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발도 阿其拔都
(1365? ~ 1380년)
고려말 한반도 해안지방을 노략질한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아지' 역시 이두식으로는 '아기'라고 읽기 때문에 마찬가지 뜻이다. 용비어천가 제50장의 주해에서는 한글로 '아기바톨'이라고 당대의 독음을 적었다.
한국 측 기록에 등장하는 대목에서 보여준 무용이 대단해서 유명한 점도 있지만, 그 무용 덕분에 이성계를 유명하게 만들어줘 더 유명한 인물이다. 이렇게 조선 역사에는 비중이 있으나, 반대로 일본 측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서 그가 당시 일본이나 왜구집단 내에서 실제로 얼마나 비중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홍산대첩, 진포해전에서 패배한 후 삼남의 내륙지방으로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이 황산대첩에서 왜구의 무리와 대전하였을 때, 적진에 나타난 장수이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을 다루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의 기록도 동일하다.
*출처: 나무위키
태조가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니 한산군 이색 등이 시를 지어 치하하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033) 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三道) 연해(沿海)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우왕이 태조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3도(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가서 왜적을 정벌하게 하고,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부장(副將)으로 하게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평리 우인열(禹仁烈)·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아 모두 태조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군대가 나가서 장단(長湍)에 이르렀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싸움을 이길 징조입니다."
하였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들어와서 6일 동안 주연(酒宴)을 베풀고 부고(府庫)를 불살랐다. 경산부(京山府)034) 를 지나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니, 삼도 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9원수가 패전하고,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2원수가 전사(戰死)하니, 사졸(士卒)로서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성하여 마침내 함양성(咸陽城)을 도륙(屠戮)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치고서,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성언(聲言)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태조가 천리(千里) 사이에 넘어진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음을 보고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편안히 잠 자고 밥 먹지 못하였다. 태조는 안열(安烈) 등과 함께 남원(南原)에 이르니 적군과 서로 떨어지기가 1백 20리(里)였다. 극렴(克廉) 등이 와서 길에서 태조를 뵙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하루 동안 말을 휴식시키고는 그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군이 험지(險地)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부서(部署)를 정하여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하고 동(東)으로 갔다. 운봉(雲峰)을 넘으니 적군과 떨어지기가 수십 리(里)였다. 황산(黃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서 태조가 큰길 오른쪽의 소로(小路)를 보고서 말하기를,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하면서, 마침내 자기가 빨리 갔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바라보고서는 싸우지 않고 물러갔으니, 이때 해가 벌써 기울었다. 태조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갔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과연 돌출(突出)하는지라, 태조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유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쏘았는데, 50여 개를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었으되, 시윗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무릇 세 번이나 만났는데 힘을 다하여 최후까지 싸워 이를 죽였다. 땅이 또 진창이 되어 적군과 우리 군사가 함께 빠져 서로 넘어졌으나, 뒤미처 나오자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이에 적군이 산을 의거하여 스스로 방어하므로, 태조는 사졸들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분거(分據)하고, 휘하의 이대중(李大中)·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하였다. 태조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衝突)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내려왔다.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태조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螺]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賊陣)에 부딪쳤다. 적의 장수가 창을 가지고 바로 태조의 후면(後面)으로 달려와서 심히 위급하니,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뛰게 하여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여, 두란이 드디어 적장을 쏘아 죽였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를 맞혔다. 태조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기세가 더욱 용감하여, 싸우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사들은 태조의 상처 입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군이 또 태조의 앞에 부딪치므로 태조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좌우에게 지휘하기를,
"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
하니, 장수와 군사가 감동 격려되어 용기백배로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군이 나무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 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적군의 용감한 사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
하면서, 마침내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이내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적군을 공격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나희(儺戱)를 베풀고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적군의 머리[首級]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면서 살려주기를 원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군의 진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아기발도(阿其拔都)가 태조의 진을 설치함이 정제(整齊)한 것을 바라보고는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아기발도가 그 섬[島]에 있으면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러 적군이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에 복종하여 굳이 청하여 왔으므로, 여러 적의 괴수들이 매양 진현(進見)할 적마다 반드시 빨리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았으며, 군중(軍中)의 호령을 모두 그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번 행군(行軍)에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써 바꾸고자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대나무가 일반 나무보다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그러나 대나무는 또한 민가(民家)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니, 그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간다면 족(足)할 것이다."
