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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趙浚, 1346년 ∼ 1405년 11월)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시인(詩人), 무신(武臣), 정치가(政治家), 혁명가(革命家)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다. 작위는 충의군(忠義君),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연(趙璉)의 손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덕유(趙德裕)의 5남이고 태종 둘째딸 경정공주의 부군인 조대림(趙大臨)의 아버지이다.
1371년(공민왕 21년) 음서로 문관 관직에 천거되었다가 1374년(공민왕 24년)에 과거(문과)에 급제, 공민왕 시대와 우왕 시대에 문관(文官)과 무관(武官)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384년 관직에서 잠시 물러났다.

1388년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의 신임을 받고 관직에 전격 복귀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대사헌 등을 거쳐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되었다.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 밀직사사(密直司事) 겸 대사헌의 지위로써 문하시중 조민수(曺敏修)를 탄핵하여 축출시키고 이어 1389년 창왕 폐위 및 공양왕 보위 추대에도 개입하였다. 3년 후 1392년(공양왕 4년)에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의기상투(意氣相投)하여 고려 공양왕을 폐위하고 조선 태조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는 특히 경제와 이재에 밝아 전제 개혁안을 통해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개편하였다. 정치적으로 동반자였던 정도전과는 요동정벌 문제로 결별한 뒤, 제 1차 왕자의 난에 협조하여 그 일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조선 시대 초기를 통하여 그는 도통사·문하우시중·좌정승 등을 거쳐 1403년 음력 7월 16일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조준을 가리켜 항상 조정승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조대림은 경정공주와 혼인하여 평녕군(平寧君)에 봉해지는 등 왕실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다. 시문에 능하였고 1397년(태조 6년) 하륜 등과 함께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태조실록 1권, 총서 96번째기사

사전을 혁파하다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 기사 【홍무(洪武) 22년.】 , 이때에 토지 제도가 크게 허물어져서 겸병(兼倂)하는 집안에서는 남의 전지(田地)를 빼앗아 산(山)과 들[野]을 둘러싸고 있으니, 고통이 날로 심하여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였다. 태조가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과 더불어 의논하여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겸병을 막고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고 민심이 더욱 따르게 되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00번째기사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다

처음에 청친조사(請親朝使) 윤승순(尹承順) 등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065) 에 자문을 보내니, 이성(異姓)으로써 왕씨(王氏)의 후사로 삼았음을 책망하고 친조(親朝)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태조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정몽주(鄭夢周)·정당 문학(政堂文學) 설장수(偰長壽)·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趙浚)·판자덕부사(判慈德府事) 박위(朴葳)·밀직 부사(密直副使) 정도전(鄭道傳)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병위(兵衛)를 크게 벌여 두고 의논하기를,

"우(禑) 창(昌)은 본디 왕씨(王氏)가 아니므로 봉사(奉祀)하게 할 수가 없는데, 또 천자(天子)의 명령까지 있으니, 마땅히 거짓 임금을 폐하고 참임금을 새로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요(瑤) 신왕(神王)066) 의 7대 손자로서 족속(族屬)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세워야 될 것이다."

하고는, 공민왕의 정비궁(定妃宮)에 나아가서 정비의 말씀을 받들어 우왕은 강릉(江陵)에 옮겨 두고, 창왕 강화(江華)에 내쫓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요(瑤)를 맞아서 왕으로 세우니, 이 분이 공양왕(恭讓王)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10번째기사

태조의 공적을 치하하는 교서

4월, 공양왕 중사(中使)076) 를 보내어 문병하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교서(敎書)를 공신(功臣)에게 내려 그 공로를 칭찬하고 내구마(內廐馬) 1필, 백금(白金) 50냥, 비단과 명주 각 5단(端), 금대(金帶) 한 개를 내리고 이내 내전(內殿)에서 위로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다. 태조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아아! 비상(非常)한 변고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人才)를 기다리게 되며, 만세(萬世)의 공을 세우는 사람은 반드시 한이 없는 보수(報酬)를 받게 마련이다.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077)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비로소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대실(大室)078) 에 함께 배향(配享)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거의 5백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 이인임(李仁任)이 몰래 현릉(玄陵)079) 에게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를 인도하여 상상(上相) 자리를 차지하고는, 임금에게 원망을 돌아가게 하여 마침내 갑인년의 변고080) 를 초래하여 사자(嗣子)가 없게 하였다. 인임(仁任)은 이에 〈여불위(呂不韋)가〉 진(秦)나라를 도적질한 계책081) 을 써서, 현릉조(玄陵朝)의 요망스런 중[僧] 신돈(辛旽)의 소생인 우(禑)로써 거짓으로 현릉의 궁인(宮人)이 낳은 아이라고 일컫고 이를 왕으로 세우니, 현릉의 모후(母后)가 불가하다고 했으며, 재상(宰相) 이수산(李壽山)의 종친(宗親)을 세우기를 청했으나 인임이 따르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했으며, 누른 안개[黃霧]가 사방에 차 있어 햇볕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禑)가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현릉을 장사할 적엔 무지개가 태양을 둘러쌌으며, 증제(烝祭)082) 를 주관할 적엔 올빼미가 대실(大室)에서 울고 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했으며, 그가 현릉의 아버지인 의릉(毅陵)083) 의 기일(忌日)에 재계할 적엔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천둥과 번개하며 우박이 내렸으며, 그가 작(爵)을 물려받을 적엔 바람이 조묘(祧廟)084)  침원(寢園)085) 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뽑고, 대실(大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廩)에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혼령이 위엄을 보여 우(禑)를 끊으려고 한 것이다. 우(禑)의 어미 반야(般若)를 죽여 증언(證言)할 사람을 없애었는데 사평(司平)의 새 문[新門]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죽은 후에 살이 썩어 없어진 뼈를 장사하여 우(禑)의 어미라 하였는데, 널[柩]을 안치한 장막이 하루 동안에 두 번이나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만세(萬歲)에 우(禑) 반야(般若)의 아들임을 보이는 것이다.

우(禑)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는데도 그 어미의 명씨(名氏)가 정해지지 않으니, 재상(宰相)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세상에 그 아비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혹 있을 수 있지마는, 그 어미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나는 듣지 못하였다.’하여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였으나, 현릉의 모후(母后)가 힘써 구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김유(金庾) 우(禑) 왕씨(王氏)가 아님을 황제에게 말하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선뜩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禑)의 아내는 인임(仁任)의 질녀(姪女)인데 창(昌)을 낳았으니, 이에 왕씨(王氏)의 흥복(興復)될 희망은 끊어졌다. 인임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15년이나 되었는데, 우(禑)가 또한 광패(狂悖)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꾀하여 삼한(三韓)의 백만 백성들을 징발하여 다 죽이려고 하였는데, 경(卿)과 부관(副官) 조민수(曺敏修)가 행군(行軍)이 압록강을 지날 때, 경(卿)이 여러 장수들에게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이 매여 있다는 계책으로써 깨우쳐 군사를 돌이켰으니, 이것은 경이 우리 백성들의 이미 죽은 것을 다시 살게 한 것이오. 사직이 망하지 않은 것은 다만 경에게 힘입었소. 경의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가고 직위는 양부(兩府)086) 에 높았으며, 공명(功名)은 세상에서 뛰어났으나 자랑하지 않았소. 《강목(綱目)》087)  《연의(衍義)》088) 를 읽기를 좋아하여 유후(留侯)089) · 강후(絳侯)090) · 무후(武侯)091) · 양공(梁公)092) 의 충성에 감동한 까닭으로, 군사를 돌이켰던 그 즈음에 흥복(興復)을 의논하니, 민수(敏修)도 또한 그렇게 여기었소. 그러나, 이미 돌아와서는 그 친척 인임(仁任)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경(卿)의 의논은 저지시키고 창(昌)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총재(冢宰)093) 가 되었으니,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일이 한 번의 큰 기회를 잃게 되었소. 경은 속으로 견디고 참아 관직에 종사하면서 공의(公義)로써 민수(敏修)를 개유(開諭)하고, 이에 대간(臺諫)의 인선(人選)을 철저히 하여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켰소. 이에 헌사(憲司)에서 민수를 탐욕이 많아 법을 남용(濫用)했다고 탄핵하여 쳐서 제거하였소.

경은 밤에 생각한 일이 있으면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고, 현인(賢人)을 구하기를 목마름과 같이 하며, 악(惡)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여, 모든 백성들의 조그만 이익도 반드시 일으키고자 하고, 조그만 해로움도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며, 언로(言路)를 열어 민정(民情)을 통하게 하고, 일민(逸民)094) 을 천거하여 공도(公道)를 널리 폈소. 지난번의 뇌물로 분경(奔競)095) 하는 기풍과 금전으로 관직과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草野)에는 천거되지 않은 현인(賢人)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가 없으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휘권[鉞]을 주고, 주군(州郡)을 순시하여 출척(黜陟)을 행하매, 번진(藩鎭)096) 이 감히 구적(寇賊)을 내버려두지 못하고, 목수(牧守)가 감히 백성을 해하지 못하며, 여러 소인의 사설(邪說)을 배척하여 사전(私田)을 여러 도(道)에서 개혁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塗炭) 속에서 구제하여, 넉넉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지경으로 올려 놓았소. 규전(圭田)097) ·채전(采田)098) 의 법을 채용하여 서울에 벼슬하는 사람에게 전지(田地)를 공급함으로써 군자(君子)를 우대하고 수위(守衛)를 엄하게 하니, 관작을 주되 사정(私情)이 아니고, 형벌을 쓰되 노(怒)한 것이 아니오, 경의 성심(誠心)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고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명백하여 우부 우부(愚夫愚婦)도 다 함께 보는 바이니, 그 경영해 하는 일이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터전이 아닌 것이 없었소.

기사년 겨울에 창(昌)이 보낸 청조사(請朝使) 윤승순(尹承順)이,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으로 보낸 것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고려의 왕위는 자손이 끊어져서 이성(異姓)으로써 왕씨(王氏)로 꾸몄으니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니다.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관위(官位)에 있어 군신(君臣)의 본분(本分)을 지킨다면, 비록 수십 대(代)나 조회하지 않더라도 또한 무엇이 걱정되겠으며, 해마다 와서 조회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싫겠는가? 동자(童子)099)  경사(京師)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천자(聖天子)께서 현릉(玄陵)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한 시기에 남보다 앞서 신하라 일컬어, 천하 사람들에게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곳이 있음을 알게 하여, 천운을 도와주는데 큰 공이 있음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제사(祭祀)가 끊어진 것을 민망히 여겨 왕씨(王氏)의 신자(臣子)에게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간절하기 때문이었소. 창(昌)의 외조부(外祖父)인 이임(李琳)이 총재(冢宰)로서 황제의 조칙을 숨기고 발표하지 아니하여, 흉악한 꾀가 헤아릴 수가 없었으니, 신씨(辛氏)의 변고는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발생하게 되었소. 왕씨(王氏)는 이미 솥 안의 물고기처럼 되어 존망(存亡)이 호흡(呼吸)에 달려 있었는데, 경이 만번 죽을 고비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몸소 대의(大義)를 잡아 지켜, 우리 왕씨(王氏)를 위하여 만세(萬世)의 계책을 정하니, 덕부(德符)·몽주(夢周)·용기(湧奇)·장수(長壽)·석린(石璘)·조준(趙浚)·박위(朴葳)·도전(道傳) 8명의 장수가 서로 따라 도와서 11월 15일에 천자의 조칙을 현릉 정비(定妃)의 뜰에 선포하고, 나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여 현릉의 후사(後嗣)로 삼아, 한 사람도 처형(處刑)하지 않고 새벽에서 조반(朝飯) 때가 되기 전에 16년 동안 왕노릇을 한 신씨(辛氏)를 제거하였소. 그 인친(姻親)과 지당(支黨)들이 온 나라에 뿌리가 서려 얽혔으나,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보고는 간담이 떨어져 면모(面貌)를 고치고 향순(向順)하면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으며, 햇빛은 봄과 같았소. 위로는 31대(代)를 서로 계승하던 차례를 잇게 되고, 아래로는 천만억(千萬億) 대(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열어 놓았으니, 경의 흥복(興復)한 공은 강후(絳後)100)  오왕(五王)101) 에게 비길 바가 아니오.

경은 대대로 충의(忠義)를 쌓아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했는데, 덕(德)이 후하매 유광(流光)이 경의 몸에 나타났으며,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을 다 갖추었으니 왕좌(王佐)의 재주요, 나라만 위하고 집은 잊었으니 사직(社稷)의 신하요, 천지와 조종(祖宗)께서 도타이 낳았으니[篤生] 삼한(三韓)의 안위(安危)에 주의(注意)한 것이고 현릉(玄陵)에게 지우(知遇)되어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양경(兩京)102) 을 수복하고, 요망스런 중[僧]103) 을 몰아내어 왕씨(王氏)를 편안하게 하고, 납씨(納氏)104) 을 달아나게 하여 사막(沙漠)에 위엄을 떨쳤고, 왜구를 패퇴시켜 서해를 보전하고, 인월(引月)에서 공격하여 부상(扶桑)105) 을 겁내게 했는데, 경은 현릉의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종묘(宗廟)의 절사(絶祀)를 슬퍼하여 해가 지는 곳[虞淵]에서 해를 붙잡기를 맹세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은 천지에 통하고, 지극한 충성은 조종(祖宗)에 통하였소.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대함은 삼한(三韓)의 마음을 감복시켰고, 지극히 인애(仁愛)하고 지극히 은혜로움은 만백성의 환심을 맺게 하였소. 하늘은 대순(大順)106) 을 돕고 사람은 대신(大信)107) 을 돕는 까닭에, 흥복(興復)이 이같이 쉬웠던 것이오. 경은 이에 현릉의 지우(知遇)를 진실로 갚게 되었소. 옛날에 주공(周公)이 국가에 훈공이 있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동방에 제후(諸侯)로 삼았으니, 내가 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모토(茅土)를 나누어 대대로 봉후(封侯)하게 하고, 모습을 그리고 공(功)을 새기며, 자손에게 무궁한 세대까지 유사(宥赦)하게 하오. 내가 원자(元子)를 거느리고 이 일을 종묘에 고하오. 아아! 경이 우리의 억조 백성을 살리고 우리의 종사(宗祀)를 계승하여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건국하게 한 공로는, 변변치 못한 포상(褒賞)으로써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는가? 경이 중흥(中興)의 원신(元臣)이 되어 명망은 배 태사(裵太師)108) 와 같으나, 임무는 상(商)나라 아형(阿衡)109) 보다 무겁도다! 경륜(經綸)을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어 만세(萬世)의 법칙으로 삼고, 준수한 인재를 좌우로 구하여 우리 조정을 거듭 나게 함으로써, 덕이 적은 나를 보필하고, 우리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게 하니,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이 만년 동안에 조상의 제사와 함께 제향(祭享)하게 된다면, 나의 덕이 적은 사람도 함께 빛이 있겠소! 경의 자손도 경의 충량(忠良)을 본받아 영세(永世)토록 잊지 않고서, 나의 후사왕(後嗣王)을 보필하여 나라와 더불어 함께 경사를 누린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군사를 돌이킨 공을 기록하여 교지(敎旨)를 내려 포장(褒奬)하고 전지(田地) 1백 결(結)을 내려 주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29번째기사

세자가 명에서 돌아오다. 정몽주가 태조를 견제하기 위해 태조의 측근을 탄핵하다

3월, 세자(世子) 석(奭) 중국에 조현(朝見)하고 돌아오니, 태조 황주(黃州)에 나가서 맞이하고, 드디어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장차 길을 떠나려 하매 무당 방올(方兀) 강비(康妃)에게 말하기를,

"공(公)의 이번 행차는, 비유하건대, 사람이 백척(百尺)의 높은 다락[樓]에 오르다가 실족(失足)하여 떨어져서 거의 땅에 이르매, 만인(萬人)이 모여서 받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강비가 매우 근심하였다. 태조가 활을 쏘아 사냥하면서 새를 쫓다가,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졌으므로 드디어 떨어져 몸을 다쳐, 교자(轎子)를 타고 돌아왔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연달아 보내어 문병(問病)하였다. 처음에 정몽주(鄭夢周)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조정과 민간이 진심으로 붙좇음을 꺼려하였는데,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는 기색이 있으면서 기회를 타서 태조를 제거하고자 하여,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말하기를,

"먼저 그의 보좌역(補佐役)인 조준(趙浚) 등을 제거한 후에 그를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태조의 친근하고 신임이 있는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준(趙浚)·전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전 판서(判書) 윤소종(尹紹宗)·전 판사(判事) 남재(南在)·청주 목사(淸州牧使) 조박(趙璞)을 탄핵하니, 공양왕이 그 글을 도당(都堂)139) 에 내렸다. 몽주(夢周)가 중간에서 이를 선동(煽動)하여 조준 등 6인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그 무리 김귀련(金龜聯)·이반(李蟠) 등을 조준·정도전·남은의 귀양간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그들을 국문(鞫問)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김귀련 등이 길을 떠나려 할 적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모친상[內憂]를 당하여 속촌(粟村)의 무덤 옆에서 여막(廬幕)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李濟)가 차와 과일을 준비하여 가니, 전하(殿下)가 이제에게 말하기를,

"몽주는 반드시 우리 집에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이를 먼저 제거해야 되겠다."

