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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에 활약했던 장군이자 조선의 개국공신.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심복 중 심복이었으며 개국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은 전쟁영웅이다.

'이지란'은 조선 귀화 이후 개명한 이름이고, 여진족 시절의 성은 퉁(佟), 이름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로서 보통 '퉁두란'으로 불렸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태조의 의형제가 된 후 성씨를 사성받아 이씨 성을 붙여서 '이두란'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지란과 이두란이라는 이름이 섞여서 기록되어 있고, <용비어천가>에는 "고론투란터물"이라 표기되어 있다. 청해 이씨의 시조다. 청해 이씨 족보에 따르면 남송의 명장 악비(1103 ~ 1142)가 간신 진회의 참소로 죽게 되자 악비의 5남 악정(岳霆)이 화를 피해 북쪽으로 올라가 여진족 행세를 하게 되었으며 이지란은 악비의 7대손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중 수교 이후 청해 이씨 문중은 중국에 있는 악왕 묘에 참배하러 가는 등 정기적으로 중국 쪽 악씨 문중과 교류 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한 국가의 지배층이 적국에 귀화하는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옛날 사람들은 온갖 가문을 주장하고 다닌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신뢰성은 알 수 없다.

원래 북청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진족 족장이자 몽골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千戶)가 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휘하의 1백 호를 거느리고 고려 조정에 귀순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갔다.
1380년(우왕(禑王) 6년)에 의형 이성계를 따라 왜구 토벌에 나서 지리산 근교의 운봉(雲峯)에서 왜적장인 아지발도를 제거해 전승을 올렸다.
공민왕과 우왕의 시기에, 이지란은 이성계와 의형제가 되었는데, 이들의 의형제가 되는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즉, 몽골식 의형제인 '안다(Анда)' 관계라는 설도 있고 단순 나이를 감안한 형과 아우의 맺음이었다는 말도 있으나 그들의 의형제가 된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에 대한 명확한 과정이나 전승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단순히 이지란신도비에는 형제의 의를 맺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어쟀든 이후부터 이지란은 이성계의 성인 이씨 성을 따랐다.
1383년(우왕(禑王) 9년) 7월, 요심(遼瀋)의 초적 40여 기가 단주(端州)로 쳐들어왔는데, 북청의 천호인 이지란, 단주의 만호(萬戶)인 육려(陸麗), 청주의 만호(萬戶)인 황희석(黃希碩) 등이 함께 이들에 맞서 서주위(西州衛), 해양(海陽) 등에서 우두머리 6인의 목을 베며 승리한다. 적의 침입 경로와 마지막 결전지 및 참여한 이들의 신분을 보면 당시 고려는 외부의 침략자에 의해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형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같은 해 8월, 호바투(胡拔都)가 단주로 거듭 침략해 들어왔는데, 부만호(副萬戶) 김토부카(金同不花)가 내응하는 바람에 고려군이 패했다. 당시 이두란은 어머니가 사망하여 고향 북청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성계의 부름으로 상복을 벗고 종군하였다고 한다.
1385년(우왕(禑王) 11년), 함흥(咸興) 토아동(兎兒洞)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나아가 격퇴하여 공로를 인정받아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의 칭호를 받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이후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위화도 회군 이후 상의동지밀직사사(商議同知密直司事) 회의도감사(會議都監事)가 되었고, 창왕(昌王) 때에는 지밀직사사를 맡았다.

이지란은, 이성계를 처음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이지란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이성계의 의형제가 될 것을 자처하였다. 이성계의 의형제답게 무력이 강대한 용장으로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이성계가 이지란을 가리켜 "이두란의 말 달리고 사냥하는 재주야 그만한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싸움에 임해 적군을 무찌르는 데는 이두란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평가한 대목이 있을 정도.

활 솜씨는 확실히 이성계 못지 않아서 황산대첩에서 고려군을 괴롭힌 왜구 대장 아기바투의 숨통을 끊은 것도 바로 이지란이다. 이성계가 아기바투의 투구 끈을 맞춰서 아기바투의 투구를 벗기자 곧바로 화살을 쏴서 아기바투의 얼굴에 명중시켰다고 한다. 황산대첩에서는 달려드는 왜군을 이성계가 미처 보지 못하자 이지란이 2번이나 위험하다고 부르짖은 다음 바로 활을 쏘아 거꾸려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호바투(胡拔都)와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였으며 함흥으로 처들어온 왜구를 격파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신중하고 사려가 있는 성품이었던지 이지란의 비문인 이지란 신도비에 따르면 고려 우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왔을 때 이성계가 나서서 활을 쏘아 한 발에 과녁을 맞히자 우왕이 기뻐하였으나 이지란은 "재주의 아름다움을 어찌하여 남에게 많이 보이십니까."라며 넌지시 꼬집었고 이성계가 반성하면서 이지란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인임을 비롯해 중앙 정계의 경계를 받았던 이성계인 만큼 굳이 재주를 과시해 꼬투리를 잡힐 일은 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에 동행하면서 전공을 세워 공양왕 시절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의 벼슬을 받았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1등 개국 공신에 책록되고 청해군(青海君)에 봉해졌다. 이지란은 조선 개국 후 경상절도사가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아냈고, 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고향을 돌보았다. 그의 건의로 조선에서는 적극적으로 조선인과 여진족의 결혼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에서는 조카 이방원을 도왔다.(정종 3권, 2년(1400년 경진/명 건문(建文) 2년) 1월 28일(갑오) 3번째 기사) 그래서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에 이지란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이후 이성계가 양위하고 함흥으로 갈 때 함께 함경도로 갔으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에는 살생을 많이 한 것을 참회하는 의미로 불교에 귀의하고 승려가 되어 은둔했다고 전한다. 태조의 심장에 대못을 박은 태종의 편에서 싸운 것 때문에 태조에게 매우 미안해했다고 한다.

1402년(태종 2년) 세상을 떠났는데, 시신을 여진족의 풍습에 따라 화장해서 고향인 북청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사망 후 북청부에 묻혔다. 현재도 이지란의 묘는 함경남도 북청군에 있다. 이후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55번째기사

태조가 잡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슴을 잡다

태조이두란(李豆蘭)과 더불어 사슴 한 마리를 함께 쫓는데 갑자기 쓰러진 나무가 앞에 가로막아 있고 사슴은 나무 밑으로 빠져 달아나니, 두란(豆蘭)은 말고삐를 잡아 돌아갔다. 태조는 나무 위로 뛰어넘고, 말은 나무 밑으로 빠져 나갔는데, 즉시 잡아타고 뒤쫓아 사슴을 쏘아 잡으니, 두란이 놀라 탄복하면서 말하였다.
"공(公)은 천재(天才)이므로 인력(人力)으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66번째기사