하였다. 태조는 이르는 곳마다 민간의 물건은 털끝만한 것도 범(犯)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올라(兀羅)의 전쟁에 태조가 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으므로 처명이 은혜에 감동하여 매양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보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종신토록 태조의 곁을 따라다니며 모시었다. 이 싸움에서 처명이 태조의 말 앞[馬前]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우니, 이때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조가 승전(勝戰)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채붕(綵棚)과 잡희(雜戲)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나아가서 재배(再拜)하니, 최영도 또한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謝禮)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 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우왕이 금(金) 50냥을 내려 주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臣)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 치하(致賀)하기를,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충성은 백일(白日)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은 청구(靑丘)035) 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
출목연(出牧筵)036) 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
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
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
하였다. 전 삼사 좌사(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은 이를 화답하기를,
"적의 기세 꺾기를 우레처럼 하니,
군사의 지휘가 모두 공(公)에게서 나왔네.
상서로운 안개 퍼져 나가 독한 안개를 없애고,
서리 바람 매서워서 위엄 바람 도왔도다.
섬 오랑캐 간담이 떨어지매 군용(軍容)이 성대하고,
이웃나라가 마음이 선뜩하매 사기(士氣)가 웅장하네.
온 나라 의관(衣冠)이 다투어 배하(拜賀)하니,
삼한 만세에 태평의 공이네."
라 하였다. 성균 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이 이를 화답하기를,
"3천 신하037) 마음과 덕이 모두 다 같은데,
군율(軍律)은 지금에 와서 모두 공에게 있도다.
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
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
동궁(彤弓)은 빛나서 은영(恩榮)이 무겁고,
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
한번 개선(凱旋)하매 종사(宗社)가 안정되니,
마상(馬上)에서 기공(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
하였다.
풍가이의 일과 별시의 제도·성주 사고의 일을 의논하다
조정에 나아갔다. 장령 정희등(鄭希登)이 아뢰기를,
"풍가이(豐加伊)의 종이 본부(本府)에 정소(呈訴)하기를 ‘풍가이의 죄는 상께서 조정의 공론을 채택(採擇)하여 그렇게 죄를 정했던 것인데, 【장 일백 유 삼천리인데, 유 삼천리는 여인(女人)이기 때문에 속을 바치도록 했었다.】 상궁(尙宮)이라는 사람이 타살했으니 종과 상전의 사이에 정의가 민망하다.’고 했습니다. 또 상처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게 하려고 하여 의금부에서 때린 데를 때렸다고도 하고, 굶주려 죽게 하였으므로 몸이 말랐었다고도 했습니다. 이는 비록 성상께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겠지만, 민일 조금이라도 상께서 알고 계시는 것이 있다면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금내(禁內)에서도 더욱 추찰(推察)하소서."
하니, 상이 재빨리 이르기를,
"내가 물론(物論)을 듣고 이미 그의 죄를 정했었다. 사천(私賤)인 사람은 본디 그의 상전이 있고 궁중(宮中)에 속하지 않는 것인데 금내에서 어떻게 추찰할 수 있겠는가? 법사(法司) 자체가 마땅히 상처를 보고 추찰해야 할 것이고 궁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정희등이 아뢰기를,
"상처는 이미 추찰할 수 없게 되었고, 혹자는 굶주려서 죽었다고 하나, 추찰하기가 어려울 듯하기에 그대로 정지하였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혹시 성상께서 알고 계시는 것으로 여긴다면 성상의 덕에 매우 누가 될 일입니다. 대저 근래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피전 감선(避殿減膳)하고 소의 한식(宵衣旰食)하며 근심하고 수고로우시니 백관들도 허둥지둥하여 천청(天聽)이 더욱 멀기만 했습니다. 농사철이 이미 지났는데도 도무지 비 내릴 기미가 없으니, 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잠깐 비가 내리다가 도로 가물어 여러날토록 이러하니 매우 근심스럽다."
하였는데, 정희등이 아뢰기를,
"천도(天道)는 지극히 먼 것이라 이런 미미한 일이 어찌 위로 하늘에 닿게 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동해(東海)의 효부(孝婦)258) 를 살해하매 3년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었습니다. 【풍가이가 앞서 어머니를 위하여 단지(斷指)했었는데, 옥(獄)에 들어갈 때도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에, 효부(孝婦)의 일을 끌어다 말을 한 것이다.】 그 상궁이라는 사람이 감히 도리가 아닌 짓으로 살육(殺戮)을 자행했으니, 그의 원통함과 불쌍함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매양 원통하고 억울한 옥사(獄事)를 심리하고 있지만, 이처럼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한 지아비나 한 지어미의 원통함도 오히려 한재(旱災)를 부르는 것인데 하물며 사대부이겠습니까?
