습니다. 봉화대를 산중턱 이하에다 설치해야 마땅하겠으나, 국력(國力)으로 보아 또한 증설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로는 이미 우후(虞候)에게 명하여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강원도도 사실을 잘 밝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박필명(朴弼明) 을해년078) 정식(定式)을 반포한 뒤의 궁장(宮庄)으로 절수(折受)된 토지를 혁파할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이탄(李坦)이 말하기를,

"온 천하의 땅이 임금의 땅이 아닌 것이 없는데, 그것이 일단 궁가(宮家)에 소속되면 백성들이 경작(耕作)을 못합니다. 을해년의 정식은 사람마다 우러러 흠모하는 바이며, 왕언(王言)이 한 번 전파되면 도로 회수(回收)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흔쾌히 따르소서."

하고, 수찬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이탄(李坦)은 민폐(民弊)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은 성덕(聖德)에 누(累)가 될까 두렵습니다. 을해년의 정식은 팔도의 백성들이 똑같이 우러러보았는데, 오늘에 와서 지금 새로 규식(規式)을 정한다고 하교하신다면, 어찌 성덕에 큰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부터 규식을 정하자는 것은 을해 정식을 폐지하자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박필명(朴弼明)이 말하기를,

"권상유의 말은 매우 합당합니다. 애당초 궁가(宮家)에 급가(給價)한 것은 대개 민폐를 근심해서였는데, 지금은 이미 급가도 하고 또 절수(折受)까지 하니, 이 때문에 신이 그칠 줄 모르고 간쟁하는 것입니다."

하고, 권상유 이탄도 반복해서 이를 논하고, 모든 승지들도 계속해서 말했지만, 임금은 끝내 듣지 않았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8월 27일 임오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희빈의 복제를 다른 후궁과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행 부사직 이봉징의 상소문

행 부사직(行副司直) 이봉징(李鳳徵)이 상소하기를,

"해조(該曹)에서 정(定)한 복제(服制) 가운데 ‘희빈(禧嬪)은 마땅히 자최 기년(齊衰期年)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여러 후궁(後宮)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신의 혼매(昏昧)한 생각으로써도 또한 경악(驚愕)할 따름입니다. 대저 성체(聖體)의 배필(配匹)이 된 지가 6년이란 오랜 기간에 이르렀으니, 지금 대행 왕비(大行王妃)를 위하여 복(服)을 입는 것은 후궁(後宮)에 비하여 그 경중(輕重)에 차이가 있어야 할 것 같고, 해조에서는 마땅히 먼저 상지(上旨)에 계품(啓稟)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또, 전례(典禮)를 상고하고 명의(名義)를 참작(參酌)해 지당한 도리에 합치되도록 힘써야 하며, 전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재삼 순문(詢問)하셔서 처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절목(節目)을 공봉(供奉)하고 강정(講定)하는 일로써 상소하여 그 대략을 아뢰었으니, 지금 이러한 의논을 드리는 것도 또한 꼭같은 뜻입니다.

대신(大臣)들이 이르기를, ‘사대부 가운데 사친(私親)의 상복(喪服)을 벗지 못한 자는 마땅히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변제해야 한다.’하고, 예경(禮經)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는데, 이것은 더욱 의혹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예기(禮記)》에서〉 증자(曾子)가 묻기를, ‘대부(大夫)·사(士)가 사친(私親)의 상복(喪服)이 있어서 상복을 벗을 때가 되었는데, 임금에 대한 상복이 있다면 그 상복을 벗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니,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임금의 상복이 몸에 있으면 감히 사친의 상복을 입지 못하는데, 또 어찌 상복을 벗을 수 있겠는가? 이에 때가 지나도 상복을 벗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임금의 상복을 벗은 뒤에 그제서야 사친을 위하여 은제(殷祭)199) 를 거행하는 것이 예(禮)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의 상복이 몸에 있으면, 비록 사친의 상복이 있더라도 또한 감히 사친의 상복을 입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감히 사친의 상복을 입지 못한다면 상복을 벗거나 벗지 아니하는 것은 논할 바가 아니요, 반드시 임금이 상복을 벗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은제를 거행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상복을 벗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은제에서 삼헌(三獻)과 여러 제문(祭文)을 갖추는 것은 곧 소상(小祥)·대상(大祥)의 제사입니다. 임금의 상이 앞에 있고 사친(私親)의 상이 뒤에 있다면, 마땅히 입어야 할 사친의 상복을 감히 입지 못하는 자가, 임금이 상복을 미처 벗기도 전에 이미 입은 사친의 상복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 고금(古今)의 시의(時宜)가 다르니 비록 임금의 상복을 벗는 것을 기다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졸곡(卒哭)도 마치지 아니하고 먼저 사친의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대단히 마음에 편안치 못합니다. 만약 오늘 예문(禮文) 한 구절을 고치고 내일 또 한 구절을 고친다면, 대방(大防)200) 이 점점 무너져 장차 사람들이 나라에 국상(國喪)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대신(大臣)들이 ‘복을 벗는 것은 마땅히 때를 넘길 수 없다.’는 말을 공자 증자의 물음에 답한 것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어떤 경전(經典)에 나타난 것인지요?

조사(朝士)로서 상중(喪中)에 있는 자를 의주(儀註)에 거론하지 아니한 것은, 관직(官職)에 있는 신료(臣僚)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기 그 품질(品秩)에 따라 의주에 의거해서 최복(衰服)을 받는다면, 상례(喪禮)도 곧 엄해지고 사사로운 분수도 또한 편안해질 것입니다. 모포(帽袍)로써 성복(成服)하는 것이 이미 옳다고 하였으니, 입령(笠領)으로 【입(笠)은 백립(白笠)이고 영(領)은 포호령(布互領)인데, 조사(朝士) 가운데 사친(私親)의 상복을 입는 자는 이것으로써 성복한다.】 한 것은 미처 예경의 본의를 구명(究明)하지 못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그대로 존치(存置)할 수가 없으니, 원컨대, 성명(聖明)께서 몇 구절을 다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널리 의논하게 하고, 외방(外方)에 있는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에게도 또한 마땅히 수의(收議)하도록 하명(下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할 것이나, 복제(服制)의 일을 지금 와서 운운하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예조에서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서문중(徐文重)·이세백(李世白)·신완(申琓)은 예(禮)를 알지 못한다고 사양하였고,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은 모두 헌의(獻議)하지 아니하였으며, 유상운(柳尙運)은 말하기를,

"국휼(國恤) 때 사친(私親)의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임금의 상복이 몸에 있으면 감히 사친(私親)의 상복을 입지 못하는데, 또 어찌 벗을 수 있겠는가?’라는 글이 있는데, 이 부분이 근래 호례가(好禮家)들의 논의가 일치하지 아니하고 그 문답(問答)이 각기 다른 곳입니다. 다만 고금(古今)의 시의(時宜)가 다를 뿐더러, 이미 아침저녁 임금이 계신 곳의 시의와도 같지 아니합니다.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사친(私親)의 복제(服制)를 입는 자는 일찍이 임금의 상복이 몸에 있으므로 감히 사친(私親)의 상복을 입지 못하는 일이 없었는데, 단지 ‘또 어찌 복을 벗을 수 있겠는가?’라는 글을 가지고 상복을 벗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갓 사친(私親)의 상에 복제(服制)를 넘기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오로지 조정에서 시의(時宜)를 참작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널리 채용하여 일대(一代)의 제도를 이루도록 하소서."

하였다. 유신(儒臣)들에게 순문(詢問)하니, 좌찬성(左贊成) 윤증(尹拯)은 헌의(獻議)하지 아니하고, 찬선(贊善) 권상하(權尙夏)는 말하기를,

"선사(先師) 송시열(宋時烈) 이세귀(李世龜)의 물음에 답하기를, ‘국장(國葬) 뒤에 택일(擇日)하여 소상(小祥)·대상(大祥)을 거행하는데, 뜻을 잘 기울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유감이 없게 한다. 옛날에는 상기(喪期)에 기한이 없었으니, 비록 몇달을 더하더라도 의리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궤전(饋奠)201) 하는 데에 또 몇 달을 하더라도 또한 이것은 정(情)을 표시하는 일단(一端)이다.’라고 하였고, 최규서(崔奎瑞)에게 답한 데에는 이르기를, ‘옛날 사계(沙溪) 노선생(老先生)의 소상(小祥) 때 마침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국휼(國恤)을 당하자, 간략하게 제수(祭需)를 마련해 곡(哭)을 하고 일을 거행하였으며, 국장 뒤에 택일하여 연사(練事)202) 를 거행하였다. 이것은 옛것을 참작하고 지금것에 알맞게 하였으니, 통행(通行)하더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민진장(閔鎭長)에게 답한 데에서는 이르기를, ‘졸곡(卒哭)은 반드시 국장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택일하여 거행해야 하나, 다만 명문(明文)이 없어서 감히 질언(質言)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이민장(李敏章)에게 답한 글에는 이르기를, ‘국휼 중의 사대부의 장사(葬事)에 대해서는 이미 금령(禁令)이 없었으니, 예절의 본의에 있어서도 해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단지 장사한 뒤에 으레 은제(殷祭)가 있기 마련인데, 종묘(宗廟)·산릉(山陵)으로 정향(停享)할 때를 당하여 신자(臣子)의 마음이 실로 편안키 어렵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장사한 뒤에 우제(虞祭)를 폐하는 것도 또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니, 비록 우제(虞祭)를 거행하더라도 강쇄(降殺)하여 퇴계(退溪)의 기제(忌祭)의 설(說)과 같이 거행한다면, 혹 무방(無妨)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설로 보건대, 사가(私家)에서는 졸곡(卒哭) 전에 은제(殷祭)를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기(禮記)》의 증자문(曾子問)에서 논한 귀절의 대목에 이르면 아주 까다롭고 불분명한 점이 있는데, 이와 같은 따위의 귀절은 전의(傳疑)203) 라고 의심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찬선(贊善)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게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9월 23일 정미 1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대행 왕비를 무고한 죄인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비망기를 내리다

밤에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희빈(禧嬪) 장씨(張氏)는 비단 한 번도 기거(起居)222) 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궁전(中宮殿)’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閔氏)’라고 일컬었으며, 또 말하기를, ‘민씨는 실로 요사스러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취선당(就善堂)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매양 2, 3인의 비복(婢僕)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祈禱)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이것을 참을 수가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는가? 제주(濟州)에 유배(流配)시킨 죄인 장희재(張希載)를 먼저 처형하여 빨리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행 왕비(大行王妃)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에 민진후(閔鎭厚) 형제가 입시(入侍)하니, 왕비가 하교(下敎)하기를,

"갑술년223) 에 복위(復位)한 뒤 조정의 의논이 세자(世子)의 사친(私親)을 봉공(俸供)하는 등의 절목(節目)을 운위하면서, ‘마땅히 여러 빈어(嬪御)224) 들과는 구별(區別)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궁중(宮中)의 사람들이 모두 다 다 희빈에게로 기울어졌다. 궁중(宮中)의 구법(舊法)에 의한다면 빈어에 속한 시녀(侍女)들은 감히 대내(大內)225) 근처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희빈에 속한 것들이 항상 나의 침전(寢殿)에 왕래하였으며, 심지어 창(窓)에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는 짓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꾸짖어 금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너무나도 한심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귀신의 재앙[所祟]이 있다.’고 한다. 궁인(宮人) 시영(時英)이란 자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사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주상께 감히 고(告)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다만 나는 갖은 고초(苦楚)를 받았으나, 지금 병이 난 두해 사이에 소원(所願)은 오직 빨리 죽는 데 있으나, 여전히 다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여 이처럼 병이 낫지 아니하니, 괴롭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때에 이르러 무고(巫蠱)의 사건이 과연 발각되니, 외간(外間)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追慕)하여, 통곡(痛哭)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告)하였다."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9월 26일 경술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인정문에 나아가 궁녀 축생 등을 친히 국문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궁녀(宮女) 축생(丑生) 등을 친히 국문(鞫問)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축생 등은 내전(內殿)을 질시하고 원망하여 원수처럼 여겼다. 남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사람을 물리치고 기도하면서 국모(國母)를 해치고 도모한 자취가 분명하게 드러나 숨기기 어렵다. 그러나 내전(內殿)에서 이를 물으면 혹은 인경 왕후(仁敬王后)를 위한다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세자(世子)의 두창(痘瘡)을 위한다고 일컫기도 하면서 말을 꾸며 속였으니, 지극히 통절(痛切)한 일이다."

하고, 임금이 곧바로 언문(諺文)으로 해석하여 물으니, 축생이 대답하기를,

"매양 들으니, 혹은 세자를 위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인경 왕후를 위하여 기도하기도 한다고 하였을 뿐이며,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경오년239) 에 궁 밖으로 나갔는데, 무인년240)  희빈방(禧嬪房)으로부터 전언(傳言)하기를, ‘내전(內殿)에서 들어오게 하였다.’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대로 머무르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고 정신이 혼미하여 아침저녁으로 밥이나 축낼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친히 설향(雪香)을 심문하였는데, 문목(問目)은 축생과 같았다. 또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본가(本家)의 비자(婢子)로서 숙영(淑英)과 더불어 심복이 되어, 내전의 동정(動靜)을 남몰래 염탐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언제나 항상 내전의 침전(寢殿) 창(窓) 밖에서 엿보았고, 심지어 칙간(厠間)에 갈 적에도 또한 반드시 엿보았다. 경춘전(景春殿)241) 이 승하(昇遐)할 때 남쪽 창에 구멍을 뚫어 병의 증세를 몰래 엿보았다가 목숨이 떨어지자 기쁜 기색이 넘쳐 흘렀다. 구멍을 뚫은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고, 나도 또한 직접 본 바이다. 반함(飯含)242) 할 때 내가 아주 가까운 곳에 나아갔는데, 왔다갔다 하면서 기뻐 날뛰는 모양이 너무나도 망측스러웠다."

하고, 또 신당을 몰래 설치할 때 반드시 주장한 무녀(巫女)가 있을 터이니, 이름을 대고 고(告)하라는 뜻도 또한 문목에 더 넣으라고 명하였다. 설향이 이러한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세자께서 두창(痘瘡)을 앓으셨을 때 매양 신증(神甑) 【떡으로 신(神)에게 기양(祈禳)하는 것이다.】 을 설치하였는데, 갑자기 철거하기가 어려워서 그대로 두고 때때로 이런 일을 하였습니다. 또 세자의 두창 뒤 안질(眼疾) 때문에 양쪽 가장자리에 흑상(黑床)을 설치하고 손을 모으고 기축(祈祝)하였는데, 병이 조금 낫자 곧 정지하였습니다. 무녀는 숙영(淑英)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축생에게 물었던 것을 가지고 시영(侍英)에게 물어보라고 명하니, 대답하기를,

"본래 대전(大殿)의 궁인(宮人)으로서 세자궁(世子宮)으로 이속(移屬)되었으므로, 신당의 배설(排設) 여부를 진실로 알지 못합니다. 무녀가 설치한 신당은, 대개 인경 왕후께서 두창으로 승하하셨는데 세자께서는 두창을 잘 넘겼기 때문에, 그 음즐(陰騭)243) 을 위하여 이것을 설치하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상탁(床卓) 따위의 물건들은 희빈의 시녀 일렬(一烈)이 주로 마련하였습니다. 숙영이 세자궁이 있던 검은 비단을 가지고 가려고 하기에 제가 노하여 ‘어찌하여 반드시 이러한 무익(無益)한 일을 하는가?’라고 하였는데, 희빈이 이를 듣고 저에게 ‘무녀(巫女)가 항상 「세자(世子)께 액(厄)이 있다」라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기양(祈禳)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신당에 가지 아니하였는데, 희빈이 권하였기 때문에 이 뒤에 한번 가서 주과(酒果)를 진설(陳設)하고 예배(禮拜)를 드린 뒤에 돌아왔습니다. 그 뒤 일렬이 저를 보고서 신당(神堂)을 배설(排設)하는 일을 스스로 말하였는데, 무녀가 죽자, 용동(龍洞) 근처 희빈의 본궁(本宮)으로 옮겨서 배설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임금이 설향에게 물었던 것을 숙영에게 물으라고 명하니,

"비자(婢子) 철생(鐵生)이 무녀의 집에 왕래하였는데, 무녀가 죽자 유무(游巫) 【무당(巫堂) 가운데 일정한 거처가 없는 자를 유무(游巫)라고 한다.】 에게 물어 보고, 신당을 희빈의 본궁으로 옮겨 설치하였습니다. 유무의 이름은 철생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당은 대개 인경 왕후를 위하여 설치하였는데, 금단(錦段)으로 종이의 표면을 싸고 두신(痘神)의 이름을 써서 벽(壁)에 끼워 두었습니다. 기축(祈祝)하는 글에 대해서는 참여하여 듣지를 못하였으나, 대개 세자께서 두창을 잘 넘겼으므로 희빈이 무녀의 말을 믿고, 혹은 붉은 콩떡을 진설(陳設)하기도 하고, 혹은 당여의(唐女衣)를 설치하기도 하여 몸소 기도하였으나, 그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일을 위한 것인지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창(窓)에 구멍을 뚫고 엿본 따위의 일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대개 갑술년244) 부터는 설향 하량교(河梁橋) 【도성(都城) 가운데 있다.】 의 무녀 집에 왕래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철생(鐵生)은 본래 희빈방(禧嬪房)의 비자(婢子)로서 설향(雪香)·숙영(淑英) 등이 무녀(巫女)의 집에 왕래할 때 그 출납(出納)하거나 주고받는 물건들을 전적으로 관장(管掌)하였으니, 이것을 물어보도록 하라."

하니, 철생이 대답하기를,

"희빈방의 시상 무수리[市上水賜] 【무수리[水賜]란 궁녀(宮女)가 사역(使役)하는 종을 말한다.】 가 되어서 모든 신사(神祀)의 물건들을 과연 전하여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무녀의 이름은 실로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태자방(太子房)’【속칭 자고신(紫姑神)245) 을 태자(太子)라고 한다.】 이라고 일컫던 자는 지난해 과연 죽었습니다. 이 뒤에 이른바 ‘유무(游巫)’라고 하는 자가 한강(漢江) 근처에서 태자방의 집에 들어가 거처하였다가, 금년 2월에 스스로 자기 몸에 신(神)이 내렸다고 일컬었는데, 4월에 갑자기 달아났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당의 설치가 2월에 있었고, 세자의 안질(眼疾)이 이미 작년보았다 나아졌는데, 도리어 ‘세자를 위하여 설치하였다.’고 한다. 시영이 ‘처음에는 신당에 가지 아니하였으나, 최후에는 궁을 나가서 갔었다.’고 한다. 설향은 ‘무녀(巫女)의 이름을 숙영이 안다.’고 하고, 숙영은 ‘철생이 안다.’고 하는데, ‘전의 무녀는 죽었고, 뒤의 무녀는 도망하였다.’는 것은 더욱 그들의 간교한 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무녀를 물어볼 수 있으나, 혹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도망하였다고 하기도 하니, 장차 그 자녀(子女)와 친족들을 심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은밀하게 체포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궐내(闕內)에서 추문(推問)할 때 축생은 스스로 은휘(隱諱)하였고, 설향·숙영은 당여의(唐女衣)를 불태운 사건을 대략 발고(發告)하였다."

하고, 설향·숙영을 형신(刑訊)하라고 명하였으나 모두 자복(自服)하지 아니하였다. 장(杖)을 수대로 때리지 아니하고 그만두게 하였으니, 대개 그들이 곧장 죽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정언 황일하(黃一夏)가 논하기를,

"어제의 비망기에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한두 사람의 비복(婢僕)이 기도하고 미리 일을 빈틈없이 준비한 사건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관직이 출납(出納)에 있는 자들은 왕옥(王獄)에 붙이라는 뜻을 마땅히 계품(啓稟)해야 할 것인데 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으니,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允許)하였다. 또 논하기를,

"대개 역모(逆謀)를 다스릴 때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한 경우가 진실로 많이 있었습니다. 윤지인(尹趾仁)은 그 품은 생각을 진달한 데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어찌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한 적(賊)을 일찍이 대수롭지 않게 보았겠습니까? 청컨대, 삭탈(削奪)하여 내쫓으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승지 김진규(金鎭圭)가 말하기를,

"이번의 국옥(鞫獄)은 전에 없던 변고(變故)입니다. 더욱이 외간(外間)의 일과는 다른 점이 있어 외정(外廷)의 신료(臣僚)들이 들어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국문(鞫問)에 친림(親臨)하심은 그 거조(擧措)가 마땅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윤지인이 곧 본부(本府)에서 추문(推問)하자고 청하였으니,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臺臣)들이 그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한 것을 신은 그윽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말이 옳다. 이것은 천고에 없던 변고이다. 그런데도 승지가 다만 본부에서 추문(推問)하자고 청하였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너무나 심하였다. 내가 이 일을 당한 이래로 밤낮으로 마음이 우울하여 자리에 누워도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음흉(陰凶)한 정상을 반드시 샅샅이 밝혀낸 뒤에라야 지극한 한(恨)이 풀려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며 나라도 나라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비망기에다 ‘밤낮으로 이를 갈았다.’고 한 말은 바로 나의 심사(心事)에서 나온 말이다. 금번 국휼(國恤) 때, 한편으로는 신당에다 빌고 한편으로는 저주(咀呪)하였다는 말이 궐내(闕內)에 자자(藉藉)하였으며, 온 나라의 말도 같았다. 그리고 내전(內殿)이 병으로 누워 있을 때 매양 말하기를, ‘이 병이 괴이(怪異)하였다.’ 하며 날로 몸이 점점 여위어졌는데, 내가 일찍이 그 몸이 사그라져 살이라곤 한 점도 없어 지극히 참담한 모습을 보았으니, 이것은 천하 만고에 없던 일이다. 저 여자들이 도리어 ‘아마도 저주(咀呪)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한 것은 진실로 스스로 말한 것으로서, 실로 심기원(沈器遠)이 국청(鞫廳)에 있을 때 다른 대신(大臣)들이 ‘대감(大監)이 역적(逆賊)의 공초(供招)에 나왔다.’고 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어찌 역적질하였다는 말이요?’라고 한 말과 같다. 비록 현상금을 걸더라도 반드시 그 단서를 얻어 내전(內殿)의 망극(罔極)한 원수를 갚고 난 뒤에라야 궁금(宮禁)을 맑고 깨끗하게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윤지인(尹趾仁)·서종헌(徐宗憲) 등은 반드시 막고자 하여 도리어 내가 격분한 감정을 가졌다고 하였으니, 지극히 괴이한 일이다. 그리고 사관(史官)은 ‘뒤에 후회할 것이라’는 따위의 말로 이 일을 기사년246) 의 일에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장희재(張希載)가 모해(謀害)한 일은 아직도 목소리를 같이하여 쟁집(爭執)하고 있는데, 더욱이 이 일은 전고(前古)에 없던 변고이니, 덮어 둘 수 있겠는가? 흉악한 사건을 모조리 샅샅이 들추어낸다면, 저 여자들이 감히 무슨 말로 속이거나 피할 수 있는 계책을 쓸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금일의 변고에 대해 누군들 놀라고 가슴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상도(常道)로써 말한다면, 마땅히 목욕(沐浴)한 뒤 토죄(討罪)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보고 생각해야 할 만한 일이 있기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고, 승지와 옥당에서 청대(請對)하여, 비망기를 도로 거두고 장차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해서 이에 대한 품은 생각을 아뢰도록 마땅히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김진규(金鎭圭)가 신하들에게 순문할 일을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명하여 다음날까지 기다리게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9월 27일 신해 3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세자를 보호하자는 영의정 최석정의 상소문. 무녀의 아들 이수장 등을 친국하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병을 핑계대고 국청(鞫廳)에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궁정(宮廷)에서 변고(變故)가 일어났고, 신국(訊鞫)에 친림(親臨)하시니, 온 나라가 어지럽고 황급(遑急)합니다. 그저께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자 온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곧 후사(喉司)의 청대(請對)로 인하여 즉시 반한(反汗)247) 하셨으니, 뜻을 바꾸어서 명령을 거두시는 미덕(美德)을 누구인들 흠모(欽慕)하고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번 옥사(獄事)의 요망스럽고 악한 것을 생각해 본즉 놀라움과 아픔이 살점을 도려내는 듯하였으며, 춘궁(春宮)의 사정을 생각해 본즉 아픈 마음이 무너지는 듯하였습니다. 신자(臣子)의 심정이 오히려 또 이와 같은데, 우러러 성념(聖念)을 생각하면, 마땅히 어떠한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 경제(景帝)  전숙(田叔)을 보내어 양왕(梁王)248) 사건을 안문(按問)하였는데, 태후(太后)가 이를 걱정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밤낮으로 흐느껴 울었으므로 황제도 또한 근심하였습니다. 전숙 양왕의 옥사(獄辭)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빈손으로 와서 알현(謁見)하니, 황제가 ‘양왕의 사건은 증거가 있던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죽을 만한 죄가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그 사건의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황상(皇上)의 모후(母后)께서 양왕의 사건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지금 양왕이 복주(伏誅)되지 아니하면 이것은 한(漢)나라 법(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며, 복주되면 태후(太后)께서 음식을 잡수셔도 맛을 느끼지 못하실 것이고 잠자리에 들어도 자리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어러한 근심이 폐하(陛下)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이를 매우 옳게 여기고 전숙으로 하여금 태후를 알현하게 하여 ‘양왕은 알지 못하였고, 이런 짓을 한 자들은 행신(幸臣)인 양승(羊勝)·공손궤(公孫詭)의 무리였으므로 삼가 이미 복주하였으며, 양왕은 무고(無故)합니다.’라고 하니,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서로 눈물을 흘리고 다시 옛날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주자(朱子) 《통감강목(通鑑綱目)》에다 자세히 썼는데, 선유(先儒)의 사단(史斷)249) 에서도 또한 칭찬하기를, ‘태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먹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황제도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천리(天理)의 마음이 유연(油然)하였으니, 진실로 실형(失刑)하였다고 나무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관계는 윤리 강상(綱常)에 아울러 나란하나, 은혜와 의리, 상경(常經)과 권도(權道) 때문에 서로 경중(輕重)이 있게 됩니다. 태후와 세자는 친속(親屬) 관계와 존비(尊卑) 지위에는 비록 차이가 있겠지만, 인군(人君)이 자애(慈愛)하고 효성(孝誠)하는 도리와 신자(臣子)의 복종하고 섬기는 의리는 진실로 다른 이치가 없는 것이며, 종사(宗社)의 대계(大計)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또 얼마나 중대하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춘궁의 사정과 형편이 태후가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먹지 않던 것에 비길 정도이겠습니까? 대저 양왕은 하나의 번신(藩臣)이고 죽을 만한 죄가 분명히 있었으나, 특별히 태후의 아끼고 사랑하던 으로 인하여 법을 어겨가면서 관대히 용서하였지만, 선유(先儒)는 오히려 또 이를 용납하였습니다.

지금 희빈(禧嬪)이 설령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춘궁을 낳아서 기른 은혜를 생각한다면, 춘궁이 걱정하고 마음 상할 것을 염려하여 조금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어, 그 죄상을 끝까지 캐내어 세상에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좌우의 불령(不逞)한 무리들은 율(律)에 의하여 대벽(大辟)250) 에 처하되 왕법(王法)을 옛날 양승(羊勝) 등의 일과 같이 시행하여 춘궁을 편안하게 한다면, 아마 금일의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우리 춘궁을 얻어서 주창(主鬯)251) 의 중임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춘궁께서도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시어 명호(名號)가 일찍부터 정해졌고, 바야흐로 초츤(齠齔)의 나이에 곤전(坤殿)께서 취(取)하여 아들로 삼으시어 어머니의 깊은 자애(慈愛)와 아들의 돈독한 효성이 자기 친자식보았다 더한 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퍼져 나가자 사방에서 귀를 세우고 들었으니, 이것은 곧 종묘(宗廟) 신령(神靈)이 보호하고 도와주신 것이며, 실로 전하의 하늘과 같은 큰 복(福)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뜻밖에도 나이 어린 몸으로 인륜(人倫)의 망극(罔極)한 변고(變故)를 당하고, 또 불안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 무너질 듯한 놀라움과 괴로움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미치도록 괴롭게 하여 스스로 그 성정(性情)을 보전할 수 없게 한다면, 비단 전하께서 지극히 자애하시는 은의(恩誼)를 거듭 상(傷)하게 할 뿐만 아니라, 종묘 사직에 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일의 방편(方便)에 따라서 세자를 보호하는 데 뜻을 기울이고 진정(鎭定) 보안(保安)하는 방도를 다하도록 힘쓰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노신(老臣)이 구구하게 바라는 지극한 간청(懇請)입니다. 금일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에게 순문(詢問)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병으로 경연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내리신 명령을 이미 거두었으니, 반드시 순문하실 것도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그대로 중지시키고 시행하지 마시며, 여러 신하들의 하정(下情)을 본받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장차 여러 죄수들을 친국(親鞫)하려고 하면서, 최석정의 차자를 내어 보이고 대신들을 돌아보면서 묻기를,

"이 차자의 말단(末端)에서 한 말이 어떠한가?"

하니, 판부사(判府事) 서문중(徐文重)이 말하기를,

"이번 일을 성상께서는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전대 역사에 없었던 일이고 관계되는 바가 너무나 중대하므로, 신자(臣子)들이 놀라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오로지 성상께서 윤당(允當)하게 처분하시는 데 달려 있을 뿐이요, 신료(臣僚)들에게 순문하실 만한 것이 아닙니다. 영상(領相)의 뜻은 대개 세자를 위하여 깊이 염려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말하기를,

"이번 일을 외신(外臣)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전후의 비망기와 어제 하교(下敎)를 가지고 보건대, 일이 대행 왕비(大行王妃)와 관련되어 있으니, 아랫사람들이 어찌 감히 입을 놀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걱정하는 바는 세자께서 몹시 놀라 손상될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럴 것이니, 오직 성상께서 참작하고 헤아려서 처리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찌 반드시 신하들에게 순문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신완(申琓)도 또한 이세백의 말과 같았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여(李畬)는 말하기를,

"금일에 당한 일은 실로 망극한 변고입니다. 신은 옥사(獄事)를 주장하는 관원으로 마땅히 옥사의 전말을 알아야 할 것인데, 어제의 처분은 실로 너무 급하게 서둔 것이니, 이번에는 마땅히 앞으로의 사정을 서서히 보아가면서 십분 참작하고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단코 서둘러 먼저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옥사를 끝까지 밝혀낸 뒤에 참작하여 처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여가 말하기를,

"춘궁이 나이가 어린데, 놀라고 가슴 아파하였다가 크게 손상된다면, 마침내 성상의 자애하심에 어그러짐이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참작하고 헤아려서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사(兩司)에서도 또한 진달(陳達)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차자를 양사에 보여 주었다. 장령 윤홍리(尹弘离)는 말하기를,

"옥사를 국문(鞫問)하여 끝까지 밝혀낸 뒤에 마땅히 조용하게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고(前古)에 없던 변고이니, 신의 생각으로서는 2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모두 순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헌납 어사휘(魚史徽)는 말하기를,

"대신의 차자는 실로 춘궁을 보호하려고 말한 것이니, 마땅히 옥사를 끝까지 밝혀내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순문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여가 말하기를,

"문안(文案)에 있는 신당(神堂)의 사건은 중대한데, 죄인들은 버티면서 변명하며 자복(自服)하지 아니합니다. 모름지기 자복받기를 기다렸다가 결정해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제 하교(下敎)를 받고 신민(臣民)들의 마음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였겠습니까? 다만 저주(咀呪)의 옥사는 옛부터 밝히기가 어려웠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반드시 상세하게 심문하여 다시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그러나 그러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채 서둘러 비망기를 내리시고, 곧 엄청난 처분을 내리셨으니, 실로 가볍고 갑작스런 처사입니다."

하고, 도승지 이돈(李墩)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처분하신 것은 국가에서 일체(一切)로 다루는 법(法)이요, 대신이 차자로 진달한 것은 십분 선처(善處)하자는 뜻입니다. 세자를 위하여 생각한다면, 어머니가 비록 군부(君父)에 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인자(人子)의 망극한 정리(情理)야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대신들이 증언(證言)하는 바가 비록 십분 꼭 들어맞거나 타당하지는 않더라도 그 말은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그 말에 따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 차자를 도로 올리게 하고, 드디어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그대로 중지하고 시행하지 말라는 말이 대신에게서 나왔으니, 실로 미안(未安)한데 관계된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무녀(巫女) 【태자방(太子房)이다.】 의 아들 이수장(李壽長)을 잡아 와서 심문하니, 대답하기를,

"어미가 살아 있을 때인 을해년252)  장희재(張希載)의 첩 숙정(淑正)과 시상 무수리[市上水賜]라고 일컫는 자가 같이 와서, 면주(綿紬)와 쌀로 신당(神堂)에 기도하였습니다. 이 뒤로부터 해마다 절일(節日)에는 밥을 차리고 기도하였는데, 정축년253) 이후로는 매달 밥을 차렸습니다. 기묘년254) 정월에 어미가 죽자, 어떤 무녀(巫女) 하나가 성인방(聖人房)이라고 일컬으며 서강(西江)에서부터 우리 집에 와서 거처하였는데, 그 이름은 정말 알지 못하며, 그 아들의 이름은 순흥(順興)입니다. 희빈방(禧嬪房)에서 우리들 형제를 내쫓고 그 무녀가 신당을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하나는 스스로 주관하였고, 다른 하나는 희빈방에서 설치하였으며, 장희재의 첩과 그 무녀가 같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무녀 【태자방이다.】 의 딸 정(貞) 【외자 이름이다.】 에게 물으니, 대답한 내용이 대략 이수장과 같았다. 시영(時英)이 한 말을 가지고 일렬(一烈)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상탁(床卓) 등의 물건들을 제가 과연 무녀의 집에 가져갔었는데, 이는 희빈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제게 고질병(痼疾病)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도에 응감(應感)이 있기를 바랐을 뿐이고,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그때 숙정은 이미 내사(內司)의 옥(獄)에 갇혀 있었는데, 이수장이 말한 것을 가지고 숙정을 잡아 와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설향(雪香)이 저더러 태자방에 내왕하기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른바 태자방은 희빈을 위하여 액(厄)을 물리칠 것을 빌었는데, 혹은 신사(神祀)를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등(燈)을 밝히기도 하였으며, 축생(丑生)은 언제나 왔습니다. 무인년255) 가을에 성상의 환후가 미령(未寧)하자, 희빈이 명은(命銀) 【은(銀)을 가지고 목숨[命]을 빌기 때문에 ‘명은(命銀)’이라고 한다.】 으로 기도하였으며, 태자방이 죽자 전에 배설(排設)한 물건들을 많이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만명 제석(萬命帝釋) 【만명 제석은 무녀들이 기축(祈祝)하던 신(神)의 호(號)이다.】  희빈의 본궁(本宮)에다 옮겼으며, 다른 무녀 【이른바 순흥(順興)의 어미이다.】 가 신사를 행하였는데, 희빈방에서 은(銀) 1백 냥을 태자방의 지아비 【이준일(李俊一).】 에게 주어 그 집을 팔게 하고 다른 무녀를 거처하게 하였으며, 빼앗아서 준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녀 오례(五禮)를 잡아 와서 심문하라 명하였는데, 곧 이수장이 말한 순흥(順興)의 어미였다. 대답하기를,

"본래 서강(西江) 뱃사람의 아낙이었는데, 지아비가 죽자 의탁할 곳이 없어서 태자방에 가서 살았고, 지난해 6월에 한번 신사(神祀)를 행하였을 뿐입니다. 장희재의 첩이 비록 간혹 왕래하였으나 이미 그 얼굴도 알지 못했는데, 어찌 그와 서로 알고 지냈겠습니까? 기도한 한 가지 일도 또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곧 오례 숙정·이수장과 대변(對辨)시키라 명하니, 숙정·이수장이 모두 말하기를,

"오례가 실제로 기도하는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형신(刑訊)하니, 오례가 그제서야 말하기를,

"갑술년256) 부터 장희재의 첩이 큰 무수리[大水賜] 두백(頭白)한 자와 함께 신사(神祀)를 행하였고, 매 시절(時節)마다 또한 기도하였으나, 국가의 태평(太平)을 바라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한 자는 현수(絃手) 【세속에서 무녀를 도와서 신사(神祀)를 하는 자를 현수라고 한다.】 자근녀(者斤女) 【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며, 이른바 신선방(神仙房) 【무녀(巫女)의 호(號)이다.】 이란 자가 바야흐로 기도하는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장희재의 첩과 자근례(者斤禮)와 더불어 일찍이 장 대장(張大將)의 누이가 중전(中殿)이 되도록 축원(祝願)하였습니다."

하였다. 오례의 말을 가지고 이수장을 형신하였는데, 한 차례가 채 되기도 전에 이수장이 말하기를,

"지난해 7, 8월 사이에 순흥의 어미가 한 상궁(韓尙宮) 【한시영(韓時英)이다.】  차씨(車氏) 성의 궁인(宮人) 【차축생(車丑生)이다.】 과 함께 자주 신사를 설행하였는데, 매번 신사 때마다 순흥의 어미가 활과 화살을 차고 풍악을 울리며 ‘내가 장차 민 중전(閔中殿)을 잡아서 쇠 그물 속에 넣겠다.’라고 하고, 이어서 화살을 마구 쏘면서 벽력(霹靂) 같은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내가 민 중전(閔中殿)을 쏘아서 이미 우물 가운데 던져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장 중전(張中殿)이 미구에 복위(復位)할 것이고 사도(使道)도 미구에 바다를 건너서 올 것이다.’ 하였는데, 이른바 사도란 곧 장희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이달 그믐 사이에 중전을 죽이지 못하면 다음달 그믐 사이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씨(張氏) 집 종 가운데 옥씨(玉氏) 성과 이씨(李氏) 성을 가진 자와 정월(正月) 【계집종의 이름이다.】 의 어미와 서귀산(徐龜山) 【사내종의 이름이다.】 의 누이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헌납(獻納) 어사휘(魚史徽)가 논하기를,

"영숙(英淑)의 정형(正刑)은 특교(特敎)에서 나왔는데, 다만 그 결단한 문안(文案)에서는 겨우 ‘조금도 징계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등의 몇 마디 말뿐이었으니, 옥사(獄事)의 체통에 있어서 지극히 소루(疏漏)한 것이었으나,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이 이미 계품(啓稟)한 일도 없었고, 우사(有司)의 신하들도 또한 샅샅이 심문하여 실정(實情)을 캐내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비망기의 문자만을 가지고 대충대충 취초(取招)하여, 중죄(重罪)를 결안(結案)하는 체모를 몹시 잃었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와 형조의 당상관(堂上官)을 모조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9월 28일 임자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인정문에 나아가 무녀의 딸 정 등을 친국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친국(親鞫)하였다. 오례(五禮)의 말을 가지고 정(貞)을 형신(刑訊)하니, 한 차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 말하기를,

"지난해 4월에 장희재(張希載)의 첩과 새 무녀(巫女) 【오례(五禮)를 가리킨다.】  차씨(車氏) 성의 궁인(宮人)이 가마를 타고 와서 신사(神祀)를 같이 행하였는데, 축원한 내용은 민 중전(閔中殿)이 승하(昇遐)하고 희빈(禧嬪)이 다시 중전(中殿)으로 되며 사도(使道)가 석방되어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사도(使道)가 석방되어 돌아오도록 우리가 쉽게 도모하자. 사도가 석방되어 돌아오면 희빈이 다시 중전이 되는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자근례(者斤禮)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기도를 축원할 때 차씨 성의 궁인과 나이 어린 궁인이 붉은 옷을 입고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새 무녀가 활과 화살을 잡고 마구 쏘면서 ‘내가 이미 민 중전(閔中殿)을 쏘아 맞혔다. 금년 8, 9월에 사도가 마땅히 돌아올 것이며, 또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참으로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새 무당이 숙정(淑正)과 두 궁인과 현수(絃手) 등과 더불어 방문(房門)을 걸어 잠그고 암암리에 기도하고 축원하였으나, 저는 정말 그 말한 내용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수장과 의 말을 가지고 오례를 형신하니, 오례가 대답하기를,

"과연 한 상궁(韓尙宮) 장희재의 첩과 더불어 자주 신사를 행하였습니다. 태자방이 살아 있을 때부터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활과 화살을 마련하였는데, 태자방이 죽자 그 신(神)이 저에게 내렸으므로, 제가 드디어 그 신청(神廳)을 세우고 활과 화살을 잡고 축원하기를, ‘민 중전이 이미 쇠 그물에 들어간 것이 이미 내 눈 가운데 보였으니, 마땅히 8, 9월 사이에는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숙정과 큰 무수리[大水賜]·한 상궁 등이 모두 저에게 ‘청컨대 민 중전을 죽이고 희빈을 다시 중전이 되게 해 달라는 뜻으로 축원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제가 과연 그런 말을 썼으며, 이른바 방(房) 안에서 암암리에 축원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이 밖에 방재(龐災)【세속(世俗)에서 무축(巫祝)·염매(魘魅)·고독(蠱毒)의 술책을 방재(龐災)라고 한다. 대개 방연(龐涓)257)  손빈(孫臏)을 저주한 뜻을 취한 것이다.】 의 일은 제가 본래 배우지 못하였고, 들으니, 숙정이 궁내(宮內)에서 방재를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장희재의 처 형제들이 묘산(墓山)에서 방재를 행하였다가 곧 발각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달 19일에 숙정이 저를 불러서 묻기를, ‘방재를 곳곳에서 행하였는데, 지금 비록 찾아서 파낸다 하더라도 능히 찾을 수가 없다. 나의 아비·할아비의 신(神)이 나를 도와주지 아니하여서 그런 것인데, 방재에 대한 말이 이미 나왔으니, 걱정스럽다. 만약 혹시 반중(反中)한다면, 【그 재앙(災殃)이 그 일을 주관하는 자에게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시험삼아 나를 위하여 길흉(吉凶)을 점쳐 달라.’고 하기에, 제가 점을 쳐보고 ‘9월 그믐에 불길한 일을 당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자근례(者斤禮)를 잡아다가 이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본래 태자방의 현수로서 지난해 5, 6월에 신사를 같이 행하였는데, 숙정과 큰 상전(上典), 【세속에서 궁인(宮人)을 상전(上典)이라 일컫는데, 시영(時英)을 가리킨다.】 큰 무수리[大水賜]와 태자방이 같이 앉아서, ‘장 사도(張使道)가 속히 바다를 건너올 것’을 축원(祝願)하였습니다. 그 뒤에 오례가 신사를 행할 때에 숙정 등 여러 사람들이 또 같이 참석하여 축원하기를, ‘기해생(己亥生) 【장씨(張氏)가 기해년(1659)에 났다.】 을 몰래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오례는 활과 화살을 차고 문밖으로 나가 스스로 ‘사살신(四殺神)’ 【무신(巫神)의 호(號)이다.】 이라고 일컫고 기축(祈祝)하였는데, 그 음성이 낮아서 상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큰 상전이 꾸짖기를, ‘너는 어찌하여 목을 벤다는 말을 하는가? 희빈에게 이미 세자(世子)가 있는데, 무슨 그리 상하게 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6월에 오례 숙정에게 ‘10월에 마땅히 뇌동(雷動)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원컨대 상사(賞賜)를 받게 해 주소서.’라고 하니, 숙정이 ‘만약 그와 같이 된다면 마땅히 중한 상을 받을 것이니, 반드시 세자와 기해생을 몰래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2월에 오례 숙정에게 ‘10월에 과연 뇌동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상을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숙정이 ‘비록 뇌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귀(貴)하게 될 일이 있다고 너에게 상을 주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오례 숙정에게 ‘금년에 기해생에게 3재(三災) 【무복가(巫卜家)의 말이다.】 가 있을 터이니, 삼가고 다시 신사를 행하지 말라.’고 하였고, 태자방의 지아비가 오례를 내쫓자 신당은 드디어 텅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에 이를 희빈궁(禧嬪宮)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하였다. 장씨(張氏) 집 종으로서 옥씨(玉氏) 성을 가진 자를 잡아 왔는데, 그 이름이 학옥(學玉)이었다. 이수장(李壽長)의 말을 가지고 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종은 바깥에 있고 신사의 일은 안에서 있었으니, 안팎이 막혀서 듣거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장씨 집의 계집종 신월(信月) 【즉 정월(正月)의 어미이다.】 을 잡아 와 또 이수장의 말을 가지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새로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모든 일의 본말(本末)을 알지 못합니다. 신사 때에 일찍이 참여하여 본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곧 이수장과  오례의 말을 가지고 숙정을 형신(刑訊)하였는데, 한 차례를 마쳤으나 자복하지 아니하였다. 전에 물었던 내용과 여러 사람의 말을 가지고 축생을 형신하니, 곧 자복하며 말하기를,

"지난해 9월 9일·동지(冬至)와 금년 2월 초하루에 매양 4경(更)이 되면 제가 취선당(就善堂) 서쪽 우물 가에서 찬(饌)을 마련하여 희빈의 침실(寢室)에 바치면 희빈 숙영·시영이 손을 모아 축원하기를, ‘원하건대, 원망하는 마음을 풀어 주소서. 요사이의 소원(所願)은 곧 민 중전(閔中殿)을 죽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자방 신당인 경우에는 숙정이 항상 주관하였습니다. 지난해 11월 신사(神祀) 때에는 무녀가 갓을 쓰고 붉은 옷을 입은 채 활과 화살을 가지고 춤추고 또 활을 쏘면서 ‘내가 마땅히 민 중전을 죽이리라. 민 중전이 죽는다면, 어찌 좋지 않으랴? 어찌 좋지 않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숙정·시영도 과연 손을 모아서 빌기를 ‘이와 같이 된다면 너무나 다행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11월의 신사에는 서강(西江)의 무녀 【오례이다.】 가 이렇게 하였고, 2월에 신당(神堂)을 철거하자 금천교(禁川橋) 가에 사는 무녀가 하였는데, 철생(鐵生)이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또 전의 심문한 내용과 여러 사람들의 말을 가지고 시영을 형신하였으나 시영이 기꺼이 자복하지 아니하고, 축생이 찬(饌)을 마련한 것과 희빈이 손을 모아 기도하며 축원하였다는 것은 시인하면서 오히려 말하기를,

"그 기도 축원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또 무녀 오례가 신사를 행하였다는 것은 시인하면서 단지 말하기를,

"좌윤(左尹) 장희재가 빨리 석방되기를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숙정이 자복하지 아니하므로, 압슬형(壓膝刑)을 한 차례 행하고 심문하니, 그제서야 대답하기를,

"지난해 9, 10월 사이에 오례의 집에 갔더니, 오례가 왕신(王神) 【무신(巫神)의 호(號)이다.】 의 관대(冠帶)와 붉은 치마를 입고 춤을 추면서 축원(祝願)하기를, ‘9, 10월 사이에 중전이 승하하고, 희빈이 전의 자리대로 되리라.’ 【전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라고 하였고, 축생 시영도 또한 손을 모으고 ‘참으로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례에게 점을 친 일은 이달 19일에 있었고, 과연 희빈의 명령으로 무수리와 비자(婢子)를 보내어 오례를 맞이해 묻기를, ‘근래에 취선당(就善堂)이 저절로 울리고, 옥에 갇힌 궁녀가 많으며, 재변(災變)도 또 많다. 그리고 요사이 대궐 안의 여러 곳을 모조리 조사하여 파헤치니,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하니, 오례가 ‘우리가 신당(神堂)을 철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큰 이변이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어 자근례(者斤禮)가 전에 대답한 것이 여전히 상세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시 형신(刑訊)을 더하니, 비로소 대답하기를,

"오례가 갓과 수의(繡衣)·붉은 치마를 입고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신(王神)의 첩(妾)인데, 기해생(己亥生)은 곧 나의 자손이다. 마땅히 남몰래 도움을 내려 내상고(內廂庫)를 기해생(己亥生)에게 옮겨 주소서.’라고 하였으며, 또 사살신(四殺神)이라고 일컫고, 활과 화살을 잡고 북쪽을 향해 마구 쏘면서 ‘신(神)께서 바야흐로 나가서 사냥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태자방이 설치한 신당에서 축원한 바는, 희빈이 다시 중궁이 되고 사도(使道)가 바다를 건너 석방되어 돌아와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며 세자(世子)를 안녕(安寧)하게 해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례가 신사를 설행할 때 또 활과 화살을 잡고 마구 쏘면서 ‘내가 마땅히 민씨(閔氏)를 죽이겠다.’라고 하였고, 서씨(徐氏) 【서설향(徐雪香).】 가 흰 비단 장삼(長衫)으로 제석(帝釋)을 위하여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저도 부(缶)258) 를 두들기면서 같이 참여하였습니다. 숙정은 큰 무수리와 입을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소근거렸는데, 이어서 태자방의 딸로 하여금 서찰(書札)을 만들어 희빈방에 보내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일 갑인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인정문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다. 영의정 최석정을 진천현에 부처시키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히 국문(鞫問)하였다. 시영(時英)이 자복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압슬형(壓膝刑)을 한 차례 행하니, 말하기를,

"영숙(英淑)·숙영(淑英) 숙정(淑正)의 집에 가서 각색(各色) 옷을 만들었는데, 네살짜리 아이가 입는 옷과 같았습니다. 치마는 남사(藍紗)와 홍사(紅紗)였고, 윗옷은 녹색(綠色)과 옥색(玉色)이었으며, 요(褥)는 그 모양이 보통 아이들이 드러눕기에 알맞을 크기였는데, 길이가 겨우 3자 정도였습니다. 그 밖의 집물(什物)들은 능히 열어 볼 수 없었으나, 보배와 기명(器皿) 따위는 보통 제도와 같았습니다. 기도하고 축원한 말은, 대개 희빈(禧嬪)이 전날에 원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중전(中殿)이 승하하고 다시 희빈이 중전으로 되기를 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희빈은 앉아서 축원하였고, 설향(雪香)·숙영(淑英)과 저도 또한 같이 축원하였습니다. 태자방(太子房)이 신사(神祀)에 기도할 때에 제가 과연 일어나 춤을 추었으나 기도하고 축원한 말은, 숙정이, ‘희빈께서 복위하시고 좌윤(左尹)께서 석방되어 돌아오도록 많은 경사(慶事)가 있으라.’고 한 것이엇으며, 저도 또한 손을 모으고, ‘장씨(張氏)께서 다시 중전으로 된다면 정말 다행하고 정말 다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모역(謀逆)으로 결안(結案)하고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 때 숙영은 병이 심하여 형벌을 정지하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또 형신(刑訊)을 더하였다. 채 한 차례가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기를,

"숙정과 상궁이 말을 보내어 저를 맞이하였는데, 제가 가서 보니, 숙정이 바야흐로 아이의 오색 의상을 만들며, ‘외사(外舍)의 어린아이들에게 주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그 뒤 다시 듣거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축생(丑生)이 찬(饌)을 만들어 취선당(就善堂)에 바치면, 시영·희빈·설향과 제가 과연 같이 축원하기를, ‘원하옵건대, 요기(妖氣)와 사기(邪氣)를 없애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축생이 불러서 찬을 올리고, 설향은 저에게 ‘원하옵건대, 우리 희빈을 해치는 사람을 없애주소서.’라고 하였고, 저도 ‘악인(惡人)은 없애주시고 선인(善人)은 구제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내신당(內神堂)은 과연 취선당의 서쪽 가장자리 온돌에 설치하고, 당의(唐衣) 1벌을 상자 가운데 넣어 검은 탁상에 두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른바 악인이란 희빈이 항상 전 상궁(全尙宮)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전 상궁을 없애고 다시 선량한 보모(保母)를 얻고자 하였던 것이며, 선인은 원래 누구라고 지적한 자 없었습니다."

하였다. 또 숙정을 형신(刑訊)하였는데, 두 차례 심문하자, 그제서야 대답하기를,

"3, 4년 전에 민 상궁(閔尙宮) 숙영이 와서 말하기를, ‘희빈이 금단을 보내고 이것을 가지고 옷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고 했는데, 그 모양은 네 살 정도의 아이가 입는 옷과 같았으며, 납장의(衲長衣) 2벌, 납의(衲衣)·송화색의(松花色衣)·생초의(生綃衣)·사의(紗衣)·녹사의(綠紗衣)가 각각 1벌, 홍금상(紅錦裳)·홍사상(紅紗裳)이 각각 1벌, 사폭주고(四幅紬袴)·백릉고(白綾袴)가 각각 1벌이었으며, 그 나머지는 비록 다 기억하지 못하나 합해서 계산하면 윗옷이 15, 6벌이고 치마가 10여 벌이었습니다. 희빈 민 상궁에게 양식을 주어 5월 그믐에서 7월 초하루까지 옷을 다 만들어서 대궐에 도로 바치게 하였는데, 제가 설향 숙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취선당의 서쪽 가장자리에 들여다 두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 때때로 백반(白飯)과 두병(豆餠) 등속을 보내 주었는데, 이것은 취선당의 신당에 기축(祈祝)할 때 바친 물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묻기를, ‘그 축원하는 바는 무슨 일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취선당이 저절로 울리고, 또 병환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외신당(外神堂)의 신사(神祀)에 기도할 때에 무녀가, ‘중궁전이 불길하였다. 희빈이 다시 중궁에 들어가리라.’라고 하니, 앞에 앉았던 여러 상궁들이 일제히 손을 모으며, ‘이와 같이 된다면 정말 다행하고 정말 다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무녀는, ‘중전이 만약 승하한다면, 희빈이 다시 중전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오례(五禮)가 ‘근래에 들으니, 대궐에서 방재(龐災)를 찾아 파내고자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또 큰 구렁이를 찾아냈다는 말도 있으니 진실로 두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축생이 또 와서 ‘방재의 설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취선당의 나인[內人] 가운데 취리(就理)276) 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철생(鐵生)을 형신(刑訊)하였는데, 한 차례 심문하여도 기꺼이 자복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채 친림(親臨)하기 전에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금번의 옥사는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니, 국가로서는 왕법(王法)에 있어서 반역하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가 되고, 춘궁(春宮)으로서는 인륜의 망극한 변고(變故)가 됩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법을 시행하고 은혜를 저버림으로 신자(臣子)들이 주토(誅討)하는 법을 이루게 하는 것보았다 오히려 법을 어기고 은혜를 베풀어서 춘궁을 보안(保安)하는 방도를 다하는 것이 낫지 아니할까 합니다. 어제 입시(入侍)해 잇따라 수차(袖箚)를 올려 주상께서 이것을 들어주시기를 바라 어리석은 신하의 의리를 다하고자 하였는데, 또 지엄하신 분부로 인신(人臣)의 분의(分義)를 알지 못한다고 꾸짖으시니, 신은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이른바 ‘끝까지 파헤치지 말자.’ 한 것은 여러 죄수들에 대하여 끝까지 파헤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희빈의 정절(情節)을 끝까지 파헤치고자 아니하였던 것일 뿐이니, 대개 비록 그 정절을 핵문(覈問)하여 캐어낸다고 하더라도 또한 법대로 다스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깊이 종사(宗社)를 위하는 계책으로 인륜의 변고를 선처(善處)하기를 바랐던 것인데, 천청(天聽)이 아득하여 조금도 살펴 받아들이지 아니하셨으며, 지척의 전석(前席)에서 또 엄한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처지로는 감히 조정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제집에 가만히 엎드려 성상의 견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당당한 천승(千乘)의 지존으로서 날마다 요사스런 무당과 천한 계집종을 데려다가 친히 스스로 힐문(詰問)하시니, 또한 어찌 인군(人君)의 체통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다시 맑게 성찰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번의 요사스러운 역모는 전고에 없던 바이다. 안으로는 저주하고 밖으로는 신당(神堂)을 설치해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하고자 한 정절이 완전히 드러났으니,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토죄(討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영상(領相)은 날마다 차자를 올려 기필코 구원하고자 하고, 이에 내가 친국(親鞫)하는 것을 도리어 비난하여 인군(人君)의 체모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생각건대, 아마도 간사한 정상이 혹 드러났음에도 조금도 국모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 것인가 한다. 역적을 보호자는 자는 또한 역적이다. 의리에 어둡고 막힘이 이보았다 심할 수가 없으니, 신자의 분의(分義)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대간(臺諫)은 아직도 이에 대해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아니하니, 국모의 중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지극히 해괴하였다. 영상 최석정(崔錫鼎) 중도 부처(中途付處)277) 하라."

하였다. 장령 윤홍리(尹弘离)가 인피(引避)하기를,

"신이 바야흐로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陳達)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대저 천하 고금에 막중한 것은 역적(逆賊)의 옥사(獄事)입니다. 지금 친림해 국문하시자 역적의 정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를 당하여, 잇따라 수차(袖箚)를 올리고 심지어 ‘끝까지 캐내지 말자’고까지 하였습니다. 《춘추(春秋)》의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대의를 생각하지 아니한 것이 비록 지극히 해괴하였다고 하겠으나, 미처 대간에서 즉시 논렬(論列)하지도 아니하여 엄한 교지가 이르게 되었으니, 신들의 죄는 실로 피할 수가 없겠습니다."

하고, 정언 유명응(兪命凝)이 인피하기를,

"대신의 차본(箚本)을 신이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개 그 본의는 반드시 성상으로 하여금 춘궁(春宮)을 보안하게 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논핵(論劾)하는 데 이르러서는 신들의 뜻과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예(例)대로 답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옥(鞫獄)이 바야흐로 진행중이니, 물러가서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이 말하기를,

"이번 옥사는 곧 내간(內間)의 일이므로, 외정(外庭)의 신료들은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춘궁께서 나이가 어리신데, 이처럼 망극한 변고를 당하였으니, 아마도 몸이 상하고 마음이 아플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최석정의 차사(箚辭)는 대개 사건이 발각된 뒤에 난처한 일이 많을 것이라는 점을 말한 것이고, 그 뜻은 오로지 세자의 처지를 위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희빈을 고려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오직 사리를 마땅히 개석(開釋)하셔야 할 따름인데, 엄한 교지를 거듭 내리시고 갑자기 견책과 벌을 더하시니, 아마도 수상(首相)을 대접하는 도리에 미진(未盡)함이 있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옥사가 비록 무녀와 비자(婢子)가 간범(干犯)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국모를 모해(謀害)하였으니, 흉악하기 그지없다. 지금 친국하는 것을 ‘인군(人君)의 체모가 아니다.’고 하면서 나의 몸을 기롱(譏弄)하였으니, 분의(分義)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진실로 악역(惡逆)을 분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신구(申救)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아니할 것이다. 결단코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였다. 우의정 신완(申琓)이 말하기를,

"세자(世子)께서 나이가 어린데 이처럼 망극한 변고를 당하였으니, 아마도 몹시 놀라서 몸이 상하고 마음이 아플 우려가 있을 듯합니다. 여러 신하들이 걱정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최석정(崔錫鼎)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옥사를 끝까지 파헤친다면 아마도 난처한 단서가 생길까 합니다. 그러므로 그 차사(箚辭)가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오늘 잇따라 올린 차자는 반드시 죄를 끝까지 파헤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인신(人臣)의 분의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여(李畬)와 도승지 이돈(李墩)과 승지 조태구(趙泰耉)가 서로 잇따라 그것이 역적을 비호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자, 임금이 드디어 차자를 꺼내어 여러 신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신하로서 누군들 춘궁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최석정은 역적을 구원하려고 꾀하여 반드시 다투어 이기고자 하였으니, 《춘추(春秋)》에서 역적을 토죄(討罪)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내가 죄주려고 하는 바는 역적을 비호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세자를 위했기 때문이 아니다. 역옥(逆獄)을 끝까지 다스린 뒤에 진실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어서 진달(陳達)한다면 무엇이 거리끼겠는가? 그러나 이 경우는 지성으로 죄인을 신구(申救)하고자 한 것이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재궁(榟宮)이 빈전(嬪殿)에 있는데, 옥사를 끝까지 캐내지 말라는 뜻을 가지고 시종 간쟁(諫爭)하고 고집하였으니, 비록 그가 ‘역적을 비호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하였다. 조태구 이돈이 되풀이하여 진달하였으며, 이세백 신완도 또한 견책과 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전의 차자(箚子) 가운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가련하게 여긴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이 어찌 꼭 들어맞는 말이겠는가? 건성으로 말한 것이 심하였다. 내전(內殿)을 위하는 마음이 도리어 나만 못하니, 이와 같은 신하를 죄주지 아니하고 어찌하겠는가?"

하니, 이돈 조태구와 승지 심평(沈枰)·이국방(李國芳)이 합사(合辭)하여 부처(付處)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조태구가 또 말하기를,

"전지를 받자오니 죄명이 지극히 무거운지라 사람들이 듣고서 놀라고 의혹스러워 합니다. 청컨대, 재삼 생각을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역적을 비호한다는 두 글자를 전지에 쓰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조태구가 전지를 가져다 올리고 또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다. 승지 윤세기(尹世紀)가 말하기를,

"최석정(崔錫鼎)의 차자(箚子)의 글은 미안(未安)한 곳이 많으나, 신은 역적을 다시 복역(覆逆)할 뜻은 없습니다. 다만 왕세자께서 이제 큰일을 당하였는데, 또 사친(私親)의 변고를 당하게 되니, 옛날 고수(瞽瞍)278) 가 사람을 죽였다면 순(舜) 임은 몰래 고수를 업고 도망하였을 것이라고 한 고사로 보건대, 춘궁의 정리(情理)를 미루어 알 만합니다. 금일 여러 신하들이 누군들 춘궁을 위하여 걱정하고 근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최석정의 마음도 또한 역적을 비호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니, 파직(罷職)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고, 부처(付處)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아니하고 드디어 최석정 진천현(鎭川縣)에 부처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옥사의 정상이 이미 죄다 드러났으니, 반드시 친림(親臨)하여 국문할 것이 없다. 내일부터 정국(庭鞫)279) 을 설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일 갑인 4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세자의 처지를 헤아리자는 공조 판서 엄집의 상소문

공조 판서 엄집(嚴緝)이 상소하기를,

"왕세자가 이제 막 망극한 슬픔을 당하고 또 비상한 변고를 만났는데, 어머니의 목숨을 구하려 해도 변해(辨解)할 말이 없고 은혜로 용서해 주기를 빌고자 해도 왕명이 지엄(至嚴)한지라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니, 정리가 궁박(窮迫)하여 답답한 심사가 병이 된다면, 우려(憂慮)되는 바가 어찌 국가와 관계되지 아니하겠습니까? 전하께서 희빈을 법대로 처치하시려는 것은 진실로 후일을 염려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는 나라의 큰 근본이니, 이로 인하여 끝내 몸을 상하게 되고 마음을 해치는 데 이른다면, 실로 온나라 신민(臣民)들의 눈앞에 닥친 절박한 근심이 될 것입니다. 어찌 그 먼 장래만을 염려하고 가까운 문제를 염려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미리 방비하는 방도라면, 어찌 죽음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겠습니까? 상경(常經)과 권도(權道)를 참작하여 은혜와 법을 아울러 시행하는 것도 때에 따라 변화에 대처하는 뜻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토죄(討罪)하는 데 급급해서 다시 참작하여 헤아리지 아니하시고 혹 세자의 처지를 경홀하게 여기신다면, 장차 반드시 후일에 끝없는 후회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대신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다 유시하였다."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2일 을묘 5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왕명을 받들어 좌의정 이세백 등이 정국을 내병조에 설치하고, 숙정 등을 국문하다

좌의정 이세백(李世白)과 우의정 신완(申琓)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여(李畬) 등이 왕명을 받들고 정국(庭鞫)을 내병조(內兵曹)에 설치하였다. 죄인 숙정(淑正)이 다시 공초(供招)하기를,

"방재(龐災)의 일에 대해서 어제 고한 말은 전혀 제가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가 궁 밖에 있으면서 설향(雪香)을 지휘하였다는 일도 너무나 애매합니다. 만약 설향 숙영(淑英)에게 물어본다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월(信月)의 공초 가운데 제가 흉역(凶逆)에 가담하였다는 말도 또한 너무나 애매합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숙정이 방재에 관한 한 가지 항목에 대해 처음에는 발설했다가 나중에는 숨기려는 정상을 따로 문목(問目)을 만들어 다시 엄하게 심문을 더하였더니, 어제 고한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고, 설향을 지휘한 정상도 애매하였다고 얼버무리며 끝내 실토하지 아니하니, 그 정상이 매우 지극히 간악합니다. 청컨대, 형벌을 더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숙정을 세 차례 형문(刑問)하였는데, 신장(訊杖)이 8도(度)에 이르자, 바로 공초하기를,

"재작년 9월·10월과 작년 9월·10월에 희빈(禧嬪)의 말을 따라 금단(錦段)으로 각씨(角氏) 7개를 만들고, 다홍비단(多紅緋段)으로 치마를 만들며, 남비단(藍緋段)으로 윗옷을 만들었는데, 몸통의 크기가 보통과 같았습니다. 금단은 희빈방(禧嬪房)에서 보내 왔는데, 죽은 새·쥐·붕어를 아울러 각각 7마리씩 담았습니다. 그리고 대궐에서 밖으로 내보냈던 버드나무 상자를 철생(鐵生)으로 하여금 대궐 안으로 들여 보내도록 하였는데, 철생은 혹은 내용을 알기도 하고, 혹은 내용을 모르기도 하였습니다. 설향이 글을 보내 와 보고하기를, ‘한 상궁(韓尙宮) 황씨(黃氏) 숙이(淑伊) 통명전(通明殿)·대조전(大造殿)의 침실 안에다 같이 묻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월(信月)이 고한 일은 너무나도 애매합니다."