태조가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니 한산군 이색 등이 시를 지어 치하하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033) 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三道) 연해(沿海)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우왕태조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3도(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가서 왜적을 정벌하게 하고,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부장(副將)으로 하게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평리 우인열(禹仁烈)·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아 모두 태조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군대가 나가서 장단(長湍)에 이르렀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싸움을 이길 징조입니다."
하였다. 왜적상주(尙州)에 들어와서 6일 동안 주연(酒宴)을 베풀고 부고(府庫)를 불살랐다. 경산부(京山府)034) 를 지나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니, 삼도 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9원수가 패전하고,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2원수가 전사(戰死)하니, 사졸(士卒)로서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성하여 마침내 함양성(咸陽城)을 도륙(屠戮)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치고서, 장차 광주(光州)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성언(聲言)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태조가 천리(千里) 사이에 넘어진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음을 보고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편안히 잠 자고 밥 먹지 못하였다. 태조안열(安烈) 등과 함께 남원(南原)에 이르니 적군과 서로 떨어지기가 1백 20리(里)였다. 극렴(克廉) 등이 와서 길에서 태조를 뵙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하루 동안 말을 휴식시키고는 그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군이 험지(險地)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부서(部署)를 정하여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하고 동(東)으로 갔다. 운봉(雲峰)을 넘으니 적군과 떨어지기가 수십 리(里)였다. 황산(黃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서 태조가 큰길 오른쪽의 소로(小路)를 보고서 말하기를,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하면서, 마침내 자기가 빨리 갔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바라보고서는 싸우지 않고 물러갔으니, 이때 해가 벌써 기울었다. 태조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갔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과연 돌출(突出)하는지라, 태조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유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쏘았는데, 50여 개를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었으되, 시윗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무릇 세 번이나 만났는데 힘을 다하여 최후까지 싸워 이를 죽였다. 땅이 또 진창이 되어 적군과 우리 군사가 함께 빠져 서로 넘어졌으나, 뒤미처 나오자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이에 적군이 산을 의거하여 스스로 방어하므로, 태조는 사졸들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분거(分據)하고, 휘하의 이대중(李大中)·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하였다. 태조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衝突)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내려왔다.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태조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螺]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賊陣)에 부딪쳤다. 적의 장수가 창을 가지고 바로 태조의 후면(後面)으로 달려와서 심히 위급하니,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뛰게 하여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여, 두란이 드디어 적장을 쏘아 죽였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를 맞혔다. 태조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기세가 더욱 용감하여, 싸우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사들은 태조의 상처 입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군이 또 태조의 앞에 부딪치므로 태조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좌우에게 지휘하기를,
"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
하니, 장수와 군사가 감동 격려되어 용기백배로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군이 나무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 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적군의 용감한 사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
하면서, 마침내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이내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적군을 공격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나희(儺戱)를 베풀고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적군의 머리[首級]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면서 살려주기를 원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군의 진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아기발도(阿其拔都)태조의 진을 설치함이 정제(整齊)한 것을 바라보고는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아기발도가 그 섬[島]에 있으면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러 적군이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에 복종하여 굳이 청하여 왔으므로, 여러 적의 괴수들이 매양 진현(進見)할 적마다 반드시 빨리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았으며, 군중(軍中)의 호령을 모두 그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번 행군(行軍)에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써 바꾸고자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대나무가 일반 나무보다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그러나 대나무는 또한 민가(民家)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니, 그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간다면 족(足)할 것이다."
하였다. 태조는 이르는 곳마다 민간의 물건은 털끝만한 것도 범(犯)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올라(兀羅)의 전쟁에 태조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으므로 처명이 은혜에 감동하여 매양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보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종신토록 태조의 곁을 따라다니며 모시었다. 이 싸움에서 처명태조의 말 앞[馬前]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우니, 이때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조가 승전(勝戰)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채붕(綵棚)과 잡희(雜戲)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나아가서 재배(再拜)하니, 최영도 또한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謝禮)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 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우왕이 금(金) 50냥을 내려 주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臣)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 치하(致賀)하기를,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충성은 백일(白日)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은 청구(靑丘)035) 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
출목연(出牧筵)036) 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
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
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
하였다. 전 삼사 좌사(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은 이를 화답하기를,
"적의 기세 꺾기를 우레처럼 하니,
군사의 지휘가 모두 공(公)에게서 나왔네.
상서로운 안개 퍼져 나가 독한 안개를 없애고,
서리 바람 매서워서 위엄 바람 도왔도다.
섬 오랑캐 간담이 떨어지매 군용(軍容)이 성대하고,
이웃나라가 마음이 선뜩하매 사기(士氣)가 웅장하네.
온 나라 의관(衣冠)이 다투어 배하(拜賀)하니,
삼한 만세에 태평의 공이네."
라 하였다. 성균 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이 이를 화답하기를,
"3천 신하037) 마음과 덕이 모두 다 같은데,
군율(軍律)은 지금에 와서 모두 공에게 있도다.
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
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
동궁(彤弓)은 빛나서 은영(恩榮)이 무겁고,
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
한번 개선(凱旋)하매 종사(宗社)가 안정되니,
마상(馬上)에서 기공(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
하였다.

태조실록 1권, 총서 69번째기사

태조가 단주에 침입한 호발도를 격퇴하고 변방을 평안히 할 계책을 올리다

신우(辛禑) 9년(1383) 계해 8월, 호발도(胡拔都)가 또 와서 단주(端州)를 침구(侵寇)하니, 부만호(副萬戶)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외적(外敵)과 내응(內應)하여 재화(財貨)를 다 가지고 고의로 뒤에 있다가 짐짓 적에게 잡히었다. 상만호(上萬戶)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였다. 이때 이두란(李豆蘭)이 모상(母喪)으로 인하여 청주(靑州)에 있었는데, 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喪服)을 입고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
하니, 두란이 이에 상복을 벗고 절하고 울면서 하늘에 고(告)하고 활과 화살을 차고 태조를 따라갔다. 호발도(胡拔都)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났는데, 두란이 선봉(先鋒)이 되어 먼저 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후에 이르렀는데,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이나 입고 붉은 털옷[褐衣]을 껴입었으며, 흑색 암말[牝馬]을 타고 진(陣)을 가로막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태조를 깔보아, 그 군사는 남겨 두고 칼을 빼어 앞장서서 달려나오니, 태조도 또한 단기(單騎)로 칼을 빼어 달려나가서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득이면서 지나쳐 능히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려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곧 또 그의 말을 쏘아 꿰뚫으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태조가 또 그를 쏘려고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들도 또한 이르렀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발도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태조가 이로 인하여 변방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올렸는데, 그 계책은 이러하였다.
"북계(北界)039)여진(女眞)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 그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양 저들과 무역[互市]하여 날로 서로 가까워져서 혼인까지 맺게 되었으나, 그 족속(族屬)이 저쪽에 있으므로 유인해 가기도 하고, 또는 향도(嚮導)가 되어 들어와 침구(侵寇)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唇亡齒寒]게 되므로, 동북면 한 방면의 근심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또 전쟁의 이기고 이기지 못한 것은 지리(地利)의 득실에 달려 있는데, 저들 군사의 점거한 바가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도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아니하니, 이에 중한 이익을 가지고 멀리 우리의 오읍초(吾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의 백성들에게 주어서 그들을 유인해 가기도 하고, 지금 단주(端州)·독로올(禿魯兀)의 땅에 뛰어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을 노략질해 가니, 이로써 본다면 우리 요해지의 지리·형세는 저들도 진실로 이를 알고 있습니다. 신(臣)이 방면(方面)에 임무를 받고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삼가 변방의 계책을 계획하여 아뢰옵니다.
1. 외적(外敵)을 방어하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하여 일제히 적군을 공격하는 데 있는데, 지금은 교련(敎鍊)하지 않은 군사로써 먼 땅에 흩어져 있다가 도적이 이르러서야 창황(倉皇)히 불러 모으게 되므로, 군사가 이르렀을 때는 도적은 이미 노략질하고 물러가 버렸으니, 비록 뒤따라 가서 싸워도, 그들이 기[旌]와 북[鼓]을 익히지 않았으며 치고 찌르는 것도 연습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는 군사를 훈련하는 데에 있어 약속(約束)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號令)을 거듭 밝혀서, 변고를 기다려 군사를 일으켜 일의 기회[事機]를 잃지 마옵소서.
1. 군사[師旅]의 생명은 군량에 매여 있으니, 비록 백만의 군사라도 하루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하루의 군사가 되고, 한 달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한 달의 군사가 되니, 이는 하루라도 식량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도(道)040) 의 군사는 예전에는 경상도(慶尙道)·강릉도(江陵道)·교주도(交州道)의 곡식을 운반하여 공급하였으나, 지금은 도내(道內)의 지세(地稅)로써 이를 대체시켰는데, 근년에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인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고갈되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僧]과 무뢰인(無賴人)이 불사(佛事)를 핑계하고서 함부로 권세 있는 사람의 서장(書狀)을 받아서 주군(州郡)에 청탁하여, 백성들의 한 말[斗]의 쌀과 한 자[尺]의 베를 빌린다고 하고는, 섬[甔石]이나 심장(尋丈)041) 으로써 거둬들이면서 이를 반동(反同)이라 명칭하며 바치지 아니한 빚[逋債]처럼 징수하여, 백성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게 되었으며, 또 여러 아문(衙門)과 여러 원수(元帥)들의 보낸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며 기식(寄食)하여 백성의 피부를 벗기고 골수를 쳐부수니, 백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처소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십상팔구(十常八九)이니, 군량(軍糧)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원컨대, 모두 이를 금단(禁斷)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소서. 또 도내(道內)의 주군(州郡)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여서 땅이 좁고도 척박한데, 지금 그 지세(地稅)를 징수하는 것이 경지(耕地)의 많고 적은 것은 묻지도 않고 다만 호(戶)의 크고 작은 것만 보게 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道內)에서도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모두 이민(吏民)의 지록(地祿)042) 인데도, 그 지세(地稅)는 관청에서 거둘 수가 없게 되어,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균등하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이 넉넉하지 못하니, 금후(今後)로는 도내(道內)의 여러 주(州)와 화령(和寧)에 한결같이 경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세(稅)를 부과하여 관청과 민간에 편리하게 하소서.
1. 군사와 백성이 통속(統屬)되는 곳이 없으면 위급한 경우에 서로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로써 선왕(先王)의 병신년의 교지(敎旨)에, 3가(家)로써 1호(戶)로 삼아 백호(百戶)로써 통솔하고, 통주(統主)를 수영(帥營)에 예속시켜, 사변이 없으면 3가(家)가 상번(上番)하고, 사변이 있으면 다 함께 나오고, 사변이 급하면 가정(家丁)을 모두 출동시키게 하였으니, 진실로 좋은 법이었습니다. 근래에는 법이 폐지되어 통속된 곳이 없으므로, 매양 군사를 징발할 적엔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으므로 불러모으기가 어려우며, 지금 또 가물어 흉년이 들어서 민심이 더욱 이산(離散)되었는데, 저들은 금전과 곡식으로써 미끼를 삼아 불러 들이고, 군사를 몰래 거느리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니, 한 지방의 곤궁한 백성이 이미 항심(恒心)도 없는데다가, 또 모두가 잡류(雜類)이므로, 저쪽과 이쪽을 관망하다가 다만 이익만을 따르게 되니, 실로 보전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원컨대, 병신년의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통속(統屬)이 있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단단히 매[固結]게 하소서.
1. 백성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매여 있고, 군사의 용감함과 겁내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의 군현(郡縣)을 다스리는 사람은 권세있는 가문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세력만 믿고 그 직무는 근신하지 아니하여, 군대는 그 물자(物資)가 모자라게 되고, 백성은 그 직업을 잃게 되어, 호구(戶口)가 소모되고 부고(府庫)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청렴하고 근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공정하게 선출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여 홀아비와 홀어미를 사랑하고 어루만져 주게 하며, 또 능히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서 국가를 방어하게 하소서."

