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렴(裵克廉, 1325년 ~ 1392년 12월 10일(음력 11월 26일))은 고려 말 조선 초 무신이자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본관은 경산(京山). 자는 양가(量可), 호는 주금당(晝錦堂)·필암(筆菴),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1325년 (충숙왕 12년) 고려 경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에서 위위시소윤으로 있던 배현보(裵玄甫)와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고려 경상도 경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관향인 성주 관하리에 살고 있을 때에는 나무를 심고 근처의 황무지를 개간해 고을의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농사를 짓게하니 백성들은 그의 공을 고맙게 생각해 그곳의 하천을 배천(裵川:白川)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을 배리(裵里)라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공민왕 때인 1353년 문음으로 천거되어 진주, 상주의 목사, 계림, 화령의 부윤, 합포진첨사 등을 역임했다. 1376년 (우왕 2년) 진주 도원수가 되어, 진주에 쳐들어 온 왜구를 반성현에서 대파시키고, 이듬해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하여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의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 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하여 완성하니,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의 번성(藩城)이 그것이다.
한편 1378년 경상도 원수(慶尙道 元帥)로서 욕지도(欲知島)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삼도원수(三道元帥)로 함양부(咸陽府)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또다시 왜구를 격파한 전공을 세웠다. 같은해 겨울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하여 사주(泗州)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 울주전투와 청도전투·사주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한 뒤,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여 1380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그 후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왕으로부터 말안장, 의복 및 술을 하사받았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수(右軍都統師)인 이성계의 휘하에서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을 결행하여 최영(崔瑩) 등의 구세력을 추방하였다. 1389년 (창왕 1년) 7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요직을 맡았다. 그해 10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 (공양왕 1년) 평리(評理)로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며, 같은해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수하였다.
이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시중 심덕부(沈德符)와 함께 각도의 관찰사(觀察使)를 파하고 안렴사(按廉使)를 두고, 절제사(節制使), 경력(經歷), 도사(都事)등을 파하고 장무록사(掌務錄事)를 두는 등 지방의 관제(官制)를 혁신하는 상소를 올려 이를 혁파(革罷)하고, 이어서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이 되었다.
1392년 7월 문하우시중으로 조준(趙浚), 정도전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2] 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1천호(千戶)가 식읍(食邑)으로 내려졌다.
그리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올라, 고려와 조선에 걸쳐 정승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초대 영의정이 되지만 같은 해 12월 8일(음력 11월 24일)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이틀 후 졸(卒)하니 조정에서는 크게 애도하여 3일을 철조(撤朝)하고 장례에 쓰는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어 증평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에 예장하였다. 이어 정절(貞節)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슬하에는 1녀를 두었는데 영평군 반자건(潘自建)에게 출가하였다.
*출처: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B%B0%B0%EA%B7%B9%EB%A0%B4)
태조가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니 한산군 이색 등이 시를 지어 치하하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033) 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三道) 연해(沿海)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우왕이 태조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3도(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가서 왜적을 정벌하게 하고,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부장(副將)으로 하게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평리 우인열(禹仁烈)·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아 모두 태조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군대가 나가서 장단(長湍)에 이르렀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싸움을 이길 징조입니다."
하였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들어와서 6일 동안 주연(酒宴)을 베풀고 부고(府庫)를 불살랐다. 경산부(京山府)034) 를 지나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니, 삼도 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9원수가 패전하고,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2원수가 전사(戰死)하니, 사졸(士卒)로서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성하여 마침내 함양성(咸陽城)을 도륙(屠戮)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치고서,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성언(聲言)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태조가 천리(千里) 사이에 넘어진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음을 보고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편안히 잠 자고 밥 먹지 못하였다. 태조는 안열(安烈) 등과 함께 남원(南原)에 이르니 적군과 서로 떨어지기가 1백 20리(里)였다. 극렴(克廉) 등이 와서 길에서 태조를 뵙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하루 동안 말을 휴식시키고는 그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군이 험지(險地)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부서(部署)를 정하여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하고 동(東)으로 갔다. 운봉(雲峰)을 넘으니 적군과 떨어지기가 수십 리(里)였다. 황산(黃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서 태조가 큰길 오른쪽의 소로(小路)를 보고서 말하기를,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하면서, 마침내 자기가 빨리 갔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바라보고서는 싸우지 않고 물러갔으니, 이때 해가 벌써 기울었다. 태조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갔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과연 돌출(突出)하는지라, 태조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유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쏘았는데, 50여 개를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었으되, 시윗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무릇 세 번이나 만났는데 힘을 다하여 최후까지 싸워 이를 죽였다. 땅이 또 진창이 되어 적군과 우리 군사가 함께 빠져 서로 넘어졌으나, 뒤미처 나오자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이에 적군이 산을 의거하여 스스로 방어하므로, 태조는 사졸들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분거(分據)하고, 휘하의 이대중(李大中)·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하였다. 태조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衝突)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내려왔다.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태조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螺]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賊陣)에 부딪쳤다. 적의 장수가 창을 가지고 바로 태조의 후면(後面)으로 달려와서 심히 위급하니,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뛰게 하여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여, 두란이 드디어 적장을 쏘아 죽였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를 맞혔다. 태조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기세가 더욱 용감하여, 싸우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사들은 태조의 상처 입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군이 또 태조의 앞에 부딪치므로 태조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좌우에게 지휘하기를,
"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
하니, 장수와 군사가 감동 격려되어 용기백배로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군이 나무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 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적군의 용감한 사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
하면서, 마침내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이내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적군을 공격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나희(儺戱)를 베풀고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적군의 머리[首級]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면서 살려주기를 원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군의 진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아기발도(阿其拔都)가 태조의 진을 설치함이 정제(整齊)한 것을 바라보고는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아기발도가 그 섬[島]에 있으면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러 적군이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에 복종하여 굳이 청하여 왔으므로, 여러 적의 괴수들이 매양 진현(進見)할 적마다 반드시 빨리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았으며, 군중(軍中)의 호령을 모두 그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번 행군(行軍)에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써 바꾸고자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대나무가 일반 나무보다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그러나 대나무는 또한 민가(民家)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니, 그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간다면 족(足)할 것이다."
하였다. 태조는 이르는 곳마다 민간의 물건은 털끝만한 것도 범(犯)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올라(兀羅)의 전쟁에 태조가 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으므로 처명이 은혜에 감동하여 매양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보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종신토록 태조의 곁을 따라다니며 모시었다. 이 싸움에서 처명이 태조의 말 앞[馬前]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우니, 이때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조가 승전(勝戰)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채붕(綵棚)과 잡희(雜戲)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나아가서 재배(再拜)하니, 최영도 또한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謝禮)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 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우왕이 금(金) 50냥을 내려 주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臣)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 치하(致賀)하기를,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충성은 백일(白日)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은 청구(靑丘)035) 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
출목연(出牧筵)036) 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
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
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
하였다. 전 삼사 좌사(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은 이를 화답하기를,
"적의 기세 꺾기를 우레처럼 하니,
군사의 지휘가 모두 공(公)에게서 나왔네.
상서로운 안개 퍼져 나가 독한 안개를 없애고,
서리 바람 매서워서 위엄 바람 도왔도다.
섬 오랑캐 간담이 떨어지매 군용(軍容)이 성대하고,
이웃나라가 마음이 선뜩하매 사기(士氣)가 웅장하네.
온 나라 의관(衣冠)이 다투어 배하(拜賀)하니,
삼한 만세에 태평의 공이네."
라 하였다. 성균 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이 이를 화답하기를,
"3천 신하037) 마음과 덕이 모두 다 같은데,
군율(軍律)은 지금에 와서 모두 공에게 있도다.
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
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
동궁(彤弓)은 빛나서 은영(恩榮)이 무겁고,
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
한번 개선(凱旋)하매 종사(宗社)가 안정되니,
마상(馬上)에서 기공(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
하였다.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정몽주(鄭夢周)가 성헌(省憲)140) 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화(和), 사위인 이제(李濟)와 휘하의 황희석(黃希碩)·조규(趙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몽주(夢周)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上王)141) 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道傳) 등을 국문(鞫問)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142) 를 마치게 하라."
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邸宅)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극언(極言)하기를,
"백성의 이해(利害)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혈통(血統)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私第)로 돌아와서 상왕(上王)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의논하여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豆蘭)은 말하기를,
"우리 공(公)143) 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하고는, 휘하 인사(人士)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 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李氏)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니, 영규(英珪)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영규·조영무(趙英茂)·고여(高呂)·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公)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康妃)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전하는,
"마땅히 휘하의 인사를 모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待備)해야 되겠다."
하면서, 즉시 장사길(張思吉)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태조는 마지못하여 황희석(黃希碩)을 불러 말하기를,
"몽주 등이 죄인과 한편이 되어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伏罪)하여 처형(處刑)되었으니, 마땅히 조준·남은 등을 불러 와서 대간과 더불어 변명하게 할 것이다. 경(卿)이 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라."
하니, 희석(希碩)이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여 말이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가 곁에 있다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므로, 희석이 대궐에 나아가서 상세히 고하니, 공양왕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탄핵을 당한 사람들과 맞서서 변명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장차 대간(臺諫)을 밖으로 내어보낼 것이니, 경(卿)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 때 태조는 노기(怒氣)로 인하여 병이 대단하여,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하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하고는, 비밀히 이자분(李子芬)을 보내어 조준·남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할 의사로써 개유(開諭)하고, 또 상왕(上王)과 이화·이제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상왕을 보내어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만약 몽주의 무리를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면 신(臣) 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공양왕이 마지못하여 대간(臺諫)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외방(外方)에 귀양보내야 될 것이나, 국문(鞫問)할 필요가 없다."
하더니, 조금 후에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문하 평리(門下評理) 김주(金湊)·동순군 제조(同巡軍提調) 김사형(金士衡) 등에게 명하여 대간을 국문하게 하니,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가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를 보내어 신(臣) 등에게 이르기를, ‘판문하(判門下) 이성계(李成桂)가 공(功)을 믿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다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보좌역(補佐役)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숭인·이종학·조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조금 후에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우간의(右諫議) 이내(李來)·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사헌 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와 장령(掌令) 김묘(金畝)·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이신(李申)과 이숭인·이종학을 먼저 먼 지방에 귀양보냈다. 형률(刑律)을 다스리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진양 등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진양 등은 몽주의 사주(使嗾)를 받았을 뿐이니, 어찌 함부로 형벌을 쓰겠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호되게 곤장을 쳐야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미 이들을 용서했는데 어찌 곤장을 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진양 등이 이로 말미암아 형벌을 면하게 되었다.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먼저 이달 12일에 공양왕(恭讓王)이 장차 태조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001) 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기로(閑良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와 강비(康妃)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는 시조(始祖)가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권신(權臣)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자기의 총행(寵幸)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요망스런 중[妖僧]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후사(後嗣)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해 있은 지가 15년이 되었으니,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는 이미 폐(廢)해졌던 것입니다. 우(禑)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公)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이색(李穡)·조민수(曹敏修) 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두 번이나 폐(廢)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왕위(王位)로써 공(公)에게 명한 시기이었는데도, 공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위태로운 사직(社稷)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 그 무리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은 미혹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매,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에 도망해 들어가서, ‘본국(本國)002) 이 이미 배반했다.’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장차 본국(本國)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과연 행해졌다면 사직(社稷)은 장차 폐허(廢墟)에 이르고 백성도 또한 멸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疏)를 번갈아 올려 계청(啓請)하기를, ‘이색·우현보 등이 사직(社稷)에 죄를 얻고 백성에게 화(禍)를 끼쳤으므로써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하여 글이 수십 번 올라갔는데, 정창군(定昌君)003) 은 인아(姻婭)의 관계라는 이유로써 법을 굽혀 두호(斗護)하여 언관(言官)을 곤장을 쳐서 쫓으니, 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면서 당(黨)을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變)에 응하기를 도모하여, 화란(禍亂)의 일어남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는데, 정창군(定昌君)은 사직(社稷)과 백성을 위하는 큰 계책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사의 은혜를 베풀어 인망(人望)을 수습하고자 하여, 다만 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용서해 주고 곡진히 더 탁용(擢用)하였으니, 《서경(書經)》의 이른바, ‘달아난 죄수를 수용하는 괴수가 되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듯, 짐승이 숲에 모이듯 한다.’는 것입니다. 도와서 왕을 세울 계책을 결정한 것으로써 말한다면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으며,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것으로써 말한다면 덕택이 백성에게 가해졌는데도, 이에 좌우에 있는 부인(婦人)과 환자(宦者)의 참소를 지나치게 듣고서 반드시 죽을 곳에 두려고 하고, 사람들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죄를 주니, 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들이 뜻대로 되고, 충성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기(氣)가 꺾여져서,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그 수족(手足)을 둘 데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려서, 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요얼(妖孽)004) 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定昌君)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제(私第)로 갔습니다. 다만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홍영통·안종원·배극렴·조준·이화·윤호·정도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문하부(門下府)에 교지를 내려 홍영통(洪永通)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안종원(安宗源)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배극렴(裵克廉)을 익대 보조 공신 문하 좌시중(翊戴補祚功臣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으로, 조준(趙浚)을 좌명 개국 공신 문하 우시중(佐命開國功臣門下右侍中) 평양백(平壤伯)으로, 서제(庶弟) 이화(李和)를 좌명 개국 공신(佐命開國功臣)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도절제사(都節制使) 의안백(義安伯)으로, 윤호(尹虎)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김사형(金士衡)을 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판팔위사(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判八衛事) 상락군(上洛君)으로, 정도전(鄭道傳)을 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 봉화군(奉化君)으로, 정희계(鄭熙啓)를 좌명 공신(佐命功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팔위 상장군(八衛上將軍) 계림군(雞林君)으로, 이지란(李之蘭)을 보조 공신(補祚功臣) 참찬문하부사 의흥친군위 절제사(節制使) 청해군(靑海君)으로, 남은(南誾)을 좌명 공신 판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佐命功臣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의령군(宜寧君)으로, 김인찬(金仁贊)을 보조 공신 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中樞院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익화군(益和君)으로, 장사길(張思吉)을 보조 공신 지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知中樞院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화녕군(和寧君)으로, 정총(鄭摠)을 보조 공신 첨서중추원사(補祚功臣僉書中樞院事) 서원군(西原君)으로, 조기(趙琦)를 보조 공신동지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同知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은천군(銀川君)으로, 조인옥(趙仁沃)을 보조 공신 중추원 부사(補祚功臣中樞院副使) 용성군(龍城君)으로, 황희석(黃希碩)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남재(南在)를 좌명 공신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의성군(宜城君)으로 삼았다.
공신과 그 부인들이 각각 임금과 중궁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이 임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여러 공신의 부인들도 또한 중궁(中宮)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서자 이방석을 왕세자로 정하다
어린 서자(庶子) 이방석(李芳碩)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 처음에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를 존중하여 뜻이 이방번(李芳蕃)에 있었으나, 이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사적으로 서로 이르기를,
"만약에 반드시 강씨(康氏)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 아들이 조금 낫겠다."