하매, 이제는 말하기를,

"예! 예!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였다. 태조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유숙하니, 전하가 달려와서 아뢰기를,

"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모함(謀陷)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태조는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마땅히 곧 서울로 들어가셔야 될 것입니다. 유숙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태조께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굳이 청한 후에야 태조가 병을 참고 밤에 행차하니, 전하가 태조를 부축하여 저택(邸宅)에 이르렀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1번째기사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정몽주(鄭夢周) 성헌(省憲)140) 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화(和), 사위인 이제(李濟)와 휘하의 황희석(黃希碩)·조규(趙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禍)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몽주(夢周)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上王)141)  이화(李和)·이제(李濟)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道傳) 등을 국문(鞫問)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廬幕)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142) 를 마치게 하라."

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邸宅)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극언(極言)하기를,

"백성의 이해(利害)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혈통(血統)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私第)로 돌아와서 상왕(上王)과 이화(李和)·이제(李濟)와 의논하여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豆蘭)은 말하기를,

"우리 공(公)143) 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하고는, 휘하 인사(人士)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王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 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이씨(李氏)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니, 영규(英珪)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영규·조영무(趙英茂)·고여(高呂)·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公)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康妃)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전하는,

"마땅히 휘하의 인사를 모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待備)해야 되겠다."

하면서, 즉시 장사길(張思吉)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태조는 마지못하여 황희석(黃希碩)을 불러 말하기를,

"몽주 등이 죄인과 한편이 되어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伏罪)하여 처형(處刑)되었으니, 마땅히 조준·남은 등을 불러 와서 대간과 더불어 변명하게 할 것이다. 경(卿)이 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라."

하니, 희석(希碩)이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여 말이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가 곁에 있다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므로, 희석이 대궐에 나아가서 상세히 고하니, 공양왕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탄핵을 당한 사람들과 맞서서 변명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장차 대간(臺諫)을 밖으로 내어보낼 것이니, 경(卿)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 때 태조는 노기(怒氣)로 인하여 병이 대단하여,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하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다."

하고는, 비밀히 이자분(李子芬)을 보내어 조준·남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할 의사로써 개유(開諭)하고, 또 상왕(上王)과 이화·이제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상왕을 보내어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만약 몽주의 무리를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면 신(臣) 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공양왕이 마지못하여 대간(臺諫)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외방(外方)에 귀양보내야 될 것이나, 국문(鞫問)할 필요가 없다."

하더니, 조금 후에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문하 평리(門下評理) 김주(金湊)·동순군 제조(同巡軍提調) 김사형(金士衡) 등에게 명하여 대간을 국문하게 하니,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를 보내어 신(臣) 등에게 이르기를, ‘판문하(判門下) 이성계(李成桂)가 공(功)을 믿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다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보좌역(補佐役)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숭인·이종학·조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조금 후에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우간의(右諫議) 이내(李來)·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사헌 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와 장령(掌令) 김묘(金畝)·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이신(李申) 이숭인·이종학을 먼저 먼 지방에 귀양보냈다. 형률(刑律)을 다스리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진양 등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진양 등은 몽주의 사주(使嗾)를 받았을 뿐이니, 어찌 함부로 형벌을 쓰겠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호되게 곤장을 쳐야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미 이들을 용서했는데 어찌 곤장을 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진양 등이 이로 말미암아 형벌을 면하게 되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2번째기사

조준 등을 소환하고 태조를 문하 시중으로 임명하다

조준 등을 소환(召還)하고, 태조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으니, 태조가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3번째기사

공양왕이 태조의 집에 가서 위문하다. 조인옥 등 52명이 태조를 추대하기로 결정하다

6월, 공양왕 태조의 사제(私第)에 거둥하여 병을 위문하였다. 남은(南誾)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이킨 때로부터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비밀히 태조를 추대하기로 의논하였는데, 돌아온 후에 전하(殿下)에게 알리니, 전하가 말하기를,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투어 서로 추대하려고 하여, 혹은 빽빽하게 모인 많은 사람이 있는 중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소속된 데가 있는데, 어찌 빨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하가 이에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는데, 남은이 비밀히 평소부터 서로 진심으로 붙좇은 조준·정도전·조인옥·조박(趙璞) 등 52인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기를 모의했지만, 그러나, 태조의 진노(震怒)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들어가서 강비(康妃)에게 고하여 태조에게 전달되도록 하였으나, 강비도 또한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남은 등에게 일렀다.

"마땅히 즉시 의식(儀式)을 갖추어 왕위에 오르심을 권고해야 될 것이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태조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먼저 이달 12일에 공양왕(恭讓王)이 장차 태조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 시좌궁(時坐宮)001) 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 조준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기로(閑良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 강비(康妃)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는 시조(始祖)가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권신(權臣)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자기의 총행(寵幸)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요망스런 중[妖僧]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 공민왕의 후사(後嗣)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해 있은 지가 15년이 되었으니,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는 이미 폐(廢)해졌던 것입니다. 우(禑)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公)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이색(李穡)·조민수(曹敏修) 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두 번이나 폐(廢)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왕위(王位)로써 공(公)에게 명한 시기이었는데도, 공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위태로운 사직(社稷)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 그 무리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은 미혹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매,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에 도망해 들어가서, ‘본국(本國)002) 이 이미 배반했다.’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장차 본국(本國)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과연 행해졌다면 사직(社稷)은 장차 폐허(廢墟)에 이르고 백성도 또한 멸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疏)를 번갈아 올려 계청(啓請)하기를, ‘이색·우현보 등이 사직(社稷)에 죄를 얻고 백성에게 화(禍)를 끼쳤으므로써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하여 글이 수십 번 올라갔는데, 정창군(定昌君)003) 은 인아(姻婭)의 관계라는 이유로써 법을 굽혀 두호(斗護)하여 언관(言官)을 곤장을 쳐서 쫓으니, 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면서 당(黨)을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變)에 응하기를 도모하여, 화란(禍亂)의 일어남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는데, 정창군(定昌君)은 사직(社稷)과 백성을 위하는 큰 계책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사의 은혜를 베풀어 인망(人望)을 수습하고자 하여, 다만 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용서해 주고 곡진히 더 탁용(擢用)하였으니, 《서경(書經)》의 이른바, ‘달아난 죄수를 수용하는 괴수가 되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듯, 짐승이 숲에 모이듯 한다.’는 것입니다. 도와서 왕을 세울 계책을 결정한 것으로써 말한다면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으며,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것으로써 말한다면 덕택이 백성에게 가해졌는데도, 이에 좌우에 있는 부인(婦人)과 환자(宦者)의 참소를 지나치게 듣고서 반드시 죽을 곳에 두려고 하고, 사람들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죄를 주니, 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들이 뜻대로 되고, 충성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기(氣)가 꺾여져서,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그 수족(手足)을 둘 데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려서, 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요얼(妖孽)004) 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定昌君)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제(私第)로 갔습니다. 다만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8일 정유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대소 신료가 태조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명의 예부에 사신을 보내자고 청하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및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반(趙胖)으로 하여금 중국 서울에 가서 예부(禮部)에 아뢰게 하기를 청하였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우리 나라가 공민왕이 후사(後嗣)없이 세상을 떠나자 후사(後嗣)가 없으매, 역신(逆臣)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 등에 의하여 왕으로 세워졌으나, 우(禑)는 곧 혼폭(昏暴)하고 광자(狂恣)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으로 향하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면서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이에 돕는 사람이 적은 것을 스스로 알고서,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여 아들 창(昌)에게 물려주니, 나라 사람들이 공민왕의 비(妃) 안씨(安氏)의 명령을 받들어 왕씨(王氏)의 종친(宗親)인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한 지가 지금 4년이나 되었습니다. 요(瑤)가 또한 혼미(昏迷)하여 법에 어그러져서 충성하고 정직한 사람을 소원(疏遠)하게 하고, 참소하고 간사한 무리를 친근(親近)하게 하여, 시비(是非)를 변란(變亂)시키고 훈구(勳舊)를 모함(謀陷)하며, 불신(佛神)에게 아첨하여 혹하고, 토목(土木) 공사를 함부로 일으켜 비용을 낭비함이 한도가 없으니, 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 석(奭)이 어리석고 무지(無知)하여 주색(酒色)이 방종하며 여러 소인을 모아 충성하고 정직한 사람을 모해(謀害)하였으며, 또 그 신하 정몽주(鄭夢周) 등이 간사한 계책을 몰래 이루어 난(亂)의 발단을 일으키고자 하여, 이에 훈신(勳臣) 이성계(李成桂)·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는 요(瑤)에게 참소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논핵(論劾)하여 해칠 것을 꾀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여 몽주(夢周)를 함께 목 베었습니다.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하는 요(瑤)가 그래도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고 또 살육(殺戮)할 것을 꾀하므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실로 사직(社稷)과 백성이 모두 그 해를 입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고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생각하기를 이 같은 짓으로는 이 백성들을 다스리고 사직(社稷)을 받들기가 어렵다고 하여,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2일에 공민왕의 비(妃) 안씨(安氏)의 명령으로써 요(瑤)를 사제(私第)에 물러가 있게 하였습니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하루라도 통솔(統率)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 종친(宗親) 중에서 가려 뽑아 보니 세상의 인망(人望)에 당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성계(李成桂)는 은택(恩澤)이 백성들에게 입혔으며, 공로는 사직(社稷)에 있어서, 조정과 민간의 마음이 일찍부터 모두 진심으로 붙좇았으므로, 이에 온 나라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군민(軍民)들이 모두 왕으로 추대하기를 원하여, 지밀직부사(知密直司事) 조반(趙胖)으로 하여금 앞서 조정(朝廷)에 가서 주달(奏達)하게 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번거롭게 아뢰옴을 밝게 살펴서 여러 사람의 뜻을 굽어 따라서, 한 나라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소서."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8일 정미 5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홍영통·안종원·배극렴·조준·이화·윤호·정도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문하부(門下府)에 교지를 내려 홍영통(洪永通)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안종원(安宗源)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배극렴(裵克廉)을 익대 보조 공신 문하 좌시중(翊戴補祚功臣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으로, 조준(趙浚)을 좌명 개국 공신 문하 우시중(佐命開國功臣門下右侍中) 평양백(平壤伯)으로, 서제(庶弟) 이화(李和)를 좌명 개국 공신(佐命開國功臣)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도절제사(都節制使) 의안백(義安伯)으로, 윤호(尹虎)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김사형(金士衡)을 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판팔위사(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判八衛事) 상락군(上洛君)으로, 정도전(鄭道傳)을 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 봉화군(奉化君)으로, 정희계(鄭熙啓)를 좌명 공신(佐命功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팔위 상장군(八衛上將軍) 계림군(雞林君)으로, 이지란(李之蘭)을 보조 공신(補祚功臣) 참찬문하부사 의흥친군위 절제사(節制使) 청해군(靑海君)으로, 남은(南誾)을 좌명 공신 판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佐命功臣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의령군(宜寧君)으로, 김인찬(金仁贊)을 보조 공신 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中樞院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익화군(益和君)으로, 장사길(張思吉)을 보조 공신 지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知中樞院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화녕군(和寧君)으로, 정총(鄭摠)을 보조 공신 첨서중추원사(補祚功臣僉書中樞院事) 서원군(西原君)으로, 조기(趙琦)를 보조 공신동지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同知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은천군(銀川君)으로, 조인옥(趙仁沃)을 보조 공신 중추원 부사(補祚功臣中樞院副使) 용성군(龍城君)으로, 황희석(黃希碩)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남재(南在)를 좌명 공신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의성군(宜城君)으로 삼았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9일 무진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공신과 그 부인들이 각각 임금과 중궁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이 임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여러 공신의 부인들도 또한 중궁(中宮)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0일 기사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서자 이방석을 왕세자로 정하다

어린 서자(庶子) 이방석(李芳碩)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 처음에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를 존중하여 뜻이 이방번(李芳蕃)에 있었으나, 이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사적으로 서로 이르기를,

"만약에 반드시 강씨(康氏)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 아들이 조금 낫겠다."

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라고 물으니, 장자(長子)로써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써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결정하여 세자로 세웠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0일 기사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개국 공신의 위차를 정하다

교지(敎旨)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위차(位次)를 정하게 하였다.

"고려 왕조의 임금의 자리는, 공민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요망한 중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사이를 틈타 도둑질해 차지하여, 주색(酒色)에 빠져 무도(無道)한 짓을 하고, 마음대로 살육(殺戮)을 행하였으며, 무진년에 함부로 군대를 일으켜 장차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려고 하는데, 여러 장수들이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그제야 그 죄를 스스로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전했으니, 왕씨(王氏)가 이미 끊어진 것이 16년이 되었는데, 그래도 오히려 종친(宗親) 중에서 택하여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다. 요(瑤)는 혼미(昏迷)하여 법도에 어긋나서, 먼 앞날을 헤아리는 대체(大體)를 잊고 눈앞의 작은 이익만 보고, 그 사친(私親)이 있는 것만 알고 공신(功臣)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전제(田制)는 그 경계(經界)의 바른 것을 싫어하고, 공름(公廩)은 자식과 사위의 봉양(奉養)에 다 없어졌으며, 무릇 정인(正人)·군자(君子)에게는 다만 시기하고 꺼릴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죄를 가하고자 하며, 참소하고 아첨하여 면전(面前)에서 알랑대는 자에게는 다만 친근히 할 뿐만 아니라 빠짐없이 임용하여, 상벌(賞罰)은 규칙이 없어서 국법(國法)을 무너뜨리고, 용도(用度)는 절제(節制)가 없어서 백성의 재물을 해치게 하였으며, 다만 인아(姻婭)와 부시(婦寺)078) 의 말만 듣고, 곧은 말을 하는 선비는 모두 내쫓았으니, 백성이 원망하고 신(神)이 노하여, 요얼(妖孼)이 자주 일어나고, 화란(禍亂)의 기미가 날로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사길(張思吉)·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인옥(趙仁沃)·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남재(南在)·예조 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대장군(大將軍) 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 등은 천명(天命)의 거취(去就)와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알고, 백성과 사직(社稷)의 대의(大義)로써 의심을 판단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과궁(寡躬)을 추대하여 대업(大業)을 함께 이루어 그 공이 매우 컸으니,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작게 되어도 잊기가 어렵도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공조 전서(工曹典書) 이민도(李敏道)·대장군(大將軍) 박포(朴苞)·예조 전서(禮曹典書) 조영규(趙英珪)·지중추원사 조반(趙胖)·평양 윤(平壤尹) 조온(趙溫)·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조기(趙琦)·좌부승지(左副承旨) 홍길민(洪吉旼)·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유경(劉敬)·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정용수(鄭龍壽)·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장담(張湛) 등은 모의(謀議)에 참여하여 과궁을 추대하였으니, 그 공이 또한 크며, 도승지 안경공(安景恭)·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김균(金稛)·전 한양 윤(漢陽尹) 유원정(柳爰廷)·전 지신사(知申事) 이직(李稷)·좌승지 이근(李懃)·호조 전서(戶曹典書) 오사충(吳思忠)·형조 전서(刑曹典書) 이서(李舒)·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 조영무(趙英茂)·전 예조 판서 이백유(李伯由)·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이부(李敷)와 상장군(上將軍) 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과 사헌 중승(司憲中丞) 심효생(沈孝生)·전의감(典醫監) 고여(高呂)·교서감(校書監) 장지화(張至和)·개성 소윤(開城少尹) 함부림(咸傅霖) 등은 고려 왕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과궁에게 뜻을 두고 오늘날까지 이르도록 지조를 굳게 지키고 변하지 않았으니, 그 공이 칭찬할 만하다! 위에 말한 사람들에게는 차례대로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그 포상(褒賞)의 전례(典禮)는 유사(有司)에서 거행할 것이다. 중추원 사(中樞院使) 김인찬(金仁贊)은 불행히 죽었지마는, 일찍이 극렴 등이 의심을 판단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과궁을 추대할 때에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도왔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아울러 극렴의 예(例)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3일 임신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이숭인·이종학·우홍수의 졸기