태조실록 1권, 총서 71번째기사

태조가 자유 자재로 활을 쏘다

신우(辛禑) 11년(1385) 을축, 태조우왕을 따라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화살 만든 장인(匠人)이 새 화살[新矢]을 바치니, 태조가 지환(紙丸)을 쌓아 놓은 벼[稻] 위에 질서 없이 꽂아 놓게 하고 이를 쏘아 모두 맞히고는, 좌우(左右)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짐승을 쏘면 마땅히 모두 등골을 맞힐 것이다."
하였다. 태조가 평상시에는 짐승을 쏘면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었는데, 이날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그 등골을 바로 맞히니, 사람들이 그 신묘한 기술을 탄복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짐승을 쏠 적에, 짐승의 왼쪽에 있으면 짐승의 오른쪽을 쏘아서, 짐승이 오른쪽으로부터 가로질러 달아나서 왼쪽으로 나오면, 짐승의 왼쪽을 쏘는데, 태조는 짐승을 쫓아서 짐승이 비록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나오더라도 즉시 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의 말을 돌려 꺾어서 채찍질하여 짐승으로 하여금 왼쪽에서 바로 달아나게 하고서, 그제야 이를 쏘는데 또한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히니, 이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온갖 짐승을 쏘되, 반드시 쏠 때마다 그 오른쪽을 맞힌다."
하였다. 우왕이 일찍이 행궁(行宮)에서 여러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는데, 과녁[的]은 황색 종이로써 정곡(正鵠)을 만들어 크기가 주발만 하게 하고, 은(銀)으로써 작은 과녁[小的]을 만들어 그 복판에 붙였는데, 직경(直徑)이 겨우 2치[寸] 정도이었다.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 태조는 이를 쏘았으나 마침내 은 과녁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우왕은 즐거이 구경하기를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하였으며, 태조에게 좋은 말 3필을 내려 주었다. 이두란(李豆蘭)태조에게 말하였다.
"세상에 드문 재주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76번째기사

명 사신이 태조와 이색의 안부를 묻다. 왜구의 침략을 태조가 격퇴하다

9월, 명(明)나라 사신 장부(張溥)·주탁(周倬) 등이 국경에 이르러서 태조이색(李穡)의 안부를 물었다. 이때 태조최영은 위명(威名)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장부 등에게 이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 밖에 나가 있었는데, 최영은 교외(郊外)에 나가 둔치고 있었다. 이때 왜적의 배 1백 50척이 함주(咸州)·홍원(洪原)·북청(北靑)·합란북(哈闌北) 등처에 침구(侵寇)하여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아 거의 다 없어졌다. 원수(元帥) 찬성사(贊成事) 심덕부(沈德符)·지밀직(知密直) 홍징(洪徵)·밀직 부사(密直副使) 안주(安柱)·청주 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대호군(大護軍) 정승가(鄭承可) 등이 왜적홍원(洪原)대문령(大門嶺) 북쪽에서 싸웠는데,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하여 먼저 도망했으나, 다만 덕부(德符)만이 적진을 꿰뚫어 혼자 들어가서 창에 맞아 떨어졌다. 적군이 다시 찌르려고 하니, 휘하의 유가랑합(劉訶郞哈)이 달려 들어가서 적군을 쏘아 연달아 세 사람을 죽이고, 적군의 말을 빼앗아 덕부에게 주고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적진에서 빠져 나왔다. 이에 덕부의 군대도 또한 크게 패하였으므로 적의 세력은 더욱 성하였다. 태조가 가서 치기를 자청하여 함주(咸州) 관아에 이르렀다. 제장들의 영중(營中)에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70보(步) 거리에 있었다. 태조가 군사를 불러 이르기를,
"내가 소나무의 몇째 가지에 몇 개째 솔방울[松子]를 쏠 것이니, 너희들은 이를 보라."
하고는, 즉시 유엽전(柳葉箭)으로 이를 쏘아, 일곱 번 쏘아 일곱 번 다 맞혀 모두 말한 바와 같으니, 군중(軍中)이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환호(歡呼)하였다. 이튿날 바로 적이 주둔한 토아동(兎兒洞)에 이르러서, 동(洞)의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 적의 무리가 먼저 동내(洞內)의 동산(東山)과 서산(西山)을 점거했는데, 멀리서 소라 소리[螺聲]를 듣고는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이성계차거(硨磲)045) 로 만든 소라 소리다."
하였다. 태조가 상호군(上護軍) 이두란·산원(散員) 고여(高呂),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조영규(趙英珪)·안종검(安宗儉)·한나해(韓那海)·김천(金天)·최경(崔景)·이현경(李玄景)·하석주(河石柱)·이유(李柔)·전세(全世)·한사우(韓思友)·이도경(李都景) 등 백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고삐를 당기면서 천천히 행군하여 그 사이를 지나가니, 적군은 우리 군사가 적고 행진이 느린 것을 보고는 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어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동쪽에 있던 적군이 서쪽에 있는 적군에게 나아가서 한 진을 만들었다. 태조가 동쪽의 적군이 둔친 곳에 올라가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군사들로 하여금 말안장을 벗겨서 말을 쉬게 하였다. 한참 있다가 말을 타려고 할 적에 백 보(步)가량 되는 곳에 마른 풀명자나무[枯槎]가 있는지라, 태조가 연달아 화살 세 개를 쏘아 모두 바로 맞히니, 적군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고 탄복하였다. 태조가 왜말[倭語] 아는 사람을 시켜 큰소리로 이르기를,
"지금의 주장(主將)은 곧 이성계(李成桂) 만호(萬戶)이니 너희들은 속히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니, 적의 추장(酋長)이 대답하기를,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고는, 그 부하와 더불어 항복하기를 의논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마땅히 그들의 게으른 틈을 타서 공격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말에 올라 두란(豆蘭)·고여(高呂)·영규(英珪) 등을 시켜 그들을 유인해 오게 하니, 선봉(先鋒) 수백 명이 쫓아오는지라, 태조는 거짓으로 쫓기는 체하면서 스스로 맨 뒤에 서서 물러가 복병(伏兵) 속으로 들어갔다가, 드디어 군사를 돌이켜서 친히 적군 20여 명을 쏘니 시윗소리에 따라 모두 죽었다. 두란·종검(宗儉) 등과 함께 달려서 이를 공격하고, 복병(伏兵)이 또한 일어났다. 이에 태조는 몸소 사졸들의 선두에 서서 단기(單騎)로 적군의 후면을 충돌하니,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리었다.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것이 서너너덧 번 되는데, 손수 죽인 적군이 계산할 수 없으며, 쏜 화살이 중갑(重甲)을 꿰뚫어 혹은 화살 한 개에 사람과 말이 함께 꿰뚫린 것도 있었다. 적의 무리가 무너지므로 관군(官軍)이 이 기세를 이용하여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내를 막아, 한 사람도 빠져 도망한 자가 없었다. 이 싸움에 여진군(女眞軍)이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함부로 죽이니, 태조가 영을 내리기를,
"적군이 궁지에 몰려 불쌍하니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남은 적군은 천불산(千佛山)으로 들어가므로 또한 다 사로잡았다. 우왕태조에게 백금(白金) 50냥, 옷의 겉감과 안찝 5벌, 안장 갖춘 말[鞍馬]을 내리고, 또 정원 십자 공신(定遠十字功臣)의 칭호를 더 내렸다.