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라고 물으니, 장자(長子)로써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써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결정하여 세자로 세웠다.
개국 공신의 위차를 정하다
교지(敎旨)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위차(位次)를 정하게 하였다.
"고려 왕조의 임금의 자리는, 공민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요망한 중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사이를 틈타 도둑질해 차지하여, 주색(酒色)에 빠져 무도(無道)한 짓을 하고, 마음대로 살육(殺戮)을 행하였으며, 무진년에 함부로 군대를 일으켜 장차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려고 하는데, 여러 장수들이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그제야 그 죄를 스스로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전했으니, 왕씨(王氏)가 이미 끊어진 것이 16년이 되었는데, 그래도 오히려 종친(宗親) 중에서 택하여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다. 요(瑤)는 혼미(昏迷)하여 법도에 어긋나서, 먼 앞날을 헤아리는 대체(大體)를 잊고 눈앞의 작은 이익만 보고, 그 사친(私親)이 있는 것만 알고 공신(功臣)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전제(田制)는 그 경계(經界)의 바른 것을 싫어하고, 공름(公廩)은 자식과 사위의 봉양(奉養)에 다 없어졌으며, 무릇 정인(正人)·군자(君子)에게는 다만 시기하고 꺼릴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죄를 가하고자 하며, 참소하고 아첨하여 면전(面前)에서 알랑대는 자에게는 다만 친근히 할 뿐만 아니라 빠짐없이 임용하여, 상벌(賞罰)은 규칙이 없어서 국법(國法)을 무너뜨리고, 용도(用度)는 절제(節制)가 없어서 백성의 재물을 해치게 하였으며, 다만 인아(姻婭)와 부시(婦寺)078) 의 말만 듣고, 곧은 말을 하는 선비는 모두 내쫓았으니, 백성이 원망하고 신(神)이 노하여, 요얼(妖孼)이 자주 일어나고, 화란(禍亂)의 기미가 날로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사길(張思吉)·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인옥(趙仁沃)·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남재(南在)·예조 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대장군(大將軍) 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 등은 천명(天命)의 거취(去就)와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알고, 백성과 사직(社稷)의 대의(大義)로써 의심을 판단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과궁(寡躬)을 추대하여 대업(大業)을 함께 이루어 그 공이 매우 컸으니,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작게 되어도 잊기가 어렵도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공조 전서(工曹典書) 이민도(李敏道)·대장군(大將軍) 박포(朴苞)·예조 전서(禮曹典書) 조영규(趙英珪)·지중추원사 조반(趙胖)·평양 윤(平壤尹) 조온(趙溫)·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조기(趙琦)·좌부승지(左副承旨) 홍길민(洪吉旼)·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유경(劉敬)·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정용수(鄭龍壽)·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장담(張湛) 등은 모의(謀議)에 참여하여 과궁을 추대하였으니, 그 공이 또한 크며, 도승지 안경공(安景恭)·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김균(金稛)·전 한양 윤(漢陽尹) 유원정(柳爰廷)·전 지신사(知申事) 이직(李稷)·좌승지 이근(李懃)·호조 전서(戶曹典書) 오사충(吳思忠)·형조 전서(刑曹典書) 이서(李舒)·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 조영무(趙英茂)·전 예조 판서 이백유(李伯由)·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이부(李敷)와 상장군(上將軍) 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과 사헌 중승(司憲中丞) 심효생(沈孝生)·전의감(典醫監) 고여(高呂)·교서감(校書監) 장지화(張至和)·개성 소윤(開城少尹) 함부림(咸傅霖) 등은 고려 왕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과궁에게 뜻을 두고 오늘날까지 이르도록 지조를 굳게 지키고 변하지 않았으니, 그 공이 칭찬할 만하다! 위에 말한 사람들에게는 차례대로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그 포상(褒賞)의 전례(典禮)는 유사(有司)에서 거행할 것이다. 중추원 사(中樞院使) 김인찬(金仁贊)은 불행히 죽었지마는, 일찍이 극렴 등이 의심을 판단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과궁을 추대할 때에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도왔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아울러 극렴의 예(例)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배극렴 등이 한양의 궁궐과 성곽이 완성된 후 신도로 이전하자고 청하니 윤허하다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이 온천에 나아가서 아뢰었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漢陽)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하여서, 호종(扈從)하는 사람이 민가(民家)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기후는 점차 추워 오고 백성들은 돌아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配置)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공신 도감에서 개국 공신의 포상 규정을 상언하니 윤허하다
공신 도감(功臣都監)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과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16인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소재(所在)를 환하게 알고서 의논과 계책을 결정하여 전하를 추대하여 왕업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비록 전하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른 것이겠지마는, 역시 일세(一世)에 뛰어난 신하들의 충성을 다하고 대의에 힘써서 천명을 도와 나라를 세운 것[佐命開國]이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敎書)에 이른 바 그 공이 매우 커서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작게 되도록 길이 공을 잊기 어렵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일등공신(一等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전각(殿閣)을 세워서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고, 작위(爵位)를 봉하고 토지를 주며, 그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3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封爵)을 증직(贈職)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3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蔭職)099) 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질(甥姪)과 사위에게 2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전지 몇 결(結), 노비 몇 구, 구사(丘史) 7명, 진배파령(眞拜把領) 10명을 주고 처음 입사(入仕)함을 허락하고, 적장(嫡長)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100) 내에 일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赦免)이 영구한 세대(世代)에까지 미치게 할 것입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 등 11인은 위의 항목이 공신들이 천명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 즈음에 모의에 참예하여 전하를 추대했으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에 이른 바 그 공이 또한 크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이등 공신(二等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전각을 세워서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며, 그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2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을 증직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2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1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전지 몇 결, 노비 몇 구, 구사 5명, 진배파령 8명을 주고, 처음 입사함을 허락하고, 적장(嫡長)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 내에 개국 이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이 영구한 세대에까지 미치게 할 것입니다.
도승지 안경공(安景恭) 등 16인은 고려 왕조의 정치가 문란한 때에 전하에게 뜻을 두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조를 굳게 지켜 변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에 이른 바 그 공이 칭찬할 만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삼등 공신(三等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전각을 세워서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며,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한 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을 증직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1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를 녹용(錄用)하고, 전지 몇 결, 노비 몇 구, 구사 3명, 진배파령 6명을 주고, 처음 입사함을 허락하고, 적장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 내에 개국 삼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이 영구한 세대에까지 미치게 할 것입니다.
중추원 사(中樞院使) 김인찬(金仁贊)은 지금 그 몸은 죽었지마는, 배극렴 등이 전하를 추대할 때에 마음을 같이하여 추대하였으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에 이른 바 그 공이 매우 크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일등 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그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한결같이 배극렴의 예와 같이 하소서."
임금이 이를 윤허(允許)하고, 또 명하여 일등 공신 배극렴과 조준에게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 전지 2백 20결, 노비 30구를 내려 주고,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에게는 전지 2백 결, 노비 25구를 내려 주고, 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정탁(鄭擢)에게는 전지 1백 70결, 노비 20구를 내려 주고, 정총(鄭摠)·오몽을(吳蒙乙)·김인찬(金仁贊)에게는 전지 1백 50결, 노비 15구를 내려 주고, 이등 공신에게는 전지 1백 결, 노비 10구를 내려 주고, 삼등 공신에게는 전지 70결, 노비 7구를 내려 주었다.
개국 공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공신 녹권 등을 내리다
편전(便殿)103) 에서 개국 공신(開國功臣)들에게 연회(宴會)를 베풀고 각기 기공 교서(紀功敎書) 1통(通)과 녹권(錄券)·금대(金帶)·은대(銀帶)·옷감의 겉감과 안찝을 차등 있게 내려 주고, 시중(侍中) 배극렴·조준에게는 고정립(高頂笠)·옥정자(玉頂子)·옥영구(玉纓具)를 특별히 내려 주었다. 이날에 부마(駙馬)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성(姓)을 내려 주어 종성(宗姓)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학교·수령·의창·향리 등 22개 조목에 대한 도평의사사의 상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배극렴·조준 등이 22조목을 상언(上言)하였다.
"1. 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이고, 농상(農桑)은 의식(衣食)의 근본이니, 학교를 일으켜서 인재(人才)를 양성하고, 농상을 권장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할 것이며,
1. 수령(守令)은 전야(田野)가 황폐되고 개간되는 것과, 호구(戶口)가 증가되고 감손되는 것 등의 일로써 출척(黜陟)할 것이며,
1. 신구(新舊) 수령(守令)이 교대할 즈음에 일이 많이 해이(解弛)해지니, 지금부터는 서로 해유(解由)를 주고받은 후에 임지(任地)를 떠나게 할 것이며,
1. 봉명 사인(奉命使人)125) 과 군관(軍官)·민관(民官)은 관(官)에서 미곡을 급여하고 말을 주는 것이 양부(兩府)로부터 이하의 관원에까지 모두 정해진 수효가 있으니, 이로써 일정한 법으로 삼게 할 것이며,
1. 각도에서 경의(經義)에 밝고 행실을 닦아서 도덕을 겸비(兼備)하여 사범(師範)이 될 만한 사람과, 식견이 시무(時務)에 통달하고 재주가 경제(經濟)126) 에 합하여 사공(事功)을 세울 만한 사람과, 문장에 익고 필찰(筆札)을 전공하여 문한(文翰)의 임무를 담당할 만한 사람과, 형률과 산수(算數)에 정통하고 행정(行政)에 통달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는 직책을 맡길 만한 사람과, 모계(謀計)는 도략(韜略)127) 에 깊고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가서 장수가 될 만한 사람과, 활쏘기와 말타기에 익숙하고 봉술(棒術)과 석척(石擲)에 능하여 군무(軍務)를 담당할 만한 사람과, 천문·지리·복서(卜筮)·의약(醫藥) 등 혹 한가지라도 기예(技藝)를 전공한 사람을 자세하게 방문하고 재촉하여 조정에 보내어서, 발탁 등용하는 데 대비하게 하고, 서인(庶人) 가운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고 농사에 힘쓰는 사람에게는 조세(租稅)의 반을 감면하여 주어 풍속을 권장할 것이며,
1. 민정(民丁)은 16세로부터 60세에 이르기까지 역(役)을 맡게 하는데, 10정(丁) 이상이면 대호(大戶)가 되고 5정 이상이면 중호(中戶)가 되고, 4정 이하이면 소호(小戶)가 되게 하여 정(丁)을 계산하여 백성을 등록시키고, 만약 요역(徭役)이 있으면, 대호(大戶)는 1명을 내고 중호는 둘을 합하여 1명을 내고 소호는 셋을 합하여 1명을 내어 그 역을 고르게 할 것이며, 만약 유망(流亡)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이유를 묻고 더욱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을 가하여 완취(完聚)128) 하게 할 것이며,
1. 의창(義倉)의 설치는 본래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기 위한 것이니, 매양 농사철을 당하여 먼저 곤궁한 백성들에게 양식과 종자를 주는 때, 반드시 두량(斗量)으로 하고 추수 후에는 다만 본 수량만 바치게 하고, 그 출납하는 수량은 해마다 마지막 달에 삼사(三司)에 보고하게 하고, 그 수령(守令)으로서 두량(斗量)으로 행하지 아니하거나, 부유(富裕)한 사람에게도 아울러 주는 자는 죄를 논단하게 할 것이며,
1. 여러 주(州)의 향리(鄕吏) 가운데 과거에 오르거나 공을 세운 사람 외에, 본조(本朝)의 통정(通政)129) 이하의 향리와 고려 왕조의 봉익(奉翊)130) 이하의 향리는 모두 본역에 돌아가게 할 것이며,
1. 수령은 때때로 민전(民田)을 답험(踏驗)하고 가을에 가서 손실(損實)을 자세히 갖추어 써서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적당히 헤아려 조세를 감면하게 할 것이며,
1. 각관·역(館驛)마다 마필(馬匹)의 상·중·하 3등의 수효를 관(館)의 벽(壁)에 써서 붙여 두고, 봉명(奉命)을 받고 사신(使臣)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공역서(供驛署)의 마부(馬符)를 상고하여 험증(驗證)한 뒤에 체송(遞送)131) 을 하게 할 것이나, 도관찰사와 도절제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봉명을 받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주지 못하게 할 것이며,
1. 주·부·군·현에서는 죄수의 정상을 도관찰사에게 진술 보고하여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하고, 사형죄 이상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여 임금에게 계문(啓聞)하여 명령을 받아 결정하게 할 것이며,
1. 문선왕(文宣王)132) 의 석전제(釋奠祭)와 여러 주(州)의 성황(城隍)의 제사는 관찰사와 수령이 제물을 풍성히 하고 깨끗하게 하여 때에 따라 거행하게 할 것이며, 공경(公卿)으로부터 하사(下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묘(家廟)를 세워서 선대(先代)를 제사하게 하고, 서인(庶人)133) 은 그 정침(正寢)134) 에서 제사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 부정한 제사[淫祀]는 일절 모두 금단(禁斷)할 것이며,
1. 봉명 사인(奉命使人) 외에 관·역(館驛)을 빌려 유숙하는 사람에게는 관(官)에서 미곡을 주지 못하게 할 것이며, 봉명 사인과 수령이 연음(宴飮)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인하여 때 아닌 사냥을 금단(禁斷)하게 할 것이며,
1. 무릇 주상자(主喪者)는 부모가 빈소(殯所)에 있을 때에는 조석으로 울며 제사하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며,
1. 각도(各道)와 각주(各州)에서는 그 노정(路程)을 헤아려 원관(院館)135) 을 짓거나 수리하여 나그네에게 편리하게 할 것이며,
1. 재인(才人)136) 과 화척(禾尺)137) 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농업을 일삼지 않으므로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여 상시 모여서 도적질하고 소와 말을 도살하게 되니, 그들이 있는 주군(州郡)에서는 그 사람들을 호적에 올려 토지에 안착(安着)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죄주게 할 것이며,
1. 외방(外方)의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집에서는 양민(良民)을 슬그머니 차지하여 자기의 사역꾼으로 삼으니, 청하옵건대, 찾아내어 억지로라도 등록시켜 부역에 이바지하게 할 것이며,
1. 무릇 중이 되는 사람이 양반(兩班)의 자제이면 닷새 베[五升布] 1백 필을, 서인이면 1백 50필을, 천인이면 2백 필을 바치게 하여, 소재(所在)한 관사(官司)에서 이로써 관에 들어온 베의 숫자를 계산하여 그제야 도첩(度牒)138) 을 주어 출가(出家)하게 하고, 제 마음대로 출가하는 사람은 엄격히 다스리게 할 것이며,
1. 공사(公私)의 전물(錢物) 가운데 자모전(子母錢)139) 은 이식(利息)을 정지하게 하도록 이미 일정한 제도가 있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이자 중에다 이자를 붙이니 매우 도리에 어긋납니다. 지금부터는 연월(年月)이 비록 많더라도 1전의 본전에 1전의 이자[一本一利]를 더 받지 못하게 할 것이며,
1. 중들이 중앙과 지방의 대소 관리들과 결당(結黨)하여 혹은 사사(寺社)140) 를 건축하기도 하고, 혹은 불서(佛書)를 인쇄하기도 하며, 심지어 관사(官司)에까지 물자를 청구하여 백성들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일절 모두 금단(禁斷)할 것이며,
1. 바다와 육지에서 싸울 때는 쓰는 무기를 수리하고 점검하여 뜻밖의 변고에 대비(對備)하게 할 것이며,
1. 시위군(侍衛軍)과 기선군(騎船軍)은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나누어 윤번(輪番)으로 할 것입니다."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배극렴 등이 여러 왕자들에게 규정된 과전 외의 전지를 더 주도록 청하다
좌시중(左侍中) 배극렴·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이 아뢰었다.