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김로(金輅) 등은 조정에 돌아왔으나, 경상도에 귀양간 이종학(李種學)·최을의(崔乙義) 전라도에 귀양간 우홍수(禹洪壽)·이숭인(李崇仁)·김진양(金震陽)·우홍명(禹洪命) 양광도(楊廣道)에 귀양간 이확(李擴) 강원도에 귀양간 우홍득(禹洪得) 등 8인은 죽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장(杖) 1백 이하를 맞은 사람이 모두 죽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숭인(崇仁) 성주(星州) 사람으로서, 자(字)는 자안(子安)이며, 호(號)는 도은(陶隱)이니, 성산군(星山君) 이원구(李元具)의 아들이다. 고려 지정(至正) 경자년(1360)에 나이 14세로서 성균시(成均試)081) 에 합격하고, 임인년(1362)에 예위시(禮闈試)082) 병과(丙科) 제2인에 합격하여 예문 수찬(藝文修撰)에 임명하였으며, 여러 번 옮겨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해년(1371)에 조정(朝廷)083) 에서 공사(貢士)084) 를 보내도록 명하니,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향시(鄕試)를 주관하면서 숭인을 뽑아 제1로 삼았는데, 공민왕이 이를 아끼어 〈중국에〉 보내지 아니하였다. 조금 후에 성균 직강(成均直講)과 예문 응교(藝文應敎)에 제수(除授)되어 전리 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다. 이때 김승득(金承得) 박상충(朴尙衷) 등을 지윤(池奫)에게 무함(誣陷)하여 모두 외방(外方)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숭인도 또한 대구현(大丘縣)으로 폄출되었다. 무오년에 성균 사성(成均司成)으로 소환(召還)되었다. 신유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임술년에 기복(起復)되어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으로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했는데, 아버지가 생존해 있고, 또 기년(期年)이 지났으므로, 시관(試官)을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일로써 그의 결점을 지적하였다. 벼슬을 옮겨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이르고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병인년에 하정사(賀正使)로 중국의 서울에 가고, 무진년 봄에 최영(崔瑩)의 문객(門客) 정승가(鄭承可)의 참소를 입어 통주(通州)로 폄출(貶黜)되었다가, 여름에 최영이 실패하자 소환되어 다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좌시중(左侍中) 이색(李穡) 중국의 서울에 조회하매 숭인을 부행(副行)으로 삼았다. 기사년 가을에 어느 사람이 일본(日本)에 와서 스스로 영흥군(永興君)이라 일컬으니, 숭인 영흥군의 인친(姻親)으로서 일찍부터 그 사람됨을 상세히 잘 알고 있으므로, 그 거짓임을 분변하다가 성주(星州)로 폄출(貶黜)을 당하였다. 경오년 여름에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獄事)로써 체포되어 청주(淸州)에 갇히었다가, 수재(水災)로 인하여 사면되어 충주(忠州)에 돌아왔다. 임신년 봄에 다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가 여름에 순천(順天)으로 폄출(貶黜)되었다. 이때에 황거정(黃居正) 나주(羅州)에 와서 그의 등골을 매질하여 드디어 남평(南平)에서 죽으니, 나이 46세였다. 아들이 넷이니 이차점(李次點)·이차약(李次若)·이차건(李次騫)·이차삼(李次參)이다. 숭인은 총명(聰明)이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으면 문득 외게 되고, 나이 20세가 되지 않았는데도, 시문(詩文)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추허(推許)하는 바가 되었다. 여러 서적을 널리 다 통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히 연구했으며, 직강(直講)에서 판서(判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교(製敎)085) 를 겸무(兼務)하여, 이색(李穡)이 병들고 난 뒤에는 중국과의 외교(外交)에 관계되는 문자(文字)는 모두 그 손에서 만들어졌으니, 고황제(高皇帝)086) 가 이를 칭찬하기를,

"표사(表辭)가 자세하고 적절(適切)하다."

하였으며, 이색도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의 문장은 선배(先輩)들도 자안(子安)과 같은 사람은 없었다."

하였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그의 유고(遺藁)에 서문을 짓게 하고, 인쇄하여 세상에 반행(頒行)시켰다. 처음에 정도전과 친구로 삼아 종유(從遊)한 지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정도전이 후일에 조준에게 친밀히 하게 되어, 조준 숭인을 미워함을 알고서는 도리어 〈숭인을〉 몰래 험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종학(種學)의 자는 중문(仲文)이니,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영특하고 호걸스러워서, 공민왕 갑인년(1374)에 나이 14세로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위조(僞朝)087) 병진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마침내 장흥고 사(長興庫使)에 임명되고, 관직을 오랫동안 지내어 밀직사 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에 승진되고, 기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색이 나라의 정무(政務)를 맡고 있었으며, 종학이 해마다 시험을 관장하게 되니, 사람들이 자못 이를 비난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색이 탄핵을 당하고, 종학도 또한 폄출(貶黜)되었다. 경오년에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매, 부자(父子)가 함께 청주(淸州)에 체포되어 있던 중, 수재(水災)로 인하여 함께 사면(赦免)을 입었다. 임신년에 또 함창(咸昌)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손흥종(孫興宗) 계림(鷄林)에 와서 등골에 곤장을 치려고 하니, 문생(門生) 김여지(金汝知)가 그때 판관(判官)이 되어, 몰래 형리(刑吏)에게 법 밖의 형벌은 시행하지 못하게 하니, 이로 인하여 겨우 살게 되어,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겨 안치(安置)되었는데, 손흥종이 사람을 보내어 뒤쫓아 무촌역(茂村驛)에 이르러 밤을 이용하여 목을 졸라 죽이니, 나이 32세였다. 아들이 여섯이니, 이숙야(李叔野)·이숙휴(李叔畦)·이숙당(李叔當)·이숙묘(李叔畝)·이숙복(李叔福)·이숙치(李叔畤)이다.

홍수(洪壽)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의 맏아들이다. 위조(僞朝) 정사년(1377)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낭장(郞將)에 임명되고, 성균 박사(成均博士)를 겸하였으며,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러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었다. 기사년에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에 임명되었으나, 임신년 여름에 순천(順天)으로 폄출(貶黜)되었다가, 또한 황거정이 등골에 곤장을 쳐서 죽었다. 나이 39세였다. 아들은 넷이니, 우성범(禹成範)·우승범(禹承範)·우흥범(禹興範)·우희범(禹希範)이다. 처음에 현보(玄寶)의 족인(族人)인 김진(金戩)이란 사람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奴]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김진의 족인(族人)들은 모두 수이(樹伊)의 딸이라고 하였으나 오직 김진만은 자기의 딸이라고 하여 비밀히 사랑하고 보호하였다. 김진이 후일에 속인(俗人)이 되자, 수이를 내쫓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를 삼고, 그 딸을 사인(士人)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고는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모두 주었다. 우연이 딸 하나를 낳아서 공생(貢生)088)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보냈는데, 운경(云敬)이 벼슬을 오래 살아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운경이 아들 셋을 낳았으니, 맏아들이 곧 정도전(鄭道傳)이다. 그가 처음 벼슬하매 현보(玄寶)의 자제(子弟)들이 모두 그를 경멸(輕蔑)하므로, 매양 관직을 옮기고 임명할 때마다 대성(臺省)에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으니, 도전 현보의 자제들이 시켜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여겨, 일찍부터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홍수(洪壽)의 아들 성범(成範)으로 부마(駙馬)를 삼으니, 도전 성범 등이 형세를 이용하여 그 근원을 발각시킬까 두려워하여,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시킬 만한 일은 계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개국(開國)한 즈음에 성범을 무함하여 죽이고는, 마침내 현보의 부자(父子)를 무함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또 조준 이색·이숭인과 틈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내 이색 종학(種學)·숭인 등을 무함하여 원례(援例)로 삼고자 하였다. 후에 즉위(卽位)의 교서(敎書)를 지으면서 백성에게 편리한 사목(事目)을 조례(條例)하고는, 계속하여 현보 등 10여 인의 죄를 논하여 극형(極刑)에 처하게 하였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안경공(安景恭)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고는 매우 놀라면서,

"이미 관대한 은혜를 베푼다고 말했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마땅히 모두 논죄(論罪)하지 말라."

하였다. 도전 등이 형벌을 감등(減等)하여 죄를 집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현보·이색·설장수(偰長壽)는 비록 감등시키더라도 역시 옳지 못하다."

하였다. 이에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되 차등이 있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장형을 집행당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마지못하여 이를 따랐다. 도전(道傳) 남은(南誾) 등과 몰래 황거정 등에게 이르기를,

"곤장 1백 대를 맞은 사람은 마땅히 살지 못할 것이다."

하니, 황거정 등이 우홍수 형제 3인과 이숭인 등 5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여서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고는, 황거정 등이 돌아와서 곤장을 맞아 병들어 죽었다고 아뢰었다. 도전이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서 사감(私憾)을 갚았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뒤에 그들이 죽은 것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우리 전하(殿下) 신묘년(1411) 가을에 황거정 손흥종 등이 임금을 속이고 제 마음대로 죽인 죄를 소급해 다스려서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었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3일 신사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배극렴 등이 한양의 궁궐과 성곽이 완성된 후 신도로 이전하자고 청하니 윤허하다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이 온천에 나아가서 아뢰었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漢陽)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하여서, 호종(扈從)하는 사람이 민가(民家)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기후는 점차 추워 오고 백성들은 돌아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配置)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16일 갑오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공신 도감에서 개국 공신의 포상 규정을 상언하니 윤허하다

공신 도감(功臣都監)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과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16인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소재(所在)를 환하게 알고서 의논과 계책을 결정하여 전하를 추대하여 왕업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비록 전하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른 것이겠지마는, 역시 일세(一世)에 뛰어난 신하들의 충성을 다하고 대의에 힘써서 천명을 도와 나라를 세운 것[佐命開國]이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敎書)에 이른 바 그 공이 매우 커서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작게 되도록 길이 공을 잊기 어렵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일등공신(一等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전각(殿閣)을 세워서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고, 작위(爵位)를 봉하고 토지를 주며, 그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3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封爵)을 증직(贈職)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3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蔭職)099) 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질(甥姪)과 사위에게 2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전지 몇 결(結), 노비 몇 구, 구사(丘史) 7명, 진배파령(眞拜把領) 10명을 주고 처음 입사(入仕)함을 허락하고, 적장(嫡長)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100) 내에 일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赦免)이 영구한 세대(世代)에까지 미치게 할 것입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 등 11인은 위의 항목이 공신들이 천명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 즈음에 모의에 참예하여 전하를 추대했으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에 이른 바 그 공이 또한 크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이등 공신(二等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전각을 세워서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며, 그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2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을 증직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2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1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전지 몇 결, 노비 몇 구, 구사 5명, 진배파령 8명을 주고, 처음 입사함을 허락하고, 적장(嫡長)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 내에 개국 이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이 영구한 세대에까지 미치게 할 것입니다.

도승지 안경공(安景恭) 등 16인은 고려 왕조의 정치가 문란한 때에 전하에게 뜻을 두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조를 굳게 지켜 변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에 이른 바 그 공이 칭찬할 만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삼등 공신(三等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전각을 세워서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며,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한 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을 증직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1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를 녹용(錄用)하고, 전지 몇 결, 노비 몇 구, 구사 3명, 진배파령 6명을 주고, 처음 입사함을 허락하고, 적장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 내에 개국 삼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이 영구한 세대에까지 미치게 할 것입니다.

중추원 사(中樞院使) 김인찬(金仁贊)은 지금 그 몸은 죽었지마는, 배극렴 등이 전하를 추대할 때에 마음을 같이하여 추대하였으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에 이른 바 그 공이 매우 크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일등 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그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한결같이 배극렴의 예와 같이 하소서."

임금이 이를 윤허(允許)하고, 또 명하여 일등 공신 배극렴 조준에게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 전지 2백 20결, 노비 30구를 내려 주고,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에게는 전지 2백 결, 노비 25구를 내려 주고, 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정탁(鄭擢)에게는 전지 1백 70결, 노비 20구를 내려 주고, 정총(鄭摠)·오몽을(吳蒙乙)·김인찬(金仁贊)에게는 전지 1백 50결, 노비 15구를 내려 주고, 이등 공신에게는 전지 1백 결, 노비 10구를 내려 주고, 삼등 공신에게는 전지 70결, 노비 7구를 내려 주었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21일 기해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개국 공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공신 녹권 등을 내리다

편전(便殿)103) 에서 개국 공신(開國功臣)들에게 연회(宴會)를 베풀고 각기 기공 교서(紀功敎書) 1통(通)과 녹권(錄券)·금대(金帶)·은대(銀帶)·옷감의 겉감과 안찝을 차등 있게 내려 주고, 시중(侍中) 배극렴·조준에게는 고정립(高頂笠)·옥정자(玉頂子)·옥영구(玉纓具)를 특별히 내려 주었다. 이날에 부마(駙馬)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성(姓)을 내려 주어 종성(宗姓)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24일 임인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학교·수령·의창·향리 등 22개 조목에 대한 도평의사사의 상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배극렴·조준 등이 22조목을 상언(上言)하였다.

"1. 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이고, 농상(農桑)은 의식(衣食)의 근본이니, 학교를 일으켜서 인재(人才)를 양성하고, 농상을 권장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할 것이며,

1. 수령(守令)은 전야(田野)가 황폐되고 개간되는 것과, 호구(戶口)가 증가되고 감손되는 것 등의 일로써 출척(黜陟)할 것이며,

1. 신구(新舊) 수령(守令)이 교대할 즈음에 일이 많이 해이(解弛)해지니, 지금부터는 서로 해유(解由)를 주고받은 후에 임지(任地)를 떠나게 할 것이며,

1. 봉명 사인(奉命使人)125) 과 군관(軍官)·민관(民官)은 관(官)에서 미곡을 급여하고 말을 주는 것이 양부(兩府)로부터 이하의 관원에까지 모두 정해진 수효가 있으니, 이로써 일정한 법으로 삼게 할 것이며,

1. 각도에서 경의(經義)에 밝고 행실을 닦아서 도덕을 겸비(兼備)하여 사범(師範)이 될 만한 사람과, 식견이 시무(時務)에 통달하고 재주가 경제(經濟)126) 에 합하여 사공(事功)을 세울 만한 사람과, 문장에 익고 필찰(筆札)을 전공하여 문한(文翰)의 임무를 담당할 만한 사람과, 형률과 산수(算數)에 정통하고 행정(行政)에 통달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는 직책을 맡길 만한 사람과, 모계(謀計)는 도략(韜略)127) 에 깊고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가서 장수가 될 만한 사람과, 활쏘기와 말타기에 익숙하고 봉술(棒術)과 석척(石擲)에 능하여 군무(軍務)를 담당할 만한 사람과, 천문·지리·복서(卜筮)·의약(醫藥) 등 혹 한가지라도 기예(技藝)를 전공한 사람을 자세하게 방문하고 재촉하여 조정에 보내어서, 발탁 등용하는 데 대비하게 하고, 서인(庶人) 가운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고 농사에 힘쓰는 사람에게는 조세(租稅)의 반을 감면하여 주어 풍속을 권장할 것이며,

1. 민정(民丁)은 16세로부터 60세에 이르기까지 역(役)을 맡게 하는데, 10정(丁) 이상이면 대호(大戶)가 되고 5정 이상이면 중호(中戶)가 되고, 4정 이하이면 소호(小戶)가 되게 하여 정(丁)을 계산하여 백성을 등록시키고, 만약 요역(徭役)이 있으면, 대호(大戶)는 1명을 내고 중호는 둘을 합하여 1명을 내고 소호는 셋을 합하여 1명을 내어 그 역을 고르게 할 것이며, 만약 유망(流亡)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이유를 묻고 더욱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을 가하여 완취(完聚)128) 하게 할 것이며,

1. 의창(義倉)의 설치는 본래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기 위한 것이니, 매양 농사철을 당하여 먼저 곤궁한 백성들에게 양식과 종자를 주는 때, 반드시 두량(斗量)으로 하고 추수 후에는 다만 본 수량만 바치게 하고, 그 출납하는 수량은 해마다 마지막 달에 삼사(三司)에 보고하게 하고, 그 수령(守令)으로서 두량(斗量)으로 행하지 아니하거나, 부유(富裕)한 사람에게도 아울러 주는 자는 죄를 논단하게 할 것이며,

1. 여러 주(州)의 향리(鄕吏) 가운데 과거에 오르거나 공을 세운 사람 외에, 본조(本朝)의 통정(通政)129) 이하의 향리와 고려 왕조의 봉익(奉翊)130) 이하의 향리는 모두 본역에 돌아가게 할 것이며,

1. 수령은 때때로 민전(民田)을 답험(踏驗)하고 가을에 가서 손실(損實)을 자세히 갖추어 써서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적당히 헤아려 조세를 감면하게 할 것이며,

1. 각관·역(館驛)마다 마필(馬匹)의 상·중·하 3등의 수효를 관(館)의 벽(壁)에 써서 붙여 두고, 봉명(奉命)을 받고 사신(使臣)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공역서(供驛署)의 마부(馬符)를 상고하여 험증(驗證)한 뒤에 체송(遞送)131) 을 하게 할 것이나, 도관찰사와 도절제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봉명을 받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주지 못하게 할 것이며,

1. 주·부·군·현에서는 죄수의 정상을 도관찰사에게 진술 보고하여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하고, 사형죄 이상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여 임금에게 계문(啓聞)하여 명령을 받아 결정하게 할 것이며,

1. 문선왕(文宣王)132) 의 석전제(釋奠祭)와 여러 주(州)의 성황(城隍)의 제사는 관찰사와 수령이 제물을 풍성히 하고 깨끗하게 하여 때에 따라 거행하게 할 것이며, 공경(公卿)으로부터 하사(下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묘(家廟)를 세워서 선대(先代)를 제사하게 하고, 서인(庶人)133) 은 그 정침(正寢)134) 에서 제사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 부정한 제사[淫祀]는 일절 모두 금단(禁斷)할 것이며,

1. 봉명 사인(奉命使人) 외에 관·역(館驛)을 빌려 유숙하는 사람에게는 관(官)에서 미곡을 주지 못하게 할 것이며, 봉명 사인과 수령이 연음(宴飮)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인하여 때 아닌 사냥을 금단(禁斷)하게 할 것이며,

1. 무릇 주상자(主喪者)는 부모가 빈소(殯所)에 있을 때에는 조석으로 울며 제사하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며,

1. 각도(各道)와 각주(各州)에서는 그 노정(路程)을 헤아려 원관(院館)135) 을 짓거나 수리하여 나그네에게 편리하게 할 것이며,

1. 재인(才人)136)  화척(禾尺)137) 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농업을 일삼지 않으므로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여 상시 모여서 도적질하고 소와 말을 도살하게 되니, 그들이 있는 주군(州郡)에서는 그 사람들을 호적에 올려 토지에 안착(安着)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죄주게 할 것이며,

1. 외방(外方)의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집에서는 양민(良民)을 슬그머니 차지하여 자기의 사역꾼으로 삼으니, 청하옵건대, 찾아내어 억지로라도 등록시켜 부역에 이바지하게 할 것이며,

1. 무릇 중이 되는 사람이 양반(兩班)의 자제이면 닷새 베[五升布] 1백 필을, 서인이면 1백 50필을, 천인이면 2백 필을 바치게 하여, 소재(所在)한 관사(官司)에서 이로써 관에 들어온 베의 숫자를 계산하여 그제야 도첩(度牒)138) 을 주어 출가(出家)하게 하고, 제 마음대로 출가하는 사람은 엄격히 다스리게 할 것이며,

1. 공사(公私)의 전물(錢物) 가운데 자모전(子母錢)139) 은 이식(利息)을 정지하게 하도록 이미 일정한 제도가 있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이자 중에다 이자를 붙이니 매우 도리에 어긋납니다. 지금부터는 연월(年月)이 비록 많더라도 1전의 본전에 1전의 이자[一本一利]를 더 받지 못하게 할 것이며,

1. 중들이 중앙과 지방의 대소 관리들과 결당(結黨)하여 혹은 사사(寺社)140) 를 건축하기도 하고, 혹은 불서(佛書)를 인쇄하기도 하며, 심지어 관사(官司)에까지 물자를 청구하여 백성들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일절 모두 금단(禁斷)할 것이며,

1. 바다와 육지에서 싸울 때는 쓰는 무기를 수리하고 점검하여 뜻밖의 변고에 대비(對備)하게 할 것이며,

1. 시위군(侍衛軍)과 기선군(騎船軍)은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나누어 윤번(輪番)으로 할 것입니다."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26일 갑진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배극렴 등이 여러 왕자들에게 규정된 과전 외의 전지를 더 주도록 청하다

좌시중(左侍中) 배극렴·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이 아뢰었다.