태조실록 1권, 총서 84번째기사

태조가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5월, 대군(大軍)이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니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므로, 우왕이 소재(所在)에서 목 베도록 명하였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좌우군 도통사(左右軍都統使)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洲中)에 머물어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이곳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는 큰 내가 많이 있으니 잘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일의 실상[事狀]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황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하여 말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불충(不忠)이니, 어찌 감히 죽음[鈇鉞]을 피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국가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이후로 큰 나라 섬기기를 근실히 하여, 현릉(玄陵)047) 께서 홍무(洪武) 2년에 명(明)나라에 복종하여 섬겨 그 올린 표문(表文)에, ‘자손만세(子孫萬世)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뜻을 계승하여 세공(歲貢)의 물품을 한결같이 조지(詔旨)에 의거했으므로, 이에 황제가 특별히 고명(誥命)048) 을 내려 현릉(玄陵)의 시호(諡號)를 내려 주고 전하의 작(爵)을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福)이요 전하의 성덕(盛德)입니다. 지금 유 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위(鐵嶺衛)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 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表文)을 받들어 품처를 계획했으니, 대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城)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필할 수 없으며 공격하여도 빼앗음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군사를 돌이키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였으나, 우왕최영은 듣지 아니하고, 환자(宦者) 김완(金完)을 보내어 군사를 전진하도록 독촉하였다. 좌우군 도통사는 김완을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아니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가서 빨리 군사를 돌이킬 것을 허가하도록 청하였으나, 최영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군중(軍中)에서 거짓말이 나기를,
"태조가 휘하의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는데 벌써 말에 올랐다."
하니, 군중이 떠들썩 하였다. 민수(敏修)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기(單騎)로 달려 태조에게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공은 가시는데 우리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공은 이러지 마십시오."
하였다. 태조는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만약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天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宗社)·생민(生民)의 재화(災禍)가 즉시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또한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卿) 등과 함께 왕을 보고서 친히 화(禍)되고 복(福)되는 일을 진술하여 임금 측근의 악인(惡人)을 제거하여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공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에 이르러 흰 말을 타고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가지고 언덕 위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니, 군중(軍中)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
"옛부터 지금까지 이 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했는데도 물이 넘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가고 난 후에 큰물이 갑자기 이르러 온 섬이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에,
"목자(木子)049) 가 나라를 얻는다."
는 말이 있었는데, 군인과 민간인, 늙은이와 젊은이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를 노래하였다.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대군(大軍)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우왕에게 알렸다. 이날 밤에 상왕(上王)050) 이 그 형 방우(芳雨)이두란(李豆蘭)의 아들 화상(和尙) 등과 함께 성주(成州)우왕의 처소로부터 태조의 군대 앞으로 도망해 갔으나, 우왕은 해가 정오(正午)가 되어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길에서 대접하는 수령(守令)들을 만나 그들의 말[馬]을 다 빼앗아 타고 갔다. 우왕은 대군(大軍)이 돌아와 안주(安州)에 이르렀음을 알고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군사를 돌이킨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속히 행진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므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될 것이다."
하였다. 매양 군사들을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승여(乘輿)051) 를 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오이[瓜] 한 개만 빼앗아도 또한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
하였다. 연로(沿路)에서 사냥하면서 짐짓 느리게 행군하니, 서경(西京)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백 리 사이에 우왕을 좇던 신료(臣僚)와 서울 사람과 이웃 고을 백성들이 술과 음료(飮料)로써 영접하여 뵙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동북면의 인민과 여진(女眞)으로서 본디 종군(從軍)하지 않던 사람까지도, 태조가 군사를 돌이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서 이르게 된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왕은 도망해 돌아와 화원(花園)으로 돌아갔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하여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무기를 가지고 시위(侍衛)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았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1번째기사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정몽주(鄭夢周)성헌(省憲)140) 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화(和), 사위인 이제(李濟)와 휘하의 황희석(黃希碩)·조규(趙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몽주(夢周)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上王)141)이화(李和)·이제(李濟)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道傳) 등을 국문(鞫問)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142) 를 마치게 하라."
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邸宅)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극언(極言)하기를,
"백성의 이해(利害)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혈통(血統)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私第)로 돌아와서 상왕(上王)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의논하여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豆蘭)은 말하기를,
"우리 공(公)143) 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하고는, 휘하 인사(人士)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 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李氏)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니, 영규(英珪)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영규·조영무(趙英茂)·고여(高呂)·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公)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康妃)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전하는,
"마땅히 휘하의 인사를 모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待備)해야 되겠다."
하면서, 즉시 장사길(張思吉)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태조는 마지못하여 황희석(黃希碩)을 불러 말하기를,
"몽주 등이 죄인과 한편이 되어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伏罪)하여 처형(處刑)되었으니, 마땅히 조준·남은 등을 불러 와서 대간과 더불어 변명하게 할 것이다. 경(卿)이 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라."
하니, 희석(希碩)이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여 말이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가 곁에 있다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므로, 희석이 대궐에 나아가서 상세히 고하니, 공양왕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탄핵을 당한 사람들과 맞서서 변명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장차 대간(臺諫)을 밖으로 내어보낼 것이니, 경(卿)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 때 태조는 노기(怒氣)로 인하여 병이 대단하여,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하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하고는, 비밀히 이자분(李子芬)을 보내어 조준·남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할 의사로써 개유(開諭)하고, 또 상왕(上王)과 이화·이제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상왕을 보내어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만약 몽주의 무리를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면 신(臣) 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공양왕이 마지못하여 대간(臺諫)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외방(外方)에 귀양보내야 될 것이나, 국문(鞫問)할 필요가 없다."
하더니, 조금 후에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문하 평리(門下評理) 김주(金湊)·동순군 제조(同巡軍提調) 김사형(金士衡) 등에게 명하여 대간을 국문하게 하니,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를 보내어 신(臣) 등에게 이르기를, ‘판문하(判門下) 이성계(李成桂)가 공(功)을 믿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다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보좌역(補佐役)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숭인·이종학·조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조금 후에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우간의(右諫議) 이내(李來)·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사헌 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와 장령(掌令) 김묘(金畝)·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이신(李申)이숭인·이종학을 먼저 먼 지방에 귀양보냈다. 형률(刑律)을 다스리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진양 등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진양 등은 몽주의 사주(使嗾)를 받았을 뿐이니, 어찌 함부로 형벌을 쓰겠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호되게 곤장을 쳐야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미 이들을 용서했는데 어찌 곤장을 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진양 등이 이로 말미암아 형벌을 면하게 되었다.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2월 14일 계묘 2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오랑합과 수오적개 등 4인 투항사실과 당시 북방 야인들의 귀화 실태