"왕자 제군(王子諸君)들은 의복·거마(車馬)·추종(騶從)142) 을 갖추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며, 용도(用度)를 넉넉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비옵건대, 본과(本科) 외에 전지(田地)를 더 내려 주소서."
임금이 조용히 잠저(潛邸)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는, 인하여 말하였다.
"본과(本科) 1백여 결(結)만 가지고도 또한 배고프고 추위에 떨게 되지는 않을 것인데, 만약 또 더 준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내가 자기 아들에게 사정을 쓴다고 할 것이다. 더군다나 경기(京畿) 지방의 전지가 한정이 있으니, 어찌 함부로 줄 수가 있겠는가! 경 등이 만약 더 주고자 한다면, 공신(功臣)들에게 먼저 더 주고 그 예로써 왕자들에게 미치게 하면 옳겠지마는, 단지 왕자만으로써 이를 말한다면 옳지 않다."
남은이 아뢰었다.
"여러 공신들은 과전(科田) 외에 이미 사전(賜田)143) 을 받았으니, 왕자들에게 더 주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임금이 남은에게 눈짓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공신에게 사전(賜田)했으니 또한 여러 아들에게도 사전(賜田)하란 말인가?"
조금 후에 임금이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옛날에 신하가 되었을 적에 또한 사전(賜田)을 받았는데, 모두 돌이 많고 메말라서 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지금 공신의 사전(賜田)은 마땅히 비옥한 땅을 골라서 주어야 할 것이다."
개국 공신이 여러 왕자들과 왕륜동에서 회맹한 내용
개국 공신(開國功臣)들이 왕세자와 여러 왕자들과 회동(會同)하여 왕륜동(王輪洞)에서 맹세하였다. 그 〈맹약(盟約)을〉 기록한 문서에 이러하였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은 감히 황천 후토(皇天后土)와 송악(松嶽)·성황(城隍) 등 모든 신령에게 고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대명(大命)을 받자왔으므로, 신 등이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큰 왕업을 이루었습니다. 이미 일을 같이 했으므로 함께 한 몸이 되었으니,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처음은 있지만 종말은 있기 드물다.’고 하여, 옛날 사람이 경계한 바 있습니다. 무릇 우리들 일을 같이한 사람들은 각기 마땅히 임금을 성심으로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를 다투어 서로 해치지 말며, 이익을 다투어 서로 꺼리지 말며, 다른 사람의 이간하는 말로 생각을 움직이지 말며, 말과 얼굴빛의 조그만 실수로 마음에 의심을 품지 말며, 등을 돌려서는 미워하면서도 얼굴을 맞대해서는 기뻐하지 말며, 겉으로는 서로 화합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멀리 하지 말며, 과실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고, 의심이 있으면 물어 보고, 질병이 있으면 서로 부조(扶助)하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구원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자손에게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킬 것이니, 혹시 변함이 있으면 신(神)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이조에 명하여 작고한 배극렴의 부모에게 추증토록 하다
이조(吏曹)에 명령하여 공신 배극렴의 고비(考妣)(돌아간 아버지와 어머니.) 를 추증(追贈)하게 하였다.
상의중추원사 황희석을 개국 공신 2등의 예에 준하여 포상하라는 교지
교지를 내렸다.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황희석(黃希碩)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상시 휘하에 있으면서 방어한 공로가 있었다. 또 고려 왕조의 정몽주 등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던 즈음에, 내가 그 때 말에서 떨어져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간사한 무리들의 화가 거의 장차 나에게 미치려 하였으나, 곧 병졸을 훈련하여 나를 호위하고 그 간사한 모의를 저지시켰으니, 그 공이 크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 등이 나를 임금으로 추대할 때 마침 아버지 상사(喪事)를 당하여 비록 모의에 참예하지는 못하였지마는, 만약 희석(希碩)이 나를 방어한 힘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날이 있겠는가? 요사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예(例)로 칭호를 내리는 것은 내가 공을 보답하는 뜻에 있어 대단히 흡족치 못하니, 개국 이등 공신 윤호(尹虎)의 예로 칭호를 내릴 것이다."
문하 좌시중 배극렴이 병으로 사직하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이 병으로 사직하였다.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201) 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202) 이니, 위위 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203) ·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임금에게 마음을 돌려 조준 등과 더불어 서로 모의하여 임금을 추대하고는, 마침내 수상(首相)이 되었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으며,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이에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功)으로 삼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아들이 없었다.
친히 배극렴의 빈소에 가서, 장례를 주관하던 안순을 불러 조문하다
임금이 친히 배극렴(裵克廉)의 빈소(殯所)에 나아가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임금이 슬퍼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고 주상(主喪)하는 사람을 불러서 조문(弔問)하였다. 배극렴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누이의 외손(外孫)인 안순(安純)이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다.
회군 공신을 책록토록 교지를 내리다
교지를 내리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위주(僞主) 신우(辛禑)가 완흉(頑凶)하고 광패(狂悖)하여, 그 신하 최영(崔瑩)과 더불어 요양(遼陽)을 범하기를 꾀하고 여러 장수들을 독촉하여 장차 압록강을 건너려고 했는데, 그때 내가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여러 장수들을 타일러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하게 되니 의(義)에도 불순(不順)한데, 하물며 천조(天朝)에 득죄(得罪)하게 되면 동방의 백성들은 거의 종류도 없을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실로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의 구별을 밝게 이해하였다. 그 당시에 군사가 만약 압록강을 건넜더라면 동방의 백성들이 어찌 편안하게 살아서 지금까지 이르겠는가? 다만 여러 장수들이 과인(寡人)의 말을 듣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동방을 편안하게 했으니, 그 까닭으로 과인(寡人)이 오늘날이 있게 되었다. 만약 그 공을 논한다면 마땅히 공적을 표창해야 될 것이다.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만수(柳蔓殊)·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최영지(崔永沚)·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 등 13인은 1등 공신이 될 만하고, 전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경보(慶補)·참찬 문하부사 경의(慶儀)·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윤사덕(尹思德)·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정요(鄭曜)·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박영충(朴永忠) 등 15인도 또한 대의(大義)를 알고 참모(參謀)하여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이등 공신이 될 만하며, 전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최단(崔鄲)·전 계림 부윤(鷄林府尹) 왕빈(王賓)·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김천장(金天莊)·전 개성 윤(開城尹) 남성리(南成理)·전 한양 윤(漢陽尹) 이지(李至)·공조 전서(工曹典書) 장자충(張子忠)·첨절제사(僉節制使) 최윤수(崔允壽)·전 진주 목사(晉州牧使) 황순상(黃順常) 등 10인도 또한 이해(利害)를 알아서 순리(順理)에 따르고 도리에 어김이 없었으니, 삼등 공신이 될 만하며,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남재(南在)·병조 전서(兵曹典書) 윤소종(尹紹宗) 등은 비록 행군(行軍)하는 데는 참여하지 않았지마는, 서울에 돌아와서 사직(社禝)의 대계(大計)를 헤아려 의논할 즈음에는 예전 일을 인용하여 계책을 도왔으니, 삼등 공신 최단(崔鄲)의 예(例)가 될 만하며, 죽은 시중(侍中) 조민수(曹敏修)·배극렴(裵克廉),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 등은 일등 공신 심덕부(沈德符)의 예(例)가 될 만하며, 죽은 검교 시중(檢校侍中) 변안열(邊安烈)과 판삼사사(判三司事) 왕안덕(王安德)·지용기(池湧奇),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璧)·완산군(完山君) 이원계(李元桂)·문하 평리(門下評理) 정지(鄭地)·충주 절제사(忠州節制使) 최공철(崔公哲) 등 9인은 이등 공신 경보(慶補)의 예(例)가 될 만하며, 죽은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안경(安慶)·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상(金賞)·개성 윤(開城尹) 이백(李伯) 등은 삼등 공신 최단(崔鄲)의 예(例)가 될 만하니,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
정도전이 몽금척·수보록·납씨곡·궁수분곡·정동방곡 등의 악장을 지어 바치다
문하 시랑찬성사 정도전이 전문(箋文)을 올리었다.
"신(臣)이 보건대, 역대(歷代) 이래로 천명(天命)을 받은 인군은 무릇 공덕(功德)이 있으면 반드시 악장(樂章)에 나타내어 당시(當時)를 빛나게 하고, 장래(將來)에 전하여 보이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한 시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시대의 제작(制作)이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뛰어난 무용(武勇)은 그 계략을 도우셨고, 용기(勇氣)와 지혜는 하늘에서 주신 것이므로, 깊고 후한 인덕(仁德)이 민심(民心)에 결합(結合)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면, 천명(天命)을 받은 것은 반드시 인민들의 기대에서 나왔을 것이니 아침이 되기 전에 대의(大義)를 바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상서로운 봉(鳳)이 뭇 새들보다, 신령스런 지초(芝草)가 보통 풀보다 그 남[生]이 반드시 다르게 되니, 성인(聖人)이 일어날 적에 영이(靈異)한 상서(祥瑞)가 먼저 감응(感應)하게 되는 것은 또한 이치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에 ‘짐(朕)의 꿈이 짐(朕)의 점[卜]과 합하여 좋은 상서(祥瑞)에 합치되었다.’고 한 말과, 광무제(光武帝)의 적복부(赤伏符)049) 와 같은 종류가 전책(典冊)에 기재된 것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국가를 정제(整齊)하십시오.’라 한 것과, 또 어떤 사람이 이상한 글을 얻어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숨기고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마십시오.’라고 한 것이 그 후 10여 년 만에 그 말이 과연 맞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하늘이 오늘날의 일을 미리 알려 준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여러 사람의 말을 용납해 받아들여서, 무릇 여항(閭巷) 사이의 미세(微細)한 백성들로서 그 안정된 처소를 얻지 못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이를 알게 되고, 이를 알게 되면 반드시 후하게 구휼(救恤)하여, 오히려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까 염려했으니, 언로(言路)를 열어 놓음이 넓었으며, 공신(功臣)을 대우하되 지성으로써 하여, 신서(信書)를 내려 주시고 금석(金石)에 새겼으니, 공신을 보전하심도 지극하였습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정치가 퇴폐(頹廢)하고 법도가 무너져서, 토지 제도[經界]가 바르지 못하여 백성이 그 해를 받게 되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않아서 관원이 그 직책을 잃게 되었는데, 전하께서 일체 모두 바로잡아 정하였으므로, 천도(天道)로써는 저와 같았고 인도(人道)로써는 이와 같았으니, 공을 비교하고 덕을 헤아려 보매 더불어 비할 데가 없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성시(聲詩)로써 전파하고 현가(絃歌)에 올려서 한없는 세상에 전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게 해야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민(不敏)하나 성대(盛代)를 만나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말석(末席)에 참여하고, 다행히 문필(文筆)로써 태사(太史)의 직책을 겸무하게 되었으니, 감격하여 뛰고 싶은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삼가 천명(天命)을 받은 상서(祥瑞)와 정치를 보살핀 아름다운 점을 기록하여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이를 써서 전문(箋文)에 따라 바치옵니다.
1. 몽금척(夢金尺).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받들고 하늘에서 왔는데, ‘경 시중(慶侍中)050) 은 깨끗한 덕행은 있으나 또한 늙었으며, 최 삼사(崔三司)051) 는 강직한 명성은 있으나 고지식하다.’ 하고는, ‘전하(殿下)는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비했으며 덕망도 있고 식견도 있으니, 백성의 희망이 붙게 되었다.’ 하면서, 이에 금자를 주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살피심이 심히 밝으셔서, 길몽(吉夢)이 금자에 맞으셨습니다. 깨끗한 사람은 늙었고 강직한 사람은 고지식하니,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이것이 적합하였습니다. 상제(上帝)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서 국가를 정제(整齊)하게 했으니, 꼭 맞은 그 증험은 천명(天命)을 받은 상서(祥瑞)입니다. 아들에게 전하여 손자에게 미치니, 천억년(千億年)까지 길이 미치겠습니다.
1. 수보록(受寶籙).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智異山) 석벽(石壁)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뒤에 임신년052) 에 이르러, 그말이 그제야 맞게 되었으므로, 수보록(受寶籙)을 지었습니다. 저 높은 산에는 돌이 산과 가지런했는데, 여기서 이를 얻었으니 실로 이상한 글이었습니다. 용감한 목자(木子)053) 가 기회를 타서 일어났는데, 누가 그를 보좌하겠는가? 주초(走肖)054) 가 그 덕망 있는 사람이며, 비의(非衣)055) 군자(君子)는 금성(金城)에서 왔으며, 삼전 삼읍(三奠三邑)056) 이 도와서 이루었으며, 신도(神都)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王位)를 8백 년이나 전한다.’는 것을 우리 임금께서 받았으니, 보록(寶籙)이라 하였습니다.
1. 전하께서 처음 왕위에 오르시매, 상법(常法)을 만들고 기강(紀綱)을 베풀어 백성들과 더불어 혁신(革新)하게 되니 칭송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 큰 것을 들어 말한다면, 언로(言路)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예악(禮樂)을 정하였습니다. 궁궐은 엄하여 아홉 겹이나 깊었으며, 만기(萬機)057) 는 하루 동안에도 매우 번잡하온데, 군왕께서는 민정(民情)을 통하게끔 하여, 크게 언로(言路)를 열어 사방의 시청(視聽)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언로(言路)를 열어 놓은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우리 임금의 덕은 순제(舜帝)와 같습니다. 성인(聖人)이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많은 선비가 다투어 일어나서 구름처럼 따랐습니다. 계책을 부리고 힘을 써서 그 공을 함께 이루었으니, 산하(山河)로써 맹세하여 시종(始終)을 보전했습니다. 공신(功臣)을 보전한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우리 임금의 덕은 무궁한 세대(世代)에까지 전하겠습니다. 토지제도가 무너졌는데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으니, 강한 사람은 합치고 약한 사람은 줄어들어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를 바로잡은 지 겨우 1주년에 국가의 창고는 꽉차고 백성은 휴식하게 되었습니다. 토지 제도를 바룬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임금께서 즐거워하여 천 년까지 누리겠습니다. 정치하는 요령은 예악(禮樂)에 있으니 가까이는 규문(閨門)에서부터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를 정하여 법칙을 전하였으니, 질서 정연하게 차례대로 되고 화락(和樂)으로써 기쁘게 되었습니다. 예악(禮樂)을 정한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천지(天地)에 필적(匹敵)하겠습니다."