"왕자 제군(王子諸君)들은 의복·거마(車馬)·추종(騶從)142) 을 갖추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며, 용도(用度)를 넉넉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비옵건대, 본과(本科) 외에 전지(田地)를 더 내려 주소서."

임금이 조용히 잠저(潛邸)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는, 인하여 말하였다.

"본과(本科) 1백여 결(結)만 가지고도 또한 배고프고 추위에 떨게 되지는 않을 것인데, 만약 또 더 준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내가 자기 아들에게 사정을 쓴다고 할 것이다. 더군다나 경기(京畿) 지방의 전지가 한정이 있으니, 어찌 함부로 줄 수가 있겠는가! 경 등이 만약 더 주고자 한다면, 공신(功臣)들에게 먼저 더 주고 그 예로써 왕자들에게 미치게 하면 옳겠지마는, 단지 왕자만으로써 이를 말한다면 옳지 않다."

남은이 아뢰었다.

"여러 공신들은 과전(科田) 외에 이미 사전(賜田)143) 을 받았으니, 왕자들에게 더 주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임금이 남은에게 눈짓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공신에게 사전(賜田)했으니 또한 여러 아들에게도 사전(賜田)하란 말인가?"

조금 후에 임금이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옛날에 신하가 되었을 적에 또한 사전(賜田)을 받았는데, 모두 돌이 많고 메말라서 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지금 공신의 사전(賜田)은 마땅히 비옥한 땅을 골라서 주어야 할 것이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1일 기유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시중 조준이 전세 수납을 감면하고, 이를 위해 조관을 파견할 것을 청하다

시중(侍中) 조준(趙浚)이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금년에 밭곡식이 풍년이 들지 않았다고 하니, 마땅히 전세의 징수를 가볍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갓 명령만 내리고 실지의 효과가 없다면 도리어 간사한 이속(吏屬)의 농간(弄奸)만 되고 백성은 이익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특별히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밝게 바로잡아 시행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금년에 논밭의 곡식이 충실하지 못하다면, 강릉도(江陵道)·삭방도(朔方道) 등의 도(道)에는 논은 적고 밭은 많으니, 더욱 감면(減免)을 하도록 하라."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3일 신해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대간에서 한상경 등 7인의 개국 공신 추록을 반대하였으나 윤허치 않다

대간(臺諫)이 연명(連名)하여 상소(上疏)하였다.

"전하께서 즉위하셔서 공신(功臣)을 3등급으로 정하여 이미 상록(賞祿)과 녹권(錄券)을 내리신 지가 오래 되었는데, 지금 또 우승지(右承旨) 한상경(韓尙敬) 등 7인을 공신이라 일컬으니, 신 등은 그윽이 의혹이 생깁니다. 또 그 조그만한 공로를 기록하여 공신으로 삼는다면, 여러 해 동안 노고(勞苦)하면서 시위(侍衛)한 인사(人士)로서 참예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실망할 것이오니, 7인의 공신 칭호를 없애기를 청합니다. 더군다나 병조 의랑(兵曹議郞) 민여익(閔汝翼) 정몽주(鄭夢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마땅히 죽어서는 안 될 것인데도 죽었다.’고 했으니, 그가 정몽주에게 편든 것이 명백합니다. 마땅히 공신의 반열(班列)에 참예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이 남은에게 일렀다.

"공신은 나와 경(卿) 등만이 아는 바인데 대간(臺諫)이 어찌 알겠는가? 또 민여익 정몽주가 죽던 날에 손흥종(孫興宗)과 더불어 의논하여 이문(移文)을 급작스레 만들어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서, 경(卿)과 조준(趙浚) 등으로 하여금 살게 했으니 그 공이 작지 않은데, 어찌 정몽주가 마땅히 죽어서는 안 된다고 즐겨 말했겠는가? 비록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신하가 임금에게 청하지도 않고서 대신(大臣)을 제 마음대로 죽였는데, 누가 ‘마땅히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또 정몽주가 죽은 후에 여러 군사부(軍事府)의 군관(軍官) 등이 사직(社稷)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글을 올려 정몽주와 그 일당들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서명한 사람들은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시기에 있어서도 나에게 뜻을 두었으니, 또한 칭찬할 만한데, 또 ‘하공신(下功臣)’이라 일컫고자 하니, 대성(臺省)에서 가히 이를 그만두게 해야 할 것이로다."

이어서 대성(臺省)에 교지를 내렸다.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6일 갑인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공이 있어 자급을 올려준 군관의 고신에 서경치 않은 대간을 힐문하다

임금이 조준·남은 등에게 일렀다.

"위성(僞姓)144) 을 폐하고 다시 왕씨(王氏)145) 를 임금으로 세울 때에 휘하(麾下)의 군관(軍官)이 시위(侍衛)한 공이 있었고, 내가 왕위에 오를 때에 시위한 공도 또한 작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모두 관직을 한 계급씩 승진시켰는데, 대성(臺省)에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13일 신유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조준·정도전 등에게 《고려사》를 수찬케 하다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정도전(鄭道傳)·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정총(鄭摠)·박의중(朴宜中)·병조 전서(兵曹典書) 윤소종(尹紹宗)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하게 하였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6일 계묘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201) 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202) 이니, 위위 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203) ·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임금에게 마음을 돌려 조준 등과 더불어 서로 모의하여 임금을 추대하고는, 마침내 수상(首相)이 되었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으며,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이에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功)으로 삼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아들이 없었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일 정미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천변 재이로 인해 고려조의 죄인을 사면하고 가산과 노비를 돌려주도록 하다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조준(趙浚),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좌승지(左承旨) 이근(李懃) 등이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명령하였다.

"요사이 하늘의 견책(譴責)이 자주 나타나니 하늘의 뜻이 반드시 있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무진년 무렵에 참형(斬刑)을 당한 사람의 가산(家産)과 노비(奴婢)가 모두 관청에 소속되고 처첩(妻妾)과 자손이 고립(孤立)하고 곤궁(困窮)하여 슬퍼함과 원망함이 날로 깊어가니, 하늘의 견고(譴告)가 아마 혹시 이로 말미암은 것일 것이다. 무진년 이후 즉위 이전에 무릇 좌죄(坐罪)되어 적몰(籍沒)된 사람으로서, 고려 왕조의 종실과 시역(弑逆)을 범한 자 외에는 일체 모두 사면(赦免)하고 가산과 노비를 모두 처자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생업(生業)을 이루게 하라."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조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조준(趙浚)을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삼고, 김사형(金士衡)을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상락백(上洛伯)으로 삼고, 식읍(食邑)은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은 3백 호로 하고, 권중화(權仲和)를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로 삼고, 정도전(鄭道傳) 최영지(崔永沚)를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삼고, 우인열(禹仁烈) 유만수(柳蔓殊)를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고, 정희계(鄭熙啓)를 판팔위사(判八衛事)로 삼고, 조임(趙琳)을 중추원 사(中樞院使)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다만 문하부(門下府)·삼사(三司)·중추원(中樞院) 정원(正員)의 2품 이상만이 도평의사사의 직책을 겸무하였는데, 이날에 비로소 문하부(門下府)와 중추원(中樞院)의 상의(商議)와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대학사(大學士)·학사(學士)와 개성부(開城府)의 판사(判事)·윤(尹)까지 모두 도평의사사의 직책을 겸무하게 하였다.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노조 고려 왕조의 정강군(定康君)이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좌시중 조준이 전문을 올려 평양의 식읍과 도통사의 관직을 사양하다

좌시중(左侍中) 조준이 평양 식읍(食邑)과 경기 도통사(京畿都統使)를 사면(辭免)하기를 청하였다. 그 전문(箋文)은 이러하였다.

"신이 듣자옵건대, 은총(恩寵)과 이록(利祿)으로써 성공(成功)한 후에 그대로 있지 아니한 것이, 이윤(伊尹)이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고 그 임금으로 하여금 ·순(堯舜)의 임금으로 만든 이유이고, 권세가 극성(極盛)한데 그냥 있으면서 그만두지 아니한 것이, 소하(蕭何)가 자기 몸을 욕되게 하고 한(漢)나라 고조(高祖)로 하여금 그 공신을 능히 보전하지 못하게 한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왕업을 창건하여, 신에게 봉읍(封邑)을 내리시니, 분수에 감당할 바가 아니며, 신에게 경기의 병권(兵權)을 맡기시니, 재주에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모기의 어깨로 태산(太山)을 짊어진 것과 같으므로, 권세가 극성(極盛)함에는 반드시 전복(顚覆)하게 될 것입니다. 명령을 받은 이후로 잠잘 때는 자리에 편안하지 못하며 밥 먹을 때는 달게 먹지 못하므로, 지극한 심정을 간절히 진술하여 감히 천총(天聰)을 모독(冒瀆)하오니, 성상의 은혜를 내려서 윤허(允許)하심을 바라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신이 처음 현릉(玄陵)207) 을 섬겨 유악(帷幄)에 시봉(侍奉)하였으나, 중간에 비색(否塞)한 운수를 만나 문을 닫[杜門]고 글을 읽으면서 한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한 번 만나 보고서 옛벗과 같이 친밀히 하셨으니, 이것은 하늘이 신을 전하께 만나게 한 것입니다. 무진년 정월에 전하께서 대장 최영(崔瑩)과 더불어 15년 동안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여러 흉인(兇人)들을 숙청(肅淸)하였으니, 이 일은 전하의 잔인한 무리를 제거한 덕이 백성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최영은 학술이 없는 사람이므로 이에 위주(僞主)208) 와 더불어 요동(遼東)을 범하려고 모의하여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자, 전하께서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썩어 문드러짐을 면하게 하였으니, 이 일은 전하께서 세상을 구제한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때에 신을 천거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으므로, 신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전하께서 말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어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 공도(公道)를 펴서 밝히고, 준수한 현량(賢良)을 등용하고 간사한 무리를 내쫓아 하민(下民)들의 해독을 제거하고 상국(上國)에 우호(友好)를 맺었으며, 이에 위조(僞朝)를 내쫓고 왕씨를 흥복(興復)시켰으므로,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어 와서 위로하였으니, 이 일은 전하께서 광복(匡復)한 공이 천하에 알려진 것입니다.

처음에 전하께서 신을 천거하여 대사헌을 삼으실 적에는 전하께서 개연(慨然)히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개시(開始)함을 하늘의 신명(神明)에게 고(告)하고는, 여러 사인(邪人)의 비방을 배척하고 거실(巨室)의 노여움을 범하면서까지 사전(私田)의 여러 해 묵은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을 도탄(塗炭) 가운데서 구제하고 군량(軍糧)을 어려운 즈음에서 넉넉하게 하여, 이로써 누선(樓船)을 만들고 이로써 성보(城堡)를 쌓게 하여, 무위(武衛)가 떨치게 되고 조로(漕路)가 통하게 되어, 삼한(三韓) 40년 동안의 왜놈[倭奴]의 병화(兵禍)가 하루아침에 그쳐졌습니다. 과전(科田)을 경기에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하고 군전(軍田)을 주군에 설치하여 군사를 길렀으며, 이로써 향리(鄕吏)와 진·원(津院)에도 모두 전지를 공급하여, 전지에는 일정한 제도가 있고 나라에는 성문(成文)한 법이 있어 각기 상하(上下)·존비(尊卑)의 구별이 있어 서로 침해하고 빼앗지 못하게 하였으니, 겸병(兼幷)이 근절되므로써 모든 백성들의 전택이 정해지고, 부세의 징수가 경해지므로써 환과(鰥寡)209) 의 의식이 넉넉해지고, 봉록(俸祿)이 후해지므로써 염치가 시행되고, 창고(倉庫)가 충실해지므로써 국가의 용도가 넉넉해졌습니다. 전하께서 신과 더불어 탐오(貪汚)한 관리가 백성을 해치고 무능한 장수가 구적(寇賊)을 양성하는 것을 분개하여, 국가에 건의하여 대신(大臣)을 천거해서 병권을 맡게 하고 여러 도에 순찰해서 출척(黜陟)을 행하니, 번진(藩鎭)은 군율을 시행하므로써 패(敗)하여 달아나는 걱정이 근절되고, 주군은 법을 받들므로써 탐욕 많고 잔인한 기풍이 그쳐졌습니다. 영장(令長)은 서리(胥吏)에서 나왔으므로 이에 그 관질(官秩)을 승진시키고 그 선용(選用)을 소중하게 하고, 대간과 육조의 보증 천거[保擧]함을 사용하므로써 전리(田里)에는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없어지고, 유망(流亡)한 사람이 직업에 돌아오는 즐거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하여 독직(瀆職)한 관리를 신문(訊問)하여 그 향리(鄕吏)로 돌려보내고, 향원(鄕原)210) ·토활(土猾)211) 의 간사한 사람을 공격하여 그 음호(蔭戶)를 부역(賦役)시키고, 현(縣)에는 각기 재(宰)를 두고 역(驛)에는 각기 승(丞)을 두므로써, 빈 터가 변하여 읍리(邑里)가 되고 숲과 풀이 변하여 좋은 곡식이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관원[冗官]이 국록(國祿)을 소모하고, 총애 받는 사람이 국가의 직무를 더럽히고, 공(工)·상(商)·조례(皂隷)212) 가 외람히 관직을 차지하고, 중들로서 놀고 먹는 사람이 토지를 많이 점거하고, 공이 없는 봉군(封君)과 유약한 자제(子弟)가 직무를 비워 두게 되었는데, 법을 제정하여 도태시키니 요행(僥倖)의 문이 닫혀지고 분경(奔競)213) 의 길이 막혀졌습니다. 가묘(家廟)를 세우고 기제(忌祭)를 설치하는 것은 백성의 덕을 후하게 하는 까닭이고, 학교를 넓히고 교수(敎授)를 두는 것은 인륜(人倫)을 밝히는 까닭입니다. 문치(文治)가 이미 흡족하고 무위(武威)가 멀리까지 밝아져서, 부상(扶桑)214) 의 도적이 진보(珍寶)를 받들고 와서 조회하고, 유구(琉球) 남만(南蠻)이 이중으로 통역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습니다.