하니, 국청에서 아뢰기를,

"상궐(上闕)의 죄인 아홉 명 중에서 숙정은 지금 바야흐로 국문하고 있고, 축생(丑生)·오례(五禮)·자근례(者斤禮)·이수장(李壽長)·정이(貞伊) 등 다섯 명은 모두 이미 승복하였으니, 아직 다시 심문할 단서가 없습니다. 숙영(淑英)이 가장 요긴하게 물어볼 자인데, 중병(重病)이기 때문에 상례대로 신국(訊鞫)할 수가 없으니, 지금 그 병세를 보아가면서 다시 신문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신월 순례(順禮)는 다른 죄수에 비하여 조금 늦추었는데, 국청의 체례(體例)로 보아 한 차례 형문(刑問)을 시행한 뒤에는 잇따라 신문하는 것이 마땅하니, 숙영·신월·순례를 청컨대 아울러 형벌을 더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숙정이 저주(詛呪)에 대한 한 가지 항목은 이미 바로 공초하였으니, 법에 의하여 결안 취초(結案取招)하고, 끌어들인 바 철생도 즉시 추문(推問)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숙이(淑伊)는 곧 숙영(淑英)이니, 그 가형(加刑)하는 문목(問目) 가운데다 숙정이 공초(供招)한 바를 덧붙여 넣어 끝까지 심문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숙영이 다시 공초하기를,

"희빈 숙정이 서찰을 몰래 왕복하였는데, 서찰을 전한 사람은 숙정의 계집종 신월이었습니다. 또 희빈이 서찰을 써서 단단히 봉해 보자기로 싼 다음 직접 저와 설향에게 주며 세수간(洗水間)의 하인 강례(絳禮) 몽렬(夢烈)을 거쳐 신월에게 주게 하였습니다. 혹은 사나흘 걸리기도 하고 혹은 하루이틀 걸리기도 하였는데, 근간에는 숙정의 서찰이 10여 일 동안 뚝 끊어지고 오지 않았으며, 금년 9월 초에 숙정이 서찰을 써서 희빈에게 들여보냈는데, 봉투의 모양이 자못 커 사설(辭說)도 많은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빈이 본 뒤에 즉시 불태웠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무슨 사설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숙정이 들여보낸 물건을 매장한 일은, 시영이 작은 버드나무 상자에 담아서 그가 입었던 치마꼬리로 덮고 저와 설향과 같이 초저녁에 통명전 서쪽가와 연못가의 두곳에 묻었는데, 묻은 물건은 각씨와 붕어였습니다. 또 통명전 뒷 계단 아래에다 한줄로 두 곳에 쌍으로 묻었는데, 묻은 물건은 금단으로 쌌으며, 또한 붕어·새·쥐 따위였습니다. 대저 통명전에는 장춘각(長春閣)이 있는데, 장춘각 모서리에 연못이 있고, 연못가를 돌아가며 섬돌이 있습니다. 재작년 10월 초저녁, 시영은 그 계단 아래에 앉고 저는 통명전의 남쪽가에 가서 사람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를 엿보았으며, 설향 통명전 남쪽가의 처마 밑에 서서 내간(內間)의 사람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를 엿보았습니다. 시영은 그가 앉아 있던 흙을 파고 묻었는데, 그 묻은 곳은 장춘각의 연못 서쪽가에 있는 섬돌의 온돌방 첫번째 칸 가까운 곳이었으며, 묻은 후에 발로 그 흙을 밟았습니다. 시영과 저와 설향 통명전의 뒷쪽가로 돌아갔는데, 저는 통명전의 동쪽으로 향하여 서고 설향은 서쪽 모퉁이에 서고 시영 통명전의 뒷쪽 계단 아래에 앉아서 한 곳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거리가 멀지 않은 땅에 또 한 곳을 정해 묻었습니다. 또 통명전의 북쪽가 뜰 가운데서 벽돌[磚石]한 장을 들어내고 금단에 싸가지고 간 물건을 묻었으며, 그 전돌은 도로 그전처럼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시영이 저와 설향과 같이 가면서 ‘설향은 반드시 이러한 말을 발설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숙영은 나의 계집종과는 다르고 또 그 마음 쓰는 것이 착하지 않으며 혹 역정을 내기도 하니, 이 말을 발설하기가 쉽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취선당으로 같이 돌아왔는데, 시영은 먼저 희빈방(禧嬪房) 안으로 들어가고 저와 설향은 문밖에 앉아 있도록 하였습니다. 제가 몰래 들으니, 시영 희빈에게 고하기를, ‘다하였습니다.’ 하자, 희빈이 ‘숙영도 또한 곳곳에 가 보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시영이 ‘비록 숙영을 시켜서 멀리 서서 망을 보게 하였으나, 이미 같이 갔으니, 어찌 그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설향 숙영을 비록 마찬가지로 본다 하더라도 설향은 저의 계집종이고, 숙영은 빌려온 계집종과 같기 때문에 명목(名目)이 이미 다릅니다. 만약 혹 이것을 숨긴다면 더욱 좋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참여하여 알게 하였던 것인데, 이 뒤에 이 말이 만약 새나간다면 반드시 숙영의 입에서 새나간 것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희빈이 ‘내가 비록 어진 마음으로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절로 의리로써 맺어진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시영이 비로소 저와 설향을 불러서 들어오게 하였기 때문에 즉시 희빈방에 들어가니, 희빈이 ‘아이들이 반드시 경계하고 부탁한 말을 먼저 누설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대로 잠자코 앉아 있었더니, 시영이 ‘너를 믿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저는 전에 희빈에게 죄를 지어 감히 그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영이 ‘네가 전의 죄과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공경하여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미 그 급료를 타 먹었으니 어찌 불공하는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시영이 ‘이 뒤로 희빈으로 하여금 꾸짖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가도록 하였기 때문에 설향과 더불어 같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밤 장차 대조전(大造殿)으로 가려고 할 때 시영 희빈에게, ‘밤이 이미 깊었으니, 다른 사람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숙영을 머무르게 하고, 다만 설향과 같이 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희빈이 ‘숙영은 여기에 머물러 꼭 붙어 있고 떠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영 설향이 같이 대조전으로 갔는데, 시영이 작은 버드나무 상자에 담긴 물건을 가지고 그가 입은 치마꼬리로 가렸으며, 설향은 빈손으로 뒤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희빈의 창 밖에 엎드려 거짓으로 자는 척 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시영 설향이 돌아와 바로 희빈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가 설향은 도로 나왔으며, 시영 희빈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설향에게 묻기를, ‘언제 돌아왔느냐?’ 하니, 설향이 ‘이미 시간이 조금 지났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 일을 하였는가?’라고 하였더니, 설향이 ‘하기는 무엇을 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곳에서 하는 일이라면 무어 다른 것이 있다고 나에게 숨기느냐?’라고 하니, 설향이 ‘어찌 숨길 일과 숨기지 아니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상궁(韓尙宮)이 나에게 ‘숙영은 너와 다르다. 숙영이 못 보았던 곳을 모름지기 말하지 말라. 이곳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곳에서는 저렇게 하였다.…’라고 하므로, 제가 ‘이미 마음을 다하여 일을 같이 하였는데, 이와 같이 숨기니, 분한 마음이 더욱 생긴다. 통명전에서는 나와 일을 같이 하였는데, 이곳은 이미 갔다가 되돌아 온 뒤에도 오히려 나에게 숨기려고 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설향이 ‘사람 가운데 지리(支離)한 사람도 있다.’라고 하므로, 제가 ‘대체 어느 쪽으로 갔더란 말이냐?’라고 하니, 설향이 ‘대조전 북쪽 마당으로 갔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북쪽 마당이라 하더라도, 단지 마당에만 갔더란 말이냐?’라고 하였더니, 설향이 ‘나는 마당 가운데에 서 있었고, 한 상궁이 북쪽 가로 들어가 화로 아래에 엎드려 있다가 도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들어가서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하였더니, 설향이 ‘지난번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이번에는 혼자 갔기 때문에 나는 오직 망을 보았다가 온 사람일 뿐이다. 물건을 묻은 곳을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밖에 다른 아는 것은 없으며, 통명전에서 한 일은 이미 죄다 아뢰었습니다. 만약 대조전의 묻은 곳을 안다면, 어찌 감히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흉모(凶謀)를 서로 내통한 것은 그 해당자가 절로 있으니, 만약 그것들에게 물어본다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안으로는 시영이 일을 주모하고 설향이 같이 모의하였으며, 밖으로는 숙정이 주모하였습니다. 그러나 흉물을 매장한 사건은 이미 위에서 아뢰었고, 이 밖에 달리 진술할 것이 없으며, 또한 다른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신월을 두 차례 형문(刑問)하고 위차(威次)를 베풀자, 바로 공초(供招)하기를,

"기축(祈祝)하는 말에 대해서는, 제가 무녀의 집에 갔을 때 신사(神祀)가 거의 다 끝났으므로 자세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녀 계대(戒大)와 상전인 장 대장(張大將)의 첩이 축원하기를, ‘장 사도(張使道)가 석방되어 돌아오지 못하니,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하였고, 또 ‘제발 살펴주소서. 제발 살펴주소서. 만약 빨리 석방되어 돌아오지 아니하면 대궐 안이 불안하기가 마땅히 그지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서찰을 전하여 준 일은 상전이 서찰을 내어 주고 저로 하여금 대궐 밖으로 가서 덕창(德昌)의 어미에게 전하게 하였는데, 혹은 서씨(徐氏)에게 전하여 주기도 하고 혹은 강례(絳禮)에게 전하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서찰을 봉한 서찰의 크기는 사람의 팔뚝만 하였으며, 봉한 물건이 무엇인지 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밖에 달리 아뢸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순례(順禮)를 두 차례 형문(刑問)하고 신장(訊杖)이 30도(度)에 이르자, 바로 공초하기를,

"작년 11월에 큰 나인[內人]이 대궐에서 나와서 장 대장의 첩을 맞이하여 같이 앉아 축원하기를, ‘희빈께서 태평하시고 중궁전은 승하하소서.’라고 하였으며, 그 뒤에 흰 머리의 늙은 궁인이 또 장 대장의 첩과 같이 와서 무녀의 집에 앉아 무녀와 더불어 같이 축원하기를, ‘우리 말루하주(抹樓下主)283) 는 태평하시고 태평하시며, 중전 말루하주는 마땅히 승하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옥 마직(玉馬直) 이 마직(李馬直)에 대해서는, 그들이 본방(本房)의 마직(馬直)인지라 저는 알지 못합니다. 이 밖에 더 아뢸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철생에게 숙정이 공초한 사연(辭緣)을 그 문목(問目)에 덧붙여 넣어서 형벌을 더하여 끝까지 심문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국청에서 이뢰기를,

"죄인 숙영이 저주한 정상과 묻어둔 장소를 아울러 실토하였으니, 스스로 결안 취초(結案取招)하고, 율(律)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하건대, 흉물(凶物)을 매장한 장소를 이미 가리켜 진달하였으니, 장소마다 발굴해 낼 즈음에 혹시 다시 심문할 단서가 없지 아니할 것이니,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사세를 보아가며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그 공초한 말 가운데, 중간에서 서찰을 전달한 자인 신월과 세수간(洗水間)의 하인 강례(絳禮)·몽렬(夢烈) 등은 모두 관련되어 끌려들었으니, 강례와 몽렬 두 사람도 또한 일체로 끝까지 심문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모조리 잡아다가 가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철생을 두 차례 형문하였는데, 신장(訊杖)이 4도(度)에 이르자, 바로 공초하기를,

"설향 숙영이 무녀의 집에 왕래할 때에 출납한 물건을 전담한 일은, 축생이 저를 시상 무수리[市上水賜]로 정하였기 때문에 과연 부득이 제가 전담하였습니다. 오례가 기도할 때에 큰 상전 무수리[大上典水賜]와 장희재(張希載)의 첩이 과연 같이 참여하였습니다. 오례는 다홍수(多紅綉)의 치마와 자수(紫綉)의 윗옷을 입고 일어나 춤추며 말하기를, ‘장 중전(張中殿)께서는 옛날대로 전의 보좌(寶座)에 들어가도록 하며, 죽일 만한 사람은 죽이고, 자리에 들어갈 만한 사람은 들어가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무녀는 지아비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불결하였다고 하여 손짓해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 축사(祝辭)는 자세히 듣지 못하였습니다. 금천교(禁川橋)에 사는 무녀로 하여금 신당(神堂)을 옮겨 설치하게 한 일은, 계대(戒大)·자근례(者斤禮)와 큰 상전 무수리와 한 상궁, 장 대장의 첩이 금천교의 무녀를 가서 맞이하여, 외신당(外神堂)을 본궁에 옮겨 설치하고, 고비(高飛)를 꽂아서 그대로 신사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축원하는 말은 국가가 태평하라는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작년 9월·10월 사이에 작은 버드나무 상자를 들여보내도록 한 일은, 장희재의 첩이 생포(生布) 보자기로 싸서 봉하고 도장을 찍은 뒤 설향에게 전하여 주라고 하였기 때문에 제가 과연 전하여 주었을 뿐이지, 그 안의 물건은 이미 굳게 봉하였기 때문에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밖에 달리 아뢸 바는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정국(庭鞫)을 우선 파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3일 병진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궁녀 숙정·숙영·축생 등을 모두 결안 취초하고 군기시 앞길에서 참형시키다

대신과 금부 당상(禁府堂上)이 국좌(鞫坐)를 내병조(內兵曹)에 설치하였다. 죄인 강례(絳禮)가 공초(供招)하기를,

"제가 대궐에 들어간 지가 지금 이미 7년이 되었습니다. 철생(鐵生)이 한 달마다 두세 번씩 버드나무 상자를 가지고 희빈에게로 와서 전하였는데, 혹은 ‘무녀(巫女)의 집에서 왔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장씨 본댁(本宅)에서 왔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서찰은 철생이 간혹 1, 2일 만에 간혹 3, 4일 만에 와서 희빈에게 전하였는데, 혹은 ‘무녀의 집에서 왔다.’고 하고, 혹은 ‘장씨 본댁에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버드나무 상자와 서찰은 희빈이 내보낸 것이 또한 들여보낸 수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만 철생과 창차비(窓差備)에게 전해주었을 뿐이고, 봉한 물건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고, 몽렬(夢烈)이 공초하기를,

"저는 희빈의 세답방(洗踏房)의 하인으로서, 궁 밖에서 버드나무 상자와 서찰을 들여오기도 하고, 때때로 간혹 궁 안팎으로 내보내거나 들여보내기도 하였으나, 능히 그것이 어느 곳에서 오고 어느 곳으로 가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버드나무 상자 위의 표지(標紙)를 본 적이 있는데, 혹은 장의동(壯義洞)이라고 쓰기도 하고, 혹은 중부동(中部洞)이라고 쓰기도 하였습니다. 장의동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 중부동은 곧 숙정(淑正)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봉한 물건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니,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축생(丑生) 오례(五禮) 자근례(者斤禮)는 자복을 한 뒤에도 혹 다시 물어 볼 단서가 있을까 염려스러웠으므로, 우선 처단하지 말자는 뜻을 탑전(榻前)에서 정탈(定奪)286)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 죄인들을 차례로 법대로 처단하고 다시 더 기다릴 일이 없으니, 아울러 즉시 결안 취초(結案取招)하고, 율에 따라서 시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철생·신월·순례 등은 형벌을 더한 뒤에 문목(問目)의 사연(辭緣)을 거의 다 바로 공초하였으나, 철생은 ‘나는 봉한 물건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숙정의 공초에서도 또한 ‘혹은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반드시 그 정상을 알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기도하는 쌀과 찬을 이미 자기가 맡아가지고 갔으며, 흉한 잡물(雜物)을 묻을 때에도 또한 왕래하며 전하여 들여 보내어 그 일을 도왔으니, 비록 정범(正犯)과 일체로 처단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알았거나 몰랐거나를 막론하고 옥사의 체모에 있어서 끝내 용서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신월·순례는 당초 심문한 바를 그들 자신이 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그가 또한 신사(神祀)를 참견(參見)하였다고 공초하였으며, 신월이 서찰을 전한 것도 또한 현저한 정상이 있는 것은 아니니,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른 죄인은 한꺼번에 계품(啓稟)하여 처리하겠으나, 강례·몽렬은 이미 자복을 한 죄인들에 의해 끌려 들어왔는데, 그 말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다만 잡아오도록 청하였을 뿐입니다. 그들이 공초한 사연을 살펴보건대, 서찰을 출납한 것을 감히 발명(發明)하지는 못하였는데, 또한 명백하게 의심할 만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형문(刑問)을 청하는 것은 이미 몹시 어려운 데 관계되고 국옥(鞫獄)의 체모도 무거우니, 또한 감히 마음대로 방송(方送)을 청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결정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철생은 비록 정범(正犯)과 일체로 처단할 수가 없다 하더라도 결코 죽음을 용서해 주기 어렵다. 결안 취초하고 율에 따라서 처단하라. 강례 몽렬은 아울러 방송하라. 신월 순례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무일(武一)을 잡아오니, 납초(納招)하기를,

"작년 11월 초와 그믐 사이에 두 번 태자방(太子房)의 집에서 신사(神祀)를 행하였는데, 새로 신이 내린 무녀(巫女)가 그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전(上典)의 첩이 앞으로 나갔으므로 저도 또한 가서 구경하였으나, 밖에서 들여다보았을 뿐이요, 들어가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떠어떠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는지와 기도한 말들을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하자, 국청에서 아뢰기를,

"이번의 무일은 곧 이수장(李壽長)이 공초한 가운데 말한 이 마직(李馬直)이란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공초한 말을 살펴보면 옥학신(玉學臣)과 다를 바가 없으니, 한꺼번에 계품(啓稟)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국청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여러 죄인들 가운데 차례대로 법을 시행한 자 이외에 이수장 정이(貞伊)는 태자방 무녀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들이 바른대로 공초한 것으로 인하여 옥사의 정상이 비로소 드러났는데, 비록 그들 자신이 간범(干犯)한 일은 없다 하더라도 흉악한 역모를 기도(祈禱)하는 정상은 이미 보았음에도 엄하게 심문한 뒤에야 비로소 발고하였으니, 그 정상을 알고도 앞서 고하지 아니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월 순례 숙정의 계집종으로서, 신사를 행할 때 따라가 참여하였던 것이니, 비록 그 정상과 범죄가 조금 가볍다 하더라도 감사(減死)하여 죄를 정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무녀 열이(烈伊)는 기도할 때에 음흉한 정상이 비록 발각되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그 신당(神堂)의 의복을 모두 그의 집에 옮겨 두었으니, 오례(五禮) 등이 중형을 받은 뒤에 마땅히 징치(懲治)하여 먼 곳으로 유배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형조로 이송(移送)하여 법에 따라서 처단하게 하소서. 일렬(一烈)은 여러번 죄인의 공초에 나왔으나 여러 죄수들을 추핵(推覈)할 때 따로 흉악한 역모에 참여한 흔적이 없으며, 이준일(李俊一)은 처음에 태자방의 무녀의 지아비였으므로 혹시라도 빙문(憑問)할 단서가 있을까 생각하여 단지 잡아다가 가두었을 뿐입니다. 지금은 사건의 단서가 모두 드러났으며, 다시 물어볼 만한 일도 없습니다. 옥학신 무일 숙정이 신사에 기도할 때에 비록 ‘따라갔다.’라고 하나, 이미 여복(女僕)과는 달랐으며, 같이 참여하여 기도한 일은 없었던 듯합니다. 위의 네 사람 등을 아울러 참작하여 분간(分揀)한다면, 아마도 적당한 방도를 얻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숙정·숙영·축생·오례·자근례 등은 모두 결안 취초(結案取招)하고 군기시(軍器寺)의 앞길에서 참형(斬刑)에 처하였으며, 철생 당현(堂峴)에서 참형에 처하였다. 이수장 정이·신월·순례·열이 등은 형조에 이송하였으며, 일렬·이준일·옥학신·무일 등은 방송(放送)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정국(庭鞫)을 파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3일 병진 3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모역한 죄를 실토한 숙정의 결안 내용

죄인 숙정(淑正)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3, 4년 전에 민 상궁(閔尙宮) 숙영(淑英)이 와서 말하기를, ‘희빈이 금단(錦段)을 내보내어 옷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그 모양은 네 살 먹은 아이가 입는 옷과 같고, 납장의(衲長衣) 2벌, 납여의(衲女衣)·송화색여의(松花色女衣)·생초여의(生綃女衣)·사여의(紗女衣)·초록사여의(草綠紗女衣) 각각 1벌, 다홍대단(多紅大段) 치마·남대단(藍大段) 치마·다홍대사(多紅大紗) 치마 각각 1벌, 사폭면주(四幅綿紬) 바지·백릉(白綾) 바지 각각 1벌 등 비록 그 이름을 능히 다 기억할 수가 없으나, 합하면 옷이 15, 6벌이었고 치마는 10여 벌이었다. 민 상궁이 5월 그믐날 궁에서 나와 7월 초하루까지 다 만들었으며, 7월 초하루에 대궐 안으로 도로 들여갔다. 대개 희빈의 꿈에 이미 죽은 공주가 와서 「옷을 입고 싶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설향(雪香) 숙영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답하기를, ‘취선당(就善堂)의 서쪽 가에 들여다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의복을 들여간 뒤에 혹은 백반(白飯)이나 혹은 두병(豆餠)을 때때로 내보내었는데, 물어보았더니, ‘취선당의 신당(神堂)에서 기도할 때에 바친 물건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 기도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취선당이 저절로 울리고 또 병환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외신당(外神堂)의 신사(神祀) 때에 무녀가 ‘중전 전하가 만약 없어진다면, 희빈께서 다시 중전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저도 같이 축원하기를, ‘다시 귀하게 되면, 정말 다행스럽고 정말 다행스럽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재작년 9, 10월에 희빈의 말로 인하여 각씨(角氏) 7개를 만들어 보내었는데, 다홍비단(多紅緋段)으로 치마를 만들고 남비단(藍緋段)으로 옷을 만들었으며, 죽은 새·쥐·붕어 각각 7마리를 아울러 대궐에서 내보낸 버드나무 고리에 담아 철생으로 하여금 대궐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설향이 글로 보고하기를, ‘한 상궁(韓尙宮) 숙이(淑伊) 통명전(通明殿)·대조전(大造殿) 침실 안에다 같이 묻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역(謀逆)이 적실(的實)한 죄입니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3일 병진 8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세자를 보전하는 방안으로 장 희빈을 용서하자는 판부사 서문중의 상소문

판부사(判府事) 서문중(徐文重)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이제 죄인들을 잡아서 나라의 법을 이미 시행하였으니, 특별히 희빈(禧嬪) 한 사람을 너그러이 용서하도록 명하시어 세자(世子)를 위안하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保全)하는 바탕을 삼는다면, 또한 어찌 나라의 법을 크게 어긋나게 하는 데 이르겠으며, 어찌 상경(常經)과 권도(權道)를 처리하는 방도에 부합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의 뜻을 이미 대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다 유시하였다. 경은 그리 생각하고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8일 신유 8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희빈 장씨를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 한 죄로 자진하게 하라고 하교하다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내전(內殿)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몰래 모해하려고 도모하여, 신당(神堂)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祈祝)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는 바이다.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후일에 뜻을 얻게 되었을 때, 국가의 근심이 실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대 역사에 보더라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 나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장씨는 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라. 아! 세자의 사정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였겠는가? 만약 최석정(崔錫鼎)의 차자의 글과 같이 도리에 어긋나고 끌어다가 비유한 것에 윤기(倫紀)가 없는 경우는 진실로 족히 논할 것이 없겠지만,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춘궁을 위하여 애쓰는 정성을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다시 충분히 생각한 결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처분을 버려두고는 실로 다른 도리가 없다. 이에 나의 뜻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유시하는 바이다."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8일 신유 10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부교리 권상유 등이 세자 보안을 위해 장 희빈의 구명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부교리 권상유(權尙游) 부수찬 이관명(李觀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전의 비망기에 의하여 자진(自盡)하게 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었습니다. 지금 위명(威命) 아래서 서로 이끌고 와 청대(請對)하는 것은, 폐부에 들어 있는 속마음을 지척지간에서 직접 진달(陳達)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전하의 처분은 대의(大義)를 증거로 끌어댔으나 여러 신하들이 염려하는 바는 춘궁을 보안(保安)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비록 오늘의 처분이 있어도 춘궁을 손상시키는 일이 털끝만큼도 없다.’고 하신다면, 진실로 말참견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그렇지 아니할 경우, 우리 춘궁의 어린 나이로서는 망극한 변고를 당해 만의 하나 손상될 염려가 있으니, 온나라의 신민(臣民)들이 세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진실로 감히 명(命)을 들을 수가 없는 점이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6일 기사 1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작은아기의 공초 내용

국청 죄인(鞫廳罪人) 작은아기[者斤阿只]가 공초하기를,

"당초에 숙원(淑媛)께서 왕자를 낳아 기사년318) 에 원자(元子)로 봉해졌을 때의 일입니다. 숭선군(崇善君)이 살아 있을 때 동평군(東平君)이 세자의 어머니를 마땅히 중궁(中宮)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봉서(封書)로 숙원에게 전해 보내고 이것을 주상께 주달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봉서를 들여보낼 적에 제가 그것을 뜯어 보았기 때문에, 저도 또한 참여하여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숙정(淑正) 동평군 구사(丘史)319) 로서 그 봉서를 가지고 왕래할 적에 제가 그 봉서의 일을 참여하여 들었던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뒤로는 여러 차례의 봉서를 혹시 제가 참여하여 들을까 염려하여 저에게는 완전히 감추고 숨겼습니다. 그 뒤 봉서 때문이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미구에 과연 즉위(卽位)하였습니다. 제가 하량교(河梁橋)에 살 때에 언문(諺文)으로 쓰여진 익명서(匿名書)가 여러 차례 담을 넘어 던져졌는데, 그 사연은, ‘이항(李杭)이 반적(叛賊)들을 종용하여 민 중전(閔中殿)을 배척하여 폐하게 하고, 장희재가 조정의 정사(政事)를 맡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시어미가 저의 남편을 불러서 ‘전후의 익명서는 글자가 잘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 능히 잘 볼수가 없어서 번번이 불에 태워버렸는데, 이번 익명서의 사연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하니, 저의 남편이 ‘이 익명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흉악한 사람에게서 나왔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흉악한 사람이란 바로 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흉악한 사람을 능히 일찍 없애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흉악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고 하였기에 이어서 더불어 다투고 힐난하였는데, 그가 저를 마치 원수처럼 대했기 때문에 저의 집 친족은 한 사람도 그 집에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술년320) 이 되기 1년전부터 저의 남편이 저를 전보았다 상당히 후하게 대하였으며, 또 저의 집 조카 김이만(金以萬)을 불러서 혹은 집을 팔도록 하기도 하고, 혹은 토지를 사들이도록 하기도 하였으므로, 김이만이 이때부터 자주 왕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또한 자주 볼 수가 있었으며, 또 저의 남편은 첩의 집을 저의 집 사랑채 앞에다 사두었습니다.

갑술년이 되어 저의 남편이 의금부에 붙잡혀 간 뒤 김이만 이의징(李義徵)의 아들과 그 사촌 매부로서 유생(儒生)인 박씨 성을 가진 사람과 저의 남편의 첩의 친족으로서 일찍이 전옥 봉사(典獄奉事)를 지낸 안가(安哥)라는 자와 정승 김덕원(金德遠)의 장손과 이의징의 자식과 혼인을 맺었다가 여덟살 짜리 아들을 둔 상처(喪妻)한 자가 매양 언제나 밤을 틈타 저의 남편의 첩의 집에 모였다고 합니다. 제가 김이만을 불러서 묻기를, ‘나는 너에게 고모가 되니 와서 보는 것이 마땅하나, 숙정의 집에는 무슨 일로 뻔질나게 가느냐?’라고 하니, 김이만이 대답하기를, ‘마침 숙정의 집에 왔더니, 이 사람들이 장 대장(張大將)의 일이 오래도록 정계(停啓)되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소식을 물어 보려고 와서 모였다고 하며, 나도 또한 거기에 앉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어서 그를 경계하고 가지 말라고 하였더니, 김이만이 대답하기를, ‘숙정의 집에 왕래하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다고 이처럼 금지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어느날 밤 삼경(三更)쯤에 숙정이 화약을 담은 나무통을 가지고 와서 ‘한 놈이라도 배반하면 이것을 그 집에 불질러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집을 팔고 하량교로 이사간 뒤 어느날 숙정이 몇 줄의 서찰을 가지고 와서 저더러 ‘이 글은 영감(令監)이 아들에게 보내신 글이다.’ 하였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너의 어미는 너무 인색하여 기꺼이 남에게 잘 주지도 아니한다. 김이만이 나에 대해서 돌봐주는 일이 많았으니, 너는 나를 위하여 의당 어떠한 물건을 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달리 줄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저의 빈집을 빌려 주었습니다. 병자년이 되기 1년 전 연서역(延曙驛)에서 비석을 쳐서 부순 뒤 이듬해 3월쯤에 김이만이 와서 저더러 ‘산소에 작변(作變)한 일이 있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종을 보내어 지켜야 한다.’고 하기에 저의 시어미와 제가 종 업동을 보내어 수직(守直)하게 하였습니다. 업동이 나무 인형을 파내 온 뒤 산소의 종 지일(枝一)의 아내와 이명(二明)의 아내가 와서 ‘업동이 나갈 때에 업동이 「14, 5일 사이에 찾아낼 물건이 있는데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업동이 알고 있는 일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업동에게 따져서 물었으나 업동이 끝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업동이 국청(鞫廳)의 공초에서 일찍이 14, 5일이라는 말이 저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도리어 저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니, 저는 실로 원통하고 억울합니다. 또 당초에 익명서와 방재(龐災)의 말을 제가 지어낸 것이라고 하였는데, 저의 남편과 숙정이 이 따위의 말로 저에게 죄를 뒤집어씌어서 죽이려고 한 계략이었습니다. 김이만은 위에서 말한 박씨 성을 가진 사람과 이의징의 아들과 김정승의 손자와 민암의 후실의 처조카 정 내승(鄭內乘) 숙정의 친사촌 안 주부(安主簿)와 저의 친족 조카 안 봉사(安奉事) 등과 더불어 항상 왕래하면서 같이 모의하였는데, 숙정이 그 집에 장차 불을 지를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저의 집 사랑채에 와서 잤습니다. 이때가 곧 업동을 연서역으로 내보낸 다음이었습니다. 숙정이 저의 집에 와서 잔 지 6, 7일 뒤에 업동이 과연 나무 인형 등의 물건을 찾아 왔으며, 숙정 윤 별검이 같이 보고 ‘이것은 흉물이다. 이와 같은데도 어찌 태연히 보아 넘길 수 있겠는가? 반드시 마땅히 구문(究問)해서 캐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숙정이 집을 옮겨 간 다음 어느 날 저녁 숙정 서 내승(徐內乘)의 동생으로 서신(徐身)이라 이름하는 자가 저의 집에 와서 저의 죽은 아들을 불러서 묻기를, ‘그 파낸 흉물을 내버렸는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가?’라고 하자, 저의 아들이 대답하기를, ‘아직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 유생의 상소가 과연 나와 그 사건이 드디어 발각되었습니다. 전부터 숙정의 집에 모여 있었던 무리들이 이러한 일을 함께 꾸며내었으니, 시인(時人)321) 들을 모해하려 한 계략인 듯하였습니다.

또 중궁전께서 승하하여 성복(成服)한 뒤에도 숙정이 와서 저에게 ‘일찍이 장 상궁(張尙宮)이 그 동생 장천한(張天漢)과 더불어 재산을 분배하는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어 화목하지 못한 일을 희빈에게 글로써 알렸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은 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내가 능히 장 상궁에게 바로 물어 볼 수가 없다. 금번 국휼(國恤) 때 희빈이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나를 위해서 장 상궁에게 자세히 물어봐 달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네가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숙정이 ‘희빈과 여러 후궁들이 일체 상복을 입는지의 여부를 내가 알고 싶어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다시 이것을 물었더니, 숙정이 ‘이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그 알고 싶어하는 사람을 굳이 물었더니. 숙정이 ‘이러한 시절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 내년 봄에 절로 마땅히 좋은 일을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묻기를,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네가 혹시 무당의 말을 듣고 이런 말을 하느냐? 나 또한 이 따위의 말을 들은 것이 많다. 너는 다시 말하지 말아라.’ 하였더니, 숙정이 ‘이것은 무당의 말이 아니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여러 차례 물어보았지만 끝내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뒤 윤 별검의 둘째 아들이 저에게 와서 ‘얼굴을 알지 못하는 어떤 한 사람이 와서 「판서 오시복(吳始復) 희빈의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말하고자 한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세하게 알 길이 없다. 이곳에서는 반드시 알 수가 있을 터이니, 자세히 탐문하여 일러 달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장 상궁에게 전언(傳言)하기를, ‘상궁이 오랫동안 궐중(闕中)에 출입하지 아니한 끝에 지금 비로소 들어갔다가 도로 나왔는데, 내간(內間)의 일에 대해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니, 내가 가서 뵙고자 한다.’라고 하였더니, 장 상궁 방자(房子)322) 를 시켜 전언하기를, ‘왕래하는 것은 번거로우니 꼭 와서 만날 것이 없다. 제가 상궁의 방자에게 ‘희빈의 상복을 입는 일을 알고자 한다.’라고 하니, 방자가 ‘희빈은 내간에 계시므로 그 복색을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다시 윤 별검의 아들에게 ‘상궁의 집에 물어 보았더니,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라고 하니, 윤가(尹哥)가,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와서 묻는 것이니, 내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무방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윤 별검의 아들이 또 저의 집에 와서 ‘내가 숙정의 집에 가서 상복의 일을 물었는데 그도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숙정의 집에 궐내에서 내보낸 소비(少婢)로서 애정(愛正)이라 이름하는 자가 저의 집에 왔기에, 제가 묻기를, ‘근래에 숙정의 집에 왕래하는 자가 누구이던가?’라고 물었더니, 애정이 ‘양반이나 혹은 양반의 가노(家奴)가 왕래하였는데, 그들이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나 우리들을 능금나무 아래로 물리쳤으므로, 그 사이의 말들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전날 희빈이 상복을 입는 일을 윤 별검의 아들에게 물었던 자가 또 저의 집에도 와서 ‘오 판서가 종을 보내어 상복을 입는 일을 숙정의 집에다 물었는데, 숙정도 또한 자세하게 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내가 다시 알고자 하여 여기에 왔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궐내와 통하지 못하므로 나도 또한 알지를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한성 좌윤(漢城左尹)이 「희빈은 상복을 입을 수가 없다」는 일로 상소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저와 상의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이의 모의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금년 여름 사이에 저의 남편이 저의 아들에게 보낸 글을 보았는데, 그 봉서 안에 윤 첨사에게 보내는 서찰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그 글을 뜯어보니, ‘이 여자가 집에 있으면서 흉악한 말을 지어내고 숙정이 궐내에서 방재(龐災)한 일을 누설하여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한다. 이 여자야말로 어찌 흉악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으며, 이 여자란 저를 가리키는 것 같았습니다. 또 제가 서인(西人)과 교결(交結)하였다고 하였는데, 대개 저의 시어미가 살아 있을 때 안동 방동(安東坊洞)의 권 도사(權都事)의 집과 서로 친했고, 판서 이언강(李彦綱)은 바로 권 도사의 맏사위였기 때문에, 연달아 보낸 저의 남편의 서찰 중에다 이른바 제가 서인과 교결하였다고 한 것은 실로 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주에서 보내 온 서찰을 윤 첨사에게 사람을 시켜 현납(現納)하게 하였으미, 그가 허다한 이야기를 알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재작년 7월에 저의 사돈 남 생원(南生員) 숙정과 같이 한 집에 들어갔는데, 남 생원이 아들을 잃었을 때 윤 별검이 가서 조문한 뒤 숙정을 만나보기를 원하였더니, 숙정이 ‘여자 손님이 방금 왔으니 뒷날 다시 오라.’라고 하였습니다. 윤 별검이 창틈으로 엿보았더니, 민암(閔黯)의 후실 처조카로서 일찍이 내승(內乘)을 지냈던 자가 숙정과 서로 대면하여 밀담(密談)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사연은 들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8월 16일 사이에 숙정이 와서, ‘명년 봄에 반드시 환국(換局)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묻기를,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라고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남인이 때를 만난 것은 불과 6, 7년에 지나지 아니하고, 서인은 10년이 한정이니,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정절(情節)을 죄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능히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이른바 봉서(封書)란 바로 기사년 동평군(東平君) 봉서 사건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데, 원래 저에게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서인이 원통하게 죽고 남인이 역적질을 한다.’라고 한 일은 기사년 환국할 즈음에 서인으로서 원통하게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남인들이 하는 짓이 역적과 무슨 다른 점이 있는가라는 뜻입니다. 이밖에 달리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죄인 무일을 두 차례 형문하고 신장(訊杖)을 30도(度)나 쳤으나, 전에 공초한 내용과 가감(加減)이 없었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작은아기는, 계사(啓辭)의 사연을 가지고 따로 문목(問目)을 만들어서 되풀이하여 추문(推問)하였더니, 그가 바친 공초가 번잡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개 그 주된 뜻은 죄를 숙정에게 돌리고 저는 스스로 빠져 나가려는 계략에서 전적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형문을 더하였을 때 핑계댄 바 중대한 일이 있어 마치 급변(急變)에 관계된 것이 있는 양했던 것과는 크게 같지 아니한 점이 있으니, 그 정상이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다만 그가 말한 것이 비상한 데에 관계되니, 그가 증인으로 끌어들인 각인(各人)을 마땅히 아울러 청하여 잡아다가 심문하여야 할 것이나, 먼저 간증(看證)323) 을 물어 그 허실을 알아낸 다음에 바야흐로 잡아 오기를 청하는 것이 또한 옥사의 체모에 마땅할 것입니다. 그 중에 윤정석의 둘째 아들은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물은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고, 숙정의 계집종 애정은 그 집에 와서 모여서 모의한 사람이 누구누구인지 반드시 알 것이며, 서호(徐琥)는 연서역의 나무로 만든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탐문한 다음에 계속하여 상소를 올렸던 자이니 그 정적(情跡)이 또한 매우 수상합니다. 이 세 사람을 우선 모두 잡아 올 것을 청합니다. 윤정석 숙정의 집에 갔을 때 숙정이 청한 정 내승(鄭內乘)이라는 자가 와서 앉아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엿보았으며, 윤순명(尹順命) 장희재의 서찰 중에 있는 글 뜻에 대해 물어 볼 만한 단서를 가지고 있을 듯한데, 지금 잡아다 가두었으니, 청컨대 이것으로 문목(問目)을 만들어 아울러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죄인 업동은 전후로 바꾸어 한 말들을 이미 사실대로 자복하였으니, 그가 나무로 만든 물건을 파내어 흉악한 음모를 도와준 죄를 즉시 결안 취초(結案取招)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기는 아직도 실정을 다 털어놓지 아니하였으니, 추문하는 사이에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둘 것을 청합니다. 무일은 줄곧 형장(刑杖)을 참으면서 자복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형문을 더하게 하소서. 작은아기는 전의 문목의 사연도 아직 실토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그대로 형벌을 더할 것을 청해야 할 것이나, 그가 증인으로 끌어들인 여러 사람들을 잡아 오는 대로 질문할 일이 없지 아니할 듯하니, 잇따라 심문하였다가 지레 죽게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선 형신을 중지하고 그대로 가두어 둘 것인지를 감히 계품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추국(推鞫)은 우선 파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8일 신미 3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윤순명·윤정석·애정·이항·안여익·김태윤·무일 등의 공초 내용

국청 죄인 윤순명(尹順命)이 다시 공초(供招)하기를,

"정축년327) 8월의 일입니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장희재의 맏아들이 죽었을 때 장희재의 처(妻)가 ‘장희재의 첩 숙정(淑正)이 방재(龐災)로 그 아들을 죽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장희재가 왕래하던 노복의 전하는 말을 듣고 저에게 글을 보냈었는데, 글에다 ‘이 여자가 숙정이 방재로 아들을 죽였다는 말을 지어내니, 이것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는 계략에서 나온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년 여름 장희재의 서찰 사연에는, ‘의복과 양식을 전혀 갖추어 보내 주지 아니하니, 내가 장차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죽을 것이다. 이 여자의 하는 짓은 토막내어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후의 서찰이 모두 작은아기에게 있었는데, 그로 하여금 현납(現納)하게 하였으니, 그 곡절을 알 것입니다. 이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죄인 윤정석(尹廷錫)이 다시 공초하기를,

"재작년 7월 남 생원(南生員)이 아들을 잃었을 때 제가 가서 조문하고서 이어 숙정을 만나 보기를 청하였더니, 숙정이 ‘여자 손님이 안에 있다.’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숙정을 불러내어 보았습니다. 또 이른바 민암(閔黯)의 처남(妻娚)으로서 정 내승(鄭內乘)이라고 하는 자가 숙정이 있던 곳에 있었기 때문에 제가 과연 그를 보았으나, 서로 대면(對面)하여 밀담(密談)을 나눈 사연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죄인 윤보명(尹甫命)이 공초를 바치기를,

"중전께서 승하하신 뒤 제가 포도청 군관(軍官)으로서 포도청에서 장차 집으로 돌아가려고 문밖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영 장관(御營將官)으로 조시경(趙時卿)이라고 이름하는 사람이 길가에서 저와 서로 마추쳤는데, 저에게 묻기를, ‘장 대장(張大將)의 안부가 어떠한가?’라고 하고, 이어서 ‘오 판서(吳判書)가 망곡(望哭)하러 서울로 들어갔을 때 나도 마침 가서 문안을 드렸더니, 오 판서가 「장 대장 집이 가장(家藏)328) 을 모두 팔아서 생활이 지극히 곤란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아주 마음 아프고 불쌍하였다. 그 친족이 있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어떠 어떠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시경이 또 묻기를, ‘근래의 희빈의 문안은 어떠한가? 그리고 이번 국휼(國恤) 때 희빈이 상복을 입는 것은 어떻게 한다던가?’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나는 궐내(闕內)와 서로 통하는 일이 없으므로, 전혀 듣거나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제가 가서 숙정을 만나 조시경이 물었던 말을 전하였더니, 숙정이 ‘오 판서가 어찌하여 희빈 장희재의 안부를 묻는가? 이와 같이 괴이한 말을 뒤에 다시 전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무안하여 돌아왔으며, 전후에 들었던 사연을 작은아기에게 말한 것은 확실하나, 상세하게 탐문(探問)해서 보고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원래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죄인 애정(愛正)이 공초하기를,

"상전의 집에 항상 왕래하던 사람은 바로 장희천(張熙川)이라고 일컫는 자와 탑동(塔洞) 나으리, 홍문입동(紅門立洞) 나으리 및 안 봉사(安奉事) 안 봉사의 아들과 붙잡혀 갔던 사람인 김 직장(金直長) 장희천의 아우였습니다. 또 이밖에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또한 왕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반의 가노(家奴)가 왕래한 일은, 탑동 홍문입동 두 곳에서 때때로 계집종을 보내어서 혹은 서찰로 전하기도 하고, 혹은 말로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죄인 이항(李杭)이 공초하기를,

"작은아기가 공초한 사연 가운데 당초 숙원(淑媛)이 왕자를 낳아 기사년329) 에 원자(元子)로 봉해지자 저의 아비가 살아 있을 때 세자의 어머니를 마땅히 중궁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봉서(封書)로써 숙원에게 전하고 주상께 주달(奏達)하게 했다고 하였는데, 너무나도 애매하며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즉각 변명할 수 있는 일은, 왕자의 탄생은 무진년330) 10월 28일이었고, 원자(元子)의 호가 정해진 것은 그해 겨울이었으니, 기사년에 원자를 봉했다는 말이 어찌 꾸며보려고 하였다가 저절로 거짓말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기사년에 제가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나라 밖으로 나갔다가 경오년331) 에 비로소 돌아왔으니, 작은아기가 끌어댄 연월의 착오가 또한 이와 같이 명백합니다. 또 왕자의 집에서 비록 언문 서찰로 문안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주상 앞에 곧바로 주달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몇 가지 조문에 있어서 더욱 그가 거짓임을 알 수가 있으니, 제 아비의 망극한 무고가 절로 밝혀지고 씻겨질 수 있습니다. 숙정이 저의 구사(丘史)라고 하는데, 왕손(王孫)은 으레 구사가 없으며, 숙정은 곧 저의 아비의 사패 구사(賜牌丘史)의 딸입니다. 그러니 저의 구사라고 잘못 아뢴 것이 일마다 사실과 어긋난 정상임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저의 집이 불행하여 이처럼 요사스런 계집종 숙정이 있었는데, 장희재 경신년332) 간에 우연히 첩으로 삼은 뒤, 그의 아내 작은아기를 줄곧 팽개쳐 버리니, 숙정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저의 집은 숙정의 상전으로서 매번 좋지 않은 말이 있을 때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염려를 하였으나 숙적(淑賊)을 이미 물리치고 딱 떼어버렸으니, 대단하게 서로 원수질 일도 없었던 듯합니다. 지금에 와서 작은아기가 만 번 죽을 처지에서 살기를 갈구하며 저의 집에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죄를 얽어 분을 씻으려는 계략으로 삼았으나, 천일(天日)이 밝게 비추시니 간악한 정상을 실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제가 비록 지극히 보잘것 없으나,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왕손으로서는 오로지 저 혼자만 남았으며, 조가(朝家)의 내종(內宗)333) 또한 신 한 사람뿐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조(聖朝)의 사생(死生)을 같이하는 골육(骨肉)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구원하여 온전히 목숨을 보전할 지경에 두신 것이 전후에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위한 저의 정성이 살을 저미는 듯 뼈에 사무치는 듯함은 천일(天日)이 밝게 비추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남에게 허구 날조된 모함을 당해 저의 부자가 이와 같은 망측(罔測)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미 죽은 저의 아비로 하여금 또한 날조된 무고 가운데에 빠지게 하였으니, 저는 오로지 원하건대, 심장을 쪼개고 배를 갈라서 이러한 원통함을 드러내 보이며, 구천 지하(九泉地下)에 있는 저의 아비의 혼령(魂靈)으로 하여금 원통함을 품으며 눈물을 머금지 아니하도록 하고자 합니다. 또 제가 너무나도 망극하게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정상이 있습니다. 저의 아비는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거듭 살려주는 은혜를 곡진하게 입었고, 성명(聖明)을 만나서는 은혜가 두텁고 예사롭지 아니하여 밤낮 감사하고 축원하였으며, 평소의 한 생각 한 마디 말이라도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 바치는 데 있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저에게 경계하고 당부하기를, ‘너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우리 부자가 죽어 인조 대왕을 돌아가 뵙더라도 죄를 짓는 데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 있어 한시라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는데, 지금 문목(問目)의 사연을 보니, 저의 죽은 아비의 나라에 대한 정성으로 이처럼 허구 날조된 망극한 죄명을 입게 하였습니다. 작은아기가 고한 연월과 사설(辭說)은 모두 다 큰 착오였으니, 저의 부자의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통분한 사정을 스스로 성명의 아래에 거듭 신백(申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이 이미 적녀(賊女)의 입에서 나왔으니, 비단 저의 간담(肝膽)이 절로 찢어져 죽고자 해도 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저의 죽은 아비를 뒤미처 생각하건대, 또한 장차 구천지하에서 황황하게 눈물을 머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통분의 정상은 일월(日月)이 굽어 비추고 있는 바이니, 오로지 성상께서도 애처롭게 여기고 불쌍하게 여겨주소서. 저는 원통함을 품고 죽어도 진실로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저의 죽은 아비는 선조(先朝)의 왕자로서 이와 같은 허구 날조된 죄를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 얻게 되었는데도, 저로 하여금 우리 성상의 은혜가 더욱 더 우악(優渥)한 때에 드러내어 밝힐 수 없게 하였으니, 저는 인자(人子)로서 불효하였으며, 인신(人臣)으로서도 불충하였습니다. 사설(辭說)의 번거롭고 추잡함을 피하지 아니하고 간혈(肝血)을 다 짜내어 엎드려 바라오니, 천지(天地) 부모(父母)께서는 곡진하게 성찰(省察)을 더하시어 저의 부자가 망극하게 원통함을 품는 사정이 없게 해 주소서."

하였다. 죄인 안여익(安汝益)이 공초하기를,

"저는 문목 가운데 말한 바 ‘모였던 여러 사람’ 중에서 다만 정 내승(鄭內乘)만 알 뿐이며, 다른 사람은 모두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안 봉사(安奉事)는 곧 저의 5촌 조카이고, 이홍발(李弘渤) 김태윤(金泰潤)은 다만 그 이름을 들었을 뿐이요 그 얼굴을 알지 못하며, 다만 김태윤의 아비를 알 뿐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였다는 말은 기사년 간에 제가 과연 들은 바가 있지만, 능히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조카는 연소(年少)하여 혹 왕래한 일이 있으나, 능히 밝게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가 숙정의 친사촌 오라비이고, 제 조카 또한 숙정의 친삼촌 조카이기 때문에 말하는데 쉽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보잘것 없지만 모여서 모의하는 데에는 실로 같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죄인 김태윤(金泰潤)이 공초하기를,

"저는 거듭 상복을 입은 몸으로서 무덤 아래에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데, 천만 뜻밖에도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엄하게 심문하는 아래서 처음부터 원통한 정상을 감히 모두 아뢰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갑술년334) 저의 조부가 해외(海外)에 위리 안치(圍籬安置)되자, 죽은 아비가 혈혈단신의 혼자 몸으로 따라가고, 저는 가묘(家廟)를 지키며 서울의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과 접촉한 것은 드물고 두문불출하면서 칩거(蟄居)하고 있었습니다. 병자년335) 여름 사이에 홀연히 한 사람이 스스로 설관(舌官)336) 김시관(金是梡)이라고 일컬으면서 명함을 보내어 만나보기를 청하였습니다. 저도 그 성명을 보았더니, 일찍이 전혀 알지 못한 바였으나, 저의 조부가 일찍이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를 지냈던 까닭에 설관의 무리가 때때로 간혹 문안하기도 하였으므로, 저는 그런 경우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시험삼아 불러서 보았더니, 해외의 안부와 초면의 인사를 으레 하는 것처럼 몇 마디 나눈 뒤 즉시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5월 초 그 사람이 또 와서 나타났는데, 제가 일찍이 전혀 알지도 못하였는데도 재차 내방한 까닭을 괴이쩍게 여겨 물어 보았더니, 궐자가 비로소 장희재의 처족이라 일컬으며, ‘장희재 집에 바야흐로 치제(致祭)할 일이 있는데, 중인배(中人輩)들은 제문(祭文)의 격식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들으니, 진사가 글을 잘하고 예(禮)를 좋아한다는 말이 여염(閭閻)에 퍼져 있기 때문에 감히 와서 품고(稟告)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나는 이미 글을 하지 않고 집의 동생도 또한 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속히 나가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제가 즉시 집으로 들어올 즈음의 일입니다. 흉적(凶賊) 방찬(方燦)은 곧 조식(趙湜)이 북경으로 갈 때 따라간 부북 군관(赴北軍官)이었기 때문에 일분의 면식이 있었고 그 뒤로 바둑을 두느라 집의 동생과 몇 차례 면식이 있었는데, 마침 왔다가 내쳐 물러가는 정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흉적(凶賊)을 동모하였을 줄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때의 실상은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그 뒤 변고가 터졌을 때, 여러 적(賊)들을 면질시키자 말이 오고 가는 사이에 우연히 이 말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 국청에서 그 상세한 내용을 힐문하니, 그 적이 대답하기를, ‘호패(戶牌)를 내보이려고 하였더니 손을 내저으며 물리쳐 보지 않았고, 제문을 청하고자 하였더니, 글을 못한다고 핑계대며 엄한 말로 물리쳐 보냈다.’고 하였는데, 그때의 사실 형편을 명백하게 실토하였으니, 제가 절대로 관여하지 아니한 연유를 국청에서 그 적들의 입에서 진술한 것으로 인하여 명백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론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흉적(凶賊)이 뜻밖에 문 밖에 발을 붙여, 비록 너무나도 지극히 불행하였으나, 제가 처신하는 방도로는 이 밖에 아마도 다른 도리가 없었던 듯합니다. 또 흉적의 무리들이 남김없이 자복하여 아울러 나라의 형벌에 의해 복주될 적에 저에게 무슨 돌아보고 핑계될 것이 있었겠습니까? 호패를 보지도 제문을 짓지도 아니한 상황을 일일이 재삼 엄하게 형문하는 아래에서 따로 아뢰었으니, 저의 원통한 상황은 저절로 밝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대계(臺啓) 때문에 적소에 유배되었다가 비록 즉시 용서받고 돌아왔으나, 언제나 이 한 가지 생각에 이르면 부끄럽고 분하여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또 장희재의 처에게 무고를 당하여 이와 같은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름자를 장희재의 처가 터무니없이 거론하니, 아무리 생각하고 헤아려 보아도 그 까닭을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일찍이 제문을 청하고자 했다는 말을 듣고서 이번에 엄하게 심문하는 아래서 함부로 지껄이며 무고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어찌 이와 같이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통분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장희재의 아내가 끌어대는 바는 다만 흉적의 말뿐인데, 여러 적들이 모두 죽었으니 빙문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두 명백하게 변파(辨破)하여 환히 밝혀낼 수가 있으니, 단단히 변파할 것을 청합니다. 기사년 처분(處分)하던 날, 저의 조부가 삼사(三事)의 반열(班列)을 잘못 차지하여, 혹은 빈청(賓廳)에서 진계(陳啓)하고, 혹은 탑전(榻前)에서 힘써 간쟁하였는데, 마침 수상(首相)은 자기 집에서 대죄하고 좌상(左相)은 들어가 전시(殿試)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저의 조부가 홀로 백관을 거느리고 궐중(闕中)에서 일제히 모였던 것입니다. 저녁 무렵 방(榜)이 나오고 전문(殿門)이 비로소 열리자 대정(大庭)에서 진계(陳啓)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비답(批答)을 받고, 이튿날 새벽에 일제히 모이라는 뜻을 백관에게 분부한 뒤 물러났습니다. 그날 저녁 박태보(朴泰輔)를 정국(庭鞫)하는 일이 있어 저의 조부가 탑전으로 나아가 광구(匡救)하는 정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한 마디 말을 막 하자마자 곧 엄한 견책을 받고, 이어서 내쳐져 파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 또 ‘대행 왕비를 위하여 공제(公第)337) 에 옮겨 받들어 공가(公家)에서 공급하자.’는 뜻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윤허를 받았는데, 성명(成命)이 내리자마자, 곧 즉시 반한(反汗)338) 하였습니다.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장희재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끝내 서로 좋아하지 아니한 정상은 그 당시의 온 조정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장희재의 족속은 또한 한 사람도 저의 집과 친숙한 자가 없으니, 하물며 장희재의 처이겠습니까? 밤을 타서 모였다는 말은 인정(人情)과 사세(事勢)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흉적 숙정은 곧 장희재의 창첩(娼妾)이니, 그의 족속은 그래도 왕래할 수 있지만, 저의 경우 비록 한미한 집안이기는 하나 조부가 일찍이 삼사(三事)를 지냈고 죽은 아비는 명환(名宦)을 두루 거쳤으니, 제가 스스로를 지키는 도리상 결코 차마 잡류(雜類)와 더불어 장희재의 창첩의 집에 왕래하며 저의 이름을 더럽히고 문호(門戶)에 욕을 끼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령 저의 몸가짐과 행사(行事)가 아무리 보잘것 없다 하더라도, 이른바 ‘같이 왕래하였다.’는 사람들을 한 곳에서 빙문하여 핵실(覈實)한다면 곧장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모의하였다.’고 하는 것은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흉모(凶謀)를 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니, 위에서 말한 호패와 제문은 모두 흉악한 역모 가운데에서 나왔습니다. 진실로 한 오라기라도 모의한 일이 있었다면, 호패는 자연히 미리 알 수 있었을 터인데, 그가 어찌 반드시 저에게 가지고 와서 보이려고 하였겠으며 물리치고 보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제문도 또한 지어 줄 수가 있었는데도 어찌하여 엄하게 사양하고 물리쳐 쫓았겠습니까? 흉역의 무리들이 이미 조금도 간범한 바가 없었음을 일일이 실토하였으니, 숙정의 집에 왕래하지 아니하였던 정상을 자연히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병자년339) 의 옥사에서 여러 적들이 죄인으로 끌어들인 바 그 흉모의 절차와 동모(同謀)한 당류(黨類)가 일일이 자복하고, 머리를 나란히 하여 법대로 복주될 적에 저의 심사(心事)를 그들이 이미 발명하였습니다. 또 숙정의 집에서 어떠어떠한 사람들과 모였다는 일은, 만약 지목한 사람과 한곳에서 대면시킨다면 곧장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안가(安哥)의 숙질(叔姪)은 이름은 들었으나, 얼굴은 알지 못하는 자이고, 정 내승(鄭內乘)이라는 자는 일찍이 전에 서로 알던 사람이었으므로 갑술년340) 겨울에 한강 밖의 외오촌 숙모의 남편 이도문(李道問)의 집에서 한 번 만나보았으며, 지난 가을 죽은 아비의 상(喪)을 치를 때 길가에 나와 조문하기에 망극한 중에 언뜻 만났습니다. 그리고 금년 봄 제가 서숙(庶叔)의 상을 당하였을 때 그가 또 와서 조문하였으므로 슬프고 어지러운 중에 갑자기 만났습니다. 적(賊) 이홍발(李弘渤)은 과연 저와는 동서(同婿) 사이였으나, 제가 어릴 적에 의절(義絶)하였으므로 서로의 정분은 길가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또 그 아비 이의징(李義徵)이 어영 대장(御營大將)에 제배(除拜)되었을 때 저의 조부가 ‘이 사람은 선치(善治)한 수령(守令)이니, 한(漢)나라의 고례(故例)와 같이 직질(職秩)을 더하고 금(金)을 내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백도(白徒)로서 장령(將領)이 되었으니, 나라의 체모상 놀라운 일이다.’고 하자, 이후로 그가 앙심을 품었고 평상시에도 자제들 또한 과종(過從)341)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적 이홍발의 사촌 매부로서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창졸간에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무리들과 한 곳에서 빙문하게 한다면, 숙정이 비록 이미 법대로 복주되었더라도, 저의 왕래 여부를 한 마디로 결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죄인 무일(武一)을 세 차례 형문(刑問)하고 위차(威次)를 베푸니, 바로 공초하기를,