임금이 정도전(鄭道傳)에게 채색 비단을 내려 주고는,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이를 익히게 하였다. 도전이 또 그 무공(武功)을 서술하여 악사(樂詞)를 지어 바치었다.
"1. 납씨곡(納氏曲). 납씨(納氏)058) 가 세력이 강함을 믿고 동북방(東北方)에 쳐들어왔습니다. 방종하고 오만하여 힘으로써 자랑하니, 그 기세의 강함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북을 치매 용기가 배나 나는데, 앞장서서 적의 심장부에 부딪쳤습니다. 한 번 쏘아서 편비(褊裨)를 죽였으며, 두 번 쏘아서 괴수에게 미쳤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미처 구원하지 못하는데 적군을 추격하여 성화(星火)처럼 달려갔습니다. 바람소리는 진실로 두렵지만, 학(鶴)의 울음도 또한 의심할 만했습니다. 피로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니 동북방이 영구히 걱정이 없었습니다. 공을 이룸이 이번 거사(擧事)에 있었으니 이를 천만년(千萬年)에 전하겠습니다. 【위는 납씨(納氏)를 쫓은 공을 말한 것임.】
1. 궁수분곡(窮獸奔曲). 곤궁한 짐승이 위험한 곳으로 달아나는데, 우리 군사가 이를 덮치니, 좌우에서 활짝 갈라졌습니다. 혹은 죽이고 혹은 잡았으며, 혹은 달아나고 혹은 숨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부스러져 가루가 되고, 산 사람은 넋을 빼앗겼습니다. 하루 아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난을 평정하여 청명(淸明)하여졌습니다. 개가(凱歌)를 부르면서 돌아왔으니, 동방의 백성이 편안하여졌습니다. 【위는 왜구(倭寇)를 물리친 공을 말한 것임.】
1. 정동방곡(靖東方曲). 아아! 동방은 바다 모퉁이에 막혔는데, 저 교동(狡童)059) 이 임금의 자리를 도적질했습니다. 미친 계획을 자행(恣行)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니 화(禍)가 극도에 달했는데, 평정할 사람은 누구인가? 하늘이 덕망 있는 사람을 도와 의기(義旗)를 돌이켜서, 죄 있는 자는 내쫓고 반역한 자는 죽였습니다. 황제가 이에 기뻐하여 은혜를 미치게 하여, 군사가 나라로써 우리에게 알게 하였습니다. 백성과 사직(社稷)이 돌아가는 데가 있으니 천만세(千萬世)까지 기한없이 전하겠습니다. 【위는 그 군사를 돌이킨 공을 말한 것임.】 "
동북면 함주에 환왕의 정릉비를 세우다
문하 시랑찬성사 성석린을 동북면(東北面) 함주(咸州)에 보내어 환왕(桓王)070) 의 정릉비(定陵碑)에 글을 써서 이를 세우게 하였다. 그 비문은 이러하였다.
"임금이 즉위(卽位)한 2년 봄 정월 신미일에 신(臣) 정총(鄭摠)에게 명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으니, 조종(祖宗)의 쌓은 덕을 힘입었다. 삼가 이미 사대(四代)를 추시(追諡)하여 모두 왕작(王爵)을 올렸으니, 그대는 내 선열고(先烈考)071) 의 정릉비(定陵碑)에 비명(碑銘)을 지어 영원한 세대(世代)에 밝게 보이게 하라.’ 하매, 신 총(摠)이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문사(文辭)의 변변치 못한 이유로써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맹씨(孟氏)072) 의 말을 살펴보건대, ‘5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일어나게 된다.’ 하였으니, 고려 왕조는 시조(始祖) 왕씨(王氏) 이후로 거의 5백 년이 되었습니다. 국운(國運)이 이미 쇠퇴(衰頹)해지자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끊어졌는데, 요망스런 중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성(姓)을 속여 왕위를 도적질하고는 주색(酒色)에 빠지고 포학하였습니다. 무진년에 그 재상(宰相) 최영(崔瑩)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움직여서 장차 천자의 국경을 범하려고 하였으니, 백성의 화(禍)가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대의(大義)에 따라 군사를 돌이켰으니, 우(禑)가 그제야 죄를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사양했습니다. 이듬해에 천자(天子)께서 이성(異姓)이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되었음을 책망하니, 전하(殿下)께서 시중(侍中)으로서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으므로, 여러 장상(將相)들과 서로 의논하여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당초 우(禑) 때로부터 정권이 권신(權臣)에게 있었으므로, 돈을 받고 벼슬을 팔며, 송사(訟事)로 인하여 뇌물을 받아 조정을 탁란(濁亂)시켰으며, 토지를 빼앗아 산야(山野)를 온통 싸고 있었으며, 기강(紀綱)이 크게 무너져서 해독이 날로 심하니,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탄식하며 밤낮으로 다스려진 세상을 생각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구폐(舊弊)를 고쳐 없애고 치도(治道)를 다시 새롭게 하여, 사전(私田)을 폐지하여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용관(冗官)073) 을 도태(淘汰)시켜 명기(名器)를 소중히 하고, 준량(俊良)을 등용시키고 완흉(頑兇)을 내쫓았으며, 무위(武威)를 떨쳐서 변방의 외구(外寇)를 물리치고, 인정(仁政)을 베풀어 백성의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기강(紀綱)을 정돈하고 예악(禮樂)을 수명(修明)하였으니,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습니다. 요(瑤)는 혼미(昏迷)한 자질로써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간사한 무리를 믿어 쓰고 충직(忠直)한 신하를 내쫓으며, 부녀와 환관(宦官)의 말을 듣고서 전제(田制)의 바른 것을 어지럽히고, 사친(私親)과 근신(近臣)을 임용하여 명기(名器)의 공정함을 문란시키며, 정령(政令)이 일정하지 않아서 국법(國法)을 무너뜨리고, 용도(用度)가 절차가 없어서 백성의 재물을 해롭게 하며, 여러 소인들의 차츰차츰 헐뜯는 참소를 믿고, 전하의 나라를 광복(匡復)시킨 공로는 잊고서 이에 그 재상(宰相)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늘 전하를 모함(謀陷)하였습니다. 몽주(夢周)는 그의 무리로서의 대간(臺諫)에 있는 사람을 몰래 사주(使嗾)하여, 공신(功臣)과 직언(直言)하는 사람에게 죄를 가하려고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으려는 글을 올려서, 장차 전하(殿下)에게 미치게 하려고 하여 화(禍)가 헤아리지 못할 단계에 있게 되니, 나라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6일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인이 천명(天命)이 있는 바를 알고 인심의 돌아가는 바를 살펴서, 대의(大義)로써 먼저 주창하니, 백관(百官)과 부로(父老)들이 의논하지 않고서도 의견이 서로 같게 되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니, 전하께서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사오나, 여러 사람의 뜻이 더욱 견고하므로 마지 못하여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저자[市]는 가게[肆]를 변동하지 않고,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하루아침에 청명(淸明)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즉시 지중추(知中樞) 신(臣) 조반(趙胖)을 보내어 이 사실을 황제에게 주문(奏聞)하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는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고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즐거움을 즐기게 되니, 곧 상제(上帝)의 명령이다.’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추사(中樞使) 신(臣) 조임(趙琳)이 잇따라 돌아왔는데, 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고치는가? 빨리 달려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신(臣)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명(國名)을 주청(奏請)하니, 조선(朝鮮)의 국호(國號)로 내려 주고, 또 말하기를,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의 위아래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이른바 5백 년의 시기에 응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신(臣)이 삼가 선원(璿源)074) 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全州)의 명망(名望)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075) 의 십대손(十代孫)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가서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을 낳고, 시중은 복야(僕射)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는 아간(阿干) 이광희(李光禧)를 낳고, 아간은 사도(司徒) 이입전(李立全)을 낳고, 사도는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긍휴는 이염순(李廉順)을 낳고, 염순은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승삭은 이충경(李充慶)을 낳고, 충경은 이경영(李景英)을 낳고, 경영은 이충민(李忠敏)을 낳고, 충민은 이화(李華)를 낳고, 화는 이진유(李珍有)를 낳고, 진유는 이궁진(李宮進)을 낳고, 궁진은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를 낳고, 대장군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璘)을 낳고, 집주는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가서 장군(將軍) 이양무(李陽茂)를 낳고, 장군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가서 지의주(知宜州)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았는데, 뒤에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남경 오천호소(南京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으니, 곧 우리 전하의 황고조(皇高祖)입니다. 지금 목왕(穆王)으로 봉해졌으며, 능(陵) 이름은 덕릉(德陵)이라 하고, 배위(配位) 이씨(李氏)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로서, 지금 효비(孝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안릉(安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증조(皇曾祖) 휘(諱) 이행리(李行里)는 천호(千戶)를 물려 봉[襲封]했는데, 지금 익왕(翼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지릉(智陵)이라 하고, 배위(配位)는 등주(登州) 최씨(崔氏)이니, 지금 정비(貞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숙릉(淑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조(皇祖) 증 찬성사(贈贊成事) 휘(諱) 춘(春)은 지금 도왕(度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의릉(義陵)이라 하고, 배위(配位)는 문주(文州) 박씨(朴氏)이니, 경비(敬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순릉(純陵)이라 하였습니다. 황고(皇考) 영록 대부 판장작감사 삭방도 만호 증 문하 시랑(榮祿大夫判將作監事朔方道萬戶贈門下侍郞) 휘(諱) 이자춘(李子春)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을 세워 만부(萬夫)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정(至正) 경자년(1360) 4월 갑술일에 병으로 삭방도(朔方道)에서 훙(薨)하니, 연세가 46세였습니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咸州)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했는데, 지금 환왕(桓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정릉(定陵)이라 하고, 비(妃) 최씨(崔氏)는 증 판문하 영흥백(贈判門下永興伯)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니, 의비(懿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화릉(和陵)이라 하였습니다.
대대로 훈공(勳功)과 은덕(恩德)을 쌓아서 비로소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으며, 선행(善行)이 쌓여지고 경사(慶事)가 모여져서, 근원이 깊으매 덕이 후세에 전하여 성철(聖哲)을 거듭 낳아서 큰 왕업(王業)을 세우게 했으니, 하늘이 덕이 있는 이를 돌보아 도와주심이 지극하였습니다. 딸은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壁)에게 시집갔습니다. 전하(殿下)의 배위(配位) 한씨(韓氏)는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고, 절비(節妃)라 증시(贈諡)하고 능 이름은 제릉(齊陵)이라 하였습니다. 아들 이방우(李芳雨)는 진안군(鎭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과(李芳果)는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의(李芳毅)는 익안군(益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간(李芳幹)은 회안군(懷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원(李芳遠)은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연(李芳衍)은 일찍 별세했는데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고, 딸 두 사람은 모두 어립니다. 계실(繼室)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아들 이방번(李芳蕃)은 무안군(撫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석(李芳碩)은 어리며, 딸은 경산 이씨(京山李氏) 제(濟)에게 시집갔는데, 흥안군(興安君)으로 봉해졌습니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복근(李福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영안군(永安君)은 증 문하 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에게 장가갔으며, 익안군(益安君)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석근(李石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회안군(懷安君)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맹종(李孟宗)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정안군(靖安君)은 예문관 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에게 장가 갔으며, 무안군(撫安君)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에게 장가갔습니다.
신이 가만히 보옵건대, 제왕(帝王)이 일어날 적에 조종(祖宗)의 적루(積累)076) 가 오래고 본지(本支)077) 의 번연(蕃衍)의 많은 것이 주(周)나라와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후직(后稷)078) 으로부터 수십세(數十世)를 지내어 문왕(文王)·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왕업(王業)을 일으켰는데, 인후(仁厚)한 후비(后妃)의 덕화에 자손이 또한 인후(仁厚)하고, 후비(后妃)가 질투하지 않으므로써 자손이 많아져서, 실로 창희(蒼姬) 8백 년의 역수(曆數)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지만, 또한 선대(先代)의 인후(仁厚)한 덕이 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는 사공(司空)으로부터 환왕(桓王)079) 에 이르기까지 적선(積善)을 오래 했는데,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영명(英明)한 자질과 신무(神武)의 지략(智略)으로써 멀리 전해 온 공렬(功烈)을 계승하고 큰 경사(慶事)를 빛나게 받아 억만대(億萬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개시하여, 금지(金枝)080) 의 퍼짐이 이미 무성하여졌으니, 진실로 주(周)나라와 같이 융성(隆盛)하겠습니다. 이것은 그 쌓인 것이 오래 된 까닭으로 나타나는 것이 크게 되고, 심은 것이 튼튼한 까닭으로 전하는 것이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아아! 성대한 일이로다. 신 총(摠)은 절하고 손을 모아 머리를 조아려 명사(銘辭)를 올리기를 ‘실령한 오얏나무[李氏]는 근본이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습니다. 사공(司空)으로부터 대대로 덕음(德音)이 무성하더니, 길이 그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환왕(桓王)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명주(明主)081) 를 낳으시어 문득 동방을 차지하였습니다. 역수(曆數)의 돌아가는 바이니 전쟁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혁신(革新)하여 덕을 밝게 선포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말하시기를, ‘불선(不善)한 내가 천록(天祿)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이 경사(慶事)를 기른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예전에 시행하던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왕(王)을 추시(追諡)하니,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덕행이 나타나게 되매, 그 광채가 빛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인후(仁厚)한 공성(公姓)082) 은 즉시 그 경사를 두터이 하여,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만세(萬世)까지 영구히 존속하겠습니다. 저 귀주(歸州)를 보건대, 높다란 그 언덕에 왕기(王氣)가 매우 성하니, 한이 없는 그 경사입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매, 나의 명(銘)이 과분한 칭찬이 아니옵니다. 이 비석(碑石)에 새겨서 후세의 사람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산백 이색의 졸기. 여주 신륵사에서 죽다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여흥(驪興)012) 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조회를 정지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부의를 내려 주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색(穡)의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한주(韓州)013) 사람 정동행중서성 낭중 도첨의찬성사(征東行中書省郞中都僉議贊成事)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과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나이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지정(至正) 무자년(1348)에 이곡(李穀)이 원조(元朝)014) 의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색은 조관의 아들이라 하여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었다. 신묘년(1351) 정월에 곡(穀)이 본국에 돌아와 죽으니,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여 상제(喪制)를 마치고, 계사년 공민왕이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할 때는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 등이 색을 장원으로 뽑았다. 가을에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하였고, 갑오년(1354)에 회시(會試)에 합격하였으며, 전정(殿庭)에서의 대책(對策)에서 제2갑(甲) 제2명으로 합격하였다. 독권관(讀券官)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 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 등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여 칙지로 응봉 한림문자·동지 제고 겸 국사원 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고 귀국하자, 공민왕이 전리 정랑(典理正郞)·예문 응교 겸 춘추 편수(藝文應敎兼春秋編修)를 더하였다. 이듬해 내사 사인(內史舍人)에 오르고,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병신년(1356)에 모친이 늙었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와 가을에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임명되고, 다시 옮겨서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015) 로 임금을 가까이 한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경성(京城)016) 을 함락시켜 공민왕이 남행(南行)할 때, 색은 왕의 행행(行幸)에 호종, 도움을 이루어 적을 물리친 뒤에는 훈 1등에 책정되고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 계묘년에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원나라에서 임명받고, 본국에서는 밀직 제학(密直提學)을 임명받고 단성 보리 공신(端誠保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정미년에 원나라 정동성 낭중(征東省郞中)으로 제수되고, 본국에서는 판개성 겸 성균 대사성(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되었는데, 한때의 경술(經術)을 통하는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6, 7인을 천거하여 모두 학관(學官)을 겸했다. 경전을 나누어 수업을 하매 서로 어려운 것을 논란해서 각각 있는 지식을 다했다.