지난번에 조광조(趙光祖)의 일을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이 서로 글을 올려 논계(論啓)했었지만 아직도 통쾌하게 들어주지 않으시어, 형정(刑政)이 매우 중(中)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실정은 그렇지 않았으니 황천(黃泉)에서도 원통한 마음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옛적에도 추연(鄒衍)259) 이 수심(愁心)을 안게 되자 5월인데 서리가 내렸었습니다. 비록 아무 일이 잘못되었기에 아무 구징(咎徵)이 반응하게 되고, 아무 일이 잘 되었기에 아무 휴징(休徵)이 반응하게 된다고 지적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원통한 기운이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는 것은 곧 이치 속의 일입니다. 요사이 성상께서 괴롭도록 근심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시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제사하지 않은 신(神)이 없어 규벽(珪壁)260) 이 이미 다 되었는데도 가뭄은 더욱 혹독하기만 하여 조금도 천심(天心)을 돌리는 효과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혹 이러한 일들 때문에 그러한 듯합니다."
하였다. 정언 민기문(閔起文)이 아뢰기를,
"한 시대가 일어날 적마다 각각 제도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나라는 비록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따른다고 하지만 모두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유독 사모(紗帽)만 반드시 중국 제도를 따르려고 합니다. 당초에 대관(臺官) 【장령 백인영(白仁英).】 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고서 아뢴 것은 매우 온편치 못한 일입니다. 대저 의문(儀文)이나 제도에 관한 일은 마땅히 위에서 재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오히려 대신들과 의논하여 하셨습니다. 요사이 재상들이 초헌(軺軒) 위에다 모두들 검정 일산[傘]을 장치하는데, 한갓 새로 생긴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서 바라 보면 마치 동궁(東宮)의 청산(靑繖)과 같아 보기에 매우 미안합니다. 중국의 사정으로 말하면 비록 ‘관개(冠蓋)가 서로 잇달았다.’고 하지만, 지역마다 풍속이 다른 법이므로 새 준례를 만들 것이 없습니다. 재상들이 이런 짓을 하면 아래서는 반드시 더 심한 짓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앞서 대관의 뜻을 들어보니 반드시 중국 제도를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한결같게 하려한 것이었고 나도 역시 옛 체제를 따르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대신들의 의논이 모두 중국 제도를 따르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의상(衣裳) 체제를 중국 체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유독 사모에 있어서만 그렇게 함은 과연 공편하지 못한 일이겠다. 초헌에다 일산을 장치하는 짓에 있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또 옛적에는 늙어서야 초헌을 탔었는데 지금은 비록 나이 젊은 사람이라도 벼슬이 2품만 되면 문득 초헌을 타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사신은 논한다. 요즘은 정령이 한결같지 않아 아침에 고쳤다 저녁에 고쳤다 하고, 대신이 가하다 하면 대간은 불가하다 하여 서로들 옳으니 그르니 하므로 의논이 귀결되지 않아, 백성들이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서 포창(褒彰)하는 칙서(勅書)가 내려지자, 처음에는 별시(別試)를 보이라고 명했다가 중간에 고쳐 향시(鄕試)를 보이라고 하였고 나중에는 대관(臺官)의 아룀을 듣고 도로 그만두게 하였는데 이제 또 가을이 되면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또 사모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백인영의 말에 따라 중국 제도대로 하게 했다가 뒤에는 또 민기문의 말을 듣고 다시 우리 나라의 제도를 따르게 했는데, 또 대신의 의논을 듣고 다시 중국 제도를 따르게 하였다. 물론이 정해지지 못하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영사 윤은보가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비록 말을 타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청개(靑蓋)를 세우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 이와 같은 일을 볼 수 없습니다."
하고, 지사 성세창이 아뢰었다.
"신이 앞서 사초(史草)를 다시 쓸 적에 보니【 무술년261) 에 성주 사고(星州史庫)에 불이났었기 때문에 다시 써서 보관했었다.】 세종조에 초헌 제도를 의논할 때에 한결같이 양(梁)나라 제도대로 하여, 초헌 위에 청개를 세워 해를 가리우게 했었는데, 그때의 의논이 ‘노쇠한 재상들은 혹독한 볕을 쪼이기 어려우므로 부득이 해 가리는 것을 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때에 정부에 신보(申報)하고 시행하여 썼었는데 어느 때부터 다시 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한 두 재상이 하고 있지만 삼공(三公)은 지금도 오히려 하지 않으며 그다지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의논을 듣게 된다면 누가 감히 하겠습니까?"