"오래 된 일인 데다가 성격이 매우 잊어버리기를 잘하므로 재차 엄하게 심문하는 아래에서 능히 기억할 수가 없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연서역(延曙驛)의 일이 발각된 뒤 상전이 업동(業同)과 저를 불렀습니다. 업동과 갔더니, 그를 머물러 기다리게 하고, 저는 먼저 물러가게 하였는데, 잠시 가림 파자(把子) 밖에 서서 들으니, 상전의 첩이 업동에게 ‘네가 혹시 붙들려 가더라도 세 차례 형문할 때까지 어떤 조문은 자복하지 말며, 김이만을 증인으로 끌어들이지 말라. 그러면 마땅히 후하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돌아왔습니다. 며칠 지난 뒤에 안 상전(安上典)이 저에게 묻기를, ‘숙정이 무슨 일로 너희들을 불렀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파자 밖에서 들은 말로 대답하였더니, 안 상전이 ‘김이만이 반드시 일을 꾸민 바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윤순명이, 제주에서 보낸 서찰에 ‘이 여자가 반드시 숙정이 방재(龐災)를 행하여 그 아들을 죽였다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은 이미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금년 여름의 서찰은 ‘의복과 양식을 준비해서 보내주지 아니한다.’는 말에 지나지 아니한다는 것 또한 꾸며낸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서찰이 ‘작은아기에게 있다.’고 한 것은 전적으로 미루어 대려는 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청컨대, 도사(都事)를 보내어 두 사람의 집에서 서찰을 찾아내게 하며, 또한 이것을 가지고 작은아기를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죄인 윤정석은 과연 숙정의 집에서 전 내승(內乘) 정빈(鄭彬) 숙정이 있는 곳에 같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서로 대면하여 나눈 밀담(密談)을 전혀 듣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정빈이 세밀하게 꾸민 정상을 또한 저절로 볼 수가 있으니, 청컨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정빈을 잡아온 뒤에 빙문(憑問)하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죄인 윤보명은 ‘조시경 오시복의 말을 가지고 장희재 집안의 생활이 매우 곤란함과 친족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으며, 이어서 희빈의 안부와 상복이 어떤가를 물었다.’고 하였으니, 그 정적이 지극히 수상합니다. 그러나 그가 반드시 상세하게 정탐하여 보고한 정상을 오히려 고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조시경을 먼저 잡아와서 빙문하고 처치하게 하소서. 죄인 애정은 그 공초 가운데서 비록 ‘어떠어떠한 사람이 왕래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모의한 이야기를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열세 살 짜리 아이는 이미 심문하기도 어려우며, 또한 그 말을 가지고 갑자기 증인으로 끌어들인 사람들을 잡아다가 국문하자고 청하기도 어렵습니다. 청컨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형세를 보아가며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죄인 이항(李杭)은 ‘원자(元子)의 정호(定號)’ ‘봉명 사신으로 나라를 떠남’ ‘왕손에게는 구사(丘史)가 없음’이라는 3건의 일을 가지고 발명하는 단서로 삼는데, 정호는 기사년 정월 초 10일에 있었으며, 나라를 떠났던 것은 곧 책봉(冊封)을 주청(奏請)하는 일로서 일이 아직 발각되기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구사는 그 아비 집에 내려 준 계집종인데, 아들의 집의 구사라고 그대로 청하는 것이 반드시 이상한 것도 없으니, 이것을 서로 어긋나는 단서라고 지적하지만, 이미 말이 안됩니다. 또 작은아기가 ‘숙정을 시켜 봉서를 가지고 내간(內間)에 전하여 이것을 성상께 주달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상전에 바로 주달하였다는 것이 아닌데, 지금 그 공초한 글에서 ‘비록 언문 서찰로써 문안하더라도 어찌 상전에 바로 주달하는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그가 발명하는 바가 크게 분명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청컨대, 이것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만들어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죄인 안여익은 단지 기사년간에 모였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고, 자신은 실지로 같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니, 청컨대 다시 여러 죄수를 잡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핵문(覈問)한 뒤에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죄인 김태윤은, 방찬(方燦) 김시관(金是梡)을 혹은 ‘원래부터 서로 알지 못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몇 번 만난 사이다.’라고 하는데, 바둑을 두느라 왕래한 것이 결코 몇 번에 그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과연 사이가 뜸한 사람이라면 그들이 마땅히 비밀스럽게 숨겨야 할 일을 갑자기 와서 말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가 청한 제문(祭文)은 치제(致祭)할 글이었다.’라고 하는데, 그때 만약 치제할 일이 있었다면 절로 종정에서 향축(香祝)을 내릴 것이고 남의 손을 빌려 짓지 아니할 것이니, 그가 또한 이미 이것을 알지 못하였고 글을 못한다고 지어 주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위안제(慰安祭)’라고 하지 아니하고 ‘치제(致祭)’라고 한 것은 숨기는 정상이 있는 듯하며, 호패를 보지 아니하였다는 말과 여러 역적들이 이러쿵 저러쿵 하였다는 말은 모두 문안에 없는 바인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발명하는 단서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것을 가지고 문목을 만들어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죄인 무일은 문목하는 사연을 이미 바로 공초하였으니, 청컨대 우선 형문을 정지하고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가 여러 죄인과 한꺼번에 처단하게 하소서. 죄인 작은아기는 서찰의 일을 가지고 다시 추국하려고 하였으나, 전의 공초 중에 다시 심문하고 핵실할 말이 없지 아니하니, 청컨대 아울러 뽑아내어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9일 임신 5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정빈·작은아기·이항 등의 공초 내용

국청 죄인(鞫廳罪人) 정빈(鄭彬)이 공초하기를,

"제가 을해년343) 3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있으면서 3년동안 실명(失明)하여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3년 뒤 병이 조금 나았으나, 왼쪽 다리가 좋지 않아서 출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저의 이름이 흉인(凶人)의 공초에 올랐습니다. 신미년344) 간에 소정우(蘇挺宇)가 저에게 ‘장희재 민종도(閔宗道)의 중군(中軍)이 되었는데, 만약 장희재와 교제한면 좋은 관직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드디어 가서 장희재와 교제하였습니다. 그때 이어서 윤정석과 서로 알게 되었는데, 그 뒤 때때로 혹 서로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숙정에 대해서는 장희재가 서울에 있을 때 그에게 첩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며 그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안여익은 어려서부터 서로 알았으며, 안가(安哥) 일족도 또한 모두 서로 알고 지내서 정의가 친하고 두터웠는데, 갑술년345) 전부터 자주 과종(過從)하였습니다. 김이만은 일찍이 서로 잘 알지 못하였으며, 이의징(李義徵)의 아들은 그 아비와 서로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가 소과(小科)를 했을 때 그 집에 가서 축하를 했으며, 그 뒤 주자동(鑄字洞) 연정(蓮亭)에서 몇 차례 서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김 정승의 손자는 제가 장흥동(長興洞)에 살고 있을 때에 자주 서로 만났는데, 그때 김태윤(金泰潤)은 어렸고, 그 뒤 정릉동(貞陵洞) 민암의 집에서 혹 서로 더불어 만나기도 하였으며, 김몽양(金夢陽)의 발인(發靷) 때 저의 집이 소사(素沙)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과연 나가서 조문(弔問)한 일이 있었습니다. 김 정승이 석방되어 돌아온 뒤에 그 첩자(妾子)를 잃었기 때문에 제가 찾아가서 조문하였고 이어서 김태윤과 서로 만났습니다. 저는 민암과는 일가(一家)가 되기 때문에, 저의 이름이 장희재 집안의 귀에 익혀 들려 이와 같은 모임에 참여하였다는 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제가 비록 보잘것 없으나, 그 남편도 있지 아니한데, 어찌 상중의 사람으로서 숙정의 집에 가서 모였을 까닭이 있었겠습니까? 윤정석과 면질시킨다면 그 허실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죄인 조시경(趙時炅)이 공초하기를,

"제가 처음 국휼(國恤)이 났을 때 윤보명(尹甫命)과 포도청 앞길에서 서로 마주치자, 윤보명이 저에게 묻기를, ‘희빈의 복제는 어떻게 마련하는가?’라고 하기에, 제가 ‘의주(儀註) 가운데 따로 마련하는 일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윤보명이 ‘외방에 있는 재신(宰臣) 가운데 곡반(哭班)에 올라온 자가 많은가?’라고 하기에, 제가 ‘많은 숫자가 올라왔다.’고 말하니, 윤보명이 ‘누구누구가 올라왔던가?’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유 정승(柳政丞)·오 판서(吳判書)·조 감사(趙監司)가 올라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부터 오 판서와 서로 친했기 때문에 재차 곡반에서 배례(拜禮)하였더니, 오 판서는 그냥 볼 뿐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희빈의 상복과 장희재의 안부 등을 탐문했다.’는 따위의 말은 절대로 알지 못했으니, 만약 윤보명과 면질시킨다면 그 허실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죄인 작은아기가 다시 공초하기를,

"봉서(封書)의 사건은 해가 이미 오래 되어 능히 자세히 기억할 수 없으나, 숭선군 부인(崇善君夫人)과 동평군(東平君)이 봉서한 사연을 저의 남편이 뜯어보았을 때 저도 과연 모두 참여하여 보았습니다. 그 대강의 뜻은 ‘원자의 어머니가 마땅히 중궁이 되어야 한다. 옛날 일에도 또한 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으며, 성상의 춘추가 이미 높으시니, 마땅히 세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또한 봉사가 한 통 있었는데 오룡동(五龍洞)을 얻으려고 청하는 일이었고, 사신으로 북경에 나아갈 때에는 더욱 그 수가 빈번하였으나, 그 사연은 다시 참여하여 보지 못했습니다. 숙정의 집에 자주 모였던 일은, 저의 집의 옛날 계집종 진이(眞伊)가 언제나 숙정의 집 서찰을 받아 궐중(闕中)에 왕래하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모였던 정상을 상세히 알고 저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제가 김이만을 불러와서 그가 무슨 일 때문에 모이는지 그 연유를 힐책하였더니, 김이만은 이미 숙정의 심복이 되었는지라 실상대로 저에게 다 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김 정승의 손자와 이 대장의 아들과 박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대론(臺論)의 정지 여부를 알고자 하여 여러 차례 와서 모였다고 하였으나, 그 사이에 모의한 정상을 저는 능히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또 저의 남편의 서찰 중에 ‘저가 종전부터 말을 잘 지어내어 아들이 숙정의 방재(龐災) 때문에 죽었다고 하니, 이번에 중궁전의 병환이 이와 같은데 만약 또 방재의 일을 발설한다면, 이것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계략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숙정이 방재의 말을 제주도에 있는 남편에게 서찰로 통기하였기 때문에 저의 남편의 서찰의 사연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희빈의 상복을 와서 물은 일은 다만, 윤보명이 전언(傳言)한 ‘오 판서가 탐지하려고 한다.’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며, 그 밖의 곡절을 알지 못합니다. 장 상궁(張尙宮)에 자세하게 탐문한 일은, 윤보명 희빈이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탐지하고자 하여 저에게 와서 물었기 때문에, 제가 숙정을 통하여 장 상궁이 궐중(闕中)에서 나온 사실을 듣고서 장 상궁에게 전언(傳言)하기를, ‘내간(內間)의 소식을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니, 내가 가서 뵙고 상세히 알고자 한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장 상궁이 즉시 사환하는 종을 보내왔는데, 그 방자(房子)가 ‘반드시 직접 올 것은 없다. 이 사람편에 물어본다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그 방자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숙정이 이른바, ‘내년 봄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는 말도 또한 그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성 좌윤(漢城左尹)이 상소한 일은 윤보명(尹甫命)으로 인하여 들었는데, 그간의 모의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애정(愛正)이 고한 장희천(張熙川) 탑동(塔洞) 나으리가 서로 왕래한 일은, 이들이 모두 장희재 집과 가까운 친족들이었으니 그 서로 모인 바가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도 처음 공초에 거론하여 고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제가 거기에 모였다고 고한 사람들을 애정이 현고(現告)하지 아니한 까닭은 대개 애정을 종으로 사서 얻은 것이 김이만(金以萬) 등이 법대로 복주(伏誅)된 뒤에 있었으므로, 그가 알지 못하였던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금년 여름에 저의 남편이 윤 첨사(尹僉使)에게 보낸 서찰을 윤순명(尹順命)이 가지고 와서 저에게 보인 뒤에 ‘이 서찰은 아울러 나의 형제에게도 보내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대로 소매에 넣어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서찰 중의 사연은 전의 공초에서 고한 것 이외에는 다시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억울하게 죽었다.’느니, ‘역적’이라느니 하는 말은 기사년346) 숭선군(崇善君)이 살아 있을 때 동평군(東平君)이 남인과 더불어 한 일이 역적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죄인 이항(李杭)이 다시 공초하기를,

"죄인 작은아기의 공초 가운데, ‘기사년에 원자(元子)를 봉하였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저는 다만 세자의 탄생일이 무진년347) 10월이고, 곧바로 원자의 호(號)를 정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으므로 무진년 겨울로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작은아기가 신을 허구 날조한 것은 말로 안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원자의 어머니가 마땅히 중궁전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면, 이것은 기사년 책례(冊禮)하기 전의 말이니, 혹 사람을 모함하기 위한 말이 되기도 하겠으나, 지금은 이미 ‘기사년에 원자를 봉했고 세자의 어머니는 중궁전이 되는 것이 마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세자의 칭호를 가지고 말한다면 세자로 봉한 뒤에야 세자라고 호칭할 수가 있는 것이며, 지난해 세자로 봉하고 왕비로 봉한 것이 같은 때에 있었으니, 어찌 마땅히 중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겠습니까? 작은아기가 착란(錯亂)할 즈음에 말이 전도되어 이와 같은 말도 안되는 말을 가지고, 저를 모함하려고 하는 계략을 성명(聖明)께서는 유의하시고 통촉해 주신다면, 그 착란된 말을 판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봉명 사신(奉命使臣)이었던 연월(年月)은 과연 기사년 가을이었으나, 제가 삼목(三木)348) 아래서 니수(泥首)349) 해 위령(威令)에 겁을 먹은 나머지 이와 같은 착란된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숙정은 저의 구사(丘史)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여러 궁가(宮家)에서 왕자와 대군의 사패 비자(賜牌婢子)를 통칭하여 구사라고 일컫는데, 종실의 집에서 사환(使喚)하는 비자를 외람되게 구사라고 감히 일컬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작은아기가 이른바 ‘봉서(封書)를 상전(上殿)에 주달하였다.’고 한 것은, 그 어세(語勢)로 보아 마치 바로 상전에 주달했던 것 같은 점이 있었기에 이처럼 잘못 진달했던 것이고, 모두 치대(置對)에 익숙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며, 당황하게 겁을 내어 실언(失言)한 소치입니다. 저는 두 번째 공초에서 또 다시 진달하고 드러낼 것이 있습니다. 기사년 이후 저는 장희재 무리들에 의해 얽어서 해를 입히려고 하는 바가 되어 마침내 제가 갑술년350) 옥사 때 어지러이 끌어들이는 데 빠져들어 거의 죽어 없어질 뻔하였다가 다행하게도 천일(天日)께서 위에 계신지라 남은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장희재의 집에서 허구 날조하고자 하였던 정상을 여기서도 알 수 있으며, 이번에 그의 아내가 허구 날조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천일(天日)께서는 밝게 통촉하소서. 또 저의 집에서 만약 과연 작은아기의 고한 것처럼, ‘마땅히 중궁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글로써 진달한 바가 있었다면 천일께서 조림(照臨)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처음 공초에서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진달할 수가 없었으므로, 지금 재차 공초하는 아래서 감히 이와 같은 몇 마디 말을 덧붙여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이항(李杭)이 재차의 공초에서 공술한 바도 또한 말이 되지 아니하며, 봉서(封書)에 관한 한 가지 사실도 전혀 명백하게 발명하지 못했습니다. 옥사의 체모로 말한다면, 마땅히 예에 의해서 형문(刑問)을 청하여야 할 것이나, 반복해서 구문(究問)하여 다시 남김이 없도록 한 다음에 바야흐로 처치하는 것이 또한 신중한 도리가 될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 추국한 공초에 ‘세자로 봉하고 왕비로 봉한 것이 같은 때 있었으니, 어찌 마땅히 중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세자로 봉한 것은 실제 기사년 다음해에 있었으니, 이미 이것을 가지고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또 이러한 봉서의 왕래는 본래 중간에서 부도(不道)한 것을 경영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글을 실로 천감(天鑑)이 일찍이 미치지 못한 바인데, 감히 ‘과연 글로써 주달(奏達)하였다면, 천일께서 조림(照臨)하였을 것이다.’라는 따위의 말을 가지고 발명하는 단서로 삼으니, 더욱 통분스럽습니다. 작은아기가 공초한 사연으로 보건대, ‘그 뒤에도 봉서(封書)가 빈번하여, 비단 이 봉서뿐만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여러 궁가(宮家)와 궐내의 문안은 스스로 정해진 격식이 있으니, 반드시 숙정을 매개하는 길로 삼아서 장희재의 집에서 글을 들여 보냈다면, 전에 봉서한 정적을 숨기기 어려움을 더욱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청컨대, 이것을 가지고 문목을 만들어서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죄인 작은아기를 다시 추국한 사연은 전의 것과 크게 다른 것은 별로 없으나, 그 중에 제주(濟州)에서 보낸 서찰에 관한 한 가지 사실은 줄곧 윤순명(尹順命)의 집에 있었다고 하기에, 오늘 도사(都事)를 보내 두 집안을 뒤졌지만 또한 그 서찰을 찾아낼 수가 없었으니, 윤순명이 반드시 그 서찰의 사연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 아주 지극히 통탄스럽습니다. 또 윤순명이 전에 공초한 사연에서도 또한 한두 가지 물어 볼 만한 단서가 있으니, 청컨대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죄인 정빈(鄭彬)은 비록, ‘을해년 3월에 상인(喪人)이 되었다.’고 하였으나, 갑술년에 사람들이 모인 것과, 기묘년에 밀담을 나눈 것은 그가 아무런 일이 없었을 때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변명할 근거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윤정석(尹廷錫)과 먼저 면질시키소서. 조시경(趙時炅)의 경우 그가 바친 공초가 윤보명의 공초와 크게 상반되니, 청컨대 일체 면질시킨 뒤에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죄인 김태윤(金泰潤)은 바야흐로 다시 추국할 때 기절한 채 깨어나지 못해, 마침내 능히 그 말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 공초를 받들어 들이지 못하니, 대령(待令)하고 있는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각별히 구료(救療)하게 하소서. 조시경(趙時炅)의 이름을 어제 잡아오기를 청한 계사(啓辭)에는 ‘시경(時卿)’이라고 잘못 썼는데, 그 본명은 시경(時炅)인 것이 확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추안(推案) 중에 고쳐 써 넣는 뜻도 이와 아울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추국(推鞫)하는 것을 우선 파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20일 계유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장천한·장성유의 공초 내용과 윤정석·정빈, 윤보명·조시경의 면질 내용

국청 죄인(鞫廳罪人) 윤정석(尹廷錫) 정빈(鄭彬)을 면질시켰더니,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재작년 내가 숙정의 집에 갔을 때 문틈으로 들여다 보았다. 네가 숙정과 더불어 서로 대면하여 앉아 있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를 끌어들인 것은 단지 내가 장희재와 서로 친하였기 때문이다. 네가 분명하게 보았다면, 내가 어떤 집에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리고 숙정과 서로 대면하여 앉았을 때에는 어떤 곳에 앉았던가?"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는 숙정과 더불어 대청(大廳)에 앉아 있었다."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처음에는 나더러 방 안에 앉았었다고 했는데, 또 대청에 앉았다고 하니, 너는 어찌하여 한곳을 지적하여 말하지 아니하는가?"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방 안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대청이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는 처음에 ‘숙정이, 「여자 손님이 왔으므로, 만나볼 수가 없다」고 핑계대었기 때문에 내가 창틈으로 엿보았더니, 정빈 숙정과 더불어 방 안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또 대청에 앉아 있었다고 하는가?"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냇가에 있는 장희재의 집인데, 죽은 민 판서의 집이엇다. 그때 남 생원(南生員)이 안채로 들어가고, 숙정은 사랑으로 들어갔는데, 숙정이 ‘여자 손님이 있다.’고 핑계대었기 때문에, 내가 창틈으로 들여다 보았더니 너는 동향(東向)으로 앉아 있었고 숙정은 남향으로 앉아 있었다."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장만춘(張萬春)이 일찍이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나도 또한 알고 있다. 그 집은 남향(南向)인데, 숙정이 남향하고 내가 만약 동향하였다면 좌세(坐勢)가 서로 반대가 되니, 이것이 어찌 이치에 가깝겠는가?"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거짓말을 꾸며대도 소용없다. 그 집은 남향인데 서쪽에서 들어가면, 너는 마땅히 동향이 될 것이고 숙정은 북쪽에서 나왔으니 남향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본래 바깥 대청(大廳)이 없다."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일찍이 정 사교(鄭士僑)가 들어가 살던 집인데, 어찌 바깥 대청이 없겠는가?"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 집의 대청은 매우 높은데, 네가 어찌 능히 문틈으로 들여다 볼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거짓으로 꾸며대는 말이다."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오르내리는 마루에서 들여다보았다."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때는 따뜻한 철이었으므로, 창문을 모두 열어 놓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만약 오르내리는 마루에서 보았다면, 내가 마땅히 너를 보았을 것이다. 비록 혹 문을 닫았다고 하더라도 엿볼 때 내가 반드시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더욱 꾸며댄 거짓이다."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비록 여름철이라 하더라도 문을 여닫는 것은 때가 없는 법이다. 여름철을 당하여 문을 닫았으니, 더욱 네게 수상한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냐?"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만약 문 밖에서 엿보았다면, 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찌 알아채고 불러들이지 아니하였겠는가?"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내가 거기에 갔을 때 윤 봉사(尹奉事)라고 통명(通名)하였는데, 너는 숙정과 더불어 같이 앉아 있었으나 숙정이 숨기고 보이지 않았다. 네가 그때에는 나를 불러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엿볼 때 알아차렸다면 불러들였을 것이라는 말이 어찌 이치에 가깝겠는가?"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숙정이 이미 ‘여자 손님이 있다.’고 핑계대었는데, 네가 무슨 까닭으로 문 밖에서 엿보았는가? 이것은 터무니없이 꾸며 나를 모함하는 말이다. 네가 어떻게 마루 위에 올라가서 엿보았다는 말인가?"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숙정은 나의 조카의 첩이다. 비록 여자 손님이 있다고 했지만 어떤 사람이 왔는지 알고 싶어 과연 엿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너는 친족도 아니면서 어떻게 숙정의 처소에 갔단 말이냐?"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를 숙정의 집에서 보았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내가 어찌 가서 보았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윤정석 정빈을 향하여 말하기를,

"증거댈 만한 사람이 있다. 그때 장천한(張天漢)이 어찌 너와 같이 앉아 있었지 않았던가?"

하니, 정빈 윤정석을 향하여 말하기를,

"내가 애시당초 숙정을 가서 만나본 일이 없는데, 장천한과 더불어 어찌 같이 앉아 있었을 리가 있었겠는가? 장천한에게 물어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죄인 윤보명(尹甫命) 조시경(趙時炅)과 면질시키자, 윤보명 조시경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는 나와 더불어 일찍이 서로 친한 일이 없으니, 내가 너의 집을 알겠으며 네가 우리 집을 알겠는가? 희빈의 복상(服喪) 여부를 나는 알지 못하였는데, 네가 포도청(捕盜廳) 앞길에서 나를 만나자, 장 대장(張大將)의 안부와 희빈의 복상 여부를 물어 보았다. 그리고 ‘장 대장의 집에서 가재도구를 팔아서 생활한다.’라는 말을 네가 또한 나를 향해 말하지 아니하였던가?"

하니, 조시경 윤보명을 향하여 말하기를,

"포도청 앞길에서 너를 만났더니, 네가 나더러 ‘너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근간에 곡반(哭班)에 왕래하였던 까닭에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했다. 복제(服制)를 마련하는 것을 보니, 입자(笠子)를 모두 생포(生布)로 싸게 하는데, 나는 백저포(白苧布)로 싸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라고 하니, ‘네가 동관(同官)들이 모두 그렇게 하니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더러 ‘희빈의 복제도 또한 마련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나는 글을 못하므로, 복제를 마련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네가 또 나에게 묻기를, ‘곡반이 외부에 있는데, 재상 몇 사람들이 왔던가?’ 하자, 네가 ‘유 정승·오 판서·조 감사가 왔다.’라고 하지 아니하였던가?"

하였다. 윤보명 조시경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 포도청 앞길에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던가? 네가 입자(笠子)를 생포로 싼다는 말을 나에게 물은 다음 나를 이끌고 포도청의 다모간(茶母間)351) 으로 가서 오 판서 장 대장(張大將)의 안부와 희빈이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알고자 한다는 말을 네가 먼저 물으며 나에게 언급하기에, 내가 ‘나는 본래 글을 모르니 복제를 마련하는 절목을 알지 못한다. 또 그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또한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더니, 네가 ‘복제는 이미 예조(禮曹)에서 마련하여서 들어갔으니,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는 네가 모름지기 자세하게 탐문하라….’라고 하지 아니하였던가? 내가 만약 탐문해서 알아낸 일이 있었다면 내가 마땅히 먼저 너에게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네가 나에게 갔으니, 네가 나에게 물었던 것을 이에 의거해 알 수 있다."

하니, 조시경 윤보명을 향하여 말하기를,

"내가 포도청 앞길에 갔었던 것은 너를 만나 보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다. 네가 포도청 문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마침 서로 만났던 것이다."

하였다. 죄인 윤순명이 다시 공초하기를,

"장희재가 이번 여름에 보냈던 서찰의 사연을 이미 앞서 공초한 가운데 다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서 작은아기의 허물과 악함을 많이 말하였으므로 그 서찰을 제가 가져 오려고 하자 그가 매우 수치스럽게 여겨서 가져 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제가 가져 오지 못하고 그의 거처에 그대로 두었고, 작은아기의 아들 장차경(張次慶)도 또한 그 글을 참여하여 보았습니다. 작은아기의 공초 가운데서 ‘그 글 중에 방재(龐災) 운운했다.’는 따위의 말은 전혀 맹랑한 거짓말입니다. 만약 작은아기와 면질시켜 준다면, 그 허실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무로 만든 인형을 파내 온 일은, 제가 병자년352) 3월 초 10일에 외삼촌의 상을 당하여 잇달아 상가에 있었기 때문에, 전혀 듣거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별감이 가져 갈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알 수가 있었으며, 제가 몸소 스스로 내주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죄인 장천한(張天漢)이 공초하기를,

"수색하는 서찰 가운데, ‘계려(計慮)를 칭찬했다.’는 말은 그 글을 바로 숙정의 집에 내렸고 저는 보지 못하였으므로, 전혀 그 유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인사(人事)는 조금 알고 또 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처럼 칭도(稱道)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을해년353) 에저의 아비가 죽은 뒤 5, 6년 동안 추수(秋收)하는 일 때문에 재령(載寧) 땅에 왕래하면서 반은 서울에 있고, 반은 시골에 있었으며, 금년 8월에 또 시골에 내려갔다가 10월에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만약 서울에 있을 때라면 제가 장희재의 친족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해외(海外)의 소식이 오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하여, 때때로 숙정의 집에 가서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직접 범한 죄가 있다면 어찌 여러 적의 공초에 나오지 아니하였겠습니까? 모의한 따위의 일은 너무나도 애매합니다."

하였다. 죄인 장성유(張聖維)가 공초하기를,

"저는 친족이기 때문에, ‘계려(計慮)가 있다.’고 칭도(稱道)하였던 것은 인물(人物)을 포폄(褒貶)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고, 저의 서찰이 있지도 아니하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궁금(宮禁)과 교통(交通)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장희재가 해외로 유배된 뒤 저는 친족인 까닭으로 왕래하는 길에 그의 소식이 있을까 하여 혹은 3개월 간격으로 혹은 2개월 간격으로 그의 안부를 숙정의 집에 가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숙정의 계집종 애정은 제가 본래 알지 못하는 바이니, 만약 대면시킨다면 혹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제가 비록 그 집에 간혹 왕래하였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대낮에 여러 사람이 모두 볼 때에 왕래하였으며, 몰래 서로 모여서 의논한 것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정빈·윤정석 조시경·윤보명 등을 아울러 한 곳에서 면질시켰더니, 윤정석의 말은 비단 작은아기의 공술한 내용과 부합할 뿐만 아니라, 숙정의 집에서 정빈이 밀담을 나누는 정상을 엿보았다는 것이 꾸며낸 말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정빈은 처음에 공초 가운데서 ‘을해년에 상중에 있었다.’라는 말로써 ‘기묘년354) 에 그가 가서 보았다.’는 정상을 은폐하고자 하나, 이것은 바른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면질할 때에 다만 가사(家舍)의 크고 작음과 좌차(坐次)의 향배를 가지고 말을 늘어 놓으며 둘러대었으나, 끝내 드러나게 발명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윤보명은 포도청 앞에서 불러 내었던 정상을 자세하게 아뢰었고 말에 모두 근거가 있으나, 조시경은 다만 생포니 입자니 하는 따위의 말만으로 현란(眩亂)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사리로써 미루어 본다면, 윤보명은 장가(張家)의 족속으로서 상복을 입을 지의 여부는 타인에게 물어 볼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조시경 윤보명에게 물었던 것은 분명히 실상이었습니다. 윤순명 장희재가 여름에 보낸 서찰을 끝내 현납(現納)하지 아니하였고, 서찰 중의 사연도 또한 바로 고하지 아니하니, 지극히 통분스럽습니다. 그리고 처음 나무 인형을 파냈을 때 그 아비가 알았으니, 그 또한 알지 못하였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도 별감이 가져갈 때에 비로소 알았다고 말하니, 그 사이에 반드시 숨기는 정상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정빈·조시경·윤순명을 아울어 형추(刑推)하게 하소서. 죄인 장성유는 비록 언문 편지로 치밀하게 꾸민 흔적이 있으나 그때의 모의가 현저한 정상이 없으니, 청컨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여러 죄인을 핵실(覈實)하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일체로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죄인 장천한은 공초한 사연이 장성유와 매일반이나, 정빈 숙정의 집에서 밀담을 나눌 적에 장천한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 윤정석을 면질할 때에 나왔으니, 청컨대 이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내어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죄인 김태윤은 병세가 지금도 또한 마찬가지이고, 죄인 이항도 갑자기 흉통(胸痛)을 앓아 능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모두 취초(取招)할 수가 없습니다. 대령(待令)한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다시 더 구료하여 조금 낫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추국(推鞫)하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전지하기를,

"국청을 우선 파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22일 을해 1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집의 유명웅 등이 남구만·유상운을 파직시키라고 상소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집의 유명웅(兪命雄), 장령 윤헌주(尹憲柱), 지평 이동언(李東彦), 사간 어사휘(魚史徽), 헌납 윤홍리(尹弘离), 정언 황일하(黃一夏)·김재(金栽)가 아뢰기를,

"갑술년356) 에 중전을 복위한 일은 실로 천고에 거룩한 덕이 있으니, 기사년357) 의 통박(痛迫)한 일은 반드시 하나하나 거론할 것이 못됩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그 당시 나라의 권병(權柄)을 담당하였던 신하가 나라를 그르치고 화(禍)의 기틀을 만든 죄는, 신 등이 피를 뿌리듯 간을 쪼개듯 성토(聲討)하여 일국의 신민(臣民)들이 8년 동안 쌓아온 울분을 조금이라도 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 국적(國賊)인 장희재가 흉적(凶賊) 민암(閔黯)과 같은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국모에게 망극한 화를 얽어 씌우려고 비밀리에 언문 서찰을 만들어 궁금(宮禁)에 몰래 내통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전대(前代)의 역사에서 보지 못하였던 일이며 신인(神人)이 함께 분노하는 바였으니, 전하께서 갑술년 국청(鞫廳)에서 밝히고 드러낸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무릇 전하의 신자(臣子)가 되어서 국모로서 우리 곤전(坤殿)을 섬기는 자라면, 눈을 부릅뜨고 간담(肝膽)을 두근거리며 살점을 뜯어먹고 그 가죽을 벗겨서 깔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즉 남구만(南九萬)은 여러 조정을 두루 섬기면서 삼사(三事)의 우두머리를 지냈으니, 《춘추(春秋)》의 정의(正義)를 들어보지 못한 바도 아닐 것이며 조정의 대법(大法)을 알지 못하는 바도 아닐 터인데, 사사로운 뜻은 화복(禍福)에 치우치게 집착하고 사악한 마음은 의리에 배치되어, 억지로 의친(議親)358) 의 법을 끌어다 천청(天聽)을 현란시키고 먼 장래를 깊이 염려한다고 핑계대며 여러 사람들의 눈을 가리려고 하였습니다. ‘장희재(張希載)가 법대로 복주(伏誅)되면 희빈이 불안해지고, 희빈이 불안해지면 세자가 불안해지며, 세자가 불안해지면 종사(宗社)가 불안해진다.’는 따위의 말은 전적으로 장희재를 날개로 덮어주고 군부(君父)를 현혹시키려는 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 하나의 보잘것 없는 흉얼(凶孽)이 무슨 종사의 안위(安危)에 관계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되지도 않는 말을 줏어모아 눈치나 보는 태도를 재빨리 지어내어 흉적을 굽혀 비호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하여, 마침내 크나큰 대죄인(大罪人)으로 하여금 하늘과 땅 사이에 목숨을 부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륜(彛倫)이 역패(斁敗)하는 지경에 떨어져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되고 사람이 사람꼴이 아니된 지 거의 12년에 이르렀으니, 남구만이 강상을 파괴하고 국법을 어지럽힌 죄는 통탄해 마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이후로 흉악한 역모가 그치지 아니하고 변괴가 백 가지로 나오니, 장희재의 처자들과 당류(黨類)들이 서울에 편안히 있으면서 귀신을 공양할 밑천을 가지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과 결탁하여 밤낮으로 경영한 것이 곤위(壼位)를 몰래 엿보며 왕가를 좀먹고자 하는 기미가 아님이 없었는데, 이번의 요망스러운 고독(蠱毒)의 화(禍)가 과연 궁액(宮掖)의 지밀(至密)한 곳에서 일어나 성모(聖母)로 하여금 명부(冥府) 가운데서 한을 머금게 하고, 성상으로 하여금 목청(穆淸)359) 의 위에서 놀라고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더욱이 우리 춘궁(春宮)께서 이제 막 엄청난 일을 당하였는데, 또 이처럼 놀랍고 기막힌 변고를 당하였으니, 신민들의 울분과 국가의 불행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 원인을 캐본다면, 남구만의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아! 지난번에 장희재를 일찍 나라의 법대로 복주하게 하여 그 근원을 없애버리기를 한결같이 조정의 법전과 《춘추》의 대의(大義)대로 하였더라면, 허리를 베고 목을 잘라버려야 마땅할 요망한 난적들이 또한 어찌 감히 흉악한 계책을 마음대로 부려서 궁금(宮禁)의 변고(變故)를 오늘날처럼 참혹하게 빚어내었겠습니까? 지금 나라의 기강이 비로소 떨쳐지고 천토(天討)가 바야흐로 행해져 역적의 당류들이 모두 법대로 복주되었으며, 장희재도 또한 장차 율(律)대로 처형될 것이니, 남구만은 역적의 괴수를 비호한 죄인으로 왕법(王法)에서 요행스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영부사(領府事) 남구만을 우선 먼저 파직시키소서.

업동(業同)의 고옥(蠱獄)의 변고는 실로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대개 곤위가 광복(光復)된 뒤로부터 나라를 원망하는 귀역(鬼蜮)360) 의 당류들이 장희재의 집에 몰려 들어 몰래 궁액(宮掖)과 내통하여 국가를 어지럽게 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목우상(木偶像)을 가짜로 만들어 몰래 장가(張家)의 산소에 묻어 두고 자기편 사람을 사주해 상변(上變)하여 옥사를 일으킨 데 이르러서는 그 뜻을 두어 계책을 꾸민 바가 어찌 다만 조정에 화를 전가(轉嫁)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만 그쳤겠습니까? 다행하게도 천일(天日)이 밝게 조림하시고 귀신이 옆에서 보살펴 주는 데에 힘입어 흉악한 정상과 간악한 형상이 이미 업동(業同)의 입에서 탄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국청의 대신 유상운(柳尙運)의 무리들은 천총(天聰)을 가리고, 옥정(獄情)을 조작하여, 여러 적들이 혹 그 실정을 털어놓고자 하면 먼저 그 근본이 반드시 드러날 만한 단서를 막아버리고, 증거가 요긴한 공초에서 나오면 문득 그 증거로 끌어들인 사람들을 심문하지 말자는 의논을 주장하였습니다. 국청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 가운데 혹 통분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고 법을 고집하는 논의가 그 사이에 능히 없지도 않았으나, 급급히 청대(請對)하여 곧 ‘의심스런 죄는 오로지 가볍게 다스리며 끝까지 핵실(覈實)할 수 없다.’는 말로 앞장서서 영구(營救)하고 힘을 다해 저지해 마침내 업동을 완전히 석방하고 끝내는 국청을 파하게 되자, 다정스레 감사를 드리고 심지어 ‘감격한다.’고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아! 죄악을 미워하는 본성을 사람마다 같이 타고났으니, 유상운이 지성으로 구해(救解)한 것이 어찌 그 본정(本情)이겠습니까? 대개 훗날 화복(禍福)의 기미를 돌아보고 자기 한 몸의 장구한 계책을 위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는데, 흉악한 고독(蠱毒)의 남은 수단이 또 장희재의 집에서 나왔고, 궁금(宮禁)의 나인(內人)에게까지 미쳐 마침내 금일의 화를 조성하였으니, 《춘추》의 대의로써 논하건대 또한 어찌 유상운이 죄인의 괴수가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또 장희재가 언문 서찰로 국모를 모해하려고 한 죄가 갑술년 국청의 하교(下敎)에서 드러났는데도 ‘깊이 먼 장래를 생각한다[深長慮]’는 세 글자를 주창하여 근거없는 말로 너그러이 용서할 것을 시종 주장한 자는 곧 남구만입니다. 그 뒤 대간(臺諫)의 소장(疏章)과 유생(儒生)의 상소가 번갈아 서로 엄하게 배척하였으나, 당시에 유상운은 목을 움추리고 입을 다문채 한 마디도 그 죄를 책임지겠다고 말한 바가 없었으며, 녹위(祿位)는 여전하고 행동거지는 태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대행 왕비께서 승하하시어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애통해 하는 날이 되자, 시골에 사는 유생의 이미 오래된 상소를 억지로 끌어다가 스스로 ‘깊이 먼 장래를 염려하는 의논을 신은 실로 힘써 주장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장희재의 죽음을 용서한 것이 정말로 자기의 손에서 나왔다면, 8년동안 어찌하여 혼자 몰래 참고 입을 다문 채 짐짓 참여하지 않은 체하였다가 지금에 와서야 갑자기 자수하여 은근히 자기가 떠맡았던 것인양 멀리 장래를 생각한다는 말을 빼앗아 취하며 현저하게 요행을 바라고 장래를 엿보려는 뜻을 가지는 것입니까? 식견이 있는 자들이 저으기 통분하며 길가는 사람도 비웃을 정도입니다. 공의(公議)가 있는 바라 죄를 성토(聲討)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판부사 유상운을 우선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기를,

"윤허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23일 병자 4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장천한·조시경 등의 공초 내용

국청 죄인 장천한(張天漢)이 다시 공초하기를,

"정빈(鄭彬) 숙정(淑正)의 집에 가 있었을 때, 제가 과연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매우 이상하게 여겨서 정빈에게 묻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는가?’라고 하였더니, 정빈이 대답하기를, ‘장희재와 더불어 서로 알기 때문에 와서 숙정을 만나는 것이다.’라고 하기에, 저는 즉시 곧 일어나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추수(秋收)하는 일 때문에 농장으로 내려가 반은 서울에서 반은 시골에서 있었는데, 서울에 있을 때 가서 숙정을 만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언문(諺文) 서찰에서 ‘칭예(稱譽)했다.’라고 한 일은, 저는 전혀 그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다면, 지난날 친국(親鞫)할 때에 어찌 묻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죄인 안세정(安世禎)이 다시 공초하기를,

"작은아기[者斤阿只]가 저와 숙정이 모여서 모의하였다고 하였는데, 설령 숙정과 제가 한 집에 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안팎이 이미 다르니, 자질구레한 일은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숙정이 출가(出嫁)한 뒤에 그 남편의 집 친족들과 더불어 저주(詛呪)한 일은 오히려 혹 했을지 몰라도 작은아기가 사는 곳은 또 숙정의 집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제가 왕래한 여부를 그가 어떻게 능히 알겠습니까? 작은아기가 숙정을 투기(妬忌)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하였기 때문에, 또한 저를 미워하여 망측(罔測)한 곳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이만(金以萬) 등과 모였던 일에 있어서 김 정승의 손자와 이의징(李義徵)의 아들은 모두 반면(半面)의 친분도 없습니다. 정 내승(鄭內乘)은 비단 한 동네에 같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민암(閔黯)의 집에 늘 있었기 때문에 민암의 집에 왕래할 때에 언제나 그와 더불어 서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김이만(金以萬)은 상놈이었으니, 제가 어찌 얼굴을 알겠습니까? 박씨 성을 가진 사람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이며, 그 사이에 모였던 사람들이 비록 많았었다고 하나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제가 숙정의 집에 갔을 때에 장희천(張熙川)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와 더불어 같이 가는 것이 매우 부끄러웠기 때문에 도로 일어나 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숙정이 굳이 만류하고 저는 안정(顔情)에 구애된 데다가 또 장희천이 노여워할까 봐 염려하여, 그대로 대청으로 들어가 술 석 잔을 마시고 물러나 돌아왔습니다. 또 민장도(閔章道)가 가서 숙정을 만났던 것은 장희재와 더불어 결탁하려는 뜻이었는데, 그 뜻은 국모(國母)를 모해하는 것과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일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숙정의 집에 모였던 일이 있은 뒤 숙정에게 뒤미처 묻기를, ‘내가 일어나 나온 뒤 너희들이 꾸민 이야기는 알지 못하겠다만 어떤 일이냐?’고 하였더니, 숙정이 ‘이것은 환국(換局)하는 일이다.’고 하기에, 제가 ‘너희들이 하는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화가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니 나는 서울에 있지 않으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이어서 가족을 거두어 하향(下鄕)하였는데, 무진년377) 9월 13일에 즉시 출발하였던 것은 대개 이 말을 들은 뒤에 황공하고 불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죄인 정빈(鄭彬) 윤순명(尹順命)은 각각 두 차례 형추(刑推)하고 신장(訊杖)이 30도(度)에 이르렀으나, 모두 전의 공초한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죄인 조시경(趙時炅)을 두 차례 형추하였는데, 다섯 번째의 신장에 이르자 바로 공초하기를,

"제가 곡반(哭班)에 왕래할 때 판서 오시복(吳始復) 의막(依幕)378) 에서 만나 뵈었으나, 별달리 주고받는 말은 없었습니다. 성복(成服)하던 날 오 판서가 일을 파하고 수각교(水閣橋) 본집으로 돌아왔는데, 저도 또한 가서 뵈었더니, 저녁때라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 판서가 저에게 ‘희빈(禧嬪)이 여러 후궁들과 매한가지로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들어서 알 수가 없다. 너는 모름지기 자세히 탐문하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윤보명(尹甫命)을 만났을 적에, ‘오 판서 희빈이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알고자 하여 나를 시켜 탐지하게 하였기 때문에 너에게 묻는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아는가?’라고 하였더니, 윤보명이 대답하기를, ‘나도 알지를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너는 모름지기 그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자세히 탐문하라.’라고 하였더니, 윤보명이 ‘마땅히 탐지한 뒤에 너에게 가서 회보(回報)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또 윤보명에게 ‘곡반(哭班)에서 장두유(張斗維)를 만나 들으니, 「장 대장(張大將)의 집안에서 생활이 매우 곤란하여 심지어 밥그릇 따위를 내다 판다」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오 판서의 뜻이 아니고 제가 스스로 제 뜻으로 물었던 것입니다. 또 작은아기의 집에 가서 물어본 일은 실상이 아니나, 윤보명에게 오 판서가 말한 바 ‘희빈이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탐문한 일은 과연 확실한 일입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정빈 윤순명을 재차 심문하였는데, 줄곧 형장을 참으면서 자복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형문을 더하게 하소서. 죄인 조시경에게 재차 형문을 더하였을 때 오시복이 복제(服制)의 일을 그에게 탐문하도록 하였던 한 가지 사실을, 이미 바로 공초하였으니, 지금 우선 형문을 정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오시복을 청컨대 잡아와서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죄인 장천한 안세정 등의 경우 숙정의 집에 왕래할 때에 일을 꾸민 정적(情迹)을 모두 숨기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세정은 흉역(凶逆)의 말을 또한 그가 들은 바에 의해 그 단서를 약간 드러내고 실토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모두 형추(刑推)하게 하소서. 죄인 애정(愛正)은 일찍이 그대로 가두어 두고 형세를 보자는 뜻으로서 계달하였는데, 당초에 비록 말한 바가 있었지만 이미 13세의 어린아이이고 이후로 다시 심문할 일도 없을 것이니, 방송(放送)함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재량(載量)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추국하는 것을 우선 파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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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24일 정축 3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안세정·안여익·민언량·오시복 등의 공초 내용

국청 죄인(鞫廳罪人) 정빈(鄭彬) 윤순명(尹順命)을 각각 세 차례 형문(刑問)하였는데, 신장(訊杖)이 30도(度)에 이르렀고, 죄인 장천한(張天漢)을 한 차례 형문하였는데 신장이 30도에 이르렀으나, 모두 전의 공초와 다름이 없었다. 죄인 안세정(安世禎)을 한 차례 형문하고, 신장이 30도에 이르니, 공초하기를,

"저는 무진년384) 9월 초 10일에 민장도(閔章道)와 더불어 숙정(淑正)의 집에 가서 모였습니다. 그 이튿날 또 민장도·장희재(張希載)와 더불어 민종도(閔宗道)의 집에 같이 갔더니, 민종도는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였고 그 아들 민언량(閔彦良)이 저희를 상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의(謀議)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장도가 먼저 ‘남인(南人)이 환국(換局)하는 일은 장희재를 중간 매개로 삼아야만 성사시킬 수가 있다.’ 하였더니, 장희재가 ‘명하는 대로 따르겠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민언량이, ‘숙부의 계획은 정말로 좋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그 밖의 사연은 전의 공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정빈 윤순명을 세 차례 엄하게 형문하였는데, 줄곧 완강히 견디며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죄인 장천한 안세정은 엄하게 심문하는 아래에서도 오히려 바로 공초하지 아니하였는데, 안세정은 전의 공초에서 단서(端緖)를 낸 말도 또한 일일이 실토하지 아니하고 단지 무진년 간에 그가 민장도·장희재와 더불어 민종도의 집으로 가서 모여, 그 아들 민언량과 주고받은 말들만 대략 공초하였습니다. 그 밖의 사연은 모두 전의 공초한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고 일컬으니, 그 정상이 더욱 지극히 간악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형문을 더하여 실정을 캐내게 하소서. 죄인 안여익(安汝益)은 전의 공초 가운데서 ‘사람들이 모였다는 말은 기사년385) 간에 과연 들은 바가 있는데, 숙정의 집에 모였을 때에 저의 조카는 나이가 어렸으나, 혹 왕래한 일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여러 죄수들을 핵문하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계품(啓稟)하여 처리할 일을 계달합니다. 그리고 그때 공초한 사연도 오히려 그 실상을 다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이것을 가지고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아울러 엄하게 형문하여 실정을 캐내도록 하라."

하였다. 죄인 정빈 윤순명을 각각 네 차례 형문하였는데 신장이 30도에 이르렀고 죄인 장천한 안세정을 각각 한 차례 형문하였는데 신장을 30도에 이르렀으나, 모두 전의 공초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죄인 안여익이 다시 공초하기를,

"저는 악한 조카 안세정과 간악하고 악독[奸毒]한 숙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죽을 처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기사년에 사람들이 모였다는 말은, 저의 조카 안세정이, ‘정말로 환국(換局)한 공이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칭도(稱道)한다.’라고 하였고, 기사년 전후에 안세정이 그 당류(黨類)와 더불어 항상 장희재의 집에 모였으나 그 모였던 당류가 누구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저는 갑술년386) 에 장수 군수(長水郡守)가 되었다가, 그 해에 도로 곧 순천(順天)에 정배(定配)되었으며, 을해년387) 에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병자년388) 에 풍질(風疾)을 얻어서 지금까지 보통 때와 같지 않습니다. 집 문앞과 뜰 사이에서도 오히려 또 지팡이를 짚는데, 어찌 능히 사람들이 모였던 곳에 왕래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밖에는 달리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죄인 민언량이 공초하기를,

"저는 경술년389)  신해년390) 사이에 사촌 대부(大父)의 집을 빌려서 들어갔기 때문에, 안세정이 그 뒤에 거주하였는데, 제가 어린아이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었는데, 기사년에 제가 5촌숙(五寸叔) 민장도와 더불어 대부(大父) 집에서 돌아오다가 민장도 안세정의 소과(小科)를 축하하려 안세정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므로 제가 그와 더불어 같이 들어갔고, 경술년 이후에 비로소 다시 서로 만났었는데 다만 절후에 대한 인사를 물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묘년391) 에 제가 적소(謫所)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안세정이 홀연히 와서 저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다시 서로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기사년에서 기묘년에 이르기까지 10년 이내에 제가 만약 안세정과 더불어 서로 만난 일이 있다면, 죽어도 좋을 것입니다. 모의(謀議)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하였다. 죄인 오시복(吳時復)이 공초하기를,

"저는 본래 죄루(罪累)의 자취가 있어 시골에 처박혀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망극함을 이기지 못한 채, 소식을 들은 즉시 길을 떠났습니다. 밤이 이슥한 뒤 동대문(東大門) 밖에 이르러 파루(罷漏)를 기다려 분곡(奔哭)하였는데, 분의(分義)가 있는 바라 감히 물러나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대궐 근처의 여염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른바 조시경(趙時炅)은 그 아비가 저와는 문무과(文武科)의 동방(同榜)이었으므로 예전에 서울에 있을 때 때대로 혹 왕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분답(紛沓)한 가운데서도 와서 만나고는 즉시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성복(成服)이 지난 뒤 날이 저물어 미처 시골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조시경이 마침 왔길래, 제가 우연히 묻기를, ‘곡반(哭班)에 왕래할 때에 들으니, 어떤 이는 「희빈이 예(例)대로 상복을 입는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상복을 입지 않는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여항(閭巷)의 소문은 어떠한가?’ 하였더니, 조시경이 ‘여항의 소문도 또한 이와 같으나, 그 상세한 바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의 문답은 이와 같은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우연히 들은 바를 가지고 대충 말하였는데, 조시경은 제가 그 상세한 것을 알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곳에서 들었는지는 원래 제가 알 바가 아닙니다. 장희재의 집에 안부와 생활 따위의 말은 본래 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니, 근거가 없는 것이 너무나 심합니다. 그리고 복제(服制)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은 우연히 언급했던 것인데, 저에게까지 미쳐 묻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실로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입니다. 전지(傳旨) 가운데의 사연은 천만번 애매합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정빈 윤순명·장천한·안세정 등은 그 정적(情迹)이 이미 드러났으나 연달아 엄하게 심문하는데도 줄곧 버티고 숨기니, 진실로 지극히 통분스럽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형문을 더하게 하소서. 죄인 안여익은 사람들이 모였던 일을 오로지 그 조카에게 돌리고, 그 자신은 병이 있다고 핑계대며 원래 왕래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미 의심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그 조카의 기사년 전후의 종적(蹤迹)에 대해서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그 당류(黨類)의 모의(謀議)를 모두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거짓을 꾸며서 속이는 것입니다. 청컨대 형추(刑推)하게 하소서. 죄인 민언량 안세정과 이미 어린아이 때부터 서로 알았다고 하고는 전후에 서로 만난 것이 불과 두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너무나 사리에 가깝지 아니하니, 청컨대 안세정과 더불어 한곳에서 면질(面質)하게 하소서. 죄인 오시복은 우연히 들은 바를 조시경에게 언급하였다고 하는데, 조시경의 공초에서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들어서 알지를 못하니, 네가 모름지기 자세하게 탐문하라.’고 했다고 하였으니, 피차에 공술한 것이 대단히 서로 어긋납니다. 청컨대, 조시경에게 다시 추국한 다음에 계품(啓稟)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26일 기묘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안세정·민언량의 면질 내용과 조시경·박명겸·순복 등의 공초 내용

국청 죄인(鞫廳罪人) 안세정(安世禎) 민언량(閔彦良)을 한곳에서 면질(面質)시켰는데, 안세정 민언량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날 저녁에 내가 민장도(閔章道)·장희재(張希載)와 더불어 너의 집에 갔더니, 너의 아비가 집안에 있는 것 같았는데, 시골에 내려갔다고 핑계대고 즉시 나와서 보지 아니하였으며, 네가 먼저 나와서 접대하면서 ‘누구 장수가 되고, 누구 재상이 된다.’라고 하니, 장희재가 ‘만약 환국(換局)하자면 하루라도 장수와 재상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이 말이 옳다.’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자 네가 ‘우리 대인(大人)께서는 밤이 깊은 다음에야 마땅히 돌아오실 것이다.’ 하면서 이어 너의 계집종 예금(禮今)을 시켜서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는데, 너의 집 계집종 중에 예금이란 자가 있지 아니하냐? 이와 같이 문답한 뒤에 너의 아비가 비로소 나와서 ‘내가 출타하였다가 방금 들어왔는데, 요사이 오랫동안 안 서방(安書房)을 만나지 못하였다. 옛날 당(唐)나라 이세적(李世勣)이 출정(出征)할 때에 반드시 얼굴 생김새가 잘 생긴 사람을 골라서 보냈다.392) ’고 하면서 이어 내 얼굴을 보고 ‘얼굴이 잘 생겼다.’라고 하였다. 또 ‘어찌 심부름값이 없겠는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이엄(耳掩)393) 을 비스듬히 쓰고 있었는데, 너의 아비가 ‘눈에 부스럼이 생겼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니 지금 네가 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느냐?"

하니, 민언량 안세정을 향하여 말하기를,

"내가 전후에 일찍이 이와 같은 말을 듣지 못하였다. 민장도가 이미 죽었으니, 지금 너와 나와 장희재만 살아 있다. 나는 그해 8월 하순에 타작(打作)하는 일 때문에 수원(水原)의 사창(社倉)으로 나갔다가, 그 길로 아산(牙山) 신창(新昌) 등지로 갔었으며, 이어서 장인의 임소(任所)에 머루르다가 10월 초에 비로소 돌아왔다."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그때 있었지 아니하였더냐? 이야기할 때가 어찌 무진년394) 가을 경이 아니었던가?"

하니, 민언량 안세정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때에 자리에 참여하여 앉았던 사람은 오직 장희재만 있을 뿐이다. 장희재가 만약 온다면, 그 허실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안세징이 민언량을 향하여 말하기를,

"강릉 부사(江陵府使) 여익제(呂翼齊)가 그날 너의 아비에게 하직(下直)하러 왔었다. 네가 어찌 초록색 옷을 입고 나오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가 혹시 우리 아비와 내 형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냐? 나는 수원을 거쳐 신창에 갔기 때문에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다."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그날 그대로 너의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올 때에 내가 가졌던 부채를 잃었는데, 너가 어찌 나에게 따로 부채 한 자루를 주지 않았던가?"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이 틀림없으니, 다른 사람과 말을 주고받은 일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알지 못하겠다만 시월(時月)의 착오가 아니냐? 그때는 내가 집에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전혀 알지를 못하니, 나는 대답할 만한 말이 없다."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너가 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만약에 너의 집에 가지 않았다면, 너의 계집종 예금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때 너의 계집종 예금이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한 일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였다. 네가 비록 살고자 하지만 어찌 뻔뻔스런 얼굴로 상대하여 이처럼 서로 만나보지 아니하였다는 말을 하는가?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진휴(李震休)가 갈 때에도 나와 더불어 서로 만나보지 아니하였단 말이냐?"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이 말은 과연 옳다. 그날 날이 저물었을 때 네가 한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어두컴컴하였기 때문에 네가 온 줄 알지 못하였다. 네가 떠나간 뒤에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고서야 너가 왔던 것을 알았다."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저동(苧洞)에 있는 너의 집 대문(大門)에 들어서면, 왼쪽에 방 1칸 마루 1칸이 있는 곳이 있다. 내가 만약 너의 집에 왕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너의 집이 이와 같은 것을 알겠는가?"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가 비록 이세적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하지만, 나는 그 때에 사창(社倉)에 내려갔다가 이어서 신창(新昌)으로 갔으므로, 이 말을 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비록 능히 질언(質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장희재가 아직 살아 있으니, 만약 혹시라도 살아 와 그와 면질한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너의 말이 또 근거가 없는 것이 있다. 전의 저동(苧洞)에 있던 옛집은 지금 박종발(朴宗發)의 누이의 집이 되었으니, 그 집의 모양이 너가 말하는 바와는 같지 않다."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네가 기사년395) 에 내가 소과(小科)에 급제했을 때 와서 보았다고 하는데, 너의 집은 그때 형세가 당당하고 교만한 기세가 몹시 심하였으니, 너가 어찌 와서 나같은 사람을 만나 보았다는 말인가? 기사년 소과 때 와서 보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너의 집에 가서 들어갔더니, 너의 집 서쪽 뜰이 매우 넓었고 방은 남쪽 편에 있었다. 바야흐로 재인(才人)396) 을 고를 그때 어찌 가서 보지 아니하였다는 말인가?"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기사년 이후에는 네가 우리집에 와서 만나본 적이 없으며, 너의 대부(大父)의 집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는 내가 너의 집에 가서 만난 일도 능히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능히 다른 사람 집에서 서로 만난 것을 기억할 수가 있단 말이냐? 너의 말은 뒤죽박죽이다."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이 일은 무진년 가을철부터 시작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있었다.’고 하겠는가? 그날 장희재가 ‘큰 일을 하자면, 장수와 재상이 한시라도 없을 수가 없으니, 누가 이것을 할 수가 있는가’ 하자 너와 민장도가 ‘그때 가면 장수와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이 절로 있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민장도가 또 ‘재상이라면 옛날 재상들이 있다. 병조 판서라면 나의 대인(大人)이 또한 할 만하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가 처음에는 ‘이러한 말을 네가 하였다.’고 하였다가, 뒤에 가서는 ‘장희재가 하였다.’고 하고, 끝에 가서는 ‘민장도가 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데, 이와 같이 착란(錯亂)하여 발설(發說)하는가?"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네가 그때 ‘장수와 재상은 없을 수가 없다.’고 하자, 장희재가 ‘이 말이 옳다. 장수와 재상은 마땅히 어떠어떠한 사람으로 속히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민언량 안세정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의 말이 비록 이와 같지만, 그때 내가 집에 있지 아니하였으니, 이런 따위의 말을 나는 끝내 알지 못한다."

하였다. 민언량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누가 장수가 될 만하고 누가 재상이 될 만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찌하여 그 사람들을 분명하게 말하지 아니하는가?"

하니, 안세정이 말하기를,

"그때 너의 아비가 또한 ‘재상은 절로 옛날 재상들이 있으며, 병조 판서는 또한 때에 따라 할 수 있다.’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다. 안세정이 말하기를,

"그날 말을 주고받을 때 내가 ‘이것은 곧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의 기틀이 되니, 또한 매우 걱정스럽다.’고 하자, 여명(汝明)이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으며, 모의를 이루는 것은 사람에 있다. 사생과 화복을 어찌 이와 같이 무서워하는가?’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여명(汝明)은 곧 민장도(閔章道)이다. 그리고 장희재가 또한 ‘어찌 그리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내가 안 서방이 어쩔 수 없이 이러한 모의에 끌려들어 온 것을 알고 있으니, 내가 마땅히 그대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겠다.’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전후의 사설(辭說)을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므로, 전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죄인 조시경(趙時炅)이 다시 공초하기를,

"어제 공초를 바칠 때 이미 오 판서 희빈의 상복을 입는 일을 탐문(探問)하게 하였다고 바로 공초하였으며, 그 사이의 사건의 실상은 전과 같이 다름이 없습니다. 제가 곡반(哭班)에 나아갔을 때에 민언량을 만났더니, 인마(人馬)가 아울러 북적거려 나올 수가 없었으므로 단지 그 얼굴만 보았을 뿐입니다. 성복(成服)한 지 며칠 뒤 민언량의 종을 길에서 만났더니, 민언량의 종이 말하기를, ‘저의 상전이 저를 부르기 때문에 바로 저의 집으로 갑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그 종을 따라서 민언량을 만났더니, 날씨에 대한 인사를 나눈 뒤 민언량이 ‘희빈이 상복을 입는가? 안입는가?’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민언량이 또 ‘윤보명(尹甫命) 등을 네가 알고 있는가?’라고 하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윤가(尹哥)는 3형제가 있는데, 하나는 이미 죽었고, 그 나머지는 서로 만나 보지 못한 지 4, 5년이 되었다.’ 하였더니, 민언량이 ‘이 사람들이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알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탐지하라. 장차 이것을 가지고 상소(上疏)하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물어보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과연 윤보명에게 물었더니, 윤보명의 말이 ‘상복의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문답한 것은 이러한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민언량 윤보명 등을 제가 다시 서로 만나 본 적이 없으나, 그 뒤에 제가 들으니, ‘상복을 입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상소가 과연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상소가 나온 뒤 가서 민언량을 만났더니, 민언량이 ‘취선당(就善堂)이 매장한 흉물(凶物)을 군사를 시켜서 파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하기에, 제가 답하기를, ‘나느 알지 못하는데 나으리가 어찌 이것을 아는가?’라고 하였더니, 민언량이 ‘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박시원(朴時遠)이 나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안다.’고 하였습니다. 또 오 판서가 저를 시켜 희빈의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상세히 탐문하여 보고하게 한 일은, 성복(成服)한 그날 저녁 무렵 제가 오 판서의 집에 갔더니, 마침 다른 손님이 없었으며, 오 판서가 ‘오늘 성복(成服)에 희빈이 상복을 입는 것은 여러 후궁(後宮)들과 일체로 한다던가? 나는 내일 마땅히 시골로 돌아가야 할 것이나,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이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너는 윤가(尹哥)를 알고 있는가?’라고 하기에, ‘제가 알고 있다’고 하였더니, 오 판서가 ‘너는 모름지기 윤가에게 탐문하여 알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즉시 탐문하지 아니하였다가, 민언량이 말한 바에 의하여 비로소 윤보명에게 가서 물어 보았던 것인데, 윤보명이 대답하기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작은아기에게 제가 또한 가서 탐문했다는 일은 너무나 애매합니다. 그러나 오 판서 장희재의 안부를 물은 일은, 실제로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 전의 공초에서 공술(供述)한 바와 같습니다."

하였다. 죄인 박명겸(朴命謙)이 공초하기를,

"저는 갑술년에 조모(祖母)의 상을 당하여, 온 가족이 대구(大丘)로 내려간 지가 지금까지 8년이며, 그 사이에 경중(京中)에 왕래한 적이 없지 아니하였습니다. 병자년397) 에 향시(鄕試)의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회과(會科)398) 를 보기 위해서 10월에 상경하였으나, 낙방(落榜)한 뒤에 즉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정축년399) 에 같이 살던 사촌(四寸)의 상을 당하였고 또 계부(季父)의 상을 당하여 수삼년 동안에 상환(喪患)이 거듭 겹쳐 경황이 아주 없었습니다. 무인년400) 에 외조부모의 회혼례(回婚禮)401) 를 치르고서 또 상경하였었는데, 집의 어미가 병이 지극히 위중하였다는 말을 듣고 즉시 창황하게 내려갔었습니다. 그해 동짓달에 저의 아비가 장릉 참봉(莊陵參奉)이 되었으므로, 기묘년402) 봄에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올라왔으나, 저는 그대로 대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 4월에 또 상경하였다가, 8월에 내려갔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상경하였을 때가 병자년 10월이었으니, 이때는 이의징(李義徵) 아들의 옥사가 이미 지난 뒤입니다. 그러니 저의 원통한 실상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혹 상경한 때가 있었다고 하나 저의 종적(蹤迹)을 일가(一家)와 친구들이 알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또 이른바 함께 모였던 사람들은 거개 알지 못합니다. 이의징의 아들의 경우 저의 처 4촌(妻四寸)이었으므로 갑술년 전부터 과연 서로 더불어 알고 있었으나, 갑술년 이후로는 다시 서로 만나 보지 못하였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에 혹 살아 있는 자가 있어 저의 이름과 자(字), 나이와 모습을 물어 보되 만약 서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비록 죽어도 달갑겠습니다."