색은 변론하고 분석하며 절충하는 데 저물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억하고 외우기만 하는 습관과 공리(功利)의 학설이 점점 없어지고, 성리(性理)의 학문이 다시 일어났다. 기유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이인복(李仁復)으로 더불어 임금에게 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법을 쓰자고 했는데, 색이 무릇 공거(貢擧)를 주장한 지 네 번이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공정함을 탄복했다. 공민왕이 노국 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짓는데 말할 수 없으리만큼 사치하고 호화롭기가 지극하여,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상서(上書)하여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유탁을 죽이려 하고, 색을 시켜서 여러 신하들에게 알리는 교유문을 지으라 했다. 색이 죄명을 임금에게 물으니, 임금이 탁의 네 가지 죄목을 들었다. 색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죽일 만한 죄가 아닙니다. 원컨대, 깊이 생각하옵소서."
임금이 더욱 노하며 독촉하기를 급히 하였다. 색이 아뢰었다.
"신이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글로써 죄를 만들겠습니까?"
임금이 감동되어 깨우쳐 탁이 죽기를 면했다. 신해년에 모친의 상(喪)을 만났으나, 이듬해 임금이 기복(起復)시켜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삼았는데, 병이 있다고 사면하였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돌아갔다. 색이 병이 중해서 문을 닫고 7, 8년을 지내다가 우왕 8년 임술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고,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요동위(遼東衛)를 공격하자고 청하여, 우왕이 기로(耆老)와 양부(兩府)로 하여금 모여서 가부를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서 반대하는 자가 적고 좋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색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나, 물러 나와서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오늘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의리에 거스리는 논의를 했다."
고 하였다.
이 태조가 회군하자 최영을 물리치고 색으로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삼았다. 공민왕이 돌아간 뒤로 부터 〈원나라〉 천자가 번번이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들어오라고 해서, 모두 겁을 내고 감히 가지 못했는데, 색이 시중이 되어 폐왕(廢王) 창(昌)을 친히 조회하도록 하고, 또 창왕으로 감국(監國)을 시키도록 하려고 원나라에 들어가기를 자청하여, 드디어 색으로 하여금 하정사(賀正使)를 삼았다. 그리고 태조가 칭찬하여 말하였다.
"이 노인은 의기가 있다."
색이 생각하기를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해지고, 중외가 마음이 돌려져서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혹 변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한 아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는 전하(殿下)017) 로 서장관(書狀官)을 시켰다. 천자가 원래에 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인견하고 종용(從容)하게 하는 말이,
"그대가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해 한림 학사를 했으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리라."
하니, 색이 당황하여 한어(漢語)로 대답하기를,
"왕이 친히 조회하려 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뜻을 깨닫지 못학고 묻기를,
"무슨 말이냐?"
하매, 예부의 관원에게 전하여 주달하게 하였다. 색이 오래도록 조회하지 않았으므로 말씨가 대단히 간삽(艱澁)하니, 천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대의 한어는 정히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였다. 색이 돌아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내 마음으로 이것을 물으려니 하면 황제는 묻지 않고, 묻는 바는 모두 내 뜻과는 같지 않더라."
하니, 당시의 논의로 기롱(譏弄)하기를,
"큰 성인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어떻게 요량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공양왕이 즉위하였는데, 이색은 시론(時論)에 참예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섯 차례나 폄척(貶斥)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 옛날의 벗이라 하여 용서하니, 태조에게 나아가서 보고 올 때마다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천명을 받은 거룩한 임금님이시다."
하였다. 또 일찍이 영선(營繕)을 정지하기를 청하고는 물러 나와서 사람들이 묻는 일이 있으면,
"창업하는 임금은 종묘·사직과 궁궐이며 성곽 같은 것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고 했다.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 곳에서 거주하려 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 와서 한산백(韓山伯)을 봉했다. 색이 진현(進見)하고 하는 말이,
"개국하던 날 어찌 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 만일 알렸다면 읍양(揖讓)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마고(馬賈)018) 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배극렴(裵克廉)을 가리킨 것이었다. 남은(南誾)이 〈옆에 있다가〉 하는 말이,
"어찌 그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
하니, 임금이 은(誾)을 꾸짖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하고, 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하였다. 뒤에 〈이것을〉 논의하는 자가 있으므로, 남재(南在)가 색의 아들 이종선(李種善)을 불러서 하는 말이,
"존공(尊公)이 광언(狂言)을 하여 이를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오."
하였다. 병자년 5월에 신륵사(神勒寺)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갈 때에 병이 생겼다. 절에 가자 병이 더하니 중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색이 손을 내 흔들면서 하는 말이,
"죽고 사는 이치는 내가 의심하지 않으오."
하고, 말을 마치자 돌아갔다.
색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왔으며,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다. 사리를 처리하는 데 자상하고 밝아서, 재상이 되어 기성의 법을 따르는 데 힘을 쓰고 복잡하게 고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애를 쓰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만 잡으면 즉시 쓰되 사연이 정밀하고 간절했었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나왔다. 집을 위해서는 재산의 유무(有無)를 묻지 않았으며, 평시에 경솔한 말과 갑자기 노여워하는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 연회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도 여유있고 침착하여서 처사하는 데 난번되지 않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언동은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임금의 은총과 좋은 자리에 있었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변란과 불행을 만났으되 슬퍼하지도 않았다. 늙어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지공 대사(指空大師)019) 와 나옹 대사(懶翁大師)020) 의 부도(浮圖)에 명(銘)을 지었기로, 그 중들이 문하에 내왕해서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다.
색이 듣고 하는 말이,
"저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복을 기원해 주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하였다. 색의 아들은 세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 이종덕(李種德)과 둘째 아들 이종학(李種學)은 모두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으나 먼저 죽었고, 셋째 아들 이종선(李種善)은 지금 병조 참의가 되었다.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이 죽었다. 준(浚)의 자(字)는 명중(明仲)이고, 호(號)는 우재(吁齋)인데, 평양부(平壤府) 사람이다. 증조(曾祖)는 인규(仁規)인데, 고려(高麗)에 공(功)이 있어 벼슬이 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다. 아버지는 덕유(德裕)인데, 판도 판서(版圖判書)077) 이다. 준(浚)은 가계(家系)가 귀현(貴顯)하였으나, 조금도 귀공자(貴公子)의 습관이 없었고,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 충효(忠孝)로써 자허(自許)하였다. 어머니 오씨(吳氏)가 일찍이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의 가갈(呵喝)078) 을 보고 탄식하기를,
"내 아들이 비록 많으나, 한 사람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하니, 준(浚)이 곧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맹세하고 분발해 배움에 힘썼다. 홍무(洪武) 신해년에 공민왕(恭愍王)이 수덕궁(壽德宮)에 있을 적에, 준(浚)이 책을 끼고 궁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왕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곧 보마배 행수(步馬陪行首)에 보(補)하고 매우 사랑하였다. 갑인년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병진년에 좌·우위 호군(左右衛護軍) 겸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에 임명되었다가, 뽑혀서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가 되었는데, 이민(吏民)들이 두려워하고 사모하여 사납고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다. 순행하다가 정선군(旌善郡)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귀(詩句)를 남겼는데, 식자(識者)들이 옳게 여기었다.
"동쪽 나라 바다를 깨끗이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니, 여기 사는 백성은 눈을 씻고 그 때를 기다리게나"
여러 번 옮겨서 전법 판서(典法判書)079) 에 이르렀다. 이때에 조정의 정치가 날로 어지럽고, 왜구(倭寇)가 가득하여, 장수(將帥)들이 두려워서 위축(萎縮)되어 있었는데, 임술년 6월에 병마 도통사(兵馬都統使) 최영(崔瑩)이 준(浚)을 들어 써서 경상도 감군(慶尙道監軍)을 시키니, 준(浚)이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을 불러 두류(逗遛)한 죄를 문책하고, 병마사(兵馬使) 유익환(兪益桓)을 참(斬)하여 장수들에게 조리를 돌렸으므로, 제장(諸將)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받들었다. 계해년에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으며, 무진년 여름에 최영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칠 때에,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대의(大義)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쌓인 폐단을 크게 개혁하여 모든 정치를 일신(一新)하려고 하였는데, 준(浚)이 중망(重望)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으시고, 〈준을〉 불러서 더불어 일을 의논하고는 크게 기뻐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발탁(拔擢)하시고, 크고 작은 일 없이 모두 물어서 하니, 준(浚)이 감격하여 분발(奮發)하기를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경기(經紀)080) 를 바로잡고, 이(利)를 일으키고 해(害)를 없애어,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탕화(湯火)081) 가운데서 나와 즐겁게 사는 마음을 품게 한 것은 준(浚)의 힘이 퍽 많았다. 위주(僞主) 신우(辛禑)가 강화(江華)로 쫓겨날 적에 태상왕이 왕씨(王氏)를 세우기를 의논하였는데, 수상(首相) 조민수(曹敏修)가 본래부터 이인임(李仁任)의 편당(偏黨)으로서 우(禑)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이에 준(浚)이 맨먼저 민수(敏修)의 간사함을 논하여 쫓고, 이어서 인임(仁任)의 죄를 논하여 그 시호(諡號)와 뇌문(誄文)082) 을 깎아 없애기를 청하고, 또 사전(私田)을 폐지하여 민생(民生)을 후(厚)하게 하기를 청하니, 세가(世家)와 거실(巨室)에서 원망과 비방이 매우 심하였다. 그러나, 준(浚)이 고집하고 논쟁하기에 더욱 힘쓰니, 태상왕이 준(浚)과 뜻이 맞아 마침내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시행하였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오르고, 기사년 겨울에 창(昌)이 친조(親朝)083) 하기를 청하니, 예부(禮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붙여서 이성(異姓)084) 이 왕이 된 것을 책(責)하였는데, 창(昌)의 외조(外祖) 이임(李琳)이 수상(首相)이 되어 비밀에 붙이고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준(浚)이 본래부터 왕씨(王氏)의 뒤가 끊긴 것을 분하게 여기고, 마침내 태상왕의 계책(計策)085) 에 찬성하여 심덕부(沈德符)·정몽주(鄭夢周) 등 일곱 사람과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맞아서 세웠다.
문하 평리(門下評理)에 옮기고 책훈(策勳)086) 하여 조선군 충의군(朝鮮郡忠義君)을 봉하였다. 세상에서 이를 ‘구공신(九功臣)’이라 이른다. 경오년 겨울에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신미년 6월에 중국에 들어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는데, 길[道]이 북평부(北平府)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연저(燕邸)에 있을 때인데, 〈태종 황제가〉 마음을 기울여 〈준을〉 대접하였다. 준(浚)이 물러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왕(王)이 큰 뜻이 있으니 아마 외번(外藩)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정몽주가 우상(右相)으로 있었는데, 태상왕의 심복(心腹)과 우익(羽翼)을 없애려고 하여 비밀히 공양왕에게 고하기를,
"정책(定策)087) 할 때에 준(浚)이 이의(異議)가 있었습니다."
하니, 공양왕이 이 말을 믿고 준에게 앙심을 품었었다. 임신년 3월에 정몽주가, 태상왕이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할 때를 타서 대간(臺諫)을 시켜 준(浚)과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 등을 탄핵하여, 붕당(朋黨)을 만들어서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지적하여 모두 외방으로 귀양보냈다가, 이내 수원부(水原府)로 잡아 올려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4월에 우리 주상(主上)께서 조영규(趙英珪)로 하여금 정몽주를 쳐 죽이게 하여, 준(浚)이 죽음을 면하고 찬성사(贊成事)에 복직되었다. 7월 신묘에 준(浚)이 여러 장상(將相)들을 거느리고 태상왕을 추대하였다. 태상왕이 즉위(卽位)하던 날 저녁에 준(浚)을 와내(臥內)088) 로 불러들여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대저(代邸)에서 들어와서 밤에 송창(宋昌)으로 위장군(衛將軍)을 삼아 남북군(南北軍)을 진무(鎭撫)하게 한 뜻을 경이 아는가?"
하고, 인하여 도통사(都統使) 은인(銀印)과 화각(畫角)·동궁(彤弓)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5도 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한다."
하고, 드디어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평양백(平壤伯)을 제수하고, 1등(一等)의 훈작(勳爵)을 봉(封)하여 ‘동덕 분의 좌명 개국 공신(同德奮義佐命開國功臣)’의 호(號)를 주고,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와 전지(田地)·노비(奴婢) 등을 하사하였다.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차비(次妃) 강씨(康氏)에게서 출생하였는데, 태상왕이 이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강씨가 개국(開國)에 공(功)이 있다고 칭탁하여 이를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준(浚)과 배극렴(裵克廉)·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불러 의논하니, 극렴이 말하기를,
"적장자(嫡長子)로 세우는 것이 고금(古今)을 통한 의(義)입니다."
하매, 태상왕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준(浚)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功)이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원컨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
하였다. 강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태상왕이 종이와 붓을 가져다 준(浚)에게 주며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하니, 준(浚)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태상왕이 마침내 강씨의 어린 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삼으니, 준(浚) 등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12월에 문하 좌시중(門下佐侍中)이 되었다. 준(浚)이 전(箋)을 올려 식읍(食邑)과 실봉(實封)을 사양하니, 특별히 전교(傳敎)하여 윤허하지 아니하고, 은총(恩寵)과 위임(委任)이 비할 데 없었다. 갑술년에 또 5도 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고 막료(幕僚)를 두었는데, 태상왕이 명하여 도성(都城) 사문(四門)의 열쇠를 주관하게 하고, 그것을 준(浚)의 집에 간직해 두고 〈사문(四門)의〉 열고 닫음을 맡게 하였다.
