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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산(崔海山, 1380년 ~ 1443년)은 조선시대의 무신이다. 본관은 영천(永川) 이고 최무선의 아들이다. 태조 때 아버지의 유명에 따라 화약 수련법과 화포법을 공부하여 학문과 기술을 터득하였다. 1400년 태종 때 군기시에 등용되어 주부에 올랐다. 1436년 세종 때 동지중추 원사가 되었으며 화차, 완구, 발화, 신포 등의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냈다.
본관은 영주(永州) 현재의 영천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使) 무선(茂宣)의 아들이다. 15세가 되어서야 글자를 해독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의 유고(遺稿)인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1401년(조선 태종 1) 군기시(軍器寺)에 등용 주부(主簿)를 거쳐 경기우도 병선군기점고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이 되었다. 1409년 군기감승(軍器監丞)에 오르고 그 해 10월에는 화차를 만들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해온정(解慍亭)에서 발사시험을 하였다. 또 1424년(조선 세종 6) 12월에도 군기판사로서 왕을 모시고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 화포 발사연습을 주관하였다. 1425년 군기감사를 지내고 1431년 6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그가 오랜 군기감 근무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 하여 조정 신하들이 그의 체직(遞職)을 품신했지만 조선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듬해 공조우참판으로 승임되었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해진다 하여 중추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433년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과 함께 파저강(婆猪江) 토벌작전에 참전했을 때도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은 관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세종은 그가 20여 년 동안 오로지 화포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 벼슬만 거두도록 하라고 하여 용서하였다. 그 뒤에도 제주안무사 중추원부사 강계절제사 등을 지냈다. 그는 전수받은 화약수련비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성과 열을 다하여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4월 19일 임오 1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검교 참찬문하부사 최무선의 졸기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이 졸(卒)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永州)요, 광흥창 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 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 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라고 하였다. 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 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 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헌의(獻議)하여 마침내 성의가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이루어지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전함(戰艦)의 제도를 연구하여 도당(都堂)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내었다.

경신년013)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무선을〉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고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이 있는 줄을 뜻하지 못하고 배를 한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太祖)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 참찬(檢校參贊)을 제수하였다. 죽음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賻儀)하였으며, 신사년에 의정부 우정승·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이다. 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

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주니,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 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윤3월 1일 경인 2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문익점의 아들 중용과 최무선의 아들 해산에게 벼슬을 내리다

이거이(李居易)를 파면하여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을 삼고, 하윤(河崙)으로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을, 김사형(金士衡)으로 좌정승(左政丞)을, 이서(李舒)로 우정승(右政丞)을, 조영무(趙英茂)·곽추(郭樞)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이직(李稷)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조박(趙璞)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조호(趙瑚)로 예문관 태학사(藝文館太學士)를 삼고, 문중용(文中庸)을 뽑아서 사헌 감찰(司憲監察)을 삼고, 최해산(崔海山)으로 군기 주부(軍器注簿)를 삼았다. 참찬(參贊) 권근(權近)이 상서하기를,

"고(故) 간의 대부(諫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처음 강남(江南)에 들어가서 목면 종자(木緜種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 진양(晉陽) 촌 집[村舍]에 보내어, 비로소 목면을 짜서 진상(進上)하였으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上下)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익점이 준 것입니다. 백성에게 크게 공덕(功德)이 있는데도 응보(應報)를 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아들 중용(中庸)이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3년을 시묘(侍墓)하고, 이어 어미의 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시묘하고, 상을 마친 뒤에 그대로 진양에 숨었으니, 근근(勤謹)하고 효렴(孝廉)하여 쓸 만한 선비입니다. 고(故)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은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하여 능히 해구(海寇)를 제어하였으니, 실로 국가에 공(功)이 있습니다. 그 아들 해산(海山)도 또한 마땅히 서용(敍用)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5월 18일 병인 1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희천군 김우 등을 경기좌·우도에 나누어 보내 왜적을 방비하게 하다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 등을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에 나누어 보냈으니, 왜적(倭賊)을 막기 위함이었다. 김우(金宇) 경기우도(京畿右道) 교동(喬桐) 등처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김귀보(金貴寶)로 조전 첨절제사(助戰僉節制使)를, 김만수(金萬壽) 좌도(左道) 연흥(延興)·자월(紫月) 등처 수군 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최용화(崔龍和)로 조전 첨절제사를, 조비형(曹備衡)으로 경기좌도(京畿左道) 대진(大津) 등처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삼고, 호군(護軍) 이도(李韜)로 경기좌도 병선 군기 점고 별감(京畿左道兵船軍器點考別監)을, 군기 주부(軍器注簿) 최해산(崔海山)으로 경기우도 병선 군기 점고 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을 삼아 즉일(卽日)로 길을 떠나게 하고, 이관(李灌)으로 사헌 집의(司憲執義)를, 권헌(權軒)·신간(申簡)으로 장령(掌令)을 삼고, 권우(權遇) 등은 모두 면관(免官)시켰다.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0월 18일 병진 2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화차를 제작하는 데 공이 있는 이도와 최해산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군기 소감(軍器少監) 이도(李韜)와 감승(監丞) 최해산(崔海山)에게 말 한 필씩을 주었다. 임금이 해온정(解慍亭)에 거둥하여 화차(火車) 쏘는 것을 구경하고 이 하사(下賜)가 있었다. 또 포(布) 50필을 화통군(火㷁軍)에게 주었다. 화차(火車)의 제도는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구리통[銅桶]에 넣어서 작은 수레[小車]에 싣고 화약(火藥)으로 발사(發射)하면 맹렬(猛烈)하여 적(敵)을 제어할 수 있었다.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1월 9일 경오 4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제야의 불꽃놀이에서 군중을 놀라게 한 군기감 승 최해산을 용서하다

의정부에서 군기감 승(軍器監丞) 최해산(崔海山)에게 죄를 주기를 청하였다. 최해산이 제야(除夜)에 불꽃놀이[火戲]를 할 때, 자신이 몸소 살피지 아니하여 군중(群衆)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죄가 장(杖) 1백 대에 해당되었으나, 명하여 최해산을 용서하고, 그 약장(藥匠)에게 편형(鞭刑)을 가하게 하였다.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2월 24일 경술 1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사헌부에서 군기감 승 최해산, 사헌 감찰 최세창 등의 죄를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군기감 승(軍器監丞) 최해산(崔海山)·사헌 감찰(司憲監察) 최세창(崔世昌)의 죄를 청하니, 명하여 태(笞) 50대를 속(贖)받게 하였다. 최해산 등이 정하게 살피지 못하고, 권지 직장(權知直長) 장의(張誼)로 하여금 철(鐵) 1백 33근을 지나치게 내게 하였기 때문이다. 헌부(獻府)에서 또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 변차희(邊次熹)의 죄를 청하였는데, 변차희 장생전(長生殿)260) 에 벽(壁)을 바를 때에 표지(表紙) 14권을 모실(耗失)하게 하였으므로 죄주도록 청한 것이다.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변차희는 공신 심귀령(沈龜齡)의 사위였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5월 5일 계미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공조 판서 박자청에게 직임에 나오도록 명하다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직임에 나오도록 하였다. 처음에 시정(市井)의 무리들이 단오(端午)라 하여 광통가(廣通街)에 모여서 척석희(擲石戲)171) 를 하였는데, 군기 소감(軍器少監) 최해산(崔海山)이 별군(別軍) 30여 인을 거느리고 곁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와 승세(勝勢)를 타고 추격하매, 박자청이 대장(隊長)·대부(隊副)를 거느리고 갑자기 척석(擲石)놀이 하는 장소로 들어가다가 말이 뛰어 오르며 치는 바람에 땅에 떨어지니, 대장(隊長) 1인이 돌에 맞아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루(鄙陋)하게 여기고, 이르기를,

"판서의 직임이 가석(可惜)하다."

하니, 헌부(憲府)에서 듣고 그를 탄핵하였었다.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11월 4일 계묘 1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경번갑을 만들지 않은 죄로 군기감 관원을 파직시키다

군기감(軍器監) 부정(副正) 최해산(崔海山)·판관(判官) 양회(梁淮)·직장(直長) 손군달(孫君達)·녹사(錄事) 윤근(尹謹)을 파직하였다. 처음에 최해산에게 명하여 중국의 경번갑(鏡幡甲)353) 을 감독하여 만들어서 장차 각도로 나누어 보내도록 하였는데, 최해산이 스스로 감독하여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본감(本監)에서 일찍이 두두미갑(豆豆味甲) 8부(部)와 별철갑(別鐵甲) 3부(部)를 월과(月課)로 하였으나, 이를 중지하도록 명하고 쇄자갑(鎖子甲)354) 3부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또 병조에 명하였다.

"각도의 월과(月課) 갑옷은 일찍이 보낸 견본[見樣]에 의하여 견고하고 치밀(緻密)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 중에 법식과 같이 하지 않는 자는 죄주겠다."

임금이 말하였다.

"가죽으로 갑(甲)을 꿴 것은 여러 해가 지나면 끊어져버리니, 또 수선하도록 하면 그 폐단이 끝이 없을 것이다. 또 녹비(鹿皮)를 재촉하여 바치게 하는데, 그 수도 적지 않다. 내가 생각건대, 철(鐵)로써 꿴다면 썩지 않고 단단할 것이니, 폐단도 따라서 없앨 수 있다."

임금이 또 말하였다.

"이제 동지(冬至)에 각도에서 바치는 철갑(鐵甲)은 아직도 가죽을 사용하여 짜고 꿰는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하다. 이제부터 뒤로는 방물(方物)도 또한 견본[見樣]에 따라서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5월 3일 갑오 7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군기감의 관물을 사사로이 쓴 일로 사헌부에서 박은·윤부·정촌·김성미 등의 죄를 사헌부에서 청하다

사헌부에서 판좌군도총부사(判左軍都摠府事) 박은(朴訔)·군기 판관(軍器判官) 윤부(尹敷)·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촌(鄭村)과 군기시관(軍器寺官) 김성미(金成美)·최해산(崔海山)·최자해(崔自海) 등의 죄를 청하였다. 윤부 박은의 사위인데, 그 처가 장인 집 숙동(熟銅) 9근을 군기감(軍器監)에 바치고 생동(生銅) 9근을 바꾸었고, 정촌은 전에 군기 부정(軍器副正)이 되었을 때 주철(鑄鐵)에 쓰고 남은 소목(燒木) 4천 5백 근을 도로 보충한다고 핑계하고 사사로이 이로써 기와를 구웠고, 김성미·최해산·최자해 등은 그의 청을 청종(聽從)한 까닭이었다.

 

 

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1월 17일 신사 2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상왕이 양화도에 거둥하여 전함을 관람하다

상왕이 양화도(楊花渡)에 거둥하여 전함(戰艦)을 관람하였다. 이에 앞서 여러 도의 전함이 왜선(倭船)을 쫓아가다가, 왜선이 빨라서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다. 상왕이 한스럽게 여겨, 대호군(大護軍) 윤득민(尹得民)을 명하여 빠른 배 3척을 만들게 하였다. 귀화한 왜인을 시켜 왜선을 타고 10여 보 가량이나 먼저 떠나가게 한 후, 득민과 대호군 최해산(崔海山)과 군기 부정(軍器副正) 이예(李藝)를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각기 배 1척씩 타고 쫓아가는데, 득민의 배가 항상 앞서게 되어 경첩(輕捷)하고 빠르기가 왜선보다 나았다. 수군들에게 주식(酒食)과 정포(正布)를 차등 있게 내려 주고, 드디어 서이궁(西離宮)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서이궁에 나아가 술을 마련하였는데, 효령 대군 이보(李𥙷) 유정현(柳廷顯)·박은·이원·조말생·이명덕·원숙이 입시하였다. 날이 저물어 환궁하였다.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2월 14일 을묘 3번째기사 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군기 판사 최해산에게 명령하여 광연루에서 화포를 쏘게 하다

밤에 군기 판사(軍器判事) 최해산(崔海山)에게 명령을 내어 광연루(廣延樓) 밑에서 화포(火砲)를 쏘게 하였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9월 27일 계해 1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사헌부에서 정원 이상의 구사를 거느린 자들을 탄핵하니 당하관들만 처벌하게 하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병조 판서 조말생·참판 이각·참의 유연지(柳衍之)·형조 판서 신상(申商)·참판 김자지·총제 이천(李蕆)·원민생·전흥(田興)·황상(黃象)·지신사 곽존중·우대언 김맹성(金孟誠)·겸 지형조사 박고(朴翺)·판군기감사 최해산(崔海山)·중군 경력 신정리(申丁理)·부정 유급(柳汲)·공조 정랑 안구(安玖)·병조 정랑 정분·차유(車有)·좌랑 송은(宋殷)·이승문(李承門)·김유진(金由畛)이 정해 준 수효 외의 구사(丘史)를 많이 거느려서, 이미 신하로서 법을 받드는 뜻이 없고 또 나타난 사실을 덮어 숨기기만 하니, 율대로 죄를 매기기를 청합니다."