하였다. 죄인 순복(順福)이 공초하기를,

"저의 여 상전(女上典)이 김 직장(金直長)을 맞이해 오고 방찬(方燦)에게 사환(使喚)시켰던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 직장의 집은 제가 세시(歲時)에 한 번 문안을 드렸으나, 맞이해 왔던 일은 없습니다. 방찬은 상전이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을 때 교련관(敎鍊官)이 되었기 때문에 과연 얼굴을 알았을 뿐이며, 원래 사환시켜서 왕래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죄인 정빈(鄭彬)을 다섯 차례 형문(刑問)하고 신장(訊杖)이 30도(度)에 이르렀으나, 전에 공초한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죄인 윤순명(尹順命)을 다섯 차례 형문하고 위차(威次)를 베푸니, 공초를 바치기를,

"나무 인형[木人]의 일은, 별감(別監)이 가져 가기 전에 제가 설혹 얻어 들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능히 분명하게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만 별감이 가져 갈 때에 명백하게 보았다고 답하였던 것입니다. 서찰의 일에 대해서는 제가 실제로 가지고 간 일이 없으며, 서찰 중의 사연은, 제가 작은아기와 더불어 대질(對質)할 수만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지난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나, 작은아기를 만나본즉, ‘제주(濟州)에서 방재(龐災)에 관한 책 1권과 방재의 도구(道具)로서 계란같은 물건 3개를 숙정에게로 보내 왔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묻기를,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는가?’ 하였더니, 작은아기가 ‘대사동(大寺洞)에 사는 무녀(巫女) 삼이(三伊)가 그곳에 와서 말하였기 때문에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죄인 장천한(張天漢)을 세 차례 형문하였는데 신장을 30도에 이르렀으며, 죄인 안여익(安汝益)을 한 차례 형문하였는데 신장이 30도에 이르렀으나, 모두 전에 공초한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정빈(鄭彬) 장천한(張天漢)은 줄곧 완악하게 참고서 여전히 실정을 자백하지 아니하니, 더욱 지극히 통악(痛惡)합니다. 청컨대, 형문(刑問)을 더하게 하소서. 죄인 윤순명(尹順命)에게 장차 형문을 더하고자 할 즈음에 ‘제주(濟州)에서 흉물(凶物)을 보내 왔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자복을 하는 말은 아니지만 추핵(推覈)하여 처치하지 아니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 형문을 더할 수가 없으며 작은아기에게 이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 마땅히 끝까지 심문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그 전후 공초한 사연에 점출(拈出)하여 물어볼 만한 말이 있으니, 청컨대 작은아기를 다시 추핵하게 하소서. 죄인 안세정(安世禎)은 이미 두 차례 형신(刑訊)을 받았는데, 면질(面質)시키고 하옥한 뒤 병세가 아주 위중해졌습니다. 또 장희재를 잡아온 뒤 빙문(憑問)할 단서가 없지 아니하니, 섣불리 죽을까 염려스러워 오늘은 심문을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형세를 보아가면서 형문을 더하게 하소서. 죄인 안여익(安汝益)이 전후로 공초한 사연 가운데서 안세정(安世禎)의 정절(情節)에 대해 그 단서를 조금 드러내었습니다만, 그 실상을 다 말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이미 형추(刑推)하기를 청하여 한 차례 엄하게 심문하였으나 아직도 실토하지 아니하니, 그대로 형문을 더하기를 청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람이라 또한 섣불리 죽을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청컨대 우선 안세정의 사실 자백 여부를 보아가면서 다시 계품(啓稟)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죄인 민언량(閔彦良) 안세정을 면질시켰더니, 안세정이 말한 바가 간혹 사실이 아닌 것도 있었으나, 또한 그 내력(來歷)이 없지도 아니하였으니 창졸간에 지어낸 말은 아닌 듯하였습니다. 민언량은 다만 ‘혹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과 서로 말하였던 것이며, 나는 시골에 내려가 그 자리에 없었다.’라고 하였는데, 그가 말한 바 시골에 내려갔다는 데 대해 이미 분명하게 증명할 길이 없으니, 이것은 반드시 발명할 단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 이외에도 또 조시경(趙時炅)을 다시 추핵하자 거론한 말이 있으니, 민언량에게 청컨대 이 말을 가지고 먼저 다시 추핵하게 하소서. 조시경을 다시 추핵하자 공초한 바에 ‘오시복(吳始復)이 말한 바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상세하게 탐문하여 보고하라」고 한 것은 전의 공초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는데, 오시복의 공초한 사연 중에 또한 전후로 착란된 말이 없지 아니하니, 청컨대 오시복을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죄인 박명겸(朴命謙)은 이미 갑술년 이후에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고, 사람들이 모였던 실상에 있어서는 아직 현저하게 드러난 단서가 없으니, 청컨대 그대로 가두어 두고 앞으로의 형편을 보아가며 처리하게 하소서. 죄인 순복(順福) 업동(業同)이 뒤에 공초한 바로 보건대 이미 ‘김지중(金志重)이 그 상전과 불목(不睦)하였으므로, 왕래 또한 드물었다.’고 하였으니, 항상 맞이해 왔다는 말은 절로 사실이 아닌 데로 귀착됩니다. 또 방찬(方燦)을 위하여 안상전[內上典]에게 말을 전했던 일이 있으니, 청컨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작은아기의 결말을 기다린 뒤 처치하게 하소서. 죄인 김지중은 용서할 만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 순복이 아직 잡혀오기 전이므로, 감히 곧장 계품하지 못합니다. 지금 물어볼 만한 일도 없으며 석방하여 보내야 마땅할 것 같으니, 청컨대, 성상(聖上)께서 재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28일 신사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작은아기·민언량·장희재·오시복 등의 공초 내용

승지 이국방(李國芳)이 아뢰기를,

"죄인 장희재(張希載)를 빨리 나라의 형벌대로 시행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 전 대사간(大司諫) 윤덕준(尹德駿)이 본죄(本罪)를 논단(論斷)하는 일로 상소를 올렸더니, 상소의 말이 타당하였다고 비답(批答)하셨습니다. 그러니 전지(傳旨)를 고쳐서 봉입(捧入)한 다음이라야 국청(鞫廳)에서 마땅히 문목(問目)을 만들 것인데, 당초 장희재가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한 죄상이 그때 죄를 청하였던 대계(臺啓)에 모두 실려 있으니, 그때 쓴 말로 전지를 고쳐서 봉입해야 하리까? 감히 계품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작은아기가 다시 공초하기를,

"금년 2월에 제주(濟州)에서 윤순명(尹順命)에게 보냈던 서찰이 5월 10일에 도착하였는데, 제가 먼저 뜯어 보았더니 이르기를, ‘이 글을 너의 형제가 마땅히 같이 보아야 한다. 이 여자가 전부터 우리 집안에 살면서 방재(龐災)에 관한 말을 지어냈는데, 이때 생각해 보건대 궐내(闕內)의 병환이 이와 같은데 저 같은 흉언(凶言)을 지어내니, 반드시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 토막내어 죽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서찰은 윤순명이 가지고 간 것이 확실합니다. 대사동(大寺洞)에 무녀(巫女) 삼이(三伊) 설향(雪香)은 궐내에서 귀매(鬼魅)404) 의 요괴(妖怪)한 짓을 하여 단발(斷髮)하는 일로 인해 저의 집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삼이는 제가 과연 불러와 한 차례 신사(神祀)를 설행하고 귀매에게 빌었습니다. 또 저의 남편이 귀양갔을 때에 용제사라고 하면서 수로(水路)에 무사하기를 기도하였을 뿐입니다. 삼이에게서 방재(龐災)에 관한 책에 대해 듣고 방재의 물건을 보냈다는 일은 전혀 맹랑한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윤순명의 말이 이와 같다면, 그는 반드시 알고 있을 터이니, 그에게 물어본다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희빈의 상복을 입을지의 여부를 와서 물었던 일은, 윤보명(尹甫命)이 와서 물어본 뒤 어떤 사람이 또 문 밖에 왔으므로 건장한 종을 내보내게 하고 제가 창틈으로 보았더니 무인(武人)인 것 같았습니다. 저의 집에는 건장한 종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제 집의 어린종에게 묻기를, ‘윤 부장(尹部將)이 왔는가? 안왔는가?’라고 하기에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더니, ‘윤 부장이 간 곳을 하량교(河梁橋)에다 물었더니 알지 못하여 이곳에 물어본 것인데, 또한 없다는군.’ 하고 이어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물었던 말은 저의 앞서 공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조시경(趙時炅)은 일찍이 항상 왕래한 일이 없고 본래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과연 지면(知面)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초에 어찌 이름을 들어서 대답을 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연서역(延曙驛)에 흉물(凶物)을 매장한 일로 방찬(方燦) 순복(順福)을 시켜 말을 전한 일은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죄인 민언량(閔彦良)이 다시 공초하기를,

"조시경(趙時炅)의 부자와 저의 부자는 같은 나이이기 때문에 자못 정분이 있었고, 조시경이 혹 때때로 와서 만나긴 하였지만, 복제(服制)의 일은 일찍이 물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달 9월 초2, 3일 사이에 조시경의 형이 불러서 물어볼 일이 있다며 조시화(趙時華)의 집에 종을 보내 불러오게 하였는데, 제가 마침 출입할 곳이 있었으므로, 조시화가 저의 집에 왔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제가 향교동(鄕校洞)에 있는 매부의 집에 있었는데, 조시화가 그곳으로 저를 찾아왔기에 제가 묻기를, ‘근래 이 좌윤(李左尹)이 상소로 희빈의 복제를 논한 일로 말미암아 외간(外間)에서 전하는 말이 여러 가지이다. 혹자는 「상복을 입지 아니한다.」 하고, 혹자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하며, 혹자는 전하기를, 「예조에서 마련한 바에 복을 입게 한다」라고 하는데, 너는 혹시 상세히 아는가?’라고 하였더니, 조시화가 ‘능히 자세히 알지 못한다. 마땅히 물어서 알아 가지고 와서 보고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것 때문에 가서 묻는다면, 아주 일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조시화가 그 뒤 다시 와서 보고한 일이 없었습니다. 초6일 식후(食後)에 조시경이 저의 집에 저를 찾아와서 ‘어제 저녁 나인[內人]으로서 궐중으로 붙잡혀 들어간 자가 있어 저의 형이 장의동(壯義洞)의 동네 어귀에서 이것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저는 단지 이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뒤 5, 6일이 지난 뒤에 성임(成任)이 와서 ‘궐중에서 무엇을 파낸 일이 있었는데, 아직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그 말을 듣고 놀라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박시원(朴時元)이 일찍이 저의 딸을 길렀기 때문에 자못 절친한 사이여서 정이 한 집안과 같았습니다. 즉시 사람을 보내어 불렀더니, 박시원이 대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비로소 소문을 물었더니, 박시원이 ‘나도 또한 아직 능히 알지 못한다. 대개 어제와 그저께 사이에 수색해서 파낸 일이 있다고 전하나, 얻은 물건은 없었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조시경이 와서 저를 만났는데, 박시원이 전했던 말을 전하고, 묻기를, ‘너도 또한 들었는가?’ 하였더니, 조시경이 ‘나는 듣지를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죄인 장희재(張希載)가 공초하기를,

"동평군(東平君)의 서찰을 신의 첩의 집을 통하여 궐내(闕內)로 들여보냈던 일은 과연 있었으며, 서찰을 전달할 즈음에 저의 집 계집종을 시켜 항상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제 마음속으로 그것이 미안(未安)함을 알았으나, 무식한 소치로 ‘종실(宗室) 집안에서 으레 궐내에 서찰을 통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여 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봉함(封緘)한 글을 제가 어떻게 뜯어 보았겠습니까? 이미 뜯어 보지 아니하였으니, 그 글의 사연을 전혀 알지 못하는 데, 작은아기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동평군이 ‘세자의 어머니를 중궁(中宮)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으로서 숙원(淑媛)에게 글을 보내고, 주달(奏達)하게 했다는 것이 사세(事勢)로 미루어 보건대 어찌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또 숙원이 자기를 중궁으로 삼아 달라는 뜻을 상전(上前)에 진달(陳達)하였더니, 어찌 이와 같은 인사(人事)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작은아기에게 가야지(可也之)란 이름의 계집종이 있었는데, 무녀(巫女)를 불러와 저주(詛呪)하는 물건을 잘 파낸다고 핑계를 대고 저의 집 곳곳을 파낸다는 말을 저에게 왕래하던 노복(奴僕)을 통해 들었기 때문에, 제가 과연 윤순명(尹順命)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 여자가 이런 흉언(凶言)을 지어내니, 혹시라도 나를 질시하는 자가 있어서 만약 이런 말을 퍼뜨리며 궐내에서 방재(龐災)를 한다는 말을 지어 낸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모두 마땅히 죽을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니, 작은아기를 공동(恐動)시켜 그를 징계하고 두려워하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궐내(闕內)의 방재는 곧 역적질입니다. 설령 이와 같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윤순명은 저의 사촌인데, 이와 같은 따위의 말을 나이 어린 사촌 사이에 글로 통기한다는 것이 절대로 이치에 가깝지 아니함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재에 관한 책자(冊子) 등의 물건을 내보냈다는 말은 너무나도 근거가 없습니다. 만약 윤순명과 면질(面質)시킨다면 변명할 수가 있습니다. 무진년405) 9월에 민종도(閔宗道)의 집에 가서 모여서 모의하였다는 일은, 9월에는 가서 모이지 아니하였으며, 그 뒤에 안세정(安世禎)·민장도(閔章道) 등과 더불어 과연 민언량(閔彦良)의 집에 왕래하였으니, 서로 허물을 흉보지 아니하는 사이인데, 무슨 말인들 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민언량의 ‘무리들이 과연 만약 환국(換局)을 우리들에게 맡긴다면, 어찌 춘궁(春宮)을 잘 보호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으며, 또 그 뒤에 민언량이 취중에 또 환국에 대한 말을 하였는데, 제가 ‘비록 취중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환국이 어찌 우리가 할 수 있는 바인가?’라고 하였더니, 민언량의 무리들이 듣고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여익(安汝益)이 공초한 가운데, ‘안세정이 그 당류(黨類)와 더불어 저의 집에 모였다.’는 일은, 안여익과 면질시킨다면 또한 변명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죄인 오시복(吳始復)이 다시 공초하기를,

"저는 한 마디 말 때문에 재차의 엄한 형문(刑問) 아래서 놀라고 두려워 벌벌 떨면서 곧장 땅속으로 뚫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의 공초에서 혹은 상복을 입는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상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미 그렇게 하였다.’고 한 것이 아니라, 대개 장례에 상복을 입을지 또는 입지 않을지를 가지고 말한 것이었으니, 이것은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소치에 불과하고, 제가 물었던 바는 이미 ‘아직 미처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곡반(哭班)에 왕래할 때에 들은 바 또한 여염(閭閻)에서 전하는 말에서 나왔으니, 조시경(趙時炅)에게 물었던 것은 여항(閭巷)의 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시경은 곧 여항에서 생장한 사람이기 때문에 문답한 것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아니하였을 뿐입니다. 윤보명(尹甫命)은 전부터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니, 탐문하였다는 말은 실로 근거가 없으며, 조시경이 잘못 고한 소치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당초에 그가 와서 만났을 때에 제가 ‘들은 바가 있으면 와서 말하라.’라는 말을 하였으니, 조시경이 이것을 가지고 ‘탐문’이라 생각한 것 또한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다투어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죄인 정빈(鄭彬)을 여섯 차례 형문하였는데 신장(訊杖)이 30도에 이르렀고, 죄인 장천한(張天漢)을 네 차례 형문하였는데 신장이 30도에 이르렀으나, 모두 전에 공초한 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정빈 장천한은 줄곧 신장을 참고 자복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형신을 더하게 하소서. 장희재는 어제의 계사(啓辭)에 의하여 우선 다른 죄인들이 끌어댄 말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만들어서 추문하였더니, 방재(龐災)를 누설한 것과 그 책자(冊子)를 내보냈던 두 가지 사실은 그가 비록 발명하였으나, 봉서(封書)에 관한 한 가지 사실에 이르러서는 왕래한 중간 매개가 되었음을 능히 숨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서를 뜯어 보았는지의 여부는 작은아기가 공초한 사연과 서로 어긋나니, 청컨대 작은아기에게 먼저 이로써 다시 추국한 뒤 이어서 그가 공초한 것을 가지고 장희재에게 다시 심문한 다음 계품(啓稟)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민언량(閔彦良)이 복제(服制)를 탐문한 따위의 일은 이미 수상한 데 관계되고, 장희재 등과 더불어 같이 모였던 일을 장희재가 이미 완전히 숨기지 못하였으니, 그 전의 공초에서 스스로 발명한 말도 꾸며댄 거짓말로 돌아갔습니다. 청컨대 이로써 다시 추국하게 하소서. 오시복을 다시 추국하였더니, 그가 말한 바, ‘들은 바를 와서 말하였다.’고 하는 것이 전에 공초한 가운데 ‘범연하게 언급하였다.’는 말과 같지 아니하니, 청컨대 지금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다시 앞으로의 사단(事端)을 보아가면서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처음부터 끝까지 흉모(凶謀)를 주장한 자는 숙정이었으니, 장희재가 알지 못하였을리 만무한데, 말을 꾸며대며 거짓으로 발명하니, 더욱 지극히 통분스럽다. 각별히 엄하게 심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7일 경인 1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민언량의 공초 내용

국청(鞫廳)의 죄인 정빈(鄭彬)을 열한 차례 형문(刑問)하며 신장(訊杖) 30도(度)를 쳤으나, 전초(前招)에서 가감이 없었다. 죄인 민언량(閔彦良)을 네 차례 형문(刑問)하고 위세(威勢)를 베풀려 할 즈음에 직초(直招)하기를,

"국휼(國恤)456) 10여 일 뒤에 동료들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상소(上疏)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권규(權珪) 권중경(權重經)을 만났더니, 말을 전하기를, ‘목임일(睦林一)·심단(沈檀)·오시복(吳始復) 등이 의막(依幕)에 모여 말하기를, 「희빈(禧嬪)을 잠시 내려서 빈(嬪)으로 삼았으나, 이제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승하(昇遐)하신 뒤이니, 마땅히 중궁(中宮)을 세워야 하는데, 사리로 말하면 희빈이 마땅히 중궁이 되어야 하니, 상소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고 권중경이 이어 말하기를, ‘오도일(吳道一)이 혹시 남인(南人)을 만나면 말하기를, 「지위를 올리라는 상소를 오시복의 무리가 어찌 하지 않는가?」 하였다.’ 하였는데, 권중경이 전하는 바 언근(言根)은 당시에 제가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알지 못하였으나, 권중경이 또한 말하기를, ‘희빈이 이미 국모(國母)로 6년 동안 임하였으니, 마땅히 차례를 따라 지위가 올라야 할 듯하나, 일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먼저 상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반드시 상소할 것 없이 다만 앉아서 관망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희빈의 지위를 올리는 여부는 일에 관계가 없지만, 희빈이 불안하면 세자 또한 불안하게 되니, 세자를 보전하는 도리를 위하여서는 먼저 상소하는 것이 옳다.’ 하고, 저에게 물으므로, 저는 말하기를, ‘사리(事理)는 그때 말한 바와 같으나, 일이 만약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어찌 상소하여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킬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권중경이 또 말하기를, ‘어떤 이는 전하기를 「희빈은 예조(禮曹)에서 마련한 의주(儀註)에 의하여 복상(服喪)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복상하지 않는다.」고 하므로, 자세히 알 수 없는데, 그대는 들은 바가 있는가?’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어떤 이는 「복상하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이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고 하므로, 나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권중경이 또 말하기를, ‘물을 만한 곳이 있거든 그대는 모름지기 물어서 알아야 한다.’고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나도 물을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백모(白帽)를 사는 일로 인하여 조시화(趙時華)를 부르고 인하여 희빈의 복상 여부를 물었더니, 조시화가 답하기를, ‘알지 못한다. 마땅히 알 만한 곳에 물어야 할 것이다.’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상소의 의논이 있으나, 희빈의 복상 여부를 자세히 알 수 없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탐문하여 알려 달라.’고 하였으나, 그 후에 조시화가 와서 알린 일이 없으며, 그가 어느 곳에 가서 물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장희재는 제가 일찍이 서로 알지 못하였는데, 무진년457) 10월 사이에 민장도(閔章道) 장희재의 첩의 적사촌(嫡四寸) 안여익(安汝益)과 삼촌질(三寸姪) 안세정(安世楨) 등으로 인하여 장희재와 교분을 맺었다고 하였으나, 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섣달 사이에 이우겸(李宇謙)을 만나 보았더니, 이우겸이 저의 사촌 대부(四寸大父) 민암(閔黯)과 연인(連姻)한 집안이므로, 민장도 장희재와 결탁한 정상을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이우겸이 저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민장도 장희재와 결탁하여 장차 환국(換局)을 도모(圖謀)하려고 한다는데, 그대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하므로, 제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더니, 이우겸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그다지도 귀가 어두운가?’ 하였습니다. 그 후에 민장도를 가서 보았을 때 장희재의 객(客)을 만났기 때문에 번거로와 그 일을 묻지 못하였으며, 또 그 후에 민장도가 저를 찾아 왔으므로, 제가 이우겸이 말하던 바로써 묻기를, ‘이우겸도 이미 이 일을 알고 있는데, 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하였더니, 민장도가 말하기를, ‘나는 교하(交河)에 있었고, 그대 또한 시골에 내려가 있었으니, 그대가 들어서 알지 못하게 된 것은 사세(事勢)가 진실로 그러하였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인하여 바야흐로 환국(換局)의 일을 도모한다고 말하면서, ‘임금의 뜻은 서인(西人)을 온당치 않게 여기고, 희빈 또한 그 어미가 탄 교자(轎子)를 때려 부순 데 대해 깊이 서인을 원망하고 있기 때문에, 안세정(安世楨) 숙질(叔姪)로 인하여 장희재와 결탁하여 일을 도모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이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만약 이루지 못하면 화(禍)가 장차 이를 것이다.’ 하였더니, 민장도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거의 이루어졌으니 근심할 것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판서 이우정(李宇鼎)이 홀로 이 일을 아는가?’ 하였더니, 민장도가 말하기를, ‘내가 또 몇 차례 안산(安山)에 가서 의논하였다.’ 하였으니, 유명천(柳命天) 형제가 안산에 있었기 때문인데, 저는 이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또 기사년458) 정월에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이우겸이 날이 저물 무렵에 저를 찾아와 그대로 머물러 있고 가지 않았는데, 민장도 장희재가 밤을 틈타 잇따라 이르러서 서로 더불어 술을 마셨습니다. 제가 장희재에게 묻기를, ‘내가 이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바야흐로 환국을 도모한다고 하는데, 그 말이 옳은가?’ 하자, 장희재가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잡된 말을 하는가?’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이미 아는 일인데 그대는 왜 구태여 서로 꺼리는가?’ 하니, 장희재가 대답하기를, ‘이렇건 저렇건 간에 남인은 마땅히 춘궁(春宮)을 잘 보호해야 할 것이다.’ 하였으니, 그 말의 뜻을 알만 하였습니다. 또 이우겸 장희재에게 말하기를, ‘여명(汝明)이 말한 일을 내가 들은 지 오래인데 오늘 이 곳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진실로 지극히 다행스럽다.’고 하였으니, 여명은 곧 민장도의 자(字)입니다. 대체로 민장도로 하여금 사심(邪心)을 갖게 한 것은 안여익·안세정 등이 소개하여 장희재와 결탁하게 한 때문입니다. 또 그 해 정월 그믐께 민장도가 저에게 말하기를, ‘며칠 뒤에 환국하여 옛사람을 진용(進用)할 듯한데, 만약 먼 곳에 있으면 일에 불편함이 많을 것이니, 마땅히 곧 와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나는 바야흐로 안산(安山)으로 갈 것이니, 그대 또한 노량(露梁)의 판서 이우정(李宇鼎)을 가서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하므로, 저는 그 말대로 즉시 이우정의 집으로 가서 일의 정상(情狀)을 갖추 말하기를, ‘만약 급히 명초(命招)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서울 집으로 들어와야만 군급(窘急)한 폐단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 그 아우 이우겸(李宇謙) 및 그 아들 이도문(李道聞)과 더불어 함께 이야기하면서 자고 돌아왔습니다. 묻어 놓은 흉물을 파서 얻어낸 것을 탐문한 일에 대하여 제가 박시원(朴時元)에게 묻기를, ‘대궐 안에서 묻어 놓았던 흉물을 파낸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가?’ 하니, 박시원이 말하기를, ‘과연 파서 꺼낸 사실이 있었다고 하나, 어느 궁전(宮殿)에 흉물을 묻었는지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이 밖에 다른 수작(酬酢)은 없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궁금(宮禁) 사이의 일을 탐지(探知)하였다는 것은 절대로 애매(曖昧)합니다."

하였다. 죄인 작은아기는 네 차례 형문(刑問)하고 신장(訊杖) 30도(度)를 쳤으나, 전초(前招)에서 가감이 없었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정빈(鄭彬)과 작은아기[者斤阿只] 등이 줄곧 형장(刑杖)을 견디면서 불복(不服)하고 있으니, 청컨대, 모두 더 형신(刑訊)하게 하소서. 죄인 민언량은 문목(問目) 3건 중에서 기사환국(己巳換局) 및 복제(服制)를 탐문(探問)한 일은 이미 승복(承服)하였으니, 청컨대, 이제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끌어댄 여러 죄인을 빙문(憑問)한 뒤에 처단하게 하소서. 민언량의 초사(招辭) 중에 이우겸(李宇謙) 권중경(權重經) 두 사람이 가장 긴절(緊切)하게 나왔으니, 청컨대, 모두 붙잡아 와서 엄중하게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죄인 안여익(安汝益)은 1차 형신(刑訊)한 뒤에 그가 늙고 병든 까닭에 곧장 죽을 근심이 있음을 염려하여 잠시 형벌을 정지하기를 계청하였었으나, 이제 민언량의 공초에서 또 긴절하게 나왔으니, 청컨대, 전대로 형벌을 더하여 구문(究問)하게 하소서. 죄인 조시경(趙時炅)의 초사(招辭)에서는 민언량이 그를 불러 복제(服制)를 탐문하였다고 하였으나, 민언량의 초사에는 그가 물은 것은 바로 조시경의 형 조시화(趙時華)라고 하였으니, 저 사람과 이 사람의 공초가 서로 다릅니다. 청컨대 한 가지 조항을 조시경에게 다시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가, 전교(傳敎)하기를,

"추국(推鞫)을 우선 정파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9일 임진 7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권중경·이우겸·조시경 등의 공초 내용

국청(鞫廳)의 죄인 권중경(權重經)이 공초(供招)하기를,

"천만 뜻밖에 전혀 근거없는 말로 억울하게 큰 죄에 빠졌으니, 땅을 치고 하늘을 부르며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올 여름에 저의 숙부(叔父) 권규(權珪)가 자부(子婦)의 상(喪)을 당하였기 때문에, 민언량(閔彦良)이 그 상을 위문하기 위하여 9월 2, 3일께 찾아와서 위문한 외에는 모두 한담(閑談)이었습니다. 그때에 이봉징(李鳳徵)의 소(疏)가 이미 나와 삭출(削出)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던 중에 민언량이 묻기를, ‘이 대감의 상소가 어떠한가?’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예(禮)에 없는 말을 창출해 무한한 의혹과 비방을 야기하여 마침내 큰 죄에 빠뜨렸으니, 지극히 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길 만하다.’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상인(喪人)의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또 말하기를, ‘근래 항간(巷間)에 전하는 말에, 「희빈(禧嬪)은 본디 복(服)을 입은 일이 없다.」고 하는데 상인도 이를 들었는가’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죄인(罪人)도 이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헛소문인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 자리를 파하였는데, 그로 하여금 탐문(探問)케 하였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대단히 맹랑합니다. 제가 그 일을 탐문하여 장차 무엇을 할 것이며, 민언량 또한 궁금(宮禁)에 간련(干連)된 사람이 아닌데, 어찌 탐문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이봉징의 소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면 연줄로 탐문한다는 것이 혹시 주무(綢繆)한다는 자취에 관계되겠지만, 이봉징의 소가 이미 나와서 비방과 원망이 세상에 넘쳐 죄명(罪名)이 낭자하였고, 이때에 희빈의 복을 입고 입지 않음은 더욱 물을 만한 일이 없었으니, 그 말이 허망(虛妄)하여 근거없음은 공박(攻駁)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뜨려집니다. 지위를 올리는 상소를 주장하였다는 한 조항은 더욱 근거없는 말로서, 그 날의 수작(酬酢)에서 피차간에 본래 제기한 일이 없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민언량이 중형(重刑)을 받아 거의 죽게 된 가운데 잠시 동안이나마 목숨의 연장을 바라고서 이런 허황한 말을 한 것인지, 지극히 괴이하고 의아(疑訝)합니다.

목임일(睦林一) 등이 의막(依幕)에서 상소했다는 말은 제가 본래 들은 적이 없으니, 또 어찌 그를 향하여 발설(發說)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목임일 등이 과연 이를 의논한 적이 있었으나, 제가 마침 들을 수가 없었는지, 본래 이러한 일이 없으나 민언량이 갑자기 지어냈는지, 목임일 등 세 사람을 추문(推問)하면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지위를 올리는 데 대한 여부(與否)는 오직 성상의 처분에 달렸을 뿐이고, 진실로 신하가 감히 청할 바가 아닙니다. 또 말세의 풍속이 두려워 쉽사리 의심과 비방을 부르게 되므로, 혐의스러운 형적(形迹)은 사군자(士君子)가 마땅히 깊이 피해야 하니, 단 분의(分義)로 보아 감히 청하지 못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저의 어리석고 미혹(迷惑)된 소견이 본래 이와 같았기 때문에, 지위를 올리는 일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비록 한 집안의 지친(至親) 사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제기하지 않았는데, 어찌 그를 대하여 수락했을 리 있겠습니까? 하물며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있으므로, 대소의 신민(臣民)으로서 슬퍼하여 허둥지둥 분주(奔走)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비록 천하의 지극히 무상(無狀)한 사람일 망정 어찌 차마 이러한 때에 급급히 지위를 올리는 일을 논하였겠습니까? 또 더욱이 몸이 바야흐로 최질(衰絰) 가운데 매어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곡(哭)하며 전(奠)드리는 외에는 집안의 모든 일도 때로 관섭(管攝)하지 못하는데, 곤위(壼位)의 올리고 올리지 않음이 괴점(塊苫)472)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 있기에 예법을 뛰어넘고 슬픔을 잊은 채 망령되게 조가(朝家)의 대사(大事)를 논하였겠습니까? 공의(公議)나 사정(私情)으로 헤아려 보아 결코 이치에 근사하지 않은 것은 비록 삼척 동자(三尺童子)라 할지라도 역시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위를 올리는 한 조항은 이미 그와 더불어 수작한 일이 없었으면, 희빈(禧嬪)이 불안하였다느니, 세자(世子)가 불안하였다느니 하는 한 어구(語句)는 말을 늘어놓아 변명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스스로 무함(誣陷)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오도일(吳道一)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가소로운 일에 속합니다. 제가 오도일과 한 번 대면한 교분도 없거니와, 두 집의 문정(門庭)에 또한 서로 왕래한 사람이 없는데, 오도일이 그런 말을 한 것을 제가 어떤 연유로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도일은 본래 조가의 중신(重臣)으로서 전혀 동서(東西)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니, 또한 어찌 이 같은 형적 없는 말을 하겠습니까? 민언량의 이 말은 참으로 아이들의 말이므로 진실로 여러 말로 변명할 것도 못됩니다. 제가 비록 극히 불초(不肖)하나, 평생에 ‘근신(謹愼)’ 두 글자는 곧 저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세훈(世訓)이니, 이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일 뿐만 아니라, 해와 달 같이 밝으신 성상께서도 반드시 굽어 통촉하실 것입니다. 제가 비록 조정에 벼슬하고 있을 때에도 남과 더불어 논의(論議)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한 번 물러나 집에 들어앉은 뒤로는 더욱 두려움이 더하여 절대 입으로 시사(時事)을 말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참최(斬衰)의 복을 입어 애통(哀痛)하고 있는 중이겠습니까? 민언량의 허다(許多)한 말은 모두 허구(虛構)로 무함(誣陷)하는 말입니다. 천일(天日) 밑에서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속이고 꾸미겠습니까? 전지(傳旨) 안의 사연(辭緣)은 매우 애매합니다."

하고, 죄인 이우겸(李宇謙)이 공초하기를,

"제가 천만 뜻밖에 민언량의 근거없는 모함을 받아 이런 불측(不測)한 처지에 빠졌는데, 사부(士夫)의 수욕(羞辱)과 신명(身名)의 더럽힘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저의 맏형 고(故) 판서(判書) 이우정(李宇鼎)은 성명(聖明)께서 저궁(儲宮)에 계실 적부터 춘방(春坊)의 벼슬을 띠고 모셨고, 인하여 육경(六卿)의 지위에 이르렀으며, 저는 처음 벼슬길에 나선 뒤로 지나치게 성은(聖恩)을 입어 시종(侍從)으로 출입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저희 형제의 사람됨의 선악과 마음가짐의 좋고 나쁨을 성명께서 이미 통촉(洞燭)하시고 남음이 없을 것이니, 다만 해와 달 같은 성총으로 하늘과 땅 끝까지 사무치는 원통함을 밝게 비추시기 바랍니다. 민언량의 초사(招辭) 안에 이른바 ‘섣달 그믐께 저를 만나 보았다’는 말은 길 위에서 만나본 것인지, 친우의 집에서 만나본 것인지 그 어느 곳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민언량이 이른바 ‘제가 그의 사촌 대부(四寸大父)인 민암(閔黯)과 연인(連姻) 관계의 집인 까닭에, 먼저 민장도(閔章道) 장희재와 결탁한 정상을 알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민장도 장희재와 결탁하여 장차 환국(換局)을 도모하려 한다는데, 그대는 이를 아는가?」 하고, 그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자, 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귀가 그리 어두운가?」’라 하였다 했는데, 맏형이 민점(閔點)과 과연 연인의 정의는 있으나, 민장도는 본래 잡배(雜輩)인 까닭에 친구 사이에 서로 상종(相從)하지 않음을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이니, 아직 결혼하기 전에는 저희 형제가 일찍이 그가 어떤 모습인지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정묘년473) 12월에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맏형의 장자(長子)가 민점의 사위가 되었으나, 혼인을 치른 뒤에 민암의 집에서 곧 교하(交河)로 돌아갔으므로, 그 사이에 서로 만난 것이 많아도 5, 6차에 지나지 않았으니, 비록 연인(連姻)이라고는 하나 교분(交分)은 깊지 않았습니다. 민언량의 아비 민종도(閔宗道)는 곧 민장도의 사촌 형이니, 정의(情義)의 깊고 밀접함이 새로 혼인을 맺은 집과 과연 어떠하였기에, 사촌 형에게 말하지 않고 연인한 집에 말하였겠습니까? 이것은 비록 삼척 동자가 듣더라도 또한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민언량의 말 속에 또 이르기를, ‘기사년 정월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제가 날이 저물 무렵에 찾아와 이내 머문 채 가지 않았고, 민장도 장희재가 밤을 틈타 뒤이어 이르러 서로 술을 마셨다.’고 하였지만, 그때 저는 본래 가서 민언량을 본 일이 없었는데, 어찌 그대로 머물러 가지 않고 더불어 수작(酬酢)하였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 변명(辨明)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임신년474) 에 달과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조가(朝家)의 여러 대장(大將)이 각각 장재(將才) 세 사람씩을 천거하였는데, 저의 형은 당시에 수어사(守禦使)로 있으면서 합당한 사람이 없어서 애당초 천거하지 않았고, 여러 대장은 모두 장희재를 천거하였습니다. 그러자 비국(備局)에서 저의 형이 끝내 사람을 천거하지 않았다 하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다시 이를 천거하게 하였는데, 그때에 민암 민종도가 저의 형에게 글을 보내어 장희재를 천거하도록 권하였습니다. 형이 그 글을 저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가 만약 이 사람을 천거한다면, 몸과 이름이 모두 욕될 것이니, 어찌 하늘과 땅 사이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저의 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 말이 내 뜻과 부합한다.’ 하고, 저로 하여금 지필(紙筆)을 잡아 김세익(金世翊) 윤천뢰(尹天賚) 두 사람을 써서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 대신(臺臣) 이원령(李元齡)이 늙고 병든 사람을 책임을 면하기 위해 천거하였다는 것으로써 상소하여 매우 힘껏 배척하였으니, 이는 다만 온 조정에서 알 뿐만 아니라, 삼가 생각하건대, 성명(聖明)께서도 역시 장희재를 천거하지 않은 사실을 굽어 통촉하실 것입니다. 저희 형제의 심사(心事)가 본래 이와 같은데, 민언량이 이제 장희재와 서로 술을 마시고 수작하였다고 말하니, 그 원통함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간(肝)을 가르고 심장을 쪼개어 본정(本情)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나,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민언량의 조사 가운데 또 이르기를, ‘통보(通報)하기 위해 저의 형을 노량(露梁)으로 가서 만나 보고, 인하여 저와 함께 잤다.’고 하였는데, 기사년 2월 초2일에 조정에서 갑자기 바꾸어 형을 도승지(都承旨)에 임명하였으나, 저의 형은 오랫동안 폐출(廢黜)되었던 끝에 갑자기 은명(恩命)을 받았으므로, 급히 들어가 사은(謝恩)할 수 없다 하여 현도 봉소(縣道封疏)하고 3, 4일을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에 민언량이 과연 나와서 그 아비의 말을 전하기를, ‘조정이 초창(草創)되고, 또 앞으로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갈려고 하는데, 물의(物議)가 장차 대감을 의망(擬望)하려 하니, 오래 있지 말고 곧 들어오라.’ 하고, 인하여 유숙(留宿)하였는데, 정월 그믐께 나갔다는 말은 지극히 맹랑합니다. 민언량이 전혀 근거 없는 말로 저희 형제를 얽어 무함하면서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음은 그 까닭이 있습니다. 기사년 폐비(廢妃) 때에 맏형이 말하기를, ‘전고(前古)에 없던 변고를 당하여 신하된 자가 죽음으로써 다투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신하의 분의(分義)이겠는가?’ 하고, 탑전(榻前)에 입시(入侍)하여 극력 다투니, 성상께서 특별히 파직을 특명하시고, ‘그 마음의 소재를 측량할 수 없는 바가 있다.’는 하교를 내리시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제가 기사년의 증광 전시(增廣殿試)475) 를 보기 위하여 외정(外庭)에 들어갔는데 그때 비망기(備忘記)가 이미 내려졌으므로, 제가 친분이 있는 5, 6인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신하된 자로서 안연(晏然)히 입장(入場)할 수 없다.’ 하고, 인하여 사관(四館)에 말을 전해 보내기를, ‘이는 신하로서 과거를 볼 때가 아니므로 입장할 수 없으니, 이런 뜻을 시소(試所)에 통지하여 계달(啓達)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여 달라.’ 하였더니, 사관에서 과연 시관(試官)에게 통고하였습니다. 그때에 민종도가 시관이 되어 말하기를, ‘거자(擧子)가 모두 이미 입장하였는데, 몇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까닭으로 계달할 수 없으니, 속히 들어 오는 것이 타당하였다.’고 하므로, 저도 마지 못하여 입장하였으니, 제가 처음의 생각을 굳게 지키지 못한 것은 과연 죄가 있습니다. 출방(出榜)한 이튿날 민종도가 맏형을 찾아왔을 때에 저도 그 곳에 있었는데, 민종도가 저희 형제에게 말하기를, ‘대감 형제가 이번 처분에 반드시 절의(節義)를 세우고자 함은 무엇 때문인가?’ 하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은혜로 먹고 입고 한 자가 만약 모후(母后)를 폐하는 때에 절의를 세우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 하자, 민종도가 발끈하여 낯빛이 변한채 돌아갔으니, 민언량과 일을 함께 하는 자의 심사가 과연 이와 같겠습니까? 기사년에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을 안율(按律)하라는 의논을 민종도의 무리가 실로 주장하였는데, 저의 형이, ‘이때 만약 이 대신(大臣)을 죽인다면, 폐비(廢妃)의 마음이 과연 어떻겠는가? 쥐를 잡으려다가 그릇을 깨뜨리는 혐의(嫌疑)는 피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탑전에서 순문(詢問)하실 때에 맏형이 누누이 그 불가함을 진계하였으며, 중형(仲兄) 이우진(李宇晉)도 끝내 계청(啓請)에 참여하지 않으니, 민종도가 크게 원한을 품고 저희 형제를 공공연하게 조당(朝堂)에서 꾸짖고 욕하였습니다. 민언량이 오늘에 와서도 오히려 전의 원한을 품어 근거없이 구무(構誣)하기에 여력을 남기지 않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이 요악(妖惡)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전지 안의 사연은 애매합니다."

하였다. 죄인 안여익(安汝益)을 두 차례 형문하고, 죄인 작은아기를 다섯 차례 형문하여 각각 신장(訊杖) 30도(度)를 쳤으나, 전초(前招)에서 가감이 없었다. 죄인 조시경(趙時炅)이 다시 공초(供招)하기를,

"민언량이 만약 저에게 언급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알아서 희빈(禧嬪)의 복상(服喪)에 대한 일을 윤보명(尹甫命)에게 가서 물었겠습니까? 민언량이 종을 보내어 저를 부른 것이 과연 어찌 적실(的實)하겠습니까?"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작은아기는 여러 번 엄중히 신문하였으나, 줄곧 굳게 참으면서 불복(不服)하고, 죄인 안여익 민언량이 이미 말하기를, ‘민장도의 사특한 마음은 오로지 안여익 숙질(叔姪)이 〈장희재를〉 소개한 데에 말미암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안여익은 도리어 일컫기를, ‘장희재와 서로 안 것은 기사년 4월에 처음 있었다.’ 하고, 형장을 참으며 불복(不服)하니, 정상이 지극히 통분합니다. 청컨대 더 형신(刑訊)하게 하소서. 죄인 권중경 이우겸의 공초한 바가 민언량의 초사와 일마다 상빈(相反)되고, 조시경 민언량이 불러 물은 것은 본래 그 형이 아니고 그가 실지로 가서 만났다고 하니, 또한 민언량의 말과 서로 틀립니다. 청컨대 이 세 죄인의 말로써 민언량에게 단락(段落)마다 다시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추국(推鞫)을 우선 정파(停罷)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10일 계사 3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민언량의 공초 내용

국청의 죄인 민언량이 다시 공초하기를,

"국휼(國恤) 뒤 16일과 17일 사이에 제가 가서 권중경(權重經)을 보았는데, 권중경의 매부(妹夫) 이징(李徵)이 와서 주인을 보았습니다. 권중경이 먼저 묻기를, ‘이좌윤(李左尹)이 상소한 뒤에 예조 당상(禮曹堂上)이 맞서 올린 소를 보았는가?’ 하니, 이징이 말하기를, ‘잠시 소본(疏本)을 보고 넘겼다.’고 하였습니다. 권중경이 말하기를, ‘말뜻이 어떻던가?’ 하니, 이징이 말하기를, ‘그 소는 포복 절도(抱腹絶倒)할 만하였다.’ 하였으니, 그들이 서로 만난 때가 9월 초2일·3일 사이가 아님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 권규(權珪)가 자부(子婦)의 상(喪)을 당한 것이 여름 사이에 있었으므로, 9월 이전에 제가 여러 번 가서 위문하였으니, 9월 초2일·3일 사이에 비로소 가서 위문하였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이징이 일어나 간 뒤에 권중경이 저에게 묻기를, ‘이제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승하하신 뒤이니, 희빈을 올려 중궁(中宮)으로 삼는 것이 사리(事理)에 당연하나, 혹시 뜻밖의 일이 있게 되면 세자(世子)를 보전하기 어려울 듯하므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니, 복위(復位)를 청하는 상소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데, 제배(儕輩)들 중에 더러는 이 의논을 늦추자는 이도 있고 서두르는 자도 있다. 그러나 상소가 혹 이루어 진다면 난만(爛熳)한 데로 함께 돌아갈 것이니, 염려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말하는 사이에 권중경이 또 말하기를, ‘목임일(睦林一) 등 세 사람이 의막(依幕)에 모였을 때에 이 의논이 있었다.’ 하였으나, 와서 전한 사람은 발설(發說)하지 않았으며, 저도 묻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서 권중경을 본 날은 8월 29일과 그믐 사이를 지나지 않았고, 이봉징이 죄를 받은 것은 9월 초5, 6일 사이에 있었으니, 죄를 받았는지의 여부는 제가 물을 만한 것이 아니었고, 그 또한 어찌 미리 헤아려 알고 발설하였겠습니까? 그 말이 허망(虛罔)한 것임은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오도일(吳道一)이 말한 일은 서인(西人)이 남인(南人)에게 반드시 정분(情分)이 있은 뒤에야 피차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말을 서로 듣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권중경의 이른바, ‘일면(一面)의 교분도 없어서 서로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 거의 말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우겸(李宇謙)이 공초 가운데 말한 일은 이우겸 노량(露梁)에서 본가(本家)로 들어왔을 때, 제가 과연 무진년476) 섣달 그믐 사이에 명례동(明禮洞) 그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이우겸이 말하기를, ‘여명(汝明)477) 의 일을 그대가 아는가?’ 하였습니다. 제가 그때의 일을 비록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지만, 일부러 들어 알지 못하는 것으로 대답하고, 그가 대답하는 것을 살펴보았더니, 이우겸이 말하기를, ‘우리 두 집안에서 비록 안다 하더라도 어찌 해롭겠는가? 유가(柳家)의 형제가 성실(誠實)하지 않으면 혹시 일후에 악명(惡名)이 온전히 한 사람의 집으로 돌아갈까 두렵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이것으로 여명을 경계하고 신칙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그 관여(關與)하여 알고 있음이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이우겸이 입신(立身)한 전후에 민장도에게 노비(奴婢)처럼 굽실댄 정상(情狀)은 온 세상에서 다 아는 바인데, 다른 사람은 비록 민장도를 잡류(雜類)라고 이르더라도, 이우겸이 어찌 감히 잡류라는 말을 입에서 내겠습니까? 이우겸이 찾아온 것을 저는 비록 우연인 듯 여겼으나, 그가 만약 민장도·장희재와 처음에 모임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세 사람이 어찌 일시에 와서 모이는 것입니까? 이제 민장도 장희재는 이미 죽었고, 저의 한 오라기 목숨도 끊어지려 하는데, 만약 엄중하게 묻는 일이 없다면, 그 정세(情勢)를 알아내기 어려울 듯합니다. 기사년478) 정월 20일에서 그믐 사이에 민장도가 와서 저에게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응당 환국(換局)하게 될 듯하였다. 양국(兩局)479) 의 대장(大將) 중에 노량 이 참판(李參判)이 마땅히 해야할 것인데 혹시 먼 곳에 있다가 패초(牌招)를 받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급히 들어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그대는 모름지기 노량으로 나가서 이 뜻을 말하라.’ 하므로, 제가 과연 나갔습니다. 이우정(李宇鼎) 형제가 묻기를, ‘무슨 일로 왔는가?’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민장도의 종숙(從叔)이 몹시 급하게 나를 보냈다.’ 하고, 대개 첫머리에, ‘반드시 대감을 대장으로 삼는 일이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왔을 뿐이다.’ 하였더니, 이우정은 말하기를, ‘인기(人器)가 적합하지 않아서 실로 받들어 감당하기 어렵다. 내가 비록 이 곳에 있으나 성(城) 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 어찌 구태여 서울 집으로 들어가겠는가?’ 하였고, 이우겸은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무슨 장재(將才)가 있어서 이 중임(重任)을 얻겠는가?’ 하였으며, 이어 이우겸  이도문(李道聞)과 함께 잤습니다. 2월 초에 조정이 갑자기 바뀌었으나, 이우겸이 대장에 임명된 일은 없었습니다. 이우겸의 공초 안에 환국한 뒤에 비로서 가서 보았다는 것은 더욱 말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당초에 그가 장차 중임에 임명될 것이기 때문에 과연 나갔었지만, 이미 환국한 뒤에는 이우정이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된 인물도 아닌데, 제가 어찌 이와 같이 일이 많을 때에 그를 배행(陪行)하기 위하여 10리 강 밖으로 나갔겠습니까? 그가 말한 바가 매우 간악합니다. 조시경(趙時炅)을 불러 물은 일은, 제가 정녕 조시화(趙時華)에게 언급하였다면 조시화를 추문하지 않고, 반드시 제가 조시경을 불러 물었다고 하니, 실로 원통합니다."

하였다. 죄인 안여익을 세 차례 형문하고, 죄인 작은아기를 여섯 차례 형문하여, 각각 신장(訊杖) 30도(度)를 쳤으나, 모두 전초(前招)에서 가감이 없었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작은아기와 안여익은 형신(刑訊)을 더하여 엄중하게 추문(推問)한 것이 이미 여러 차례에 이르렀으나, 한결같이 형장을 견디며 불복(不服)하고 있으니, 그 정상이 더욱 지극히 통분합니다. 청컨대, 모두 더 형신(刑訊)하게 하소서. 죄인 민언량 권중경·이우겸의 공초 및 조시경이 다시 공초한 사연(辭緣)과 서로 틀리는 사유를 가지고 다시 반복하여 추문하였으나, 한결같이 전초(前招)의 공술(供述)한 바와 같고, 권중경 등이 말한 것과는 또 다시 일마다 상반(相反)되는데, 번번이 추문하여도 하나로 귀결되기가 쉽지 않으니, 청컨대, 권중경·이우겸·조시경 등을 모두 민언량과 한 곳에서 면질(面質)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추국(推鞫)을 우선 정파(停罷)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11일 갑오 4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민언량·권중경, 민언량·이우겸, 민언량·조시경의 면질 내용

국청(鞫廳) 죄인 민언량 권중경과 한 곳에서 면질(面質)시키니, 민언량 권중경을 향하여 말하기를,

"이 좌윤(李左尹)이 상소한 2, 3일 뒤에 내가 네 집에 갔을 때, 네가 예조(禮曹)의 관원이 맞서 올린 상소를 이징(李徵)에게 물으니, 이징이 말하기를, ‘포복 절도할 만하였다.’ 하지 않았는가?"

하니, 권중경 민언량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 날 이징이 과연 왔었는데, 내가 어찌 말하기를, ‘이 대감이 무익(無益)한 소를 올려 죄를 받기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민언량이 말하기를,

"이봉징을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것이 9월 초5일·6일 사이에 있었으니, 너와 서로 본 날이 이봉징이 죄를 받기 전이 아니겠는가? 이봉징이 일어나 간 뒤에 네가 말하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승하(昇遐)하셨으니, 곤위(壼位)는 반드시 비워두지 않을 것인데, 사리(事理)로 말한다면 희빈이 세자(世子)를 탄생하고 국모(國母)로 6년 동안 임(臨)하였으니, 지위를 올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중간에 만약 지절(支節)이 있게 되면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말하기를, ‘나의 뜻도 또한 그대의 뜻과 같다.’고 하니, 네가 말하기를, ‘무릇 일이란 혹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또한 반드시 순조롭게 이루어찌리라는 것을 기필(期必)하기 어려우니, 만약 순조롭게 이루어찌지 않는다면 나라일이 끝이 없을 것이다. 이제 복위(復位)를 청하는 소를 의논하는 자들이 더러는 늦추자고 하고, 더러는 급히 서두르자고 하나, 필경 소가 이루어찌면 처음에는 비록 늦추고 의논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마침내 난만(爛熳)하게 같은 길로 돌아갈 것이다. 복제(服制)의 일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그대는 이를 하는가?’고 하였다. 그래서 그 뒤에 조시화(趙時華)를 불러 복제의 일을 물을 때에 소(疏)에 대한 일도 언급하였던 것이니, 이는 그 유래(由來)가 있는 것이다. 네가 또 ‘오도일(吳道一)이 혹시 남인(南人)이나 소론(少論)을 만나면 말하기를, 「오시복(吳始復)·심단(沈檀)·목임일(睦林一) 등이 곡반(哭班)의 의막(依幕)에 모였을 때에 복위(復位)를 청하는 의논이 있었다.」고 하였다.’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네가 말하기를, ‘일이 만약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세자(世子)도 평안(平安)하게 되어 진실로 염려할 것이 없겠지만, 만약 순조롭게 이루어찌지 않는다면, 희빈도 불안하고 세자도 불안할 것이니, 신자(臣子)의 도리에 있어서 복위를 청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제 머뭇거리는 까닭은 혹 순조롭게 이루어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니, 권중경이 말하기를,

"9월 초2일·3일 사이에 너와 서로 보았을 때에, 이봉징의 소(疏)에 대한 일을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민언량이 말하기를,

"그 날이 바로 이징이 온 날이었다."

하니, 권중경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기를, ‘이봉징이 예(禮)에 없는 상소를 한 것은 매우 경솔하였으니, 이 때가 어찌 우리들이 상소할 때인가? 명위(名位)가 낮고 미약한 자도 아닌데, 진실로 가석(可惜)하였다.’ 하니, 너도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민언량이 말하기를,

"나는 너의 이 말을 듣지 못하였다."

하니, 권중경이 말하기를,

"제배(儕輩) 중에서 모두 이 소를 절실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였고, 너도 그렇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자, 민언량이 말하기를,

"그 소를 절실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다만 양천(陽川) 김 정승(金政丞)529)  안산(安山) 유 판서(柳判書)530) 뿐이었고, 이 외에 절실하지 않다고 말한 다른 사람이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다. 네가 만약 절실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당초에 이봉징이 소초(疏草)를 네게 보냈을 때에 너는 왜 절실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이 말은 내가 성임(成任)에게 들었다."

하니, 권중경이 말하기를,

"이봉징의 소는 다른 방에 거처하는 그의 아들도 들어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너의 이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 네가 말하기를, ‘목임일 등 세 사람이 의막에 모여서 복위를 청하는 의논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네 말이 크게 근사(近似)하지 못함을 내가 마땅히 분변(分辨)하여 밝히겠다. 설령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승하하신 뒤이니, 마땅히 이 소를 올려야 한다 하나, 결코 곡반(哭班) 때에 의논할 만한 것이 아닌데, 하물며 분요(紛擾)하고 이목(耳目)이 번다(煩多)한 곳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내겠는가? 또 한 마디 말로 타파(打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목임일이 누구의 아들인가? 갑술년531) 이후로 죄명(罪名)이 지극히 무거워서 본정(本情)을 드러내지 못하여, 부자(父子)가 밤낮으로 억울해 하고 두려워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대행 왕비께서 승하하신 벽두에 설령 복위의 소를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목임일에게 있어서는 설상 가상(雪上加霜)의 혐의가 있었으니, 목임일이 비록 극히 어둡고 미련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목일임이 그런 일을 하고자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반드시 그와 이 소를 함께 올리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근사한 말인가?"

하자, 민언량이 말하기를,

"내 말은 목일임이 혼자 이 말을 꺼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 목임일 등이 모였을 때에 이런 의논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였다. 권중경이 말하기를,

"이른바 복위를 청하는 상소는 본래 그런 의논이 없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네게 말하였겠느냐?"

하였는데, 민언량이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너한테 들었다."

하니, 권중경이 말하기를,

"오시복 등 세 사람이 이 소를 주장하였다면, 이것은 곧 우리 제배(儕輩) 가운데 하나의 큰 의논이니, 제배 사이에 만약 그런 의논이 있었다면 노소(老少)를 논할 것 없이 마땅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나의 제배가 또한 너의 제배이니, 내가 만약 이를 들었다면, 어찌 너 혼자 듣지 못했을 리 있겠는가?"

하자, 민언량이 말하기를,

"그때에는 상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사(時事)가 크게 달라졌으니, 네가 말을 바꾸는 것은 당연하였다."

하니, 권중경이 말하기를,

"내가 들은 것을 너만 혼자 듣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당하였다. 하물며 내가 비록 최마(衰麻)532) 를 입는 사람으로서 곡반(哭班)에 왕래했다 하나, 발걸음이 어찌 친구(親舊)의 의막(依幕)까지 미치겠는가? 네가 만약 처음 들었다면 그때에 어찌 그 들은 곳을 묻지 않았는가?"

하자,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는 언제나 의논을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무릇 논의(論議)가 있으면 참여하여 간섭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유독 이 일만은 어찌 알지 못했을 리 있겠는가?"

하니, 권중경이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수작(酬酢)하였다는 말은 모두 내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또 공박(攻駁)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말이 있다. 희빈이 불안하면 세자가 불안하였다는 것은, 곧 갑술년에 남구만(南九萬) 장희재(張希載)의 죽음을 용서하기를 청했을 때 조어(措語)이다. 장희재가 죽으면 희빈이 불안하고, 희빈이 불안하면 세자가 불안하였다는 그때의 조어는 진실로 그러하였으나, 이를 어찌 오늘날 지위를 올리는 일에 옮겨 쓸 수 있겠는가? 지위를 올리지 못하여 세자가 불안하였다고 말했으니, 설령 대행 왕비께서 끝내 무양(無恙)하셨다면, 희빈은 반드시 지위를 올리는 일이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세자가 또한 불안하겠는가? 이것이 참으로 이른바 슬갑 도적(膝甲盜賊)533) 인 것이다. 내가 어찌 이와 같은 형적(形跡)이 없는 말을 하겠느냐? 또 조시경(趙時炅)이 고한 일을 네가 어찌 승복(承服)하겠는가마는, 죄를 얽어 죽을 계책이 없으니, 화(禍)를 내게 옮기고자 하며 마치 내가 탐문하는 모양으로 조시경에게 물었던 적이 있으며, 상소(上疏)했다는 말로써 그 말을 실증(實證)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꾸며댄 까닭에 그 말이 저촉(抵觸)하는 곳에서 파탄(破綻)하기에 이르렀으니, 목임일이 진소(陳疏)한 일이나 세자가 불안하다는 등의 말이 어찌 파탄의 일단(一端)이 아니겠느냐? 만약 대행 왕비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평안하셨다면, 희빈의 안부(安否)는 논할 만한 것이 못되는데, 변고가 나기도 전에 어떻게 그 불안함을 미리 알았다는 것인가? 내가 더러 제배(儕輩)를 만나면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옛날과 같지 아니하여 비록 협잡(挾雜)할 마음이 없어도 의심과 비방을 부르기 쉬우니, 지금의 도리(道理)로는 오직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이 성상의 처분만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봉징이 상소한 것을 이튿날에야 비로소 듣고, 마음속으로 그윽기 놀랍고 괴이하여 이봉징에게 소초(疏草)를 보여 달라고 했더니, 이봉징이 그 아우에게 보냈다 하였으나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늦게야 비로소 이를 볼 수가 있었다. 오도일 오시복을 격동시켜 상소하게 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너의 말이 더욱 지극히 형적이 없는 것이니, 오시복이 세 살 먹은 아이가 아닌데, 어찌 오도일이 격동시킨다고 이를 하겠는가?"

하자, 민언량이 말하기를,

"네가 당초에 전한 바는 직접 본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네가 이제 와서 말을 바꾸니, 내가 어떻게 분변하여 밝히겠는가? 네가 말하기를, ‘소론(少論)이 때를 놓치고 바야흐로 변화를 살펴보고 있으니, 오도일의 이 말이 어찌 오시복의 무리를 격동시켜 이루려는 데서 나온 계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니, 권중경이 말하기를,

"너의 이 말이 처음의 공초에서는 나오지 않았고, 이번에 면질(面質)할 때에도 처음에는 말하지 않다가 갑자기 나오니, 어찌 매우 의심스럽지 아니하며, 전후에 대단히 큰 차이가 있으니, 이것이 어긋나는 단서가 아니겠는가?"

하자, 민언량이 말하기를,

"내가 거의 죽게 되었는데, 네가 하지 않은 말을 갑자기 지어내어 나한테 무슨 보탬이 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민언량 이우겸과 한 곳에서 면질(面質)시켰는데, 민언량 이우겸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8월에 아산(牙山)으로 내려갔으므로, 전연 환국(換局)한 일을 알지 못하였는데, 10월에 서울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이를 들을 수 있었다. 너를 명례동(明禮洞) 너의 집으로 찾았더니, 네가 말하기를, ‘너는 여명(汝明)의 일을 아는가?’ 하므로, 내가 거짓 알지 못하는 체하고 대답하기를, ‘여명의 일을 알지 못한다.’ 하자, 네가 미소(微笑)하며 말하기를, ‘어찌 그리 귀가 어두운가?’ 하고, 네가 또 말하기를, ‘너희들이 하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우겸이 말하기를,

"네가 처음에 나를 만났다고 말하였는데 네가 길에서 만났느냐, 제우(儕友)의 집에서 만났느냐? 지금은 나를 명례동 집으로 찾아왔었다고 말하니, 어찌 앞뒤가 서로 틀리는가? 민장도와 혼인을 맺기 전에는 서로 알지 못한 정상(情狀)을 너도 알고 있다. 정묘년534) 12월 혼인을 맺은 뒤에야 비로소 서로 알게 되고, 너의 사촌 대부(四寸大父)가 가권(家眷)을 이끌고 교하(交河)로 내려갔으니, 그 사이에 서로 만난 숫자를 역력히 알 수 있다. 민장도는 너의 아버지와 종형제(從兄弟)의 사이가 되니, 어찌 한 집안간에 말하지 않고, 새로 혼인을 맺은 사람에게 먼저 말할 리가 있겠는가?"

하니, 민언량은 말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민장도 교하를 왕래할 때에 길이 노량(露梁)을 지나게 되어, 너를 찾아 언급하였기 때문에 대략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 이우겸이 말하기를,

"이른바 대략 안다는 것이 무슨 일인가?"

하니, 민언량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거짓 알지 못하는 체하였고, 너 또한 이를 알면서도 거짓 알지 못하는 체하였다."

하니, 이우겸이 말하기를,

"네가 처음에는 네가 거짓 알지 못하는 체하였다고 말하더니, 이제 나도 거짓 알지 못하는 체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인가?"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내가 강경하게 묻기를, ‘민장도가 이미 여러 번 말하였다고 하였는데, 너는 어찌 듣지 못하였다고 하는가?’ 하니, 네가 마침내 말하기를, ‘이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 이우겸이 말하기를,

"네가 처음에는 내가 너한테 들었다고 하였다가, 지금은 네가 나한테 들었다고 하니, 어찌 서로 틀리는가?"

하자, 이우겸이 말하기를,

"네가 그때에 말하기를, ‘나는 이를 들은 지 이미 오래이다. 너는 어찌 귀가 그리 어두운가?’ 하지 않았는가?"

하자, 이우겸이 말하기를,

"애초에 입을 연 일이 없었다."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내가 시골에 내려갔다가 방금 돌아왔으니, 내가 이를 듣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못된다고 했더니, 네가 말하기를, ‘여명(汝明)의 일을 계속 듣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안산(安山)의 유가(柳家)는 본래 성실하지 못하여 남과 일을 함께 하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미룬다고 한다. 민장도가 그와 일을 함께 한다고 들리는데, 나는 일후에 악명(惡名)이 한 곳으로 돌아갈까 두렵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였는데, 이우겸이 말하기를,

"네가 까닭 없이 터무니없는 사실을 들어 무함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네가 나한테 물어서 알았다고 하였다가, 뒤에는 네가 시골에서 올라온 뒤에 스스로 알았다고 하니, 처음 공초에 없던 말이 어찌 면질(面質)에서 나오는가?"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두 번째 공초에서 나왔다."