사신은 논한다.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한결같이 편리한 대로만 하고 법례(法例)를 따르지 않는다. 옛적에는 나이가 늙은 재상이 아니면 초헌을 타는 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청년(靑年) 재상이라도 2품만 되면 모두 멋대로 탔고, 왕자(王子)와 부마(駙馬)들도 또한 마음대로 탔다. 이뿐만이 아니라, 권벌(權橃)·유인숙(柳仁淑) 등은 초헌 위에다 또한 양산(涼繖)을 설치하여, 마치 임금의 거둥과 흡사하게 하기를 꺼리지 않으니 물정(物情)이 모두들 미편해 하였다.
민기문이 아뢰기를,
"사학(四學)의 윤차(輪次)262) 법은 비록 유생들을 진작하는 데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역시 옛적부터 해오던 법입니다. 다달이 두 차례씩 시관(試官)을 정하고 유생들을 모아 제술을 시켰었는데 지금은 《후속록》에 실리지 않았기 때문에 폐하고 하지 않으므로 유생들이 더욱 학궁(學宮)에 모이지 않습니다. 법사(法司)가 더러 관리를 보내 적간하게 하면, 관원들이 술을 대접하여 보내며 모이는 것으로 신보(申報)하도록 한다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하고, 성세창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학궁에 오지 않는 것은 단지 이때에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매양 보이게 하려고 해 보았지만 유생들을 몰아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하지 못했었습니다. 사학의 윤차를 어찌하여 하지 않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균관의 윤차는 비록 《대전》에 실려 있지 않은데도 시행하고 폐하지 않았는데, 사학에서는 유독 하지 않는다니 사학의 관원들을 추고해야 합니다. 또 듣건대 학궁에 와 있는 유생들은 대부분 외방에서 온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고, 서울에 사는 자제(子弟)들은 전혀 가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습이 이미 이러하니 학궁에 나아가도록 할 계책이 없습니다. 앞서는 원점(圓點) 주는 법을 해 보았지만 도리어 매우 소란하기만 했습니다. 사장(師長)을 가려서 임용하여 글을 숭상하는 풍습을 진작한다면 자연히 기꺼이 학궁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아주 흡족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항상 생각해 보아도 그 계책을 얻지 못하겠습니다. 학교의 황폐가 지금에 와서 더욱 심하니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학교에 관한 일은 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다만 받들어 거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생들을 몰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누가 부형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권유하여 학궁에 나아가도록 하면 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아, 이런 분부를 받게 되었으니 곧 임금이 학교에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어찌 군사(君師)의 소임에 있으면서, 즐거운 벽옹(辟雍)263) 에 다사(多士)들이 제제(濟濟)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반드시 부형들이 권유하기만 기다려야 할 리가 있겠는가. 문형(文衡)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오직 방책을 찾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고 임금은 또한 아래에서 받들어 거행하지 않는 것에 허물을 돌리고 있으니, 아, 학교의 황폐는 장차 어찌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특진관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왜노를 거절하기로 이미 조정 의논이 정해졌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을 계달해 보겠습니다. 왜노들이 오가면 한갓 각 고을들만 폐해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해량(渡海糧)264) 및 상품[商物] 무역이 한량 없어 참으로 크게 손해가 되니, 이번의 미미한 사단이 생긴 기회에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는 합니다. 다만 제왕(帝王)의 사람 대우하는 도리는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천자는 제후에 대해 한 차례 조회하지 않느면 작위를 낮추고 두 차례 조회하지 않으면 영토를 깎고 세 차례 조회하지 않은 다음에야 육사(六師)265) 를 출동하는 법입니다. 또 도둑을 다스리는 법으로 보더라도 초범(初犯)·재범·삼범이 각각 율(律)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인(倭人)들은 본시 교화(敎化) 밖의 사람으로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한 차례 변방을 침범했는데 어찌 경솔하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이번에 엄중한 말로 서계(書啓)를 만들어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책망하기를 ‘네가 능히 적왜(賊倭)들을 모조리 베어 죄를 자복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하되,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 다음에 죄악이 가득차게 되었을 때에 거절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전조(前朝)266) 의 일로 보더라도 왜구들이 교동(喬桐)에까지 들어 왔었고, 강화(江華)와 운봉(雲峰)에서의 싸움 때는 성무(聖武)하신 태조(太祖)가 계신 데다 또한 이두란(李豆蘭)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아기발도(阿只拔都)와 같은 천하의 기이한 무재(武才)로도 패전(敗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었다면 위태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방비가 전조에 비하여 비록 조금 든든한 듯하기는 하지만, 해마다 흉년 들고 군졸이 고단하여 빈약한 데다가 더욱이 변방 고을들은 성(城)이 없는 데가 또한 많으므로 완전하게 든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들 돌 위에다 흙을 북돋우고 보리를 심어 먹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접대(接待)받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없어 장차는 궁지에 빠진 도적이 되어 부득이 노략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북 변방의 일도 또한 매우 허술하여 침범해 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또 시운으로 보더라도 백년토록 태평한 시운은 없었으니, 이번에 왜노들을 거절하는 것은 경솔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 왜노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항복을 애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와서 항복하면 반드시 경솔하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두 세 차례 와서 애걸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납관(納款)267) 을 허락하게 될 것이니, 변방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많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절하기는 중난(重難)하다는 뜻을 내가 또한 여러 차례 말했었지만, 마침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기 때문에 부득이 따른 것이다. 이제는 변동하여 고칠 수가 없다. 늘 마음에 끝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있다."