왕씨(王氏)의 16년 동안의 이미 망했던 왕업이 실로 전하께 힘입어 다시 일어났는데도, 왕씨는 혼미(昏迷)하여 도리어 시기와 미워하는 마음을 내게 되고, 위신(僞辛)215) 의 역란(逆亂)한 무리와 전지를 잃고 관직을 잃은 무리들이 고기 비늘[魚鱗]처럼 곁에 있어 근거 없는 말로써 차츰차츰 헐뜯어서, 전하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여 흉악한 계책이 자꾸 변하여졌습니다. 금년 3월에 와서 전하께서 세자(世子)가 〈중국에〉 들어가 조회하고 동쪽으로 돌아올 적에 서울 서쪽 수백 리의 먼 곳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또 몸소 사냥하여 와서 하례(賀禮)를 하려고 하던 차에,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초막(草幕)에 누워 있었는데, 간신(姦臣) 정몽주(鄭夢周)는 전하께서 비호해 준 사람인데도 자신이 총재(冢宰)가 되어 손수 정권을 잡고는, 왕씨의 뜻을 맞추어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신과 정도전·남은을 전하의 심복(心腹)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틈을 타 계책을 부려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어 먼저 내쫓고, 다음에 전하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병을 무릅쓰고 수레를 타고 길을 갑절이나 빨리 하여 돌아왔습니다. 4월 4일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여서 정몽주가 참형을 당하였으나, 전하께서 살리시기를 좋아하는 덕을 펴서, 그 나머지 간사한 무리들을 한 사람도 주멸(誅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제(私第)에 병들어 누워서 빈객(賓客)을 사절하면서도 오히려 왕씨(王氏)가 깨닫기를 바라면서, 형벌하고 상주는 권한을 임금에게서 나오도록 했는데도, 왕씨는 혼미하여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서 흉악한 무리들이 더욱 제 마음대로 굴어 화(禍)가 경각(頃刻)에 있게 되었습니다. 7월 12일에 이르러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이반하여 온 나라가 마음을 돌이켜 전하를 왕으로 추대하여, 인심과 천명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조(曹)나라 자장(子藏)216) 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에 왕씨(王氏)를 강릉(江陵)의 간성(杆城)에 봉하였으니, 이 일은 탕왕(湯王) 걸왕(桀王) 남소(南巢)에 내쫓은 것이요, 왕씨의 동모제(同母弟)를 기현(畿縣)의 마전(麻田)에 봉하여 신성왕(神聖王) 공민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 일은 무왕(武王) 미자(微子)217)  송나라에 봉한 것입니다. 여러 왕씨 강화도(江華島)·거제도(巨濟島)에 안치(安置)하고는 관에서 미곡(米穀)을 급여하게 하였으니, 한(漢)나라·위(魏)나라 이후로 혁명(革命)한 군주로서는 미치지 못한 바입니다.

지난번에 만약 전하께서 나라를 취(取)할 마음이 있었다면,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이킬 적에 어찌 즐거이 만 번 죽을 위태한 지경에 나와 한 평생을 버리면서까지 왕씨를 부흥시킬 의논을 세웠겠습니까? 기사년 겨울에 황제의 조칙(詔勅)이 왔을 적에도 어찌 즐거이 종친(宗親)의 장(長)을 세워서 왕씨에게 정권이 돌아가게 하였겠습니까? 어찌 즐거이 이미 성인이 된 저군(儲君)218) 을 일찍 세워서 국가의 근본을 정하고자 하였겠습니까? 어찌 즐거이 경연(經筵)을 개최하고 학문에 밝은 선비를 임금의 좌우에 나아가게 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219) 를 바치고 조석으로 가르치게 하였겠습니까? 어찌 즐거이 서연(書筵)을 개최하고 많은 선비를 동궁(東宮)에 모아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올려 정치하는 방법을 날마다 강론하였겠습니까? 어찌 즐거이 상상(上相)220) 의 정병(政柄)을 내놓고 택리(宅里)를 아들과 사위에게 나누어 주고서 고향에 돌아가 쉬기를 원한 일이 두세 번에까지 이르도록 더욱 힘써 하였겠습니까? 전년(前年) 가을에 또 어찌 즐거이 저군(儲君)에게 천자(天子)를 알현하도록 건의(建議)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씨를 위하신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충성은 하늘이 굽어 보신 바이며 온나라가 함께 아는 바이온데도, 왕씨는 참소하는 적당(賊黨)에게 의혹되어 연(燕)나라 소왕(昭王) 악의(樂毅)221) 에게 대한 일과 제(齊)나라 양왕(襄王) 전단(田單)222) 에게 대한 일과 같이 하지 못하고서는, 이에 운대(雲臺)223) 의 훈신(勳臣)을 도리어 도마 위의 고기로 삼으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이 왕씨의 덕을 싫어하고 전하의 왕업을 세우게 한 것입니다.

나라 일에 지극히 부지런하고 집안 일에 지극히 검소한 것은 우왕(禹王) 순제(舜帝)를 계승한 이유이요, 간언(諫言)을 따르고 거절하지 않으며 허물을 고치되 인색하지 않은 것은 탕왕(湯王) 하(夏)나라를 대체(代替)한 이유이요. 은(殷)나라의 정치에 반대하여서 천하가 다스려진 것은 무왕(武王) 주(周)나라를 세운 이유이요, 현신(賢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 한 것은 전한(前漢)이 흥융(興隆)한 이유이요,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 한 것은 후한(後漢)이 경퇴(傾頹)한 이유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미 전하에게 명령하여 삼한(三韓)에 어버이 노릇하게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삼왕(三王)224) 의 지극한 정치를 본받으시고 양한(兩漢)225) 의 득실(得失)을 거울로 삼아, 삼가고 두려워하여 이를 생각하여 마음을 이에 두어, 억만대(億萬代)의 성자신손(聖子神孫)의 귀감(龜鑑)으로 삼으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은 가만히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나라를 처음 세우신 것은 실로 하늘이 명하신 바이니, 신이 어찌 조그만 공로라도 그 사이에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어리석은 신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태재(太宰)226) 의 높은 관직에 임명하고 저군(儲君)의 사부(師傅)에 등용시켰으니, 임무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또 하찮은 공로를 기록하여 개국 공신에 이름이 우두머리에 있게 하고 전지와 노비를 주셨으니, 상도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는데 식읍(食邑) 1천 호(戶)에 실봉(實封) 3백 호를 더 주고,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의 군사를 총제(摠制)하는 권한까지 더 맡기시니, 신이 어찌 이를 감당하겠습니까? 원컨대, 이를 회수하시고 어리석은 신으로 하여금 한 몸으로 맡은 두 임무를 나누게 하여, 빈궁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려는 본뜻을 이루게 하고, 온전한 생활을 길이 주어서 신의 조그만 보필을 후일에 책임지우게 하소서. 옛날에 은나라에서는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삼아 왕이 되었으며, 한(漢)나라에서는 장양(張良)을 사부(師傅)로 삼아 황제가 되었는데도, 이윤은 오히려 돌아가기를 고하고자 하였으며 장양 적송자(赤松子)와 놀기를 원하였으니, 그들이 은(殷)나라 한(漢)나라에 박대(薄待)한 것이 아니라, 대개 혹시 권세가 극성(極盛)함에 이름을 좋아한다는 비방을 받아서, 탕왕(湯王)이나 고제(高帝)와 같은 지덕(智德)을 겸비한 임금에게 누(累)를 끼칠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4월 4일 이후의 생명은 실로 전하께서 주신 바이옵니다. 신은 전하께 다만 임금과 신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실로 하늘같이 가이 없는 부모의 은혜가 있사오니, 마침내 사직(辭職)하기를 청할 이치는 없습니다. 어찌 감히 이윤(伊尹) 장양(張良)의 돌아가서 휴식하는 뜻을 품겠습니까? 신은 다만 두 분의 성만(盛滿)을 경계하고 겸손함을 지키는 마음을 본받아서 전하와 함께 한없는 세대(世代)에 시종(始終)을 보전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역경(易經)》에, ‘천도(天道)는 영만(盈滿)한 것은 이즈러지게 하고 빈 것은 보태어 주며, 귀신(鬼神)은 영만(盈滿)한 것은 이를 해치고 빈 것은 이를 복준다.’ 하였으며, 또 ‘근로하고 겸손하면 군자가 결실이 있게 되니, 길(吉)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위로 성감(聖鑑)께 폐를 끼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이 권세의 극성(極盛)함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지극한 심정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이 나라와 함께 기쁨을 같이하려는 충성스런 계책을 살피시어, 봉호(封戶)를 공실(公室)에 돌리게 하고 병권(兵權)을 양장(良將)에게 맡기게 하신다면, 신은 더욱 분골쇄신(粉骨碎身)하는 정성을 다하여 위로 생성(生成)해 주신 덕을 보답하겠습니다."

임금이 글을 내리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일 정미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백관의 조하를 받고,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새해를 축하하는 의식을 가지다. 처음으로 명나라에서 제정한 관복을 입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비로소 조정(朝廷)001) 제도의 관복(冠服)을 입었다. 예(禮)를 마치고 난 뒤에 임금이 전(殿)에 앉아서 중외(中外) 관원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각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안렴사(按廉使)·목사(牧使)·도호부사(都護府使)들이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조박(趙璞)은 역대의 제왕이 학문을 하고 정치를 하는 강목(綱目)의 그림[歷代帝王爲學爲治綱目之圖]을 바치고, 교주 강릉도 안렴사(交州江陵道按廉使) 정탁(鄭擢) 사상보(師尙父)002)  단서(丹書)003) 를 받들어 무왕(武王)을 경계한 그림[師尙父奉丹書戒武王之圖]과 《대학연의(大學衍義)》 2부를 바쳤으며, 알도리(斡都里)는 산 범[生虎]을 바쳤으므로, 이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내렸다.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이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였다.

"정월 초하루 새해의 아침에 신 등은 큰 경사를 감내하지 못하여 삼가 천세수(千歲壽)를 올립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천세(千歲)를 세 번 불렀다. 임금이 술잔을 다 비우고 여러 신하들에게 앉기를 허락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 번 절하고 자리에 나아가 앉아서 한껏 즐기고 파(罷)하였다. 해가 지매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놀이[火戲]를 설치하게 하고 이를 구경하였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2일 무오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고려조에 사관을 겸하면서 우왕·창왕을 태조가 죽였다고 사초에 허위로 기재한 이행을 국문하다

사헌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 이행(李行)이 일찍이 공양왕(恭讓王)의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직책이 사관 수찬(史官修撰)을 겸했는데도,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에 아첨하여,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우(辛禑)·신창(辛昌) 변안열(邊安烈)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며서 썼사오니, 청하옵건대,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국문(鞫問)하여 논죄(論罪)하소서."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이보다 먼저 시중(侍中) 조준(趙浚)이 춘추관(春秋館)에 앉아서 고려 왕조의 사초(史草)를 보다가. 이행이 기록한 글에,

"윤소종(尹紹宗) 이숭인(李崇仁)의 재주를 꺼려서, 조준에게 알려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

는 말이 있음을 보고, 조준이 해[日]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윤소종의 말을 듣고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는 것은 하늘의 해가 증명하고 있다."

고 하면서, 나아가 임금에게 고(告)하니, 임금이 명하여 무진년 이후의 사초(史草)를 바치게 하고서 친히 이행의 기록한 것을 보니, 안열(安烈) 신우·신창 부자(父子)를 목 베인 일들을 모두 임금을 지척(指斥)하여, 죄도 없이 살해당했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변안열은 대성(臺省)에서 죄주기를 청하매, 공양왕이 문득 목 베기를 허가했으므로, 내가 미처 이를 중지할 것을 청하지 못하였으며, 우(禑) 창(昌) 부자(父子)는 백관(百官)과 나라 사람들이 합사(合辭)하여 목 베기를 청하므로, 공양왕이 이를 윤허했으니, 나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이 없었는데, 작은 선비[小儒]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면서, 이에 헌사(憲司)에게 국문(鞫問)하기를 허가하였다.

처음에 고려 왕조의 공민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신돈(辛旽)의 간사한 계책에 의혹되어, 신돈의 아들 우(禑)를 궁녀(宮女) 한씨(韓氏)가 낳았다고 일컫고, 나이 9세에 강녕 대군(江寧大君)으로 책봉하여 왕대비(王大妃)의 궁전에 두었었다. 뒤에 공민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인임(李仁任) 등이 이에 공민왕의 부정(不正)한 뜻을 탐색(探索)하여 그를 세워 군주로 삼았었다. 무진년에 〈위화도 에서〉 군사를 돌이키던 날에 임금께서 다시 왕씨(王氏)를 세우려고 하니, 조민수(曺敏修) 이색(李穡)의 말[言]을 써서 우(禑)의 아들 창(昌)을 세우기를 의논하매, 변안열 우(禑)의 장인(丈人)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우(禑)를 맞이하기를 꾀하여, 정상(情狀)이 현저하였었다. 뒤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대성(臺省)에서 안열(安烈)에게 죄주기를 청하매, 공양왕이 이를 윤허했으므로, 헌사(憲司)에서 즉시 그 관리를 보내어 배소(配所)에 가서 목 베었으니, 임금이 듣고 이를 중지시키고자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우(禑) 창(昌) 부자(父子)는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형(刑)에 처하여 화근(禍根)을 근절시키기를 청하므로, 공양왕이 이를 윤허했던 것인데, 이행 공양왕의 근신(近臣)이 되어 사건의 본말(本末)을 바른 대로 쓰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국문(鞫問)을 받게 된 것이었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2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좌시중 조준 등이 국호 받은 것을 진하한 전문

문하 좌시중 조준 등이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이황(李滉)을 보내서 전문(箋文)을 받들어 진하(陳賀)하게 하였다.

"성인(聖人)이 왕통(王統)을 창시(創始)하였으니 문득 기자(箕子)의 옛 봉토(封土)를 다스리었으며, 황제의 명령이 아름다웠으니 조선(朝鮮)의 미호(美號)를 주었습니다. 종사(宗社)에 영광이 오고 신민(臣民)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순제(舜帝)의 문명(文明)보다 지나쳤으며, 탕왕(湯王)의 용지(勇智)에 필적(匹敵)하셨습니다. 구가(謳歌)의 따른 바에 순응하고 역수(曆數)의 돌아온 바를 받아서 하민(下民)을 다스리는 인덕(仁德)을 미루어 넓히고, 대국(大國)을 섬기는 예절에 더욱 근실히 하셨으니, 한 장의 종이에 열 줄 되는 조칙이 먼저 그 이름을 바루게 하였으매, 억년 만년의 기업(基業)이 지금부터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신 등은 성상의 병위(兵衛)를 모시지 못하여, 비록 빨리 달려가는 반열[駿奔之班]에 나아가지 못했사오나, 즐거이 도성(都城) 사람들과 더불어 연하(燕賀)의 정성을 갑절이나 다하겠습니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21일 병신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좌시중 조준이 행재소에서 임금을 알현하다

좌시중 조준이 임금을 행재소(行在所)에서 알현(謁見)하였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5월 25일 기사 2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이성 등지로부터 의탁한 여진인을 돌려 보내도록 하고, 황제에게 주문할 일을 의논하다

임금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에서 와서 의탁한 여진(女眞)의 인물을 찾아 돌려보내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황제는 군사가 많고 정형(政刑)이 엄준(嚴峻)하였으므로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지만, 사람을 죽임이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원훈(元勳)과 석보(碩輔)028) 들이 생명을 보전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이에 우리 작은 나라를 자주 책망하면서, 강제로 청구함이 한량이 없었다. 지금 또 나에게 죄가 아닌 것을 책망하면서, 나에게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니,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공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도승지 이직(李稷)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답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우선 말을 낮추어 조심스럽게 섬길 뿐이다."

하였다. 명하여 시중(侍中)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등과 더불어 황제에게 주문(奏聞)할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6월 13일 정해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지공거 조준 등이 선발한 윤정 등 33인에게 전시를 치뤄 송개신을 1등으로 뽑다

임금이 보평전(報平殿)에 앉아서 지공거(知貢擧)인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과 동지공거(同知貢擧)인 예문춘추관 대학사 김주(金湊)가 천거한 윤정(尹定) 등 33인을 시험하였는데, 송개신(宋介臣)을 제1로 삼았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6월 22일 병신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현빈 유씨의 일을 함부로 논한 대간·형조의 관원들을 순군옥에 가두다

또 좌간의(左諫議) 이황(李滉)·우간의(右諫議) 민여익(閔汝翼)·직문하(直門下) 정탁(鄭擢)·기거주(起居注)039) 이지강(李之剛)·우보궐(右補闕) 윤장(尹將)·우습유(右拾遺) 왕비(王裨)·형조 전서(刑曹典書) 이서(李舒), 의랑(議郞) 조사의(趙思義)·최사의(崔士儀), 좌랑(佐郞) 민사정(閔思正)·겸 사헌 중승(司憲中丞) 박포(朴苞), 잡단(雜端)040) 진경(秦瓊)·이치(李致), 참대 감찰(參臺監察) 유선(柳善)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게 하고, 정희계(鄭熙啓)·남은(南誾)·조기(趙琦)·황희석(黃希碩)에게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이전에 임금이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과 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에게 이르기를,

"궁중(宮中)의 소수(小竪)041)  빈잉(嬪媵)042) 을 내쫓아 처벌하는 것은 내 집안의 사삿일이므로 외인(外人)이 알 바가 아닌데, 지금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이 일을 함부로 논(論)하게 되매, 반드시 외인(外人)이 망령되게 스스로 의심을 내어 전해서 서로 모여서 의논하게 될 것이니, 다만 이 무리들의 뜻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무리들을 옥에 가두어 국문(鞫問)하고자 한다."

하니, 조준 등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나가서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이르기를,

"대간(臺諫)과 형조는 한 나라의 기강(紀綱)이 매여 있으므로 예로부터 이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합사(合司)가 갇히게 되면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말을 잘 해서 계문(啓聞)하오."