하니, 당상관은 논죄하지 말고 나머지는 율을 적용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비록 당상관은 논죄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들의 범람한 짓을 미워하며 대언들을 꾸짖으니 모두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각사(各司)에 노비(奴婢)를 뽑아 올리는 폐단을 없애고자 하여 참람하게 구사를 거느리는 잘못을 논란하고, 감독관에게 분부하여 영을 범한 자를 엄하게 다스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좌·우 의정과 병조 판서가 흑 40여 명까지 거느려서, 항상 따르게 하는 외에 토목의 일을 시키고, 혹은 재산의 영리를 위하여 못할 짓이 없으므로, 이번에 헌사에서 영돈녕 유정현과 우의정 유관까지 아울러 탄핵하였던 것인데, 임금이 듣고 곧 묻지 말도록 명하였다. 관(觀)은 본디 성품이 깨끗하고 검소하여 벌이를 구하는 일이 없었고, 구사는 3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거느리고 다녔다. 정현은 혹 여기저기 내보내어 장리(長利) 받기를 독촉하게 하고, 혹 돌을 져 나르게 하여 자기 종들보다 더 심하게 부렸다.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6월 11일 계묘 3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김익생·유맹문·최해산·황보인·봉여·원창명·김흡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생(金益生)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유맹문(柳孟聞)을 중군 총제로, 최해산(崔海山)을 좌군 동지총제로, 황보인을 형조 참의로, 봉여(奉礪)를 이조 참의로, 원창명(元昌命)을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事)로, 김흡(金洽)을 우군 첨총제로 삼았다.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0월 9일 경자 1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창덕궁에서 정조를 하례하는 표·전에 배례하다

백관이 창덕궁에 나아가 정조를 하례하는 표·전에 배례하였다. 총제 이천 최해산 등이 표·전을 받들고 길을 떠나니, 이천 등에게 의복·모관·갓·신을 내리었다.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0월 13일 갑진 7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대간의 임용을 품계에 구애받지 말라하다

지신사 안숭선이 아뢰기를,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과 같으니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는 품계(品階)에 구애되어 품계가 정품이 아닌 사람은 장령에 임명하지 않으며, 재주는 비록 합당하지 못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의논이, 다만 정품의 산관(散官)이라 하여 제수하게 되니 심히 옳지 못합니다. 또 재상과 대간은 다른 관직을 제수하는 데 비할 바가 아니니, 품계는 비록 정품이 아니더라도, 재주가 대간에 적합한 사람은 마땅히 재주에 따라서 서용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사람을 임용함에는 모름지기 직책에 맞은 사람을 써야 할 것이니, 마땅히 산관의 직위가 높고 낮은 것을 논하지 말라."

하였다. 숭선이 또 아뢰기를,

"참판 정연이 신에게 말하되, ‘이천(李蕆) 최해산이 오랫동안 군기감 제조(軍器監提調)가 되어 불의(不義)한 짓을 많이 행하여 조금 청렴하지 못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하였사오니, 마땅히 강직하고 공정하고 청렴한 사람으로서 제조를 삼아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기감의 사무는, 다른 사람이 어찌 두 사람의 재주와 기능에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아직은 체직(遞職)하지 말라."

하였다. 〈숭선이〉 또 아뢰기를,

"정연이 말하되, ‘사복시의 관원을 모두 말[馬]을 아는 사람을 쓰게 되므로 불편하다. ’고 하였사오니, 마땅히 처사가 청렴하고 정직한 사람을 임명하여 모람(冒濫)하는 폐단을 제거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다시 아뢰어 시행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55권, 세종 14년 3월 18일 정축 3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최윤덕·이징·하경복·성달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윤덕·이징(李澄)·하경복(河敬復)을 모두 판중추원사에, 성달생(成達生)·조비형(曺備衡)·서선(徐選)을 중추원 사(中樞院使)에, 신개(申槪)·이교(李皎)·이천(李蕆)을 지중추원사에, 이순몽(李順蒙)·유은지(柳殷之)·문효종(文孝宗)·성엄(成揜)·원민생(元閔生)·유사눌(柳思訥)을 동지중추원사에, 이징석(李澄石)·왕인(王麟)·김익생(金益生)·홍약(洪約)·전시귀(田時貴)·윤중부(尹重富)·이상흥(李尙興)을 중추원 부사에, 정인지를 예문 제학에, 심도원(沈道源)을 이조 좌참판에, 정연(鄭淵)을 우참판(右參判), 박신생(朴信生)을 호조 좌참판에, 박안신을 우참판에, 최사의(崔士儀)를 예조 좌참판에, 유맹문을 우참판에, 이징옥을 병조 좌참판에, 우승범을 우참판에, 고약해를 형조 좌참판에, 봉여(奉礪)를 우참판에, 신장을 공조 좌참판에, 최해산(崔海山)을 우참판에, 이중지(李中至)를 한성부 윤에, 강주(姜籌)를 이조 좌참의에, 이긍(李兢)을 우참의에, 박곤(朴坤)을 호조 좌참의에, 김효정(金孝貞)을 우참의에, 윤수(尹粹)를 예조 좌참의에, 원창명(元昌命)을 우참의에, 박서생을 병조 좌참의에, 권복(權復)을 우참의에, 황보인(皇甫仁)을 형조 좌참의에, 이사관(李士寬)을 우참의에, 이숙치(李叔畤)를 공조 좌참의에, 노귀상(盧龜祥)을 우참의에, 장우량(張右良)·김척(金陟)·조뇌(趙賚)·송기(宋頎)·연경(延慶)·장치온(張致溫)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하였다.

 

 

 

세종실록 55권, 세종 14년 3월 27일 병술 2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정부와 육조를 불러 양·천이 서로 혼인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을 다시 논의하다

정부와 육조를 불러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는 것을 금지시킬 일을 다시 논의하였다. 맹사성·허조 등이 아뢰기를,

"어느 품계(品階)를 물론하고 〈천인을〉 첩으로 삼는 것은 일률적으로 다 금지하여야 합니다."

하고, 권진은 아뢰기를,

"전일에 의논한 대로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고, 성억·조계생·이명덕·정흠지·신장(申檣)·이징옥(李澄玉)·최사의·정연·고약해·유맹문·최해산(崔海山)·우승범 등은 아뢰기를,

"전일의 의논이 타당합니다. 다만 유음 자손 이상의 사람은 비록 천첩(賤妾)이 낳은 자녀가 있더라도 양인이 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나, 만약 평민과 천인은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서로 뒤섞이며, 또 나이가 만 40이 되었는지 아닌지도 또한 알기가 어려워서, 그들이 서로 관계하여 낳은 자녀를 양민으로 할 것인가 천민으로 할 것인가 반드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하건대, 이 부분은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논의한 것이 다 그럴 듯하다. 우선 전일의 의논에 좇기로 하겠다."

하였다.

 

 

 

세종실록 56권, 세종 14년 4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황해도 통로 정책에 대해 백성들에게 묻고 장계하라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자비령(慈悲嶺)을 경유하는 길을 개통하고 새로 참(站)을 설치하는 일과 명나라의 사신은 황주길[黃州路]을 경유하게 하고, 본국 사신은 자비령길[慈悲嶺路]을 경유하여 왕래하게 하는 일의 가부를 정부와 여러 조에 논의하였더니, 참판 봉여(奉礪)·최해산(崔海山)·유맹문·박신생(朴信生)·고약해·최사의·이징옥, 판서 최사강, 정흠지·이명덕·조계생, 참찬 성억, 우의정 맹사성 등이 말하기를, ‘마땅히 절령(岊嶺)·동선(洞仙)·경천(敬天) 등의 참을 직로(直路) 곁에 옮겨다가 배치해야 한다. ’고 하고, 찬성 허조는 말하기를, ‘왕공(王公)이 험난(險難)한 곳을 설치하는 것은 성인의 경서에 있는 것으로서, 옛 사람들이 험난한 곳에 통로를 여는 일은 깊은 뜻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세(事勢)를 가지고 살펴보면, 영구한 세월의 통로 정책(通路政策)으로는 직로의 곁으로 옮겨다가 배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근년에 명나라의 사신이 매우 많이 다녀서 황해도 한 도가 폐해를 받음이 막심하니 새 법을 거행하는 것은 때가 아닌가 합니다. 더군다나 동선·경천의 사람들이 또한 반드시 그 땅에 안정하고 있어서 옮기기를 중난(重難)하게 여길 것이니, 마땅히 본도의 정사가 간이하여지고 백성과 물산이 풍부하게 된 뒤를 기다려 옮겨 배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하니, 본도 감사에게 옮겨 배치하는 일의 좋고 나쁜 것과 옮겨서 좋은 때를 〈백성들을〉 찾아서 물어 보고 장계(狀啓)하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56권, 세종 14년 4월 15일 계묘 7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안숭선에게 이정간의 효행에 대해 표창건 등을 논의하다

임금이 안숭선에게 말하기를,

"이정간(李貞幹)은 나이 70이 지났으나 효행(孝行)이 여러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그에게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가자(加資)하여 종신직(終身職)으로 하고 특히 궤장(几杖)을 내리며, 효행을 자세히 논술(論述)하여 그대로 교서(敎書)를 삼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또 경성 군사(鏡城郡事) 유연지(柳衍之)는 부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바꿔 임명하고자 한다. 공조 참판 최해산(崔海山)은 수령이 되어 백성을 다스릴 만하기에 이 사람을 대신 보내고자 하는데 어떤가. 또 내가 일찍이 태종에게 아뢰어서 항상 이선에게 배워서 과거에 급제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그 뒤에 여러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므로 내가 그를 집현전(集賢殿)에 나아가 제술을 배우게 하였더니, 과연 이번에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서 매우 기뻤노라. 마땅히 집현전 부제학을 제수해야 하겠고, 또 이사초(李思招)는 나의 단문친(袒免親) 이상의 친족인데, 다행히 이번 과거에 급제하였다. 비록 성적이 10인 이하에 있으나 특히 7품을 제수하는 것이 어떤가. 또 재상의 직위(職位)는 존중한 것이다. 〈예전 중국 한나라에서는 형벌을 대부에게 적용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여 4백 년에 걸치는 왕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금 사헌부에서 재상에게 죄주기를 청할 때에는 비록 작은 일이라도 모두 율에 비추어 논죄하라고 말하니, 이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이 뒤로는 자질구레한 일은 임금의 재량으로 시행하도록 신청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숭선이 아뢰기를,

"특히 이것만이 아닙니다. 《육전》 안에, ‘대신은 몸소 신문(訊問)을 받지 아니하며 모두 속전(贖錢)을 받는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질구레한 일을 어찌 하나하나 모두 죄주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동은 사기(史記)에 드러나지 않고, 미세(微細)한 과실은 죄다 책에 적게 되니, 후세에 지금의 대신은 모두 죄인이라 할까 두렵사오니 어찌 옳겠습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만약에 작은 일이라면 유사(有司)에서 신청하기 전에 들추어 논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이 두어 조항을 다시 정부와 이조·병조 참판 이상과 더불어 논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세종실록 56권, 세종 14년 4월 18일 병오 2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이정간·유연지·조뇌·이선·금유·성달생·최해산·문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정간으로 중추원 사를, 유연지(柳衍之)로 공조 좌참판을, 조뇌(趙賚)로 중추원 부사를, 이선(李宣)으로 집현전 부제학을, 금유(琴柔)로 좌사간을, 성달생으로 판길주목사(判吉州牧事)를, 최해산(崔海山)으로 판경성군사를, 문귀(文貴)로 판영변대도호부사(判寧邊大都護府事)를 삼았다.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2월 11일 병신 4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최윤덕·허조·하경복 등을 불러 화포·방어소·군사를 대열하는 법 등을 의논케 하다

최윤덕(崔閏德)·허조(許稠)·하경복(河敬復)·정흠지(鄭欽之)·조말생(趙末生)·이천(李蕆)·최해산(崔海山) 등을 부르고, 안숭선(安崇善)에게 명하여 더불어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 첫째번 의논은,

"지난 해에 화포(火炮)를 여연(閭延)·강계(江界) 등지에 보내어 뜻밖에 일어나는 사변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수(個數)가 적은 것이 염려되어 군기감(軍器監)의 관원을 더 보내어 교습(敎習)케 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느냐."

하니, 사강(士康)·해산(海山)·흠지(欽之)·천(蕆) 등이 아뢰기를,

"이미 보낸 화포(火砲)도 많사오니, 아직은 관리(官吏)와 장인(匠人)을 먼저 보내시어 쏘고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또 철탄자(鐵彈子)를 보내심이 편할까 하옵니다."

하고, 말생(末生)·경복(敬復) 등이 아뢰기를,

"전에 보낸 화포가 비록 많다 할지라도 혹 해가 오래 되어 소용이 없지 않을까 염려되오니, 요량(料量)하시어 마땅히 더 보내심이 편할까 하옵니다."

하고, 윤덕(閏德)은 아뢰기를,

"아직은 더 보내지 말으시고, 먼저 화포장(火砲匠)을 보내시어 그것이 쓸만한지의 여부(與否)를 시험한 뒤에 더 보내시옵고, 피령전(皮翎箭)을 관원에게 주어 가서 가르치게 하옵소서."