하였는데, 성세창이 아뢰기를,
"왜인들을 거절하는 것은 매우 미편하게 여겨집니다. 의득(議得)할 적에 대신들 앞으로 가서 말을 했었고, 또한 여러 차례 상진과 사사로이 의논해 놓고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대마도를 거절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혹 할 말이 있겠지만, 대내전(大內殿)과 소이전(小二殿)은 당초에 거절할 만한 죄도 없고 조종 이래로 접대해 온 지 이미 오래인데, 만약 이번에 일체 거절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가지고 오는 상물(商物)에 있어서도 처분이 우리에게 달린 것인데 무슨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국왕의 사신은 조종조로부터 모두를 대등한 상대로 대우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감히 선위사의 말을 어기는 짓을 하지 않았고 또한 상물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요즘은 모두 사납고 오만하며 무역하는 물건도 매우 많아 상하(上下)의 노여움을 격동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타의 왜인들은 우리가 조종하기에 달렸습니다. 대마도를 거절하는 것은 명분이 있겠으나 만일 대내전과 소이전에서 보낸 제추(諸酋)들의 사송(使送)도 아울러 거절한다면 무리들을 연합하여 침범하게 되어 피해가 매우 클 것입니다. 대마도만 거절한다면 국왕도 반드시 도주(島主)가 아랫것들을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당한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대내전과 소이전은 거절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부득이 대중의 의논에 따른 것이다. 처음부터 나의 본 뜻이 아니었다."
생원·진사를 뽑을 때에 무예도 시험하는 일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전교하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유생들이 평일에 무사 보기를 이단(異瑞)과 같이 하고, 대접도 노예와 같이 하면서 오직 쓸데없는 고담 준론(高談峻論)만 일삼았으니, 우리 나라의 문폐(文弊)는 극도에 달하였는데 그 중에 경상도가 더욱 심하다. 전에 윤탁연(尹卓然)의 말을 들으니, 상주에는 사수(射手)가 겨우 세 사람뿐이라 하였다. 또 한마디 할 말이 있는데, 전날 경연에서 고(故) 재상 이준민(李俊民)은 이야기가 변방의 일에 미치자, 말하기를 ‘상께서는 왜국을 근심하십니까? 왜인은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내가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더니, 준민은 짧은 옷소매에, 단검(短劍)을 들고 맨발로 달리는 것은 잘하나, 그 밖에 다른 장기는 없으니 어찌 적(賊)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외숙 조식(曺植)도 항상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있는 것은 어쩐 일이냐?’ 하니, 말하기를 ‘아기발도는 주객(主客)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적국에 깊숙이 들어왔으니 어찌 태조의 절제(節制)하는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호걸이 아닙니다.’ 하므로, 나도 그렇다고 답하였다. 준민은 유장(儒將)으로서 명망이 있는 자인데 그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다. 내 생각에, 생원이나 진사를 뽑는 것은 장차 태학(太學)에 올리려는 것 같은데 공자의 가르침에도 활쏘기와 말타기가 있지 않았던가? 육상산(陸象山)이 사람을 가르칠 때에도 문인들로 하여금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지금부터 생원·진사를 뽑을 때에 무예까지 아울러 시험하여, 관혁(貫革)의 입격자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불변의 이치이니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비변사가 아뢰기를,
"인정이 무변(武弁)을 천시하고 문사(文士)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온 우리 나라의 폐습입니다. 오늘날 성상께서 무략(武略)이 강하지 못함을 크게 염려하여 권장하는 방도를 생각하시어 생원·진사를 뽑을 때 무예까지 아울러 시험하라 하시니, 나라를 보호하고 적국을 방어하는 방책으로는 지극합니다. 그러나 새로 제정하는 규칙은 반드시 충분히 강구한 후에 시행해야만 폐가 없습니다. 이 일은 마땅히 여러 사람의 논의를 모은 뒤에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권장할 방도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서서히 생각하여 자세히 처리하는 데에 달렸습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사도 도체찰사 겸 도원수 의정부 좌의정(四道都體察使兼都元帥議政府左議政) 이항복(李恒福)이 남방에서 올라왔다. 