하였다. 이우겸이 말하기를,

"너는 나의 집에 왕래한 일이 없으나, 나는 한림(翰林)으로 천거(薦擧)되었던 일로 너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너는 내가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사는 집을 알지 못하므로, 반드시 초가(草家)인지 와가(瓦家)인지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니, 네가 와서 보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네가 매양 말하는 명례동(明禮洞) 집은 바로 내 동생의 집이다."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도 내가 처자를 거느리고 있는 집을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너를 보면 될 뿐이니, 네 처자가 있고 없는 것은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우겸이 말하기를,

"나와 네가 모두 유생(儒生)으로 있을 때에는 상종(相從)하지 않았고, 출신(出身)한 이후에도 3년 동안 서로 찾지 않았는데, 네가 어찌 나의 집을 안다고 말하는가?"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어떻게 반드시 처자(妻子)가 있는 집만 서로 방문하겠는가? 정월 초승에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네가 나를 찾아와서 우리 집 구석방에 앉았을 때에, 하인배(下人輩)가 손님이 왔다고 말을 전하므로, 내가 나가 보았더니, 민장도는 소변을 보고 있고, 어떤 사람이 그 뒤에 있는데, 바로 장희재였다. 네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곧 말하기를, ‘두렵다. 두렵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너는 이미 알고 있는데, 무슨 두려워할 것이 있는가?’ 하였으며, 민장도가 과연 네 손을 끌어당기며 앉지 않았는가? 장희재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명례동 이 진사(李進士)인가?’ 하니, 민장도가 소리를 낮추어 말하기를, ‘그렇다.’고 하였고, 장희재가 말하기를, ‘벌써 서로 보았어야 마땅한데,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네가 말하기를, ‘이제, 비로소 보게 되니, 참으로 다행하였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등불을 켠 뒤에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하였었다."

하였는데, 이우겸이 말하기를,

"이미 서로 상종한 일이 없는데, 구석방이니 웃방이니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너는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까닭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인가? 비록 기사년535) 이후로 장희재의 지위가 높아진 뒤에 내 집을 찾아온 일이 없고, 장가 일족(張家一族)은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면식이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네가 어찌 차마 내가 장희재를 향하여 한훤(寒暄)536) 하였다고 말하는가? 네가 처음 공초에서는 이르기를, ‘민장도로 인하여 장희재에게 환국(換局)의 일을 언급했다.’고 하더니, 이제는 다만 인사만 하였다고 하니, 매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또 한 마디 변명할 말이 있으니, 너도 생각해 보아라. 나는 처음에 장희재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조차 알지 못했었다. 내가 예비 한림(豫備翰林)이 되고 너는 상번(上番)이 되었는데, 내가 오래도록 입시(入侍)하지 못하였다가, 어느 날 주강(晝講)에 입시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장희재의 얼굴을 보았다. 파(罷)하고 나온 뒤에 상번방(上番房)에서 너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비로소 네 집안의 장희재를 보았는데, 아직도 장사치의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더라.’ 하니, 네가 미소지으며 응답하기를, ‘그런가?’ 하지 않았느냐? 모름지기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변명하여 밝힐 수 있는 것이 있다. 신미년537) 월일(月日)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너의 사촌 대부가 장희재를 총융사(摠戎使)로 삼고자 하여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여, 네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각각 세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그때에 너의 아버지는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고, 나의 형은 수어사(守禦使)가 되었었다. 너의 아버지는 장희재를 천거하였는데, 나의 형도 너의 아버지의 뜻이 반드시 장희재를 천거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만약 장희재로 천거에 응한다면 어찌 사부(士夫)의 일이겠는가 하고, 이 때문에 나의 형이 과연 천거하지 않으니, 비국(備局)에서 추문(推問)하도록 청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었다. 그리고 다시 천거하게 하였는데, 너의 아버지와 민암이 내 형에게 글을 보내어 장희재를 천거하라고 권하였었다. 나의 형이 그 글을 보고, 그 글을 내 앞으로 던지며 말하기를, ‘어떠한가?’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사부(士夫)로서 만약 장희재를 천거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설 수 없을 것이다.’ 하였더니, 형이 나의 말을 옳게 여겨 다만 김천익(金天翊)·윤천뢰(尹天賚) 두 사람만 천거하였었다."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는 이제 장희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깨끗한 인사(人士)가 되고자 하는구나."

하였다. 이우겸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너의 집에서 장희재를 만나보았다면, 기사년 이후에 장희재가 어찌 나의 집에 왕래하는 일이 없었으며, 내가 과연 장희재와 하는 일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나의 형이 장수를 천거할 때에 천거하지 말도록 권하였겠는가? 또 너는 무상(無狀)한 자이다. 장희재의 아비에게 시호(諡號)를 내릴 때에, 성상께서 경재(卿宰)로 하여금 〈축하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하는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이는 군명(君命)이니 나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장희재의 어미가 경재(卿宰)의 부인에게 글을 보냈는데, 너의 집 부인과 민암의 집 부인은 모두 가서 참석하였으나, 나의 집에서는 어디 부인이 나아간 일이 있었는가?"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네가 내 집에 찾아 왔을 때에, 장희재와 함께 환국하는 일에 언급하고, 여러 사람이 모두 웃으면서 자리를 파하였다. 그 후 정월에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종숙(從叔) 민장도가 갑자기 와서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환국될 듯하였다. 양국(兩局)의 대장(大將)중에 노량(露梁) 이 참판(李叅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인데, 혹시 먼 데 있으면서 패초(牌招)를 받는 일이 있으면, 시급하게 들어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그대는 모름지기 노량에 나가서 이 뜻을 말하라.’ 하므로, 내가 저녁을 먹은 뒤에 노량으로 나갔더니, 너희 형제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으므로, 나는 한결같이 민장도가 말한 대로 너희 형제에게 말하자, 이우정(李宇鼎)이 곧 말하기를, ‘비록 이 곳에 있다 하더라도 패초를 받들고 들어오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고, 너는 말하기를, ‘우리 형이 무슨 장재(將才)가 있다고 이러한 중임(重任)을 얻겠는가?’ 하였으며, 인하여 더불어 수작(酬酢)하였다가 유숙(留宿)하고 돌아왔었다. 민장도 장희재가 만약 있다면 너는 반드시 이와 같이 발명(發明)하지 못할 것이다. 너의 죽고 사는 것이 나에게 무슨 보탬이 있다고 무함(誣陷)하겠느냐?"

하자, 이우겸은 말하기를,

"나는 주강(晝講) 때에 장희재의 얼굴을 보았지만, 장희재는 반드시 나의 얼굴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장희재가 만약 있다면, 비록 서로 마주 보게 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는 장희재와 같은 조정에 선 지 6, 7년이 되었는데, 어찌 피차(彼此) 얼굴을 알지 못할 리 있겠는가?"

하니, 이우겸이 말하기를,

"네가 정월에 노량에 나갔었다는 일은 더욱 근거 없는 말이다. 그 해 2월 초2일은 곧 조정이 바뀐 때였고, 네가 너의 아버지의 말로 인해 와서 나의 형에게 청하기를, ‘조정을 초창(草創)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속히 들어오라. 또 들으니, 조정의 의논이 장차 대감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주의(注擬)하려 한다고 하니, 오랫동안 강 밖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하고, 이와 같이 하여 그친 데 지나지 않으나, 노량은 곧 과천(果川) 땅이므로, 원래 소패(召牌)는 강을 건너는 규례(規例)가 없으니, 너의 패초를 받는다는 말이 어찌 어긋난 단서가 아니겠는가?"

하자, 민언량이 말하기를,

"나도 소패(召牌)가 강을 건너는 규례가 없음은 안다. 내가 노량에 나간 것은 정월 20일 후에서 그믐 전에 있었으니, 일의 정상을 갖추어 진술하면서 들어오도록 청한 것이었다. 만약 과연 강 밖에 있는데도 장수에 임명하였다면, 승정원(承政院)에서 어찌 변통(變通)할 것을 품계(稟啓)하지 않겠는가? 너의 이른바, ‘제 아비의 말을 가서 전하였다.’는 말이 어찌 근거가 없지 않겠는가? 그때에 민장도가 있었다면, 마땅히 스스로 갔겠지만, 민장도가 이미 안산(安山)으로 갔기 때문에 내가 나갔던 것이다. 과연 환국한 뒤라면 너의 형이 고사(高士)도 아닌데 내가 무엇 때문에 친히 가서 일어나기를 권하였겠으며, 나의 아버지도 또 어찌 글을 보내지 않고 반드시 나로 하여금 가서 청하게 하였겠는가?"

하자, 이우겸이 말하기를,

"과연 너의 말과 같이 나의 집이 민장도와 서로 친하였다면, 민장도 안산으로 갈 때에 길이 나의 집 문앞을 지나야 하는데, 어찌 들러서 말하지 않고 반드시 너로 하여금 와서 말하게 하였겠는가?"

하였는데, 민언량이 말하기를,

"양화도(楊花渡) 또한 안산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하니, 이우겸이 말하기를,

"그때에 폐고(癈錮)되었다가 기용된 사람으로 근기(近畿)에 있는 자는 때에 미쳐 들어오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나의 형은 특별히 도승지에 임명된 후에 10년 동안 버림받아 들어앉은 나머지 갑자기 들어올 수 없다 하여 현도(縣道)를 통해 진소(陳疏)하였었다. 그때에 다만 너의 아버지가 일어나기를 권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 일어나기를 권고한 자가 많았으나, 비답(批答)을 받은 4, 5일 뒤에야 비로소 들어와 사은(謝恩)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갑자기 변통한 말이 아니고,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기사년 이후로 너의 집과 크고 작은 논의(論議)에 의견을 달리하였음은 유독(唯獨) 우리 집의 정상(情狀)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하였다. 죄인 조시경 민언량과 한 곳에서 면질(面質)시켰는데, 조시경 민언량을 향하여 말하기를,

"국휼(國恤) 성복(成服) 뒤에 나으리께서 어찌 노자(奴子)를 보내어 나를 부르고, 희빈의 복상(服喪) 여부를 나로 하여금 탐문케 하지 않으셨다고 하십니까?"

하니, 민언량 조시경을 향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비록 네 형에게 말하였다 하더라도 나에게 무슨 보탬이 있다고, 서로 친한 사이에 너희 형제로 하여금 모두 이런 지경에 들어오게 하려고 하였겠느냐? 그때에 내가 너의 형에게는 말하였으나, 너한테는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9월 초에 내가 구해야 할 것이 있어서 조시화(趙時華)를 불렀는데, 나는 때마침 매부(妹夫) 이 서방(李書房) 집에 있었으므로, 조시화가 내 집에서 그 곳으로 찾아왔었다. 내가 네 형에게 말하기를, ‘희빈의 복상 여부를 아느냐?’ 하였더니, 네 형이 대답하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므로, 내가 다시 탐문하여 오게 하였으니, 대개 권중경과 수작한 뒤인 까닭에, 내가 과연 〈희빈의 승위(陞位)를〉 상소하는 의논의 설(說)이 있음을 네 형에게 언급하였던 것이다. 네가 말하는 내가 네게 말하였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하니, 조시경이 말하기를,

"나으리의 고성(高姓)의 노자(奴子)가 분명히 나를 불러 갔고, 나으리께서 군관청(軍官廳)에서 나를 보고 묻지 않으셨습니까?"

하였는데, 민언량이 말하기를,

"이는 면질할 일이 아니다. 조시화에게 물을 것 같으면 알 수 있다."

하였다. 죄인 안여익(安汝益)을 네 번째 형문(刑問)하고, 죄인 작은아기를 일곱 번째 형문하면서 각각 신장(訊杖) 30도(度)를 쳤으나, 모두 전초(典招)에서 가감이 없었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작은아기는 한결같이 형장(刑杖)을 견디면서 불복하고 있으니, 청컨대 더 형문(刑問)하게 하소서. 죄인 민언량 권중경·이우겸과 한 곳에서 면질시켰는데, 피차(彼此) 허다하게 말한 바가 비록 명백(明白)하게 귀일(歸一)하지는 아니하였으나, 민언량의 전후의 말이 서로 어긋나서 착란(錯亂)한 단서가 없지 않았습니다. 또 민장도 장희재가 모의(謀議)한 일들을 제가 이미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그가 공모(共謀)한 것은 의심할 수 없으나, 그가 경영(經營)한 절차(節次) 같은 것은 아직도 직고(直告)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제(服制)를 탐문한 일에 이르러서는 조시화·조시경을 논할 것 없이 이미 불러서 물었다고 하나, 누구에게 가서 탐문하게 하였다는 사연(辭緣)은 또한 실토(實吐)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이로써 다시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죄인 권중경 이우겸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민언량을 다시 추문하기를 기다린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죄인 조시경 민언량과 면질할 때에 현저하게 굽히는 빛이 있어서 그 사이에 숨기는 정상이 있는 듯하니, 청컨대, 다시 더 형문(刑問)하게 하소서. 죄인 안여익은 당초 형문을 정지한 뒤에 민언량의 초사(招辭)로 인하여 다시 더 형문하기를 청하고, 이미 네 차례 엄중하게 형신(刑訊)하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고 있으니, 이른바 소개(紹介)한 곡절(曲折)을 가지고 민언량을 다시 추문할 때에 덧붙여 넣어 구문(究問)한 후에 처치하는 것이 심신(審愼)하는 도리에 맞을 듯합니다. 이제 우선 형문을 정지해야 할지를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12일 을미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민언량의 공초 내용

국청(鞫廳) 죄인 조시경을 세 번째 형문하며 신장 30도(度)를 쳤으나, 전초(前招)에서 가감이 없었다. 죄인 민언량이 다시 공초하기를,

"제가 처음의 공초에서 이른바, ‘마땅히 상소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범연히 유생(儒生)과 제배(儕輩)의 말을 들었던 것이었으니, 혹 유생의 상소가 마땅히 먼저 나와야 한다고 하고, 혹은 진신의 상소가 마땅히 먼저 나와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후에 권중경을 만나 복위를 청하는 상소에 대해 상세하게 들었으니, 권중경이 실로 이를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른바 주장하였다는 것은 연소(年少)한 무리면 비록 전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도청도설(塗聽道說)538) 과 같은 바가 있으나, 권중경에 이르러서는 명망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하였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권중경에게 비로소 듣고 이를 믿게 된 까닭입니다. 오도일은 언근(言根)과 사단(事段)은 당초에 권중경이 전한 바가 그의 들은 것에서 나온 데 지나지 않으니, 제가 그때 언근을 미처 듣지 못한 것은 진실로 우연한 소치(所致)입니다. 시마복(緦麻服)539) 을 입는다는 말은 사단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면, 그때 전하는 말이 다단(多端)하였는데, 시마복을 입는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제가 처음에 조시화에게 듣고, 권중경과 수작한 뒤에야 비로소 자세하게 탐문하도록 하였습니다. 복위와 복제(服制)의 일이 서로 관계되는 것은 아니나, 대개 성상께서 희빈을 대우하는 도리가 여러 후궁(後宮)보았다 좀 각별하신지 다른 후궁과 똑같이 하시는지 알고자 하였는데, 복제의 경중(輕重)으로써 희빈을 대우함이 어떠한지를 알아서 진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니, 이는 대개 권중경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이것으로써 조시화에게 물었는데, 당초에 조시화와 수작할 때에 조시화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자세히 탐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므로, 제가 마땅히 탐문할 곳을 물었더니, 조시화가 답하기를, ‘나인(內人) 노씨(盧氏)가 바야흐로 김 숙원(金淑媛)의 상궁(尙宮)이 되었는데, 나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으니, 그로 인하여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후의 초사(招辭)가 착란(錯亂)한 것은 제가 여러 차례 형벌을 받고 정신이 혼미(昏迷)하여 사람과 귀신을 분간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착란한 것은 진실로 이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시 추문한 공초 안에 ‘그때 민장도의 일을 제가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일부러 들어서 알지 못하는 것으로 대답하였다.’고 한 것은 곧 실상(實狀)입니다. 다시 추국한 문목(問目) 안에, ‘저와 민장도는 한 집안 사이이므로 듣지 못할 리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다시 사실대로 초사를 바친 것입니다.

이우겸과 문답한 가운데, 제가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체하니, 이우겸이 말하기를, ‘어찌 그다지도 귀가 어두운가?’라고 하였다는 일에 이르러서는, 처음의 공초가 과연 확실합니다. 이우겸이 당초에 장희재·민장도와 함께 와서 본 것은 제가 지금 와서 생각하여도 황연(怳然)히 어제와 같으며, 정월 그믐 사이에 노량(露梁)으로 나가 이우겸 형제와 같이 자고 돌아왔는데도, 이우겸이 지금까지 일의 정상을 숨기고자 하니, 진실로 지극히 간악합니다. 민장도와 장희재가 모의한 일은 장희재로 인하여 내통(內通)하면서 환국(換局)을 경영한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니, 무슨 별다른 절차가 있었겠습니까? 민장도가 노량의 길로 갔는지 그 여부는 제가 이미 오로지 위임(委任)을 받아서 나갔으니, 민장도가 비록 이우정(李宇鼎)의 집 문앞을 지났다 하더라도 들어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또 민장도가 길을 떠난 것이 제가 노량으로 간 하루 뒤에 있었으니, 더욱 노량으로 갈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양화도(楊花渡)가 돌아가는 길인지 곧은 길인지는 모름지기 논할 것이 없습니다만, 어제 이우겸과 면질(面質)할 때에 달리 가는 길이 있음을 말하였을 뿐이며, 그때에 민장도에게 묻지 않았는데, 이제와서 어떻게 그가 거쳐 간 길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복제(服制)를 조시화에게 물은 일은 제가 애초에 모처(某處)에 탐문하게 하지 않았는데 당초에 조시화가 말하기를, ‘만약 노 상궁(盧尙宮)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기 때문에, 노자(奴子)를 보내어 불러서 물을 때에 조시화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노 궁인(盧宮人)이 아직 나오지 아니하여 들어서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민장도가 장희재와 결탁한 일은 민장도가 장희재와 결탁한 일은 민장도가 장희재와 무진년540)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교분(交分)을 맺었는데, 제가 처음에는 들어서 알지 못하였으므로, 매양 민장도와 장희재와의 결탁이 무슨 경로로 인한 것인지 의아(疑訝)해 하였으며, 일이 이루어진 뒤에도 또한 이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민장도가 글자 한 자도 모르는 안세정(安世禎)으로 소과(小科)를 차지하도록 도모하였고, 또 안여익을 사산 감역(四山監役)으로 삼은 후에야, 저는 비로소 그 안가(安哥)들이 환국(換局)할 때 주장한 사람임을 깨달았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장희재의 첩 숙정(淑正)이 안여익 등에게 지친(至親)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민언량은 전후의 초사(招辭) 가운데 어긋나 착란(錯亂)된 단서를 다시 추문하였으나, 그 발명(發明)한 바가 명백하지 못한 것이 많았고, 권중경·이우겸 등과 수작하였다는 것도 한결같이 전초와 다름이 없었으며, 이미 다른 증거를 끌어대는 것이 없어서 귀일(歸一)되기는 쉽지 않으나, 그가 민장도·장희재 등과 결탁하며 모의(謀議)한 정상은 그의 자복(自服)으로 더욱 밝게 드러났습니다. 조시화를 불러 물었다는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감히 궁액(宮掖) 사이의 일을 밀탐(密探)할 계획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더욱 절통(絶痛)합니다. 청컨대, 조시화를 먼저 나래(拿來)하여 빙문(憑問)한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죄인 조시경은 형벌을 더한 뒤에도 한결같이 스스로 했다고 하니, 이 또한 조시화의 추문(推問)을 기다린 뒤에 처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우선 형문을 정지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추국(推鞫)을 우선 정파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18일 신축 3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조시화의 공초 내용

국청 죄인 조시화가 공초하기를,

"제가 8월 초부터 학질[痁]을 앓느라고 거의 죽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8월과 9월 사이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민언량이 노자(奴子)를 보내어 저를 부르므로 제가 곧 그의 집으로 갔는데, 민언량이 그 매부(妹夫)의 집에 갔기 때문에 제가 따라서 그 곳에 갔더니, 민언량이 저에게 묻기를, ‘너는 대궐 안 나인(內人) 중에 서로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우리 친척 중에는 원래 나인이 없으니, 어찌 서로 아는 일이 있겠는가? 다만 유 숙원 방(柳淑媛房) 나인 노씨(盧人)와 일찍이 침선(針線)의 일로 서로 안 일이 있으나, 연전(年前)에 궁에 들어간 후로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민언량이 이어 말하기를, ‘희빈은 복상(服喪)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나는 병으로 드나들지 못하여 전혀 들은 바가 없다. 또 예조(禮曹)의 마련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반드시 나에게 묻는가?’ 하였습니다. 민언량이 말하기를, ‘여염(閭閻) 사이에서 혹은 복상을 한다고도 하고, 혹은 복상을 하지 않는다고도 하니, 너는 탐지(探知)하여 와서 알려 달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나의 병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탐지하겠는가?’ 하였더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는 노 궁인으로 인하여 탐문할 수 있다고 하더라.’ 하였으나, 제가 대답하기를, ‘노 궁인이 이미 궁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탐문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돌아왔습니다. 그 며칠 뒤에 민언량이 또 사람을 보내어 저를 불렀으나, 저는 때마침 종환(瘇患)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민언량이 반드시 복상 여부를 탐문하고자 하는 일이 지극히 수상하기 때문에,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일은 제가 전혀 들은 바 없고, 또한 언급한 일도 없습니다. 백모(白帽)를 샀다는 말은 전혀 맹랑한 것이고, 이른바 상소를 의논한 일이 있었다는 말도 또한 저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밖에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조시화는 공초한 사연(辭緣)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민언량의 초치(招致)로 인하여 그 집에 가서 복상에 대하여 수작한 한 가지 일은 민언량의 초사와 대략 서로 같으나, 이른바 시마복을 입도록 진소(陳疏)한다는 것과 궁인(宮人)이 있는 곳에 탐문하였다는 등의 일은 서로 어긋남을 면하지 못하니, 한곳에서 면질(面質)시키기를 청합니다. 조시화 민언량의 집에 간 것은 이미 적실(的實)한데, 조시경이 시종 스스로 감당하므로 엄중하게 신문(訊問)하기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그 말을 변치 않으니 지극히 수상합니다. 그 사이에 반드시 숨긴 정상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조시화의 공초 속의 사연을 가지고 조시경에게 다시 추문하여 귀일시키도록 하소서. 죄인 윤순명(尹順命)은 당초에 업동(業同)이 목인(木人)을 파왔을 때에 참여하여 들은 정절(情節)과, 작은아기[自斤阿只]가 말한 제주(濟州)에서 온 서찰(書札)안의 조어(措語)를 가지고 네 차례 신문하였으나, 시종 굳게 은휘하였다가, 제주에서 보내온 방재(龐災)의 책자(冊子)와 방재의 도구에 대한 한 조목은 끝에 가서 발설(發說)하였기 때문에, 추문하는 사이에 형벌을 정지하고 이어 계품(啓稟)하여 다시 형벌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완의(完議)543) 할 때에 대간(臺諫)이 말하기를, ‘처음에 신문하던 것도 모두 긴요한 일에 관계되는데, 그가 굳게 숨긴다 하여 그대로 둔 채 묻지 않고 경솔하게 먼저 형벌을 정지하는 것은 경솔함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대간의 말이 진실로 집지(執持)할 만한 바가 있습니다. 옥체(獄體)를 헤아리건대, 신 등의 경솔했던 과실은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윤순명은 더 형신(刑訊)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추국을 우선 정파(停罷)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19일 임인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민언량·조시화의 면질 내용과 윤순명·조시경·민언량 등의 공초 내용

국청(鞫廳) 죄인 민언량 조시화와 한 곳에서 면질시켰다. 민언량 조시화를 향하여 말하기를,

"내가 네게 ‘백모(白帽)가 있느냐?’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자, 조시화가 말하기를,

"백모의 말을 네가 어찌 일찍이 입에서 꺼냈던 말인가?"

하였다. 민언량이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희빈의 복상(服喪)에 관한 일을 들었느냐?’고 물으니, 네가 말하기를,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말을 과연 들은 바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조시화가 말하기를,

"네가 노자(奴子)를 보내어 나를 부르던 날에, 내가 길 가운데서 흰 옷을 입은 여인과 마직(馬直)544) 5, 6명이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너에게 하였을 뿐이고, 시마복을 입는다는 일은 본디 입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네가 ‘복제(服制)의 일로 이 좌윤(李左尹)이 귀양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민언량이 말하기를,

"네가 너한테 복제의 일을 어찌 말하지 않았느냐?"

하니, 조시화가 말하기를,

"내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에 내 아우 조시경을 네가 과연 불러가지 않았느냐? 네가 공연히 우리 형제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 하는데,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나는 80세의 부모가 있으니, 나의 목숨을 살려주기 바란다."

하였다 민언량이 말하기를,

"너의 아우 조시경을 내가 혹 불러 오기도 하였지만, 그도 또한 부르지 않아도 이르러서 늘 왕래하였으니, 조시경이 온 것은 괴이할 것이 못된다. 궐내(闕內)의 일은 네가 어찌 육후립(陸後立)의 양자(養子)인 조가(趙哥) 두 사람으로 인하여 알았고, 내간(內間)의 일은 노 궁인(盧宮人)으로 인하여 알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판서(判書) 오시복(吳始復)이 진봉(進封)에서 얻은 응련(鷹連)을 네 집에 머물러 두었는데, 내관(內官)이 그 매를 얻기를 요구한 까닭에, 오 판서의 허락을 받아 육환(陸宦)545) 이 살았을 때부터 매년 육환에게 준다는 말을 너희 형제에게서 들었다."

하니, 조시화가 말하기를,

"육후립이 이미 죽었으니, 죽은 자가 응련을 어느 곳에 쓰겠는가? 네 말은 근거가 없다."

하였다. 민언량이 말하기를,

"올해에도 주지 않았느냐?"

하니, 조시화가 말하기를,

"응련에 대한 말은 어찌 홍이도(洪以度)가 네가 응련을 준 것으로 인하여 이 때문에 파직(罷職)당하여 나오니 않았느냐? 내게 과연 응련이 있으나, 이것은 내가 관서(關西)에 갔을 때에 조 감사(趙監司)가 준 응련인데 네가 오 판서의 매라고 말하니, 어찌 맹랑하지 않은가?"

하고, 조시화가 또 말하기를,

"국휼(國恤) 때에 사람들은 모두 희빈이 복상(服喪)할 줄 알았는데, 너는 어찌 홀로 희빈이 복상하지 않을 것을 알고 내게 물었는가?"

하자, 민언량이 말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노 궁인이 오래지 않아 나올 것이니, 마땅히 탐지(探知)할 바가 있을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조시화가 말하기를,

"이미, ‘노 궁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니, 시마복(緦麻服)을 입을 것이라는 말을 내가 어디에서 듣고 네게 말하였다는 것인가?"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시마복을 입는다는 말을 네가 어찌 입에서 내지 않았다는 것인가?"

하였다. 조시화가 말하기를,

"네가 재차 노자(奴子)를 보냈을 때 내가 어찌 종환(瘇患)을 핑계대어 아니 가지 않았더냐?"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나는 재차 노자를 보내지 않았다. 만약 상소에 대한 의논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복상 여부를 탐문하는 일을 네게 말할 수 있었겠느냐? 또 내가 상소하는 일을 네게 말하지 않았고, 네가 또 윤가(尹哥)의 무리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윤보명(尹甫命)과 작은아기의 초사(招辭)에서 어떻게 상소에 대한 말이 나왔겠느냐? 네 아우가 혼약(昏弱)하기 때문에, 내가 과연 너를 불러 탐문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조시화가 말하기를,

"너희 무리가 반드시 힘을 다하여 탐지하고자 하는 뜻을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내가 상소에 대한 일을 너에게 말하였으니, 네가 혹시 네 아우로 하여금 윤가(尹哥)에게 탐문하게 한 소치(所致)일 것이다."

하였다. 조시화가 말하기를,

"네가 혹 내 아우를 불러 말하였다 하나, 내가 알겠느냐?"

하니, 민언량이 말하기를,

"네가 먼저 노 궁인을 말하였기 때문에, 내가 너로 하여금 탐문하게 하였던 것이다."

하자, 조시화가 말하기를,

"네가 만약 궁인(宮人)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노씨(盧氏)를 들어서 대답하였겠느냐?"

하였다. 죄인 윤순명(尹順命)을 다섯 번째 형문하여 신장(訊杖) 30도를 치니, 공초하기를,

"정축년546) 의 서찰(書札)의 사연(辭緣)에 이르기를, ‘이 계집이 그 맏아들의 죽음을 숙정(淑正)의 방재(龐災)로 말미암았다 하여 집안에서 파냈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은가? 그는 일찍이 그 조카 김이만(金以萬)과 더불어 묘소(墓所)에 흉물(凶物)을 묻었으니, 방재에 대한 일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인데, 숙정이 어찌 이 일을 하였겠느냐? 너는 모름지기 이런 뜻으로써 이 계집을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또 올 가을의 서찰 사연에는 이르기를, ‘이 계집은 이 판서(李判書) 집 비자(婢子)인데, 우리 집 상방(上房)에 두고서 우리 집을 기찰(譏察)하는 계제(階梯)로 삼았다. 또 김춘택(金春澤)·홍기주(洪箕疇)·변정유(卞廷郁) 등과 서로 간통(奸通)하여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하는데, 대개 이 계집이 서인(西人)과 번갈아 간통한 것은 숙정이 궐내(闕內)에 방재한 일을 누설하는 것이니, 이 계집의 소행이 진실로 불측하였다. 너는 모름지기 이를 금단(禁斷)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 계집이 홍기주와 통간(通奸)한 정상(情狀)은 그 집안의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으며, 저도 또한 적실히 알고 있습니다. 서찰 가운데 이른바 궐내에 방재한 일이란, 지난해 7월 사이에 숙정이 생강의 머리[薑頭]를 맺어 몰래 궐내로 들어가 설향(雪香)과 함께 모의하여 하였고, 올 정월 사이에 신사(神祠)를 수표교(水標橋) 근처 집에다 설치하여, 중궁전(中宮殿)을 향해 부도(不道)한 기도(祈禱)를 행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것 외에는 전초(前招)와 가감(加減)이 없었다. 죄인 조시경(趙時炅)이 다시 공초하기를,

"당초에 민언량이 만약 저를 불러 묻지 않았다면, 제가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 반드시 불러 물은 일을 스스로 담당하겠습니까? 제 형을 민언량이 또한 불러 물었느냐 하는 것은 제가 아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조시화 민언량을 한 곳에서 면질시켰더니, 피차 말한 바가 비록 귀일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불러다가 탐문한 실상(實狀)이 스스로 드러났고, 조시경을 다시 추문한 사연(辭緣)에서도 역시 민언량의 집에 갔던 것이 적실하였으며, 또 민언량과 면질한 초사를 가지고 보더라도 조시경이 늘 그 집에 왕래하였다고 하였으니, 조시화 형제를 시켜 탐문한 흔적이 있는 듯합니다. 민언량을 이로써 거듭 추문(推問)함이 마땅합니다. 또 그 승복(承服)한 초사 안에도 다 구문(究問)하지 못한 사단(事端)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민언량은 따로 문목(問目)을 만들어 거듭 추문하게 하소서. 죄인 윤순명의 문목에 대한 사연은 반은 실토하고 반은 감추어서 아직도 직초(直招)하지 않으니, 청컨대 형신(刑訊)하게 하고, 조시화는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민언량이 다시 공초하기를 기다린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순명은 여섯 번째 형문하여 신장(訊杖)이 제4도(度)에 이르렀을 때에 직초하기를,

"서찰의 일은 이미 전초(前招) 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궐내(闕內)의 방재에 대한 일과 제주(濟州)에서 온 방재 책자(龐災冊子)·방재의 도구 등의 일은, 제가 지난해 8월·9월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비가 병이 있어 꿀을 구하려고 숙정(淑正)의 집에 갔더니, 마침 숙정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상면(相面)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또 그 후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다시 가서 묻기를, ‘너는 지난번에 어디에 갔었느냐?’고 하였더니, 숙정이 대답하기를, ‘대궐 안에 들어가 7일 동안 묵고 왔다.’고 하므로, 제가 묻기를, ‘대궐 안에는 외인(外人)이 유숙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네가 무슨 까닭으로 들어갔으며 무슨 까닭으로 오래 묵었느냐?’ 하니, 숙정이 말하기를, ‘우리 마님의 분부로 들어갔었는데, 유숙한 연유(緣由)는 스스로 묘리(妙理)가 있으니, 앞으로 마땅히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후 작은아기[自斤阿只]에게 가서 묻기를, ‘전번에 내가 숙정의 집에 갔더니, 숙정이 말하기를, 「대궐 안에 들어가서 7일 동안 묵고 왔다」고 하였는데,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다.’고 하니, 작은아기가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그 일을 모르는가? 숙정이 바야흐로 대궐 안에서 방재하는 일이 있었다. 방재하는 책자와 방재하는 도구로 달걀 같은 모양을 한 것 세 개가 제주에서 숙정에게 왔었는데, 숙정이 이것을 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제가 또 숙정의 집에 가서 묻기를, ‘지난번에 이른바 「대궐 안에 들어가 유숙한 것은 묘리(妙理)가 있다」고 하였는데, 너는 모름지기 자세히 말하라.’ 하니, 숙정이 대답하기를, ‘이제 중궁전에서 병환이 이와 같으시니, 만약 이때 기도하여 해친다면 우리 마님께서 자연히 위(位)에 오르게 마련이므로, 이것 때문에 바야흐로 경영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제주에서 방재하는 책자 1권과 방재하는 도구로 달걀 모양을 한 것 세 개가 너에게 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너는 그 책과 물건으로 그 일을 하느냐?’ 하니, 숙정이 말하기를, ‘당신은 이 말을 어디서 들었느냐?’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자연히 듣는 곳이 있다.’ 하였더니, 숙정이 말하기를, ‘방재할 도구가 과연 도착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대궐 안에서 쓰고 있으나, 책자가 왔다는 말은 헛말이고, 다만 편지장 같은 데에 쓴 것이 있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그 후에 또 작은아기에게 가서 숙정의 말을 언급하였더니, 작은아기가 대답하기를, ‘방재하는 책자는 제주에서 온 것뿐만 아니라, 숙정에게 본래 말[斗]만큼 큰 책자 3권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 책자는 틀림없이 금번 수탐(搜探)한 문서 속에 같이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병자년547) 의 목인(木人)에 대한 일은 그때 제가 이홍발(李弘渤)의 집에 갔었는데, 이홍발이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김이만(金以萬)·방찬(方燦) 등과 모의하고, 목인에다 세자(世子)의 연갑(年甲)을 써서 장가(張家)의 묘소에 묻어 두고자 한다. 또 신 대장(申大將)548) 의 노자(奴子)의 호패(戶牌)를 무덤 곁에 떨어뜨려둔다면, 성상께서 경동(驚動)하시어 반드시 서인(西人)의 소행으로 의심하여 환국(換局)을 기필할 수 있다.’ 하므로, 제가 대답하기를, ‘이 일이 반드시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였더니, 이홍발이 말하기를, ‘이러이러하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고, 곧 물러나왔습니다. 그 후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저를 불렀으나, 제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죄인 민언량이 다시 공초하기를,

"복제(服制)를 조시화(趙時華)에게 물은 것은, 제가 조시경(趙時炅)과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조시경의 사람됨이 조시화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에, 국휼(國恤)의 성복(成服) 뒤에 과연 복제의 일로 조시화에게 단서를 발설하였으며, 조시경 또한 자주 왕래하였기 때문에, 제가 또한 조시경에게도 물은 바가 있었는데, 그가 대답한 말을 제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제배(儕輩)를 지명(指名)하지 않은 것은, 이는 갑(甲)은 옳다 하고 을(乙)은 그렇다고 하였다는 말이 아니고, 대강 제배 사이의 이야기가 이와 같이 유전(流傳)하였으므로, 확실하게 지적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희빈(禧嬪)이 불안하게 되면 세자도 불안하게 된다는 한 조항은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승하(昇遐)하신 뒤에 차례를 가지고 말한다면, 희빈이 마땅히 승위(陞位)하여야 할 듯하였고, 지금은 세자께서 태산(泰山)같이 편안하시니 염려할 바가 아니지만, 지난날에는 우미(愚迷)한 소견으로 생각할 때 마땅히 위(位)에 오를 자가 오르지 못한다면 불안한 사단이 있을 듯하였으며, 모자(母子)의 사이도 또한 이로 인하여 불안할 듯하였으므로, 과연 이런 뜻으로 권중경(權重經)과 문답하였습니다. 복제를 탐문하였다는 일은 권중경이 저로 하여금 기필코 탐문하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제가 과연 애써 탐문하였습니다. 또 권중경이 비록 저로 하여금 탐문하게 하였으나, 탐문한 뒤에 상소(上疏)가 과연 이루어진다면, 저도 따라서 참여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사리(事理)를 가지고 말한다면, 희빈이 마땅히 승위하여야 할 것이나, 이같은 상소는 한 사람의 뜻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것 또한 성상의 뜻을 밀탐(密探)하거나 궁금(宮禁) 안의 뜻을 정찰(偵察)하려는 것이 아니라, 희빈의 복(服)의 경중(輕重)으로써 성상께서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알고자 한 것이니, 이는 권중경의 뜻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자가 또한 많지 않고, 다만 조시화 형제뿐이므로 과연 복제의 일을 물었던 것인데, 조시화 형제가 환자(宦者) 육후립(陸後立)의 양자인 조가(趙哥) 두 사람 및 노 상궁(盧尙宮)과 서로 친한 사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말이 앞뒤가 모순된다는 일은, 국휼의 성복 뒤에 조시화가 저의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왔으므로, 제가 우연히 묻기를, ‘희빈의 복제는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하였더니, 조시화가 말하기를, ‘시복(緦服)으로 한다고 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노자(奴子)를 보내어 불렀더니, 조시화가 과연 향교동(鄕校洞) 매부(妹夫)의 집으로 와 만나서, 제가 비로소 상소에 대한 일을 말하였는데, 제가 처음 공초 때에 잘못 두 번째 보았을 때에 말하였다고 한 것이니, 이는 앞뒤가 모순된 말이 아닙니다. 장희재(張希載)와 환국(換局)에 대해 말한 일은 전후에 장희재를 만나본 것이 단지 세 번 뿐인데, 처음에는 민장도(閔章道)의 집에서 보았고, 두 번째는 저동(苧洞) 제 조모(祖母)가 살고 있는 집 사랑에서 보았으며, 마지막은 이우겸(李宇謙) 장희재와 함께 저의 집에 와서 모였을 때에 보았을 뿐입니다. 민장도 안여익(安汝益) 숙질(叔姪)과 함께 장희재와 결탁하여 몰래 환국할 일을 꾀하였는데, 민장도는 말하기를, ‘서인(西人)은 세자를 보호할 수가 없고, 세자를 보호하는 것은 남인(南人)만한 바가 없기 때문에, 희빈의 뜻도 반드시 환국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도 환국하고자 하신 지 오래이나, 반드시 사고(事故)를 인연한 후에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이루지 못하였는데, 송시열(宋時烈)의 소(疏)가 들어간 뒤에 이로 인하여 기회를 삼고 인하여 환국하였던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 외에는 다시 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안산(安山)에 가서 상의(相議)한 일이란 민장도 안산에서 돌와와 저에게 말하기를, ‘유가(柳家) 3형제가 반드시 환국하는 일을 알고자 하여 여러 차례 서찰로 그 아비 민암(閔黯)에게 물었기 때문에, 그가 어쩔 수 없이 장희재와 환국하려는 일을 가끔 언급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일을 같이 하였다는 것은 유가(柳哥)가 이미 환국하는 일을 알았으니 이는 곧 일을 같이한 것이므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른바 악명(惡名)이라고 한 것은 다른 날 일이 발각(發覺)된다면 결코 미명(美名)은 아니기 때문에, 악명이라고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윤순명(尹順命) 연서(延曙)에 매흉(埋凶)한 일과 숙정(淑正)의 흉모(凶謀)의 절차(節次)에 동참(同叅)하였음을 이미 승복(承服)하였으니, 청컨대 전례(前例)에 의거해서 결안 취초(結安取招)해서 조율(照律)하여 처단(處斷)하게 하소서. 죄인 민언량은 다시 추문한 사연이 또한 전초(前招)의 공술한 바와 다름 없으나, 그 궁금(宮禁)을 정찰(偵察)하고 국가를 패란(敗亂)시킨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청컨대 이로써 결안 취초해서 율(律)을 상고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기사년의 일은 갑술년 비망기(備忘記) 안에 갖추어져 있다. 민언량 등이 장희재의 무리와 사사롭게 서로 모의(謀議)하면서 반드시 임금의 뜻을 청탁하였으니, 매우 마음 아프다. 이제 계사(啓辭)를 보건대, 말이 분명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의혹(疑惑)을 이루는 데 관계되니, 오히려 민언량의 초사를 털끝만큼이라도 근사(近似)하였다 여겨 갑술년의 하교를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인가?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결코 장희재 무리의 지시를 받지는 않는다. 경(卿) 등이 나를 보는 것이 이와 같으니, 실로 신민(臣民)의 위에 임(臨)할 낯이 없다."

하였다. 그 뒤 국청에서 다시 의논하여 아뢰기를,

"죄인 윤순명 연서에서 매흉한 일과 숙정의 흉모 절차에 동참하였다고 이미 승복하였으니, 청컨대 전례에 의거하여 결안 취초하고 조율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죄인 민언량은 다시 추문한 사연 또한 전초(前招)에서 공술한 바와 다름 없으나, 궁중을 정찰하고 복제를 밀탐하는 등 그 뜻의 소재한 바가 이미 지극히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환국하려 했다는 말은 조정의 처분을 어찌 저희들이 마땅히 엿볼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두세 명의 간흉(奸凶)이 치밀하게 체결하여 서로 모의하고, 성상의 뜻을 가탁(假托)해서 의혹시켜 어찌럽히고 현혹시킨 정상(情狀)이 매우 통분(痛憤)합니다. 교무(矯誣)하여 부도(不道)한 죄는 모두 용서할 수 없는데 관계되니, 청컨대 이로써 결안 취초해서 율(律)을 상고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24일 정미 4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성임의 공초 내용

국청(鞫廳) 죄인 성임(成任)이 공초(供招)하기를,

"저는 잔약(孱弱)한 기질(氣質)에다 외로운 몸이라서, 동료들에게 존중받지 못하여 본래 어울리며 사이 좋게 지낸 일이 없었습니다. 또 저는 어려서부터 병을 잘 앓아서 문을 닫고 집에 들어앉아, 큰 경조(慶弔) 이외에는 한만(閑漫)하게 드나드는 일은 아주 그만두었습니다. 금년 8월 20일 뒤에 민언량(閔彦良)의 아우 민언상(閔彦相)이 묵은 병이 덧걸려 위중하여 명(命)이 경각(頃刻)에 달렸다고 하므로, 제가 문병하기 위하여 가 보았더니, 민언량이 친히 약을 쓰면서 상황이 창황(蒼黃)하여 무심히 손님을 대하기에 저는 곧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민언량이 갑자기 저의 명자(名字)를 들어서, 이봉징(李鳳徵)이 소초(疏草)를 권중경(權重經)에게 보낸 실상(實狀)을 저에게 들었다고 하나, 이봉징이 소(疏)를 얽어 만들때에 한 집안의 지친(至親) 또한 미리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을 입이 있는 자는 모두 말하여 전하는 말이 낭자(狼藉)하니, 제가 범연(泛然)하게 서로 아는 사이로서 어디에서 그런 소식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당초 들은 바가 없었다는 정상은 이봉징에게 묻는다면 즉시 밝혀질 수 있습니다. 또 권중경의 집이 제 삼촌의 집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비록 더러 상종(相從)한 때가 있었다 하나, 이봉징의 소를 처음부터 이미 듣지 못하여 그런 말을 본디 한 일이 없으며, 권중경 또한 말한 일이 없습니다. 그 사이의 사상(事狀)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은데, 제가 무엇 때문에 꿈에서도 듣지 못한 말을 만들어 내어 공공연하게 민언량에게 말하였겠습니까? 민언량이 다른 말을 만들어 내어 저를 끌어댄 것은, 그 뜻이 옥정(獄情)을 의혹시키고 어지럽혀서 잠깐이라도 목숨을 연장하려고 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그 꾀하는 바가 지극히 교묘하고도 참혹합니다. 묻어 놓았던 흉물(凶物)을 파내었다는 일은 더욱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제가 만약 여항(閭巷)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들었다면, 신자(臣子)로서 놀랍고도 두려운 마음에 이야기하는 사이에 말을 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만, 제가 병으로 궁항(窮巷)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전혀 들은 바가 없으며, 제가 듣지 못한 말을 또 어찌 민언량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 조항은 더욱 한 번 웃음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문목(問目) 안의 사연(辭緣)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하였다. 죄인 권중경이 다시 공초하기를,

"전교(傳敎) 안의 사연이 지극히 엄중하여 황공(惶恐)하고도 몹시 두려운 나머지 진달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평일의 몸가짐이 무상(無狀)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이같은 일로써 군부(君父)에게 의심을 받겠습니까? 저의 죄가 아닌 것이 없으니, 만 번 죽는다 해도 마음으로 달갑게 여겨야 하겠지만, 전교 안에, ‘갑술년595) 에 복위(復位)한 일을 그들이 이미 불쾌(不快)해 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국휼 뒤에 문득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교하셨으니, 이 한 조항은 가장 통박(痛迫)하여 가슴을 치고 마음을 두드려 죽고자 하여도 죽을 땅이 없습니다. 갑술년의 복위는 곧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거조로서, 온 나라의 삶을 누리는 자로서 기뻐하여 고무(鼓舞)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제가 비록 지극히 무상(無狀)하나, 병이(秉彛)596) 의 천성(天性)은 사람에게 본디 있는 것이니,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이와 같은 저의(底意)가 있었겠으며, 중전[坤馭]께서 승하하시어 상하(上下)가 슬퍼하며 허둥지둥하는 날에, 또 어찌 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원통함이 하늘 끝까지 사무치고, 하늘 끝까지 사무칩니다. 전교 안에, ‘국휼의 성복(成服) 전에 와서 곡반(哭班)에 참여하면서, 이미 승위(陞位)를 상소하여 청하려는 의논이 있었다.’고 하교하셨는데, 제가 비록 초토(草土)597) 에 있을망정 분의(分義)가 있는 바 감히 궐하(闕下)에 달려가 곡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쇠약하고도 피곤한 최질(衰絰)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스스로 보통 사람과 똑같이 하지 못하고, 매양 여러 사람의 맨 뒷줄의 뒤에 엎드려 있다가 해가 저물면 곧장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종적(蹤迹)이 편하지 않아서 일찍이 다른 사람의 의막(依幕)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제가 제배(儕輩)는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으니, 설령 제가 무상하여 이 같은 사악(邪惡)한 마음을 가졌다 한들 누구와 서로 의논하였겠습니까? 이 또한 하늘 끝까지 원통함이 사무칩니다. 또 민언량이 말하기를, ‘오시복(吳始復) 등 세 사람이 이 의논을 하였다.’고 제가 그에게 말을 전하였다 하였는데, 오시복 등 세 사람에게 추문하면, 그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주장하였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민언량이 저를 구함(構陷)하고자 이와 같은 지극히 무상(無狀)한 말을 한 것입니다. 오시복 등 세 사람은 저보았다 나이와 지위가 서로 현격(懸隔)하여 명론(名論)이 저절로 구별되는데, 오시복 등이 비록 지극히 졸렬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기꺼이 저의 주장에 일임(一任)하여 그 지휘를 달게 받겠습니까? 사리로 헤아려도 전혀 근사하지가 않습니다. 또 저와 오시복은 갑술년 이후로 각각 물러나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서 한 번도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가, 지난해 겨울 사이에 비로소 와서 조문(弔問)하였으나, 제가 때마침 어린 자식의 두환(痘患)598) 으로 다른 곳에 피하였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도록 서로 만나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목임일(睦林一)은 올 여름 사이에 숙부(叔父) 권규(權珪)가 자부(子婦)의 상(喪)을 당하였을 때에 잠시 와서 위문하였으며, 그 뒤에는 서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심단(沈檀)은 연인(連姻)인 까닭에 때로 혹시 찾아왔으나, 국휼 뒤에는 그 집을 수리하는 일 때문에 오래도록 와서 보지 않다가, 9월 20일 뒤에 비로소 한 번 와서 보았습니다. 국휼 뒤에 민언량과 서로 만나기 전 십수 일 동안 세 사람의 얼굴을 한 번도 서로 만나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 사람을 보지 못하고서 그 의논을 주장할 리가 있겠습니까? 민언량의 이 말은 오로지 저를 구함(構陷)하여 화(禍)를 옮기는 계제로 삼고자 함이니, 그의 간특 음흉함이 이보았다도 심한 것은 없습니다. 주장하였는지의 여부는 오시복 등 세 사람을 아울러 추문한다면, 역시 그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교 안에, ‘이봉징의 소를 예(禮)에 없는 말이라고 한 것은 때에 따라 갑자기 만들어낸 것이다.’ 하셨는데, 대개 이봉징이 죄를 받은 것입니다. 이봉징에게 후한 자는 비록 그 정죄(情罪)가 반드시 합당하였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나, 예에 없는 말이라는 데에 이르러서는 피차의 친소(親疎)를 논할 것 없이 말이 한결같을 것이므로, 비록 굽혀서 이봉징을 위하는 자라 하더라도 감히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제가 때에 따라 갑자기 말을 만들어내어 죄를 면할 계책을 삼은 것이겠습니까? 이봉징의 소가 처음 나왔을 때에 저는 개연(慨然)함을 금하지 못하여, 무릇 친구를 대하면 문득 배척하는 말을 꺼내어 소마(疏魔)라고 비방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봉징은 제가 배척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불평(不平)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소마란 말 또한 간혹 들었을 것이니, 이봉징에게 이것으로써 추문한다면 저의 본정(本情)을 밝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교 안에, ‘〈권중경이〉 계제(階梯)가 되었으니, 이제 만약 추문한다면 마땅히 차례로 끌어댈 것이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이 같은 의논을 저는 전혀 들은 바 없고, 민언량에게도 한 마디 언급한 일이 없으나 민언량이 까닭 없이 말을 지어내어 오로지 저를 불측(不測)한 처지로 몰아넣고자 합니다. 제가 비록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미 계제가 된 일이 없는데, 어찌 끌어댈 사람이 있겠습니까? 민언량이 말하기를, ‘오시복 등 세 사람의 이 의논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오시복 등 세 사람을 우선 추문(推問)하소서. 제가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계제가 된 일이 있었다면 살육[菹醢]의 형벌도 달게 여기겠습니다. 전교 안의 사의(辭意)에 누누이 항거(抗拒)하는 것이 지극히 황공(惶恐)한 줄 알지만, 저에게는 모두 지극히 원통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곡진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민언량의 초사(招辭) 안에, ‘제배(儕輩)가 모두 마땅히 복위를 청하는 소를 올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하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그의 들은 바 저절로 그 사람이 있을 것인데, 면질(面質)할 때에 무엇 때문에 다만 저에게 들었다고 말한 것입니까? 이것이 그의 간계(奸計)가 크게 파탄(破綻)된 부분입니다. 전혀 들은 바가 없으니, 민언량의 이른바, ‘제배들이 모두 마땅히 소를 올려야 한다.’고 말한 것을 그로 하여금 일일이 드러내어 고하게 한다면, 제가 들은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한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도일(吳道一)의 일은 제가 처음 공초한 속에서 이미 진달하였습니다마는, 설령 오도일이 이같은 형적 없는 말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오시복의 무리 또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닌데, 기꺼이 오도일에게 교유(敎誘)받아 이런 소를 하였겠습니까? 이와 같이 근거 없는 말은 장황하게 변명할 것도 못됩니다. 복제(服制)에 대해 수작했다는 일에 이르러서는 처음의 공초 가운데에서 이미 진달하였습니다만, 그가 말한, ‘물을 만한 곳이 있거든, 그대는 모름지기 물어서 알아야 한다.’는 것과, ‘복제의 경중(輕重)으로써 성상께서 희빈을 대우하시는 것이 어떠한지를 알아서 진소(陳疏)하고자 한다.’고 한 것은, 모두 민언량이 스스로 자기의 뜻을 가지고 까닭 없이 말을 만들어 내어 저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니, 이는 알기 어렵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이때 이봉징의 소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봉징의 소가 이미 나와서 비방과 원망이 세상에 넘치고 죄명(罪名)이 낭자하였으니, 이때 희빈이 복을 입고 입지 않는 데 대하여 무슨 물을 만한 일이 있으며, 성상께서 희빈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대해 또 어찌 탐문할 만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봉징의 소를 오히려 배척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는데, 또 어찌 진소할 뜻을 가졌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근거 없는 말입니다. 민언량에게 또 한가지 크게 어긋난 단서가 있었으니, 한 마디로 그 간사한 정상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옥에 갇힌 뒤에 있는 옥에서 죄수의 공초를 받는 곳과 멀지 않기 때문에, 민언량 조시경(趙時炅)·조시화(趙時華) 등이 면질(面質)할 때의 이야기와, 민언량이 여러 차례 거듭 공초할 때 전교 안의 사연(辭緣)을 높은 소리로 힐문할 즈음에 바람결을 인하여 들을 수 있었는데, 민언량이 복제의 일을 조시경에게 탐문한 것은 국휼의 성복 뒤 오래 되지 않은 시기에 있었던 듯하고, 민언량이 와서 저를 본 것은 9월 초승에 있었으니, 민언량이 어찌 제가 탐지하고자 함을 알아서 먼저 조시경에게 탐문하였겠습니까? 시일이 어긋나서 간계(奸計)가 모두 드러났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 없는 말로써 저를 구함(構陷)하고자 하였으나, 그 스스로 간모(奸謀)를 조작하여 도리어 사악(邪惡)한 죄과(罪科)로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拙劣)하게 된다.’는 말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또 민언량이 와서 볼 때에 이징(李徵)도 왔었는데, 예관(禮官)의 대거소(對擧疏)의 말에 대해 수작한 바는 있으나, 포복 절도(抱腹絶倒)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제가 듣지 못한 바입니다. 예관의 대거소와 이봉징을 삭탈(削奪)하자는 계청(啓請)이 한때의 일인 듯하나, 제가 정신이 당황하고 혼미해서 앞뒤의 일을 잊어버린데다가, 갇힌 지 여러 날이 되어 더욱 몽롱하여 몇 달 전에 범연히 들어 알았던 일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 공초 때에 민언량과 서로 만난 날짜를 초2일·3일로 나누어 드러내어 고하였습니다. 이제 이 문옥(問目) 안의 이틀은 곧 이봉징이 삭탈되기 전이며, 민언량이 와서 만난 것은 분명히 이봉징이 죄를 받은 뒤인데, 제가 이제 혼매(昏昧)함이 더욱 심해져서 날짜를 확실하게 기억할 수는 없으나, 초3일이 아니면 초4일로서 며칠 사이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때 이봉징이 죄를 받은 것은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또 민언량의 이른바, ‘평소에도 논의를 주장하여 무릇 논의가 있으면 참섭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말과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실지로 주장하였다.’는 말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이 비록 극히 번거롭고 잗단 일이나, 마땅히 자세하게 진달하겠습니다. 민언량의 사람됨이 본래 요악(妖惡)하고 일을 행함이 무상(無狀)하기 때문에, 제배(儕輩) 중에 본디 친한 사람이 없었으며, 근래에는 더욱 버림받아서 항상 불평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이제 그가 이끌어댄 4, 5인이 모두 평일에 서로 뜻이 맞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저에 이르러서는 수십 년 전에 청론(淸論)과 탁론(濁論)599) 으로 갈라진 후부터, 권대운(權大運) 민암(閔黯)이 서로 화목하지 않다는 말이 세상에 크게 전파되었음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 기사년 이후로는 함께 나라 일을 구하고자 하여 특별히 서로 손을 잡았으나, 숙혐(宿嫌)을 끝내 씻지 못하였습니다. 또 제가 민언량과 동시에 등제(登第)하여 함께 영달의 길게 들어갔는데, 민언량은 스스로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집안의 자제(子弟)로서 명위(名位)와 성망(聲望)이 다른 사람에 앞선다고 자부하였지만, 저와 같은 무리는 마땅히 머리 숙여 뛰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어긋나 명성과 지위가 도리어 저에게 뒤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지극히 잔약(孱弱)하고 용렬할망정 그에게 붙좇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분노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비웃고 헐뜯는 말이 한두 가지 사단(事端)이 아니었으니, 이른바 논의를 주장하고 일을 주장(主長)했다는 말이 이에서 나왔습니다. 더욱이 지금의 간계(奸計)는 오로지 터무니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반드시 저를 사지(死地)에 두려는 것이니, 그가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까? 제가 본래 용렬하여 남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또 일찍이 조정에 섰던 날에 매양 재상 집안의 자제(子弟)인 까닭에, 더욱 단속하고 피하면서 크고 작은 논의에 일찍이 한 번도 참섭한 적이 없었는데, 하물며 지금 죄인으로서 물러나 엎드려 있는 중에 무슨 주장할 만한 논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상중(喪中)의 몸으로 더욱 어찌 감히 논의하는 사이에 참섭하였겠습니까? 제가 본정(本情)을 처음의 초사에서 대략 진술하였습니다만, 금번 이 민언량의 말은 결단코 근거가 없습니다. 민언량이 만들어낸 허다(許多)한 말은 까닭 없이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낸 것으로서, 오로지 저에게 화(禍)를 옮기고 그 속에서 스스로 벗어나 보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초에 저는 창황(蒼黃)하게 국청으로 나아가 전혀 깨닫지 못하고 허둥지둥 공초를 바치고 물러났습니다. 이미 물러난 뒤에 조시경이 두 번째 공초할 때에 바람결에 전교 안의 사연(辭緣)을 들으니, 민언량이 복제를 탐문한 일을 승복(承服)한 것으로 하교하셨으므로, 제가 비로소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민언량이 승복한 뒤에 일을 귀결(歸結)시킬 곳이 없자, 상소(上疏)하는 일로써 화(禍)를 저에게 옮기려고 한 정상이 마치 폐간(肺肝)을 보는 듯하여, 면질(面質)할 때에 그 간악한 정상을 낱낱이 들엇 배척하였는데, 민언량은 말이 궁하고 뜻이 다하여서 기운이 꺾여서 한 마디의 발명(發明)도 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국청(鞫廳)의 상하(上下)가 모두 목도(目覩)한 바입니다. 면질하여 변명할 즈음에 마치 싸우는 것 같음이 있어서, 이치에 맞는 말이 매양 그의 입을 막았습니다. 민언량이 이에 화(禍)를 옮기려던 계책이 이루어지지 않자 분노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더욱 급해져서, 묵은 원한과 새로운 유감(遺憾)이 일시에 모여들게 되니, 여러 차례 거듭 공초할 때에 오로지 자기의 의사만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발설하여, 1절(節)에 1절을 더하고 한마디에 한마디를 심화하여 모두 제가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창졸간에 꾸며낸 말은 자연히 파탄이 많게 마련이므로, 수미(首尾)가 모순되어 수각(手脚)을 가리우기 어려워서 간특하고 흉악한 정상이 저절로 천일(天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저는 대단히 어긋난 단서를 모두 지적하여 진달하기를 청합니다. 민언량의 총명이 비록 남보았다 지나치다 하나, 석달전에 수작하던 때의 다른 사람의 말을 중형(重刑)으로 장차 죽게 된 즈음에 어찌 분명하게 기억해 내어 한 마디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이치가 반드시 없으니, 이것이 어긋난 단서의 첫 번째입니다. 만약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면, 처음 공초할 때에 어찌하여 모두 발설하지 않고 두 번째 공초할 때에 말이 처음 공초보았다 많았고, 면질할 때에는 또 다른 말을 많이 하여 때에 따라 더하고 덜하기를 한결같이 그 뜻대로 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겠습니까? 이것이 그 어긋난 단서의 두 번째입니다. 오시복 등 세 사람이 이 의논을 하였다면, 이는 제배 사이의 큰 의논으로서, 노소(老少)의 제배로서 마땅히 알지 못하는 이가 없어야 하는데, 어찌 그가 듣지 못한 것을 제가 혼자 들을 이치가 있다고 반드시 처음에 저에게 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그 어긋난 단서의 세 번째입니다. 이미 그가 듣지 못했던 것을 오로지 저에게 들었다고 말하였다면, 또 무엇 때문에 그 말을 바꾸어, 제배가 모두 마땅히 복위를 청하는 소를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그 어긋난 단서의 네 번째입니다. 복제의 일을 제가 그로 하여금 탐문케 하였다고 하는데, 민언량 조시경에게 복제를 탐문하게 한 것이 저를 보러 오기 전에 있었으니, 어떻게 저의 뜻을 미리 헤아려 알아서 먼저 탐문하게 하였겠습니까? 교묘하게 꾸민 정상이 불을 보듯 분명하니, 이것이 그 어긋난 단서의 다섯 번째입니다. 이 밖에도 어긋난 단서가 반드시 많을 것이나, 민언량의 여러 차례의 초사를 제가 볼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 들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다섯 가지 조목의 어긋난 단서를 보더라도, 민언량이 까닭 없이 말을 만들어 내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터무니 없는 말을 한 정상이 마치 폐간(肺肝)을 보는 듯합니다. 다만 문서가 없고 증거가 없기 때문에, 거침없이 늘어놓는 입담으로 억지로 이겨서 사람을 불측(不測)한 지경에 빠뜨리고자 하였으나, 스스로 그 어의(語意)가 이치에 어긋나서 정상이 모두 드러남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세상 천하에 어찌 이처럼 지극히 무상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수(死囚)의 원한을 갚으려는 말이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니, 이느 진실로 깊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되지만, 다만 민언량의 터무니없이 지어낸 말로 천하를 생성시키는 성상께 의심을 받고,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받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이것이 한없이 지극한 통한(痛恨)이 되어, 곧 속히 죽고자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시복·심단·이봉징·목임일 등 네 사람을 나래(拿來)하여 캐어 묻는다면, 이 일의 허실(虛實)을 즉시 분변(分辨)할 수 있습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니,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근사(近似)한 일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사람마다 스스로 은휘(隱諱)하겠습니까? 설사 은휘하고자 하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캐어 물을 즈음에 어찌 드러나는 일이 없겠습니까? 만약 그때 제가 털끝만큼이라도 참섭한 일이 있었다면, 다시 저를 국문할 것 없이 곧장 극률(極律)을 시행해도 또한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전교 안의 사연은 절대 애매합니다."