하였다. 그 둘째번 의논은,

"방어소(防禦所)에 성을 쌓지 아니하면 미편하니, 그 구자(口子)에 혹 석성(石城)을 쌓든지, 돌이 없으면 목책(木柵)을 설치하든지 하여 방비를 튼튼히 함이 어떻겠느냐."

하니, 해산(海山)·사강(士康)·흠지(欽之)·천(蕆)·말생(末生)·경복(敬復) 등이 아뢰기를,

"돌이 많으면 돌을 사용하고, 돌이 없으면 목책을 설치하되, 화포를 많이 갖추어 변역(邊域)을 굳게 하옵소서."

하고, 윤덕은 아뢰기를,

"연변(沿邊)에 성을 쌓고, 또 소보(小堡)를 설치할 것을 신이 이미 상소(上疏)하였사오니, 석성(石城)을 쌓고 목책을 설치하는 것은 신의 본디 품은 뜻입니다."

하였다. 그 셋째번 의논은,

"군사를 대열화는 법은 진실로 폐할 수 없는 일인데, 매양 사신이 올 때마다 그 군사의 수가 적으므로 열병(閱兵)을 못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오지 않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연습을 아니함도 불가할 것이다. 또 전에는 고식지계(姑息之計)로 각도의 시위군(侍衛軍)의 번상(番上)을 아울러 정지하였는데, 지난 해에 이르러 다시 번상(番上)하게 한 것은 매우 좋은 법이었다. 내가 명년의 번상 시위와 온정(溫井)에 행행(行幸)할 때의 시위를 정지하게 하고, 가을에 이르러 아울러 징발하여 대열을 행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느냐."

하니, 해산(海山)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고, 사강·천(蕆) 등이 아뢰기를,

"온정(溫井)에 행행하실 때의 시위 군사도 적을 수 없사온즉, 그전대로 번상하도록 하신 뒤에 돌려보내셨다가, 가을에 이르러 아울러 다시 징발하심이 옳겠나이다."

하고, 흠지(欽之)·경복(敬復)·윤덕(閏德) 등이 아뢰기를,

"단지 당번 군사(當番軍士)만을 써서 대열을 행하옴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아서 매우 불가하오니, 여러 도에서 징병(徵兵)하심이 마땅하옵고, 그리고 온정에 행행하실 때 군가의 수가 적음도 또한 불가하오니, 구례(舊例)에 의하여 번상하게 하여 행행에 시위하도록 하옵소서."

하고, 말생은 아뢰기를,

"군사의 수가 비록 적더라도 사리(事理)에 해로움이 없을 것이옵니다. 번상 시위(番上侍衛)와 경중 군사(京中軍士)로서 매년 열병하오면, 시위하는 무리가 서로 교대하게 되어 상습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사오리니, 비록 사신에게 보인다 하더라도 반드시 번상한 군사라 이를 것이요, 모두 징병한 것이라고 이르지는 아니할 것이옵니다."

하였는데, 경복(敬復) 등의 의논을 따르고, 오직 시위패(侍衛牌)의 번상을 면제하는 것만은 마땅히 다시 생각하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2월 20일 을사 3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중추원 부사 최해산이 염초를 전용하는 자를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아뢰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최해산(崔海山)이 아뢰기를,

"모리(謀利)하는 무리들이 청백색 구슬[靑白色珠]을 구워 만드는 데 염초(焰硝)208) 를 전용(專用)하므로, 사사로이 구워 가지는 자가 있을까 두렵사옵고, 또 유후사(留後司)의 사람들이 구워서 만들기를 가장 많이 하옵는데, 군기시(軍器寺)의 권지 직장(權知直長) 김성미(金成美)가 이에 대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사오니, 원컨대 이 사람을 보내어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옵시되, 경중(京中)은 형조로 하여금 붙잡도록 하옵소서."

하니, 즉시 성미(成美)를 유후사에 보내고, 인하여 유후사 및 형조에 전지(傳旨)하였다.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2월 19일 계묘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안숭선에게 명하여 평안도에 소용되는 활·화살·갑옷 등의 수량을 의논하게 하다

지신사 안숭선에게 명하여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최해산(崔海山)과 더불어 평안도에서 소용되는 활·화살·갑옷·투구·창·칼·화포(火砲) 등의 수량을 의논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2월 21일 을사 3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황희·권진·하경복 등을 불러 평안도에서 쓸 병장 잡물의 수량 등을 논의하다

영의정 황희·우의정 권진·도진무 하경복·이순몽·조뇌·판서 정흠지·최사강·참판 정연·황보인·중추원 부사 최해산 등을 불러서 일을 논의하였다. 그 한 가지는,

"지금 병조에서 아뢴 평안도에 쓸 병장 잡물(兵仗雜物)의 수량이 어떠한가."

하니, 황희 등은,

"신 등의 생각으로는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하경복은,

"다른 물건은 아뢴 대로 함이 마땅하나, 갑옷은 1천 5백 25부(部)가 너무 많으므로 3분의 1을 감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그 하나는,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의 수를 얼마나 써야 마땅할까."

하니, 조뇌는 마병 1천, 보병 2천을 말하고, 하경복·이순몽·정흠지·최해산·정연·황보인 등의 논의에는 마병 1천, 보병 1천이 좋겠다고 하였다. 권진은,

"마병·보병 합해서 3천으로 함이 가하나, 마병의 수와 보병의 수는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시기(時機)에 임하여 적당히 처리하여 정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그 한 가지는,

"보병들이 착용할 갑옷과 투구를 군기감(軍器監)에서 간직한 것을 보낼까. 어느 곳의 갑주(甲胄)를 쓸 것인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본도(本道)의 각 고을에 간직한 것을 골라서 쓰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다. 그 하나는,

"군사가 강을 건널 때에 배를 쓸 것인가, 부교(浮橋)를 쓸 것인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일은 비록 많으나 건너가기에 편리한 것은 부교만 못합니다."

하였다. 그 하나는,

"군사는 모두 평안도에서만 조발(調發)할 것인가, 다른 도에서도 아울러 조발할 것이가."

하니, 정연·황보인·최해산 등의 논의로는,

"황해도에서 5백명, 평안도에서 2천 5백 명으로 할 것입니다."

하고, 황희·하경복·이순몽·조뇌 등의 논의로는,

"황해도는 없애고 모두 평안도에서 조발할 것입니다."

하고, 최사강은,

"황해도에서 6백 명, 평안도에서 2천 4백 명으로 할 것입니다."

하고, 정흠지는,

"황해도에서 4백 명, 평안도에서 2천 6백 명으로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하나는,

"행군(行軍)할 때와 출정(出征)할 때에 진법(陣法)을 연습하는 것이 어떨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진법을 익히면 저 도둑들이 먼저 알고 숨을 것이니, 가만히 행군하여 돌격(突擊)해 들어가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모두 황희 등의 논의에 따르고, 오직 기병과 보병의 수는 권진의 논의에 좇아,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시기에 임하여 적당히 처리하여 수를 정하게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중군(中軍)과 좌·우군(左右軍)의 주장으로는 누가 가하냐."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최윤덕으로 중군을 삼고, 이순몽을 좌군으로, 최해산은 우군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숭선이 아뢰기를,

"순몽이 신에게 말하기를, ‘대저 군사의 진퇴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오로지 중군에 있는데, 신(臣)이 좌군을 맡으면 어찌 성공하리오. 신의 생각으로는 윤덕을 중군의 상장(上將)으로 삼고, 신을 중군의 부장(副將)으로 삼고, 해산을 좌군으로 삼고, 강계 절제사 이각(李恪)과 호조 참의 김효성을 우군으로 삼아, 신이 정기(精騎) 5, 6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先鋒)이 되어 몰래 저들의 땅에 들어가서, 만약 형세가 칠 만하면 치고, 칠 수 없으면 물러나 주둔하여 후군(後軍)을 기다리겠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숭선으로 하여금 비밀리 세 의정에게 논의하게 하고, 인하여 명하기를,

"예전에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했을 때에 태종께서 출정하는 장병들에게 활과 화살을 하사하셨으니, 지금 순몽 해산이 길을 떠남에 어떤 물건을 주어야 마땅할는지, 이것도 아울러 논의하라."

하였다. 권진은 말하기를,

"순몽 해산은 모두 광망(狂妄)한 무리이므로, 오로지 군사를 맡기는 것은 옳지 못하오니, 청컨대 전자의 논의에 의하여, 하사할 물건은 활·화살·갑옷 등으로 하옵소서."

하고, 맹사성은,

"윤덕으로 중군 상장군을 삼고, 순몽을 부장으로, 해산을 좌군으로, 각(恪)을 우군으로 삼음이 가하며, 하사할 물건은 권진의 논의대로 하옵소서."

하고, 황희는,

"삼군(三軍)을 나누는 것은 맹사성의 논의에 의하고, 하사하는 물건은 다만 말을 주는 것이 가하옵니다."

고 하였는데, 숭선이 돌아와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활과 화살과 말을 하사하고, 삼군을 나누어 정하는 것은 황희 맹사성의 논의에 좇을 것이다."

하였다. 최해산에게 명하여 먼저 평안도에 가서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고, 안숭선으로 사목(事目)을 닦아서 해산으로 하여금 최윤덕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는데, 모두 임금이 명한 뜻이다.

1. 도절제사가 아뢴 공초(供招)의 말을 여러 신하들과 논의하고 반복해 생각하니, 파저강의 도적이 거짓 홀라온을 칭탁한 것은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서, 단정코 의심이 없다. 오직 저 오랑캐의 풍속은 서로 바라보는 땅에 살면서 옛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여 간사함을 품고 사나움을 베풀어 변민(邊民)들을 찔러 죽이고는, 후환을 면하기를 꾀하여 도리어 홀라온을 칭탁해 말하여, 위로는 중국을 속이고 아래로는 우리 조정을 속였으니, 토벌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사이에 논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저 도적들이 홀라온을 칭탁해 말하여 이미 황제에게 아뢰었으니, 파저강을 허물하여 급히 칠 수 없다.’ 하나, 나는 생각하기를, 황제가 차별 없이 한가지로 사랑하는 도량(度量)으로서 어찌 파저강을 믿고 우리 나라에게 허물을 돌릴 것이랴. 반드시 이럴 이치가 없으며, 가사 혹 힐문할지라도 마땅히 사유를 갖추어 알리고, 또 태종 황제가 선유(宣諭)한 성지(聖旨)를 끌어서 아뢰면 마침내 윤허함을 얻을 것이다. 이러므로 토벌하는 일을 정하여 군사의 수는 3천 명을 거느리되, 2천 5백 명은 평안도에서 내고, 5백 명은 황해도에서 내며, 그 기병과 보병의 수는 기회에 임하여 의논해 정한다.

1. 강이 깊어서 군사를 건너기가 어려우니 이것이 진실로 염려된다. 만일 여울 위로 건널 만한 곳이 있다면 가하거니와, 만약 건널 만한 곳이 없으면 도절제사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여, 떠들고 들리지 말게 하여 두세 곳에 부교(浮橋)를 만들 것이다.

1. 강계·여연 등 강가에 머물러 사는 무지한 백성들이 일찍이 영리(營利)를 위하여 몰래 저들의 땅에 가는데, 관리들도 알지 못하여 금하지 않으니 허술함이 이와 같다. 지금 큰 일을 당하여 소문이 새면, 작은 사고가 아니니, 비밀히 관리로 하여금 엄하게 고찰을 더하여 왕래를 끊게 하라.

1. 사람을 시켜 그 부락의 많고 적은 것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엿본 뒤에, 가서 그 토벌할 기한을 정하고, 장병(將兵)과 편비(偏裨)를 마련하여 아뢰라.

1. 보졸(步卒)들이 착용할 갑옷과 투구는 도내(道內)의 각 고을에 간직한 것으로 골라서 쓰도록 하라.

1. 부교를 만들 때에 연호(煙戶)의 정부(丁夫)를 쓰지 말고, 부근 각 고을의 선군(船軍)을 사역하라.