상이 별전(別殿)에서 인견(引見)했는데 동부승지 민중남(閔中男), 가주서(假注書) 변응벽(邊應壁), 기사관(記事官) 2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남방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라·충청 두 도를 순심(巡審)하였으나 경상도는 소명(召命)이 계셨으므로 미처 순심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주사(舟師)를 보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에 이순신에게 있을 적에 보았는데, 그때엔 배의 수효는 많았으나 병사의 수가 부족하여 격군(格軍)을 충정한 배가 많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누어 배치된 것이 일정한 수효가 있고 격군의 충정도 잘 정제되어 있는 듯하였습니다만, 원수(元數)가 단약한 것이 우려됩니다. 조정을 떠나던 날 전교하신 봉수(烽燧)에 관한 것을 말씀드리면, 양남(兩南) 연해 지방의 봉수가 간격이 너무 먼 것 같아서 지금 두 곳을 더 설치하게 하고 잘 거행하도록 신명(申明)하였으니, 설령 사변(事變)이 있더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성(京城) 근처는 어렵습니다. 또 금년의 삼도(三道) 농사는, 밭곡식은 충실치 못하였습니다만 흉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논농사는 앞으로 7∼8월 사이에 풍재(風災)만 없다면 결실이 잘 될 듯한데 성패(成敗)는 바로 여기에 달렸습니다. 혹 풍년이 든다면 백성들이 그래도 의지할 바가 있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비가 많지 않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폭우가 내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오면서 본 것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냇물이 넘치거나 논밭이 무너져 떨어져 나간 것은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간(開墾) 상태는 어떠했는가?"
하니, 답하기를,
"작년은 재작년보다 나았고 금년은 작년보다 낫습니다. 다만 남방의 물력(物力)이 매우 모자라는 형편임을 지난번에 이미 차자를 올려 아뢰었는데 이번에 소미(小米)를 포(布)로 바꾼 것이 8백 동(同)이나 되니, 판탕이 극심한 이런 때 징수(徵收)가 이러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와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심과 방비에 대한 일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방비는 시원치 않았으나 이미 마친 일은 그래도 두서(頭緖)가 있었습니다. 충청도의 인심은 전라도 같지는 않았습니다. 전라도 사람은 본디 성질이 강한(强悍)하고 쉽게 동요될 뿐 아니라 물력(物力)을 쓰는 것이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만이 요역(徭役)이 갑절인가?"
하니, 답하기를,
"하삼도(下三道)는 평시에도 부담이 많았지만 임진년 난리에 전라도만 무사했던 까닭에 서로(西路)의 모든 요역이 오로지 이 전라도 지방에 부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세가 대족(世家大族)이 이 지방에 많기 때문에 군량미 등을 거둘 때도 있는 힘을 다 기울였는데 정유년 이후 변란이 끝난 뒤에도 차역(差役)이 여전하므로 물력(物力)이 고갈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적이 온다면 어떻게 방어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소규모로 온다면 방어할 수 있겠지만 대규모로 온다면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왜적은 천하에 대적하기 어려운 적이다. 임진 왜란 때 천하의 힘을 동원하였지만 어디 당하겠던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전선(戰船)은 어찌해서 패몰한 적이 있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배 위에서 무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패한 것입니다. 신은 용맹한 장수를 수군의 장수로 삼았으면 합니다. 오로지 익숙한 사람이라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데, 각진(各鎭)의 첨사(僉使)나 만호(萬戶)가 타는 배에는 숙련된 뱃사공을 돌려가며 교체시키기 때문에 이내 서툴게 됩니다. 아무리 병선(兵船)이 있더라도 진실로 뱃사공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성패는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統制使)는 어떤 사람이던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본디 그 사람을 알고 있는데 영민하고 비범하며 날카로운 기상이 있습니다. 다만 처음엔 사졸들이 물에 익숙하지 못하여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진정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장수는 수군 장수로서의 재능과 육군 장수로서의 재능이 각기 달랐는데, 이시언(李時言)은 수전(水戰)에도 능한가?"
하니, 답하기를,
"이시언은 육전(陸戰)을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용맹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번 사직을 청하였는데, 지금은 병이 없는가?"