정축년에 고황제(高皇帝)가 본국(本國)의 표사(表辭)089) 안에 희모(戲侮)090) 하는 〈내용의〉 글자[字樣]가 들어있다 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그 글을 지은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잡아서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였는데, 태상왕이 준(浚)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도전(道傳)이 그때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 있었는데, 병(病)을 핑계하여 가지 아니하고 음모하기를, 국교(國交)를 끊으면 자기가 화(禍)를 면할 것이라 하고, 마침내 건언(建言)하기를,
"장병(將兵)을 훈련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급무(急務)이니 진도 훈도관(陣圖訓導官)을 더 두고, 대소(大小) 중외(中外) 관리로서 무직(武職)을 띤 자와 아래로 군졸(軍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습하게 하여 고찰(考察)을 엄중히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남은(南誾)과 깊이 결탁하여 은(誾)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기를,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자못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은(誾)이 여러 번 말하므로, 태상왕이 도전(道傳)에게 물으니, 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論)하여 은(誾)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준(浚)은 〈병으로〉 휴가〈休暇〉 중에 있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도전(道傳)과 은(誾)이 명령을 받고 준(浚)의 집에 이르러 이를 알리고, 또 말하기를,
"상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
고 하였다. 준(浚)이 옳지 못하다 하여 말하기를,
"이는 특히 그대들의 오산이다. 상감의 뜻은 본래 이와 같지 아니하다.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는 것은 불의(不義) 중에 가장 큰 것이다. 나라의 존망(存亡)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억지로 병(病)을 이기고 들어와서 〈태상왕을〉 뵙고 아뢰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백성들의 기뻐하고 숭앙(崇仰)함이 도리어 잠저(潛邸) 때에 미치지 못하옵고, 요즈음 양도(兩都)091) 의 부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피로함이 지극합니다. 하물며, 지금 천자(天子)가 밝고 착하여 당당(堂堂)한 천조(天朝)를 틈탈 곳이 없거늘, 극도로 지친 백성으로서 불의(不義)의 일을 일으키면 패하지 않을 것을 어찌 의심하오리까?"
마침내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니, 은(誾)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은 다만 두승(斗升)의 출납(出納)만을 알 뿐이라, 어찌 기모(奇謀)와 양책(良策)을 낼 수 있겠소?"
하였다. 태상왕이 준(浚)의 말을 좇으니, 의논이 마침내 그치었다. 도전(道傳)이 또 준(浚)을 대신하여 정승(政丞)이 되려고 하여, 은(誾)과 함께 매양 태상왕에게 준(浚)의 단점(短點)을 말하였으나, 태상왕이 대접하기를 더욱 두터히 하였다. 일찍이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준(浚)의 화상(畫像)을 그려서 하사(下賜)한 것이 두 번이고, 도전(道傳)으로 하여금 그 화상에 찬(讚)을 짓게 하였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준(浚)의 집을 지났는데, 준(浚)이 중당(中堂)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매우 삼가며, 인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드리며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알고 받았다. 무인년 가을에 갑자기 변(變)이 일어나서, 임금이 밤에 박 포(朴苞)를 보내어 준(浚)을 부르고, 또 스스로 길에 나와서 맞았다. 준(浚)이 이르러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적장자(嫡長子)를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청하니, 태상왕이 이를 가하다고 하여, 9월에 상왕(上王)이 내선(內禪)을 받았다. 이에 공(功) 1등(等)을 기록하고, 인하여 좌정승(左政丞)을 제수하고 정난 정사 공신(靖難定社功臣)의 이름을 더하고, 다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하사하였다. 기묘년 8월에, 상왕(上王)의 꿈에 준(浚)이 벼슬과 지위가 분수에 넘친 다고 스스로 진술하여 물러가기를 원하였는데, 날이 밝자, 준(浚)이 과연 전(箋)을 올려 사면(辭免)하니, 상왕이 감탄하기를 매우 오랫동안 하다가, 위로하고 타일러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2월에 다시 사양하니,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집에 가 있게 하였다.
준(浚)이 수상(首相)이 되어 8년 동안 있었는데, 초창기(草創期)에 정사가 번거롭고 사무가 바쁜데, 우상(右相) 김사형(金士衡)은 〈성품이〉 순근(醇謹)092) 자수(自守)093) 하여 일을 모두 준(浚)에게 결단하게 하였다. 준(浚)은 〈성품이〉 강명 정대(剛明正大)하고 과감(果敢)하여 의심하지 아니하며, 비록 대내(大內)에서 지휘(指揮)를 내릴지라도 옳지 못함이 있으면, 문득 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리지 아니하여도, 동렬(同列)들이 숙연(肅然)하여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체통(體統)이 엄하고 기강(紀綱)이 떨치었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을 독점하고 권세를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준(浚)이 정승(政丞)을 사면하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손님을 사절(謝絶)하며, 시사(時事)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정비(靜妃)의 동생 무구(無咎)와 무질(無疾)이 좋은 벼슬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준(浚)이 막고 쓰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경진년 7월에 이를 두 사람이 가만히 대간(臺諫)에게 사주(使嗾)하여 몇 가지 유언(流言)을 가지고 준(浚)을 논(論)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순위부(巡衛府) 옥(獄)에 가두었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일이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줄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마땅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직사(職事)에 이바지해야 될 것인데, 세도가(勢道家)에 분주히 다니면서 그들의 뜻에 맞추어 일을 꾸며 충량(忠良)한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해치니, 이는 실로 전조(前朝) 말기의 폐풍(弊風)이다."
하고, 죄를 묻는 위관(委官) 이서(李舒)에게 이르기를,
"재신(宰臣)은 정인 군자(正人君子)이다. 옥사(獄辭)를 꾸며서 사람을 사지(死地)에 넣을 수는 없다."
하였다. 그리고, 곧 상왕(上王)에게 아뢰어서 준(浚)을 풀려나오게 하였다. 11월에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그대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임명하고, 갑인년 6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준(浚)이 다시 정승이 되어 일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자기와 뜻이 다른 자에게 방해를 받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아니 되어 다시 파(罷)하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죽은 나이[卒年]가 60이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통곡하고, 소선(素膳)094) 을 자시었으며, 3일 동안 조회를 정지[輟朝]하였다. 임금과 세자(世子)가 친림(親臨)하여 조제(弔祭)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그의 죽음을 들은 자는 애석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장사할 때 이르러서는 삼도감(三都監) 녹사(錄事)와 각사(各司) 이전(吏典)의 무리들이 모두 노제(路祭)를 베풀고 곡(哭)하였다. 준(浚)이 만년(晩年)에 비방을 자주 들었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피(避)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과 대우는 조금도 쇠(衰)하지 아니하여, 임금이 일찍이 공신(功臣)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준(浚)에게 이르자, 임금이 수(壽)를 빌고, 그를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죽은 뒤에 어진 정승[賢相]을 평론(評論)할 적에 풍도(風度)와 기개(氣槪)를 반드시 준(浚)으로 으뜸을 삼고, 항상 ‘조 정승(趙政丞)’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준(浚)은 국량(局量)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風采)가 늠연(澟然)하였으니,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현재(賢才)를 장려 인도하고, 엄체(淹滯)095) 를 올려 뽑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예위(禮闈)096) 를 세 번이나 맡았는데, 적격자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미 귀(貴)하게 되어서도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門)에서 영접하여 관곡(款曲)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布衣)097)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사학(史學)에 능하고, 시문(詩文)이 호탕(豪宕)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문집(文集) 약간 권(卷)이 있다. 일찍이 검상 조례사(檢詳條例司)로 하여금 국조 헌장조례(國朝憲章條例)를 모아서 이를 교정하여 책을 만들게 하고, 이름을 《경제육전(經濟六典)》이라 하여 중외(中外)에 간행(刊行)하였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조대림(趙大臨)이다. 임금의 딸 경정 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어 평녕군(平寧君)에 봉하였다.
건원릉에 비석을 세우다. 비문은 권근의 찬
건원릉(健元陵)에 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이러하였다.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치운(治運)을 열어 주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이적(異蹟)을 나타내어 그 부명(符命)을 밝게 하니, 하(夏)나라에서는 현규(玄圭)093) 를 내려 준 일이 있었고, 주(周)나라에서는 협복(協卜)094) 의 꿈이 있었다. 한(漢)나라 이후로 대대로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모두 천수(天授)에서 나온 것이요, 인모(人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공덕(功德)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符命)도 또한 나타났었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것을 주면서 말하기를, ‘공(公)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리라.’ 하였으니, 하(夏)나라의 현규(玄圭)와 주(周)나라의 꿈과 동부(同符)하다고 하겠다. 또 어떤 이인(異人)이 대문에 와서 글을 바치며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암석(巖石) 가운데서 얻은 것이다.’ 하였는데, 거기에는, ‘목자(木子)095) 가 다시 삼한(三韓)을 바로잡으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시켜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더니,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서운관(書雲觀)의 옛 장서(藏書)인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란 것이 있는데, ‘건목득자(建木得子)096) ’라는 말이 있다. 조선(朝鮮)이 곧 진단(震檀)이라고 한 설(說)은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지금에 와서야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은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신(臣)이 삼가 《선원록(璿源錄)》을 살펴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망성(望姓)097) 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에 벼슬하여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손(世孫) 이긍휴(李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 13세손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조(元朝)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된 뒤, 4세를 습작(襲爵)하였는데, 모두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었다. 원(元)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여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서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겼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홍건적(紅巾賊)이 고려의 서울[王京]을 함락하니,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 수복(收復)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첩서(捷書)를 올렸다. 이듬해 임인년에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쳐서 패주(敗走)시켰고, 또 이듬해 계묘년에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았다. 공민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장상(將相)에 이르러 중외(中外)에 출입하였으나, 경사(經史)를 읽기를 좋아하여 부지런히 읽고 게으르지 않았으니, 세상을 구제하는 도량(度量)과 호생지덕(好生之德)은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훙(薨)하자 이성(異姓)098) 이 왕위에 오르니, 권간(權奸)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여 조정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해적(海賊)이 나라 안 깊숙이 들어와 군현(郡縣)을 불지르고 약탈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우리 태조께서 운봉(雲峰)에서 싸워 이겨, 동남 지방이 편안하여졌다. 무진년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간(權奸)들을 주륙(誅戮)할 적에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살아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서 우군 도통사(左軍都統使)의 절월(節鉞)을 주어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을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정의(正義)에 의한 깃발을 돌이켰다. 군사가 강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휩쓸어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최영을 잡아서 물리치고, 대신 명유(名儒)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權奸)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광패(狂悖)한 자들이 중국과 흔극(釁隙)을 만들어, 위망(危亡)이 눈앞에 닥치고 화란(禍亂)이 헤아리기 어려웠었는데, 우리 태조의 돌이킨 힘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위태하였을 것이다. 이색(李穡)이 말하기를, ‘지금 공의 의거(義擧)는 중국을 높인 것인데,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불가(不可)합니다.’ 하고, 날을 받아 명나라 서울로 가려 하매,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099) 를 골라 이색과 함께 조현(朝見)하게 하였더니, 고황제(高皇帝)가 가상(嘉賞)히 여겨 돌려보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이성(異姓)100) 이 왕이 된 것을 문책하였으므로, 태조께서 여러 장상(將相)과 더불어 왕씨(王氏)의 종친(宗親)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용관(冗官)을 도태시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기뻐하였다. 공(功)이 높아지자 시기(猜忌)를 받아, 참소(讒訴)와 간계(奸計)가 번갈아드니, 정창군(定昌君)이 자못 의혹하였다. 태조(太祖)는 지위가 성만(盛滿)101) 하다고 하여 노퇴(老退)하기를 청하였으나, 사퇴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쪽 지방에 행차하였다가 병을 얻어 돌아왔는데, 이 틈을 타서 모해(謀害)하는 자들이 일을 더욱 급박하게 만들었다. 우리 전하(殿下)가 시기에 응해 변(變)을 제압하여, 모든 모해(謀害)가 와해되었다.
홍무(洪武) 임신년 가을 7월 16일에, 전하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왕으로 추대(推戴)하니, 신료(臣僚)들과 부로(父老)들이 모의하지 아니 하고도 모두 뜻을 같이하였다. 태조(太祖)가 정변(政變)을 듣고 놀라 일어나서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집의 섬돌을 내려오지 아니하고 한 집안을 나라로 화(化)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계도(啓導)하여 돕지 아니 하고서야 누가 능히 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을 중국에 보내어 주문(奏聞)하니, 황제가 조(詔)하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을 높였고,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각각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이는 상제(上帝)의 명(命)이다.’ 하였다. 또 칙명(勅命)하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으로 고쳐 호칭하려 하는가?’ 하였으므로, 즉시 예문 학사(藝文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주청(奏請)하니, 또 조(詔)하기를, ‘조선(朝鮮)이란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근본으로 하여 지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몸받아 백성을 기르고, 길이 후사(後嗣)를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의 위엄(威嚴)과 명성(名聲)과 의열(義烈)이 천자(天子)에게까지 높이 들려서 황제(皇帝)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고명(誥命)을 청하자 문득 유음(兪音)을 받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을 지난 갑술년 여름에 나라를 모함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入朝)시키라고 명하였다. 태조께서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事理)에 통달하여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命)에 응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부주(敷奏)한 것이 황제의 뜻에 맞으니,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종묘(宗廟)를 세웠으며, 일찍이 4대(四代)를 추존(追尊)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으로,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로,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로, 황조(皇祖)를 도왕(度王)으로,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로, 황고(皇考)를 환왕(桓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로 하였다. 예악(禮樂)을 닦고 제사하는 일을 삼가며, 장복(章服)102) 을 정하여 관등(官等)의 위의(威儀)를 구분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며, 봉록(俸祿)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고, 소송(訴訟)을 바르게 판결하며, 수령(守令)을 신중히 뽑았다. 피폐한 정치를 모두 개혁하고, 여러가지 업적이 빛나니,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고, 온 나라 안이 평안하여졌다. 우리 태조(太祖)의 높고 넓은 성덕(盛德)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지용(智勇)·총명(聰明)·신무(神武)·웅위(雄偉)의 임금이라고 하겠다.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문(表文)의 글 때문에 중국 조정의 견책(譴責)을 받게 되자, 명(命)을 거역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太祖)가 편찮은 틈을 타서 어린 얼자(孽子)103) 를 끼고 자기의 뜻을 펴 보려고 하였는데, 우리 전하가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이들을 섬멸하여 없애고, 적장(嫡長)이라 하여 상왕(上王)104) 을 세자(世子)로 세우도록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은 까닭으로 상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계사(繼嗣)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것이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고 하여, 곧 세자로 책립(冊立)하였다. 경진년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太祖)에게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호(號)를 올렸다.