하였다. 이직이 들어가서 아뢰니, 임금이 옳게 여겨 다만 장무(掌務)만 가두어 국문하고자 하였으나, 그 공사(供辭)가 관련되어 미치게 된 까닭으로, 명하여 모두 가두게 한 것이었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7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정도전이 몽금척·수보록·납씨곡·궁수분곡·정동방곡 등의 악장을 지어 바치다

문하 시랑찬성사 정도전이 전문(箋文)을 올리었다.

"신(臣)이 보건대, 역대(歷代) 이래로 천명(天命)을 받은 인군은 무릇 공덕(功德)이 있으면 반드시 악장(樂章)에 나타내어 당시(當時)를 빛나게 하고, 장래(將來)에 전하여 보이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한 시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시대의 제작(制作)이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뛰어난 무용(武勇)은 그 계략을 도우셨고, 용기(勇氣)와 지혜는 하늘에서 주신 것이므로, 깊고 후한 인덕(仁德)이 민심(民心)에 결합(結合)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면, 천명(天命)을 받은 것은 반드시 인민들의 기대에서 나왔을 것이니 아침이 되기 전에 대의(大義)를 바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상서로운 봉(鳳)이 뭇 새들보다, 신령스런 지초(芝草)가 보통 풀보다 그 남[生]이 반드시 다르게 되니, 성인(聖人)이 일어날 적에 영이(靈異)한 상서(祥瑞)가 먼저 감응(感應)하게 되는 것은 또한 이치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무왕(武王) 주(紂)를 정벌할 때에 ‘짐(朕)의 꿈이 짐(朕)의 점[卜]과 합하여 좋은 상서(祥瑞)에 합치되었다.’고 한 말과, 광무제(光武帝) 적복부(赤伏符)049) 와 같은 종류가 전책(典冊)에 기재된 것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국가를 정제(整齊)하십시오.’라 한 것과, 또 어떤 사람이 이상한 글을 얻어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숨기고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마십시오.’라고 한 것이 그 후 10여 년 만에 그 말이 과연 맞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하늘이 오늘날의 일을 미리 알려 준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여러 사람의 말을 용납해 받아들여서, 무릇 여항(閭巷) 사이의 미세(微細)한 백성들로서 그 안정된 처소를 얻지 못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이를 알게 되고, 이를 알게 되면 반드시 후하게 구휼(救恤)하여, 오히려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까 염려했으니, 언로(言路)를 열어 놓음이 넓었으며, 공신(功臣)을 대우하되 지성으로써 하여, 신서(信書)를 내려 주시고 금석(金石)에 새겼으니, 공신을 보전하심도 지극하였습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정치가 퇴폐(頹廢)하고 법도가 무너져서, 토지 제도[經界]가 바르지 못하여 백성이 그 해를 받게 되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않아서 관원이 그 직책을 잃게 되었는데, 전하께서 일체 모두 바로잡아 정하였으므로, 천도(天道)로써는 저와 같았고 인도(人道)로써는 이와 같았으니, 공을 비교하고 덕을 헤아려 보매 더불어 비할 데가 없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성시(聲詩)로써 전파하고 현가(絃歌)에 올려서 한없는 세상에 전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게 해야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민(不敏)하나 성대(盛代)를 만나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말석(末席)에 참여하고, 다행히 문필(文筆)로써 태사(太史)의 직책을 겸무하게 되었으니, 감격하여 뛰고 싶은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삼가 천명(天命)을 받은 상서(祥瑞)와 정치를 보살핀 아름다운 점을 기록하여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이를 써서 전문(箋文)에 따라 바치옵니다.

1. 몽금척(夢金尺).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받들고 하늘에서 왔는데, ‘경 시중(慶侍中)050) 은 깨끗한 덕행은 있으나 또한 늙었으며, 최 삼사(崔三司)051) 는 강직한 명성은 있으나 고지식하다.’ 하고는, ‘전하(殿下)는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비했으며 덕망도 있고 식견도 있으니, 백성의 희망이 붙게 되었다.’ 하면서, 이에 금자를 주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살피심이 심히 밝으셔서, 길몽(吉夢)이 금자에 맞으셨습니다. 깨끗한 사람은 늙었고 강직한 사람은 고지식하니,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이것이 적합하였습니다. 상제(上帝)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서 국가를 정제(整齊)하게 했으니, 꼭 맞은 그 증험은 천명(天命)을 받은 상서(祥瑞)입니다. 아들에게 전하여 손자에게 미치니, 천억년(千億年)까지 길이 미치겠습니다.

1. 수보록(受寶籙).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智異山) 석벽(石壁)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뒤에 임신년052) 에 이르러, 그말이 그제야 맞게 되었으므로, 수보록(受寶籙)을 지었습니다. 저 높은 산에는 돌이 산과 가지런했는데, 여기서 이를 얻었으니 실로 이상한 글이었습니다. 용감한 목자(木子)053) 가 기회를 타서 일어났는데, 누가 그를 보좌하겠는가? 주초(走肖)054) 가 그 덕망 있는 사람이며, 비의(非衣)055) 군자(君子)는 금성(金城)에서 왔으며, 삼전 삼읍(三奠三邑)056) 이 도와서 이루었으며, 신도(神都)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王位)를 8백 년이나 전한다.’는 것을 우리 임금께서 받았으니, 보록(寶籙)이라 하였습니다.

1. 전하께서 처음 왕위에 오르시매, 상법(常法)을 만들고 기강(紀綱)을 베풀어 백성들과 더불어 혁신(革新)하게 되니 칭송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 큰 것을 들어 말한다면, 언로(言路)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예악(禮樂)을 정하였습니다. 궁궐은 엄하여 아홉 겹이나 깊었으며, 만기(萬機)057) 는 하루 동안에도 매우 번잡하온데, 군왕께서는 민정(民情)을 통하게끔 하여, 크게 언로(言路)를 열어 사방의 시청(視聽)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언로(言路)를 열어 놓은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우리 임금의 덕은 순제(舜帝)와 같습니다. 성인(聖人)이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많은 선비가 다투어 일어나서 구름처럼 따랐습니다. 계책을 부리고 힘을 써서 그 공을 함께 이루었으니, 산하(山河)로써 맹세하여 시종(始終)을 보전했습니다. 공신(功臣)을 보전한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우리 임금의 덕은 무궁한 세대(世代)에까지 전하겠습니다. 토지제도가 무너졌는데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으니, 강한 사람은 합치고 약한 사람은 줄어들어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를 바로잡은 지 겨우 1주년에 국가의 창고는 꽉차고 백성은 휴식하게 되었습니다. 토지 제도를 바룬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임금께서 즐거워하여 천 년까지 누리겠습니다. 정치하는 요령은 예악(禮樂)에 있으니 가까이는 규문(閨門)에서부터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를 정하여 법칙을 전하였으니, 질서 정연하게 차례대로 되고 화락(和樂)으로써 기쁘게 되었습니다. 예악(禮樂)을 정한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천지(天地)에 필적(匹敵)하겠습니다."

임금이 정도전(鄭道傳)에게 채색 비단을 내려 주고는,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이를 익히게 하였다. 도전이 또 그 무공(武功)을 서술하여 악사(樂詞)를 지어 바치었다.

"1. 납씨곡(納氏曲). 납씨(納氏)058) 가 세력이 강함을 믿고 동북방(東北方)에 쳐들어왔습니다. 방종하고 오만하여 힘으로써 자랑하니, 그 기세의 강함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북을 치매 용기가 배나 나는데, 앞장서서 적의 심장부에 부딪쳤습니다. 한 번 쏘아서 편비(褊裨)를 죽였으며, 두 번 쏘아서 괴수에게 미쳤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미처 구원하지 못하는데 적군을 추격하여 성화(星火)처럼 달려갔습니다. 바람소리는 진실로 두렵지만, 학(鶴)의 울음도 또한 의심할 만했습니다. 피로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니 동북방이 영구히 걱정이 없었습니다. 공을 이룸이 이번 거사(擧事)에 있었으니 이를 천만년(千萬年)에 전하겠습니다. 【위는 납씨(納氏)를 쫓은 공을 말한 것임.】

1. 궁수분곡(窮獸奔曲). 곤궁한 짐승이 위험한 곳으로 달아나는데, 우리 군사가 이를 덮치니, 좌우에서 활짝 갈라졌습니다. 혹은 죽이고 혹은 잡았으며, 혹은 달아나고 혹은 숨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부스러져 가루가 되고, 산 사람은 넋을 빼앗겼습니다. 하루 아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난을 평정하여 청명(淸明)하여졌습니다. 개가(凱歌)를 부르면서 돌아왔으니, 동방의 백성이 편안하여졌습니다. 【위는 왜구(倭寇)를 물리친 공을 말한 것임.】

1. 정동방곡(靖東方曲). 아아! 동방은 바다 모퉁이에 막혔는데, 저 교동(狡童)059) 이 임금의 자리를 도적질했습니다. 미친 계획을 자행(恣行)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니 화(禍)가 극도에 달했는데, 평정할 사람은 누구인가? 하늘이 덕망 있는 사람을 도와 의기(義旗)를 돌이켜서, 죄 있는 자는 내쫓고 반역한 자는 죽였습니다. 황제가 이에 기뻐하여 은혜를 미치게 하여, 군사가 나라로써 우리에게 알게 하였습니다. 백성과 사직(社稷)이 돌아가는 데가 있으니 천만세(千萬世)까지 기한없이 전하겠습니다. 【위는 그 군사를 돌이킨 공을 말한 것임.】 "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7일 기미 2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병조 전서 윤소종의 졸기

병조 전서 지제교 동지춘추관사(兵曹典書知製敎同知春秋館事) 윤소종(尹紹宗)이 졸(卒)하였다. 소종(紹宗)의 자는 헌숙(憲叔)이며,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문정공(文貞公) 윤택(尹澤)의 손자이다.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나이 20세가 되기 전에 시문(詩文)은 이미 노성(老成)했으므로,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 보고 기이한 재주라고 칭찬하였다. 공민왕 경자년(1360)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을사년에 나이 21세로서 을과(乙科) 제1인에 합격하여 대책(對策)067) 이 전배(前輩)보다 훨씬 뛰어났다. 드디어 춘추관 수찬(春秋館修撰)에 임명되고, 관직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다.

이때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은 위력(威力)과 은혜를 제 마음대로 행하고, 교만하여 예절이 없었으며,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은 교사(巧詐)하여 임금의 뜻을 잘 맞추어 공역(工役)을 전장(專掌)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였다. 소종이 소(疏)를 초(草)잡아 남김없이 말하여 이들을 모두 물리쳐 제거하고자 하니, 동료(同僚)들이 이것을 알고는 병(病)을 일컫고 출근하지 않았다고 핑계하고서 그를 논핵(論劾)하여 파면시켰으므로, 소(疏)는 과연 올라가지 못하였다. 위조(僞朝)068) 기미년에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으로 임명되고, 전의 부령(典儀副令)·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로 천직(遷職)되었다. 신유년에 어머니 상사(喪事)를 만나 금주(錦州)에서 여막(廬幕)살이를 했으며, 상복을 입는 기간이 끝나자 남방(南方)의 학자(學者)들이 많이 따라와서 수업(受業)하였다. 병인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써 나라에서 소환(召還)하였다. 무진년 여름에 임금이 위화도(威化島)에서 돌아와 군사를 동문(東門) 밖에 주둔하고 있으니, 소종이 〈《한서》 곽광전(霍光傳)을 품안에 품고 나아와서 뵈었다. 임금이 이미 최영(崔瑩) 등을 물리치고, 이에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고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는 일을 단행하면서 소종을 뽑아 올려 전리 총랑(典理摠郞)으로 삼고, 조금 뒤에 우사의 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시켰다. 기사년 봄에 글을 올려 이인임(李仁任)을 논죄(論罪)하여 관(棺)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집터에 못을 파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겼다. 임금이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을 개혁(改革)하고자 하여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소종 정도전 등과 더불어 힘써 청하여 이것을 개혁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좌상시 경연 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으로 임명되었다. 공양왕이 중[僧] 찬영(粲英)을 맞아 와서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므로, 소(疏)를 올려 이를 말렸더니, 공양왕이 불평(不平)을 품고서 예조 판서로 옮겼다가, 조금 뒤에 금주(錦州)로 귀양보내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불러 와서 병조 전서에 임명하고,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열(參列)하게 하였다. 소종은 강개(慷慨)하고 큰 뜻이 있어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매양 임금에게 말할 때는 정치의 잘되고 잘못된 점을 남김없이 진술하여 꺼리고 숨김이 없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산업(産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비록 자주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러도 개의(介意)하지 아니하고, 경사(經史)를 널리 보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더욱이 성리(性理)의 학문에 정통(精通)하였으며 이단(異端)069) 을 배척하는 데 매우 힘을 기울였다. 나이 49세에 병들어 죽으니, 사림(士林)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저술한 시문(詩文)이 8권인데 스스로 제목(題目)하여 《동헌집(桐軒集)》이라 하였다. 아들 윤회(尹淮)는 신사년 과거에 올라 지금 첨지승문원사(僉知承文院事)가 되었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8일 경신 2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동북면 함주에 환왕의 정릉비를 세우다

문하 시랑찬성사 성석린을 동북면(東北面) 함주(咸州)에 보내어 환왕(桓王)070)  정릉비(定陵碑)에 글을 써서 이를 세우게 하였다. 그 비문은 이러하였다.

"임금이 즉위(卽位)한 2년 봄 정월 신미일에 신(臣) 정총(鄭摠)에게 명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으니, 조종(祖宗)의 쌓은 덕을 힘입었다. 삼가 이미 사대(四代)를 추시(追諡)하여 모두 왕작(王爵)을 올렸으니, 그대는 내 선열고(先烈考)071)  정릉비(定陵碑)에 비명(碑銘)을 지어 영원한 세대(世代)에 밝게 보이게 하라.’ 하매, 신 총(摠)이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문사(文辭)의 변변치 못한 이유로써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맹씨(孟氏)072) 의 말을 살펴보건대, ‘5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일어나게 된다.’ 하였으니, 고려 왕조는 시조(始祖) 왕씨(王氏) 이후로 거의 5백 년이 되었습니다. 국운(國運)이 이미 쇠퇴(衰頹)해지자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끊어졌는데, 요망스런 중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성(姓)을 속여 왕위를 도적질하고는 주색(酒色)에 빠지고 포학하였습니다. 무진년에 그 재상(宰相) 최영(崔瑩)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움직여서 장차 천자의 국경을 범하려고 하였으니, 백성의 화(禍)가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대의(大義)에 따라 군사를 돌이켰으니, 우(禑)가 그제야 죄를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사양했습니다. 이듬해에 천자(天子)께서 이성(異姓)이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되었음을 책망하니, 전하(殿下)께서 시중(侍中)으로서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으므로, 여러 장상(將相)들과 서로 의논하여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당초 우(禑) 때로부터 정권이 권신(權臣)에게 있었으므로, 돈을 받고 벼슬을 팔며, 송사(訟事)로 인하여 뇌물을 받아 조정을 탁란(濁亂)시켰으며, 토지를 빼앗아 산야(山野)를 온통 싸고 있었으며, 기강(紀綱)이 크게 무너져서 해독이 날로 심하니,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탄식하며 밤낮으로 다스려진 세상을 생각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구폐(舊弊)를 고쳐 없애고 치도(治道)를 다시 새롭게 하여, 사전(私田)을 폐지하여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용관(冗官)073) 을 도태(淘汰)시켜 명기(名器)를 소중히 하고, 준량(俊良)을 등용시키고 완흉(頑兇)을 내쫓았으며, 무위(武威)를 떨쳐서 변방의 외구(外寇)를 물리치고, 인정(仁政)을 베풀어 백성의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기강(紀綱)을 정돈하고 예악(禮樂)을 수명(修明)하였으니,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습니다. 요(瑤)는 혼미(昏迷)한 자질로써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간사한 무리를 믿어 쓰고 충직(忠直)한 신하를 내쫓으며, 부녀와 환관(宦官)의 말을 듣고서 전제(田制)의 바른 것을 어지럽히고, 사친(私親)과 근신(近臣)을 임용하여 명기(名器)의 공정함을 문란시키며, 정령(政令)이 일정하지 않아서 국법(國法)을 무너뜨리고, 용도(用度)가 절차가 없어서 백성의 재물을 해롭게 하며, 여러 소인들의 차츰차츰 헐뜯는 참소를 믿고, 전하의 나라를 광복(匡復)시킨 공로는 잊고서 이에 그 재상(宰相)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늘 전하를 모함(謀陷)하였습니다. 몽주(夢周)는 그의 무리로서의 대간(臺諫)에 있는 사람을 몰래 사주(使嗾)하여, 공신(功臣)과 직언(直言)하는 사람에게 죄를 가하려고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으려는 글을 올려서, 장차 전하(殿下)에게 미치게 하려고 하여 화(禍)가 헤아리지 못할 단계에 있게 되니, 나라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6일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인이 천명(天命)이 있는 바를 알고 인심의 돌아가는 바를 살펴서, 대의(大義)로써 먼저 주창하니, 백관(百官)과 부로(父老)들이 의논하지 않고서도 의견이 서로 같게 되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니, 전하께서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사오나, 여러 사람의 뜻이 더욱 견고하므로 마지 못하여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저자[市]는 가게[肆]를 변동하지 않고,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하루아침에 청명(淸明)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즉시 지중추(知中樞) 신(臣) 조반(趙胖)을 보내어 이 사실을 황제에게 주문(奏聞)하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는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고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즐거움을 즐기게 되니, 곧 상제(上帝)의 명령이다.’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추사(中樞使) 신(臣) 조임(趙琳)이 잇따라 돌아왔는데, 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고치는가? 빨리 달려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신(臣)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명(國名)을 주청(奏請)하니, 조선(朝鮮)의 국호(國號)로 내려 주고, 또 말하기를,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의 위아래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이른바 5백 년의 시기에 응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신(臣)이 삼가 선원(璿源)074) 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全州)의 명망(名望)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075) 의 십대손(十代孫)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가서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을 낳고, 시중은 복야(僕射)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는 아간(阿干) 이광희(李光禧)를 낳고, 아간은 사도(司徒) 이입전(李立全)을 낳고, 사도는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긍휴 이염순(李廉順)을 낳고, 염순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승삭 이충경(李充慶)을 낳고, 충경 이경영(李景英)을 낳고, 경영 이충민(李忠敏)을 낳고, 충민 이화(李華)를 낳고,  이진유(李珍有)를 낳고, 진유 이궁진(李宮進)을 낳고, 궁진은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를 낳고, 대장군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璘)을 낳고, 집주는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가서 장군(將軍) 이양무(李陽茂)를 낳고, 장군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가서 지의주(知宜州)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았는데, 뒤에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남경 오천호소(南京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으니, 곧 우리 전하의 황고조(皇高祖)입니다. 지금 목왕(穆王)으로 봉해졌으며, 능(陵) 이름은 덕릉(德陵)이라 하고, 배위(配位) 이씨(李氏)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로서, 지금 효비(孝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안릉(安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증조(皇曾祖) 휘(諱) 이행리(李行里)는 천호(千戶)를 물려 봉[襲封]했는데, 지금 익왕(翼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지릉(智陵)이라 하고, 배위(配位)는 등주(登州) 최씨(崔氏)이니, 지금 정비(貞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숙릉(淑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조(皇祖) 증 찬성사(贈贊成事) 휘(諱) 춘(春)은 지금 도왕(度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의릉(義陵)이라 하고, 배위(配位)는 문주(文州) 박씨(朴氏)이니, 경비(敬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순릉(純陵)이라 하였습니다. 황고(皇考) 영록 대부 판장작감사 삭방도 만호 증 문하 시랑(榮祿大夫判將作監事朔方道萬戶贈門下侍郞) 휘(諱) 이자춘(李子春)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을 세워 만부(萬夫)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정(至正) 경자년(1360) 4월 갑술일에 병으로 삭방도(朔方道)에서 훙(薨)하니, 연세가 46세였습니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咸州)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했는데, 지금 환왕(桓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정릉(定陵)이라 하고, 비(妃) 최씨(崔氏)는 증 판문하 영흥백(贈判門下永興伯)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니, 의비(懿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화릉(和陵)이라 하였습니다.