하였다. 죄인 김태윤(金泰潤)을 한 차례 형문하여 신장(訊杖) 30도를 쳤으나, 전초(前招)에서 가감이 없었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김태윤은 탑전(榻前)의 하교대로 형추(刑推)하여 구문(究問)하였으나, 형장(刑杖)을 견디면서 불복하니, 청컨대, 더 형문(刑問)하게 하소서. 죄인 성임(成任)의 공초한 바가 민언량의 초사와 서로 어긋나지만, 또한 권중경을 구핵(究覈)하는 일에 긴밀하게 관계되니, 청컨대, 한 군데에서 면질시키게 하소서. 죄인 권중경은 전교의 사연으로써 문목(問目)을 만들어서 다시 추문하였는데, 그의 발명(發明)한 말이 장황할 뿐만 아니라 별달리 명백하게 증빙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이른바 민언량의 어긋난 단서 다섯 가지도 혹은 이미 물은 것도 있고, 혹은 어긋난 단서로 생각하기에 부족한 것도 있었으며, 또 그가 이끌어댄 오시복 등 네 사람도 추문하면 그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나, 이것 또한 공증(公證)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소의(疏議)를 전연 들은 바가 없다고 말한 데 이르러서는 가려서 숨기는 자취를 면하기 어려우니, 형추하기를 청합니다. 죄인 순복(順福)은 탑전에서 정탈(定奪)한 대로 방송(放送)하기를 청합니다. 죄인 민언량은 의계(議啓)를 고쳐 들이고, 또한 탑전에서 정탈한 대로 사세를 보아 결안(結案)하여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추국(推鞫)을 우선 정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2월 1일 계축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국청 죄인 오시복을 안율하여 처단하라고 헌납 윤홍리가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이인병(李寅炳)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삼았다. 헌납(獻納) 윤홍리(尹弘离)가, ‘죄인(罪人) 이수장(李壽長)·정이(貞伊) 등은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고, 죄인 목내선(睦來善)·이현일(李玄逸)은 극변(極邊)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고, 죄인 김태윤(金泰潤)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는 일로써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오시복(吳始復)을 위리 안치하라는 명이 있으셨으나, 신은 그윽이 의아스럽게 여깁니다. 그 죄가 매우 중한데도 율(律)이 너무 가볍습니다. 오시복이 일찍이 국상(國喪)을 당한 벽두에 복제(服制)를 탐문(探問)했다는 설(說)이 비단 여러 죄인의 공초(供招)에서 긴요하게 나왔을 뿐 아니라, 그의 공초 가운데서도 스스로 가리울 수가 없어서 이에 ‘다시 와서 회보(回報)하라.’는 등의 말로 공초를 바쳤으니, 주무(綢繆)했던 정적(情迹)이 소연하게 드러나 진실로 이미 진흙 속에서 다투는 짐승과 같았습니다. 아! 상하(上下)가 비통하고 창황해 하는 즈음에 오시복이 반드시 먼저 부당한 물음으로써 묻고 왕복(往復)하며 정탐(偵探)한 것은, 그 뜻이 복제를 알려는 데 그치지 않았으며, 그 국가의 불행(不幸)을 다행스럽게 여겨 기회를 타고 넘겨다보지 못할 것을 엿보고 감히 도모하지 못할 일을 몰래 도모한 것이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권중경(權重經)은 비록 민언량(閔彦良)의 공초에서 여러 번 나오기는 했지만,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복위(復位)를 위해 소(疏) 올리기를〉 주장(主張)한 흔적은 명백한 단서가 있지 않으며, 더구나 그 최마(衰麻)660) 가 몸에 있고, 또 소(疏)에 참여한 사람도 아닌데도 오히려 형신(刑訊)을 중하게 받고 안치(安置)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오시복은 궁금(宮禁)을 몰래 정탐하고 시종(始終) 주모(主謀)한 수악(首惡)이니, 결코 천극(栫棘)하는 데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죄인 오시복을 안율(按律)하여 처단(處斷)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允許)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3월 17일 무술 2번째기사 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정사에 대해 상소한 아산의 유학 임창을 정배시키게 하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지난 정월 그믐날 아산(牙山)의 유학(幼學) 임창(任敞)이 와서 한장의 소(疏)를 올렸는데, 다만 어의(語意)가 괴이하고 망령될 뿐만 아니라, 그때에 마침 국기(國忌)를 만나 재계(齋戒)하는 중이어서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뒤에 어제와 오늘 연달아 전일의 소를 가지고 와서 바치는데, 전날 이 소를 돌려준 후에 외간의 의혹(疑惑)이 너무 심하여 근거 없는 소문이 그지 없으므로 부득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내주라고 특명(特命)하였다. 그 소(疏)에 이르기를,

"삼가 신(臣)이 오늘날 국모(國母)의 상(喪)에 남보다 배나 슬프게 우는 것은 대개 신이 기사년077) 그날 대궐을 지키면서 울부짖으며 성모(聖母)께서 눈물을 흘리고 분축(奔逐)하던 정상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신자(臣子)의 창황하여 어쩔 줄 모르던 정성이 어찌 자식이 자모(慈母)를 향하는 정경과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행하게도 성명(聖明)께서 통찰하시고 깨달으시어 곤의(坤儀)가 다시 바루어지니, 부유 하천(婦孺下賤)078) 이 모두 기뻐하여 마치 젖을 잃은 어린애가 다시 어미를 본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한 번 난 병이 지리하게도 2년동안 끌다가 끝내 증세를 잡지 못하여 마침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까? 불행하게도 지금은 저주(咀呪)하는 변이 드러나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이 낭자하고, 극도로 흉악한 무리가 서로 이어 죄상을 자백하였으니, 아! 참혹합니다. 우리 국모께서 오늘날 돌아가신 것은 하늘이 시켜서가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무릇 오늘날 국모를 섬기던 신하는 마땅히 절치 부심(切齒腐心)하여 반드시 보복을 하고 난 후에야 그만두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말하는 자들은 ‘이는 왕세자(王世子)를 낳은 처지이니, 국모를 위해서 복수를 해서는 안된다.’라고 합니다. 《맹자(孟子)》에 ‘순(舜)이 천자(天子)가 되고 고수(瞽瞍)079) 가 살인(殺人)을 하면 고요(皐陶)080)  법을 준수(遵守)할 것이다.’081)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수는 바로 천자의 아버지이고 죽은 사람은 필부(匹夫)인데도 고요가 오히려 법을 준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희빈(禧嬪)이 중궁(中宮)을 죽였으니, 그 죄범(罪犯)이 고수가 사람을 죽인 것에 비하여 어떻다고 하시겠습니까? 신이 삼가 《논어(論語)》를 살펴보건대, 진항(陳恒)이 그의 임금을 시해(弑害)하니, 공자(孔子)가 목욕을 한 다음 토벌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진항은 제(齊)나라의 대부(大夫)이고 임금도 제나라의 임금입니다. 공자는 이웃 나라의 치사(致仕)082) 한 사람으로서 반드시 목욕까지 한 것은,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인륜(人倫)의 큰 변고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신하로서 국모께서 시해당한 것을 보는 것이 그 완급(緩急)에 있어 공자에 비하여 어떻겠습니까? 아! 중궁이 정모(正母)가 되고 희빈은 사친(私親)이 되는데, 이런 망극한 변을 만났으니, 더욱 망극한 일이 있는 것은 유독 우리 세자의 정세가 참연(慘然)083) 한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하셔야 할 도리는 마땅히 그 죄를 죄주고 그 법을 법대로 하여, 십분 위유(慰諭)해서 왕세자의 망극한 정세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오늘날 신하가 해야 할 도리는 역시 성교(聖敎)를 받들어 토복(討復)하는 대의(大義)를 펴고, 이어서 세자를 위안하는 설(說)로 지성껏 진계(陳戒)하면 군신(君臣) 상하가 각기 마땅함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그렇지 않고서 반드시 희빈을 다스리지 않은 연후에 세자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자의 마음이 정모가 시해당한 데는 무심하고, 사친만 치우치게 두둔하는 것처럼 되니, 그 자취는 비록 세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듯하지마는, 사실은 세자를 옳지 못한 처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면치 못합니다. 다만 다행히 성상께서 의리를 분명히 하고 처분하시는 결단이 마침내 그 죄를 죄주고 그 일을 일삼으셨으니, 신은 이에서 감격함을 견디지 못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또 신은 국모께서 시해당한 것을 따져 보니 그 원망을 전하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는데,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닙니까? 아! 기사년084) 부터 병자년085) 까지, 병자년에서 오늘까지의 전후 화근(禍根)이 모두 한 꿰미처럼 꿰어져 왔지만 요(要)는 일시의 전국(專局)에서 국가의 불행을 다행으로 여긴 사람은 결코 사군자(士君子)의 심사를 지닌 사람이 아닐 것인데, 어찌 전하께서는 깊이 믿으시고 오로지 맡기셨습니까? 이것이 기사년의 화086) 가 일어난 까닭입니다. 병자년의 변087) 에 이르러서는 ‘장원려(長遠慮)’라 이르면서 반드시 엄호하려고 한 자는 대신인데, 대신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미 기사년에 그 모의에 부응하였고, 또 병자년에 그 죄를 엄호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간사한 모의와 흉측한 계책이 조금도 징계되지 않아, 필경에는 성상의 원비(元妃)에게 천수(天壽)를 보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옛사람이 이른바, ‘내가 비록 죽이지는 않았으나 나 때문에 죽었다.’라고 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오늘날 일에 어찌 이런 마음이 없으십니까? 신은 전하께서 빈전(殯殿)에 고한 글에서 지성으로 감회(感悔)한 성심(聖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 인산(因山)088) 이 이미 지났고 세사(歲事)가 또 지났으나, 고묘(告廟)하고 반시(頒示)하는 거조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희빈이 중궁을 시해한 것이 어떤 큰 변고이며, 전하께서 희빈을 죽인 것이 어떤 대의(大義)인데, 조종(祖宗)에 고하고, 백성들에게 반시하지 않으십니까? 이는 고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입니다. 비록 여항(閭巷) 사이에서 서로 살해하는 변고가 있더라도 안옥(獄按)의 신하가 감히 스스로 전일하게 하지 못하고 반드시 위에 알리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죄가 중하고 죽은 자를 대신하는 법이 엄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오늘날 국모가 시해당한 것이 도리어 필부가 살해당한 것만 못하여, 그 일을 크게 여기고 그 법을 중히 여기지 않습니까? 하늘에 계시는 원비의 영령에게 끝내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원한을 풀어 드리지 않으면, 이것이 어찌 전하의 도리로 보아 차마 할 일이며, 어떻게 그 지성으로 감회하는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고하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입니다. 기사년의 출척(黜陟) 때에는 전하께서 이미 고하였는데, 오늘날의 큰 변고에 고하지 않는다면 사리의 전도(顚倒)가 어떻겠습니까? 갑술년(甲戌年)의 승강(陞降)089) 때에도 전하께서 이미 고하였는데, 오늘날의 대의를 고하지 않는다면 의리의 경중이 어떻겠습니까? 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의 세 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인심의 함닉(陷溺)이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으니, 고시(蠱弑)의 대변(大變)을 더욱 밝히지 않을 수 없고, 토복(討復)하는 대의를 더욱 밝히지 않을 수 없으니, 고하지 않을 수 없는 네 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저주(咀呪)하는 변고는 변고가 어둡기 때문에 먼 곳일수록 듣는 자들이 더욱 진실을 모르게 되고, 세월이 오래되면 될수록 의심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 거짓을 믿게 됩니다. 현재에도 영남(嶺南) 유생(儒生) 유항(柳沆)이란 자가 잘못 듣고는 심지어 의심까지 했으며, 의심이 심해서 소(疏)까지 올렸으니, 신은 팔도(八道)안에서 잘못 들은 자가 무릇 몇 사람이며, 매우 의심하는 자는 또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몇 달 사이에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몇년 뒤이겠습니까? 유항과 같은 무리가 잇따라 일어나서 말하기를, ‘고시(蠱弑)의 변고가 과연 그처럼 뚜렷하게 드러났다면, 어찌 그 당시에 그 변고를 밝히어 종묘(宗廟)에 고하지 않았으며, 토복(討復)하는 의(義)가 과연 그처럼 정대(正大)했다면 어찌 그 당시에 그 뜻을 밝혀 백성들에게 반시(頒示)하지 않았겠는가?’ 한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무슨 말씀으로 그 말을 꺾겠습니까? 신(臣)은 일후에 무궁한 화가 매양 여기에 기인하여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것이 고하지 않을 수 없는 다섯 가지입니다. 무릇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그 사람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이유로써 그 말까지 버려서는 안되고, 시기가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써 그 말까지 버려서는 안되고, 시기가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써 그 일까지 폐기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약 케케묵은 선비의 말이라 하여 쓸모가 없다 하시고, 지난 후의 일이라 하여 행할 수가 없다고 여기시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비록 미천(微賤)하더라도 그 말은 쓰지 않을 수가 없다면 반드시 써야 하고, 그 시기가 비록 늦었더라도 그 일은 행하지 않을 수가 없으면 반드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방에서 바라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미심쩍은 것이 확 풀리게 될 것이니, 어찌 국시(國是)를 바르게 하고, 인심을 깨우치는 데에 하나의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고하지 않을 수 없는 여섯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고묘(告廟)하는 것이 의리(義理)로 헤아려 보더라도 어찌 고하지 않을 의리가 있겠으며, 이해(利害)로 헤아려 보더라도 어찌 고하지 않을 이해가 있겠습니까? 다만 고묘(告廟)한 후에는 으레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는 일이 있는 것인데, 이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시(蠱弑)의 변고에 국모를 잃었고, 토복(討復)의 의리에 따라 희빈을 죽인 것이 모두 국가의 불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군신 상하가 경행(慶幸)으로 여기겠습니까? 더구나 진하하는 한 절목은 세자에게는 역시 난처한 단서인데, 어찌 잗단 예절로 저군(儲君)090) 을 난처하게 하겠습니까? 진하가 없으면 반사(頒赦)도 없는 것은 이치가 본디 그러하니, 어찌 모두 일에 따라 변통하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재량(裁量)하여 처리하소서. 신은 대대로 녹(祿)을 받은 집 후손으로서 국모의 전후 변고를 보고 지성(至誠)으로 감개(感慨)하여, 박태보(朴泰輔)와 그날에 함께 죽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민망하게 말없이 물러나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국시는 밝히지 않을 수가 없으며, 오늘의 인심은 깨우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어찌 한 사람도 말하는 이가 없습니까? 아! 예로부터 국가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난 기사년에는 박태보가 있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신이 한 번, 두 번, 세 번에 이르도록 〈상소하기를〉 스스로 그만둘 줄을 모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비록 만 번 죽더라도 감히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이 말은 온 세상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데도 신히 홀로 말하니, 신을 아끼는 이들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고, 신을 배척하는 자들은 미쳤다고 말하는데, 신은 전하께서 아끼시어 어리석다고 말씀하실 것인지, 아니면 배척하여 미쳤다고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오늘날의 인심이 헤아리기 어려운 화(禍)가 조석(朝夕) 사이로 임박한 듯하여 두렵기 짝이 없는데, 온 세상이 한갓 제 몸 보전할 계책만 품고 있을 뿐이며, 누구 한 사람도 국모를 위해 직언(直言)·정론(正論)하는 자가 없습니다. 신이 그래서 어리석은 듯, 미친 듯 마지못해서 하는 일을 해서 금일과 이후의 제 책임을 메우는 것입니다. 이 말을 쓰고 안 쓰고는 전하께 달려 있으니, 신이 어찌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한 달 후에 검토관(檢討官) 이탄(李坦)이 강연(講筵)에서 진달하기를,

"작년에 성상께서 대처분(大處分)을 하신 것은 법을 집행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며,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법 굽히기를 청한 것은 대개 춘궁(春宮)이 혹은 상심(傷心)하여 손기(損氣)되지 않을까 하는 지나친 우려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지금은 국법이 이미 행해졌고, 신민들이 일찍이 우려하던 것도 다행히 진정되었으니, 다시는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임창(任敞)이란 자가 한 장의 괴이한 소를 한 번 두 번 올려서 위에까지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그 소를 본다면 전하의 처분을 미진하게 여겨, 마치 이밖에 전법(典法)을 또 시행할 것이 있는 것처럼 하여, 거칠고 난잡한 말을 하면서 전혀 돌보아 아끼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가 임금의 마음을 탐시(探試)하고 인심을 의혹시킨 형상이 몹시 한탄스럽습니다. 그 소(疏)를 성상께서 즉시 돌려주게 하셨으니, 신은 진실로 성상의 뜻이, 매우 미워하여 엄격히 물리친 것을 알고 있사오나,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그 사람을 죄주어 이후의 난잡하게 말하는 폐단을 막아서 괴귀(怪鬼)의 무리로 하여금 멋대로 인심을 혼란하게 하는 계책을 막아야 합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이관명(李觀命)은 아뢰기를,

"임창의 소는 매우 괴망(怪妄)합니다. 만약 국체(國體)에 크게 관계되는 것을 조정에서 미처 행하지 못하였다면, 비록 하찮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혹 상소하여 진달할 수가 있으나, 이는 처분이 이미 정해진 후에 하찮은 일개 유생이 감히 거칠고 난잡한 말로 제멋대로 논열(論列)하기를 조금도 돌보아 아끼지 않아서, 마치 전하의 처분이 미진한 바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죄를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장령(掌令) 이덕영(李德英)은 아뢰기를,

"신은 직책이 언책(言責)091) 에 있으면서 미처 앙달(仰達)하지 못하였다가, 조정의 처분이 이미 정해진 후에 어찌 감히 번번이 제기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요망스런 소는 통렬히 징계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신(儒臣)이 진달한 바가 참으로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이 이미 정해졌는데, 거칠고 난잡한 말로 이처럼 상소한 것이 매우 괴망(怪妄)하였으니, 유신(儒臣)의 진달이 옳다.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승지 이민영(李敏英)이 아뢰기를,

"궁차(宮差)092) 윤성우(尹聖遇)가 먼 지방에서 폐단을 일으킨 형상은 애초 최달천(崔達天)의 소(疏)에서 나와 바야흐로 추문(推問)하고 있으니, 마땅히 본도(本道)로 하여금 실상(實狀)을 조사케 하여야 하는데, 그가 스스로 변명한 말로써 갑자기 방송(放送)하라는 분부가 있으시니, 먼 고장 백성들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궁차가 일으킨 폐단을 금지시키려고 하지 않는게 아니라, 다만 이 일은 조신(朝臣)의 소로 진달한 것과는 다름이 있는데도 도리어 토민(土民)의 상소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습성이 통탄스럽다."

하였다. 이민영이 거듭 말했으나, 임금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6월 11일 신유 2번째기사 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예조에서 장씨의 분묘 단장하는 일에 대해 아뢰다

예조에서 청하기를,

"장씨(張氏)217) 의 분묘(墳墓) 용호(龍虎)218) 안의 정계(定界)는 종친(宗親) 1품으로 예장(禮葬)한 후에 4면(面)을 각각 1백 보(步)를 한정하여 경작과 목축을 금지하는 예(例)로 하고, 1백 보 안에 고총(古塚)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속히 파 옮기고 집은 헐어내며, 논밭도 또한 묵히게 하되, 집과 논밭은 모두 해조(該曹)로 하여금 값을 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숙종실록 37권, 숙종 28년 윤6월 27일 정미 3번째기사 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지평 김재가 춘궁을 보양하는 일 등에 관해 상소하다

지평(持平) 김재(金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경석(經席)에서 진강(進講)하는 법규를 보건대, 전후로 수업(授業)한 바를 한 번 읽어버리고 다만 간단하게 몇 마디 말로 대략 문의(文義)를 아뢴 뒤에는, 성상께서 다시 어려운 곳을 묻거나 검토하는 일이 없습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제부터 연석(筵席)에 임하시어 강학(講學)하실 즈음에 말이 적은 것을 고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간혹 의문나는 뜻이 있으면 일일이 헤아려 생각하시며, 정사(政事)의 득실(得失)과 민정(民情)의 휴척(休戚)275) 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질문하여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하소서. 삼가 오늘날 전하(殿下)께서 춘궁(春宮)을 보양(輔養)하는 도리를 보건대, 매우 소홀하고 간략합니다.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을 접견하고 조호(調護)하는 때가 매우 적고, 동궁(東宮)의 요속(僚屬)들이 날마다 차례로 진강(進講)하는 것에 이르기까지도 폐지하는 때가 많습니다. 현재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학덕(學德)이 높은 선비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서 보도(輔導)의 직임을 감당할 만한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좌우(左右)에 불러들여서 밤낮으로 함께 거처하게 하고,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의 관원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그 적임자를 선택하여 그 임무를 오랫동안 맡겨서, 보도(輔導)의 직임에 전념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의 올바름은 전대(前代)에 비교할 수 없으며, 전하께서 조선이 남긴 공적을 계승하여 내치(內治)를 엄하게 한 것은 지극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일에 명분(名分)이 거꾸로 된 변고가 있었고, 다시 요사스러운 무리가 못된 죄로 농락한 재앙이 있었으며, 끝내는 무고(巫蠱)의 옥(獄)276)  홍수(紅袖)277) 에게서 일어나 매흉(埋凶)278) 이 대내(大內)에 미쳤으니, 가법(家法)의 올바름에 걱정이 된 것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다행히 이제 성상의 결단을 통쾌하게 내리시어 궁액(宮掖)이 정숙(整肅)해졌습니다만, 만약 병을 얻은 근본을 엄하게 살펴서 창자와 밥통을 깨끗이 씨어내지 않는다면, 속에 숨어 있는 고질(痼疾)이 훗날 다시 싹트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근래에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하여 내총(內寵)279) 이 너무 많은 것을 거리에서 몰래 말하고, 궁가(宮家)의 절수(折受)가 사방으로 많은 땅을 널리 차지하고 있으며, 왕자(王子)의 집이 너무 사치한 것을 조정의 신하들이 들추어 논하고 있으니, 신은 전하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공(功)이 문왕(文王)의 성덕(聖德)에 부족함이 있으며, 이남(二南)280) 의 교화(敎化)를 끝내 이룰 수 있게 될 때가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수십 년 동안에 신의를 지킴이 확고하지 않고, 국면(局面)이 여려 차례 바뀌어, 나라의 일을 맡아 보는 자는 보복을 일삼고, 물리침을 당한 자는 뚫고 나아가기에 힘써서, 혹은 배후의 인물에게 반부(攀附)281) 하기도 하고 혹은 간사한 사람과 결탁하기도 하며, 뇌물이 안팎으로 통하고 위험한 말이 듣는 자들을 현혹시키며 번복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피차(彼此)가 서로 습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또 그대로 따르고 측근의 신하들은 조장하거나 억누르기만 하여, 높이고 권장할 때에는 그 사람이 현명한가 현명하지 않은가는 논하지도 않고 총애하여 발탁해서 일을 맡기기를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다가, 미워하여 냉대할 때에 이르러서는 죄(罪)가 있고 없고를 묻지도 않고서 유배(流配)시키거나 주살(誅殺)하기에 있는 힘을 다하고, 더러 음흉하고 간사한 무리가 있어 권세를 함부로 부리고 국가에 화(禍)를 떠넘겨도 금하지 않으며, 충성스럽고 곧으며 도덕(道德)이 있는 선비가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배척되어 죽어서 저승[泉壤]에서 원한을 품어도, 조금도 애석히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천도(天道)가 좋게 돌아와서 성심(聖心)이 깨달으시어, 억울함을 품은 자는 모두 누명을 씻고 죄가 있는 자는 모두 형벌을 받게 되었으니, 오래지 않아 회복된 성덕(聖德)에 영광이 있음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무너져버린 조정의 정치에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또한 이미 백골이 된 충혼(忠魂)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붕당(朋黨)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는 않는데도, 위에서 처분하시는 바가 바로 한쪽으로 기울어 반목(反目)하는 풍조를 조장하기 때문에, 붕당(朋黨)의 가운데 또 붕당이 생겨서 조급하게 서두르는 모양이 미친 듯하여,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직 동류(同類)를 비호하고 이류(異類)를 배척하기에만 힘써서, 국가의 안위(安危)와 백성의 휴척(休戚)은 서로 잊고 있으니, 이러한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또한 다행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허심 탄회하게 아주 공정하게 하시고, 근엄하게 지극히 올바르도록 하셔서, 조금이라도 치우치는 잘못이 없게 하신다면, 왕도(王道)가 서고 온갖 교화(敎化)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기사년의 일282) 을 아직도 차마 말하겠습니까? 여러 흉도(凶徒)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여러 사람의 참소(讒訴)가 서로 꾸며져서, 전하를 불의(不義)한 곳으로 인도하고 온 나라를 국모(國母)가 없는 지경에 빠뜨렸는데, 한 마디 말로써 윤리(倫理)를 밝히고 한 몸으로써 도의(道義)를 구할 수 있었던 자는, 오직 박태보(朴泰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갑술년 초기283) 에 전하께서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한 역적(逆賊)에 대해, 그 죄를 급속히 바로잡게 하는 뜻으로 특별히 밝은 교지(敎旨)를 내렸는데, 그때의 대신(大臣)이 대처(對處)한 의리는 도리어 자신의 이해(利害)를 위한 계책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병자년의 옥사(獄事)284) 는 마음씀이 더욱 심하여 청대(請對)285) 하는 일이 한밤중에 일어나고, 감격(感激)스러운 사죄(謝罪)가 마음속에서 나와 마침내 대악인(大惡人)으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고 큰 화(禍)가 하늘까지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옛날의 대신(大臣)은 간사한 싹이 드러나기도 전에 미리 꺾었는데, 지금의 대신은 역적(逆賊)이 이미 나타난 뒤에도 비호하고 있으니, 아! 또한 이상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저 유상운(柳尙運)을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남구만(南九萬)의 청렴한 명성과 곧은 절개는 또한 일찍이 조정의 고관(高官)들에게서 추앙되었으나, 세상의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꺾이고 박탈되어 거의 없어졌으니, 다만 한때에 구차하게 용납될 것만 알고 후세(後世)에 죄를 얻게 될 것은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그 기세가 떨치고 빛나서 온 세상이 바람처럼 쏠려 향하고 따르니, 혹은 ‘깊고 멀리 생각한다’하고 혹은 성실하여 다른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의 결단이 대단하여 병출(屛黜)286) 을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신은 다른 의견이 날로 치성하여 국시(國是)287) 가 어느 때에 정해질 수 없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8년 동안에 인심(人心)은 나쁜 곳에 빠져서 이익을 생각하는 풍습이 날로 자라나고, 죄를 토벌하는 법이 날로 무너져서 대역(大逆)을 풀어주고 비호하는 자가 천지[覆載]의 사이에 별 탈이 없었으며, 말이 왕비[坤聖]를 범하는 자가 스스로 시골 가운데 있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요사스럽고 이치에 벗어남을 자백한 공초(供招)를 무복(誣服)288) 이라 하고, 더러운 물건을 파서 찾았다는 말을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갑술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앞뒤가 같고 처음과 끝이 맞는 것은, 대개 의리(義理)가 이미 없어지고서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진실로 요사스러운 말을 엄하게 배척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실 수 있다면, 인심(人心)이 크게 변하고 선비의 추향(趨向)이 바르게 될 것이니, 다스리는 도리가 분명해지고 국맥(國脈)이 오래 갈 것입니다."

하고, 끝에 사치를 경계하고 수령(守令)을 선택하는 방법을 말하니, 답하기를,

"상세히 경계를 아뢰니 진실로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절실해서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기니,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령(守令)을 극진하게 선택하는 것은 마땅히 전조(銓曹)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숙종실록 41권, 숙종 31년 1월 6일 신축 4번째기사 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성을 쌓는 역사의 정지 등에 관하여 공주 유학 이만영의 상소문

공주(公州)의 유학(幼學) 이만영(李萬英)이 상소하기를,

"성(城)을 쌓는 역사는 정지시켜야 하며, 희빈(禧嬪)의 묘(墓) 앞을 침범하여 경작하는 것은 금지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성을 쌓는 것의 타당성 여부는 초야(草野)에서 알 바 아니다. 죄를 지어 죽은 사람에게 감히 작호(爵號)를 부르며, 또 한 글자를 낮추어 쓴 데 이르러서는 지극히 무상(無狀)하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여(李畬)가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이만영의 상소 가운데 묘 앞 계단에서 아주 가까운 땅을 갈아서 일군 백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예장(禮葬)한 곳이니, 당초에 반드시 경작을 금지하는 일정한 경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침범하여 경작한 일이 있다면 마땅히 본도(本道)로 하여금 적간(摘奸)하여 징치(懲治)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만영의 상소에 또 창릉(昌陵)007)  화소(火巢)008) 안에 투장(偸葬)009) 한 자가 있다고 하였으나, 조사하여 보니 그런 사실이 없었다. 임금이 연신(筵臣)이 아뢴 일로 인하여 가두고 과죄(科罪)하도록 하였다.

 

 

 

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 12월 7일 정해 2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유학 함일해의 국조 선대 능침에 관한 상소문

강릉(江陵)에서 사는 유학(幼學) 함일해(咸一海)가 상서(上書)하기를,

"국조(國祖) 선대(先代)의 능침(陵寢)이 삼척(三陟) 황지(黃池)에 있어 온 지가 이제 3백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소재처(所在處)를 분명히 알지 못하였으므로 훌륭한 후손[文孫]들의 효심(孝心)에 얼마나 아픈 감회가 많았겠습니까? 신은 대강 성가(星家)577) 에 통달하였는데, 노동(蘆洞) 황지(黃池)에서 묘방(卯方)의 좌향(坐向)인 하나인 큰 무덤을 찾아내었습니다. 그 곳은 산형(山形)과 국세(局勢)로 보아 결단코 등한(等閑)한 분묘(墳墓)가 아니었습니다. 이야말로 억만년토록 왕업을 흥왕시킬 조짐이 매우 명백하니, 삼가 바라건대, 삼척(三陟)의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신과 함께 그 곳에 가서 다시 상세히 살피게 하여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희빈(禧嬪)578) 의 묘소(墓所)를 살펴보건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하여 완전한 곳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땅속의 불안함은 말할 수 없으니 또한 훌륭한 지사(地師)로 하여금 신과 참론(參論)하게 하여 길흉(吉凶)을 조사하게 한 다음 다시 길지(吉地)를 잡으소서. 그렇게 하면 다만 저하(邸下)의 지극한 정리에 유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끝없는 복(福)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서(上書)를 봉입(捧入)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함일해(咸一海) 상서(上書)의 전편(全篇)에 깔린 주의(主意)는 오로지 아래 조항에 있는 것인데, 삼척(三陟)의 일을 핑계하여 멋대로 진달하였으니, 일이 매우 방자하다. 그리고 감히 작호(爵號)579) 를 썼으니, 또한 매우 절통(絶痛)하다. 이 상서는 도로 내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62권, 숙종 44년 12월 23일 병인 2번째기사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희빈 장씨의 천장지를 광주 진해촌으로 정하도록 명하다

장씨(張氏)560) 의 천장지(遷葬地)를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함일해(咸一海)가 상서(上書)하여 인장리(仁章里)의 묘지(墓地)는 불길(不吉)하다고 논하고, 여러 사람의 의논 또한 결점이 많다고 여겼으나, 임금이 이미 천장(遷葬)하도록 명하였었다.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지사(地師)로 이름이 드러난 자 10여 인을 거느리고 길지(吉地)를 기내(畿內)에서 두루 구한 것이 1년이나 되었는데, 처음으로 수원(水原) 청호촌(靑好村)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 두 곳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수원은 비방과 칭찬이 여러 갈래로 많았으므로, 마침내 여러 지사(地師)의 산(山)에 대한 평론(評論)을 갖추어 아뢰자, 임금이 진해촌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초상(初喪) 때의 예에 의거하여 예장(禮葬)을 행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숙종실록 65권, 숙종 대왕 행장(行狀)

숙종 대왕 행장(行狀)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국왕(國王)의 성(姓)은 이씨(李氏),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며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 부원군(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이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꿈에 명성 왕후의 침실(寢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시니, 바로 용(龍)이었다. 효묘께서 꿈을 깨고 나서 몹시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원손(元孫)을 얻을 좋은 징조이다.’ 하고 미리 소자(小字)를 용상(龍祥)이라고 지어 기다렸는데, 과연 숭정(崇禎) 기원(紀元) 34년 신축년104) 8월 15일 신유(辛酉)에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왕(王)을 낳으셨다.

다섯 살 때 명성 왕후가 산병(産病)이 있자, 왕이 매양 꿇어앉아 미음을 올리며 근심하는 빛이 안색에 드러나니, 명성 왕후가 억지로 드시며 말하기를, ‘네가 권하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셨다. 기르던 참새 새끼가 죽자 묻어주도록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우락(牛酪)을 취하는데, 그 송아지가 비명을 지르자, 왕이 듣고 불쌍히 여겨 우락을 들지 않았으니, 그 인효(仁孝)한 성품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현묘께서 몹시 사랑하여 특별히 조신(朝臣) 중에서 선발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좌명(金佐明)·김수항(金壽恒) 등을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았다. 현종께서 송준길을 인견(引見)하고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왕(王)을 불러 나오게 하니, 왕이 송준길을 향하여 재배(再拜)하였다. 송준길 현묘께 절하며 하례하기를, ‘원자의 읍양(揖讓)과 궤배(跪拜)가 정확하게 법도에 맞으니 만약 하늘이 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정미년105) 정월(正月)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기유년106) 정월(正月)에 어가(御駕)를 따라 태묘(太廟)에 참배하고 8월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여 선성(先聖)을 전알(奠謁)하였다. 이어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는데, 예를 차린 용모가 씩씩하고 엄숙하며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에 둘러서서 보고 듣는 자가 모두 뛰며 기뻐하였다.

경술년107) 3월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신해년108) 4월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 김씨(金氏)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이었다. 이때 왕이 바야흐로 어린 나이였는데 궁료(宮僚)를 자주 접견(接見)하며 부지런히 강마(講磨)하여 문리(文理)가 크게 통달(通達)하고 예덕(睿德)이 날로 향상되었으며, 빈사(賓師)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다. 찬선(贊善) 송준길이 갑자기 죽자, 하령(下令)하기를, ‘내 마음이 슬픔에 싸여 실로 스스로 안정(安定)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전날의 은근한 가르침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목이 메어 소리가 막힌다.’ 하며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갑인년109)  현종께서 병환이 나시자 왕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애태우며 옷을 입은 채 띠를 풀지 않았고, 대점(大漸)이 되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에 경건히 기도하게 하였다. 8월 18일 기유(己酉)에 현종께서 승하하시자, 왕이 우수(憂愁) 속에 상주(喪主) 노릇을 하시며 수장(水醬)조차 들지 않고 반호(攀號)하고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니, 모시는 자가 차마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 못하였다. 예관(禮官)이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리니 도로 내리며 말하기를, ‘하늘이 무너져 망극(罔極)한 가운데 또 이런 말을 들으니,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스스로 진정할 수가 없다.’ 하며, 근신(近臣)과 삼사(三司)에서 여러번 청해도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大臣)이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며 세 차례 청한 뒤에 비로소 허락하였다.

23일 갑인(甲寅)에 왕이 여차(廬次)에서 걸어 나오는데, 울며 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그리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으면서 곡하고 절하였다. 이어서 연영문(延英門)으로부터 걸어 나와 인정문(仁政門)의 계단 위에 이르러 오랫동안 서서 어좌(御座)에 나아가지 않았다. 승지(承旨)와 예관(禮官)이 달려가 나아가기를 권유하니, 왕이 따르지 않고 소리내어 울 뿐이었다. 여러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간청하니, 왕이 어좌에 올라가 곡했는데, 눈물이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뜰에 가득한 신료(臣僚)들이 모두 다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고, 위졸(衞卒)이나 이예(吏隷)들까지도 눈물을 씻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예(禮)를 마친 후에 걸어서 여차로 돌아왔는데, 울어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며, 언제나 신료(臣僚)로서 처음 보는 이를 대하면 곧 곡하였다. 조용히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이런 대위(大位)에 올라 사리(事理)가 어떠한 것을 알지 못하니, 무릇 여러 가지 정령(政令)에 있어 혹시라도 망령되고 그릇된 것이 있을까 두렵다. 다만 대신이 잘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왕은 보위(寶位)에 오른 이래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임무로 여겨, 상방(尙方)이 연시(燕市)에서 무역(貿易)하는 것을 특별히 정파(停罷)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대신(臺臣)의 말로 인해 또 태복시(太僕寺)에서 말을 사들이는 것을 정파하였다. 새 능의 석물(石物) 공사가 매우 거창했는데, 왕이 자교(慈敎)를 받들어 영릉(寧陵)의 옛 석물을 옮겨다가 씀으로서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었다.

이때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이 채 연상(練祥)110) 이 되지 않았는데, 예관(禮官)이 ‘왕이 대신 복(服)을 입는 예(禮)’를 계의(啓議)하니, 왕이 대신(大臣)의 의논을 따라 졸곡(卒哭)한 뒤에 조전(朝奠)111) 으로 인해 복(服)을 입었다. 이는 대개 고인(古人)의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살아계신 것을 본뜬다.’는 뜻을 적용한 것이다.

왕은 흉년든 해에 민생(民生)의 고달픔을 깊이 진념(軫念)하여 더욱 심한 고을의 군포(軍布)의 절반을 경감해 주었고, 신해년112) 이전 환상(還上)으로 지적해 징수할 곳이 없는 것과 함경도(咸鏡道) 임자년113) 이전의 미처 봉납(捧納)하지 못한 것 등을 모두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였다.

12월 임인(壬寅)에 현종 대왕(顯宗大王) 숭릉(崇陵)에 장사지냈다. 발인(發靷) 때 왕이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공경히 전송했고 반우(返虞)114) 때는 교외(郊外)에서 맞이해 곡하였다.

을묘년115)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연제(練祭)를 지낸 뒤 대신(大臣)의 의논을 따라 경사전(敬思殿)의 삭망(朔望) 배제(陪祭) 때 신료(臣僚)들이 지금 착용하고 있는 백포(白袍)·백모(白帽)·백대(白帶)로 제례(祭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를 드렸다. 가을에 산릉(山陵)을 참배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다.’ 하고 수령이 사조(辭朝)할 때 반드시 인견(引見)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에 대해 하문(下問)하였으며, 또 입을 벌리기를 좋아하거나 명예를 노리지 말도록 하였다. 간혹 그 적합하지 않은 자를 살펴 체직시키기도 하며, 하교(下敎)하기를, ‘「수목(守牧)은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전조(銓曹)에서 잘못 의망(擬望)한 죄를 무겁게 진다.」는 것을 일찍이 이미 엄하게 신칙(申飭)하였는데, 봉행(奉行)하는 것이 정차 해이해져 능히 가려서 임명하지 못한 나머지 근래에 방백(方伯)이 아뢰어 파직시키는 일과 대각(臺閣)의 탄핵하는 일이 자주 있으니, 별도로 거듭 밝힌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하여 경칙(警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이 말하기를, 「오늘이 나의 생일이다. 세속에서는 모두 즐거움으로 여기지만 짐(朕)에게 있어서는 도리어 서글픈 느낌을 이루니, 어찌 연락(宴樂)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자로(子路)는 일찍이 백리(百里) 밖에서 쌀을 져다가 부모(父母)를 봉양했는데, 부모가 죽자 항상 쌀을 져오던 날을 생각하였다. 지금 나는 바야흐로 상중에 있으니, 어찌 편안하게 그대로 탄일(誕日)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평일처럼 봉(封)할 수 있겠는가?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일찍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주수도(舟水圖)를 제작하게 했는데, 친히 글을 짓고 그 위에 써서 좌석 옆에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어느날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뒤에 배가 편안하고, 신하가 현명(賢明)한 뒤에 임금이 편안하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그림의 의미를 체득하여 보필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여러 도(道)의 방백(方伯)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나의 백성을 위하는 일념(一念)은 자나깨나 느슨해지지 않는다. 언제나 밥 한 술을 뜰 때마다 늘 쌀 한 알 한 알이 신고(辛苦)임을 생각하고, 옷 한 벌을 입을 때마다 늘 방적(紡績)의 노고를 생각한다. 근년의 기근(飢饉)은 8도(八道)가 모두 다 그러한데, 기전(圻甸)·양서(兩西)·영서(嶺西)·영북(嶺北)이 더욱 시급하다. 반드시 미리 요리(料理)한 연후에야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거의 구렁에 떨어지는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십행(十行)의 천찰(天札)에 말뜻이 애절하니, 중외(中外)에서 그것을 듣고 감읍(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음홍(淫虹)이 해를 꿰뚫음으로 인해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여러 신하들을 칙려(飭勵)하였으며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다.

병진년116) 에 수의(繡衣)를 나누어 보내어 수령(守令)들의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살피도록 하였다. 빈사(儐使)의 장계(狀啓)로 인해 한 현리(縣吏)가 치적(治績)이 없는데도 지나치게 포상을 준 것을 알고 마침내 어사를 처벌하였다.

개성부(開城府)에 화재(火災)가 나서 5백여 가호(家戶)가 불에 타자, 특별히 주진(賙賑)하도록 하였다.

8월에 현묘(顯廟)의 대상(大祥)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서 8일 정축(丁丑)에 산릉(山陵)을 전알(展謁)하였다. 10월에 담제(禫祭)를 거행하고 12월에 친히 편전(便殿)에서 대정(大政)을 거행하였다.

정사년117)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서 문무(文武)를 시험하여 뽑았다.

혜패(彗孛)118) 의 재앙 때문에 직언(直言)을 구하고,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대책을 적어 올리게 하였다. 시절이 오랫동안 가뭄이 든 것을 걱정하여 친히 사직단에 기도하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감하며, 음악을 중지하고 술을 금하였다. 영희전(永禧殿)을 중수(重修)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무오년119) 에 왕이 병환을 앓으시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나았다. 예관(禮官)이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아 자성(慈聖)께 근심을 끼쳐 드려 마음이 몹시 황송했는데, 어찌 칭경(稱慶)하는 일에 안심(安心)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大臣)이 극력 청하니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그래도 외방(外方)에서는 단지 하전(賀箋)만 올리고 방물(方物)은 바치지 말도록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왕위를 욕되게 한 후로 한재와 수재가 서로 연속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다. 양맥(兩麥)120) 이 타서 말라 죽고 온 들판에 푸른 식물이 없는데, 우박과 천둥, 얼음덩이의 변이 여름철에 계속 발생하니,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건대, 실은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먹으나 쉬나 편안하지가 않다. 오늘부터 정전을 피하여 더욱 경외(敬畏)를 더할 것이니, 아! 그대들 대소(大小) 신공(臣工)들은 각각 서로 공경과 화합을 다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상선(常膳)을 감하고 음악을 중지하고 술을 금할 것을 명하였다. 또 양국(兩局)과 병조(兵曹)에 명하여 아약(兒弱)을 충정(充定)한 경우 물고자(物故者)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종류를 분명히 조사하여 변통하도록 하였다. 몸소 종묘(宗廟)에 기도하고 다시 하교(下敎)하여 직언(直言)을 구하기를, ‘오늘의 이 한발(旱魃)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혹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천심(天心)에 합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공도(公道)를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옥송(獄訟)이 공정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궁금(宮禁)이 사치스러운 것은 아닌가? 언로(言路)가 막히고 수령(守令)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뇌물이 공공연히 횡행하고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자가 많은 것은 아닌가? 과매(寡昧)한 나의 득실(得失)과 백성들의 곤고(困苦)를 각각 다 진술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기미년121) 에 인조조(仁祖朝) 공신(功臣)의 아내로서 서울에 있는 이를 호조(戶曹)로 하여금 월름(月廩)을 주게 하고, 시골에 있는 이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주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돈은 한 나라의 통화(通貨)이고 백성들 역시 즐겨 사용하니 계속해서 주전(鑄錢)하여 과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 동철(銅鐵)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작업을 정지하는 날이 많다. 이제 동철 1백 근(斤)을 내리니, 주전에 보태는 자료로 삼으라.’ 하였다.

승도(僧徒)를 조발하여 강도(江都)에 돈대를 쌓았다. 하교하기를, ‘강도는 나라의 보장(保障)이니, 돈대를 설치한 것은 사전에 대비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다만 바야흐로 봄을 맞이하여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비록 징발되어 부역에 나가는 일이 없다 해도 침범하여 어지럽히고 농사를 방해하는 우환이 없지 않을 것이니,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이제 근시(近侍)를 보내어 진휼(軫恤)하는 뜻을 선포하고 금년의 전조(田租)122) 를 하사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 1만 명에 가까운 승도가 멀리서 부역하니, 쌀 1석(石) 3승(升)을 나누어 주도록 하고, 만일 함부로 소란을 떨며 시골 마을에 폐해를 끼치는 자가 있을 경우 군율(軍律)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간(臺諫)은 군주(君主)의 이목(耳目)이므로 하루라도 잠시 비워둘 수가 없는데, 근일 대간(臺諫)이 혹은 추고(推考) 때문에 인피(引避)하기도 하고, 또는 벼슬을 임명한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곧바로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기도 하여,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체직(遞職)되니 매우 고례(古例)에 어긋난다. 이제부터는 실지로 병이 있는 자가 아니면 사직 단자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양사(兩司)에서 서로 감추(勘推)하도록 하라. 조관(朝官)의 부모가 연로(年老)하면 식물(食物)을 하사(下賜)하는데 유독 종척(宗戚)·의빈(儀賓)에 대해서는 추은(推恩)의 은전이 없으니, 나이 70 이상이 된 사람에게는 의자(衣資)와 식물을 똑같이 넉넉하게 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근래에 격쟁(擊錚)123) 이 분운(紛紜)한 것은 반드시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사정(私情)에 끌리고 형세에 구애되어 잘못된 줄을 알면서 그릇 판결한 소치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같다면 백성들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추조(秋曹)124) 의 사송(詞訟)이 적체(積滯)된 경우가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다. 간혹 사사로운 뜻에 견철(牽掣)되어서 세월을 지연시키며 곧바로 회계(回啓)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종전의 버릇을 답습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다시 법령(法令)을 준수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중죄(重罪)로 논할 것이다.’ 하였다.

가을에 노량진(露梁津)에 나아가 대열(大閱)125) 하고, 강(江)가에 있는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묘소(墓所)를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

흉인(凶人) 이유정(李有湞)이 이름을 숨기고 돈대를 쌓는 일에 대해 투서(投書)하였는데, 말한 바가 몹시 불측하므로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여기에 연루된 사람은 법을 시행함에 차등이 있었다. 종실(宗室) 이혼(李焜)·이엽(李熀) 형제가 이름이 흉서(凶書)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마지못해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라 제주(濟州)에 안치(安置)하였는데, 늠료(廩料)와 의자(衣資)를 후하게 주고 부리는 사람을 정해 주었다. 그 어린 나이에 형제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가엾게 여겨 같은 곳에 송치(送置)하였고, 어머니와 아내로 하여금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의원(醫員)을 보내 구호(救護)하고, 현관(縣官)은 차례로 말을 주고 먹을 것을 주도록 하였다. 뒤에 양이(量移)126) 를 명하였고, 갑자년127)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의 주갑(周甲) 때 있었던 반사(頒赦)로 인해 특별히 방유(放宥)를 명하였다.

왕은 유교(儒敎)가 폐이(廢弛)되었다며 경상(慶尙)·전라(全羅) 양도(兩道)에 4명의 계수관(界首官)과 제독관(提督官)을 다시 설치했고, 친히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관무재(觀武材)를 하고 겸하여 문신(文臣)의 정시(庭試)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은 마땅히 구례(舊例)에 따라 돈을 더 지급해야 하지만, 돈이 지금 부족하여 형세가 장차 계속하기 어려우니, 6품 이상의 감(減)한 녹봉에 대하여 먼저 채워 주도록 하라.’ 하였다.

10월에 천둥과 번개가 치니 하교하기를,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재변이 순음(純陰)의 달에 나타났으니, 조용히 나의 허물을 생각하건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마땅히 더욱 경척(警惕)을 더할 것이나, 대소(大小) 신공(臣工)들은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습관을 말끔히 없애고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는 도리에 힘써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사(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내어 약간인(若干人)을 시험하여 뽑았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홍범(洪範)의 글을 강(講)하는데, 기자(箕子) 무왕(武王)에게 도(道)를 전하여 이륜(彛倫)을 펴게 했고, 동방(東方)에 봉해지자 크게 교화(敎化)를 밝혀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연하여 기술할 만하게 하였으니, 우리 동국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관대(冠帶)를 하고 능히 오상(五常)을 밝혀 소중화(小中華)의 칭호를 얻도록 한 것은 기자의 힘이다. 문장을 주관하는 신하에게 각별히 제문(祭文)을 짓도록 하고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기자묘(箕子廟)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묘우(廟宇)나 무덤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수즙(修葺)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이며, 자손(子孫) 가운데 녹용(錄用)에 적합한 자 또한 방문(訪問)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단군(檀君)·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또한 그곳에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부터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렸으니, 마땅히 똑같이 제사를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먼저 기자(箕子)의 사당에 제사지낸 뒤 또한 택일(擇日)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신년128) 에 하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의 묘정(廟庭)에 대신(大臣)을 배향(配享)하는 일이 없었던 세대가 없었다. 그런데 선왕(先王)의 묘정에만 유독 대신이 없으니, 선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불만족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인들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세종조에 태종(太宗)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셨는데, 남은(南誾)·조준(趙浚)·조인옥(趙仁沃) 태조(太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려고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남은은 국가 자손 만세(萬世)의 원수」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를 빼버렸다가 뒤에 태종의 하교(下敎)로 인해 결국 추배(追配)하였다. 고려(高麗) 시조묘(始祖廟)의 네 신하129) 도 또한 추배하였는데, 그때 당 태종(唐太宗)의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언급하였다. 이 일은 비록 고례(古例)가 없다 하더라도 의리로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이미 선조(先朝) 때 시행한 성전(成典)이 있고, 또 당조(唐朝) 고사(古事)의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빈청(賓廳)으로 하여금 권점(圈點)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빈청에서 영의정(領議政) 정태화(鄭太和)로 권점하였다. 처음에는 여러 신하들이 정태화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좌명(金佐明)으로 배향(配享)을 의정(議政)하였는데,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정태화를 빼버렸다가 이때에 와서 추배하였다. 뒤에 또 대계로 인해 조경을 빼버렸다.

하교하기를, ‘재이(災異)가 연달아 닥쳐 어려움과 근심이 눈에 가득하고, 와언(訛言)이 물끓듯 하여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으니, 연곡(輦轂)130)  친병(親兵)131) 의 장수는 나라의 지친(至親) 중에서 지위가 높은 자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다.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를 즉시 훈련 대장(訓鍊大將)에 제수하여 곧 그날로 병부(兵符)를 받아 임무를 살피도록 하고, 또 신여철(申汝哲)을 총융사(摠戎使)에 제수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염파(廉頗) 인상여(藺相如)132) 는 전국(戰國)의 선비였으나, 오히려 국가의 위급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사적인 원수를 뒤로 미루었다. 과인(寡人)의 여러 신하들은 사당(私黨)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국가는 뒤로 미루어 공도(公道)는 상실되고 사의(私意)가 크게 유행한다. 주의(注擬)하는 즈음에 오로지 한쪽편의 사람들만을 등용하여 권세(權勢)가 편중되고 교만하고 방자함이 날로 심해지니, 결코 태아(太阿)133) 의 자루를 거꾸로 쥐어주어 임금의 형세는 위에서 고립되고 당여(黨與)는 아래에서 더욱 치열하게 만들 수 없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원정(李元禎)을 우선 먼저 삭탈 관작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라.’ 하였다.

여러 역적들을 토벌하고 보사공(保社功)을 녹훈(錄勳)하였다. 왕이 사복(嗣服)한 초기에 여러 소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왕실(王室)을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여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을 건청(建請)하였다. 대개 친잠을 하면 마땅히 빈어(嬪御)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오정창(吳挺昌)의 딸을 들여보내 중궁을 동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미 길일(吉日)을 가려 장차 거행하려 하였는데, 하늘에서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니, 바람에 단선(壇墠)134) 과 장막이 마구 흔들려 부수어지고 찢어지니, 왕이 두려워하여 그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역종(逆宗) 이정(李楨)·이남(李柟)·이연(李㮒) 형제는 모두 효묘와 현묘 양조(兩朝)의 권애(眷愛)를 받아 궁중에 출입하며 한도가 없었는데, 점차 더욱 교만하고 음란해졌다. 현묘의 대상(大喪)이 처음 났을 때 남(柟)이 또 대전관(代奠官)으로서 빈전(殯殿)에 기거하면서 양궁(兩宮) 사이를 엿보며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넘겨다보았는데, 제구(諸舅)135) ·형제·빈객(賓客)들이 조정에 포열(布列)하여 우익(羽翼)이 되었다.

허적(許積)의 얼자(孼子) 허견(許堅)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오랫동안 딴 뜻을 품어왔는데, 그 간교하고 기만적인 일이 드러나자 크게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부자가 더욱 급하게 계책을 꾸며서 체찰사(體察使)에 제수되어 군무(軍務)를 통괄할 것을 도모하고, 유혁연(柳赫然)과 서로 교분을 맺어 멋대로 사병(私兵)을 만들려고 했다. 드디어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함께 밤낮으로 모의하여 화(禍)가 조석(朝夕)에 닥쳤다. 왕이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처리하여 먼저 병권(兵權)을 빼앗는데, 한 두 폐부(肺腑)의 신하가 그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하는 것을 살폈으므로 적(賊)이 감히 발동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원로(鄭元老)가 상변(上變)하여 남(柟) 허견(許堅)을 고발(告發)하니, 자백을 받아 허견이 처형되었다. 왕이 특별히 종친(宗親)를 후대(厚待)하는 의리를 미루어 남(柟)은 경전(磬甸)되었다. 즉각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줄 것을 명하였다. 허적과 유혁연이 차례대로 처형되었다. 또 이원성(李元成)이 추가로 고발한 것으로 인해 흉얼(凶孼) 중에서 법망(法網)을 빠져 나갔던 오정창·최만열(崔晩悅)·정원로 등이 복법(伏法)되었다. 책훈(策勳)하여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 등에게 보사 공신(保社功臣)의 칭호(稱號)를 하사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왕에게 아뢰기를, ‘송준길(宋浚吉)은 오랫동안 서연(書筵)의 반열에 있으면서 지성으로 보도(輔導)하였고, 허적(許積)의 사람됨을 소론(疏論)하며, 「이필(李泌) 노기(盧杞)를 논한 일」136) 을 인용해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허적의 죄악이 밝게 드러났으니, 그의 말이 과연 증명이 된 것입니다. 송준길이 비록 매얼(媒孼)137) 하는 자가 죄를 얽어 물리친 것 때문에 끝내 〈벼슬을〉 추삭(追削)당하기는 했지만, 성심(聖心)이 이제 이미 개오(開悟)하셨으니, 마땅히 그 작의를 추복(追復)하고 사제(賜祭)하여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빈신(儐臣) 오시수(吳始壽)가 통관(通官)의 거짓 공갈로 인해 거기에 구어(口語)를 더 보탰는데, 말이 선조(先朝)를 침범했다.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이 말을 듣고 몹시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수상(首相)에게 명해 통관(通官)의 말이 나온 곳을 가서 힐문하도록 하자, 빈신이 빙자해 환혹(幻惑)시킨 단서가 모두 폭로되었다. 또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이정(李楨)·이연(李㮒)이 궁인(宮人)과 교란(交亂)한 정상을 소론(疏論)하니, 흉당(凶黨)이 급히 구대(求對)하여 캐물으며 반좌(反坐)138) 하려고까지 하였다. 명성 왕후께서 대신(大臣)을 발[簾] 앞으로 불러서 격절(激切)하게 교유(敎諭)하니, 유사(有司)가 비로소 ·의 죄상을 신문하였으나, 반드시 동조(東朝)를 동요시켜 간계(奸計)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윤휴(尹鑴)가 이에,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조관(照管)한다.’는 말을 연중(筵中)에서 공공연히 말하니, 나라 사람들이 가슴 아프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왕이 오시수 윤휴를 죄주고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강도(江都)·남한(南漢) 신해년139) 이전의 환상(還上)으로 봉납(捧納)하지 못할 것을 탕척(蕩滌)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찬(撰)해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 《대학(大學)》에 근본하고, 《연의(衍義)》에서 요약하여 거세(巨細)와 정조(精粗)가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선조(宣祖)께서 크게 칭상(稱賞)하셨습니다. 만일 소대(召對)할 즈음에 수시로 강론(講論)하고 또 한가하신 가운데 예사로 즐겨 찾아보신다면 그 공효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 본관(本館)에서 올린 《대학연의(大學衍義)》는 내가 일찍이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여 펼쳐 보기 어려운 점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이제 들건대, 《성학집요》가 진실로 절실하다고 하니, 즉시 써서 올리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원임(原任) 2품 이상,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밤에 서운관(書雲觀)의 초기(草記)를 보았더니, 「어떤 별이 태미 서원(太微西坦) 밖으로 들어갔는데, 꼬리 부분의 자취가 있는 듯하다.」고 하였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므로 경(卿) 등을 불러서 재앙을 방지할 방도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하고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 외람되게 큰 기업을 계승하여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천심(天心)에 부합되지 못하니, 인애(仁愛)스러운 하늘이 이런 재앙을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아픔이 몸에 있는 듯하니, 승지(承旨)는 나를 대신해 교서(敎書)를 초(草)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고, 대소(大小)의 여러 신하들은 능히 자신의 직무를 다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신해(辛亥)에 중궁(中宮)이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인경(仁敬)’이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흉역(凶逆)이 갑자기 생겨났다. 그 기염(氣焰)이 하늘을 뒤덮던 시기를 당하여 혹은 형세를 조성(助成)한 자도 있었고 또한 사론(邪論)에 붙었던 자들도 있었으니, 이런 무리들은 이미 사방의 변방으로 추방하여 악(惡)을 징계하는 형벌을 분명하게 보였다. 이 밖의 나머지 사람들로 능히 스스로 퇴파(頹波)140) 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을 또한 어찌 족히 무겁게 처벌할 수 있겠는가? 이제 경중의 구별이 있으니, 처분(處分)이 이미 결정 되었다. 양(陽)에는 펼치고 음(陰)에는 참담하며 봄에는 살리고 가을에는 죽이나니, 인주(人主)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큰 권한을 가졌다. 이처럼 재이(災異)가 빈번히 발생하고 인재(人才)가 아주 적은 시기를 당하였으니, 즉시 경중에 따라 거두어 서용(敍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유년141) 에 하교하기를, ‘방백(方伯)은 명령을 받들어 교화를 베푸는 자이다. 한 도(道)에 강기(綱紀)를 세워서 다스리고 군(郡)·읍(邑)을 총괄하여 살피니, 그 책임이 생각하건대 중대하지 않겠는가? 비록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들어 시행할 줄 알지 못한다면 조정[朝家]의 은택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고, 비록 순리(循吏)나 오관(汚官)이 있다 하더라도 등용과 축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고적(考績)142) 의 정사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현재 여러 도(道)의 방백을 신중히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재망(才望)과 위중(威重)을 가지고 그 직책을 다한 자가 드물어서 내가 매우 개탄(慨歎)스럽게 여기고 있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자급(資級)과 이력(履曆), 그리고 일찍이 있었던 죄루(罪累)를 물론하고 별도로 초천(抄薦)·저양(儲養)하여 악목(岳牧)을 위임하는 뜻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와 척화(斥和)한 세 신하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의 사당을 세우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였다.

환(鰥)·과(寡)·고(孤)·독(獨)으로 의지할 곳이 없는 부류에게 연역(煙役)143) 을 감해 주고 나이 80세가 된 자들에게는 식물(食物)을 하사하였으며, 각양(各樣)의 신포(身布)는 구제(舊制)를 따라 5승(升) 35척(尺)으로 법식을 정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차자(箚子)를 올리고 물러나 귀향(歸鄕)하니, 중신(重臣)을 보내어 머무르는 곳에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2월 병오(丙午)에 인경 왕후(仁敬王后) 익릉(翼陵)에 장사하고, 고양군(高陽郡)의 춘수미(春收米)를 특별히 감해서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드니 소결(疏決)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정상과 죄질이 모두 무거운 자는 경솔히 의논할 수 없겠지만, 죄상은 무겁고 정상은 가벼운 자는 반드시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푼 뒤에라야 깊을 원한을 풀어주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수 있다. 비록 그렇지만 경중을 따지지 않고 혼동하여 석방한다면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희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정상과 죄범(罪犯)을 참작하고 적당히 헤아려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소전(永昭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5월 2일에 민씨(閔氏)를 책봉하여 왕비(王妃)로 삼았으니,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이다. 이때 오랫동안 가뭄이 드니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뒤 대신(大臣)·경재(卿宰)·삼사(三司)를 명소(命召)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물었고,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을 칙려(勅勵)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논하기를, ‘중궁(中宮)의 상(喪)에 연제(練祭)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의논하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영부사(領府事) 송시열(宋時烈)의 의논 가운데 「폐각(廢却)하고 거행하지 않는 것은 자못 예(禮)를 사랑하여 양(羊)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144) 는 설이 옳다. 대저 11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13개월 만에 대상(大祥)을 지내며 15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내는 것은 고금(古今)에 바꿀 수 없는 제도이다. 지금 만일 변제(變除)하는 절목이 없다는 핑계로 연제를 거행하지 않는다면 정리상 그리고 예의상 부족함이 있다. 비록 이미 상복을 벗었으니 3년의 의리를 완전히 폐(廢)할 수는 없으니, 연제와 담제의 절목을 즉시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연제를 지내는 날 드디어 혼전(魂殿)에 친림(親臨)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근래에 국가에 일이 많고 또 흉년(凶年)을 만났기 때문에 원릉(園陵)을 전알(展謁)하지 못한 지 이제 이미 5년이나 되었으니, 내 마음에 부족함이 있다. 이제 경릉(敬陵)을 전알하고 이어서 새 능을 참배하여 슬픈 심회를 풀고자 하니, 도로나 교량(橋梁)을 절대로 대단하게 수리(修理)하지 말라. 또한 식거(植炬)145) 도 하지 말고, 도성(都城)에 머무는 군병(軍兵)을 징발(徵發)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기보(圻輔)는 상번(上番) 어영군(御營軍)으로 숙위(宿衞)하게 하라.’ 하였다.

야대(夜對) 때 강(講)을 마치자 왕이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야대는 비단 밤의 기운이 고요할 뿐만 아니라 강론(講論)이 재미가 있다. 한 당(堂)에서 술잔을 나누는 사이에 애연(藹然)히 가족과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기 때문에 일찍이 효묘조(孝廟朝) 때는 자주 야대하시고 술을 권하며 즐거워하셨다. 그대들은 지금 각각 안심하고 주량(酒量)대로 술을 마시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 들러 문과(文科) 무과(武科)를 시험하여 뽑았다. 왕이 말하기를, ‘근래에 학교의 행정이 폐이(廢弛)해졌으니, 모름지기 닦아 밝힌 뒤에야 사습(士習)을 바로잡고 인심(人心)을 착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사성(大司成)으로 하여금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학교모범(學校模範)》을 가져다가 오늘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참작해 강정(講定)하고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궁중에 불경(佛經)을 유치(留置)한 일이 있었다. 우의정(右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분명 이교(異敎)에 유의(留意)하시지 않겠지만 외부 사람들은 생각건대 혹시 의심을 두기도 할 것이니, 마땅히 내어주셔야 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경(卿)에게 내어주고자 한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군상(君上)은 높은 자리에 계시니, 어찌 능히 민간 일의 고생과 어려움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숙(李䎘)의 집에 옛 화병(畫屛)이 하나 있는데, 우리 나라 민간(民間)의 사시(四時) 농공(農功)을 자못 상세히 그렸습니다. 마땅히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모화(摹畫)해 들여오도록 하여 예람(睿覽)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빈풍(豳風)146) 의 화병을 만들어서 보았는데, 이제 듣건대, 이 병풍은 우리 나라의 농공을 그렸다고 하니 더욱 보고 살필 만한 것이다. 대내(大內)로 들이도록 하여 본 뒤에 이모(移摹)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술년147) 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왕이 보신(輔臣)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하늘의 재앙이 거듭되는데, 이제 무지개의 재변이 또 이와 같으니 먹으나 쉬나 편안하지가 못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진달하도록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백골(白骨)·인족(隣族)·아약(兒弱)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폐단을 많이 말하여 호포(戶布)를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의논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으니, 대신(大臣)·비당(備堂)·삼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 신역(身役)의 편중(偏重)이 가장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있으니, 균역(均役)으로 폐단을 구제하는 것으로 진실로 호포법(戶布法)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절목(節目)이 결정되기도 전에 듣는 사람들이 먼저 놀라고, 민정(民情)이 소란스러우며 조의(朝議)가 떠들썩하니, 아무리 양법(良法)·미정(美政)이 있더라도 형세상 과단성 있게 시행할 수가 없다. 지금 우선 정지하여 부의(浮議)를 눌러 민심(民心)을 안정시키는 바탕으로 삼고, 연사(年事)를 천천히 보아서 조용히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진백(陳白)하기를, ‘올해의 흉황(凶荒)은 기호(圻湖)가 더욱 극심합니다. 기전(圻甸)은 이미 대동(大同)을 감(減)해 주었는데, 이제 만일 호서(湖西)까지 감해 주는 것을 허락한다면, 해청(該廳)의 수용(需用)이 바닥이 날 것이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만일 경비(經費)를 염려하여 전혀 견감해 주지 않는다면, 이는 자못 백성을 구휼하는 뜻이 아니니, 더욱 극심한 고을 다음가는 고을에 대해서 똑같이 1두(斗)씩 감해 주라.’ 하였다.