1. 대군(大軍)이 이미 강을 건넌 뒤에 적이 만약 불의(不意)에 나와서 혹 몰래 들어와 마음대로 날뛰거나, 혹 부교를 끊어서 군사의 다니는 길을 끊으면 이것도 가히 염려할 것이니, 군사를 나누어 굳게 지켜서 변이 있기를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2월 24일 무신 1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중추원 부사 최해산이 사조하니, 활·화살 및 말을 하사하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최해산이 사조(辭朝)하니, 활·화살 및 말을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2월 26일 경술 4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의정부·육조 등을 불러 파저강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하다

의정부·육조·도진무 등을 불러서 논의하기를,

"지금 이미 파저강을 토벌할 계책을 정하였는데, 3천 명의 군사를 통솔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조신(朝臣)으로서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골라서 패두(牌頭)를 삼아, 그 무리를 거느리고 가게 하고자 하는데, 한 패두가 몇 사람을 거느려야 마땅할까 요량하여 아뢰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한 패두에 1백 명을 영솔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오나, 다만 금군(禁軍)이 고단(孤單)할까 두렵사오니, 한 패두가 2백 명을 영솔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군의 많고 적음을 논하지 말고 적당한 대로 임명해 보내라."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최윤덕으로 주장(主將)을 삼고, 또 변장(邊將) 두 사람을 보내어 좌·우익(左右翼)을 삼거나, 혹은 따로 세 원수(元帥)를 보내고, 최윤덕을 도통사(都統使)로 삼는 것이 어떨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윤덕으로 도통사를 삼고, 따로 세 원수를 보내면, 이는 반드시 윤덕이 도통사의 권한으로서 삼군(三軍)을 총찰(總察)할 따름이고, 정벌하는 일은 친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에서 윤덕 영변에 보내어 진무(鎭撫)하게 한 것은 그 장략(將略)에 노숙(老熟)한 때문이니,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윤덕으로 중군 원수를 삼고, 도통사의 권한을 겸해 주어서 좌·우군(左右軍)을 통찰(統察)하게 함이 적당하옵니다."

하고, 홀로 이순몽의 논의에는,

"윤덕으로 중군 원수를 삼아 도통사를 겸하게 하면, 좌·우군의 일이 혹 고르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별도로 도통사를 보낸 뒤에야 고르지 못한 한탄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출장한 원수를 경 등이 숙의(熟議)하여 아뢰라. 최해산은 내가 이미 결정하였다."

하니, 모두가 이순몽과 전 총제 이징석(李澄石)을 천거하므로, 임금이 이 두 사람이 가하다고 말하고, 인하여 명하기를,

"평안도는 야인과 이웃하였으니 방어를 늦출 수 없다. 방패·화포(火砲)·갑주(甲胄)·화살과 창(槍) 등을 요량해 더 보내어서 불우지변(不虞之變)에 대비하라."

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순몽의 말에, ‘해산이 먼저 강가에 이르러 백성들을 사역하여 재목을 베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서로 소동하고 떠들어서 혹 저들이 알까 두려우니, 이것이 진실로 염려되어 아직 해산의 발행을 멈추고, 때에 다달아 군졸들로 부교(浮橋)를 만들어서 건너는 것이 가하며, 만약 일이 커서 갑자기 이룩할 수 없어서 반드시 미리 만들어야 하면, 재상(宰相)은 제하고 벼슬이 낮은 이를 택해 보내어 몰래 여러가지 물자를 준비하여 시기를 기다리게 함이 적당하다. ’고 하는데, 이 논의가 어떠한가."

하니, 황보인의 논의에는,

"미리 백성들을 부역시키면 저들이 반드시 들을 것이니, 아직 해산의 출발을 정지하고, 건널 때를 당하여 만드는 것이 가합니다."

하고, 정연의 논의에는,

"해산이 가면 반드시 오래지 않아서 얼음이 풀릴 것이니 미리 만들어서 후환이 없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고, 황희·권진·하경복·최사강 등은,

"얼음이 풀리면 저들이 반드시 안심하고 모두 농사짓기에 힘쓸 것이오니, 마땅히 해산으로 하여금 먼저 그곳에 이르러 성책(城柵)을 순시(巡視)한다고 칭탁하여, 그들의 의심을 풀게 하고, 모든 일을 몰래 준비하여 그 뜻하지 아니할 때를 기다려서 수륙군(水陸軍)을 합하여 힘을 같이 해서 만들면 가할 것인데, 하필 다른 사람을 다시 임명하오리까."

하고, 정흠지는,

"해산이 만약 이르면, 저들이 반드시 알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나, 다리를 만드는 데에는 갈대[蘆]와 칡[葛]을 많이 쓰는데, 해산으로 하여금 먼저 부근에 이르러 미리 준비하게 함이 가하옵니다."

하고, 신상은,

"신이 일찍이 여연 수령[閭延守]을 지낸 노익강(盧益剛)의 말을 들은즉, ‘강가에서 반의 반나절 길에 한 산이 있는데, 칡과 갈대가 많다. ’고 하오니, 만약 과연 있다면 임시하여 다리를 만드는 것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산이 이미 떠났는데 하필 바꾸오리까."

하니, 임금이 황희 등의 논의에 따르고, 해산에게 내전(內傳)하기를,

"부교(浮橋)를 만들기를 명하였더니, 이제 다시 생각하건대, 명목 없이 재목을 베면 인심이 요동하여 저들이 반드시 알 것이니, 이것이 크게 염려된다. 지금 경을 성책 순심사(城柵巡審使)로 삼으니 목책(木柵)을 신설할 터를 골라서 정한다고 가탁하고, 강가를 순찰하면서 가만히 생각하고 비밀히 헤아려서 군사가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부교를 만들되, 만약 부교가 완전하지 못하여 사람과 말이 함께 빠진다면 작은 사고가 아니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후환이 없게 하라."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권진이 말하기를, ‘파저강의 도둑만 염려하고 동북(東北)의 도둑을 근심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불가하므로, 함길도 도절제사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鏡城)에 가서 사변을 방비함이 마땅하다. ’고 하니, 이 논의가 어떠한가."

하니, 황보인은 아뢰기를,

"도절제사가 미리 가서 사변을 방비함이 기회에 합당하옵니다."

하고, 황희 등은,

"파저강에 발병(發兵)할 때를 기다려서 갈지라도 오히려 늦지 않은데, 하필 군사를 거느리고 미리 가서 그 고을에 폐를 끼치오리까."

하니, 임금이 황희 등의 논의에 따랐다. 또 논의하기를,

"하경복이 헌의(獻議)하기를, ‘갑사(甲士)의 시험에 그 전민(田民)의 많고 적음을 상고함은 나라에서 정한 법령이 있으나, 함길도 사람은 노비(奴婢)가 본래 적으므로, 비록 무재(武才)가 있을지라도 노비 인구의 한도에 구애되어 재주를 시험하지 못함은 진실로 편하지 못하오니, 전민(田民)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지 말고 모두 시험보게 하여 충군(充軍)하옵소서.’ 하였는데, 이 논의가 어떠한가."

하니, 황보인은,

"하경복의 논의에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정연은,

"그때에 당하여 가벼운 법령에 좇아 시험보게 하고, 반드시 별도로 딴 법을 세울 것은 아닙니다."

하고, 이순몽 등은,

"양계(兩界) 사람을 대접하기를 본디 타도와 달리 하였는데, 지금 또 가벼운 법에 좇아 재주를 시험하게 하면 사람마다 모두 서울에 와서 시위(侍衛)하고자 할 터이므로, 마침내 그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니, 아직 예전대로 두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고, 신상은,

"대저 인재(人材)는 익히고 익숙하면 그 재주를 이룩할 수 있는데, 하물며 그 도(道)의 인물은 다른 도와 같지 않으니, 그 시험하는 법도 다른 도보다 감하여 후하게 대접함을 알게 할 것입니다."

하고, 하경복은,

"시험은 마땅히 다른 도와 같이 할 것이나, 다만 전민(田民)의 많고 적음은 논하지 말고 모두 시험보기를 허락할 것입니다."

하고, 권진·황희 등은,

"전민의 많고 적음은 논하지 말고 취재(取才)하여 선비를 등용(登用)하는 길을 넓히소서."

하니, 임금이 황희 등의 논의에 좇아 곧 병조에 전교를 내리기를,

"함길도의 갑사 취재(取才) 때에 타도의 예(例)에 쫓아 노비 5, 6명과 5, 6결(結) 이상인 자라야 시험보기를 허락하였더니, 이로 인하여 비록 무재(武才)가 있는 자라도 이 정한(定限)에 구애되어 시험을 보지 못하게 되니, 지금부터는 본도에서 갑사를 취재할 때, 무예에 능한 자는 전민의 다소를 계산하지 말고 모두 취재하게 하라."

하였다. 이전에 이순몽 최윤덕이 진무로 나가던 때를 당하여 비밀히 정흠지 안숭선에게 청하기를,

"원컨대 미복(微服)으로 건주위(建州衛)에 가서 도로와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친히 보고, 만일 나라에서 가서 치게 되면 내가 반드시 비장(裨將)의 열(列)에 참여할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기고, 웃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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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2월 27일 신해 5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의정부·육조 등을 불러 주장과 함께 권략있는 자를 골라 정할 것을 논의하다

의정부·육조 및 삼군 도진무사·안숭선·김종서 등을 불러 논의하기를,

"최윤덕이 일찍이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갔는데, 이제 이순몽·최해산의 말로써 30명을 더 뽑아서 패두(牌頭)를 정하고, 주장(主將)이 거느리는 군사는 패두가 되지 못하니 진실로 적당하지 못하다. 내가 전후 군사를 합해 모아서 주장과 함께 권략(權略)이 있는 자를 골라서 정하고자 하는데 어떨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상교가 지당하옵니다."

하였다.

정연은 아뢰기를,

"한 패두(牌頭)가 1백 명을 거느리면 통솔하기 어려울까 두렵사오니, 마땅히 한 패두가 50명을 거느리게 하여 호령하기에 편리하게 하옵소서."

하고, 최사강은,

"전후의 군사를 합해 선택하여 정함이 가하오나, 다만 온정(溫井)에 행차하실 날이 이미 급박한데, 시위(侍衛)가 허술하오니 30명을 더 뽑는 것은 감함이 마땅하옵니다."

하고, 황희 등은,

"합해 모아서 골라 정하는 논의는 일체 상교에 의할 것입니다. 서울 군사만이 아니라, 만약 그 도에 무예(武藝)가 가히 패두가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또한 주장이 골라 정하기를 허락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황희 등의 논의에 좇아 말하기를,

"이순몽이 갈 적에 마땅히 이로써 친히 전교하겠다."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서울 군사의 부방(赴防)하는 자를 이미 1백 명으로 정하였으나, 지금 1백 명을 더하고자 하는데 어떨까."

하니, 안순(安純) 등은 아뢰기를,

"만약 야인들에게 군사를 쓰려고 하면 더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하경복 등은,

"이미 1백 명을 보냈으니 오히려 많은데, 더 보내는 것은 마땅치 못합니다."

하고, 황희 등은,

"서울 안의 시위도 허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의 말에 ‘정병(精兵) 1백이면 향하는 곳에 대적할 이가 없다.’ 하였으니, 더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평안·황해 두 도에 신백정(新白丁)을 뽑아서 패(牌)를 만들어 들여보내면, 이들이 산판(山坂)을 다니기에 익숙하고 활 쏘기에도 익숙하여 유익할 듯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순몽이 갈 적에 병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최해산이 떠날 때에 헌언(獻言)하기를, ‘토벌할 즈음에 만일 말을 서로 통하고, 문서를 닦아 회답하는 일이 있다면, 한통사(漢通事)와 이문(吏文)에 밝은 자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 청컨대 통사 및 문신(文臣)을 각각 한 사람씩 보내소서.’ 하였으니, 이 말은 어떤가."

하니, 경복 등은

"기해년 동정(東征) 때에도 모두 보냈으니 정해 보내는 것이 편합니다."

하고, 맹사성 등은,

"통사는 본도에도 있고, 평양 등처의 통사 한두 사람을 정해 보내는 것이 편하며, 문신은 최치운(崔致雲)을 이미 보냈으니 별도로 보낼 것은 없습니다."

하고, 황희는,

"토벌할 때에 어찌 통사와 이문(吏文)을 쓰오리까.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사성 등의 논의에 따랐다. 또 논의하기를,

"내가 양계(兩界)의 전후 치보(馳報)와 포로된 인민들의 말을 듣건대, 권두(權豆) 동맹가첩목아가 공모한 사실이 이미 드러났는데 지금 서쪽에 군사를 쓰면, 저들이 반드시 그 그름을 스스로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울 것이며, 만약 형세가 서쪽이 급박하면, 서쪽 사람이 동쪽으로 돌아가서 허(虛)한 틈을 타서 침입하여 간사한 꾀가 측량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동쪽과 서쪽을 아울러 쳐서 그 무리를 멸하고자 하는데 어떨까. 내가 일을 알지 못하니 경 등이 잘 논의하여 아뢰라."

하니, 황보인 유맹문의 논의에는,

"장차 취(取)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하며, 또 멀리 있는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치는 것은, 공격하여 취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서쪽을 친 뒤에 천천히 그 형세를 보아서 다시 도모 하옵소서."

하고, 박안신의 논의에는,

"군사를 수련시키고 성책을 베풀어서 포로된 사람과 재물을 모두 꾸짖어 돌려보내도록 하여, 앉아서 괴롭히는 것이 가하옵니다. 저들이 중국 황제의 벼슬을 받았고, 또 홀라온이 사로잡은 사람을 천사(天使)045) 와 더불어 같이 꾀하여 탈환(奪還)한 일로서 말을 가탁하여 주문(奏聞)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공격을 가하면, 외변(外邊)에서 일을 내는 자로 하여금 교묘하게 참소하는 실마리를 일으켜 중국과 틈을 맺게 하면, 두렵건대 번국(藩國)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고, 맹사성·권진·최사강·조뇌·심도원·김익정·권도·정연 등은 아뢰기를,

"먼저 파저강의 도적을 친 뒤에 도모함이 가하옵니다. 일시에 아울러 거사(擧事)함은 신 등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옵니다."