11월 계유일에 상왕도 또한 병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우리 전하가 양궁(兩宮)105) 을 봉양(奉養)하는데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영락(永樂) 무자년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께서 승하하니, 춘추가 74세이고, 재위(在位)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않으신 지 11년이다. 갑자기 활과 칼만 남기시니,106) 아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 애모(哀慕)함이 망극(罔極)하여 거상(居喪) 중에 예(禮)를 다하였다.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호(號)를 올리고, 이해 9월 초9일 갑인일에 성동(城東) 양주(楊州)의 경내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고, 능(陵)을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여 파조(罷朝)107) 하고, 곧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108) 의 예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였으니, 천성에서 나온 것이며, 천도(天道)를 공경하여 순종하고, 의(義)을 들어 충성을 다하여 공순히 사대(事大)하기를 힘쓰며, 한 지방의 백성을 보호하고 긍휼(矜恤)히 하니,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충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겨 다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내렸다. 왕의 뛰어난 공덕(功德)은 비록 옛날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으리라.’ 하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諡號)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칙유(勅諭)하고 부의(賻儀)를 특별히 후하게 내렸다. 남달리 사랑하는 은전(恩典)을 극진히 하여 유감(有感)됨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 태조(太祖)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이어받드는 효성이 전후(前後)에 서로 이어서, 천심(天心)을 잘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종(始終)의 즈음에 있어 하늘과 사람이 위 아래에서 돕는 것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은 것이니, 아아, 거룩하도다!
수비(首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 휘(諱)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였다. 처음에 시호(諡號)를 절비(節妃)라고 하였다가, 뒤에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의 호(號)를 더하였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고 전하가 다섯째이다. 맏이는 이방우(李芳雨) 진안군(鎭安君)인데 먼저 졸(卒)했고, 세째는 방의(芳毅) 익안 대군(益安大君)인데 역시 먼저 졸(卒)하였다. 그 다음 네째는 이방간(李芳幹) 회안 대군(懷安大君)이고, 여섯째는 이방연(李芳衍)인데 과거에 올랐다가 곧 죽으니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였다. 장녀(長女)는 경신 궁주(慶愼宮主)인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선 궁주(慶善宮主)인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차비(次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처음에 현비(顯妃)를 봉하였으나 먼저 훙(薨)하자, 시호(諡號)를 신덕 왕후(神德王后)라고 하였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長男)은 이방번(李芳蕃)이니 공순군(恭順君)을 증직하였고, 다음은 이방석(李芳碩)이니 소도군(昭悼君)을 증직하였다. 딸은 경순 궁주(慶順宮主)이니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모두 먼저 졸(卒)하였다. 상왕(上王)의 비(妃)는 김씨이니,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며, 증 문하 시중(門下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로서 자식이 없다.
우리 중궁(中宮)은 정비(靜妃) 민씨(閔氏)인데,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시(諡)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세자(世子) 이제(李禔)이고, 다음은 이호(李祜)108) 효령 대군(孝寧大君), 다음은 이도(李祹)109) 충녕 대군(忠寧大君)이며, 다음은 어리다. 장녀는 정순 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이니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이,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복근(福根) 봉녕군(奉寧君), 다음은 덕근(德根) 원윤(元尹)이다. 익안 대군(益安大君)은 증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석근(石根) 익평군(益平君)이다. 회안 대군(懷安大君)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맹중(孟衆) 의령군(義寧君)이다.
신이 역대(歷代)의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을 보건대, 덕업(德業)의 성대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간책(簡冊)에 밝게 나타나서 그 빛이 끝없이 흐르는데, 우리 조선이 일어남에 거룩한 덕과 신령한 부명(符命)이 옛날보다 빛남이 있다. 이는 마땅히 이미 그 위(位)를 얻고 또 수(壽)를 얻었으니, 넓은 기업(基業)을 더 높이고 큰 복조(福祚)를 이어받아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다. 신 권근(權近)이 외람되게 비(碑)에 새길 글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덕(盛德)을 드러내서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지 않으리오! 그러나 신은 글재주가 비졸(鄙拙)하여 성(盛)하고 아름다운 덕(德)을 드러내서 밝은 뜻을 남김없이 칭송하기에는 부족하와, 삼가 공훈(功勳)과 덕업(德業)이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것만을 찬술(撰述)하고, 감히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드리노라. 그 글[詞]은 이러하다.
‘하늘이 이 백성 낳으시고 사목(司牧)110) 을 세워, 기르고 다스리실 제 유덕(有德)한 이 돌보시네. 하늘이 순순(諄諄)히 말하지 않건마는 명(命)은 혁혁(赫赫)하게 나타나 있나니, 우(禹)임금은 현규(玄圭)를 내려 주고, 주(周)나라의 꿈은 협복(協卜)일세. 우리 조선 처음 왕업(王業)을 여실 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으니, 부록(符籙)이 먼저 정해지고, 천명(天命)이 아주 분명하였네, 고려 운수 이미 다하매, 임금은 어둡고 재상은 혹독하여, 농사철에 군사 일으켜 중국(中國)과 흔극(釁隙)을 일으켰네, 우리 군사 의(義)의 깃발 돌이키니, 죄인(罪人)들 복죄(伏罪)하여 벌받았네. 충성이 위에 들려 황제 마음 기뻐하였네. 천운(天運)이 돌아오고 여정(輿情)이 절박(切迫)하여, 대업(大業)은 이미 이룩되었건만, 저자[市肆]는 바뀌지 아니하였네. 고황제(高皇帝) 조(詔)하기를, 「그대 나라를 세웠으매, 백성들 병화(兵禍) 없고 하늘이 준 기쁨 즐기네.」 하였고, 이어서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회복하여 주었네. 땅을 골라 도읍(都邑)을 정하니 한강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 왕기(王氣)가 쌓인 바라. 궁실(宮室)은 높디 높고 종묘(宗廟)는 의젓하네. 임금 어진 마음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고, 정사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하여, 온갖 제도 갖춰지고 모든 교화(敎化) 흡족하네. 정사에 지치시어 적사(嫡嗣)에게 선위(禪位)하니, 공 있는 이에게 양보하셨네. 밝고 밝은 우리 전하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화란(禍亂)을 두 번이나 평정하니, 그 경사 지극히 돈독하네.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대명(大命)을 사양하기 어려워 신기(神器)111) 를 부탁받았네. 양궁(兩宮)을 공경히 받드니, 경건하고 공순함이 더욱 지극하도다. 효제(孝弟)가 신(神)에 통하여, 상제(上帝)의 돌보심이 더욱 우악(優渥)하네. 태조의 상(喪)을 만나 근심에 잠겨, 애모(哀慕)의 슬픈 정 몸부림치네. 황제가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하고 태뢰(太牢)로 제사하며, 칙명(勅命)하여 후부(厚賻)하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주어 포장(褒奬)하니, 휼전(恤典)은 온전히 갖추어졌네. 하늘의 도우심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어, 큰 복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여, 종사(宗祀)가 유구(攸久)하여 하늘처럼 무궁하리라.’"
이 글은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정승(政丞) 성석린(成石璘)이 쓰고,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구(鄭矩)가 전액(篆額)을 쓰니, 성석린에게는 안마(鞍馬)를, 정구에게는 말 1필을 하사하였다.
예조에서 올린 인군과 신하가 잔치하는 예도와 악장의 차례를 의논하다
예조에서 인군과 신하가 함께 잔치하는 예도(禮度)와 악장(樂章)의 차례를 올렸는데,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으로 첫째를 삼고, 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으로 다음을 삼고, 또 정동방곡(靖東方曲)·납씨곡(納氏曲)·문덕곡(文德曲)·무덕곡(武德曲) 등의 곡(曲)으로 그 다음을 삼았다. 임금이 보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만일 먼저 태조의 일을 노래하고자 한다면,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은 꿈 가운데 일이거나, 혹은 도참(圖讖)의 설이다. 어찌 태조(太祖)의 실덕(實德)을 기록할 곡조가 없느냐? 너희들이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한상덕(韓相德)·탁신(卓愼)이 대답하였다.
"전하의 말씀이 참 옳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여러 신하가 헌수(獻壽)하는 날에 마땅히 먼저 근천정·수명명 등의 곡조를 노래한 뒤에 태조(太祖)의 정동방곡·납씨곡·수보록·몽금척 등의 곡조를 노래하는 것이 가합니다. 신 등이 주상의 뜻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예악(禮樂)이라는 것은 인정에 맞추어 하는 것인데, 만일 먼저 태조(太祖)의 실덕의 곡조를 노래하면 납씨곡·정동방곡 등의 곡조는 잔치를 파할 때의 음절이고, 초연(初筵)에 연주(演奏)할 것이 아닙니다."
우부대언(右副代言) 조말생(趙末生)은 말하였다.
"기린(麒麟)의 태어남은 개와 양과 다르고 신인(神人)의 태어남은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직(稷)의 태어남을 찬미하는 자가 말하기를, ‘상제(上帝)의 발자취를 밟고 빠르게 흠동(歆動)하였다.’하였고, 설(契)의 태어남을 찬미하는 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현조(玄鳥)를 명하였다.’하였으니, 지금 보록을 받고 금척을 꿈꾼 것이 실상 태조가 천명을 받은 부험(符驗)이니, 악장(樂章)의 첫머리를 삼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고, 하물며, 이 예는 만대(萬代)의 군신이 함께 잔치하는 악장이니, 반드시 태조의 덕을 미루어 근원하여 먼저 노래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만일 몽금척·수보록으로 악장의 첫머리를 삼을 수 없다면, 마땅히 태조의 실덕의 곡조로 첫머리를 삼고, 몽금척·수보록으로 다음을 삼은 뒤에 근천정·수명명으로 다음을 삼는 것이 또한 가할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큰 발자취[巨跡]와 현조(玄鳥)의 설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날 여러 신하가 내게 헌수(獻壽)하는 것은 예조(禮曹) 상정색(詳定色)과 함께 다시 의논하라."
그때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가 복제(服制)로 집에 있었다. 임금이 불러서 의논하니, 조말생의 말과 같았다. 영의정(領議政) 하윤(河崙)이 상서하였다.
"신이 부재(不才)한데도 외람되게 예를 의논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금 예조에서 정조(正朝) 하례(賀禮)와 연례(宴禮)를 가지고 와서 의논하는데, 절목이 같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을 감히 마음대로 스스로 절충하지 못하고, 삼가 기록하기를 다음과 같이 합니다.
1. 조하(朝賀)의 치어(致語)277) 는 당(唐)·송(宋) 때에는 조관(朝官) 반수(班首)가 치어(致語)를 쓰고 표문(表文)은 쓰지 않았는데, 지금 조정에서 또한 같고, 원(元)나라 조정에서는 중서성(中書省)에서 표문을 썼는데, 전조(前朝) 문하부(門下府)에서 또한 표문을 썼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중국은 예의(禮義)가 나온 곳인데, 당·송과 지금 조정의 예를 마땅히 준용(遵用)하여야 합니다.
1. 시연(侍宴)하는 여러 신하의 좌차(坐次)는 당나라에서는 문관·무관을 나누지 않고 다만 직차(職次)로 앉았는데, 지금 조정에서도 또한 같습니다. 전조(前朝)에서는 송조(宋朝)를 인습하여 문신 4품 이상은 시신(侍臣)으로 상계(上階)에 앉고, 6품 이상은 중계(中階)에 앉고, 무신 3품 이하는 반(班)에 따라 동서랑(東西廊)에 앉았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문무를 경(輕)하게 하거나 중(重)하게 할 수 없으니, 조정의 예에 의하여 문무를 나누지 말고, 모두 직차로 상계에 앉고, 좌석이 좁으면 중계에 앉고, 또 좁으면 양랑(兩廊)에 앉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치어(致語)하는 것은 마땅히 당(唐)·송(宋)을 따르고, 시신(侍臣)은 전조의 예에 의하여 가까이 앉는 것이 가하다."
하윤이 또 진언(進言)하였다.
"마땅히 수보록·몽금척의 곡조로 정조(正朝)에 군신(君臣)이 동연(同宴)하는 악장(樂章)의 첫머리를 삼아야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흥(興)하는 것이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에 있으니, 어찌 부참(符讖)을 족히 믿을 수 있겠는가? 광무제(光武帝)가 도참(圖讖)을 믿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비난하였고, 당(唐)나라 배도(裵度)278) 가 장차 회(淮)·채(蔡)를 칠 때에 또한 참서(讖書)가 있었으니, 제왕의 상서(祥瑞)가 아니다. 또 이러한 보록을 받은 것과 금척의 꿈은 태조(太祖)의 실덕(實德)이라고 가리켜 말할 수 없다. 주관(周官)에 육몽(六夢)의 설이 있고 무왕(武王)이 또한 말하기를, ‘짐의 점(占)과 꿈에 합한다.’하였으니, 비록 예전 사람이 하기는 하였으나, 악장(樂章)의 첫머리를 삼을 것은 아니다."
하윤이 말하였다.
"보록에 대한 말은 신이 일찍이 들었는데, 개국하기 전에 어떤 중이 이를 얻었다고 하니, 허망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비록 괴력(怪力)은 말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촉산(蜀山) 사람 동오경(董五經)의 말이 《중용(中庸)》에 보이고, 청청천리초(靑靑千里草)라는 것은 동탁(董卓)을 가리킨 것인데, 주자(朱子)가 감흥(感興)의 시(詩)에 붙였으니, 참서(讖書)도 또한 고인이 폐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제왕(帝王)의 흥함에 반드시 앞서 정(定)한 참서가 있으면 사람의 분수가 아닌 욕망(欲望)을 저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참(圖讖)이 제왕의 일은 아닌데 만일 폐하지 않는다면, 다만 악부(樂府)에 넣을 것이요, 첫머리에 내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고, 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의 곡조를 수장(首章)으로 하였다. 임금이 또 대언(代言) 등에게 일렀다.
"예로부터 도참(圖讖)을 믿을 수 없다. 지금 보록(寶籙)의 설을 내가 믿지 않는다.
첫째는 ‘삼전 삼읍(三奠三邑)이 응당 삼한(三韓)을 멸할 것이다.’하였는데, 사람들이 삼전(三奠)의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정희계(鄭熙啓)라고 하는데, 정희계는 재주와 덕이 없고 개국하는 데도 별로 공이 없으니, 이것이 과연 때에 응하여 나온 사람이겠는가?