오랑합(吾郞哈) 수오적개(水吾狄介)등 4인이 왔다.
삼국 말기에 평양 이북은 모두 야인들의 사냥하는 곳이 되었었는데, 고려 때에 남방 백성들을 옮겨서 채우고 의주(義州)에서 양덕(陽德)에 이르기까지 장성(長城)을 쌓아 국경을 굳게 했으나, 그 사는 데 불안(不安)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켜서 군사를 내어 토벌까지 하였었다. 의주의 토호(土豪) 장씨(張氏)가 조정 명령을 듣지 않고, 남쪽 지방에는 왜구들이 멋대로 약탈해서, 동서(東西)의 수천 리와 바다에서 떨어진 수백 리에 성곽(城郭)이 불타고 해골이 들판에 깔려 있으므로, 인가[人煙]가 전혀 없고, 안변(安邊) 이북은 여진(女眞)의 점령한 바가 되어 국가의 정령(政令)이 미치지 못하였었다. 고려 예종(睿宗)이 장수를 보내어 깊이 들어가서 토벌하고 성읍(城邑)을 세웠으나, 바로 잃어버리고 기미(羇縻)만 하여 두었을 뿐이었다.
임금이 즉위한 이후에 성교(聲敎)024) 가 멀리 서북면 백성들에게까지 입혀져서, 편안하게 살고 업(業)을 즐기게 되어, 전야(田野)가 날로 개간되고 인구가 날로 번성하여져서, 의주장사길(張思吉)이 임금의 휘하에 예속되기를 원하여 개국 공신의 반열에 참예하게 되었다. 이 뒤로부터 장씨가 다시 반란하는 일이 없어서, 의주에서 여연(閭延)에 이르기까지의 연강(沿江) 천 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도왜(島倭)들도 얼굴을 고치고 내조(來朝)하여 다시 무역을 하게 되어, 남도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곳을 정하여, 호구가 더욱 불어나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게 되었으며, 바닷가의 땅과 매우 험준한 섬까지 남김없이 개간하여, 전쟁을 모르고 날마다 마시고 먹을 뿐이다.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화아아 두만(火兒阿豆漫) 고론 아합출(古論阿哈出)·탁온 두만(托溫豆漫) 고복아알(高卜兒閼)·합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奚灘訶郞哈)·삼산 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이란 두만 맹안(移闌豆漫猛安) 보역막올아주(甫亦莫兀兒住)·해양 맹안(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아도가 맹안(阿都哥猛安) 오둔완자(奧屯完者)·실안춘 맹안(實眼春猛安) 해탄탑사(奚灘塔斯)·갑주 맹안(甲州猛安) 운강괄(雲剛括)·홍긍 맹안(洪肯猛安) 괄아아올난(括兒牙兀難)·해통 맹안(海通猛安) 주호귀동(朱胡貴洞)·독로올 맹안(禿魯兀猛安) 협온불화(夾溫不花)·간합 맹안(幹合猛安) 해탄설렬(奚灘薛列)·올아홀리 맹안(兀兒忽里猛安) 협온적올리(夾溫赤兀里)·아사 맹안(阿沙猛安) 주호인답홀(朱胡引答忽)·인출활실 맹안(紉出闊失猛安) 주호완자(朱胡完者), 오롱소 맹안(吾籠所猛安) 난독고로(暖禿古魯)·해탄발아(奚灘孛牙), 토문 맹안(土門猛安) 고론발리(古論孛里)·아목라(阿木刺) 당괄해탄고옥노(唐括奚灘古玉奴)이며, 올랑합(兀郞哈)토문(土門)괄아아팔아속(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고주(古州)괄아아걸목나(括兒牙乞木那)·답비나(答比那)·가아답가(可兒答哥)이며, 남돌 올적합(南突兀狄哈)속평강(速平江)·남돌아라합백안(南突阿刺哈伯顔)이며, 활아간 올적합(闊兒看兀狄哈)안춘(眼春)·괄아아독성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고, 이두란(李豆闌)을 시켜서 여진을 초안(招安)하여 피발(被髮)025) 하는 풍속을 모두 관대(冠帶)를 띠게 하고, 금수(禽獸)와 같은 행동을 고쳐 예의의 교화를 익히게 하여 우리 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복역(服役)과 납부(納賦)를 편호(編戶)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또 추장에게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두 국민이 되기를 원하였으므로, 공주(孔州)에서 북쪽으로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읍(邑)을 설치하고 진(鎭)을 두어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하며, 또 학교를 세워서 경서를 가르치게 하니, 문무(文武)의 정치가 이에서 모두 잘되게 되었고, 천 리의 땅이 다 조선의 판도(版圖)로 들어오게 되어 두만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강(江) 밖은 풍속이 다르나, 구주(具州)에 이르기까지 풍문(風聞)으로 듣고 의(義)를 사모해서, 혹은 친히 내조(來朝)하기도 하고, 혹은 자제들을 보내서 볼모로 시위(侍衛)하기도 하고, 혹은 벼슬 받기를 원하고, 혹은 내지(內地)로 옮겨 오고, 혹은 토산물을 바치는 자들이 길에 잇닿았으며, 기르는 말이 좋은 새끼를 낳으면 자기네가 갖지 않고 서로 다투어서 바치며, 강 근처에 사는 자들이 우리 나라 사람과 쟁송(爭訟)하는 일이 있으면, 관청에서 그 곡직(曲直)을 변명(辨明)하여 혹 가두기도 하고, 혹은 매를 치기까지 해도 변장(邊將)을 원망하는 자가 없고, 사냥할 때에는 모두 우리 삼군(三軍)에게 예속되기를 자원해서, 짐승을 잡으면 관청에 바치고, 법률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뒤에 임금이 동북면에 거둥하여 산릉(山陵)을 참배하니, 강(江) 밖에 사는 야인들이 앞을 다투어 와서 뵙고, 길이 멀어서 뵙지 못한 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 야인들이 지금까지도 그 은덕을 생각하고, 변장들과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면 태조 때 일을 말하고 감읍(感泣)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태종실록 10권, 태종 5년 10월 3일 을축 2번째기사 1405년 명 영락(永樂) 3년

올량합 고이와 이두란에게 옷·갓·신 등을 하사하다

올량합(兀良哈) 고이(高里)이두란(李豆蘭)에게 각각 옷 한 벌과 갓[笠]·신[靴]을 내려 주었다.

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 9월 4일 기유 3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함길도 도절제사가 양인 고조화의 입거를 허락한 것의 불가함을 아뢰다