하고, 황희·허조·하경복·안순·노한·이순몽·조계생(趙啓生)·정흠지 등은,

"저들이 비록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할지라도 지금 우리와는 틈이 없는데, 다만 오고가는 말로서 일시에 아울러 거사하여, 갑자기 공격을 가하면 온당치 못할까 그윽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안숭선이 또 아뢰기를,

"지금 오고가는 말을 듣고 가볍게 호랑이의 입을 범한 것도 불가하였사온데, 또 서쪽에 크게 거병하고 또 동쪽에 군사를 동하고자 함은 심히 불가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나, 특히 경 등을 시험한 것이다."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역대에 무릇 많은 군사를 동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신하들에게 물어서 상·중·하(上中下)의 계책을 베풀고, ‘마땅히 아무의 계책을 따르겠다. ’고 말하였으니, 경 등이 전일에 각각 생각한 바를 써서 아뢰었으나, 토벌할 좋은 계책을 다시 논의하여 아뢰면 장차 채택하겠다."

하니, 하경복·유맹문·박안신·정연·황보인 등은 아뢰기를,

"이기기를 꾀하고 적(敵)을 헤아리는 것은 오직 장수의 계책에 있으니, 그 도로의 험하고 평탄함과 병비(兵備)의 허실(虛實)을, 그 장수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살피게 하고, 기회에 임하여 군사를 나누어 돌격하게 하옵소서."

하고, 조뇌·김익정·권도 등은,

"변(邊)은 미리 도모할 수 없고, 권(權)은 미리 베풀 수 없으니, 기묘한 꾀를 내어 적을 제어하는 일은 장수에게 위임하고, 그 부장(副將) 이하는 그 명령에 복종하여, 어기고 거스르지 못하게 하여야 일이 거의 이룩될 것입니다."

하니, 대저 순몽·해산 등이 광패(狂悖)하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있었다. 노한·최사강·심도원 등은 아뢰기를,

"군사는 많은데 승리가 있지 아니하니, 정예(精銳)한 군사를 골라서 그들이 뜻하지 않는 때에 나가서, 군사를 잠복시켜 몰래 습격해 취함이 상책입니다."

하고, 맹사성·권진·조계생·정흠지 등은,

"정예한 군사를 골라서 함매(銜枚)하고 빨리 달려 길을 나누어 함께 나아가서 그 부락을 습격하고, 그 소굴을 무너뜨리면 이것은 상책이라 이를 것이고, 대군(大軍)이 진(陣)을 치고 북을 울리면서 전진하면, 저들은 장차 두려워하여 그 부락이 온통 도망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찌 감히 항거하오리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비록 뜻을 쾌하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무위(武威)를 빛내고 드날려서, 저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고 다시 엿보는 마음을 맹동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니, 이는 중책(中策)이라 이를 것입니다."

하고, 안순 허조는 아뢰기를,

"얼음이 얼 때를 기다려서 가만히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이 뜻하지 아니할 때에 덮쳐서, 죄를 문초하고 돌아옴은 중책이 되고, 농사달에 군사를 일으켜서 다리를 만들고 군사를 건너서, 적으로 하여금 먼저 알게 하여, 복병이 갑자기 나와서 승패를 알기 어렵고, 또 비가 오고 물이 져서 진퇴(進退)가 어려우면, 이는 하책(下策)이 됩니다."

하고, 황희의 논의도 이와 같았다. 허조 등이 또 아뢰기를,

"반드시 이때에 문죄하고자 하면, 도적을 놓치지 말고 남김없이 잡는 것이 가하고, 저들이 만약 멀리 도망가거든 궁하게 쫓지 말고, 위엄을 보이고 돌아오는 것이 또한 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경 등의 논의를 다 알았으나, 토벌은 마땅히 4월의 풀이 길 때를 어겨서는 안 된다."

고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평안도에 해로(海路)를 방어하는 일은 조금 완화(緩和)되었으나 육로(陸路)는 심히 긴급하고, 또 지금 북도(北道)의 방수(防戍)가 더욱 급하여 백성이 그 노고를 입으니, 내가 북도의 각 고을 선군(船軍)을 적당하게 옮겨서 수년 동안을 한하고, 북변(北邊)을 나누어 방수하게 하여, 노고의 더하고 덜함을 거의 고르게 하려고 하는데, 이 계책이 어떨까."

하니, 맹사성·권진·허조·안순·노한·이순몽·조계생·정흠지·최사강·심도원·김익정·권도·정연·박안신·유맹문·황보인 등은 아뢰기를,

"그 도의 감사와 절제사로 하여금 적당하게 옮겨 정하여 일시의 변(變)에 응하게 하옵소서."

하고, 황희·하경복·조뇌 등은,

"육로와 해로에 각각 방어하는 일이 있는데, 하필 선군을 옮겨서 왕래하는 폐를 이루게 하오리까. 신 등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로 하여금 본도에 이문(移文)하여 마련하게 하라."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이순몽이 사졸들의 몸을 호위하는 목방패(木防牌)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기에, 내가 평안도로 하여금 시기에 임하여 만들어 주게 하려고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가하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순몽이 갈 적에 사목(事目)에 써서 보내라."

하였다.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3월 22일 을해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집현전 부제학 이선을 보내어 북정의 장졸에게 교서를 반포하다

집현전 부제학 이선(李宣)을 보내어 북정(北征)의 장졸(將卒)들에게 교서를 반포(頒布)하고, 인하여 장졸들의 강 건너는 것을 살피기를 명하였다. 그 중군 도절제사 최윤덕에게 전교한 글에 이르기를,

"군사를 씀은 제왕(帝王)이 신중히 하는 바이다. 그러나 은(殷) 나라 고종(高宗)은 3년 동안의 전쟁을 치렀고, 주(周) 나라 선왕(宣王)은 6월에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는 모두 백성을 해롭게 하고, 국가의 근심이 되기 때문에 부득이한 것이다. 이 무지한 야인들이 우리 경계에 가까이 있으면서, 쥐와 개처럼 도둑질한 적이 여러 번이었으나, 짐승 같은 습속을 족히 더불어 계교할 것이 못 된다 이르고, 참고 용납하기를 오래 하였더니, 지금 국경에 몰래 들어와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무찔러 죽이고, 부녀를 사로잡으며, 백성들의 재산을 소탕하여 사나움을 방자히 행하였으니, 어찌 그만둘 수 있으리오. 오직 경은 충의(忠義)의 자품(資稟)을 가지고 장상(將相)의 지략(智略)을 겸하여, 이름이 일찍 드러나서 안팎에서 함께 아는 바이므로, 이에 중군(中軍)의 장수로 명하여 야인을 토벌하여 문죄하기를 명하니, 오직 이 부장(副將) 이하 대소 군관(大小軍官)과 군사들의 소속에 있는 자를 경이 모두 거느리되, 명령에 복종하여 공을 이루는 자는 상을 주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자는 벌을 줄 것이다. 아아, 군사의 직무를 나누어 정하는 일은 내가 이미 명하였으니, 적을 토벌하는 공은 경이 힘쓸지어다."

하였다.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 이순몽·좌군 절제사 최해산·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우군 절제사 이각(李恪)·조전 절제사 김효성 등에게 주는 교서에 이르기를,

"임금의 도리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장수의 충성은 적개심(敵愾心)이 귀하다. 무지한 이 야인이 시랑(豺狼) 같은 마음으로 벌같이 쏘는 독기(毒氣)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 국경을 침략하고, 우리 백성의 생명을 살해하여, 고아(孤兒)와 과부(寡婦)가 원한을 일으켜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이것은 과인이 불쌍하고 슬퍼함을 마지 않는 소이이며, 또한 경들이 가슴을 치고 이를 가는 바이다.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성명(聲明)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에게 아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기를 명하노니, 모두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주장(主將)의 방략(方略)을 듣고 적을 쳐서, 꺾는 공을 이룩하여 변경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게 하라."

하였다. 3품 이하의 군관(軍官)과 군민(軍民)들에게 교서하기를,

"무지한 이 야인은 효경(梟獍) 같은 행동과 시랑(豺狼)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경계에 이웃하여 항상 화심(禍心)을 품고 틈을 엿보아 침략하므로, 방비하기를 엄하게 하고 수위(戍衛)하기에 수고롭게 하여 생민(生民)의 근심이 된 지가 오래였는데, 지금 또 변경을 침범하고 생명을 살해하며 집을 소탕하니, 내가 실로 마음이 아프다. 고아(孤兒)·과부(寡婦)를 위하여 장수를 명해 토죄(討罪)하게 하노니, 너희 뭇 군사들은 나의 밤낮으로 근심하는 마음을 다 알고, 장수의 절제(節制)하는 법을 삼가히 하며, 늙은이·어린이와 부녀를 제외하고 만일 능히 적의 머리를 베이면, 그 수(數)의 많고 적음에 따라 혹 3등을 뛰어올리고, 혹은 2등을 뛰어올리며, 혹은 한 등을 뛰어올려서 벼슬로 상을 주고, 그 총패(憁牌)와 소패(小牌)는 비록 스스로 공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라도, 부대 안에서 베이고 잡은 것이 많은 자에게도 차등이 있게 벼슬로 상을 주되, 만일 군령(軍令)을 따르지 않는 자는 비록 공을 이룩할지라도 상이 없다. 너희들은 각각 너의 용맹을 다하여 과감하고 굳셈을 이룩하기에 힘쓸지어다."

하고, 겸하여 사목(事目)을 붙였는데,

"1. 군사가 파저강에 이르러 만약 능히 사람을 잡았으면, 그 중에 늙은이·어린이는 굶주리고 피곤하게 하지 말고, 부녀는 군인으로 하여금 혼잡하지 말게 하며, 거느리고 올 때에는 다만 부녀자들로 하여금 한 곳에서 잠자도록 하라.

1. 대소(大小) 군사와 장수들이 술을 마시되, 취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고, 적당하게 술기운이 나도록 할 따름이며, 술을 마시고 기운을 쾌하게 한다는 말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3일 을묘 4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평안도 감사가 이각의 승전을 아뢰니, 선온을 영변부에 보내어 위로하게 하다

평안도 감사가 사람을 보내어 우군 절제사 이각(李恪)의 승전을 아뢰니, 곧 호조 우참판 박신생(朴信生)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가지고 영변부에 가서 출정한 도원수 최윤덕과 부장(副將) 이순몽·이징석·최해산·이각 등을 위로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7일 기미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파저강의 토벌에 관해 치계하다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 박호문을 보내어 치계(馳啓)하기를,

"선덕 8년 3월 17일에 공경히 부교(符敎)를 받들고 장차 파저강의 도둑을 토벌하려고 하였으며, 좌부(左符)를 보냄에 이르러 병부를 맞추어 보고 군사를 발하였나이다. 이에 곧 본도의 마병(馬兵)·보병의 정군(正軍) 1만을 발하고, 겸하여 황해도 군마(軍馬) 5천을 거느리고 4월 초10일에 일제히 강계부에 모여서 군사를 나누었는데, 중군 절제사 이순몽은 군사 2천 5백 15명을 거느리고 적괴(賊魁) 이만주의 채리(寨里)로 향하고, 좌군 절제사 최해산은 2천 70명을 거느리고 거여(車餘) 등지로 향하고, 우군 절제사 이각(李恪)은 1천 7백 70명을 거느리고 마천(馬遷) 등지로 향하고, 조전(助戰) 절제사 이징석은 군사 3천 10명을 거느리고 올라(兀剌) 등지로 향하고, 김효성은 군사 1천 8백 88명을 거느리고 임합라(林哈剌) 부모의 채리(寨里)로 향하고, 홍사석은 군사 1천 1백 10명을 거느리고 팔리수(八里水) 등지로 향하고, 신은 군사 2천 5백 99명을 거느리고 정적(正賊) 임합라의 채리로 향하여, 본월 19일에 여러 장수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을 마쳤습니다. 이제 사로잡은 것과 머리를 벤 것, 마소와 군기(軍器) 를 탈취한 수목(數目)과, 아울러 우리 군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사람 및 화살을 맞은 인마(人馬)의 수목을 열거하여 아룁니다. 신이 사로잡은 남녀가 62명, 사살한 적이 98명, 각궁(角弓) 21, 화살 4백 20, 환도(環刀) 3, 화살통 8, 나도(羅鞱) 3, 궁대(弓帒) 3, 창날[槍刀] 28, 소고(小鼓) 1, 말 25필, 소 27마리이고, 본국 군사로서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4명, 화살에 맞은 자가 20명, 화살에 맞은 말이 18필, 화살에 맞아 죽은 말이 2필이며, 중군 절제사 이순몽이 사로잡은 남녀가 56명이고, 【죽인 수는 기록하지 않았다. 】 좌군 절제사 최해산은 생포한 남자 1, 머리 벤 것이 3, 각궁 6, 화살 1백 4, 화살통 6, 나도(羅鞱) 2, 환도 1이고, 우군 절제사 이각은 생포 남녀 14명, 죽인 도적이 43명, 말 11필, 소 17마리이며, 조전 절제사 이징석은 생포한 장정 남자 18명, 장정 여자 26명, 남녀 아동 각 12, 사살하여 귀를 벤 것 5, 갑옷 2, 각궁 15, 화살통 7, 환도 1, 화살 3백 30, 창 2, 말 25필, 소 33두, 안자(鞍子) 3이며, 조전 절제사 김효성은 생포한 남녀 16, 죽인 도적 13, 화살 맞은 도적 7, 각궁 2, 화살 14, 말 6필, 소 12두이고, 화살 맞은 우리 군사 2명, 화살 맞은 우리 말이 6필인데, 1필은 즉사하였고, 상호군 홍사석은 생포 남녀 31명, 죽인 도적 21, 화살 맞은 도적 28, 각궁 8, 화살 1백 12, 환도 1, 소 21마리이며, 우리측은 화살 맞은 군사 3명, 말 3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호문 사정전에서 인견하니, 호문이 아뢰기를,

"지금 피로인들의 말에 의하면, 파저강 야인이 여연에 침입할 때에 동맹가첩목아의 관하 사람도 왔다고 합니다."