둘째는 ‘목자장군검(木子將軍劍)·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비의군자지(非衣君子智)·부정 삼한격(復正三韓格)이라.’ 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비의(非衣)는 배극렴(裴克廉)이라.’고 한다. 배극렴이 정승이 된 것이 오래지 않고, 보좌하여 다스린 것이 공효가 없었다. 마땅히 다시 영의정에게 고하여 하윤(河崙)이 지은 근천정(覲天庭)을 제1곡으로 하고, 수보록(受寶籙)은 악부에서 삭제하라."
하윤이 대궐에 나와 친히 청하여, 보록의 곡조를 제3장으로 하였다.
전 인녕부 윤 이은이 가뭄과 홍수에 대비할 수리시설 공사에 대해 상서하다
전 인녕부 윤(仁寧府尹) 이은(李殷)이 상서하였다.
"대개 듣건대, 탕(湯)임금 때 7년간 가물어서 이윤(伊尹)이 구전(區田)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물을 져다가 곡식에게 뿌려 가뭄을 대비하는 도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이런 일이 있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번 경신 연간에는 매양 큰 가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을 때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이 계림 부윤(雞林府尹)이 되어서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먹였으나, 각 고을에는 저축한 것이 없어서 끝내는 식량을 공급(供給)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백성에게 제언(堤堰)을 쌓아서 가뭄과 장마에 대비하도록 가르쳐서 그 후에는 비록 큰 가뭄이 있어도 백성은 실농(失農)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 쌓고는 다시 수축(修築)하지 않고, 또 가을과 겨울에 열고 닫지 않고, 봄과 가을에도 절용(節用)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가뭄에 대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수축(修築)하는 규모와 방통(防通)하는 절목(節目)은 말로써 형용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모화루(慕華樓)의 연못 가운데 구멍이 뚫린 기둥[穴柱]을 세우고, 연통(連桶)을 묻어서, 혹은 그치게 하고, 혹은 흐르게도 하니, 수령(守令)으로 부임하는 자로 하여금 모두 이것을 보고 법(法)을 취하게 하여, 그 주현(州縣)의 경내(境內)에 혹은 새 것을 쌓거나, 혹은 옛것을 수축(修築)하게 한다면, 비록 크게 가물더라고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무릇 먹는다는 것은 생민(生民)의 목숨을 맡은 것입니다. 금년에 가뭄은 작년보다 심하니, 명년(明年)의 일이 또한 두렵습니다. 옛 말에 ‘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다.’고 하였고, 또 ‘군자는 우환을 생각하여 그것을 예방한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재택(裁擇)하소서."
임금이 좋다고 하고 호조(戶曹)로 하여금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을 시험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경상도(慶尙道)의 백성은 여름철을 당하여 모[稻苗]를 옮겨 심는다고 하는데, 만약 가뭄을 만나면 모두 농사를 망칠 것이니, 명년부터 일절 금지하라."
이신이 말한 것에 관련하여 심정과 남곤이 피혐을 청하다
상이 20일에 선릉(宣陵)263) 에 제사하려 하였는데, 한강(漢江)의 물이 비 때문에 불었다. 상이 이르기를,
"물이 불어서 배를 타는 것이 매우 위태롭다고 와서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지금 큰 옥사가 있으니, 전에 능에 참배하려 하였는데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대신에게 물으라."
하매,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신 등은 처음에도 온편치 못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상께서 능에 참배하는 일은 예(禮)에 있어서 지당하므로 그만두시도록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미안하게 생각하므로 친제(親祭)하려 하였으나, 이제 마침 옥사가 있고 또 강물이 불었으니 형세가 어려울 듯하다."
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배를 타는 것은 매우 위태로우니, 신은 친행(親幸)하시는 것은 온편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농사철이므로 그 폐해가 적지 않으니 짐작하여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고, 김전(金詮)이 아뢰기를,
"모든 제사에는 반드시 재계(齋戒)해야 하는데 이제 옥사에 임하시니 친제하시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권균(權鈞)이 아뢰기를,
"이미 제사하려는 것을 고하였으니, 이제 친행하실 수 없더라고 신하를 보내어 거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심정(沈貞)이 아뢰기를,
"김식(金湜)이 신을 미워하는 까닭은 ‘주초 대부필(走肖大夫筆)’이라는 참서(讖書)를 궐정(闕庭)에 떨어뜨렸다는 것 때문인데, 이는 바로 최운(崔澐)이 이신(李信)에게 한 말이니 최운을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소서. 신이 하지 않았다면 최운이 어디에서 그것을 알았겠습니까? 이말이 사책(史冊)에 씌어 후세에 전하게 되면, 신이 어떻게 천지 사이에 용납되겠습니까? 또 미치광이가 만일 대내(大內)에 떨어뜨렸다면 상께서 이 말을 듣고 반드시 또한 신이 하였다고 의심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초라는 말은 오늘 비로소 들었다."
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비의군자지 주초대부필(非衣君子智 走肖大夫筆)’이라는 말은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비의’는 배극렴(裵克廉)을 가리키고 ‘주초’는 조준(趙浚)을 가리키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함부로 이것을 말하는 것을 어찌 셈할 만하겠습니까? 그러나 최운을 잡아다가 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빨리 최운을 잡아다가 물어야 하리라."
하였다. 심정이 아뢰기를,
"공사(供辭)에 장차 찬탈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있으니, 마음이 매우 미안합니다. 피혐(避嫌)을 청합니다."
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심정이 미안할 뿐이 아니라 신도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 말 때문에 사피(辭避)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희인(尹希仁)이 아뢰기를,
"최운의 본가가 전의(全義)에 있으니 그 집에 들러서 찾아보고 이어서 김정(金淨)의 배소(配所)에 가서 잡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 권경(權經)을 다시 추문한 공사에 이르기를,
"이신은 과연 신과 말한 것이 없고, 오직 신의 아우 권위(權緯)에게 말하기를 ‘김식이 말하기를 「예전에 주초 대부필이라는 참서(讖書)가 있었는데, 심정이 이 말을 뽑아 내어 이런 일이 있도록 만들었다.」 하였다.’ 합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놀랍고 두려워서 곧 유기(柳淇)에게 가서 의논하였더니, 유기가 말하기를 ‘무사히 밀어 보내는 것이 옳겠다. 그 아내를 빼앗아 숨겨 두고 아내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하고, 유기의 공사에 이르기를,
"이달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마는 이웃에 사는 첩의 아들 권경이 신을 찾아와서, 내가 이신에게 무함당했다고 말하기에, 신이 무함한 것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권경이 답하기를 ‘이신이 그저께 우리집에 와서 「의탁할 곳이 없어 아주 군색하니 행여 나를 위하여 살길을 구처(區處)하여 달라.」 애걸하여 마지않으므로 내가 그 말을 믿고 가엷게 여겨 이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주(晉州)에 전장(田庄)을 가졌는데 네가 가서 의탁하되 종의 지아비가 되어 살거라.」 하고는 남대문 밖에 있는 집에 가서 잠시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였더니, 이신이 자기 아내와 아내의 오라비를 데리고 가서 묵었는데, 밤에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를 따라 진주에 가서 살아야 한다.」 하니 그 아내가 즐겨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네가 처음에는 나를 속여서 서울로 데리고 들어오더니 이제는 또 먼 곳으로 옮아가려고 하는데, 나는 너를 따라갈 수 없다.」 하니, 이신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김식이 망명할 때에 내가 실로 인도하여 갔으므로, 일이 발각되면 나는 반드시 죄를 받게 될 것이기에 멀리 피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권경이 말하기를 ‘이러할 뿐이 아니라 내 아우 위에게 「김식은 내가 실로 인도하여 도망하였는데, 김식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큰 일이 있을 것인데 너는 돌격장(突擊將)이 되어야 하며 유기(柳淇)·박인성(朴仁誠)도 한 가지를 감당할 만하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 크게 놀라서 권경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발각된다면 작은 일이 아니니, 이신이 또 오거든 너는 나에게 알려야 한다.’ 하였더니 권경이 말하기를 ‘이신은 우리가 잡을 것으로 의심하여 반드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남곤이 심정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평심(平心)으로 지론(持論)하였더라도, 자기를 모해(謀害)한 사람에 대하여 어찌 사사로운 노여움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남들이 생각할 것이니, 사피해야 하오."
하니, 성운(成雲)이 말하기를,
"이 일이 영공(令公)들에게 관계되기는 하였으나 국가에 관계가 있으니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위관(委官) 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惟凊)으로 하여금 대간과 함께 국문에 참여하게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심정이 김식의 상소로 인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다
이조 판서 심정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김식의 상소의 뜻은 오로지 신에게 둔 것이라 합니다. 신이 전일에 논박받은 것은 과연 김식이 한 짓이므로 김식은 늘 신이 마음에 원한을 쌓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실패하였을 때에도 일이 일어난 까닭을 모르고서, 그때 마침 신이 논박을 받았으므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가 이조 판서로 기용되어 처음 정사(政事)하던 날에 최운(崔澐)·노필(盧㻶)의 무리가 외람되게 6품이 되었다 하여 물론이 태거(汰去)해야 한다 하므로 아뢰어서 태거하였더니, 그 마음이 신을 더욱 혐의하게 되었습니다. 듣건대 최운이 태거당하였다는 기별을 듣자 벗과 술을 마시고 그 잔을 던지며 성을 냈다 하며, 이제 이신(李信)의 말을 들으니 최운이 말하기를 ‘근일의 일은 심정이 주초 대부필(走肖大夫筆)이라는 참서(讖書)를 전정(殿庭)에 던져서 화를 만든 데에서 말미암았다.’ 하였다 하며, 김식의 소에도 이를 말하였는데, 이것은 천감(天鑑)이 밝으시니 신이 살든 죽든 한이 없으나, 후세와 금시의 선비들이 어찌 신의 실정을 죄다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때에 조금이라도 아뢴 말이 있다면 신은 워낙 변변치 않은 소인이 되었겠으나, 밝으신 성감(盛鑑)에 힘입었으므로 신이 문을 닫고 대죄(待罪)하며 스스로 위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 신이 재주 없는 몸으로 전형(銓衡)의 직임에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무뢰한 자로 조정을 채웠다’는 욕이 조정에 미치게까지 한 것이니, 신이 물러가 있으면 조정도 악명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어미를 봉양하며 물러가 있어 뭇 사람의 헐뜯는 말을 그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김식의 서한과 소장을 보건대 김식의 필적을 내가 모르나, 그 아재비에게 부친 서한은 손수 쓴 것 같고 소장은 스스로 쓴 것이 아닌 듯하다. 그 말은 위에 충성을 바치고 아래에 허물을 돌리는 듯하나, 예전부터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스러운 듯하여 외모는 충성스러우나 내심은 실로 간사한 것이니, 위에서 어찌 이 때문에 경(卿)을 의심하겠으며 경도 어찌 이 때문에 불안하겠는가?"
하매, 심정이 또 아뢰기를,
"참어(讖語)의 일을 신이 하였다고 한 것은 김식의 소와 최운의 말이 다 그러합니다. 주초 비의(走肖非衣)라는 말은 신도 전에 들었으나 대부필(大夫筆)이라는 말은 몰랐었는데 이 일이 난 뒤에 상고하니, 이것은 참사(讖辭)이기는 하나 상의 심지를 경동(驚動)할 말이 아니고 그 말은 본디 전조(前朝)의 말엽에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때 배극렴은 승상(丞相)이고 조준은 대사헌(大司憲)이었는데, 배극렴은 백관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太祖)에게 즉위를 권하였고 조준은 그 소(疏)를 기초(起草)하였으므로 그때에 대부필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또 전조는 인물을 진퇴하는 곳인데 신은 지려(智慮)가 천단(淺短)하므로, 마음을 다하여 하더라도 정사할 즈음에 번번이 과실이 많아서 더욱 미안하니 신의 벼슬을 가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대부니 주초니 하는 것은 다 근거 없는 말이니, 최운에게 물으면 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어찌 이즈음에 경을 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민정중이 상이 항상 근신할 것과 궁장의 일에 처리가 늦음을 상차하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능침에 참배할 적에 아련히 조고(祖考)가 내려와 임하신 듯하였는데, 옛적에 창업하고 지키던 어려움과 오늘날 계승하기 어려운 점을 생각하시면서, 반드시 앞으로 근신하고 두려워하여 날마다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잠깐 사이라도 끊임이 없게 하시면, 어디서든지 조고를 뵙게 되어 성상의 효도가 날로 빛날 것이니, 나라를 보호하고 왕실을 흥성하게 하는 것이 또한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미약한 마음을 향해 뭇 사욕이 공격해 오는만큼, 분명하게 뜻을 스스로 세워 줄기차게 나가지 않는다면, 성색(聲色)·화리(貨利)·기기(奇技)·음교(淫巧) 따위가 뒤섞여 번갈아 들어오므로 침식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리의 학문을 강구해 나가야만이 이 마음을 밝힐 수 있으며, 어진 사대부를 가까이 해야만이 이 마음을 기를 수 있으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즐겨 들어야만이 이 마음을 유지해 갈 수 있습니다.
대개 학문에 뜻을 돈독히 가지면 성경(聖敬)은 날로 발전하여 계승해서 번창해 가는 공이 있을 것이며,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는 때가 많으면 총명이 날로 넓혀져 서로 수양되는 이익이 있을 것이며, 언로를 활짝 연다면 자신의 허물을 날로 듣게 되어 거절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 가지의 일에 힘을 쏟는다면 전하의 마음이 맑아져 사특한 것들이 물러가게 되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도 이를 따라 모두 극치에 이를 것입니다. 옛날 태조 대왕께서 건국 초기에 대사성 유경(劉敬)과 내사사인 유관(柳觀)에게 명하여 교대로 날마다 숙직하게 하면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게 하셨는데, 성인께서 창업하여 대통을 물려주면서 자손들이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 뒤로 성신(聖神)이 서로 이어 3백 년을 지내오면서 학문에 종사하는 그 돈독함은 전이나 뒤나 똑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조(聖朝)의 가법이니, 오늘날 계승하여 해나가야 할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해서(海西) 궁장(宮庄)의 일에 대해 헌신(憲臣)이 논집한 지 오래되었고 신들도 면전에서 진달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아직까지 미루고만 계십니다. 만일 친애한다 하여 사사로이 비호하는 점이 있다면, 이는 뭇 신하들이 성명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조금 삼갈 줄 아는 사대부라도 백성과 전지로 송사를 벌여 스스로 제 몸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인데, 더구나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가난한 백성과 몇 치의 토지를 다투어 스스로 그 중함을 손상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옛날 태조조에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자들에게 전지를 더 줄 것을 청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본과(本科) 1백 결만 가지고도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을텐데, 만일 더 준다면 사람들이 필시 나보고 자기 아들만 생각한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전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줄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비록 화목과 우애의 도리를 돈독히 하신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은택을 마구 주어 조종조에 정한 가르침을 뛰어넘는다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고, 또 공사 간에 시장(柴場)과 어장(漁場)을 마음대로 차지하는 폐단을 금지할 것에 대해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main/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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