대대로 훈공(勳功)과 은덕(恩德)을 쌓아서 비로소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으며, 선행(善行)이 쌓여지고 경사(慶事)가 모여져서, 근원이 깊으매 덕이 후세에 전하여 성철(聖哲)을 거듭 낳아서 큰 왕업(王業)을 세우게 했으니, 하늘이 덕이 있는 이를 돌보아 도와주심이 지극하였습니다. 딸은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壁)에게 시집갔습니다. 전하(殿下)의 배위(配位) 한씨(韓氏)는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고, 절비(節妃)라 증시(贈諡)하고 능 이름은 제릉(齊陵)이라 하였습니다. 아들 이방우(李芳雨) 진안군(鎭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과(李芳果)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의(李芳毅) 익안군(益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간(李芳幹) 회안군(懷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원(李芳遠)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연(李芳衍)은 일찍 별세했는데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고, 딸 두 사람은 모두 어립니다. 계실(繼室)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아들 이방번(李芳蕃) 무안군(撫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석(李芳碩)은 어리며, 딸은 경산 이씨(京山李氏) 제(濟)에게 시집갔는데, 흥안군(興安君)으로 봉해졌습니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복근(李福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영안군(永安君)은 증 문하 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에게 장가갔으며, 익안군(益安君)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석근(李石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회안군(懷安君)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맹종(李孟宗)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정안군(靖安君)은 예문관 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에게 장가 갔으며, 무안군(撫安君)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에게 장가갔습니다.

신이 가만히 보옵건대, 제왕(帝王)이 일어날 적에 조종(祖宗)의 적루(積累)076) 가 오래고 본지(本支)077) 의 번연(蕃衍)의 많은 것이 주(周)나라와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후직(后稷)078) 으로부터 수십세(數十世)를 지내어 문왕(文王)·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왕업(王業)을 일으켰는데, 인후(仁厚)한 후비(后妃)의 덕화에 자손이 또한 인후(仁厚)하고, 후비(后妃)가 질투하지 않으므로써 자손이 많아져서, 실로 창희(蒼姬) 8백 년의 역수(曆數)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지만, 또한 선대(先代)의 인후(仁厚)한 덕이 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는 사공(司空)으로부터 환왕(桓王)079) 에 이르기까지 적선(積善)을 오래 했는데,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영명(英明)한 자질과 신무(神武)의 지략(智略)으로써 멀리 전해 온 공렬(功烈)을 계승하고 큰 경사(慶事)를 빛나게 받아 억만대(億萬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개시하여, 금지(金枝)080) 의 퍼짐이 이미 무성하여졌으니, 진실로 주(周)나라와 같이 융성(隆盛)하겠습니다. 이것은 그 쌓인 것이 오래 된 까닭으로 나타나는 것이 크게 되고, 심은 것이 튼튼한 까닭으로 전하는 것이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아아! 성대한 일이로다. 신 총(摠)은 절하고 손을 모아 머리를 조아려 명사(銘辭)를 올리기를 ‘실령한 오얏나무[李氏]는 근본이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습니다. 사공(司空)으로부터 대대로 덕음(德音)이 무성하더니, 길이 그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환왕(桓王)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명주(明主)081) 를 낳으시어 문득 동방을 차지하였습니다. 역수(曆數)의 돌아가는 바이니 전쟁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혁신(革新)하여 덕을 밝게 선포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말하시기를, ‘불선(不善)한 내가 천록(天祿)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이 경사(慶事)를 기른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예전에 시행하던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왕(王)을 추시(追諡)하니,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덕행이 나타나게 되매, 그 광채가 빛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인후(仁厚)한 공성(公姓)082) 은 즉시 그 경사를 두터이 하여,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만세(萬世)까지 영구히 존속하겠습니다. 저 귀주(歸州)를 보건대, 높다란 그 언덕에 왕기(王氣)가 매우 성하니, 한이 없는 그 경사입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매, 나의 명(銘)이 과분한 칭찬이 아니옵니다. 이 비석(碑石)에 새겨서 후세의 사람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1월 28일 기사 2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조준이 질병이 있는 조관에게 의원을 보내 진찰하는 제도를 실시하자고 청하다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이 조관(朝官)의 질병에 의원을 보내어 진찰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18일 무자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조준, 권중화 등에게 풍수에 관한 비결책을 가지고 무악의 천도지를 살펴보게 하다

좌시중 조준과 영삼사사 권중화 등 11인을 보내어 서운관(書雲觀)의 원리(員吏) 등을 거느리고 《지리비록촬요(地理秘錄撮要)》를 가지고 가서 천도할 땅을 무악(毋岳) 남쪽에서 살펴보게 하였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3일 계사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권중화와 조준이 무악 천도를 반대하고, 하윤만이 찬성하다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와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 등이 무악(毋岳)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무악(毋岳)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습니다."

좌도 도관찰사(左道都觀察使) 하윤(河崙)만이 홀로 아뢰기를,

"무악(毋岳)의 명당(明堂)이 비록 협착(狹窄)한 듯하지마는, 송도(松都) 강안전(康安殿) 평양(平壤) 장락궁(長樂宮)으로써 이를 관찰한다면 조금 넓은 편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고려 왕조의 비록(秘錄)과 중국에서 통행(通行)하는 지리(地理)의 법에도 모두 부합(符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친히 보고 정하고자 한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3일 임인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좌시중 조준을 5도 도총제사로, 판삼사사 정도전을 3도 도총제사로 삼다

임금이 수창궁에 계시었다.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 교주(交州)·강릉(江陵)·서해(西海)·경기좌·우(京畿左右) 5도(道)의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 경상·전라·양광 3도의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았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24일 계해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판문하부사 안종원의 졸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이 졸(卒)하였다. 종원(宗源)의 자(字)는 사청(嗣淸)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의 아들이다. 젊은 나이에 과거(科擧)에 올라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044)  공봉(供奉)045) 이 되었다. 관직의 임기가 차서 천직(遷職)하게 되었는데, 동료(同僚) 심동로(沈東老)가 나이 많은 이유로써 그에게 사양하여, 그로 하여금 먼저 천직하게 하니 문정공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사양은 덕의 첫째이니 우리 집안이 더욱 번창하겠구나!"

하더니, 그 후 1년 만에 곧 천직(遷職)되었다. 여러 번 옮겨 전법 정랑(典法正郞)이 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경상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 신축년에 시어사(侍御史)로 외직(外職)으로 나가 양광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키매,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여 죽주(竹州)에 이르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 종원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능히 접대하지 못하니, 공민왕이 노하여 그를 목 베고자 하였으나, 임금에 가까이 있는 신하 유숙(柳淑)이 변명하여 구원해 줌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갑진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임명되었으나, 신돈(辛旽)이 국정(國政)을 맡으매, 자기에게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밖으로 내보내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삼았는데, 은덕(恩德)을 베푼 정사가 있었으므로 그가 간 뒤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046) 을 세워 제사지내었다. 신해년에 신돈(辛旽)이 실패되매 일으켜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하고, 좌사의(左司議)와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와서 제학(提學)이 되고,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되었으며, 또 대사헌을 겸직하게 되었다. 임술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유양(柳亮) 등 33인을 뽑았으며, 벼슬이 문하 찬성사 판삼사사(門下贊成事判三司事)까지 이르렀다. 종원은 성품이 자상(慈詳)하고 말이 적었으며, 거처하는 정자(亭子)를 칭호하여 쌍청정(雙淸亭)이라 하였다. 사람을 접대하기를 공손하게 하고, 세상의 형편대로 따라 하여 그 몸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일을 감당하는 데 서툴러 이르는 곳마다 한 일이 없었다. 건국 초기에 이르러 임금께서 고려조의 기로(耆老)인 이유로 발탁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 71세였다.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을 보내어 빈궁(殯宮)에 제사지내고 장사(葬事)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리었다. 아들 안중온(安仲溫)·안경량(安景良)·안경공(安景恭)은 모두 과거에 올라, 중온 경량은 벼슬이 중추(中樞)에 이르고, 경공은 개국 공신에 참여하여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안경검(安景儉)은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6월 24일 임진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신하들의 보필을 당부하고 관찰사를 천거하게 하다

도승지 한상경(韓尙敬)에게 분부하여 도평의사사에 전교(傳敎)하였다.

"왕씨의 후손이 끊어지고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한 것은 실은 이 백성을 위한 것이다. 만약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돌보아 주지 않으면 하늘이 기필코 재앙을 내리리라. 예로부터 세상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나지 못한 까닭이라. 내 비록 덕은 없으나 항상 생각하기를, 경 등이 때를 타고 나서 나의 팔다리가 되어 대업(大業)을 창조하였으니, 마땅히 밤낮으로 마음을 가다듬어서 하늘의 뜻을 보답하게 하라. 옛사람의 말에, ‘천리나 되는 국토를 가지고 남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지방이 2, 3천 리나 되니, 진실로 정사와 법령을 밝히면 어찌 남을 두려워하겠는가? 내가 늙고 병들어서 정무를 게을리 하고 단지 경 등만 믿으나, 다스려 보려는 마음을 어찌 잠시인들 잊겠는가? 경 등은 모두 마음을 다해서 나의 부족을 도우라. 관찰사는 반드시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적당한 인물이면 한 지방이 그 혜택을 받고 부적당한 사람이면 한 지방이 그 폐해를 입으니, 마땅히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여 이름을 써서 알리게 하라."

이에 시중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등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였다.

"신 등이 모두 어리석고 못난 자들로서 성상(聖上)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심력을 다해서 만분의 일이라도 돕지 않겠습니까? 관찰사를 골라서 보내는 것은 실로 분부하신 바와 같으니,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소서."

또 말하였다.

"지금 시위하고 있는 군인들이 밤낮으로 근로하면서 거의 녹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가까이 모시고 있는 충용위(忠勇衛)와 기타 여러 위로서 관직을 받은 자들이 대개 합당한 사람이 아니니, 원컨대, 시위 군사들로 하여금 그 직책을 갈아 받도록 하소서. 그밖의 모든 사리는 사실대로 곧 아뢰겠습니다."

상경이 복명(復命)하니, 즉시 대성(臺省)의 장무(掌務)를 불러서 분부하였다.

"승지나 전서(典書) 이상으로 관찰사의 임무에 합당한 자가 있거든 현직이나 퇴직을 막론하고 그 이름을 써서 알리라."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11일 무인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왕이 무악을 둘러보고 유숙하다. 천도할 장소에 대한 분분한 의론

임금이 무악(毋岳)에 이르러서 도읍을 정할 땅을 물색하는데, 판서운관사 윤신달(尹莘達)과 서운 부정 유한우(劉旱雨) 등이 임금 앞에 나와서 말하였다.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는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신달 등이 물러가서 서로 의논하였는데, 임금이 한우를 불러서 물었다.

"이곳이 끝내 좋지 못하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신의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

임금이 또 말하였다.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

한우가 대답하였다.

"고려 태조 송산(松山) 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삼국 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

하고, 좌시중 조준(趙浚)·우시중 김사형(金士衡)에게 일렀다.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

이에 겸판서운관사 최융(崔融) 윤신달·유한우 등이 상서하였다.

"우리 나라 내에서는 부소(扶蘇)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이 다음입니다."

이날 저녁에 임금이 무악 밑에서 유숙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15일 임오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회암사에 거둥하고 풍천 서쪽에서 유숙하다

회암사(檜巖寺)에 거둥하여 중들에게 밥을 먹이고, 풍천(楓川) 서쪽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좌시중 조준이 앓으니, 견여(肩輿)를 주어서 먼저 송경(松京)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24일 신묘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도읍 정할 것을 아뢰니 가납하다

도평의사사에서 상신(上申)하였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堯)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하(夏)나라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 상(商)나라 박(亳)에, 주(周)나라 풍호(豊鎬)에, 한(漢)나라 함양(咸陽)에, 당나라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 혹은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 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왕지(王旨)로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0월 11일 정축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일본 구주 절도사에게 포로를 보내 준 것에 사례하고 협력을 요청하는 글

전 공조 전서 최용소(崔龍蘇) 일본에 보내고,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에게 글월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조선국 문하 정승(門下政丞) 조준(趙浚) 등은 일본국 절도사 원공(源公) 좌하(座下)에 회답합니다. 우리 사신이 돌아오는데 〈좌하의〉 귀중한 글월을 받아서 동정(動靜)이 평안하다 하니, 위안이 됩니다. 이번에 피로인(被擄人) 7백 명을 돌려보내어 모두 고향에 돌아오게 되니, 그 은혜가 지극하오. 더욱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차차 모아서 보낸다 하고, 또 왜구를 금지하여 두 나라 사이에 영원히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을 기약하며, 서로 좋게 지내려는 성심이 지극히 깊고 두터우니, 대단히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근래에 본국의 수군 장수(將帥)들이 여러 번 왜구를 사로잡고 주사(舟師)062) 를 보내 잔당을 쳐서 잡자고 하므로, 조정의 공론이 장차 허락하려던 차에 마침 좌하의 사연을 보고 중지했으니, 만일 보내 온 글뜻과 같이 호령을 엄하게 하고, 흉악한 해적들을 토벌해 없애서 영구히 변방의 걱정을 없게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리오. 진기한 예물은 더욱 감격스럽게 생각하여 이제 공조 전서 최용소를 보내서 보답하는 것인데, 변변치 못한 토산품을 별지와 같이 보내니, 받아 주기 바라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1월 4일 경자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병권과 정권 장악한 조준·정도전을 비판한 변중량 등을 국문하다

전중 경(殿中卿) 변중량(卞仲良)을 순군옥에 가두고, 대사헌 박경(朴經)과 순군 만호 이직(李稷) 등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다. 당초에 중량이 병조 정랑 이회(李薈)와 말하였다.

"예로부터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한 사람이 겸임을 못하는 법이라, 병권은 종친에게 있어야 하고 정권은 재상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준·정도전·남은 등이 병권을 장악하고 또 정권을 장악하니 실로 좋지 못하다."

〈그후〉 중량이 또 이 말을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에게 말했다. 가 임금에게 고하니, 임금이 중량을 불러서 물은즉, 중량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말하였다.