하매, 임금이 비밀히 김종서로 하여금 여러 대신에게 논의하기를,

"맹가첩목아가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구심을 품을 것이니, 비밀히 윤덕에게 효유하여 이 말을 떠들지 말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니, 모두,

"상교가 지당하옵니다."

하였다. 곧 윤덕에게 내전하고 호문에게 옷 두벌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윤덕이 출병할 때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교서와 사목(事目)을 펴 보이고, 인하여 취초(取招)하기를,

"주장(主將)의 조령(條令)을 혹 어기는 자가 있으면, 삼가 교서에 의하여 군법을 따를 것이니, 그 죄를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군령(軍令)에는,

"1. 저들과 대적할 때에는 지금 내린 칙서 및 영락 년간에 선유한 성지의 사연을 말하지 말고, 일체 교서에 의하여 모든 장수들은 오로지 주장의 영을 듣는다.

1. 주장이 각(角)을 한 통 불면 모든 장수들이 응하고, 금고(金鼓)도 같으며, 휘(麾)를 왼쪽으로 눕히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눕히면 오른쪽으로 간다. 북을 치면 나아가고, 쇠를 치면 그치며, 두 번 쇠를 치면 곧 물러가되, 일체 주장의 명령에 따른다.

1. 전쟁에 임하여 휘를 눕혀도 응하지 아니하는 자와, 북을 듣고도 나아가지 아니하는 자, 장수를 구원하지 아니하는 자, 군정(軍情)을 누설하는 자, 요망한 말을 내어 여러 사람을 의혹하게 하는 자는 대장에게 고하여 참한다.

1. 자기 패(牌)를 잃고 다른 패를 따라가는 자와, 장(章)을 잃은 자, 떠드는 자는 벌을 주고, 한 항오(行伍) 중에서 세 사람을 잃은 자도 벌을 주며, 패두(牌頭)를 구제하지 아니하는 자는 참한다.

1. 북을 천천히 치면 천천히 가고, 빨리 치면 빨리 간다. 이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행진(行陣)할 적에는 벌을 주고, 싸움에 임해서는 참한다.

1. 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늙고 어린 남녀는 치고 찌르지 말며, 장정이라도 항복하면 죽이지 말라.

1. 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영을 내리기 전에 재물과 보화를 거두어 넣은 자는 참한다.

1. 험하고 좁은 길에 행군하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면 행군을 중지하고 공격하며, 각을 불어 그 군사에게 보고하고, 모든 군사는 각으로 주장에게 보고한다. 후퇴하여 패해 달아나는 자는 참한다.

1. 소·말·닭·개 등을 죽이지 말고, 집을 불태우지 말 것.

1. 공격하는 법은 정의로서 불의를 무찌르는 것이니, 그 마음을 다스려서 만전을 기하는 것이 정의이다. 만약 늙은이·어린이를 잡아서 죽이고, 당인(唐人)을 죽여 군공(軍功)을 낚고자 하여 조령(條令)을 범하는 자는 모두 군법에 의하여 시행한다.

1. 강을 건널 때에는 모름지기 다섯씩 열씩 짝을 지어 차례대로 배에 오르고, 먼저 타려고 다투어 차례를 잃지 말 것이다. 어기는 자는 총소패(摠小牌)와 함께 논죄한다.

1. 영(營)에 머무르고 있는 사객(使客)과 제장(諸將)을 접대할 때에는, 서울에서 온 군관(軍官)들은 칼을 차고 좌우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어기는 자는 5일의 요(料)를 정지한다. 행진(行陣)하면 기·징[鉦]·북·둑(纛) 등을 영(令)에 따라 받들어 가지고 간다.

1. 진무(鎭撫) 한 사람과 서울에서 온 군관 네 사람은 날마다 윤번(輪番)으로 영문(營門)을 파직(把直)한다. 길가는 사람을 제외하고 각군(各軍) 절제사 및 영군차사원(領軍差使員) 등은 반인(伴人) 한 사람만 거느리고 들어온다.

1. 주장이 내린 영은 진무소에서 전달하고, 일체 행동에 대하여 제군(諸軍)은 진무소에서 영을 듣는다.

1. 각 패(牌)의 사후(伺候) 한 사람은 떠나지 아니하고 영을 듣는다.

1. 만약 사망한 사람과 말이 있으면, 말은 뼈를 거두어 묻어 두고, 사람은 싣고 온다."

하였다. 영을 마치고 제장들과 함께 언약하기를,

"오는 19일에 모두 소굴에 들어가서 죄를 묻는다. 만일 비바람이 심하여 날씨가 어두우면 20일도 가하다."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서로 절하고 이별하였다. 윤덕 소탄(所灘) 아래 시번동구(時番洞口)로부터 강을 건너 주둔하니, 강가에 네 마리 들노루가 스스로 영(營)으로 들어오므로 군사들이 잡았다. 윤덕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무왕(武王) 주(紂)를 치려고 하수(河水)를 지날 적에 흰 고기가 왕의 배에 들어오니, 사람이 말하기를, ‘흰 것은 상(商)나라의 빛깔인데 이제 왕의 배에 들어오니, 이는 상나라 사람이 주(周)나라로 돌아올 징조라. ’고 하였다는데, 지금 노루는 곧 들짐승으로서 스스로 와서 잡혔으니, 실로 야인이 죽음을 당할 조짐이다."

하고, 어허강(魚虛江) 가에 이르러 군사 6백 명을 머물러서 목책을 설치하고, 19일 날샐 무렵에 임합라(林哈剌)의 채리(寨里)에 이르러 그대로 영(營)을 머물렀다. 적의 마을과 심타납노(沈吒納奴)의 채리가 모두 무너져서 사람이 없고, 다만 강가에 적 세 사람이 먼저 나타나고, 혹 7, 8명씩, 혹 10여 명씩 서로 모양을 나타내어 활을 쏘므로, 윤덕이 통사 마변자(馬邊者)·마연대(馬淵大) 등으로 하여금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우리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은 너희들 때문이 아니고 다만 홀라온 때문에 온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 채리는 공격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니, 적들이 말에 내려 손을 모아 절을 하였다. 이날 싸울 때에 우리 군사의 상공에 명주 한 필 길이와 같은 흰 기운이 있었다. 20일에 홍사석의 군마가 도착하여 윤덕과 합동작전하였다. 사석의 군사가 31명을 생포하니, 적이 뒤에서 도전하여 도망해 나가게 하려고 하므로, 드디어 26명을 베고 5명만 남겼다. 타납노(吒納奴) 채리의 동쪽 산으로부터 합라(哈剌) 등 채리에 이르기까지 산위에는 좌군(左軍)이, 냇가에는 우군(右軍)이, 중앙에는 중군(中軍)이 종일토록 탐색(探索)하고 석문(石門)으로 물러나와 영(營)을 베풀고, 인하여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고, 지자산군사(知慈山郡事) 조복명(趙復明)과 지재령군사(知載寧郡事) 김잉(金仍)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 4백 명을 거느리게 하되 포로들로써 먼저 와서 길을 닦게 하였다. 이때 들에 풀이 모두 불타서 말이 여위고 또 큰 비가 내리니, 윤덕이 근심하여 하늘을 우러러 손을 모아 고하기를,

"아아, 이 야인은 우리의 변경을 침노하여 여러 해 동안 흉하고 악한 짓을 많이 하였으며, 연전에 홀라온을 불러들여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을 죽이고 가옥을 소탕하였으므로, 내가 왕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죄를 묻고자 하는데, 지금 하늘이 저 죄 있는 자를 용서하고 무고한 우리를 괴롭히니, 아아, 하늘이여, 나의 죄가 무엇인가."

하고, 고하기를 마치고 우니, 잠시 후에 비가 그쳤다. 홍사석·최숙손(崔淑孫)·마변자(馬邊者)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각 마을을 수색하고, 타납노(吒納奴)의 채리에 이르러도 사람이 없으므로, 초유 방문(招諭榜文)만 걸어 두고 왔다. 김효성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윤덕 이순몽 헌괵(獻馘)087) 치 아니하고, 또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간것과, 최해산의 군사가 모이는 기한에 미치지 못한 것과, 이징석도 영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간 일들을 탄핵하였다. 선위사(宣慰使) 박신생(朴信生)이 이르니 술을 하사하고, 인하여 상교(上敎)를 선유(宣諭)하기를,

"오늘의 일은 실로 천지와 조종의 덕을 힘입어 여기에 이른 것이니, 내가 감당할 공적이 아니다. 군사가 돌아온 후에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니 연강(沿江) 등지에 더욱 군사를 정비하여 수어하라."

하였는데, 이순몽·이징석·최해산 등은 참여하지 못했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11일 계해 3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안숭선에게 명하여 야인들의 마소와 재산, 최해산의 논공 문제 등을 의논하다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우의정 권진 등에게 의논하기를,

"야인들의 마소와 재산을 여연에서 도둑을 맞아 파산한 인민에게 나누어 주고, 그 말의 큰 것은 종마(種馬)로 삼는 것이 어떤가."

하니, 황희 등이,

"상교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최해산이 강을 건너는 시일을 도절제사가 정한 대로 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강을 건넜으며, 또 행군을 지체하여 이로 인해 야인들이 도망해 버렸으며, 천여 명이 무리로서 얻은 것이 다른 장수에 비하여 가장 적으니, 마땅히 군기(軍機)를 어기고 그르친 죄로 논할 것이나, 사(赦)를 내리기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추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장수와 같이 논공할 수는 없을 듯하니, 어떻게 처리할까."

하니, 권진은,

"이번 길에 군사가 안전히 돌아왔고, 주장의 베고 잡은 수도 많으니 또한 논상(論賞)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황희는,

"만약 사유(赦宥)가 아니라면 마땅히 군기(軍機)에 미치지 못한 죄를 더 주어야 할 것인데, 이제 비록 사유로 인하여 죄를 면하였다 할지라도 상줄 필요는 없고, 다만 그 관하의 적을 벤 사람에게만 상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예전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하고 도통사(都統使) 유정현(柳廷顯)이 돌아올 적에, 대언 유영(柳穎)에게 명하여 가서 맞이하게 하였고, 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가 돌아올 적에는 내가 상왕(上王)을 모시고 낙천정(樂天亭)에 나아가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오래되어 기억하기 어려우나, 생각건대 종무 대마도에 친히 간 것이 정현의 예(例)보다 중하기 때문인듯하다. 지금 파저강을 정벌한 것이 대마도에 비하여 그 공이 갑절이나 된다. 최윤덕·이순몽·이징석·최해산 등이 돌아오는 날에 어떻게 맞이할까. 내 생각으로는 윤덕은 친히 모화관에 나가서 맞이하고, 이순몽 이하는 대군(大君)이나 대신으로 하여금 가서 맞이하게 하려고 하는데 어떤가. 만약 너무 중하다면, 윤덕은 대군과 지신사로 하여금 가서 맞이하게 하고, 순몽 이하는 대군이나 대신으로 하여금 맞이하게 하는 것이 어떤가. 옛날의 예를 상고하니, 당(唐)나라 이성(李晟) 주자(朱泚)를 토벌하고 서울을 수복하자, 덕종(德宗) 이성을 사도(司徒)에 임명하고 영녕리(永寧里)의 집과 경양(涇陽)의 좋은 토지와 영평문(迎平門)의 임원(林園)과 여악(女樂) 8명을 하사하고, 이성이 하사한 집에 들어오자, 황제가 특히 잔치를 베풀고 여악과 비단과 은기(銀器)를 하사했고, 또 태상 교방(太常敎坊)으로 하여금 악을 갖추고, 경조(京兆)로 하여금 안주를 공급하게 하며, 풍악을 올리면서 그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였다. 후주(後周) 장종(莊宗)  진주(鎭州)를 평정한 장수가 돌아올 적에 성문에 나가서 맞이해 위로하고, 집에 나아가서 잔치와 풍악을 베풀었다. 옛날 제왕들이 장수를 대접하는 데 이같이 영광스럽게 하였으니, 지금은 어떻게 할까."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상왕께서 종무 낙천정에서 맞이해 위로한 것은 우연히 낙천정에 행차하셨다가 마침 종무가 도착한 것이고, 정현과 다르게 대접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세상 일은 시대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저 당(唐)·주(周)의 임금이 장수를 우대한 것은 그 때에는 이같이 하지 아니하면 그 마음을 결합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수복(收復)한 것과 같은 공이 아니고, 또 큰 전쟁도 아니며, 다만 작은 도둑을 친 것뿐이니 나가서 맞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윤덕은 지신사로 하여금 맞아서 위로하고, 이순몽 이하는 집현전 관원으로 하여금 맞아서 위로하여도 일시의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최윤덕·이순몽·최해산·이징석 등이 서울에 들어온 뒤에 맞이해 위로하는 날에는 여름옷 한 벌을 하사하여, 입고 잔치에 나오게 함이 어떤가."