하니, 답하기를,
"심하게 아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바닷가에 오래 있게 되면 반드시 상독(傷毒)을 받기 마련입니다. 신이 경도(鯨島)·노량(露梁) 등지에 며칠 동안 있어 보았는데 바다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으며 옷이 다 젖었습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을 얻게 됩니다. 또 양남(兩南)의 해안은 거리가 매우 멀어 동래(東萊)에서 해남(海南)까지 거의 1천여 리가 되는데 그 사이의 진소(陣所)가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엇물려 있으므로 부산(釜山)·경도·고금도(古今島)가 아득하여 서로 접속되지 않음은 물론 적이 오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비하지 않는 곳이 없고 분치(分置)하지 않는 곳이 없게 하라. 부산에서 진도(珍島)·비인(庇仁)·남포(藍浦) 등지에 이르기까지는 대부분 적이 쳐들어 올 만한 곳이니 모두 요해처(要害處)를 골라서 방어하라. 또 대마도에서는 부산이 매우 가까우므로 밤에 바다를 건너와 몰래 습격한다는 말이 전부터 있어 왔다. 공갈하는 말이지만 대마도는 뱃길로 한나절 거리라고 하니, 순풍(順風)을 만난다면 기습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지금 수종(水宗)을 정탐하는 사람이 연락 부절이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정탐(偵探)할 수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대담한 자가 없으면 어렵습니다. 강항(姜沆)이 나왔으니 틀림없이 적의 실정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어떻게 알겠으며 그의 말을 어떻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답하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은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하문하였으나 동병(動兵)의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정원이 들은 바는 어떠하였는가?"
하니, 승지 민중남(閔中男)이 아뢰기를,
"형편으로 보아 동병하지 않을 듯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민중남이 답하기를,
"왜적 중 가강(家康)이란 자가 있는데 청정(淸正)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잘 모른 것이다. 왜적의 간사한 꾀는 그 부하 졸개도 오히려 모르는데 강항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왜적들은 은밀하게 맹세하면 부자 형제 사이라도 누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를 훈련하는 일은 반드시 없을 것이지만 그 백성들은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군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할 것이요, 적의 움직임 따위는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의 형편으로 말하건대, 그들이 이것으로 그칠 것이라는 말은 기필코 그럴 리가 없다. 내년에 나온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어찌 끝내 결말(結末)이 없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난날 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사망자를 냈고 수길(秀吉)도 이미 죽었으며 나라의 물력(物力)도 많이 고갈되었으므로 스스로 중지할 계획이거나 아니면 자체에서 서로 틈이 생겨 스스로 도모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어서 당장 군대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왜적은 자구 침구하여 올 것이니 남쪽 국경이 반드시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들이 기를 쓰고 있다니 매우 큰 걱정이다. 그러나 스스로 굳건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그래도 믿을 수 있겠다."
하니, 답하기를,
"백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배는 80척에 지나지 않고 육군은 겨우 6천 명인데 경상도는 육전(陸戰)의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군이 원수(元數)도 매우 적은데 산성(山城)의 요새에 의지할 계획은 아예 하지도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적이 해안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대규모로 온다면 접전(接戰)하면서도 병력을 나누어 해안으로 상륙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80척의 전선(戰船)을 믿고 육전(陸戰)에 쓰이는 기계들을 준비하지 않으니, 적이 마구 휘몰아쳐 공격해 온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마치 분을 바르듯이 가까스로 군량을 공급하는 형편이어서 약간의 군대가 있다 하더라도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습니다. 안위(安衛)도 지금 두어 달 먹을 군량도 없어 장차 버티어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반드시 한 곳에 힘쓸 필요가 있다. 전자에 산성은 지킬 수 없다고 하여 모두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지킬 만한 곳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옳다. 단지 산성을 싫어할 줄만 알뿐 그것에 의지해서 지킬 줄을 모른다면 이는 구토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하니, 답하기를,
"전라 병사 안위는 금성(金城)을 지키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듣기로 금성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지금 병사의 장계를 보건대 좋지 않다고 하였다."