평양(平壤) 민가(民家)에 화재(火災)가 발생하여 3백 40여 가호(家戶)가 불에 타자, 특별히 쌀 5백여 석(石)을 하사하여 나누어 진휼(賑恤)하게 하고, 그 신역(身役)을 감해 주게 하였다.

오랫동안 가뭄이 들다가 비가 내리자 ‘희우시(喜雨詩)’란 시제(詩題)를 내어 승지(承旨)·옥당(玉堂)에 명하여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관무재(觀武才)하고, 어사(御史)를 남한(南漢)에 보내어 시재(試才)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군제(軍制)를 변통해야 함을 전후로 진달(陳達)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은 형세상 갑자기 크게 변경하기 어렵다.’ 하고, 이에 별대(別隊)와 정초(精抄)를 합설(合設)하여 금위영(禁衞營)을 만들었다. 이는 대개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胄)의 의논을 채용한 것이다.

문묘(文廟)의 사전(祀典)을 수정(修正)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종향(從享)된 분 가운데 수장후(壽長侯) 공백요(公伯寮)·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기양백(歧陽伯) 가규(賈逵)·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사공(司空) 왕숙(王肅)·사도(司徒) 두예(杜預)·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임천백(臨川伯) 오증(吳澄)을 출향(黜享)하고, 문등후(文登侯) 신장(申棖)·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중에서 첩향(疊享)으로 인해서 신당을 빼버렸으며, 건령백(建寧伯) 호안국(胡安國)·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포성백(蒲城伯) 진덕수(眞德秀)·숭안백(崇委伯) 채침(蔡沈)은 서열(序列)이 잘못되었다 하여 위치(位置)를 개정하였고, 송조(宋朝)의 장락백(將樂伯) 양시(楊時)·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과 본조(本朝)의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새로 성무(聖廡)에 배향하였다. 이이 성혼을 종사(從祀)해야 된다는 주청(奏請)은 인조조(仁祖朝) 을해년148) 부터 시작되었는데, 선조(先朝) 무신년149) 무렵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유생들이 다시, ‘송조(宋朝)의 3현(三賢)을 함께 배향해야 된다.’는 의논을 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보(章甫)150) 가 누차 호소하니,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을 내려 다 함께 승배(陞配)하게 하였다. 또 김석주(金錫胄)의 의논으로 인해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게 하여 한결같이 명(明)나라 제도에 의해 산출(刪黜)하고 개정하도록 했다.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할 때 우의정 김석주가 말하기를, ‘지난 경인년151) 무렵에 조정에서 사람을 뽑아 등주(登州)의 군문(軍門)에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그뒤 명나라 조정에서도 또한 사람을 보내와서 선천(宣川)에 머물며, 이어 더불어 교역(交易)하였습니다. 뱃사람 중에 서(徐) 을 가진 자가 시종 왕래하면서 통신(通信)하였는데, 청(淸)나라 사람이 사문(査問)할 때 그 사람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다행히 무사하게 되었으니 포상(褒賞)의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천한 사람으로 무식하지만 능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그 충성이 칭찬할 만하다. 그의 자손 중에 등용할 만한 자는 녹용(錄用)하고, 역(役)이 있는 자는 그 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조(仁祖朝) 때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152) 한 군병으로 나이 70 이상 되어 가자(加資)한 자에게 요미(料米)를 주었다.

혜성(彗星)이 견기(見幾)153) 하였다가 두 달 만에야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 말에 「천하(天下)를 가지고 그 어버이에게 아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근래에 해마다 연이어 흉년(凶年)이 들었으므로 풍정(豊呈)의 성대한 예식을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하였기에 내 마음에 부족함이 있다. 마땅히 다시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금년 농사 또한 풍년이 들지 못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처럼 나라가 조금이나마 평안한 때에 위로 두 분 자전(慈殿)을 받들고 새해에 장수(長壽)를 비는 축원을 올린다면, 이것이 어찌 풍형 예대(豊亨豫大)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이는 전적으로 자식으로서 애일(愛日)154) 하는 지극한 정에 말미암은 것이다. 풍정에 대한 절목(節目)을 조속히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진연(進宴)의 절목은 자전(慈殿)의 하교에 따라 간략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지금 하늘이 경계를 보여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금년의 풍재(風災)는 태고적부터 없던 것이다. 일기(日記)155) 를 살펴보면 을해년156)  신묘년157) 의 풍재(風災)가 실로 기왕의 분명한 증험이다. 그 응험이 반드시 그때와 같을는지 비록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근심스러운 단서(端緖)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만일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양향(糧餉)이 가장 시급한데, 강도(江都) 남한(南漢)의 저축이 텅 비어 있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듣건대, 호조(戶曹)에서 저축해 놓은 포목(布木)이 있어 그 수량이 꽤 넉넉하다고 하니, 이것을 돌려 쌀로 사들이든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조치하라는 뜻을 대신에게 이르도록 하라.’ 하였다. 또 경기(京畿)의 대동미(大同米)와 삼남(三南)의 월과미(月課米)를 합한 1만 석을 강도(江都)에 수송할 것을 명하였다. 훈국(訓局)의 포보(砲保)158) 와 공조(工曹)의 장포(匠布) 역시 쌀로 바꾸어 수송하도록 하였다. 강원도(江原道)의 진상품인 인삼(人蔘)은 특별히 절반을 감해 주도록 하였다.

김환(金煥)이 상변(上變)하여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이 처형되었다. 바야흐로 설국(設鞫)하는 날 김중하(金重夏) 전익대(全翊戴) 유명견(柳命堅)·수윤(秀胤) 등의 일을 은밀하게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에게 말하니, 김익훈이 계달(啓達)하였다. 국문해 보니, 일이 허황하고 거짓된 것이 많았으므로, 김중하 전익대는 사형(死刑)을 감하여 유(流) 3천 리에 처하였다.

지사(知事) 이단하(李端夏)의 진백(陳白)에 의해 각릉(各陵)의 기제(忌祭)에 쓰이는 채화(綵花)159) 를 줄였다. 어사(御史)를 삼남(三南)과 북도(北道)에 나누어 보내어 진정(賑政)을 겸하여 살펴보게 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쳤다 하여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를, ‘정령(政令)의 시조(施措)가 점차 끝까지 잘된 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인가? 언로(言路)가 열리지 아니하여 곧은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실질적인 혜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곤궁한 것인가? 사치가 풍속을 이루어 쓸데없이 허비함이 너무 많은 것인가? 등용하고 버림이 공정하지 못하여 사의(私意)가 제멋대로 전파되는 것인가?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해이해져 백관들이 직무에 태만한 것인가? 옥송(獄訟)이 정체됨이 많아서 원망과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것인가? 바른 말을 널리 구하여 혹시라도 숨김이 없도록 하라.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은 맑고 깨끗한 한 마음으로 자기의 직무에 부지런하고, 자기 한 사람의 사심(私心)을 끊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삼사(三司)의 장관들에게 인재(人才)를 천거하도록 하고, 내수사(內需司)의 호초(胡椒)·단목(丹木)·백반(白礬)·호피(虎皮) 등의 물품을 특별히 내려주어 진휼 자금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내국(內局)160) 에는 청대죽(靑大竹)을, 내농포(內農圃)에는 가출마(加出馬)를 감하여 주었고, 훈국(訓局)·군기시(軍器寺)의 월과(月課)와 내궁방(內弓房)의 활 만드는 일을 정지하게 하였다. 주방(酒房)의 주미(酒米)를 경감하고, 반사(頒賜)하는 이엄(耳掩)과 초피(貂皮) 또한 절반으로 감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유(韓愈)의 글 가운데 하번(何蕃)의 전기(傳記)를 읽어보고, 또 송(宋)나라의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의 사적(事蹟)을 보았는데,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존경심을 자아내게 한다. 무릇 국가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이 어찌 다만 그들로 하여금 글이나 짓고 녹(祿)이나 구하게 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내 생각에는 이들 세 사람을 성균관(成均館) 곁에 작은 사당을 따로 세워 제사지내고 여러 유생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게 만들었으면 하니, 예관(禮官)을 시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물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계해년161) 에 태묘(太廟)에 참배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전부터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을 참배할 때 계단 아래서 배례(拜禮)를 행하고 물러나왔는데, 정리상 몹시 부족함을 느꼈다.’ 하고, 이에 배례를 마치자 그대로 영녕전 안으로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할 때에 대신(大臣)이 새해들어 면계(勉戒)한다는 뜻으로 진달(陳達)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계하여 가르침이 간절하고 지극하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는 정과 뜻이 서로 진실한 것이 중요한데, 근래에 밖으로는 옥송(獄訟)이 공평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논의가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고 착하게 되게 하십시요.」라고 하였으니, 오늘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사의(私意)를 버리고 다함께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는 도리를 생각한다면, 나도 또한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여름에 오랫동안 가뭄이 드니, 하교하기를, ‘한발(旱魃)의 참상이 갈수록 더욱 혹독해지니, 며칠 안으로 만약 비가 흠뻑 적시는 은택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천리(千里)가 적지(赤地)162) 가 됨을 면치 못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 말을 하다 이에 미치니, 차라리 스스로 몸을 불살라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싶다. 내가 마땅히 나의 몸으로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친히 태묘(太廟)에 기도드릴 것이니, 인구(引咎)·자책(自責)하는 뜻으로 각별히 말을 만들어 제문(祭文) 가운데에 첨가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를 수행하여 제사에 참여하는 집사관(執事官) 이하는 부디 나의 뜻을 체념(體念)하여 그 몸을 목욕하고, 그 의복을 깨끗이 씻은 뒤 경건하게 재숙(齋宿)163) 할 것이며, 혹시라도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궁궐 안팎 각처의 더럽고 지저분한 물건들을 각별히 깨끗이 청소하라.’ 하고, 드디어 태묘에 비를 내려 주기를 기도하였다. 또 백성들에게 효유(曉諭)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서 하는 일이 착하지 못한 것이 많았기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게 만들었다. 수재(水災)·한재(旱災)·풍재(風災)·상재(霜災)가 너희들의 화곡(禾穀)을 해쳐 나의 아무런 죄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구렁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의 심장이 칼로 베는 듯하고 너희들의 위에 임할 면목이 없다. 다만 바라노니, 너희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참고 아내와 자식들을 보전하여 혹시라도 유랑(流浪)하거나 이산(離散)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바야흐로 입고 먹는 것을 깎고 줄여 너희들을 구해 살릴 계책을 마련하고 있으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여기지 말라. 아! 너희들은 나의 적자(赤子)가 아니냐? 부모가 비록 혹 가난하여 제 자식을 양육하지 못할지라도 어찌 그 자식으로서 부모를 버리고 떠나가는 자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간혹 굶주림에 몰려 도적이 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그것이 본심(本心)이겠는가? 실로 내가 너희들의 생업(生業)을 마련해 주지 못한 데서 말미암아 이미 항심(恒心)이 없고 또 평소의 교화(敎化)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내가 밤낮으로 마음을 썩이며 눈물을 흘리는 까닭이다. 너희 할아비와 너희 아비부터 우리 조종(祖宗)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그 전리(田里)를 보전하며 편안히 생활하고 즐겁게 일해 온 지 이제 3백 년이 되었다. 지금 비록 곤궁하고 급박하더라도 어찌 차마 나를 버리고 유랑하여 이산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찌 착하지 않은 마음을 싹틔워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빠져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생각건대 경대부(卿大夫)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스스로 보통 백성과는 같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각기 이웃 마을에 권유하여 혹시라도 유랑하여 이산하거나 절도(竊盜)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자급 자족(自給自足)하고 만약 서로 도와줄 형편이 되면 함께 서로 나누어 먹고 혼자만 살려 계획하지 말라. 서명(西銘)164) 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요, 만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다.」 하였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물(物)에 대해서도 도리어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동포에 대해서이겠는가? 내가 백성들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애통한 말을 꺼내니, 마땅히 나를 가엾이 여겨 생각을 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에게 선유(宣諭)하기를, ‘아! 그대 방백(方伯)들은 혹시라도 편안히 앉아 있지 말고, 여러 고을을 순력(巡歷)해 그 고을 수령을 직접 만나 함께 흉년을 구제할 대책을 의논하고, 아전과 백성들을 만나 조정의 힘써 구휼하려는 뜻을 효유(曉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원한을 품고서 유랑하여 이산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 내가 주자(朱子)가 절강성(浙江省) 동쪽의 구황사(救荒使)가 되었을 때 그 문인(門人)이 기록한 것을 보았더니, 이르기를, 「공(公)이 백성의 괴로움을 캐내고 찾아 묻기를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잠자는 일과 먹는 일까지 폐하기에 이르렀고, 깊은 산골짜기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번 나갈 때는 반드시 가벼운 수레를 탔고, 따라다니는 수행원들을 물리쳤으며, 자신에게 소용되는 물품은 스스로 싸가지고 다니니, 관할 구역 안에서도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관리(官吏)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하고 신칙해 늘 사자(使者)가 경계 안으로 들이닥치는 듯 여기니, 이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후 입견(入見)하였을 때 효종(孝宗)이 맞이하여 위로하기를, 『절동(浙東)에서 애쓴 수고를 짐(朕)이 아는 바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의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병사(兵使)·수사(水使)·수령(守令)·첨사(僉使)·만호(萬戶)·찰방(察訪)과 같은 경우에도 또한 각기 소속된 군사와 백성이 있으니, 각각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기의 굶주림처럼 여기고, 백성들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처럼 여기는 마음을 먹는다면, 어찌 서로 구제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였다.

11월에 왕이 천연두에 걸렸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걸린 질환이 며칠 안 가서 바로 나았으니, 이는 실로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몰래 도우신 데 힘입은 것으로, 특별한 위열(慰悅)의 행사가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이 얼어붙는 계절에 죄수들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 이하는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그 뒤에 왕이 말하기를, ‘대개 「사(赦)」란 소인(小人)에게 요행이 되는 것으로 옛 사람이 「삼가 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그 임금에게 진계(陳戒)하였다. 세도(世道)가 떨어지고 풍속이 나빠져 인심(人心)이 각박하고 악한 때는 더욱 전에 없는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풀어 간사한 사람들의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열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 위중한 병이 조금 나았을 때 다만 위열(慰悅)이 급한 줄로만 알고 뒷날의 폐단이 한없으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여 경솔하게 뒤섞어 석방하였으므로, 뒤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비록 다시 가두고 추핵(推覈)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약 혹시라도 일시적인 특교(特敎)로 인해 뒷날 전례로 끌어다 응당 행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 전례로 끌어대지 말도록 할 일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나라를 망하게 하고 몸을 잃는 화(禍)가 진실로 한 가지 길이 아니지만, 고금(古今)서 찾아보면 술에 빠진 나머지 그 덕(德)을 뒤집어 엎은 데서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조종(祖宗)께서 깊이 근심하고 먼 장래를 생각하여 간곡하게 효유(曉諭)하셨는데, 근일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이 다만 모여서 술마시는 것만을 일삼아 위로는 나라일을 치지 도외(置之度外)하고, 아래로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근심 걱정을 끼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금처럼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들이 원망하는 날은 군신(君臣) 상하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히 노력해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감히 술에 빠져 일을 폐할 수 있겠는가? 아! 그대 신하들은 능히 이 뜻을 체념하여 모여서 술마시는 일을 경계하고, 그대들의 직무에 정성껏 부지런히 힘써 시대의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5일에 왕대비(王大妃)가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명성(明聖)’이라 하였다. 갑자년165) 4월 명성 왕후 숭릉(崇陵)에 부장(祔葬)하고, 양주(楊州)의 대동미(大同米)를 2두(斗)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천연두를 앓을 적에 무녀(巫女)가 대궐로 들어가 기도하였는데,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세채(朴世采)가 상소하여 논했다. 그래서 유사(攸司)로 하여금 조사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형벌을 가해도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갑옷 만드는 사람은 다만 사람이 다칠까 두려워하고, 무당과 관(棺) 만드는 목수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무녀가 궁중에 들어와 기도하고 축원한 것은 참으로 지극히 불경스러운 일로, 비록 항양(桁楊)166) 아래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아깝게 여길 것이 없다. 하지만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들이 만약 스스로 「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또한 좋지 않을 일일 듯하다.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4월 3일에 왕대비(王大妃)의 상(喪)을 발인(發靷)하였다. 왕이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지송(袛送)하였고, 반우(返虞)할 때에는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공경히 맞았다. 하교하기를, ‘올해는 바로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의 주갑(周甲)이다. 일찍이 따로 풍정(豊呈)을 베풀어 경하를 표시하려고 하였으나, 생각하건대, 내가 이러한 도독(荼毒)167) 을 당해 애일(愛日)의 정(情)을 펼 수 없어 기쁨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닥치니, 나의 감회가 어찌 한있겠는가? 여염집의 경우로 말한다 해도 만약 이런 경사를 만나면, 비록 상중(喪中)에 있더라도 반드시 별도로 위열(慰悅)하는 행사가 있을 것이다. 이번 자의전(慈懿殿)의 탄신일(誕辰日)에는 대내(大內)로부터 장차 설공(設供)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궁중의 시어(侍御)하는 사람들에게도 또한 모두에게 반사(頒賜)하는 은전이 있을 것이니, 진상(進上)하는 물건을 평년(平年)에 비하여 더 진상(進上)하도록 하고, 반사(頒赦)도 또한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의논으로 인해 진하(陳賀)를 거행하지 않았다.

좌참찬(左參贊) 이단하(李端夏)가 선조조(宣祖朝)의 보감(寶鑑) 다섯 책(冊)을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嘉尙)하게 여기고, 이어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한재(旱災) 때문에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 삼사(三司)를 부르라고 명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계책을 하문(下問)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사이 선비들의 풍습이 날이 갈수록 더욱 들뜨고 경박해지니, 그 허물은 전적으로 부형(父兄)들에게 있다. 집안에 엄격한 부형이 없고 조정에 훌륭한 스승과 선비가 없으면 인재를 양성할 수 없을 것이니, 훗날에 입신(立身)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지금부터 이후로 대사성(大司成)은 반드시 문학(文學)이 있고, 전중(典重)하며 과묵(寡默)한 자를 골라 차임(差任)하여 선비의 풍습을 크게 변화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을축년168) 에는 특별히 내수사(內需司)의 쌀과 면포(綿布)를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고, 청백리(淸白吏)를 가려 뽑을 것을 명하였다. 또 음관(蔭官) 중에서 곤임(閫任)에 적합한 자와 무신 당상(武臣堂上)을 골라 효종조(孝宗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개강(開講)할 때 번갈아가며 입시(入侍)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옥(獄)이란 천하의 큰 명맥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공경할진저 공경할진저! 오직 형벌(刑罰)은 신중히 다룰지니라.」 하였고, 《논어(論語)》에 또한 말하기를, 「만약 그 실정을 알아내면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 하였으니, 주언(奏讞)할 즈음에 상세하고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보건대,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자식이 부모를 숨겨준다거나 아내가 남편을 숨겨준다거나 손자가 조부모(祖父母)를 숨겨주는 등의 송사는 다스리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전대(前代)의 아름다운 뜻이었다. 그리고 또 법률(法律)을 상고해 보니, 또한 「모반(謀叛)과 반역(反逆) 외에 자손·처첩(妻妾)·노비(奴婢)가 그 부모나 가장(家長)을 고발한 경우는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조문(條文)이 있다. 그런데 근래 외방(外方)의 형옥 문안(刑獄文案)을 보건대, 사건이 그다지 중대하지 않음에도 간혹 자손으로 하여금 그 부모나 조부모를 증거대게 하거나 처첩에게 그 가장을 증거대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부자가 함께 죄를 범했다거나 처첩이 모두 나쁜 짓을 한 경우는 똑같이 추치(推治)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외방에 지체된 옥사(獄事) 중에는 심지어 여러 해를 경과한 경우도 있다 하는데, 만일 의옥(疑獄)으로서 처결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감사(監司)가 즉시 계문(啓聞)하여 재처(裁處)할 것을 청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름지기 조속히 처결할 일을 각도(各道)에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천원옥력(天元玉曆)》의 글은 하늘과 땅, 해와 달, 바람과 구름, 별 등의 재앙과 상서에 대해서 갖추어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기상(氣象)을 관측하고 점(占)을 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시대적으로 멀고 가까운 차이점이 있으니, 똑같이 운대(雲臺)169) 에 비치(備置)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한 건(件)을 내리니, 혹은 사들여 오고 혹은 잘 베껴 써서 보관해 두라.’ 하였다.

극심한 한발 때문에 궁인(宮人) 25명을 내보냈다. 이때 여름부터 가을이 되기까지 가뭄이 더욱 혹독해졌으므로 여러 차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왕이 말하기를, ‘얼마 전의 제문(祭文)에다 나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책망하는 말이 몹시 소략하였으므로, 도로 내주어 고쳐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혹시라도 수향(受香)이 조금 늦어질까 염려스러워 관례에 따라 계하(啓下)하였으므로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 이제 삼각산(三角山)에 대한 제문(祭文)을 보니, 나 자신을 책망하는 말을 약간 언급했지만, 간절하고 급박하게 슬피 호소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다시 고쳐지어 들여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죄수를 소결(疏決)하였으며,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최복(衰服)을 벗고 임시로 길복(吉服)을 입은 채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기도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조처에서 나온 것인데,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하여 천심(天心)을 돌리지 못하고 대단한 가뭄은 갈수록 심해져 논밭이 텅텅 비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허둥지둥하며 고통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니, 이제 막 직접 기도했다 하여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하고,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남교(南郊)와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하게 하였다. 제문(祭文)은 대제학(大提學)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했는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책망하는 뜻을 각별히 덧붙여 넣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번 가뭄은 옛날에 없던 것이다. 만약 며칠이 더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곡식조차 장차 다 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애타게 근심한 나머지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몰라 구언(求言)의 교지(敎旨)를 내린 지 이미 30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잠잠하게 있을 뿐이다. 진언(進言)을 해도 써 주지 않는다면 군상(君上)의 잘못이지만, 구언을 해도 말하지 않는 것은 책임이 군하(群下)에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내가 기쁘게 받아들이는 도량이 좁아서 그런 것이다. 옥당(玉堂)은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이미 광구(匡救)하는 말이 없고, 양사(兩司)에서도 또한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어찌 내가 함께 큰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몹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하였다.

민충단(愍忠壇)170) 및 전사(戰死)한 사람과, 경신년171) ·신유년172) 에 굶어 죽은 사람 등에게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고, 폐문(閉門)·천시(遷市) 등의 일 또한 즉시 거행하였다. 대신(臺臣)이 아뢰기를, ‘외간(外間)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금중(禁中)에서 새로 몇 개의 괴석(怪石)과 깎은 돌을 얻어 세워놓고 있다.」고들 합니다. 이처럼 어렵고 걱정스러운 날 자질구레한 노리개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성명(聖明)께 바라던 바가 절대 아닙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 말은 사실 지나친 점이 없지 않으나, 옛 말에 「과실이 있으면 고치고 과실이 없으면 더욱 노력하라.」고 하였으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예원(隷院)의 단자(單子)를 보았더니, 송사(訟事)를 접수한 지 3년이 되도록 판결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태만한 습관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당랑(堂郞)을 추고(推考)하라. 여러 관사(官司)의 관원들이 묘사 유파(卯仕酉罷)하는 것이 법전(法典)에 실려 있고, 계하 공사(啓下公事)를 3일 만에 복계(覆啓)하는 것도 또한 수교(受敎)가 있는데, 백관(百官)들이 직무를 게을리하여 완급(緩急)을 살피지 않고 대부분 지체시키니, 아울러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8월에 숭릉(崇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슬픈 안색과 애절한 곡읍(哭泣)에 보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12월에 친히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대상제(大祥祭)를 행하였다.

병인년173) 2월에 몸소 담제(禫祭)를 행하였다. 3월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장차 선비들을 시험하려 했는데, 짓밝혀 죽은 거자(擧子)가 6, 7명이나 되었다. 왕이 놀라 슬퍼하여 춘당대(春塘臺)에서 시험을 물려 보였다. 연신(筵臣)이 궁금(宮禁)이 엄중하지 못함을 진백(陳白)하니, 왕이 말하기를, ‘항상 신칙(申飭)을 더하는데도 대궐 안의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별도로 과조(科條)를 세워 만약 무단 출입하며 대궐 안의 말을 전파하는 자가 있다면 연설(筵說)을 누설한 죄와 똑같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에 자의 대비전(慈懿大妃殿)에 풍정(豊呈)을 올렸다. 왕이 말하기를, ‘삼가 상수(上壽)의 예(禮)를 거행해 자손들이 모두 모여 밤이 다하도록 잔치를 벌이고 술잔을 들어 장수를 경하하여 화기(和氣)가 무르녹으니, 이는 실로 보기 드문 행사이다. 어찌 기쁨을 금할 수 있으랴? 지존(至尊)의 주갑(周甲)보다 더 큰 경사가 있을 수 없으니 휘호(徽號)를 받들어 올리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하고, 5월에 ‘강인(康仁)’이란 존호(尊號)를 올렸다. 왕이 무오년174) 에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죽은 이애경(李愛卿)의 아들이 나이가 지금 83세인데, 효행이 탁이(卓異)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8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하교하기를, ‘예사롭지 않은 재앙이 끊이지 않고 거듭 나타나니, 근심스럽고 두려워 날이 갈수록 전전 긍긍한다. 비록 보통 해일지라도 절약해서 쓴 뒤에야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흉년에는 더욱 마땅히 절약하고 줄여야 한다. 호남(湖南)의 삭선(朔膳)을 내년 가을까지 한정하여 덜어내어 줄여주고, 삼명일(三名日)175) 의 진상(進上)도 또한 정지하도록 하라. 여정(餘丁)에게서 거두는 포(布)를 정파(停罷)하고 첩가미(帖價米)를 없애며, 신해년176) 의 전례에 의거하여 어공(御供)을 재량하여 줄이도록 하라. 그리고 소금 5백 석(石)을 제주도(濟州島)에 보내어 구휼품에 보태도록 하라.’ 하였다.

정묘년177) 에 대신(大臣)의 청에 따라 성묘(聖廟)에 종향(從享)한 여러 현인들의 자손을 모두 녹용(錄用)하고 그 벼슬을 대대로 물려받게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사유(師儒)의 말에 따라 연산(連山)·남포(藍浦) 두 고을의 세미(稅米)로서 전란을 겪은 뒤 지부(地部)로 귀속시켰던 것을 다시 양현고(養賢庫)에 보냈다.

서도(西道)에 별과(別科)를 베풀었다. 법전(法殿)에 나가서 친림(親臨)하여 여러 종친(宗親)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강릉(康陵)을 전알(展謁)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사단(射壇)에서 군용(軍容)을 관람한 뒤 다섯 대장(大將)에게 구마(廐馬)를 하사하고, 군병(軍兵)들에게는 상(賞)을 내려 주었다. 만수전(萬壽殿)에 불이 나서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만수전의 화재(火災)는 실로 전사(前史)에 보기 드문 재변이다.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니, 진실로 내가 재덕(才德)이 천박하고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아주 천심(天心)에 맞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예사롭지 않은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미앙궁(未央宮)의 재앙178) 은 한(漢)나라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옛 말에 이르기를, 「사치의 해독은 하늘의 재앙보다 심하다.」 하였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두려움이 갑절이나 더하다. 마땅히 정부(政府)에서는 널리 바른 말을 구하여 나의 부족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고, 대소 신료는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며 부지런히 힘써서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장릉(長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언젠가 술사(術士)가, ‘장릉의 택조(宅兆)가 이롭지 않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산릉(山陵)을 옮기는 것은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반드시 봉심(奉審)한 다음 결정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하교하기를, ‘50년이나 된 능침(陵寢)을 하찮은 결점이 있다 하여 단지 풍수설(風水說)만 믿고 경솔하게 옮길 수는 없다.’ 하였다. 그 뒤로 그에 대한 의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특별히 고양(高陽) 파주(坡州)의 금년 세태(稅太)179) 를 감해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부터 왕위를 이은 임금의 기원(紀元)은 반드시 즉위한 다음해부터 시초(始初)로 삼았으니, 옛 역사를 두루 보더라도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이번 전시(展試)의 책제(策題)에다 「이제 14년이 되었다」 하였다. 그러므로 개점(改點)하여 내려 준다.’ 하였다.

야대 때 강관(講官)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이르기를, ‘이 술은 주량(酒量)대로 마시고 사양하지 말라. 하지만 술의 해독을 내가 상세히 알고 있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부모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또 그 자신에게도 이롭지 못하며 직무에도 피해가 있으니, 엄중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시(詩) 한 절구(絶句)를 내려 계칙(戒勅)하는 뜻을 보이고, 여러 신하들에게도 화합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친히 대정(大政)을 행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치란(治亂)은 훌륭한 인재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고, 등용하고 퇴진시키는 권한은 전조(銓曹)에 있다. 세상이 잘 다스려져 태평 무사할 때의 늘 하는 주의(注擬)일지라도 오히려 면려(勉勵)해야 마땅한데, 하물며 지금처럼 나라일에 어려움이 많아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 정의(情意)를 유통시키는 때이겠는가? 반드시 자기의 사의(私意)를 떨쳐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절의(節義)를 포창하고 덕행(德行)을 숭상하며, 청렴한 관리를 등용하고 벼슬길이 막힌 사람을 틔워 줄 것을 생각하고 용동(聳動)시키고 진작(振作)시키는 방도로 삼도록 하라. 관안(官案)을 살펴보고 결원이 있는 대로 의망(擬望)하여 들이고 의망한 대로 점하(點下)한다면, 한 사람의 정관(政官)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찌 친히 대정(大政)을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정을 파한 뒤 선온(宣醞)하였다.

경기(京畿)·공홍(公洪)180) ·강양(江襄)181) ·황해(黃海)·함경(咸鏡) 5도(道)의 세태(稅太)의 절반을 제감(除減)해 주고, 여러 도(道)의 춘수미(春收米)를 재실(災實)을 구분하여 차등있게 면제해 주거나 경감해 주었다.

무진년182) 정월 초하루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군신(群臣)의 조하(朝賀)를 받은 뒤에 또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거행하였다. 삼사(三司)의 금란(禁亂)·징속(徵贖)183) 의 제도를 개정할 것과 서로(西路)의 성지(城池)가 무너진 곳을 허물어지는 대로 즉시 보수할 것을 명하였다.

금루군(禁漏軍)이 대궐문이 닫힌 뒤 담을 넘어 들어왔으므로 병조(兵曹)에서 법에 따라 일죄(一罪)184) 로 처단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우매하고 용렬한 군사를 굳이 심하게 다스릴 필요가 없으니, 종중(從重)하여 곤장으로 다스리라.’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법(法)으로 간쟁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법은 비록 이와 같지만 정상을 보면 용서할 만하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왕이 장차 영릉(寧陵)을 전알(展謁)하려 하자, 우의정(右議政) 이숙(李䎘)이 차자(箚子)를 올려, ‘흉년에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고 또 전염병이 많다.’며 뒷날로 물려 행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옛적에 동한(東漢)의 명제(明帝) 원릉(園陵)을 참배하려 할 때 밤에 선제(先帝)와 태후(太后)가 평상시처럼 즐거워하는 꿈을 꾸고 비통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책력을 살펴 좋은 날을 가리고 곧바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능(陵)에 올라가 참배하였다. 내가 일찍이 꿈에 효묘(孝廟)를 뵈니 효묘께서 손을 맞잡고 기뻐하시며 옥음(玉音)이 정녕(丁寧)하셨다. 깨어나니 눈물이 흘러서 양볼을 적셨으며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간절하여 실로 스스로 억누르기 어려웠다. 신도(神道)를 생각해 본다면 사람의 정리를 벗어나지 않고 지극한 정리가 있는 곳에는 하늘도 반드시 가엾이 여겨 용서해 줄 것이다. 그런즉 저들이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령한 백성들이니, 어찌 이번의 행차가 마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영릉에 거둥하였다. 광주 산성(廣州山城)의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왕이 말하기를, ‘인조(仁祖)께서 병자년185)  주필(駐蹕)186) 하셨던 곳을 이제 마침 와서 보니 슬픈 감회를 가눌 길이 없구나!’ 하고, 양주(楊州)·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 네 고을의 봄철 대동미(大同米)를 면제해 주었으며, 여주 지역 안에 나이 70 이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음식물을 제급(題給)하였다. 온왕(溫王)187) 의 사당과 영창 대군(永昌大君)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숙정(淑靜) 네 공주(公主)와 여양(驪陽)·광성(光城) 두 국구(國舅)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또 쌍수(雙樹) 험천(險川)의 전투에서 사망한 장졸(將卒)들과 신해년188) 에 굶어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곳에 사제(賜祭)할 것을 명하였다. 왕이 쌍수령(雙樹嶺)을 지나다가 어가(御駕)를 멈추고 묻기를, ‘이곳이 싸움터인가? 민영(閔栐)·허완(許完) 등이 천리(千里)의 먼 길을 달려 근왕(勤王)하고 여기에서 싸우다 죽었다. 지금 이곳을 지나자 더욱 슬픔이 복받친다. 두 사람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다가 전사(戰死)한 신성립(申誠立)과 전공(戰攻)이 있는 서흔남(徐欣男)의 자손을 수용(收用)할 것을 명하였다. 성(城)이 포위되었을 때 관속(官屬)으로서 생존한 자에게는 음식물을 제급하고, 가자(加資)하지 않은 자에게는 특별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태조 대왕(太祖大王) 수용(睟容)189)  전주(全州)로부터 받들고 와서 강가에 도착하니, 왕이 나루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그리고 자정전(資政殿)에 봉안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이를 모사(摹寫)한 신본(新本)이 완성되자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하였다. 화상을 모시고 지나온 각 고을의 봄 대동미를 재량하여 감면해 주고, 민전(民田)으로서 연로(沿路)에 떼어져 들어간 곳이나 각 고을의 주전(廚傳)에 지공(支供)한 것은 모곡(耗穀)으로 보상해 주도록 하였다.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증세가 위독해지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묘사(廟社)190) 와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를 드렸고, 역옥(逆獄)이나 강상(綱常)에 관계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수들까지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자의 대비가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는 장렬(莊烈), 휘호(徽號)는 정숙 온혜(貞肅溫惠), 전호(殿號)는 효사(孝思), 능호(陵號)는 휘릉(徽陵)이라 하였다.

어떤 술사(術士)가 투소(投疏)하여, ‘쌍유 병결(雙乳並結)의 혈(穴)을 구하거나 아니면 일강 상하(一岡上下)의 땅을 골라 장릉(長陵)을 옮겨 모시어 두 능(陵)이 구역(區域)을 같이하는 계획을 세울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직접 살펴보고 단정(斷定)할 일이며 지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그 사람을 처벌하였다.

상원(祥原) 사람이 상소하여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하는 폐단을 낱낱이 아뢰니, 즉시 폐지할 것을 명하였다.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어미가 옥교(屋轎)를 타고 대궐을 출입하니, 대관(臺官)이 그 교자(轎子)를 불사르고 그 하인들을 추치(推治)하였다. 왕이 ‘그들에게 출입(出入)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논계(論啓)도 하지 않고 멋대로 형벌을 가했다.’고 하여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금리(禁吏)와 소유(所由)191) 를 죄주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많이 간쟁하니, 왕이 말하기를, ‘당초 형신(刑訊)하게 한 것은 대개 한때의 지나친 행동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들으니 두 사람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한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하건대, 후회스러워 실로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든다.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다시 헌신(憲臣)의 상소에 답하기를, ‘칠정(七情) 가운데서 쉽게 발동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생각건대 분노가 가장 심하다. 나의 병통은 언제나 여기에 있고, 지난번의 일 또한 한때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이런 전에 없는 과오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실로 함양(涵養) 공부에 미진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으로, 나 자신을 반성하고 부끄러워하고 있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여백공(呂伯恭)192) 은 한낱 필부(匹夫)였지만 문득 성인(聖人)의 가르침에 각성하여 이에 그 기질(氣質)을 변화시켰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일을 할 능력이 있는 자는 또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반드시 본원(本源)이 되는 곳에 뜻을 더하여 능히 존양(存養)의 공부를 이룬 뒤에라야 거의 거칠고 사나운 병통을 떨어버리고 빈번한 후회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으로써 내 마음에 스스로 경계하는 바이나, 어찌 밖으로 뉘우치는 단서를 보이면서 안으로 분노를 품어 사람들에게 도량이 넓지 못함을 보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15일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발인(發靷)이 있었고, 16일에 반우(返虞)하였는데, 왕이 동교(東郊)에서 곡하며 전송했고 곡하며 맞이하였다.

기사년193) 정월(正月)에 원자(元子)의 위호(位號)를 정할 것을 명하였다. 원자는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소생이다. 장씨를 봉하여 희빈(禧嬪)으로 삼았다.

왕이 ‘과거(科擧)는 선비들이 출신(出身)하는 첫길인데, 근래 과거를 치른 뒤에 언제나 사람들의 말이 있다.’ 하고 시관(試官)을 승정원(承政院)에 불러오게 하여 ‘공정(公正)하게 사람을 뽑으라.’고 신칙(申飭)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봄바람이 불어 얼음이 풀리고 흙의 맥박이 막 움직이니, 권농(勸農)하고 진대(賑貸)하는 뜻을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5월에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사제(私第)에 물러가 있도록 하고,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올려 왕비(王妃)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가뭄 때문에 소결(疏決)하였다.

경오년194)  서흥현(瑞興縣) 일대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니, 왕이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예관(禮官)을 보내 본현(本縣)의 사단(社壇)과 경내(境內)의 명산(名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6월에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를 책봉(冊封)하였다. 10월에 장렬 왕후(莊烈王后)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였다.

삼남(三南) 지방과 경기(京畿) 각 아문(衙門)의 무진년195) 이전의 결딴난 증미(拯米)196) 6천여 석을 탕감(蕩減)해 주었다.

야대(夜對) 때 강(講)을 마친 다음 선온(宣醞)을 명하고, 손수 사운시(四韻詩)를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는데, 이르기를, ‘막막한 천지 한이 없는데,[天地茫無垠] 이 한 몸은 너무나도 작구나.[眇然有一身] 타고난 성품은 본래 착한 것,[秉彝本自善] 물욕이 유혹해서 진성(眞性)을 잃게 되네.[物誘乃亡眞] 마음잡고 놓는 것은 호리(毫釐)에서 판가름나고,[操舍毫釐判] 성인(聖人)과 미치광이는 잠깐 사이에 이루어지네.[聖狂俄頃臻] 사심(邪心)을 막는 것은 경(敬)만한 것이 없고,[閉邪莫若敬] 사욕(私慾)을 극복하면 날마다 덕이 새로워진다.[克己日維新]’ 하였다. 이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도록 하였다.

신미년197) 에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이 그 전에 환시(宦侍)에게 전해 들은 것으로 내수사(內需司)의 일을 진달(陣達)하였는데, 그 말이 선조(先朝)에 관련되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들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쓰라.」고 하였다. 내조(內朝)와 외조(外朝)는 옛부터 사이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므로, 원래 마땅히 서로 더불어 수작하거나 선조(先祖)를 평론(評論)할 수 없는데, 이런 말을 가지고 또 진달하였으니, 지극히 터무니가 없다. 김덕원을 파직(罷職)하라.’ 하고, 곧이어 내시부(內侍府)에 명을 내려 그 환관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아울러 그 자서(子婿)들의 적(籍)까지 삭제해 버리게 하였다.

어제(御題)로 반유(泮儒)198) 에게 책문(策問)으로 시험을 보이고 한 방(榜) 모두 급제(及第)를 주었다.

정릉(貞陵)을 전알(展謁)하고 지나는 길에 무안왕(武安王)199) 의 사당에 들어가 손을 들어 읍(揖)하였다. 이어 날을 가려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동남(東南)쪽의 사당이 훼손된 곳을 즉시 보수하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지나는 길에 여기에 들른 것은 실로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감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무사(武士)들을 격려하고 권장하기 위한 것이다. 아! 그대 여러 장수들은 부디 나의 이러한 의도를 체념하고 더욱 충의(忠義)에 힘써 왕실을 보위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단(射壇)에 주필(駐蹕)하고 관병(觀兵)한 뒤 다시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관무재(觀武才)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담명(李聃命)이 보리 이삭이 두세 갈래 혹은 너댓 갈래로 난 것을 아름다운 상서라 하여 봉진(封進)하니,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삼남(三南) 지방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호조(戶曹)에 바칠 세태(稅太) 1만 2백여 석과, 쌀 9천 5백 60여 석, 선혜청(宣惠廳)에 바칠 쌀 3만 4천 5백 60여 석을 탕감해 주고, 삼남(三南)에 주진곡(賙賑穀) 10만여 석을 이전(移轉)하여 주었다.

친히 천자문(千字文)의 서문(序文)을 짓고 세자(世子)에게 이것으로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이때 각 영문(營門)의 군졸(軍卒)들을 징발하여 강도(江都)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중사(中使)200) 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기를, ‘너희들이 직접 판삽(版鍤)201) 을 잡고 있으니 노고(勞苦)가 실로 많다. 나의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어찌 다만 송제(宋帝)가 서쪽으로 원정한 장졸(將卒)들을 걱정한 정도일 뿐이겠는가?202) 이에 나의 뜻을 선유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석뇌(錫賚)203) 를 더하였다. 또 어주(御酒) 60병을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모두에게 두루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대개 또한 투료 음하(投醪飮河)204) 하는 뜻이다.’ 하였다. 또 수령(守令)들에게 명하기를, ‘군졸 중에 만약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민간(民間)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으면 군법(軍法)으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였다. 이어서 선비를 시험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회유(誨諭)하기를, ‘상서(庠序)와 학교(學校)를 만들어 사방(四方)의 선비를 양성하는 까닭은 대개 바른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선(善)을 택해서 자신을 닦으며, 인륜(人倫)에 근본을 두고 물리(物理)에 밝게 하고자 함이니, 어찌 단지 글이나 짓고 녹(祿)이나 구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옛날 전손(顓孫)205) 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참으로 능히 학문이 넓고 선택이 정밀하며 조수(操守)가 간요(簡要)하다면 벼슬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찾아올 것이다. 가만히 살펴 보건대, 근래에 선비들의 습속이 옛날같이 않아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단정하여 정치의 방법에 밝게 통달한 사람은 적고, 문사(文詞)를 숭상하고 녹리(祿利)를 추구하는 자들만 넘실대니, 이것이 어찌 조종(祖宗)의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신 본뜻이겠는가? 옛적에 안정(安定) 호공(胡公)206)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의 교수(敎授)가 되었을 적에 부지런히 바르게 계칙(戒勅)하니,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들과 판이하였다. 더구나 지금은 훌륭한 여러 선비들이 지척에 있고 위와 아래의 정(情)과 뜻이 막힘없이 통하니, 유액(誘掖)하고 격려하는 바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나의 훈계를 공경히 들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잃지 말라.’ 하였다.

임신년207) 에 군신(群臣)들에게 교칙(敎飭)하기를, ‘백성들의 괴로움을 찾아 묻고,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학업을 권면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에 서쪽 오랑캐가 큰 개를 바치자 군석(君奭)208) 이 글을 지어 무왕(武王)을 경계하였다. 이번에 연신(筵臣)들이, 「이상한 물건을 물리치고 검소한 덕을 밝히라.」고 누누이 진달(陣達)하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그 주청을 옳게 여기는 바이다. 이제 은서피(銀鼠皮)로 만든 어구(御裘)를 내려 주니,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불사르게 하라.’ 하였다.

연신(筵臣)들에게 말하기를, ‘조송(趙宋)209) 은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웠지만 그래도 장리(贓吏)를 용서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장법(贓法)이 엄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그 해독을 입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마씨(司馬氏) 문지(門地)210) 를 앞세우고 재예(才藝)를 뒷전으로 하였으니, 실로 인재를 선택하는 방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도 또한 그러하여 전적으로 문벌(門閥)로 사람을 뽑으니, 이 때문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잃는 한탄이 있다.’ 하였다.

또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공자(孔子)·맹자(孟子)·정자(程子)·주자(朱子)는 모두 이름을 휘(諱)하면서 유독 증자(曾子)에 대해서는 이름을 휘하지 않으니, 옳은 일이겠는가? 모두 휘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남교(南郊)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날 태종조(太宗朝)에는 전대(前代)의 본받을 만한 일을 벽(壁) 위에 그려 놓을 것을 명하였고, 성종(成宗)은 역대(歷代)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고 경계로 삼을 만한 것들을 골라서 병장(屛障)에 그리도록 명하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시(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는 대개 아침 저녁으로 관람(觀覽)하여 권선 징악에 대비(對備)하려고 하였던 것이니, 어찌 자손이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나는 전대(前代)의 본받을 만한 선(善)으로 제요(帝堯)가 어진이를 신임하여 선치를 도모한 것과 제순(帝舜)이 노래를 지어 칙명한 것211) 과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방울을 매달아 놓고 간언(諫言)을 구한 것212)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것213) 과, 중종(中宗)214) 이 덕으로 상상(祥桑)을 없앤 것215) 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은택이 마른 해골에까지 미친 것216) 과, 무왕(武王)이 단서(丹書)로 계칙을 받은 것217) 과, 선왕(宣王)이 간언(諫言)에 감동하여 정사를 부지런히 한 것을 뽑아서 8폭(八幅) 병풍을 모사(摹寫)해서 만들고, 또 경계할 만한 악(惡)으로 태강(太康)이 사냥하며 즐기다가 덕망을 잃은 것과,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시리(市里)에 미행(微行)한 것과, 애제(哀帝)가 아첨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어진이를 죽인 것과, 영제(靈帝)가 서저(西邸)에서 관직을 판매한 것과,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양거(羊車)를 타고 잔치에서 노닌 것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재물을 긁어모아 사치한 것과, 의종(懿宗)이 성내어 간하는 신하를 유배시킨 것과,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간적(奸賊)을 임용(任用)한 것 등을 뽑아서 또한 8폭 병풍을 만들어 좌우(左右)에 놓아 두고 성찰(省察)의 자료로 삼고자 한다. 주문(主文)의 신하에게 각각 율시(律詩)를 지어 병풍 머리에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날 하(夏)나라 우왕(禹王) 시절에는 백성들이 호호(皡皡)218) 하였는데도 오히려 당우(唐虞)만 못하다고 깊이 스스로 각박하게 꾸짖었으며, 심지어 수레에서 내려와 죄인을 보고 울기까지 하였다. 나는 여기에 대해 일찍이 세 번 반복하여 흠탄(欽歎)해 마지않았다. 지금 세속(世俗)은 타락하고 백성의 습속은 퇴패한 나머지 어버이를 사랑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전연 알지 못하고, 인륜에 어긋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이 날로 달로 붙어나고 있는데, 호서(湖西)에서 또 자식을 살해하는 변고가 생길 줄이야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아!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고 자식은 아버지를 사랑하니, 이것은 하늘에서 부여한 떳떳한 성품이다. 저들이 비록 어리석을지라도 또한 반드시 본래의 성품을 잃어버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차마 못할 짓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유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보잘것없는 나 소자(小子)가 일찍이 덕(德)과 예(禮)로 인도할 줄 알지 못하고, 단지 법제(法制)와 형벌(刑罰)만으로 그들이 죄를 멀리하기를 구차하게 기대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랑하지 않고 가볍게 법을 범(犯)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날로 강상(綱常)은 무너져서 나라는 뒤따라 위망(危亡)한 지경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니, 과매(寡昧)가 스스로 책망하고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가 어찌 다만 대우(大禹)가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그러나 조종(祖宗)의 깊은 사랑과 큰 은택이 사람들의 살갗에 젖어 있음을 생각하건대, 무릇 우리 백성들이 누가 흥기하고 감동하지 않겠는가? 아! 너희들 크고 작은 백성들은 나의 십행(十行)의 사륜(絲綸)이 오로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음을 체념하고, 착한 마음을 감발(感發)시켜 각자 격려하며 나의 교유(敎諭)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올해 회양(懷襄)219) 의 참혹함은 옛적에 없던 일이다. 여러 도(道)에서 엄사(渰死)220) 한 사람이 거의 6백 명이란 많은 수에 이르렀으니, 무엇이 이보다 놀랍고 비참하랴? 비록 관례대로 휼전(恤典)의 명을 내리긴 하였으나 별도로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없으니, 죽은 사람들 중에 신역(身役)을 다 바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눈이 내린 뒤 추위가 기승을 떠는데, 저들 궁성 밖에서 숙위(宿衛)하는 군졸(軍卒)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견뎌내는지 염려스럽다. 입직(入直)한 군사는 대내(大內)에서 이미 술과 음식을 대접했으나, 안과 밖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자시(內資侍)로 하여금 더운 술을 대접하게 하고, 사재감(司宰監)으로 하여금 마른 안주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계유년221)  목릉(穆陵)에 거둥하여 그 길로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수찰(手札)로 부로(父老)들을 효유(曉諭)하고,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읍(圻邑)의 춘수미(春收米)를 가을까지 기다려 물려 받도록 하고, 양주(楊州)의 정묘년222) 조의 환상(還上) 중에서 거두지 못한 것은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또 진휼청(賑恤廳)에 호(戶)마다 소미(小米)223) 한 말씩을 주라고 명하고,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리(藥理)를 아는 사람을 골라 보내 호서(湖西) 지방의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료(救療)하도록 명하였다.

후릉(厚陵)에 전알한 다음 송도(松都)에 주필(駐蹕)하고 관원을 보내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능(陵)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정몽주(鄭夢周) 서경덕(徐敬德)의 서원(書院)에도 모두 제사지낼 것을 명하고, 경덕궁(敬德宮)224)  목청전(穆淸殿)에 비(碑)를 세웠다. 만월대(滿月臺)에 친림(親臨)하여 과와 과를 베풀고, 겸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부로(父老)들을 효유(曉諭)하라고 명하고, 미처 봉입(捧入)하지 못한 환상(還上)과 각 아문(衙門)에서 칙수(勅需)로 빚낸 것들을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선혜청(宣惠廳)의 쌀 1천 석을 내어 지나온 각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고도(故都)에 친림(親臨)한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는 것이다. 이에 어제시(御製詩) 세 수를 내리니, 세종조(世宗祖)의 고사(故事)에 의해 입시(入侍)한 우상(右相)으로 하여금 기문(記文)을 짓게 하되, 전말(顚末)을 갖추어 싣고 판(板)에 새겨서 남문(南門)의 문루(門樓)에 걸게 하라.’ 하였다. 문수 산성(文殊山城)을 축조하였다.

갑술년225)  헌릉(獻陵)을 전알(展謁)하고, 승지에게 부로(父老)들을 불러모아 민간(民間)의 고통(苦痛)을 물어보라고 명하였다. 경신년226) ·신유년227) 두 해의 미처 봉입(捧入)하지 못한 환상(還上)을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였다. 이때 간사한 소인들이 멋대로 정권을 농락하여 흉도(凶徒)들을 유혹하고 위협해서 무옥(誣獄)을 일으켰다. 밤낮 단련(鍛鍊)228) 하여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화(禍)가 호흡지간에 닥쳤는데, 왕이 그 간사한 정상을 살피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주모(主謀)한 대신 민암(閔黯)과 국문(鞫問)에 참여한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堂上官)을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했다. 그리고 드디어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의징(李義徵)의 병부(兵符)를 빼앗아 신여철(申汝哲)로 대신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 기사년229) 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나도 모르게 절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곤픽(悃愊)230) 을 살피지 못하고 어진 보필을 잘못 의심하여, 급기야 은례(恩禮)가 쇠하고 답답한 마음을 펴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일찍이 깊은 밤중에 가라앉은 마음으로 찬찬히 궁구하던 끝에 환히 깨닫고 크게 후회하면서 자나깨나 고민해 온 지 어언 몇 년이 되었다. 이번에 윤음(綸音)을 환발(渙發)231) 하여 곤위(壼位)를 다시 바르게 하니, 이는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회복하고 종사(宗社)의 은밀한 도움에 힘입은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6월 1일에 다시 중궁(中宮)의 책례(冊禮)를 거행하였다. 고묘(告廟)하고 하례를 받았으며, 중외(中外)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회태(回泰)232) 하여 중곤(中壼)이 복위(復位)되었으니, 백성들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리이다. 장씨(張氏)의 왕후(王后) 인수(印綬)를 회수하고 이어 희빈(禧嬪)이란 구작(舊爵)을 내려 세자(世子)에게 정성(定省)233) 하는 예를 폐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으니 무슨 말을 숨기겠는가? 아! 증자(曾子) 어머니의 어짊으로도 투저(投杼)234) 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옛부터 처리하기 어려운 바로서 부자(父子)의 사이만큼 어려운 것이 없고, 쉽사리 감동(感動)하는 바도 또한 부자의 사이보다 더 쉬운 것이 없었다. 애당초 세자를 세우던 날 유위한(柳緯漢)의 상소가 갑자기 튀어나왔고, 또 「질병이 있어야 비로소 책봉(冊封)한다.」는 등의 설이 있었다. 내가 전대의 역사에 대해 대략 이미 열람(閱覽)했으므로, 틈을 엿보아 공동(恐動)하는 수단이 언제나 이러한 곳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나의 병통이 항상 거칠고 사나운 데 있었으니, 지난날 처분(處分)이 정도에 지나쳤던 것도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조용하고 한가할 때 가라앉은 마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늘 세자를 세운 것은 종사(宗社)의 큰 계획이고, 오늘날의 신하들은 대대로 녹(祿)을 받는 구신(舊臣)이니, 만약 패리(悖理)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의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렇다면 유위한의 흉계(凶計)는 실현된 것이 아니며 여러 신하들의 본심은 드러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항상 후회한 것은 신명(神明)도 아는 바이다. 또 가만히 저들 무리의 짓거리를 살펴본다면,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도(公道)를 무시(無視)하며 도리에 반대되고 윤리를 거역하는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결코 함께 나라일을 처리할 수 없다. 이제 하늘이 그들의 마음을 유도하여 그들이 군부(君父)를 기만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들려 한 계획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러한 때를 당해 만약 전도(顚倒)될 것을 염려하고 확청(廓淸)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과실을 알면서도 과실을 고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지난일을 경계하고 뒷일을 삼갈 방도는 바로 마땅히 사의(私意)를 아주 끊고 의심과 막힘을 통렬히 제거하며, 마음을 열고 성의를 보여 불휘(不諱)235)  을 개방하고 충직(忠直)한 의논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유신(維新)하여 태평(太平)을 이루기를 기약하는 것이 국가의 복(福)이다. 아! 그대 군공(群工)들은 공경히 들으라.’ 하였다. 또 기사년236) 에 죽음으로 간(諫)한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에게 관작을 증직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하고, 뒤에 강가에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화란을 선동하고 명의(名義)를 범한 자들을 처형하고 귀양보냈는데, 차등이 있었다. 그뒤 또 하교하기를, ‘이제부터 나라의 제도로 만들어 빈어(嬪御)는 후비(后妃)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영소전(永昭殿)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문묘(文廟)에 복향(復享)하였다. 경기(京畿)의 유생(儒生)들이 두 현신(賢臣)을 복향할 것을 상소로 청하였으므로, 그 일을 예조(禮曹)에 내리니,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두 현신의 도학(道學)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나, 처음에 정인(正人)을 해치는 무리들에게 속고 가려져 출향(黜享)시키기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항상 뉘우치고 한스럽게 여겨 왔다.’ 하고 즉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박세채(朴世采)의 건의로 인해 ‘대고(大誥)237) 에 의거하여 교문(敎文)을 짓고 붕당(朋黨)을 타파(打破)하라.’는 뜻으로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이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장령(掌令) 김호(金灝)가 속히 동원(東垣)의 누각(樓閣)을 허물 것을 상소로 청했는데, 이것은 바로 반궁(泮宮)에 행차할 때 대내(大內)에서 올라가 관첨(觀瞻)하는 곳이다.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하게 여기고, 이어 고비(皐比)238) 를 하사해 포상하였다.

을해년239)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당을 전배(展拜)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묘(私廟)를 전배하니 감창(感愴)이 어찌 한이 있으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은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그 장자(長子)에게는 벼슬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송사(宋史)》를 읽다가 악무목(岳武穆)240) 의 일에 이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감동되는 것을 느꼈다. 그를 영유현(永柔縣)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여 백대(百代)의 풍성(風聲)을 수립(樹立)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친히 남교(南郊)에 나아가 비를 빌고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였다. 어공(御供)을 줄이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였으며, 8도(八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주진(賙賑)에 힘을 쏟아 민간에 효유(曉諭)하게 하였다. 또 내수사(內需司)의 쌀·포(布)·녹비(鹿皮)·단목(丹木)·백반(白礬) 및 은자(銀子) 1천 냥을 진휼청(賑恤廳)에 내려 주었다. 함흥(咸興)에 이른바 본궁(本宮)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바로 태조(太祖)의 잠저(潛邸)로서 익조(翼祖) 이하 네 분 대왕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영흥(永興)도 또한 그러했으니, 대개 한(漢)나라원묘(原廟)241) 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추부(追祔)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두 궁(宮)에는 미처 다 봉안하지 못했는데, 왕이 연신(筵臣)의 진백(陳白)에 의하여 즉시 거행하라고 명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려보냈다. 그리고 본관(本官) 본전(本殿)의 참봉(參奉)을 제관(祭官)으로 차정(差定)하고, 별감(別監) 차지(次知)가 제사지내던 관례를 폐지시켰다.

병자년242) 에 8도(八道)의 감사(監司)에게 하교하기를, ‘금년은 바로 병자년이다. 지나간 해를 돌이켜 보고 우리 백성들의 일을 생각해 볼 때 더 심함이 있다. 창과 칼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때일지라도 오히려 재난을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8도에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위망(危亡)에 떨어졌으므로, 어느 곳에서도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감사와 수령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체념(體念)하여 각별히 주진(賙賑)을 더하도록 하라. 만약 재리(財利)를 빙자하여 백성들의 죽음을 서서 구경만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들을 노륙(孥戮)하여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도적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오로지 체포하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지 말고 반드시 먼저 위로하여 따라오게 하여 안정시키고 모이게 하라. 그리고 또 농사는 천하(天下)의 근본이니, 여러 고을에 신칙(申飭)하여 백성들의 축말(逐末)243) 을 금하고, 힘들여 논밭을 가꾸도록 하여 가을에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기곡제(祈穀祭)를 거행하였다.

요적(妖賊) 이홍발(李弘渤)이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더불어 은밀히 모의하여, 세자(世子) 외가(外家)의 묘소(墓所)에 흉예(凶穢)한 물건을 묻어 두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여철(申汝哲)의 집안 종의 호패(號牌)를 훔쳐다가 그 곁에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는 묘지기로 하여금 주워 오게 한 뒤 급히 강오장(姜五章)을 사주해 장주(章奏)를 올려 고하게 하였다.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구문(究問)할 것을 명하자 단서가 약간 드러났는데, 채 구핵(鉤覈)하지 않아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과 좌의정(左議政) 유상운(柳尙運)이 참국(參鞫)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진달(陣達)하자 모두 석방하여 보냈다. 삼사(三司)에서 극력 간쟁하니, 다시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명하여 이에 죄인이 밝혀지고 여러 역적들이 복주(伏誅)되었다.

창릉(昌陵)을 전알하고 이어 순회 세자(順懷世子)의 묘소에 나아갔다. 지나는 길에 인조(仁祖) 잠저(潛邸) 때의 별서(別墅)에 들러 비각(碑閣)을 수직(守直)하는 사람을 둘 것을 명하였다. 영희전(永禧殿)에 전알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따라갔다. 태묘(太廟)를 전알하였는데, 고례(古禮)를 처음으로 시행하여 중궁(中宮)과 세자빈(世子嬪)이 수행해 묘현례(廟見禮)를 거행하였다.

강도(江都)의 수령(守令)이 진소(陳疏)하기를, ‘내년 1월 22일은 바로 청(淸)나라 사람이 성(城)을 함락시킨 날입니다.’ 하니, 충렬사(忠烈祠)에 제사를 내리고, 성 밖에다 땅을 다듬어 제단(祭壇)을 설치해 나라를 위해 죽은 이와 전쟁에 죽은 사민(士民)에게도 모두 제사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정축년244) 에 왕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게 말하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다. 한(漢)나라 때는 고을을 제일 잘 다스리는 사람이면 관질(官秩)을 승진시켜 탁용(擢用)하였다. 우리 나라의 순리(循吏)를 장려하여 등용하는 방도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는데, 간혹 진휼(賑恤)을 잘하여 초자(超資)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또한 옛날과 같지는 않다. 경(卿)은 부디 사람을 선택하는 데 유의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도신(道臣)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에게 선유(宣諭)하기를, ‘부디 밤낮으로 강구(講究)하고 형편에 따라 일을 하되, 만약 변통(變通)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면 즉시 치주(馳奏)하도록 하라. 서토(西土)245)  북관(北關)246) 의 기근(饑饉)이 예사롭지 않은데, 혹 죄가 특별히 강상(綱常)에 관계되는데도 묻어 두거나, 자신이 지극한 원한을 품고 있는데도 풀지 못하는 일이 있어 그런 것인가? 각별히 찾고 물을 것이며, 아울러 백성의 고통과 함께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봄을 맞이하여 권농(勸農)하는 것」은 《예기(禮記)》에 기록되었고, 「근본에 힘쓰고 백성들이 축말(逐末)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한사(漢史)》에 실려 있다. 지금 8도(八道)에 거듭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춘궁(春窮)의 진대(振貸)를 진실로 그만둘 수 없겠지만, 권농이 가장 시급한 일이 된다. 여러 고을에 신칙(申飭)하여 권농하는 것이 부지런한가 아니한가를 가지고 전최(殿最)를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하늘이 상란(喪亂)을 내리시어 기근(饑饉)이 거듭 닥쳤다. 백성들이 흩어지고 길바닥에서 굶어죽는 자가 즐비하니, 마음이 아프고 눈에 참담한지라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아! 이번에 아비가 자식을 죽인 일이 생겼으니 윤상(倫常)이 무너졌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었으니 사람의 도리가 없어진 것이다. 백성이 용과 뱀으로 변하여 곳곳에서 무리를 불러모으니, 이것이 어찌 본래의 성품이 악(惡)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내가 감싸주고 보호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한탄하며 임금 노릇이 즐겁지 않다. 지금 온 땅이 시뻘겋게 타들어 가고 많은 백성들이 훌쩍이며 울고 있다. 상림(桑林)에서 대신 희생(犧牲)이 되고 스스로 몸을 불사르려는 정성이 간절하지만,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하늘을 바라보면 어슴푸레할 뿐이니, 오늘날 나라일은 정신이 없는 지경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임진년247) 에 나라가 어지러워진 나머지 굶어죽은 시체가 날마다 쌓여만 가니, 선조(宣祖)께서, 「그들보다 먼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구나.」라고 하교까지 하셨는데, 지금 소자(小子)의 심정이 바로 선조의 그 당시의 심정이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여 더욱 공경하고 조심할 것이니, 정부(政府)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도록 하라. 아! 오늘날 조정의 의논은 분열이 극도에 달하였다. 각자가 문호(門戶)를 세우고 경알(傾軋)이 습성을 이루어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과실을 들으면 마치 기화(奇貨)나 얻은 듯 가지와 마디가 거듭 생겨나고, 반복해서 고질(痼疾)이 되어 화해를 기약할 수가 없다. 심복(心腹)이 먼저 무너지고서 그 나라가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군주와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 정성스럽게 계회(戒誨)하면서도 한결같이 느슨하여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긴다면 이것이 무슨 도리(道理)이겠는가? 《주역(周易)》의 감괘(坎卦)에 이르기를, 「겹겹이 둘러싸인 토굴 속에 포로가 있다. 그 마음이 성실하고 행실도 가상하다.」 하였다. 이와 같이 험난하고 어려운 날 그 마음이 성실하지 않은데, 오히려 어찌 고난을 벗어나 형통함을 이루기를 바라겠는가? 아! 그대 신료(臣僚)들은 나의 훈계를 분명히 듣고 너희 마음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가져 「한발의 재난을 우연한 것이다.」, 「당론(黨論)은 타파(打破)할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삼가 공경히 받들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직단으로부터 환궁(還宮)할 때 금오(金吾)의 앞길에 연(輦)을 멈추고 죄수들을 소결(疏決)하였다. 죄수들이 어가의 앞에 나와 엎드리니, 왕이 그들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형상을 보고 가엾이 여기며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실 그 애초에야 무엇이 달랐겠느냐? 그런데도 지금 저들은 다 귀신 꼴이 되었으니, 참혹하도다. 하(夏) 우왕(禹王)이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이 진정 그러했겠구나!’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宣祖)께서 계사년248) ·갑오년249) 두 해의 흉년 때 어공미(御供米)를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셨다. 지금도 또한 참작해 어공미를 덜어내어 율도(栗島)의 굶주린 백성을 먹이는 물자에 보태게 하라.’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관서(關西)의 굶어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내렸다. 무지개의 변괴로 인해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였다. 임경업(林慶業)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을 명하고, 제사를 내렸다.