하니,  등이 이르기를,

"상교가 옳습니다."

하매, 임금이 모두 황희 등의 논의에 따랐다. 가 또 아뢰기를,

"옛날 경인년에 동북면(東北面)에서 포로한 올량합(兀良哈)을 오래지 아니하여 돌려보냈고, 또 기해년 대마도에서 사로잡은 사람을 본토로 돌려보냈으니, 이제 파저강 사람이 이를 듣고 받드시 돌려보내리라고 바랄 것인데, 만약 파저강 사람이 중국에 주청(奏請)하여, 황제가 돌려보내라는 조서를 내리면, 은혜가 중국에서 나왔기 때문에 저 파저강 사람들도 우리 나라를 고맙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이제 나이가 늙은 포로 한두 사람을 보내어, 토벌한 이유와 만약 성심으로 귀순하면 그 처자를 돌려보내고 처음과 같이 대접할 것을 효유하여, 그들의 뜻을 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한 바가 옳다."

하고, 사목(事目)을 적어서 강계 절제사에게 보내서, 늙은 포로 한두 사람을 골라서 사목을 잘 설명해 보내어 동류들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그 사목은,

"1. 너희들이 우리 나라 가까운 경계에 뭉쳐 살면서 매양 은혜와 구휼을 받아 생활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은덕을 감사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너희들이 중국 사람을 노략하여 종으로 삼았으며, 종이 되었던 자들이 본국으로 도망해 온 것을 본국에서 중국으로 돌려보냈는데, 이것은 너희들에게 혐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국을 섬기는 떳떳한 예절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아니하고 원한만을 품고, 홀라온을 유인해서 우리의 변경 마을을 침범하여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으며, 또 재산과 마소를 약탈하고, 심지어 품속에 있는 어린아이를 눈 위에 버려 두었으니, 그 악함이 너무나 심하다. 또 우리 나라 사절과 장 천사(張天使)가 갔을 적에, 홀라온의 소위라고 칭탁하여 중국을 속이고 또 본국을 속여 죄악이 가득 차 있으므로, 장수를 보내서 죄를 묻게 한 것이니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만약 너희들이 죄를 뉘우치고 귀순하면 죄를 용서할 것이나, 악한 짓을 계속하여 고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이는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니 어찌 남을 원망하랴.

1. 이제부터 성심으로 귀순하여 감히 다른 뜻을 품지 않으면, 본국에서 포로한 너희 처자(妻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또 전과 같이 후하게 구휼할 것이나, 만약 너희들이 후회하지 아니하고 강경하게 순종하지 아니한다면, 본국에서 어찌 강제로 너희들을 귀순시키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내수(內竪)를 보내어 허조·안순·하경복 등에게 묻기를,

"최해산은 군기(軍機)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다른 사람과 같이 논상(論賞)할 것인가."

하니, 허조 등이 아뢰기를,

"만약 사(赦)를 만나지 않았으면 당연히 처벌해야 할 것이온데, 이미 죄를 논하지 아니하고, 또 상을 주는 것은 적당치 못합니다. 다만 관직을 삭탈하여 뒷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알았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14일 병인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병조에서 최해산의 고신을 거둘 것을 아뢰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금번 파저강을 토벌할 때에 좌군 절제사 최해산이 군기(軍機)를 그쳐서 성공치 못하였는데, 그 범한 바가 사하기 전이므로 죄를 가할 수는 없으나, 청하건대 고신(告身)을 거두옵소서."

하니, 벼슬만 파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15일 정묘 3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사헌부 장령 조수량이 최해산의 죄를 드러내 후인을 경계할 것을 아뢰다

사헌부 장령 조수량(趙遂良)이 아뢰기를,

"이제 최해산을 파직만 시켰는데, 해산의 범한 죄가 비록 사(赦)하기 전에 있었다 할지라도 일이 군기(軍機)에 관한 것이므로 아주 사면시킴은 부당하니, 청하건대 그 죄를 드러내 후인을 징계하소서. 또 수종한 군졸들을 징계하지 아니함은 불가하니 아울러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말은 지당하나, 해산의 죄를 어찌 사례(赦例)에 넣지 않을손가. 그만두고 논하지 말라."

하였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15일 정묘 4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최해산의 직첩을 거두고 영구히 서용하지 말 것에 대한 사헌부의 상소문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군사의 일은 엄한 것을 중하게 여기고 범하면 반드시 베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자에 파저강 등지의 야인이 그 흉악한 성질을 드러내어 우리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인민을 죽이고 약탈하매, 전하께서 장수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들어가 치게 하였는데, 좌군 절제사 최해산은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쳐 토벌할 부락이 죽음을 벗어났습니다. 병조에서 죄상을 갖추어 폄출하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사(赦)하는 범주에 넣어 파직하는 데 그쳤으니,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일이 국경 밖에 있었으므로 사(赦)에 구애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죄를 드러내어 후일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꼭 사령에 의하여 차마 법에 처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오시면, 원컨대 병조에서 아뢴 대로 직첩을 거두고 영구히 서용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산은 20여 년 동안 오로지 화포(火砲)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느냐. 그 벼슬만 파면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장령 조수량이 아뢰기를,

"해산이 그 공으로서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니 더욱 부지런히 일하여 성상의 덕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이를 돌보지 아니하고 머뭇거리며 전진하지 아니하며 군기(軍機)를 그르쳤으니, 그 죄는 작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다시 생각해 보았으나 해산의 죄는 사례(赦例)에 들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 63권, 세종 16년 3월 1일 무인 5번째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최윤덕이 건의한 평안 부윤과 군기감의 관리를 임용하는 문제·평도전의 석방 문제 등을 논의하다

우의정 최윤덕이 아뢰기를,

"평안도 감사가 항상 평양에 있어, 평양만이 홀로 부성을 누리고, 다른 고을들은 날로 조폐(凋弊)만 더해 가고 있사오니, 따로 평양 부윤(平壤府尹)을 임명해 보내고 감사의 겸임을 해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의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이를 같이 논의하여 계달하게 하였다. 최윤덕이 또 아뢰기를,

"군기감(軍器監)은 화포에 관한 일을 전장(專掌)하고 있사온데, 최해산(崔海山)이 죄를 얻어 한직에 있으매, 변상근(邊尙覲) 한 사람만이 홀로 관장하기가 어려운 것이오니 감장 관리(監掌官吏)로 임명하심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도전(平道全) 양덕(陽德)에 몸을 붙이고 있사온데 곤궁 막심하오니, 청하건대, 그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니, 안숭선이 아뢰기를,

"평도전 대마도 왜인입니다. 성상의 은혜를 후히 입고 벼슬이 3품에 이르렀으니, 의당 힘을 다하여 보답의 길을 도모해야 할 것이온데, 지난 기해년에 그 아들 망고(望古)가 나라를 배반하였고, 도전 황해도에서 왜적을 잡을 때에 힘써 싸우려 하지 않고 적도와 서로 호응하여, 그 죄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는데, 우리 태종께서 다만 외방으로 추방하셨던 것이니, 그 머리를 얻어 보전한 것만으로도 또한 다행한 일입니다. 어찌 석방하여 용서 받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 7일 신해 1번째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민심언·박곤·정분·신인손·이견기·조수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심언(閔審言)을 동지돈녕부사 전라도 도관찰사로 삼고, 박곤(朴坤)을 한성부 윤, 정분(鄭苯)을 좌승지, 신인손(辛引孫)을 우승지, 이견기(李堅基)를 동부승지, 조수량(趙遂良)을 사헌부 집의(執義), 조항(曹沆)을 전농시 윤, 김영(金寧)을 사헌부 장령, 이축(李蓄)을 전농 소윤, 조비형(曺備衡)을 경상도 도절제사, 조종생을 전주 부윤, 고약해(高若海)를 판황주목사, 최해산을 제주 안무사로 각각 삼았다. 해산은 전에 파저강 정벌에서 군기를 그르쳐서 파직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제주 안무사가 되니, 제주는 바다를 건너는 떨어진 지역이므로, 사람들이 가기를 원치 하니하였다. 항(沆) 축(蓄) 안숭선의 인아(姻婭)인데, 여러 번 숭선의 추천을 힘입어 여기에 이른 것이다. 도승지의 임무는 명령의 출납을 모두 맡고, 겸하여 전선(銓選)을 맡았으므로, 일시의 권총(權寵)이 더할 수 없었다. 좌승지 이하가 그 세력에 휩쓸려서 부주(敷奏)와 복역(覆逆)을 모두 의논해 물은 뒤에 출납하고 시행하였다. 숭선은 사람됨이 모질고 팩하며 급하고 빨라서, 쉽세 노하고 쉽게 기뻐하여, 동료들이 혹 그 뜻을 어기면 문득 욕하므로, 동료들이 모두 원망하고 미워하였다. 제수할 때를 당하여 겸 이조 판서 좌의정 맹사성은 착하고 부드러워서 결단성이 없고, 판서 신개는 따라서

"예예"

하기만 하므로, 대개 전선(銓選)이 모두 그 〈안숭선〉 손에서 나왔다. 인아(姻婭)들과 평시에 좋아하는 사람 및 자제들을 그가 추천하는 데 맡겼다.

 

 

 

세종실록 69권, 세종 17년 9월 21일 기축 5번째기사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제주 안무사 최해산이 한 꼭지에 6개가 달린 석류를 올리다

제주 안무사(濟州安撫使) 최해산(崔海山)이 한 꼭지에 6개가 달린 석류를 올렸다. 그 올리는 글에,

"가화(嘉禾)의 상서만이 어찌 홀로 칭찬을 독차지하겠습니까. 신은 마음속으로 가만히 생각하기를, 성상께서 사람의 생명을 구활(救活)하여 자애와 은혜가 널리 흡족하니, 하늘과 땅이 감응해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상림원(上林園)에 내리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6일 경진 2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제주 안무사 최해산이 원숭이와 노루 한 쌍을 바치다

제주 안무사(濟州安撫使) 최해산(崔海山)이 원숭이[獿子]와 노루[獐] 한 쌍을 바치니, 명하여 상림원(上林園)에서 기르다가, 그 뒤에 인천(仁川) 용류도(龍流島)로 옮겨 놓아주었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2월 3일 갑자 1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최사강·하연·황보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사강(崔士康)을 의정부 참찬으로, 하연(河演)을 예조 판서로, 황보인(皇甫仁)을 병조 판서로, 김효성(金孝誠)을 병조 참판으로, 강주(姜籌)를 공조 참판으로 황자후(黃自厚) 허성(許誠)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최해산(崔海山)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박연(朴堧)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김교(金敎)를 좌부승지로, 권채(權採)를 우부승지로, 이계린(李季疄)을 동부승지로, 이예손(李禮孫)을 우정언으로, 이징옥을 판경원도호부사(判慶源都護府事)로, 박호문(朴好問)을 판회령도호부사(判會寧都護府事)로 삼았다. 황보인이 병조 참판으로 변사(邊事)에 참모(參謀)하였는데, 만약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황보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에게 변사를 위임했으니, 경은 마땅히 유의하여 자세히 계획하라."