함길도 도절제사가 아뢰기를,
"삼가 내전(內傳)에 의하오면, 양목답올(楊木答兀)이 이미 천호(千戶)가 되었으니 고조화(高早化)와 그 관하(管下)의 백성 거느린 사람이 모두 천호에 속하기 때문에, 고조화 이하를 으레 그 관하로 칭한다 합니다. 갑인년 봄에 범찰(凡察)이 명나라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고조화(高早化) 등을 관하(管下)로 삼고자 하매, 조정에서 허락하여 고조화 등을 범찰의 관하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조화 등이 스스로 추장(酋長)이 되지 못하고 범찰에게 투속(投屬)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고조화 등이 범찰에게 투속된 것을 원망하여, 힘이 강한 자는 혹 항거하기를, ‘우리들은 본래 너의 관하가 아니다. 하물며 지금 종성(鍾城)에 부속(附屬)하여 조선에게 힘을 바치니, 또 어찌 너에게 복역(服役)하겠는가.’ 하여, 범찰이 이 때문에 이인화(李仁和)와 틈이 있은 지가 이미 2, 3년이 되었습니다. 전일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도망하여 달아난 양목답올의 관하(管下) 인구를 거두어 머무르게 하였다.’ 하였는데, 신이 일찍이 이것을 허위 날조한 것으로 의심하였습니다. 내지(內地)로 옮겨 살게 하는 것이 불가함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범찰(凡察)오도리(吾都里) 종류(種類)가 동요(動搖)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히 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장차 우리들을 내지로 옮기어 〈조선의〉 백성을 만들어 복역시키기를 이두란(李豆蘭)의 관하와 같이 한다면, 우리들의 자손은 영구히 복역의 노고를 면치 못한다. ’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고조화의 말을 좇아서 갑자기 옮겨 두면, 저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들을 내지로 옮겨 두는 조짐이 비로소 나타났다. ’고 하여, 더욱 의심을 품을 것이오니, 이것이 불가한 것의 하나이고, 고조화 등이 종성(鍾城)의 서쪽과 회령(會寧)의 북쪽에 돌아와 살아서 두 진(鎭)의 울타리가 되어, 무릇 보고 듣는 바를 달려 와서 고하는데, 울타리를 철거하고 적로(賊路)를 비어 두는 것이 불가함의 두 가지이고, 고조화 등이 비록 내부(來附)하였으나 그 마음은 반드시 다를 터인데, 내지로 옮기어 저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다 알게 하는 것은 무지(無智)한 것 같습니다. 또 이 무리들이 먼 곳의 야인과 더불어 칡덩굴처럼 서로 연하였으니, 왕래하여 상통(相通)해서 우리 백성의 소와 말을 도둑질한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틈이 생길 것은 필연의 형세이니, 이것이 불가함의 세 가지이고, 지금 바야흐로 범찰이 칙서에 의거하여 고조화의 집을 가까운 땅에 옮겨 두어 역사(役使)시키려고 하는데, 우리가 또한 내지로 옮겨 두도록 허락한다면, 형세가 쟁탈하는 혐의가 있고 칙서에 어긋나오니, 이것이 불가함의 네 가지이고, 서곡(瑞谷)은 경작할 만한 땅이 없고 또 목축할 곳이 없는데, 고조화 등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은 경작할 만한 좋은 밭이 있고, 수륙(水陸)으로 어렵(漁獵)할 곳이 있어, 대대로 생식하며 즐겁게 살 수 있는데도, 지금 옮겨 살려고 하는 것은 특히 범찰이 한때에 강제로 옮겨 두려는 해를 면하자는 것이요, 영구히 살려는 계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4, 5월을 지나지 못하여 곧 예전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오니, 어찌 경솔히 허락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불가함의 다섯 가지입니다.
일이 불가한 것이 다섯 가지나 있는데, 그 일시(一時)의 모피(謀避)하는 말을 따라, 와서 살게 한 것을 경솔히 허락하는 것은 잘된 계책이 아닙니다. 범찰이 옮겨 두는 것을 금하고, 저들로 하여금 예전에 살던 곳에 그대로 살게 하여 두 진(鎭)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신의 뜻에는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먼 곳으로 옮겨 가서 다른 종류에 붙고 안 붙는 것은 신이 미리 헤아릴 수 없사오나, 갑인년 여름에 오도리(吾都里)어허리(於虛里)이징옥(李澄玉)에게 밀고하기를, ‘고조화 등이 두 마음이 있어 가만히 우지개(亐知介)에 붙어 적(敵)을 도와주니 일찍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하였습니다. 징옥(澄玉)이 그렇게 여기어 이 무리를 모조리 죽이려 하기에, 신이 힘써 말리어서 이 무리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무리가 와서 신에게 고하기를, ‘범찰이 우리들이 저에게 붙지 않고 종성(鍾城)에 붙었다고 원망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다른 종류에 붙으려 한다고 말을 꾸며 낸 것입니다. 우리들은 원컨대, 그대로 예전에 살던 곳에 살면서 자유로이 경작하고 목축하며 조선에 힘을 바치겠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비록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허리(於虛里)의 갑인년의 밀고가 지금까지 사실이 아니오니, 이때의 가만히 다른 종류에게 붙는다는 범찰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병조(兵曹)에 내리어 마감(磨勘)하여 아뢰게 하였다.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2월 13일 무자 1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집의 민원 등이 박세건이 백성들에게 끼친 폐단을 들어 탄핵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집의(執義) 민원(閔㥳)·헌납(獻納) 박수문(朴守紋)장임(張琳) 등의 일을 아뢰었다. 박수문이 아뢰기를,
"박세건(朴世健)은 평소에 말장식[馬裝]과 갓꾸밈새[笠飾]가 재상처럼 참람하였습니다. 또 물개[海獺] 가죽 2장(張)을 공납(貢納)하기 위하여 20장이나 징수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감사(監司)에게 정소(呈訴)했었는데, 박세건이 그 정소[呈狀]한 자를 찾아 도리어 형장(刑杖)을 가했습니다. 최귀수(崔龜壽)는 숙천 부사(肅川府使) 때에 그 관비(官婢)를 사통(私通)하여 아들까지 낳았었는데, 길거리 사람들이 그 아이를 가리켜 ‘이는 부사의 아들이다.’ 하고 이 때문에 모두 다시 사류(士類)에 끼어주지 않으니, 망설이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세건이 민간에서 폐단 부린 일은 추고(推考)해야 하겠다.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박수문이 아뢰기를,
"붕중(弸中)이 돌아갈 때에 접대하겠다고 이미 말했으니, 이번에 온 왜인(倭人)들을 거절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왜인들에게 줄 양료(糧料)를 별부방(別赴防) 군사 녹(祿) 받는 사람들에게 모두 주었으므로, 지금 접대하기로 한다면 그들에게 지급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니, 두세 사람이 창졸간에 결정한 의논대로 할 수가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붕중이 갈 때에 이미 ‘심처 왜인(深處倭人)078) 은 접대하겠다.’고 말하였으니, 이제 와서 신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 온 사람들은 우선 접대하되, 뒤에는 오지 말라고 말하라."
하였다. 영사(領事) 성희안이 아뢰기를,
"서북(西北)에 사변이 있는데 남쪽의 왜가 이미 배반하였으니, 일본국으로 말하면 선처(善處)하여 우리를 의심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는 실로 국가의 원대한 계책이나, 다만 국가의 용도(用度)가 부족하기 때문에 처치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전조(前朝)079) 가 방어할 때에 진(鎭)을 설치한 것은 신이 잘 알지 못하나, 그때에 아지발도(阿只撥都)가 20세 가량으로 적장이 되었는데, 그 당시에 만인(萬人)을 대적한다고 일컬었습니다, 태조(太祖)께서는 모략(謀略)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며, 이두란(李豆蘭)이 활을 잘 쏘는 사람으로 늘 수종(隨從)하였는데, 발도가 얼굴과 목에 모두 갑옷을 입어 쏠 틈 하나가 없었습니다. 태조께서 두란과 약속하기를 ‘내가 투구끈을 맞혀 끈이 끊어지거던 너는 그의 얼굴을 쏘라.’ 하고서, 태조께서 투구끈을 맞히고 이두란도 약속과 같이 하였습니다. 발도는 무용(武勇)이 남보다 뛰어나 우리 나라 사람들 역시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국가가 당당하지만 왜인을 접대하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실수가 없어야 하니, 소소한 폐단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이해(利害)를 널리 의논하여 좋은 계책을 취해야 합니다."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7일 갑자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풍가이의 일과 별시의 제도·성주 사고의 일을 의논하다