하니, 답하기를,
"담양 산성(潭陽山城)은 크고도 튼튼하여 평양성(平壤城)보다 낫습니다. 힘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5분의 2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안위는 어찌하여 좋지 않다고 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성은 큰데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태조(太祖)께서 운봉(雲峯) 싸움에 승리하셨을 때 변안렬(邊安烈)에게 정병 5천 명을 주면서 ‘만일 차질이 생기거든 물러나서 금성(金城)을 지키라.’고 하셨고, 아기발도(阿只拔都)는 일찍이 ‘말은 금성에서 길러야 한다.’고 했고 주(註)에 ‘금성은 광주(光州)에 있는데 광주와 남원(南原)두 곳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바로 이곳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기발도가 금성에 갔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운봉을 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변장 가운데 송희립(宋希立)·소계남(蘇繼男) 등은 다 쓸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수령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신이 처음 지방에 도착했을 적에 매우 잘못 다스린 자는 이미 6∼7인을 아뢰어 파직시켰습니다만, 그 뒤에 역시 적격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혹 장벌(杖罰)을 가하여 견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체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고 전조(銓曹)가 잘 가리지 않은 탓이고 또 수령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남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상길(李尙吉)은 어떻게 정사를 다스리기에 봉명 사신(奉命使臣)들이 한결같이 그의 선정(善政)을 일컫는가?"
하니, 답하기를,
"상길은 처사가 상세하고 부역(賦役)이 균평합니다. 또 홍주 목사(洪州牧使) 우복룡(禹伏龍)도 참으로 잘 다스리는 수령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 가운데 작은 것에는 능하지만 큰 것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 상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감사(監司)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니, 답하기를,
"그 사람을 살펴보면 말은 안하지만 일을 당하면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대개 수령을 포장(褒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처음엔 잘 다스리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예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치적이 제일 좋은 자를 골라서 포상하고 그 나머지는 포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금년의 급무는 전결(田結)을 상정(詳定)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이 마음을 쓰지 않은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난리 뒤에 원정수(元定數)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하자, 답하기를,
"수령들이 상정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요역(徭役)들을 반드시 전결(田結)에 의거하여 분정(分定)하기 때문에 사실대로 하는 고을은 부역이 매우 무겁게 되어 민원(民怨)이 한이 없게 되므로 수령들이 백성을 위하여 전결의 상정을 간략하게 합니다. 팔도(八道)가 다 똑같이 된 뒤에야 부역이 고르게 되고 백성들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노고가 매우 많다. 전에 있던 병세는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신은 본시 담증(痰症)을 앓았는데 노상(路上)에서 더위를 먹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안색을 보니 전보다 매우 좋지 않다. 이는 필시 국사 때문에 노심 초사한 탓일 것이다."
하니, 항복이 일어나 배사(拜謝)하고 아뢰기를,
"신이 올라오는 도중에 들었는데, 지난날 홍여순(洪汝諄)이 탄핵받을 때 장관(將官) 최한(崔漢) 등이 상소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지금 옥에 갇혀 형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곡절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형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죄범이 가볍지 않다. 경은 어찌하여 이 일을 말하는가? 장관들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상소하는 일이 있을 터이니 지금 경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발호할 조짐이 있게 될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발호할까 의심하시는데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지(無知)해서 저지른 망령된 행동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단한 일이건 대단치 않은 일이건 간섭해서는 안 될 일을 저들이 간섭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터이므로 통렬히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한두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다닌다고 하여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각사(各司)가 다투어 서계(書啓)하는 것을 보고 망령되이 사람들을 따라서 하려 한 일인데 형장을 맞다가 죽는다면 성대(聖代)의 누가 될지 모릅니다. 설령 탈루(脫漏)되는 폐단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이르기를,
"남쪽 지방에서는 무사(武事)를 단련하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전라도엔 훌륭한 인재가 많은데 경상도엔 전혀 무사(武事)를 단련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또 우리 나라엔 말이 없는데 무사(武士)는 반드시 말을 탄 뒤에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두 준비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이 진실로 우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에도 포수(砲手)와 살수(殺手)가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수령이 간혹 단련하려고 하지만 충총(衝銃)과 염초(焰硝) 등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살수는 백성들이 기예(技藝)에 서툴기 때문에 숙달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유생들은 독서를 업으로 삼고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남방의 폐습이 논의(論議)는 좋아하지만 학업에는 힘쓰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민중남(閔中男)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을 적에 이웃한 몇몇 고을이 해도(海島)에서 대나무를 많이 베어 왔는데 가을이 되면 더 많이 벨 수 있습니다. 전결(田結)에 대한 일은 수령들이 상정(詳定)하려고 하더라도 세입(稅入) 외에 쌀을 거두는 등의 일을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결이 많으면 사람들이 원수처럼 보므로 양전(量田)을 쉽사리 할 수 없습니다. 상명(詳明)한 수령을 가려뽑아 5∼6 고을을 전담시켜 결부(結負)를 자세히 살피게 한 뒤에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죽(箭竹)은 충청도에도 있다고 하니 베어서 써도 된다. 또 선왕조(先王朝) 때부터 전죽을 북도(北道)에 옮겨 심은 것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경기와 황해도 등지에 옮겨 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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