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승진시켜 병조 판서로 삼았다.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6월 27일 기묘 1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김효성·최해산 등 절도사를 인견하고 궁시를 내리다

경원 절제사(慶源節制使) 김효성(金孝誠)·강계 절제사(江界節制使) 최해산(崔海山) 등이 사조(辭朝)하니, 이를 인견하고 모두 궁시(弓矢)를 내려 주고는 효성에게 이르기를,

"경은 노모(老母)가 집에 있으니, 의리상으로는 비록 왕사(王事)가 견고하지 않을 것을 걱정해야 되겠지만, 마음속에는 조석으로 문안하고 살피던 일이 잊히지 않을 것이니, 내 이를 몹시 민망히 여기노라. 경의 모친이 혹시 질병이 있게 되면, 내 곧 역마를 달리게 하여 통고할 것이니, 경이 경원에 있으면서 변경의 긴장 상태가 지식(止息)되지 않는 한 올라와서는 안 되고, 무사할 때는 매년 모친을 와서 뵈어도 좋으니, 경은 내 이 뜻을 몸받아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1월 22일 신축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사헌부에서 판강계부사 최해산이 고의로 죄책을 범하여 위험을 피하고자한 데 대한 죄주기를 청하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판강계부사 최해산(崔海山)이 사첩(私妾)과 비복(婢僕)을 데리고 부임하여 국가의 창고를 허비하고, 또 마음대로 평양부의 기생 초궁장(楚宮粧)을 데리고 가서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평양부에서 사람을 보내어 돌려보낼 것을 독촉하니, 또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인(使人)을 결박하고 형장을 때렸으므로, 관찰사가 추국(推鞫)하니 그래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망녕되게 그전 전례를 이끌어다 분한 것을 이기지 못하면서 말하기를, ‘강계부의 묵은 쌀과 쓴 장[苦醬]에 하루도 지나기 어려우니 죄과(罪過)를 조정에서 듣고 교대되기를 날마다 바라오.’ 하였다 하오니, 그 고의로 죄책을 범하여 위험한 것을 피하고자 하여, 특히 대신의 봉직한다는 뜻이 없사오니 법에 의하여 죄주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고신을 빼앗아 들이고, 여연(閭延)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17일 계사 1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최해산을 석방하다

최해산(崔海山)을 석방해 보내었다.

 

 

 

 

세종실록 88권, 세종 22년 1월 30일 계유 3번째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제주 안무사에게 병진년에 최해산이 보고한 용의 승천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라고 전지하다

제주 안무사(濟州安撫使)에게 전지하기를,

"병진년에 최해산(崔海山)이 도안무사(都安撫使)가 되었을 때, 치보(馳報)하기를, ‘정의현(旌義縣)에서 다섯 마리의 용(龍)이 한꺼번에 승천(昇天)하였는데, 한 마리의 용이 도로 수풀 사이에 떨어져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뒤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였는데, 용의 크고 작음과 모양과 빛깔과 다섯 마리 용의 형체를 분명히 살펴보았는가. 또 그 용의 전체를 보았는가, 그 머리나 꼬리를 보았는가, 다만 그 허리만을 보았는가. 용이 승천할 때에 운기(雲氣)와 천둥과 번개가 있었는가. 용이 처음에 뛰쳐나온 곳이 물속인가, 수풀 사이인가, 들판인가. 하늘로 올라간 곳이 인가(人家)에서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는가. 구경하던 사람이 있던 곳과는 거리가 또 몇 리나 되는가. 용 한 마리가 빙빙 돈 것이 오래 되는가, 잠시간인가. 같은 시간에 바라다본 사람의 성명과, 용이 이처럼 하늘로 올라간 적이 그 전후에 또 있었는가와, 그 시간과 장소를 그 때에 본 사람에게 방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제주 안무사가 아뢰기를,

"고로(古老)에게 방문하니, 지나간 병진년 8월에 다섯 용이 바닷 속에서 솟아 올라와 네 용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운무(雲霧)가 자우룩하여 그 머리는 보지 못하였고, 한 용은 해변에 떨어져 금물두(今勿頭)에서 농목악(弄木岳)까지 뭍으로 갔는데, 풍우(風雨)가 거세게 일더니 역시 하늘로 올라갔다 하옵고, 이것 외에는 전후에 용의 형체를 본 것이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2월 28일 을미 2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최해산의 고신을 돌려주다

최해산(崔海山)의 고신(告身)을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7월 15일 기유 2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판사 민공을 안동 부사로 제수하다

군기감 제조(軍器監提調)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조혜(趙惠) 등이 아뢰기를,

"지금 판사(判事) 민공(閔恭)을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제수하였사온데, 공(恭)은 오랫동안 본감(本監)에 임명되어 여러가지 일을 갖추 자세하게 알며, 또 이제 갑주(甲胄) 등의 물건을 검열하므로 사무가 한창 바쁘오니, 청하옵건대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외방(外方)에 보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최해산(崔海山) 변상근(邊尙覲)의 예(例)에 비할 것이 못되고, 하물며 이미 외임(外任)을 제수하였으니 가볍게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3월 30일 계묘 1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화포 제도를 새롭게 할 것을 의정부에 전지하고 대호군 박강을 군기감 정으로 삼다

의정부에 전지하기를,

"태종께서 자주 문밖에 거둥하시어 화포 쏘는 것을 구경하시매, 이숙번(李叔蕃)·최해산(崔海山) 등이 그 일을 맡아 보는데, 마음쓰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아니나, 지자화포(地字火砲)·현자화포(玄字火砲)는 화약만 많이 들고 화살은 5백 보를 넘지 못하고, 한번에 화살 여러 개 쏘는 기술을 힘껏 연구하여도 끝내 성공하지 못한지라, 태종께서 일찍이 낙천정에 거둥하시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화포는 군국(軍國)의 중한 일이다. 유은지(柳殷之)가 총명하고 슬기로와서 기술의 소질이 있으니, 제조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시었다. 은지가 제조가 되어서 태종께 아뢰기를, ‘신이 화포 쏘는 것을 보오니, 현자화포는 힘이 센 사람이라야 쏠 수가 있삽고, 힘이 적은 자는 두세 방(放)을 넘지 못하여 어깨와 팔이 아파서 쓰지를 못합니다.’ 하기에, 나도 아뢰기를, ‘조금 그 제도를 작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은지도 내 말을 옳게 여기므로,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시험삼아 해 보라.’ 하시고, 만든 뒤에 태종께서 친히 납시어 보신즉 화살이 지자화포·현자화포보다 백여 보나 미치지 못한지라,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힘이 약해서 쏠 수가 없다.’ 하시고, 깨뜨려버리게 하시었다. 뒤에 중국 화포를 얻어서 보니 그 제도가 현자포보다 작고 부리[觜]가 긴데, 군기감으로 하여금 그 제도대로 만들게 하여 지자화포·현자화포에 비하매, 화약은 적게 들고 화살은 멀리 가니, 이른바 황자포(黃字砲)가 이것이다. 임자년에 처음으로 쌍전화포(雙箭火砲)를 만드니 화살이 2백 보까지 가는데, 정부와 육조가 모여서 구경하고 말하기를, ‘좋다.’ 하였고, 파저강 토벌 때에 크게 이익을 보았다. 뒤에 또 사전화포(四箭火砲)를 만들었다가 화살 나가는 힘이 약하여서 즉시 헐어버렸고, 또 가자화포(架子火砲)를 만들었더니 변장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단히 좋다.’ 하였고, 또 세화포(細火砲)도 만들었다. 작년 가을에 다시 화포의 제도를 의논하고, 군기감을 시켜서 여러 화포들을 시험하여 보니, 황자포는 화살이 4,5백 보에 미치고, 지자·현자포는 화약을 많이 써도 그만 못하고, 가자포는 혹은 2,3백 보에 미치나, 2백 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고, 세화포는 모두 2백 보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순몽이 말하기를, ‘지자·현자포는 무겁고 화약이 많이 들어서 도리어 황자포에 따르지 못하니, 마땅히 다 깨뜨려 버리자.’ 하매, 이천(李蕆)이 말하기를, ‘현자화포는 수가 많아서 경내에 퍼져 있는 것이 1만 가량이나 되니, 이제부터는 더 만들지 말면 그만이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깨뜨려 버리는 것은 불가하다.’ 하고, 순몽이 말하기를, ‘세화포는 한 사람이 가히 3,40개를 가질 수 있고, 비록 부인들이라도 쏠 수가 있어서, 그 이익됨이 가장 크다.’ 하매, 이천이 말하기를, ‘편전(片箭)은 비록 약한 활이라도 가히 3백 보를 갈 수 있으되, 세화포는 2백 보도 가지 못하니, 무슨 이익됨이 있는가. 마땅히 깨뜨려 버려야 한다.’ 하기에, 내 말하기를, ‘지자·현자화포는 화약은 많이 들어도 마땅히 황자화포보다 멀리 가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화살의 가볍고 무거움이 적당하지 못한 까닭이니, 마땅히 다시 연구하게 할 것이고, 가자화포와 세화포는 2백 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아서 이것이 유감이니, 역시 마땅히 화살 제도를 고쳐 정하여 시험해 보게 하라.’ 하였는데, 군기감에서 여러 달을 두고 연구하여도 마침내 기술을 얻지 못하였고, 순몽이 말하기를, ‘양편 군사가 마주 싸울 때 사이가 백 보 더되지 아니하면 지금 말한 그런 화포들이 비록 2백 보 이상 가지 않더라도 그 이익됨이 클 것입니다.’ 하기에, 내 말하기를, ‘말탄 군사가 활을 잡고 화살을 띠고서 달리면서 내리 쏘기를 비퍼붓 듯 하여, 활과 살의 이용 가치가 극치에 달하는 것인데, 화전(火箭)은 한 사람이 가지는 것이 열 개에 지나지 못하며, 한 번 쏘면 맞붙어 싸울 때는 다시 쓸 수가 없으니, 만일 다시 쓰려면 먼저 화약을 재이고 다음에 방아쇠를 걸고, 그 다음에 받침목을 넣고 마지막으로 화살을 꽂아야 쏠 수가 있게 되어서 그 쓰기가 이렇게 어렵지마는, 그러나, 화살의 힘이 맹렬하여서 만일 여러 군사들 속으로 쏘면 화살 하나가 3,4인을 죽일 수 있으므로 적군이 무서워하니, 공격하는 싸움에 유리하기는 천하에 화포와 같은 것이 없다.’ 이제 이르기를, ‘마주 싸울 때 백여 보 더 되지 아니하면 세화포가 비록 화살이 약하더라도 쓸 수 있다. ’고 하나, 그렇다면 편전으로도 족할 것인데 어찌 꼭 화포를 쓸 필요가 있는가. 내가 즉시 군기감에 명하여 대장간을 행궁(行宮) 옆에다 설치하고 화포를 다시 만들어서 멀리 쏘는 기술을 연구하게 하였더니, 전의 천자화포(天字火砲)는 4,5백 보를 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만든 것은 화약이 극히 적게 들고도 화살은 1천 3백여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1천 보까지 가며, 전의 지자화포는 5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9백 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6,7백 보를 가며, 전의 황자화포는 5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백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5백 보에 이르며, 전의 가자화포는 2,3백 보도 못갔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6백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4백 보를 가며, 전의 세화포는 2백 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5백 보에 미치게 되었으며, 전의 여러 화포들은 화살이 빗나가서 수십 보 안에서 떨어지는 것이 태반이었는데, 이번 것들은 화살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다. 이번 것들이 비록 이러하지마는, 더욱 정밀함을 구하느라고 지금은 아직 제도를 정하지 못하였다. 내 이제 왕위에 있은지 28년 동안에 화포에 관심을 두고 자주자주 강론하고 연구하여 제도를 많이 고쳤더니, 여러 신하들이 볼 때마다 잘된 양으로 칭찬한다. 오늘날의 만듦새로 보면 전의 화포들은 모두 못쓸 것이 되니 곧 깨뜨려 버림이 마땅하다. 전에는 이러한 새 제도를 모르고서 그때 만든 것을 완전히 잘된 것으로 여겼었으나, 이제는 그 우스운 일임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뒷날에 오늘 것을 볼 때 오늘날에 전날 것을 보는 것과 같게 될까 싶기도 하다. 최해산(崔海山)은 그 아비가 국가에 공이 있고, 또 그 사람 됨이 부지런하여 태만하지 않으므로 태종께서 이 일을 맡기시었고, 그 아들 최공손(崔功孫)도 조부(祖父)로 인한 음직(蔭職)으로 역시 이 일을 맡고 있으나, 내 들은즉 그 사람은 여느 사람들과 별다름이 없다 하고, 요사이 제조(提調)들이 모두 늙어 근력이 쇠잔하여서 필시 부지런히 힘써 일을 처리할 수 없을 것이므로, 정3품이나 종3품 중에서 나이 40세 미만인 자로 한 사람을 구해서 당상관을 삼아 군기감 제조(軍器監提調)로 임명하여 외직으로 내보내지 말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자리에 종신(終身)할 것을 알게 하면, 군기감 일을 계획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크게 유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러한 인재를 얻으면 좋을 것이고, 만약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공연히 벼슬자리만 가볍게 사용함이 될 뿐일 것이다. 공손은 그 조부의 업(業)을 이어서 마음 쓰는 것이 필시 남보다 나을 것이니, 역시 약간 그 벼슬을 올려서 자기로서 여기에 종신할 것을 알게 하면, 반드시 유익함이 될 것이다. 이제 제조가 될 만한 사람을 구하되 얻지 못하였으니, 경들이 문관이나 무관 중에서 네댓 사람을 골라서 아뢰라."

하매, 정부(政府)에서 대호군(大護軍) 박강(朴薑)을 천거하니, 드디어 으로 군기감 정(軍器監正)을 시키고, 특별히 통훈 대부(通訓大夫)로 한 계급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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