조정에 나아갔다. 장령 정희등(鄭希登)이 아뢰기를,
"풍가이(豐加伊)의 종이 본부(本府)에 정소(呈訴)하기를 ‘풍가이의 죄는 상께서 조정의 공론을 채택(採擇)하여 그렇게 죄를 정했던 것인데, 【장 일백 유 삼천리인데, 유 삼천리는 여인(女人)이기 때문에 속을 바치도록 했었다.】 상궁(尙宮)이라는 사람이 타살했으니 종과 상전의 사이에 정의가 민망하다.’고 했습니다. 또 상처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게 하려고 하여 의금부에서 때린 데를 때렸다고도 하고, 굶주려 죽게 하였으므로 몸이 말랐었다고도 했습니다. 이는 비록 성상께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겠지만, 민일 조금이라도 상께서 알고 계시는 것이 있다면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금내(禁內)에서도 더욱 추찰(推察)하소서."
하니, 상이 재빨리 이르기를,
"내가 물론(物論)을 듣고 이미 그의 죄를 정했었다. 사천(私賤)인 사람은 본디 그의 상전이 있고 궁중(宮中)에 속하지 않는 것인데 금내에서 어떻게 추찰할 수 있겠는가? 법사(法司) 자체가 마땅히 상처를 보고 추찰해야 할 것이고 궁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정희등이 아뢰기를,
"상처는 이미 추찰할 수 없게 되었고, 혹자는 굶주려서 죽었다고 하나, 추찰하기가 어려울 듯하기에 그대로 정지하였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혹시 성상께서 알고 계시는 것으로 여긴다면 성상의 덕에 매우 누가 될 일입니다. 대저 근래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피전 감선(避殿減膳)하고 소의 한식(宵衣旰食)하며 근심하고 수고로우시니 백관들도 허둥지둥하여 천청(天聽)이 더욱 멀기만 했습니다. 농사철이 이미 지났는데도 도무지 비 내릴 기미가 없으니, 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잠깐 비가 내리다가 도로 가물어 여러날토록 이러하니 매우 근심스럽다."
하였는데, 정희등이 아뢰기를,
"천도(天道)는 지극히 먼 것이라 이런 미미한 일이 어찌 위로 하늘에 닿게 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동해(東海)의 효부(孝婦)258) 를 살해하매 3년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었습니다. 【풍가이가 앞서 어머니를 위하여 단지(斷指)했었는데, 옥(獄)에 들어갈 때도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에, 효부(孝婦)의 일을 끌어다 말을 한 것이다.】 그 상궁이라는 사람이 감히 도리가 아닌 짓으로 살육(殺戮)을 자행했으니, 그의 원통함과 불쌍함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매양 원통하고 억울한 옥사(獄事)를 심리하고 있지만, 이처럼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한 지아비나 한 지어미의 원통함도 오히려 한재(旱災)를 부르는 것인데 하물며 사대부이겠습니까?
지난번에 조광조(趙光祖)의 일을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이 서로 글을 올려 논계(論啓)했었지만 아직도 통쾌하게 들어주지 않으시어, 형정(刑政)이 매우 중(中)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실정은 그렇지 않았으니 황천(黃泉)에서도 원통한 마음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옛적에도 추연(鄒衍)259) 이 수심(愁心)을 안게 되자 5월인데 서리가 내렸었습니다. 비록 아무 일이 잘못되었기에 아무 구징(咎徵)이 반응하게 되고, 아무 일이 잘 되었기에 아무 휴징(休徵)이 반응하게 된다고 지적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원통한 기운이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는 것은 곧 이치 속의 일입니다. 요사이 성상께서 괴롭도록 근심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시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제사하지 않은 신(神)이 없어 규벽(珪壁)260) 이 이미 다 되었는데도 가뭄은 더욱 혹독하기만 하여 조금도 천심(天心)을 돌리는 효과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혹 이러한 일들 때문에 그러한 듯합니다."
하였다. 정언 민기문(閔起文)이 아뢰기를,
"한 시대가 일어날 적마다 각각 제도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나라는 비록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따른다고 하지만 모두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유독 사모(紗帽)만 반드시 중국 제도를 따르려고 합니다. 당초에 대관(臺官) 【장령 백인영(白仁英).】 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고서 아뢴 것은 매우 온편치 못한 일입니다. 대저 의문(儀文)이나 제도에 관한 일은 마땅히 위에서 재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오히려 대신들과 의논하여 하셨습니다. 요사이 재상들이 초헌(軺軒) 위에다 모두들 검정 일산[傘]을 장치하는데, 한갓 새로 생긴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서 바라 보면 마치 동궁(東宮)의 청산(靑繖)과 같아 보기에 매우 미안합니다. 중국의 사정으로 말하면 비록 ‘관개(冠蓋)가 서로 잇달았다.’고 하지만, 지역마다 풍속이 다른 법이므로 새 준례를 만들 것이 없습니다. 재상들이 이런 짓을 하면 아래서는 반드시 더 심한 짓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앞서 대관의 뜻을 들어보니 반드시 중국 제도를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한결같게 하려한 것이었고 나도 역시 옛 체제를 따르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대신들의 의논이 모두 중국 제도를 따르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의상(衣裳) 체제를 중국 체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유독 사모에 있어서만 그렇게 함은 과연 공편하지 못한 일이겠다. 초헌에다 일산을 장치하는 짓에 있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또 옛적에는 늙어서야 초헌을 탔었는데 지금은 비록 나이 젊은 사람이라도 벼슬이 2품만 되면 문득 초헌을 타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사신은 논한다. 요즘은 정령이 한결같지 않아 아침에 고쳤다 저녁에 고쳤다 하고, 대신이 가하다 하면 대간은 불가하다 하여 서로들 옳으니 그르니 하므로 의논이 귀결되지 않아, 백성들이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서 포창(褒彰)하는 칙서(勅書)가 내려지자, 처음에는 별시(別試)를 보이라고 명했다가 중간에 고쳐 향시(鄕試)를 보이라고 하였고 나중에는 대관(臺官)의 아룀을 듣고 도로 그만두게 하였는데 이제 또 가을이 되면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또 사모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백인영의 말에 따라 중국 제도대로 하게 했다가 뒤에는 또 민기문의 말을 듣고 다시 우리 나라의 제도를 따르게 했는데, 또 대신의 의논을 듣고 다시 중국 제도를 따르게 하였다. 물론이 정해지지 못하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영사 윤은보가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비록 말을 타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청개(靑蓋)를 세우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 이와 같은 일을 볼 수 없습니다."
하고, 지사 성세창이 아뢰었다.
"신이 앞서 사초(史草)를 다시 쓸 적에 보니 무술년261) 성주 사고(星州史庫)에 불이났었기 때문에 다시 써서 보관했었다.】 세종조에 초헌 제도를 의논할 때에 한결같이 양(梁)나라 제도대로 하여, 초헌 위에 청개를 세워 해를 가리우게 했었는데, 그때의 의논이 ‘노쇠한 재상들은 혹독한 볕을 쪼이기 어려우므로 부득이 해 가리는 것을 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때에 정부에 신보(申報)하고 시행하여 썼었는데 어느 때부터 다시 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한 두 재상이 하고 있지만 삼공(三公)은 지금도 오히려 하지 않으며 그다지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의논을 듣게 된다면 누가 감히 하겠습니까?"
사신은 논한다.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한결같이 편리한 대로만 하고 법례(法例)를 따르지 않는다. 옛적에는 나이가 늙은 재상이 아니면 초헌을 타는 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청년(靑年) 재상이라도 2품만 되면 모두 멋대로 탔고, 왕자(王子)와 부마(駙馬)들도 또한 마음대로 탔다. 이뿐만이 아니라, 권벌(權橃)·유인숙(柳仁淑) 등은 초헌 위에다 또한 양산(涼繖)을 설치하여, 마치 임금의 거둥과 흡사하게 하기를 꺼리지 않으니 물정(物情)이 모두들 미편해 하였다.
민기문이 아뢰기를,
"사학(四學)의 윤차(輪次)262) 법은 비록 유생들을 진작하는 데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역시 옛적부터 해오던 법입니다. 다달이 두 차례씩 시관(試官)을 정하고 유생들을 모아 제술을 시켰었는데 지금은 《후속록》에 실리지 않았기 때문에 폐하고 하지 않으므로 유생들이 더욱 학궁(學宮)에 모이지 않습니다. 법사(法司)가 더러 관리를 보내 적간하게 하면, 관원들이 술을 대접하여 보내며 모이는 것으로 신보(申報)하도록 한다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하고, 성세창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학궁에 오지 않는 것은 단지 이때에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매양 보이게 하려고 해 보았지만 유생들을 몰아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하지 못했었습니다. 사학의 윤차를 어찌하여 하지 않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균관의 윤차는 비록 《대전》에 실려 있지 않은데도 시행하고 폐하지 않았는데, 사학에서는 유독 하지 않는다니 사학의 관원들을 추고해야 합니다. 또 듣건대 학궁에 와 있는 유생들은 대부분 외방에서 온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고, 서울에 사는 자제(子弟)들은 전혀 가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습이 이미 이러하니 학궁에 나아가도록 할 계책이 없습니다. 앞서는 원점(圓點) 주는 법을 해 보았지만 도리어 매우 소란하기만 했습니다. 사장(師長)을 가려서 임용하여 글을 숭상하는 풍습을 진작한다면 자연히 기꺼이 학궁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아주 흡족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항상 생각해 보아도 그 계책을 얻지 못하겠습니다. 학교의 황폐가 지금에 와서 더욱 심하니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학교에 관한 일은 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다만 받들어 거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생들을 몰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누가 부형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권유하여 학궁에 나아가도록 하면 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아, 이런 분부를 받게 되었으니 곧 임금이 학교에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어찌 군사(君師)의 소임에 있으면서, 즐거운 벽옹(辟雍)263) 에 다사(多士)들이 제제(濟濟)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반드시 부형들이 권유하기만 기다려야 할 리가 있겠는가. 문형(文衡)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오직 방책을 찾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고 임금은 또한 아래에서 받들어 거행하지 않는 것에 허물을 돌리고 있으니, 아, 학교의 황폐는 장차 어찌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특진관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왜노를 거절하기로 이미 조정 의논이 정해졌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을 계달해 보겠습니다. 왜노들이 오가면 한갓 각 고을들만 폐해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해량(渡海糧)264) 및 상품[商物] 무역이 한량 없어 참으로 크게 손해가 되니, 이번의 미미한 사단이 생긴 기회에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는 합니다. 다만 제왕(帝王)의 사람 대우하는 도리는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천자는 제후에 대해 한 차례 조회하지 않느면 작위를 낮추고 두 차례 조회하지 않으면 영토를 깎고 세 차례 조회하지 않은 다음에야 육사(六師)265) 를 출동하는 법입니다. 또 도둑을 다스리는 법으로 보더라도 초범(初犯)·재범·삼범이 각각 율(律)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인(倭人)들은 본시 교화(敎化) 밖의 사람으로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한 차례 변방을 침범했는데 어찌 경솔하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이번에 엄중한 말로 서계(書啓)를 만들어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책망하기를 ‘네가 능히 적왜(賊倭)들을 모조리 베어 죄를 자복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하되,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 다음에 죄악이 가득차게 되었을 때에 거절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전조(前朝)266) 의 일로 보더라도 왜구들이 교동(喬桐)에까지 들어 왔었고, 강화(江華)운봉(雲峰)에서의 싸움 때는 성무(聖武)하신 태조(太祖)가 계신 데다 또한 이두란(李豆蘭)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아기발도(阿只拔都)와 같은 천하의 기이한 무재(武才)로도 패전(敗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었다면 위태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방비가 전조에 비하여 비록 조금 든든한 듯하기는 하지만, 해마다 흉년 들고 군졸이 고단하여 빈약한 데다가 더욱이 변방 고을들은 성(城)이 없는 데가 또한 많으므로 완전하게 든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들 돌 위에다 흙을 북돋우고 보리를 심어 먹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접대(接待)받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없어 장차는 궁지에 빠진 도적이 되어 부득이 노략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북 변방의 일도 또한 매우 허술하여 침범해 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또 시운으로 보더라도 백년토록 태평한 시운은 없었으니, 이번에 왜노들을 거절하는 것은 경솔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 왜노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항복을 애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와서 항복하면 반드시 경솔하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두 세 차례 와서 애걸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납관(納款)267) 을 허락하게 될 것이니, 변방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많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절하기는 중난(重難)하다는 뜻을 내가 또한 여러 차례 말했었지만, 마침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기 때문에 부득이 따른 것이다. 이제는 변동하여 고칠 수가 없다. 늘 마음에 끝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있다."
하였는데, 성세창이 아뢰기를,
"왜인들을 거절하는 것은 매우 미편하게 여겨집니다. 의득(議得)할 적에 대신들 앞으로 가서 말을 했었고, 또한 여러 차례 상진과 사사로이 의논해 놓고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대마도를 거절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혹 할 말이 있겠지만, 대내전(大內殿)과 소이전(小二殿)은 당초에 거절할 만한 죄도 없고 조종 이래로 접대해 온 지 이미 오래인데, 만약 이번에 일체 거절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가지고 오는 상물(商物)에 있어서도 처분이 우리에게 달린 것인데 무슨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국왕의 사신은 조종조로부터 모두를 대등한 상대로 대우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감히 선위사의 말을 어기는 짓을 하지 않았고 또한 상물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요즘은 모두 사납고 오만하며 무역하는 물건도 매우 많아 상하(上下)의 노여움을 격동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타의 왜인들은 우리가 조종하기에 달렸습니다. 대마도를 거절하는 것은 명분이 있겠으나 만일 대내전소이전에서 보낸 제추(諸酋)들의 사송(使送)도 아울러 거절한다면 무리들을 연합하여 침범하게 되어 피해가 매우 클 것입니다. 대마도만 거절한다면 국왕도 반드시 도주(島主)가 아랫것들을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당한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대내전소이전은 거절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부득이 대중의 의논에 따른 것이다. 처음부터 나의 본 뜻이 아니었다."