무인년250) 에 친히 문회 서원(文會書院)의 편액(扁額)을 써서 내려 주었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여러 도(道)에 선유(宣諭)하여 진대(振貸)하고 권농(勸農)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가(國家)가 불행하여 동인(東人)·서인(西人)을 표방(標榜)한 이래 백 년이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고질(痼疾)이 되고 있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는 좁고 작은데다 문벌(門閥)을 숭상하여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이미 협소하다. 그런데 한쪽이 진출하면 한쪽은 물러나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또 대부분 막혀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그 근원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실은 내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도리로 위에서 표준을 세우지 못하여 이렇게 된 것이므로, 내가 나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제 바야흐로 따스한 봄이 돌아와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니, 시절과 함께 모두 새로워질 때가 어찌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그대들 여러 신하들은 마음을 씻고 생각을 바꾸어 지난날 하던 것처럼 하지 말고 함께 나라를 다스려 나갈 계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는 백성의 부모가 되는 것이니, 백성들의 굶주림은 자신의 굶주림과 같다. 더구나 지금 굶어죽은 사람이 날마다 저자 거리에 쌓여가는데도 구원하지 못하니, 어찌 가슴 아픔을 금할 수 있겠는가?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특별히 제휼(濟恤)을 더하게 하고, 다시 여러 관청에 신칙(申飭)해 착실히 시신(屍身)을 묻어주어 나의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호서(湖西)에 보냈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 행차하여 과·과를 시험하여 뽑았으며, 대신(大臣)을 보내어 여단(癘壇)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단종(端宗)을 추복(追復)하여 제주(題主)251) 할 때 왕이 장차 친림(親臨)하려고 하니, 부제학(副提學) 조상우(趙相愚)가 전염병이 극심하다며 친히 거둥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왕이 특별히 그를 파직시키고, 정원(政院)의 복역(覆逆)에 답하기를, ‘나의 소신(所信)이 사리에 통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왔는데, 무식한 말이 논사(論思)하는 곳에서 나왔으니, 경계하고 꾸짖는 조처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답하기를, ‘옛 사람 중에 전염병이 아주 극성을 떨어 사망자가 계속 생기는데도 혼자 남아서 떠나지 않은 사람252) 이 있었다. 부로(父老)들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까지 하였는데, 능히 감염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극한 정성 때문이었다. 더구나 인주는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 국가(國家)의 막대 막중한 의례(儀禮)에 당면하여 전염병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이에,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은 비록 간절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개 필부(匹夫)의 소신보다도 못한 것이다. 조상우는 도리어 아녀자나 하는 짓을 본떠 먼 조상을 추모하는 지극한 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니, 사리에 통한 군자(君子)가 조용히 살펴본다면 반드시 나의 말을 옳지 않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253) 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4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고, 죽을 뻔하다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전에 없던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다. 서쪽 변방에서 시작하여 8도(八道)에 두루 번져, 마을에는 온전한 집이 없고 백 명에 한 명도 치료되지 못했다. 살아남는 백성이 없다면, 나라는 장차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이 때문에 근심스럽고 조급하여 먹어도 쉬어도 편안하지가 않다.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렸으나, 신(神)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신령한 감응은 더욱 까마득하기만 하다.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으니 백성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아! 난로(鑾輅)254) 를 타고 봄을 맞이하니, 화창한 기운이 애연(藹然)하여 초목과 곤충이 모두 우로(雨露)의 은택에 휩싸여 있는데, 온 동토(東土)의 억만(億萬) 백성들은 유독 위망(危亡)에 떨어져 있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마땅히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안으로는 경조(京兆)와 밖으로 도(道)를 다스리는 신하들은 각별히 칙유(勅諭)를 더하여 약품을 공급해 구료(救療)하고 시신(屍身)을 거두어 묻어주도록 하라. 근신(近臣)을 나누어 보내되,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민망하고 측은히 여김을 보여주어 조금이나마 번민하고 원통함을 위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문종조(文宗朝)의 직제학(直提學) 원호(元昊) 단종(端宗)의 상복(喪服)을 입고, 제수(除授)하는 명령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충의(忠義)가 육신(六臣)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아뢰니, 특별히 정려(旌閭)할 것을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시습(金時習)의 절의(節義)는 지금의 백의(伯夷)입니다.’ 하니, 즉시 증직(贈職)하고 제사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친히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집에 임하여 문병(問病)하고, 초상(初喪)이 나자 곡림(哭臨)하였다. 김응하(金應河) 이순신(李舜臣)의 자손으로 입조(立朝)한 자를 수령(守令)으로 차송(差送)하고, 그 제사를 폐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아버지 권전(權專)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줄 것을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비를 내려줄 것을 빌었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으며,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였다.

경진년255)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관무재(觀武才)하고 과·과를 시험해 뽑았다.

겨울에 천둥이 친 변괴 때문에 대신(大臣)과 2품(二品)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명소(命召)하여 각자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진달하게 하였다. 여러 도(道)의 처음부터 파종(播種)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대동미(大同米)를 감하여 주었고, 양서(兩西) 지방의 대동미가 없는 곳에는 대동법(大同法)의 관례대로 재량해 감면해 주었다. 계성묘(啓聖廟) 명륜당(明倫堂)의 곁에 세울 것을 명하였다.

신사년256) 이제묘(夷齊廟)의 편액(扁額)을 써서 내렸는데 ‘청성(淸聖)’이라 하였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특별히 어필(御筆)로 사액(賜額)하여 오로지 천년 뒤 존경심을 일으키는 뜻을 표현한다.’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하교하기를, ‘옛적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초옥(楚獄)에 함부로 처리된 것이 많다 하여 밤에 일어나 방황하다가 친히 낙양(洛陽)의 감옥에 나아가 판결해 내보낸 것이 많았다.257) 지금 금오(金吾)에 시수(時囚)258) 가 매우 많으니, 막히고 답답한 기운이 어찌 위로 하늘의 조화를 범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가뭄을 걱정하는 때를 당하여 마땅히 비상한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연(輦)을 타고 금오를 지나며 친히 가서 녹수(錄囚)259) 하였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여 구언(求言)하였으니,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줄였다.

8월 14일에 왕비(王妃)가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인현(仁顯), 능호(陵號)를 명릉(明陵), 전호(殿號)를 경녕(敬寧)이라 하였다. 대신(臺臣)이 약(藥)을 의논한 여러 의관(醫官)들을 죄줄 것을 청하자,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다.」 하였다. 사람의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존귀함이겠는가? 지금 전적으로 여러 의관들만 책망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겠는가? 옛적에 당(唐)의 의종(懿宗)은 공주(公主)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하여 의인(醫人)을 죽였고, 황명(皇明)의 마황후(馬皇后)는 붕어(崩御)할 적에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일러 경계하였으니,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내가 일찍이 이것을 내전(內殿)에게 말했더니 나의 말에 깊이 감복(感服)하였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친히 무고옥(巫蠱獄)을 국문(鞫問)하여 여러 역적들이 복법(伏法)되었다. 역종(逆宗)260) 이항(李杭)이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한 정상이 이미 갖추어지니, 특별히 경전(磬甸)하라 명하고 또 거두어 장사지내 주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내가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世子)를 위해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즐거이 하겠는가?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니, 아아! 세자의 정사(情事)를 내가 어찌 염려하지 않겠으며, 여러 신하들의 춘궁(春宮)을 위한 간곡한 정성을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런 처분을 버리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에 나의 뜻으로 좌우(左右)에 유시(諭示)한다.’ 하였다.

임오년261)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과·과를 시험해 뽑았다.

10월 3일에 김씨(金氏)를 책봉(冊封)하여 왕비(王妃)로 삼았으니,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따님이다.

계미년262) 에 하교(下敎)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해내(海內)가 편안한 때에도 언제나 조령(詔令)을 내려 곧 백성들을 진념(軫念)하였다. 더욱이 지금은 8도(八道)의 민생(民生)이 이제 막 굶주림과 전염병을 겪어 채 소생하지 못하였는데, 신역(身役)이 침노하여 지치게 만들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 되어 만물이 자라는데, 불쌍한 우리 죄없는 백성들만 유독 위망(危亡)에 떨어졌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마땅히 다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니 흉년에는 권농(勸農)에 더욱 마땅히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유사(攸司)는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혹시라도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라. 이어서 생각건대, 임금은 백성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니, 자식에게 고질병이 있다면 그 아버지 되는 사람이 어찌 서서 그 죽음을 바라보기만 하고 급히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생민(生民)의 폐단으로 양역(良役)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하루 이틀 단지 시간을 미루어대는 것만 일삼아서 물불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내 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이번 새봄부터 부디 조속히 변통(變通)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미리 대비하면 근심이 없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이다. 요즈음 보건대,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 도성(都城)이 지척(咫尺)인 곳에서 범이 마구 나다니니, 범은 전쟁의 형상이다. 그 병졸(兵卒)을 거느리는 신하로 하여금 빨리 불우(不虞)의 일에 대비를 강구하게 하라.’ 하였다.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사(勅使)를 전송하고, 지나는 길에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에 나아갔다.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무안왕의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을 평소 깊이 사모하였는데, 칙사를 전송한 뒤 유묘(遺廟)가 시야(視野)에 들어왔다. 지금 와서 우러러 읍(揖)하니, 드넓은 심회(心懷)가 더욱 간절하다.’ 하였다. 관원을 보내 선무사(宣武祠)263) 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여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차출(差出)하고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을 관장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급히 할 만한 것은 급히 하고, 늦게 할 것은 늦게 하여 완급(緩急)에 각기 차례가 있게 하라. 일을 혹시 너무 급히 하면 폐단(弊端)이 생기지 않을 수 없으니, 생각을 두고 게을리하지 않으며 점차 다스려 나간다면 저절로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264) 조의 거두지 못한 신포(身布)와 각사(各司)의 노비(奴婢) 1만 1천여 구(口)의 도고(逃故) 공포(貢布)를 탕척(蕩滌)해 주었다. 친히 대정(大政)을 행하였다.

갑신년265)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勸農)하고 진대(賑貸)하였다. 그리고 이정청(釐正廳)의 여러 신하들에게 신칙(申勅)하여 지난날처럼 대충대충하지 말게 하였다. 해마다 2월에 바치는 궐내(闕內)의 뜰에 까는 솔잎을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초에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하고자 하였으나, 논의(論議)가 서로 달라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염희(恬憘)266) 하며 세월만 보내니, 진실로 매우 답답하다. 그러니, 대계(大計)를 빨리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도성(都城)을 잘 보수하면 종사(宗社)가 여기에 있고 인민(人民)이 여기에 있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그 부모와 처자(妻子)를 위해 반드시 힘을 다하여 사수(死守)할 것이요, 또 적에게 제 무기를 빌려줄 근심도 없을 것이니, 계획을 정하여 수축(修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은 모두 바로 보장(保障)의 땅이니 끝내 버릴 수 없다. 남한 산성의 경우 연이어 수선(修繕)하였고, 강도의 경우 토성(土城)을 쌓은 것은 뜻한 바 있는데, 올해 겨우 쌓아놓으면 내년에 즉시 무너져 공력(功力)을 잇기가 어려우니, 내성(內城)을 견고하게 쌓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였다.

사은사(謝恩使)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와서 해적(海賊) 장비호(張飛虎)의 일을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고사(古事)로 보건대, 먼저 연호(年號)를 세운 자는 그 형세가 장구(長久)하지 못했다. 이 해적이 먼저 연호를 세웠으니, 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태묘(太廟)에 나아가 비를 빌었는데, 세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였으며,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다.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고, 술을 금하였다. 친히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기묘년267) 조의 거두지 못한 신포(身布) 1백 87동(同)과 쌀 2천 5백여 석(石), 돈 1천 5백여 관(貫)을 탕척(蕩滌)해 주었다. 수재(守宰)로서 장법(贓法)을 범한 무리는 양전(兩銓)에 기록해 보내 외직(外職)에 제수(除授)하지 말게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근신(近臣)을 한강(漢江) 저자도(楮子島)에 보내어 비를 빌게 하였다. 친히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과·과를 시험해 뽑았다.

을유년268) 봄에 큰 눈이 왔다. 하교하기를, ‘옛부터 재이(災異)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인사(人事)의 과실에 연유한 것인데, 하늘에 인애(仁愛)하는 마음 아닌 것이 없다. 재앙을 만나고도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다면 화란(禍亂)이 뒤따를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바로 늦은 봄철에 양기(陽氣)가 피어올라 온갖 초목이 죄다 싹을 튀우는데, 큰 눈이 며칠 동안 계속 내려 날이 춥고 쌀쌀하다. 봄 날씨가 겨울 날씨 같으니, 그 응험이 아름답지 못하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마치 봄철의 얼음을 밟고 건너는 듯하므로, 자신을 돌아보고 수성(修省)하기에 겨를이 없지만, 다만 생각건대, 지금의 간절하고 급박한 근심은 조정의 의논이 분열된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전후(前後)에 걸쳐 칙려(勅勵)한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나, 누적되어 온 고질적인 병폐는 구료(救療)하기 쉽지 않으므로, 내가 몹시 답답하게 여긴다. 상하가 뇌동(雷同)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니, 이것을 군신(群臣)들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일을 의논할 때 각자 공정한 마음을 지키고 가부(可否)를 서로 도와 경알(傾軋)하는 습성을 통절히 버린다면, 조정(朝廷)이 화정(和靖)해질 것이다. 아! 그대 신료(臣僚)들은 힘써 서로 공경하고 협력하는 데 힘을 다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과·과를 시험해 뽑았다. 경녕전(敬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병술년269)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북관(北關)과 영동(嶺東)에 나누어 보내고 영동의 아홉 군(郡)의 대동포(大同布)를 특별히 감해 주었다. 한성부(漢城府)에 명해 전후(前後)의 굶어죽은 사람 가운데 땅에 드러난 해골(骸骨)을 묻어주게 하였다.

8월에 왕이 법전(法殿)에 나아가니, 세자(世子)가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고 종친(宗親)과 문관(文官)·무관(武官)이 해가 지도록 모시고 잔치하였다. 지난해에 군신(群臣)들이 왕이 즉위(即位)한 지 30년이 되었다며 휘호(徽號)를 올리고, 진연(進宴)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겸읍(謙揖)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장보(章輔)들이 상소(上疏)하여 청하였으나, 심지어 언지(言志)의 글을 내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큰 기업(基業)을 이은 지 이제 29년이다. 그동안 해마다 연이어 농사에 병이 들어 백성들이 죽마저 제대로 못 먹었다. 나라일이 매우 위급하고 천재(天災)가 날이 갈수록 또 더욱 심해지니, 칭경(稱慶)이란 말은 꺼내지 말고, 다만 스스로 밤낮으로 조심하라.’ 하였다. 세자가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진청(陳請)하였으나, 그래도 따르지 않았다. 대신(大臣)이 누차 청하여 마지 않으니, 단지 진하와 진연만 허락하되, 힘써 간약(簡約)함을 따라 외연(外宴)에는 여악(女樂)을 쓰지 말게 하는 것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날짜를 잡아놓고 미처 행하지 아니하였는데, 풍재(風災)로 인해 특별히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예(禮)를 거행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진연이 내가 어찌 즐겨 하겠는가? 춘궁(春宮)의 세 번에 걸친 상소와 공경(公卿)의 간청을 끝내 굳이 거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이 예대(豫大)에 가까우니, 단지 부끄럽고 두려움만 더할 뿐이다. 연례(宴禮)를 이미 지냈으니, 마땅히 추은(推恩)의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족(士族) 80세 이상과 상한(常漢) 90세 이상에게 가자(加資)하고, 부녀(婦女)에게는 쌀과 고기를 하사하라. 기로(耆老)의 여러 신하 중 2품 이상에게는 별도로 의자(衣資)와 쌀·고기를 하사하고, 3품 이하에게는 쌀과 고기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무인년270) 이전의 미처 봉납(捧納)하지 못한 환상(還上)을 모두 탕감(蕩減)해 주고, 도하(都下)의 상한(常漢) 중 기로(耆老)로서 80세 이상인 사람 수백 명을 널찍한 곳에 모아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성악(聲樂)을 갖추어 술과 고기를 대접하게 하였다.

정해년271)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고 이어 문신(文臣)을 정시(庭試)하였다. 그때 마진(麻疹)272) 이 기승을 떨어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일찍이 무진년273) ·기사년274) 에 온 집안 식구가 모두 죽은 경우에 대해 휼전(恤典)을 거행한 일이 있었다. 환(鰥)·과(寡)·고(孤)·독(獨)으로 의지할 데 없는 무리는 이번에도 또한 뽑아 내어 휼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제사를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일찍이 내가 한때의 희로(喜怒)로 인해 법을 받드는 아전을 함부로 죽였는데, 참회(懺悔)해도 소용이 없다. 그가 비록 미천했지만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고, 받들던 바가 법(法)이었는데, 변수(駢首)275) 하여 운명(殞命)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가엾이 여긴다. 그의 처자에게 미포(米布)를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중외(中外)의 관리들에게 감히 희로로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계칙(戒飭)하였다.

강연(講筵)에 나아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정(鄭) 양소(良霄)가 집에 굴(窟)을 파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는 그 몸을 망쳤으니276) , 술의 화(禍)는 옛부터 그러하였다. 「문왕(文王) 소자(小子)277)  유정(有正)278) ·유사(有事)279) 에게 교훈하시기를, 항상 술을 마시지 말라고 교훈하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되 다만 제사 때만 마시니 덕(德)이 있어 취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비록 술을 마시더라도 이 옛 훈계를 생각하여 경계할 바를 안다면 어찌 술의 해(害)가 있겠는가? 관리의 직책이 있는 자가 모여서 술을 마시면 직무(職務)를 포기하고 심한 자는 부모가 금하여도 그치지 아니하여 몸을 망치는 데까지 이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무자년280) 에 왕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폐해를 개혁하려는 의논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이정청(釐正廳)의 경우를 보건대, 대저 변통(變通)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우니, 일의 이해(利害)를 반드시 확실하게 따져본 연후에야 바야흐로 변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날마다 개혁하여 성급하게 다스리기를 구한다면 이익은 없고 폐해만 또 더욱 심해질 것이니, 옛부터 잘 변통하지 못하고 번쇄(煩碎)하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생민(生民)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렸으니, 수령은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적에 당(唐)의 선종(宣宗) 이행언(李行言)의 이름을 대궐의 기둥에 써붙여 놓았다.281) 내가 일찍이 하나의 첩자(帖子)를 만들어 이름을 대주첩(代柱帖)이라 하고, 별도로 포폄(褒貶)을 받은 수령(守令)을 기록하여 때때로 상고로 열람하였는데, 다만 빠진 자가 없지 않으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순전히 포상을 받은 수령만 골라서 뽑아 써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삼남(三南)에 전염병이 극심하게 번졌으므로 약물을 보내 구료(救療)하라고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친히 태묘(太廟)에 기도하고,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병통을 일찍이 스스로 점검하여 보니, 희로가 중도(中道)에 맞지 않고 언로(言路)가 열리지 못하고, 시조(施措)가 정당함에서 어긋나고, 실혜(實惠)가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정부(政府)에서 널리 직언(直言)을 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어가(御駕)가 남교(南郊)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근시(近侍)를 보내 쌍령(雙嶺)의 전사한 곳에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관동(關東)의 인삼(人蔘)의 폐단을 말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늘 변통(變通)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옛적에 송(宋)의 인종(仁宗)은 밤에 구운 양고기가 생각이 나도 주림을 참고 먹지 않았는데282) , 하물며 그보다 더 큰 민폐(民弊)야 말해 무엇하랴?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재량하여 감해 주게 하라.’ 하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고로 인해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으며, 음우(陰雨)에 대비할 것을 신칙(申飭)하였다.

기축년283)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과·과를 시험해 뽑았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황일호(黃一皓)의 일은 온 세상에서 다만 그가 원통하게 죽은 줄로만 알고, 그가 사절(死節)한 줄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황윤(黃玧)의 상(喪) 때 성상께서 사절한 사람의 아들이라 하여 상장(喪葬)에 소용되는 것을 제급(題給)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성감(聖鑑)이 보통 사람의 소견보다 아주 탁월하십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일이 존주(尊周)에 관계되었는데 끝내 참화(慘禍)를 입었으니, 특별히 증직(贈職)·증시(贈諡)하라.’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기자(箕子)가 동방(東方)에 봉(封)해지자 8조(八條)의 가르침을 펼쳐 남겨진 교화가 수천 년 이래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일찍이 근시(近侍)를 보내 그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였지만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또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지내게 하고, 별도로 수호(守護)를 더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평양(平壤)을 수복(收復)한 뒤 선묘(宣廟)께서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후(前後) 승패(勝敗)의 다름을 물으니, 답하기를, 「먼저 온 북방(北方)의 여러 장수들은 오로지 오랑캐를 막는 전법(戰法)을 썼기 때문에 패배를 초래했고, 뒤에 온 장수들은 능히 척장군(戚將軍)284) 의 왜구를 막는 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승(全勝)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선묘께서 그 책을 구득(購得)하여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연습하게 하였지만, 지금 살펴보건대, 활법(活法)285) 이 없다. 상량(商量)하여 변통(變通)할 점이 없지 않으니, 병졸을 거느리는 신하로 하여금 활법을 강구(講究)하게 하라.’ 하였다.

경인년286) 에 하교하여 권농(勸農)하고, 기민(饑民)을 진휼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여러 달 위예(違豫)하다가 평복(平復)되니, 여러 신하들이 누차 칭경(稱慶)의 거행을 청하였다. 왕이 굳이 사양하다가 한참 뒤에야 억지로 따랐다.

4월 25일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세자(世子)가 술잔을 올리고, 종친(宗親)과 문관(文官)·무관(武官)들이 모시고 벌여서서 차례로 헌수(獻壽)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관무재(觀武才)하고, 과·과를 시험해 뽑았다. 강원도(江原道)의 양전(量田)을 마친 다음 영서(嶺西) 지방의 수미(收米)를 결(結)마다 두 말씩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연신(筵臣)이 혹 ‘인재(人才)가 아주 적다.’고 말하면, 왕이 말하기를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어찌 말세(末世)여서 인재가 없기 때문이겠는가? 옛부터 창업(創業)한 임금은 모두 승국(勝國)287) 의 인재를 등용하여 성공에 이르렀으니, 어느 시대인들 인재가 없겠는가? 다만 알아보지 못함으로 인해 쓰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신묘년288) 에 하교하여 권농(勸農)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왕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북한산(北漢山)에 성(城)을 쌓는 것의 편부(便否)를 진달하게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계획은 비록 많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자 한다. 도성(都城)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天險)의 땅이 있으니, 만약 지금 수축(修築)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전에는 샘물을 염려했지만 지금 들으니 샘물도 또한 풍족하다고 한다.’ 하고 을 쌓기로 결정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울렸다 하여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양역(良役)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백성의 고통을 진념(軫念)하여 이제 막 변통(變通)하도록 하였는데, 한편 궐액(闕額)을 보충하고 한편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니, 결단코 왕자(王者)의 정사(政事)로 차마 할 바가 아니다. 신묘년289) 이전의 군병(軍兵)과 노비(奴婢) 중 도망한 자들의 징포(徵布)를 모두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진년290)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하고, 특별히 기전(畿甸)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춘수미(春收米)를 세 말씩 감해 주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를, ‘나의 마음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 간절하지만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 극기(克己)의 공부가 철저하지 못한 바 있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한 바 있어서,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퇴폐와 타락의 근심은 더욱 심해지고, 실공(實功)에 힘쓰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허위(虛僞)의 습관은 오히려 많아지니, 모두 나의 과실이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 하늘을 공경히 섬기는 정성을 돈독(敦篤)하게 할 것이니, 마땅히 정부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해서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와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6경(六卿)의 우두머리에 있는 자가 과연 능히 용사(用捨)를 공정하게 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한다면, 관사(官司)는 적임자를 얻고 조정은 화정(和靖)해질 것이다. 방악(方岳)291) 의 신하가 출척 유명(黜陟幽明)292) 하는 것이 한결같이 공정한 마음에서 나오고, 절진(節鎭)의 장수가 항상 진루(陣壘)를 대한 것처럼 감히 게으르거나 소홀하게 하지 않는다면, 조가(朝家)에서 위임한 중임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효부(孝婦)가 원한을 품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293) 연신(燕臣)이 통곡(慟哭)하자 5월에 서리가 내렸다.294) 만약 지극한 원한을 펴지 못한 자가 있으면 중외(中外)의 관원들은 상세히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옥사(獄事)를 판결하고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는 데 이르러서도 세력의 강약(强弱)을 보아 입락(立落)하지 말고, 한결같이 사실의 곡직(曲直)에 따라 처리한다면, 소민(小民)들이 거의 원통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근래 사대부(士大夫)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고 염우(廉隅)가 너무 승(勝)하여 벼슬자리를 비워두는 일이 갈수록 심해진다. 옛날 임진년295) ·계사년296) 병란(兵亂) 뒤 잿더미만 눈에 가득한 날 사대부들이 감히 노고(勞苦)를 말하지 못하고 다 연곡(輦轂)297) 에 모여서 분주히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지금의 사대부들은 이와 다르니 내가 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계사년298) 에 하교하여 권농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즉위(即位)한 지 40년이 되었으므로 종묘에 고(告)하고 진하(陳賀)하였으며, 반교(頒敎)·반사(頒赦)하였다. 대신(大臣)과 문무(文武)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사복(嗣服)하신 이래 성덕(聖德)과 홍업(洪業)으로서 마땅히 유양(揄揚)299) 하고 크게 칭찬해야 할 것을 참으로 일일이 손꼽아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단종(端宗)의 복위(復位)에서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이 났고, 곤위(坤位)가 거듭 바로된 데서 일월(日月)이 정명(貞明)하였습니다. 신종(神宗)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추모하고, 효종(孝宗)의 「지통(至痛)하다.」는 하교(下敎)를 체념하여 단(壇)을 쌓아 향사(享祀)하자, 대의(大義)는 천하(天下)에 천명(闡明)되고 풍성(風聲)은 온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실로 지극한 덕(德)과 크나큰 공(功)이 있었으므로, 군신(群臣)들이 우러러 존호(尊號)를 청하자, 처음에는 사양하시다가 끝내 받으셨습니다. 대개 어찌 옳지 못한데도 성조(聖祖)께서 구차스럽게 받으셨겠습니까? 신 등이 전하께 바라는 바는 또한 오직 성조께서 행하신 바를 따르는 데 있고, 감히 예대(豫大)의 설(說)을 만들어 성상(聖上)의 겸손을 지키시는 덕(德)에 누를 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비록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했던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덕이 없는 내가 감히 바랄 바가 아니다. 결단코 윤허하여 따르기 어렵다.’ 하였다. 이에 대신(大臣)이 누차 아뢰어 간청하고, 또 백료(百僚)를 거느리고서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다. 세자(世子)가 상소(上疏)하여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따르기를 청하고, 두 왕자(王子)가 여러 종친(宗親)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청하니, 왕이 뒤에 마지못해 따랐다. 군신(群臣)이 의논하여 존호(尊號)를,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라 올렸다.

하교하기를, ‘어약(御藥)에 쓰이는 생우황(生牛黃) 때문에 며칠 안에 수백 마리의 많은 소를 도살하였다. 비록 축물(畜物)이긴 하지만 마음에 측은하다. 도살을 5일까지 한하여 우선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가을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무재(武才)를 시험보였다. 정언(正言)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금액(禁掖)300) 안에서 노래하고 떠드는 소리가 있으니, 정성(鄭聲)301) 의 훈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만약 간신(諫臣)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런 해괴한 일을 어찌 알았겠는가? 모여서 노래하고 떠든 자들을 조사해 내어 엄중히 징계하고, 구사(丘史)로서 궐정(闕庭)에 출입하는 자들을 모조리 엄금(嚴禁)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홍계적에게 표피(豹皮)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호남(湖南)에 보냈다. 하교하기를, ‘내탕(內帑)의 은자(銀子) 1천 냥을 호서(湖西)에, 8백 냥을 기영(圻營)에 내려 보내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라. 그리고 강도(江都)의 쌀 1만 석(石)을 호남(湖南)에, 연해(沿海)의 곡식 1만 석을 제주(濟州)에 옮겨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울렸기 때문에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였다.

갑오년302) 에 하교하기를, ‘진정(賑政)과 권농(勸農)을 바로 이때 신칙(申飭)해야 할 것인데, 질병(疾病)이 이와 같아서 친히 스스로 별도로 하유(下諭)할 수 없으니, 정원(政院)에서 문장의 문구(文句)를 만들어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유수(留守)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위예(違豫)한 가운데 있었는데, 약원(藥院)에서 물오리를 올리니, 왕이 말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둥지를 엎지 않으며, 새끼와 알을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옛 성인(聖人)이 생육(生育)의 뜻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봄이 화창하여 만물(萬物)이 생육하는 때를 당해서 차마 상해(傷害)할 수가 없다. 병을 치료하는 데 절로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니, 어찌 꼭 이것을 취해야 하겠는가? 다시는 들이지 말라.’ 하였다.

재차 제주(濟州)의 공인(貢人)을 차비문(差備門) 밖에 불러서 진정(賑政)과 백성의 고통을 상세히 물었다. 전염병이 극성을 떨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약물(藥物)을 내려 보내 구료(救療)하게 하였다. 송조(宋朝)의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소강철(邵康節)·주회암(朱晦庵) 등 여섯 현인(賢人)을 성전(聖殿)에 승배(陞配)하고, 반교(頒敎)하였다. 9월 19일에 군신(群臣)들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을미년303)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勸農)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과 함께 빈청(賓廳)에서 회의(會議)하여 품지(稟旨)해서 체수(滯囚)를 재처(裁處)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도(珍島) 한 군(郡)에 10년 동안 흉년이 들어 남아 있는 백성들이 지탱하여 보전할 수 없다 하니, 해외(海外)의 피폐한 백성이 혹 원한을 품고 펴지 못한 나머지 위로 천화(天和)를 범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찾아서 물어 아뢰게 하라.’ 하였다.

병신년304)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냈다. 왕이 말하기를, ‘양전(量田)한 지 이미 오래 되어 경계(經界)가 바르지 않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왕정(王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한다.」 하였다. 반드시 8도(八道)에 풍년이 들어 한꺼번에 하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기약이 없을 것이니, 이에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제주(濟州)의 굶어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드러난 뼈를 가려 주고, 썩은 살을 묻어준다.」 하였으니, 대개 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죽은 사람에게 미루어 미치는 것이다. 더구나 탐라(耽羅) 한 지역의 백성들이 전후로 굶어 죽은 자가 수천에 이른다 하니, 거두지 못해 들판에 뼈를 드러내 놓은 시신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나도 몰래 측은한 생각이 드니,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묻어주고 아뢰게 하라.’ 하였다.

가뭄이 들자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훈칙(訓勅)하였다. 은자(銀子) 2천 냥을 기영(圻營)에 내려 주고 진자(賑資)에 보태 쓰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계복(啓覆)305) 을 행하지 않은 지가 3년이 되었다. 혹은 범죄(犯罪)가 지극히 중한데 법(法)을 집행하기 전에 경폐(徑斃)306) 하기도 하고, 혹은 정리로 보아 용서할 점이 있는데도 한결같이 판결이 지체되기도 하므로, 작년에 이것을 염려하여 반드시 시행하고자 했지만, 나의 병 증세가 더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결단코 시행하고자 한다.’ 하고, 마침내 9월에 계복하여 그 계동(季冬)을 기다려 형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유년307) 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들에게 하교하여 권농하고, 제언(堤堰)을 수리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병으로 앓는 동안에도 오로지 생각은 모두 백성에게 있다. 이 말은 입에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심복(心服)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이때 왕이 여러 해 위예(違豫)했는데, 눈병과 다리의 마비 등의 증상으로 가장 괴로와하였다. 그래서 장차 온천(溫泉)에 목욕하려고 호서(湖西)의 수신(守臣)에게 하유(下諭)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묻고 행재(行在)308) 에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3월에 온천에 거둥하여 경기(京畿)·호남(湖南) 두 도(道)의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 사족(士族)과 상한(常漢)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감사(監司)와 차원(差員)·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물었다. 관원을 보내 송시열(宋時烈)·이귀(李貴)·김집(金集)·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의 묘소(墓所)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윤집의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진휼청(賑恤廳)의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여금 재차 유개(流丐)309) 를 갯가에 모아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하고, 환궁한 뒤 도신(道臣)에게 차원(差員)을 정해서 거처를 잃은 유개에게 계속 주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호서(湖西)의 병신년310) 조의 대동미(大同米)를 결(結)마다 두 말씩 감해 주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근래에 궐내(闕內)에서 술을 파는 자가 있다 하니, 일이 매우 놀랍고 해괴하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형률을 상고하여 과죄(科罪)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왕위에 오른 지 사기(四紀)311) 에 직접 만기(萬機)를 관장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하여 밥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중신(中身)312) 을 지나자, 나쁜 병이 끊이지 않으니, 지난 을유년313) 에는 춘궁(春宮)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하였다. 춘궁이 상소(上疏)하여 굳이 사양하고, 종친(宗親)·대신(大臣)·문무 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아래로는 방민(坊民)의 기로(耆老)에 이르기까지 분주히 다투어 간(諫)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성명(成命)을 정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5년 동안 고질(痼疾)을 앓는 나머지 눈병이 더 심해졌다. 물건을 보면 더욱 어두워 수응(酬應)하기 점점 어려워지니, 나라일이 염려스럽다. 국조(國朝)와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에 의해 세자로 하여금 청정(聽政)하게 하라.’ 하였다. 세자가 진장(陳章)하여 극력 사양하니, 답하기를, ‘여러 해 동안 고질을 앓은데다 눈병이 또 심하여 사무(事務)가 지체되니, 병으로 앓는 동안 걱정이 대단하였다. 너에게 명하여 노고(勞苦)를 대신하게 하니, 이것은 곧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이다. 네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아! 부탁(付託)하는 것이 지극히 무겁고 너의 책임이 지극히 크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혹시라도 게을리하지 말라. 공경과 게으름의 구분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에 나뉘어지니, 두려워하지 않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오로지 한 생각으로 시종 학문에 종사하라.」 하였으니, 너는 마땅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재차 올린 상소에 답하기를, ‘어제 비지(批旨)로 훈계(訓戒)한 말을 너는 공경하고 조심스레 받들어서 다시 사양하지 말라. 그리고 또 근일의 일은 처분(處分)이 바르고, 시비(是非)가 명백하여 백세(百世) 뒤라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되니 생각건대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니, 너는 나의 뜻을 따라 혹시라도 흔들리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앞서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양조(兩朝)에서 예우(禮遇)하던 유현(儒賢)이라 하여 왕이 빈사(賓師)로 대접했는데, 그 문도(門徒) 윤증(尹拯)이 역적 윤휴(尹鑴)에게 빌붙어 오래 전부터 송시열에게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였다. 송시열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묘문(墓文)을 찬술할 때 유양(揄揚)한 바가 그의 기대에 맞지 않자, 윤증은 이 일로 인해 유감을 품고 제 마음대로 고쳐서 물리쳤다. 또 송시열에게 보내는 의서(擬書)를 지어 죄상(罪狀)을 늘어놓으니, 이에 유림(儒林)은 분열되고, 조정의 의논은 마구 흩어져 반세(半世) 동안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기는 데로 쏠렸다. 왕도 또한 그 일의 실상을 통촉하지 못하고, 일찍이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輕重)이 있다.’고 하교(下敎)하였는데, 병신년314) 에 이르러 묘문(墓文)과 의서(擬書)를 직접 얻어 읽어 보자 비로소 그 빙자하여 허구날조한 정상을 살피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아버지와 스승의 경중(輕重)에 대한 설(說)을 일찍이 이미 하교하였으나, 한 번 의서와 묘문을 상세히 본 뒤로 내가 깊이 의리(義理)를 연구하여 시비(是非)가 크게 정해졌으니, 후세(後世)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나의 자손된 자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따라 굳게 지키고 흔들리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비지(批旨)에다 춘궁(春宮)을 교유(敎諭)하니, 반복된 정녕(丁寧)한 가르침이 일성(日星)처럼 밝게 걸려 만세(萬世)에 연익(燕翼)의 계획을 남겨주었다. 사륜(絲綸)이 한 번 전파되자 사림(士林)이 모두 펄쩍 뛰며 경하하였다. 왕이 또 손수 화양(華陽)·흥암(興巖) 두 서원(書院)의 액호(額號)를 써서 걸게 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인주(人主)가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다면 거의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고 사설(邪說)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화양은 곧 송시열을 조두(俎豆)하는 곳이고, 흥암은 곧 송준길(宋浚吉)을 조두하는 곳이다.

무술년315)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평안도(平安道)에 보냈다. 왕이 말하기를, ‘강봉서(姜鳳瑞)의 격쟁(擊錚) 때문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내가 평소 강씨의 옥사(獄事)에 대해 마음속으로 항상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착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고, 나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앙(餘殃)이 있다.」 하였다. 임창군(臨昌君) 소현(昭顯)의 혈손(血孫)으로서 그 자손들의 번연(蕃衍)316) 함이 당(唐)의 분양(汾陽)317) 에 비길 만하니, 선인(善人)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가 과연 분명하다. 이명한(李明漢)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강석기(姜碩期)의 시장(諡狀)에 이르러 그가 어진 재상이었던 것을 알았고, 또 경덕궁(慶德宮)의 높은 곳에서 소현(昭顯)의 사당을 바라보고 그 신도(神道)의 외롭고 단출함에 서글픈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 건의 일에 느낀 바 있어 드디어 절구(絶句) 셋을 지었다. 작년에 수상(首相)이 관작을 회복해 주는 일을 진달(陳達)했을 적에 마음에 망설이는 바가 있어서 능히 다 말하지 못하고 단지 관작의 회복만을 허락했는데, 대개 강석기가 화(禍)를 입었던 것은 단지 그 딸에게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옛적 을미년318) 에 연신(筵臣) 이단상(李端相) 김홍욱(金弘郁)의 원통함을 남김없이 말하였을 적에 효묘(孝廟)께서 한숨을 쉬고 탄식하셨지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련된 것이라서 감히 의논할 수가 없다.」고 하교하였었다. 그런데 그 뒤에 마침내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해 주셨으니, 성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다. 헌의(獻議)하는 여러 대신(大臣)들은 이 뜻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또 2품(二品) 이상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원통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먼저 정해졌고, 공의(公議)도 크게 같으니, 신리(伸理)의 은전(恩典)을 조속히 거행하도록 명하라.’ 하였다. 이에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그 묘소를 봉(封)하였다. 강석기 김홍욱에게는 제사를 내리고 증직(贈職)하였으며,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병이 고질이 되어 계복(啓覆)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형세로 보아 할 수 없으니, 집마다 옥사(獄事)의 판결이 지체되어 유사(瘦死)319) 할 뿐이다. 계복 역시 형인(刑人) 가운데 있으니, 변통(變通)의 방도가 없을 수 없다. 대벽(大辟)320) 으로 처단(處斷)할 즈음에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움이 있으면 세자가 스스로 마땅히 면품(面稟)할 것이며, 지금부터 이후로 무릇 형인(刑人)의 공사(公事)에 관계된 것은 일체 동궁(東宮)에 입달(入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성황단(城隍壇)과 여단(癘壇)에 제사를 내렸다.

기해년321) 에 태조조(太祖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으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내국 제조(內局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향년(享年)이 일흔을 넘긴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인데,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비록 근거할 만한 것은 없으나,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 김육(金堉)이 찬(撰)한 서문(序文)과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모두 그 일을 기록하고 있고, 또 본소(本所) 서루(西樓)의 제명(題名)한 곳에 사롱(紗籠)322) 을 설치하여 봉안(奉安)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이번에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하여 청한 일은 이미 고사(故事)에 근거하고 있고, 왕세자(王世子)의 희구(喜懼)하는 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많아 쉰을 스스로 기약할 수 없었는데, 이미 쉰을 넘었으니, 항상 「태조께서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으니, 나도 만약 그 나이가 되어 성조(聖祖) 아래에 제명(題名)한다면 또한 거룩한 일이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 세자(世子)가 이 일을 누차 청하니, 내가 그 희구하는 정을 생각하여 이에 허락하노라.’ 하였다. 이에 기로소에 영수각(靈壽閣)을 세워서 어첩(御牒)을 봉안(奉安)하였다.

4월에 왕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은술잔을 하사하였다. 또 음악을 내려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와 기사(耆司)에서 잔치를 벌였다.

하교하기를, ‘관무재(觀武才)를 혹은 2, 3년 간격으로 혹은 4, 5년 간격으로 하는 것이 고례(故例)였다. 그런데 내가 여러 해 동안 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설행(設行)하지 못한 지 지금 10년이 되었다. 명관(命官)으로 하여금 대신해 거행하여 위열(慰悅)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에 왕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군신(群臣)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삼남(三南)에 균전사(均田使)를 나누어 보냈다. 연령군(延齡君)의 상차(喪次)에 친히 곡림(哭臨)하였다.

경자년323) 에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다 하여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였다. 6월에 왕의 환후(患候)가 더욱 무거워지니, 세자가 재차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을 보내어 종사(宗社)·산천(山川)에 기도하였다. 8일 진시(辰時)에 왕이 경덕궁(慶德宮) 융복전(隆福殿)에서 군신(群臣)을 버리니, 춘추(春秋) 예순이었다. 이날 경성(京城)의 모예(旄倪)324) ·여대(輿儓)325) 들까지 궐하(闕下)에 달려나와 마치 부모처럼 곡(哭)하였고, 심산 궁곡(深山窮谷)에 이르기까지 바삐 달려와서 호읍(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중궁(中宮)이 원상(院相)에게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평일의 거룩한 덕행을 조신(朝紳)들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오히려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무(政務)에 수응(酬應)하시느라 누차 침식(寢食)을 폐하셨고, 하늘을 공경히 섬겨 재앙을 만나면 공구(恐懼)하셨다. 사시(四時)의 기후가 간혹 고르지 못하거나 우설(雨雪)의 절기가 만일 시기를 잃어 무릇 농사에 피해가 있으면 곧 근심이 얼굴빛에 나타났고, 날씨의 흐리고 맑음과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는가 하는 것 등을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여시(女侍)로 하여금 살펴보도록 하셨다. 백성에 대한 걱정과 나라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잠시도 잊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근로하심이 시종 하루와 같아 여러 해 동안 계속 손상된 나머지 성수(聖壽)를 단축시키게 된 것이다. 상장(喪葬)의 제구(諸具)에 이르러서는 경비를 진념(軫念)하여 일찍이 조치한 바가 있었다. 모든 여러 가지 제기(祭器)는 이번에 내려 주는 은자(銀子)로 만들도록 하고, 또 이 3천 7백 금(金)은 대행 대왕께서 진휼의 자금으로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것인데, 이제 지부(地部)에 내려 국장(國葬)의 비용에 보태 쓰도록 한다. 습렴(襲殮)의 의대(衣襨)도 또한 대내(大內)에서 준비해 쓸 것이니, 만일 부족한 것이 있을 경우 해조(該曹)에서는 다만 써서 보이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여보내도록 하여 평일에 백성을 구휼하고 경비를 절약하던 지극한 뜻에 힘써 따르도록 하라. 습렴(襲殮)할 때는 대신(大臣)·예관(禮官)·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에서 입시(入侍)하는 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왕은 영명(英明)·특달(特達)·관홍(寬弘)·근검(勤儉)하였으며, 효성(孝誠)의 돈독함은 천성에서 나와 시선(視膳)할 때부터 기쁜 낯빛으로 모시는 도리를 다하였다. 사복(嗣服)하자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증자(曾子) 민자건(閔子騫)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여 자의(慈懿)·명성(明聖)  동조(東朝)326) 를 받들어 섬겼는데, 새벽과 저녁으로 승환(承歡)하여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였다.

해마다 태묘(太廟)에 친히 향사(享祀)하고 봄·가을로 반드시 원릉(園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여러 능(陵)을 두루 참배했는데, 더러는 두세 차례에 걸쳐서 하기도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성신(聖神)이 계승하여 풍성한 공렬(功烈)이 드높고 빛났으며, 관덕(觀德)의 묘우(廟宇)와 숭보(崇報)의 의전(儀典)이 거의 모두 이룩되었는데도, 왕은 오히려 미진하게 여겼다. 효사(孝思)를 미루고 넓혀서 말하기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것은 존주(尊周)의 의리이니 밝히지 않을 수 없는데, 자수(字數)가 가지런하지 않은 것은 여러 묘우의 예(禮)가 마땅히 다른 점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에 태조(太祖) 태종(太宗)의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렸고, 인조(仁祖)는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효종(孝宗)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으므로, 높여서 세실(世室)로 삼았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은 선위(禪位)한 이후 수백 년 동안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고 억울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열성(列聖)이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는데, 왕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결단을 내려 서둘러 욕의(縟儀)를 거행하니, 종묘(宗廟)의 전례(典禮)가 질서가 있게 되었고, 신(神)·인(人)이 모두 기뻐하였다. 별도로 중종(中宗) 신비(愼妃)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며,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였다. 한가로이 보내는 여가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경전(經傳)·사서(史書)와 제자 백가(諸子百家), 우리 동방(東方)의 문집(文集)까지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무릇 한 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았다. 날마다 세 번 경연(經筵)을 열어 부지런히 노력하며 게을리하지 않았고, 모년(暮年)에 이르러서도 자주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하였으며, 글에 임하여서는 이치를 분석하여 견해가 분명하고 투철하였다. 일찍이 《심경(心經)》의 ‘마음의 동정(動靜)’을 논하기를, ‘출몰(出沒)이 일정하지 않고 발동하기는 쉽지만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마음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동(動) 가운데 정(靜)이 있고 정(靜) 가운데 동(動)이 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주역(周易)》의 ‘납약(納約)’의 설을 논하기를, ‘이것은 대신(大臣)이 어렵고 험난한 때를 당해 마지못하여 이런 방도를 쓸 수 있는 것이며, 만일 치평(治平)한 세상에 사잇길을 통해 임금에게 결탁한다면 옳지 않다.’ 하였다. 대유괘(大有卦)의 구사효(九四孝)를 논하기를, ‘강하고 부드러움이 중도(中道)를 얻은 연후에야 밝혀 비추고 강건하여 결단할 수 있다. 만일 혹시라도 단지 부드럽기만 하고 엄(嚴)하지 않거나 단지 엄하기만 하고 부드럽지 않다면, 어떻게 능히 그 소유한 대중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육오효(六五爻)를 논하기를, ‘너무 부드러우면 인심(人心)이 해이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반드시 위엄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중용(中庸)》에 이른바 「강함을 나타내고 꿋꿋하여야 고집함이 있기에 족하다.」는 것은 위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역대(歷代)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한(漢)의 성제(成帝)가 이미 적방진(翟方進)으로 하여금 자살(自殺)하도록 하고서 또 후하게 장사(葬事)지내 주도록 하였으니,327) 하늘에 응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송 경공(宋景公)은 좋은 말을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1도(一度)를 옮겨갔으니,328) 군주의 말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지난 역사를 보니 실로 소인(小人)인 줄 알지 못하고서 쓴 사람도 본래부터 있었지만, 더러는 소인인 줄 알면서 쓴 사람도 또한 있었으니, 이는 대개 사의(私意)를 제거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주에게 신하가, 아비에게 아들이 모두 간(諫)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 부소(扶蘇)가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파묻는 것을 보고 어찌 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화(禍)는 없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부소의 허물이겠는가? 혹자가 이것을 부소의 과실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비록 악했을지라도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장수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했다면 옳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친정(親征)을 하지 않았다면 비록 공(功)은 없을지라도 그렇게 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玄宗)은 세째 아들을 죽이고 자부(子婦)를 궁인(宮人)으로 맞아들였으니, 이는 태종(太宗)의 규문(閨門)이 바르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왕은 임어(臨御)하신 지 46년 동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안(慰安)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하늘을 공경히 섬기려는 정성이 위로 하늘에 이르렀고 여상(如傷)329) 의 인덕(仁德)이 아래로 백성에게 미쳤다. 나라는 남북(南北)의 경보(警報)가 없어 경내(境內)가 편안했고 백성들은 하늘과 땅의 포용해 주는 은혜에 싸여 생업(生業)에 안락하였는데, 왕은 한(漢)·당(唐)의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많은 정치를 비루하게 여긴 나머지 개연히 삼대(三代)의 융성(隆盛)에 뜻을 두어 조처와 사업(事業)이 수신(修身)·제가(齊家)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저(關雎)330)  인지(麟趾)331) 의 덕화(德化)가 이미 집안과 나라에 흡족하였고, 주관(周官)의 제도가 찬란히 다시 밝혀졌다.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열조(列祖)의 광휘(光輝)를 더하였고, 큰 계획과 큰 사업은 후사(後嗣)의 한없는 복을 열었다. 이것은 바로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신주(神州)332)  육침(陸沈)333) 되고 일월(日月)이 캄캄하게 어두워졌으나, 한 줄기의 의리(義理)가 좌해(左海)334) 의 지역에서 어둡지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날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은 ‘비풍(匪風)335) ·하천(下泉)336) ’의 원통함을 안고서 ‘고황 백등(高皇百登)의 수치’337) 를 남겼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대지(大志)를 분발하여 장차 큰 일을 하시려 하여, ‘지극한 통한이 마음속에 있다.’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귀신을 울릴 만하였다. 흉적(凶賊)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으려는 뜻은 밝기가 해와 별 같았는데, 하늘이 계획을 기약할 수가 없어 궁검(弓劍)을 갑자기 버리니, 지사(志士)의 분통이 지금까지도 하루와 같다. 그러나 고금을 통해 멸할 수 없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미해지자, 왕은 이것을 크게 두려워하며 분연히 한 몸으로 짊어지고 이에 갑신년338) 이 거듭 돌아오는 날에 황도(皇都)가 함락된 일을 슬퍼하시어 금중(禁中)에 단(壇)을 설치하여 멀리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제사하였는데, 장차 제사를 지내려는 때에 출척(怵惕)339) ·참달(慘怛)340) 하여 참으로 천지(天地)가 무너지고 분열되는 것을 친히 보는 듯이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임진년341) 에 재조(再造)한 은혜는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다.’며 궁성(宮城) 북쪽 정결한 곳에 단(壇)을 설치하고, ‘대보단(大報壇)’이라 명명(命名)하여 해마다 태뢰(太牢)로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였으며, 친히 ‘지감시(志感詩)’와 서문(序文)까지 지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신종 황제가 천하(天下)의 군대를 동원하여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가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황명(皇明)이 속히 망한 것은 반드시 동정(東征)에 연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데, 돌아보건대, 우리 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이미 복수(復讎)·설치(雪恥)를 하지 못하였고, 홍광(弘光)342) 이 남도(南渡)한 후에도 또한 막연히 그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니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늘 개탄하며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종 황제 선조 대왕에게 망룡의(蟒龍衣)를 하사하여 지금도 궁중에 보관되어 있는데, 때때로 꺼내 펼쳐보면 처참한 감회를 금할 수가 없다. 명(明)나라의 우리 나라에 대한 은혜가 한집안과 같은데도, 강약(强弱)의 형세에 구애되어 지금 저들을 복종해 섬기니, 천하에 어찌 이처럼 원통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제갈양(諸葛亮)의 일을 논하면서 왕이 말하기를, ‘제갈양이 한(漢)나라를 회복(恢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몰랐던 바 아니었으나, 그 마음을 다하였을 뿐이다. 신종 황제 생사 육골(生死肉骨)343) 의 은혜를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병자년344) 부터 지금까지 6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심(人心)이 해이해져 점차 처음과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개탄스럽게 생각한다.’ 하였다.

《대명집례(大明集禮)》를 간행(刊行)할 것을 명하고 친히 서문(序文)을 지었으며, 한인(漢人)으로서 흘러들어와 우거(寓居)하는 자는 그 자신에게는 늠료(廩料)를 주고 그 자손(子孫)은 수용(收用)하게 하였다. 또 황조(皇朝)의 성화(成化)345) 무렵에 하사한 인적(印跡)을 괴원(槐院)의 고지(故紙) 가운데에서 얻자 왕이 말하기를, ‘왕위를 계승하는 날에 매양 청(淸)나라의 국보(國寶)를 쓰니, 마음이 아직까지 편안하지 않았는데, 이제 황조의 사본(賜本)은 전획(篆劃)이 어제 쓴 듯하니, 이것으로 모각(摹刻)하여 금보(金寶)를 만들어 보관해 두었다가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왕이 인조(仁祖)·효종(孝宗) 양조(兩祖)의 뜻을 추념(追念)하여 일생 동안 사모(思慕)하면서 차마 잠시도 잊지 못한 나머지, 또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이 금보를 받아서 왕위를 계승하며 황조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잊지 않도록 만들려 한 것이니, 그 지극한 정성과 애달파하는 뜻은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고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단상(短喪)을 한 이래로 신하가 임금을 위해 최복(衰服)을 입는 제도가 폐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그뒤 수천 년 동안 예(禮)를 좋아하는 군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잘못된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끝내 바꾸지 못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기를,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 가운데의 「오모(烏帽)·흑대(黑帶)」의 제도는 민순(閔純)의 의논에 따라서 이미 개정(改正) 하였으나 단령의(團領衣)·포과모(布裹帽)는 변경하지 못하여 고제(古制)에 미진한 바 있다.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이 주자(朱子)의 ‘군신복(君臣服)’으로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 일은 주자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본래 의심할 것이 없다. 과단성 있게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상(大喪)이 났을 때 여러 신하들이 유교(遺敎)를 받들어 고례(古禮)대로 최복(衰服)을 입고, 시사(視事)할 때는 포모의(布帽衣)을 착용하여 한 번에 천고(千古)의 오류를 깨끗이 씻고 영원히 후세의 법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더욱 왕의 고명(高明)하신 과단(果斷)으로서 삼대(三代)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어찌 한(漢)·당(唐) 무렵에 일컬어지는 명철(明哲)한 군주들이 비슷할 수가 있겠는가? 송유(宋儒)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부자(夫子)가 요순(堯舜)보다 낫다는 것은 사공(事功)을 말한 것이다. 요순(堯舜)은 천하(天下)를 다스렸는데 부자가 또 그 도(道)를 미루어서 만세(萬世)에 전하였으니, 요순의 도가 부자를 얻지 않았다면 또한 어디에 근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상제(喪制)는 인간의 대륜(大倫)이나 삼대(三代)의 제도가 천 년 동안 폐지되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이것을 다시 시행하여 후세의 왕자(王者)로 하여금 의거하여 법(法)으로 취하게 하였으니, 이 일로 미루어 논한다면 비록 ‘삼대(三代)보다 낫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존시(尊諡)를 올리기를,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숙종(肅宗)’이라 하였으며, 이해 10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明陵)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장사 때 왕이 곡장(曲墻)을 치우치게 쌓지 말고 정자각(丁字閣)도 또한 복판에 자리잡도록 하여 장릉(長陵)의 우측(右側)을 비워 둔 제도를 모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백성의 힘을 재차 수고롭게 할 것을 미리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王世子)가 사위(嗣位)한 지 4년 만에 훙(薨)하니, 이 분이 경종 대왕(景宗大王)이다.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1남(男)을 탄생하니 바로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이시다. 중궁 전하(中宮殿下)는 서씨(徐氏)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이다. 명빈(榠嬪) 박씨(朴氏)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을 낳았으나 일찍 졸(卒)하였다. 경종(景宗)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뒤에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모두 후사(後嗣)가 없다. 아!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아주시며 하토(下土)를 보살펴 주시어 넓고 넓은 구주(九州)346) 가 오랑캐의 손아귀에 넘어간 지 백 년인데, 기자(箕子)의 봉강(封疆)한 구역만은 8조(八條)의 가르침이 쇠하지 않았다. 5백 년 만에 왕자(王者)가 일어날 시기347) 를 당하여 성인(聖人)을 낳으시어 총명(聰明)·예지(睿智)한 자질을 내려주시고 강의(剛毅)·과단(果斷)의 용의(用意)로 도와주시어 왕으로 하여금 종욕(從欲)348) 의 정치(政治)를 성취하도록 하였다면, 장차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여 옛 선왕(先王)의 왕업(王業)에 앞지를 수 있었을 터인데, 선왕께서 반드시 얻어야 할 수(壽)를 내려주지 아니하여 이 세상으로 하여금 대성(大成)의 지역에 오를 수 없도록 하였으니, 아마 하늘도 기수(氣數)의 굴신(屈伸)에는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이는 바로 천하(天下) 만세(萬世)의 무궁한 애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황극(皇極)의 바름을 세우고 인륜(人倫)의 어둠을 밝히니, 대경(大經)·대법(大法)이 천지에 세워져서 어긋나지 않는다.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니,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있는 심후(深厚)한 인택(仁澤)은 장차 천만 세(千萬歲)에 이르도록 더욱 더욱 드러날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하였다.

 

 

 

숙종실록보궐정오 26권, 숙종 20년 4월 17일 갑신 1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중전의 복위에 대한 남구만·서문중·윤지완 등의 잘잘못을 논한 기사

영의정 남구만이 배명(拜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남구만이 임금에게 조당(朝堂)의 회의(會議)를 중지시킬 것을 아뢰고, 이내 승정원의 진계(陳啓)한 여러 신하들을 문책할 것을 요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경연에서 한 말은 위에 보인다.】 그 때 일월(日月)이 다시 새로워지고 천지(天地)에 태운(泰運)이 회복되어 명분을 바로잡고 윤리를 펴는 일이 하루가 시급하였다. 승정원에서 회의를 하자고 아뢰었던 것은 진실로 창졸하게 명령을 받들어 당황한 가운데 거조를 잘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사체(事體)와 의문(儀文)의 흠결이 있을 것을 염려한 점은 있으나, 중대한 바가 있어 다른 것은 개교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소절(小節)에 구애되어 대의(大義)에 어두웠던 것으로서 이미 실수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회의’라는 두 글자에 있어서는 복위(復位)시키고 폐위시킨 일에 대해서 의란(疑難)하고 잡의(雜議)하려 한 것 같은 점이 있으니 크게 윤리에 어긋나고 더욱 망발이 된다. 남구만이 조정에 나오자마자 먼저 이존(二尊)002) 이 없다는 뜻을 밝혀 거듭 견책과 처벌을 요구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명분을 바로잡고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그의 주대(奏對)한 말에 또한 실수가 있었다. 아마 그의 생각에는, 중전이 이미 복위가 되어 온 나라가 함께 경하하는 바 되었는데, 만일 또 죄로써 희빈(禧嬪)을 출처(黜處)시킨다면 아무래도 동궁(東宮)에게 상처를 입힐 염려가 있을 것이니, 바로 환강(還降)이라 칭하는 것의 형적이 없게 됨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의리의 바름을 진달하고 다시 안타까이 여기는 말을 하여 곡진하게 보호하려는 의도를 피력했던 것인데, "기사년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는 등의 말은 결국 실언(失言)을 면치 못하였다. 처음 사초(史草)를 찬수(纂修)하는 이가 만일 이것을 가지고 그 과오를 논죄하여 장점은 허여하고 단점은 비평했다면 누가 그 점을 승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제 바로 상도를 위반하고 윤리에 어긋나서 신하로서의 예의가 없는 것으로서 단죄하였으니, 이미 본정(本情)의 밖에 죄를 구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날 주륙(誅戮)한다.’는 말도 또한 국면(局面)이 누차 바뀌어 도거(刀鋸)003) 가 서로 이어질 경우 진신(搢紳)이 거의 장차 남아나지 못하게 되어 종사(宗社)가 반드시 따라서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탕평(蕩平)으로써 우러러 경계하고 평서(平恕)로써 스스로 힘쓰고자 하였던 것이니, 이것도 또한 시국을 구제하는 요도(要道)와 국가를 위하는 심려(深慮)에서 나온 것이며 일신(一身)의 사사로운 이해 관계를 위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의논하는 이가 그 괴로운 심정과 피나는 정성을 양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보복(報復)하는 사정(私情)에 통쾌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후욕(詬辱)을 더한 것은 더욱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을 논평하는 도리가 아니다. 서문중(徐文重)의 상장(上章)의 의논과 윤지완(尹趾完)의 공봉(供奉)의 의논은 또한 식견이 모자라 능히 의리를 살리지 못한 데 연유하여 그런 것이다. 그러나 본래 무식한 데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요는 갑자기 변한 상황을 만나 창황히 과오를 저지른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세백(李世白)은 또한 어찌 당인(黨人)이 일찍이 추중(推重)하던 바가 아니겠는가마는 회의(會議)를 계청(啓請)한 죄는 이것보다 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의논하는 자가 이른바 ‘흉당(凶黨)에게 아부하였다.’는 것은 저쪽에 대해서는 꾸짖지 않고 이쪽에 대해서만 책망한 것이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이 하고서 스스로 공론(公論)이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그 역시 웃을 만한 일이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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