숙종실록 25권, 숙종 19년 8월 30일 신축 2번째기사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

낭원군 이간의 청에 따라 익안 대군 이방의·여흥 부원군 민제의 묘에 치제케 하다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낭원군(郞原君) 이간(李偘)이 청대(請對)하였다. 민암이 아뢰기를,
"송도(松都)구적(舊糴)199) 을 포흠(逋欠)한 것이 자못 1천 2백 석(石)이 넘습니다. 지금 만약 죄다 감하여 준다면 미천한 백성들이 골고루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본부(本府)에서 으레 민호(民戶)에게서 은전(銀錢)을 거두어 이자를 가져다 칙사(勅使)를 지공(支供)했는데, 요즘에 와서 칙사의 행차가 잇달아 와서 경아문(京衙門)에 빌려다 쓰는 형편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갚지 못한 것이 거의 1만여 금(金)이 넘으니, 그것을 죄다 감하여 준다면 이것은 대단한 은혜입니다."
하니, 임금이 남문루(南門樓)에 전좌(殿坐)할 때 친히 부로(父老)들에게 유시할 것을 허락하였다. 낭원군(郞原君) 이간(李偘)이 아뢰기를,
"송도(松都)의 남문 밖 추동(楸洞)성조(聖祖)200) 의 잠저(潛邸) 때의 옛터가 있는데, 왕위에 오른 뒤에는 태종(太宗)께서 그대로 거처하셨으니 이른바 경덕궁(敬德宮)이 이곳입니다. 세속에 전하기를, ‘어느날 흰 용(龍)이 뜰에 내렸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숭인문(崇仁門) 안에 성조(聖祖)의 별장[別墅]이 있는데, 성조께서 상시 이두란(李豆蘭) 등과 격구(擊毬)하며 말을 달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종이 성조의 수용(睟容)을 봉안(奉安)하고 목청전(穆淸殿)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임진년201) 에 병화(兵火)로 타버리게 되었으며, 경덕궁(敬德宮)은 담장이 둘려 있고 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지만 목청전(穆淸殿)의 옛터에는 이미 담장이 없고 인해서 황폐함을 이루었으니, 이는 참으로 결점이 있는 일입니다. 지금 당연히 자세하게 살펴보고 수호(守護)하도록 하며, 글을 짓고 비(碑)를 세워 영원토록 전해 내려가는 곳을 만드소서."
하니, 임금이 유수(留守)로 하여금 자세하게 살펴서 수호하게 하고, 또 글을 주관하는 신하로 하여금 글을 지어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간(偘)이 또 아뢰기를,
"익안 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의 묘(墓)는 풍덕(豊德)에 있고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묘는 제릉(齊陵) 근처에 있으니, 사제(賜祭)를 명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일체(一體)로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https://www.history.go.kr/contents/contentsPage.do;jsessionid=04C706CBE394C79D3B2B3FBF4C1691BB?groupId=000000000571&menuId=000000000574&pageId=0000000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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