"박포(朴苞)도 또한 전하께서 국정을 잘못하여 여러 번 별의 변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임금이 성이 나서 말하였다.

"이들은 모두 나의 수족과 같은 신하들로 끝끝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을 의심한다면 믿을 사람이 누구냐?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즉시 중량  를 국문하게 하니,   중량과 더불어 서로 따지면서 자기만 모면하려고 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2월 3일 무진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왕도 공사의 시작에 앞서 황천 후토와 산천의 신에게 고한 고유문

임금이 하룻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은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옛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니, 신 단(旦)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騭)의 기쁨을 얻어,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 단(旦)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종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천도한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 ‘종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 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매,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신 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은 이러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山)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水]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조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이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 이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3월 12일 을사 2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창종을 앓는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에게 중관을 보내 문병하다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모두 창종(瘡腫)을 앓으니, 임금이 중관(中官) 조순(曹恂)을 보내서 문병하게 하고, 또 말하였다.

"창종(瘡腫)을 고치는 데는 동심(動心)하여서는 안 되니 정사(政事)를 염려하거나 손님을 접대하지 말라."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7월 17일 무신 2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좌우 정승 조준과 김사형,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말 1필씩을 하사하다

좌정승 조준(趙浚)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문충보(文忠甫)가 바친 말 1필씩을 각각 하사하였다.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5일 을미 1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제례를 마친 후 중외의 조하를 받고 국정 쇄신의 내용을 담은 교서를 내리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입고 친히 관향(祼享)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니, 세자가 아헌(亞獻)하고 우정승 김사형이 종헌(終獻)하였다. 제례를 마치고 대차(大次)에 돌아오자, 중외(中外)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평두연(平兜輦)을 타고 시가(市街)에 이르니, 성균 박사가 태학생을 인솔하고 가요(歌謠) 3편을 올렸는데, 첫째는 천감(天監)이니 천명 받은 것을 찬양한 것이요, 둘째는 화산(華山)이니 도읍 정한 것을 찬양한 것이요, 셋째는 신묘(新廟)이니 종묘를 세워서 친히 제향 올린 것을 찬양한 것이었다.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니, 전악서(典樂署)의 여악들이 노래를 부르고 정재(呈才)를 드렸다. 임금이 세 차례나 연을 멈추고서 이를 보았고, 오문(午門)의 장막친 임시 행차소에 이르러 교서를 반포해 내렸다.

"왕은 이르노라. 내가 외로운 몸으로 선대의 쌓은 덕을 입고 신민들이 추대하는 힘을 입어서, 크나큰 터전을 마련하여 문득 동쪽의 나라를 차지하고, 새 도읍을 한양에 들이게 되어 태세 을해 9월에 종묘가 낙성되고 황고조고 목왕(穆王)과 황고조비 효비(孝妃)며, 황증조고 익왕(翼王)과 황증조비 정비(貞妃)며, 황조고 도왕(度王)과 황조비 경비(敬妃)며, 황고 환왕(桓王)과 황비 의비(懿妃)의 4대 신주를 봉안하고, 10월 을미일에 삼가 몸소 재계하고 친히 희생(犧牲)과 규폐(珪幣)를 올리나니 증제(蒸祭)를 엄하게 할 것이며 의식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생각하건대 종묘의 위패는 나라의 대본이니, 종묘는 빛남이 있어야 하고, 증제와 상제는 나라의 대사이니 공명해야 한다. 이는 모두 선대부터 왕이 될 징조를 갖게 되어 나에게 이르러서 한 집이 나라로 변하니, 이번 성전을 보고서 내가 심히 스스로 경사로 여겼노라.

마땅히 관대한 은전을 베풀어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하니, 홍무 28년 10월 초5일 새벽 이전에 지은 죄로 상사(常赦)로써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한 이죄(二罪) 이하는 이미 발각된 것이나 안 된 것이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라. 아아! 참으로 나의 조상의 복록(福祿)이 이름을 보시고, 가상하게도 여러 생령으로 함께 인수(仁壽)의 지경에 올라가게 되니, 마땅히 행하여야 될 좋은 일을 다음에 기록하노라.

1. 국맥(國脈)을 배양하는 것은 예의와 풍속을 이루는 데 있다. 고려 말기에는 정치와 교화가 어지럽고 예의와 제도가 무너져서 선비들의 습관과 백성들의 풍속이 모두 좋지 못하게 되어서 망국에 이르렀으니, 이제부터는 사대부가 된 자는 그 몸을 계칙하고 그 직책에 부지런히 하며, 서민이 된 백성이라도 그 본분을 지키고 할 일에 잘하여 요행으로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말고 , 제멋대로 행동하여 혼자서만 편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예의의 풍속을 이루게 하라.

1. 백성이란 오직 나라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각각 있는 곳에서 넉넉하게 구휼해 주라. 근래에 도읍을 옮김으로 인하여 애써서 한 부역이 너무 많았으나, 종묘는 조종(祖宗)을 편안하게 하고 효도와 공경을 다하자는 바이며, 궁궐은 나라의 정사를 듣고 존엄성을 보이려 하는 바이며, 성곽은 안과 밖을 가리고 비상사태를 방비하려는 바이니, 모두 부득이한 일이다. 내 어찌 기꺼이 백성의 노력을 썼겠는가? 그 외의 건축하는 일은 모두 정지하고 파해서 다시 나의 백성의 힘을 곤하게 하지 말라. 만일에 부역하다가 죽는 자가 있으면, 그 맡은 관청에서는 그 집을 복호(復戶)하게 하라.

1. 즉위한 처음부터 교조(敎條)를 내려 백성들의 토지가 묵었나 곡식이 잘되었나를 답사해서 세곡을 적당하게 감하게 한 일정한 제도를 두었으나, 금년에 와서는 이미 장맛비와 풍재·상재가 있었는데다, 또 군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많이 직업을 잃었으니, 그 재해를 우심하게 입은 자는 답사해서 세곡을 면하게 하라. 고려 때에 주현(州縣)의 세곡이 체납된 것은 모두 면제해 주고, 그 민간에서 공사의 물건을 빌려서 쓰고, 빌려서 쓴 자가 이미 죽어서 그 일족에게까지 받는 것은 모두 금단하게 하라.

1. 주군(州郡)의 군사가 번상(番上)하여 숙위(宿衛)하는 것은 근본을 중하게 하고 수고로움과 편안한 것을 고루게 함이었다. 그러나 늙고 약한 자가 멀리서 올라와 고생을 하고, 단정(單丁)으로 있는 사람은 식량을 밑천으로 할 도움이 없으니, 내가 심히 불쌍히 여기는 바이다. 금후로는 각도의 시위 군사는 장건한자 및 노비와 두 장정이 있는 사람을 뽑아 보내고, 늙고 약하며 홑몸으로 있는 자는 아울러 보내지 말게 하라.

1. 번번이 조목으로 분부해서 백성들에게 편리할 일을 하도록 했으나, 감사와 수령들은 문구(文具)로만 여기고 즉시 거행하지 않아서 은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못할 것은 내 심히 염려한다. 경중(京中)은 사헌부에서, 외방(外方)은 관찰사가 매년 조목을 반포하여 즉시 시행하고,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하라.

1.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며, 학교는 교화하는 근원이다. 즉위한 이래로 여러 번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라는 뜻을 보였으나, 수령은 거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감사는 더 고핵(考劾)하지 않아서 모두 실효가 없으니, 내가 심히 염려된다. 이제부터는 경중은 사헌부에서, 외방은 관찰사가 때때로 성적을 매겨서 흐릿해지는 점이 없게 하여, 나의 백성을 사랑하고 도(道)를 소중하게 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여(輿)를 타고 환궁하였다. 여악(女樂)이 궁전 뜰에 이르니, 현비가 주렴을 드리우고 풍악을 보았다. 3일 뒤 정유일에 〈종묘 제사의〉 집사관으로 참예했던 사람들에게 각각 한 계급씩 올려 주고, 양부(兩府) 이상에게는 내구마 1필씩 하사하고, 신궁(新宮)에서 군신(群臣)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집사들에게,

"경 등은 맡은 일을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하여 우리 조종께서도 즐기실 것이니, 내 심히 기뻐하는 바이다."

하고, 좌정승 조준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말을 하사하면서,

"경 등은 비록 제향에는 참예하지 않았으나, 종묘의 예식은 모두 경 등이 정한 것이었다."

하고, 정도전에게 금으로 장식한 각대(角帶) 하나를 더 주면서,

"이제 아악(雅樂)을 들어보니 경의 공이 적지 않았다."

하였다.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14일 갑진 1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 때문에 대신들에게 요여를 내려 주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판문하부사 권중화·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대[竹]로 만든 요여(腰輿) 하나씩을 내려 주고, 기로 제신(耆老諸臣)에게도 내려 주었는데, 대체로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1월 11일 신미 2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명나라에 국왕의 고명과 조선국의 인장을 내려달라고 청하는 글

예문춘추관 태학사(太學士) 정총(鄭摠)을 보내어, 한량 기로(閑良耆老)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신문(申文)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나아가,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청하게 하였다. 그 신문은 이러하였다.

"조선국 도평의사사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가 덕을 잃어서 준(浚) 등은 일국의 신민과 함께 이(李) 【휘(諱).】 를 임금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홍무 25년 7월 15일에 지밀직사사 조반(趙胖)을 보내어 황제께 주달하였고, 계속해서 문하 평리(門下評理) 조림(趙琳)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아뢰게 하였더니,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오니, 권지 국사(權知國事)로 윤허하시고, 예부에서 온 자문을 받자오니, 그 사연에, ‘나라의 이름을 무엇으로 고쳐야 하느냐? 빨리 와서 알리라.’ 하옵기로, 이에 의하여 즉시 지밀직사사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주본(奏本)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가서 삼가 성지를 받자오니,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칭호는 오직 조선이라 하는 것이 아름답고, 또 그 내력이 오래 되니, 그 이름을 근본으로 삼아 본받을 만하니.’ 하셨으니, 삼가 이에 따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밖에 홍무 26년 3월 초9일 문하 평리 이염(李恬)을 보내어 전조 고려 국왕의 금인(金印)을 부송(附送)했고, 또 그 해 12월 초8일에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을 받자와 삼가 성지(聖旨)의 1절(節)을 뵈오니, 그 사연에, ‘정명(正名)에 합치되게 지금 조선이라고 이름을 고쳤은즉, 표문에 전대로 권지 국사라 함은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셨으니, 이 분부를 받자와 일국 신민들이 벌벌 떨면서 황송히 여기오며, 모두 국왕이라고 시행하라 하오나, 오늘날 비록 국왕이라 일컬을지라도 명칭이 끊어져 내려 주신 고명과 조선국의 인장을 받지 못하여, 일국의 신민들이 밤낮으로 옹망하고 감히 사연을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살피시기를 청하와 번거롭게 아뢰오니, 국왕의 고명과 조선의 인신(印信)을 주시어서 시행하게 하옵소서."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2월 20일 기유 1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좌우 정승 조준·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칼 한자루씩을 주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판삼사사 정도전에게 각각 칼 한 자루씩을 주었다.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3월 16일 계유 2번째기사 1396년 명 홍무(洪武) 29년

조준과 정도전을 과거 고시관으로 삼다. 정도전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좌정승 조준(趙浚)과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으로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을 삼고, 도승지 민여익(閔汝翼)과 대사성 함부림(咸傅霖)으로 성균 시원(成均試員)을 삼았다. 정도전이 고시관을 사면시키기를 청하였다. 윤허하지 않으니, 굳이 사양하므로 또 윤허하지 아니하니, 민여익도 또한 시원(試員)을 사양하려 하매 윤허하지 않았다.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5월 1일 정사 1번째기사 1396년 명 홍무(洪武) 29년

고시관이 조유인 등 33인을 뽑아 올렸는데 김익정을 장원으로 삼다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서 고시관 조준 정도전이 뽑은 조유인(曹由仁) 등 33인을 시험보이고, 김익정(金益精)을 제1등으로 삼았다.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8월 16일 신축 2번째기사 1396년 명 홍무(洪武) 29년

조준 등의 건의로 공신 이서로 하여금 3년 동안 왕비의 능을 지키게 하다

공신(功臣)인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을 순응하여 집을 나라로 만드셨으니, 이것은 전하의 지극하신 덕(德)과 깊으신 인(仁)이 천명과 인심이 돌아옴을 얻게 된 것이오며, 역시 현비 전하(顯妃殿下)께서는 품성(稟性)이 정숙(貞淑)하시고 조행(操行)이 근신(謹愼)하시어 평시에도 항상 경계(儆戒)하는 마음을 두시고, 위태할 때에는 대책(大策)을 결정하는 데에 참예하여 내조(內助)의 공이 역사[竹帛]에 빛나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상천(上天)이 돌보지 아니하여 문득 승하(昇遐)하시니, 신 등이 슬퍼함이 보통보다 만배나 더합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재질(材質)로 성대(盛代)를 만나서 개국 공신의 반열에 외람되이 참예하오니, 의(義)로는 임금과 신하의 사이오나, 은혜는 실로 부모와 같습니다. 비록 몸을 가루로 만들어 보답하려 해도 할 수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공신 1인으로 3년 동안 능을 지키게 하고, 이로부터 영구히 전례가 되게 하여, 대대의 자손들이 준수하여 어기지 않으면, 비록 호천망극(昊天罔極)한 덕은 갚지 못하나마 신 등의 구구(區區)한 정성은 바칠 수 있겠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채택하여 시행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 공신(功臣) 안평군(安平君) 이서(李舒)로 능을 지키게 하였다.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9월 5일 경신 1번째기사 1396년 명 홍무(洪武) 29년

정희계의 시호 문제로 최견·안성·김분 등이 유배가다

형조에서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최견(崔蠲)은 교형(絞刑), 안성(安省) 김분(金汾) 등은 장(杖) 1백에 도(徒) 3년으로 정하였다.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이 이를 듣고 불쌍히 여기면서,

"견(蠲)의 죄가 이에까지 이르겠는가?"

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전서(典書) 당성(唐誠)과 함께 동의(同議)하여 조율(照律)해서, 손에 율문(律文)을 가지고 바로 들어가서 임금에게 면대해서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견(蠲)은 장(杖) 1백 대를 쳐서 김해(金海)로 도배(徒配)하고, 성(省) 등은 차등있게 매[杖]를 쳐서, 안성 축산(丑山)으로, 분(汾) 각산(角山)으로, 심언(審言) 순천(順天)으로, 사징(士澄) 강주(康州)로 유배(流配)하고, 전백영(全伯英)·이황(李滉)·맹사성(孟思誠)·조사수(趙士秀) 등은 모두 파직(罷職)하고, 희계(熙啓)를 다시 양경(良景)이라고 시호(諡號)를 주었다.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10월 10일 갑오 1번째기사 1396년 명 홍무(洪武) 29년

좌정승 조준과 판중추원사 이근에게 신덕 왕후의 시책을 올리게 하다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근(李懃)에게 명하여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시책(諡冊)을 올리게 하였다.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12월 3일 정해 2번째기사 1396년 명 홍무(洪武) 29년

한성 윤 민개의 졸기

한성 윤(漢城尹) 민개(閔開)가 졸(卒)하였다. 개(開)는 본관이 여흥(驪興)이요, 전리 판서(典里判書) 민변(閔抃)의 막내아들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뜻이 강개(慷慨)하여 대간(臺諫)을 지냈고, 지신사(知申事)가 되기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말의〉 출납을 잘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위에서 물러나던 날에 민개가 대사헌(大司憲)으로서 반대하고자 하여 말과 기색[辭色]에 나타내었었다. 남은(南誾) 등이 조준(趙浚)에게,

"는 베어야 한다."

하였으나, 이 반대해서 죽지 않았다. 뒤에 경상·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모두 성적이 좋았었다. 죽을 때의 나이가 37세였다. 사림(士林)들이 아깝게 여기었다. 가 관찰사로 있을 때에 자봉(自奉)이 너무 박해서 병이 나게 되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각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하루 네 때씩 먹도록 길이 항식(恒式)으로 정하였다.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1월 6일 기미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대사헌 민여익이 지중추원사 조견과 한성 윤 신효창을 탄핵하려다가 도로 탄핵당하다

대사헌 민여익(閔汝翼)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견(趙狷)과 한성 윤(漢城尹) 신효창(申孝昌)을 탄핵하였다. 조견 합포(合浦)의 절제(節制)로 있었을 때, 왜구(倭寇)를 제어하지 못하였는데, 신효창은 당시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조견을 탄핵하지 못하였다. 이에 민여익 조견의 형인 조준(趙浚)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성상께서 헌부로 하여금 견(狷)을 탄핵하고자 하신 지 오래였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헌관이 되어 죄가 있는 자를 탄핵하면 되었지, 하필 말[辭]을 핑계할 것은 무엇이냐? 또 조견은 공신이라 경솔히 탄핵하는 것은 불가하다."

민여익을 옥에 가두려고 하니,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나아가 아뢰었다.

"조견 민여익은 모두 공신이온데, 누구는 취하고 누구는 버리시옵니까?"

그래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 있게 하고 헌부에 나오지 못하도록 명하였는데, 다시 탄핵하게 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모두 용서하여 풀어주었다.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2월 8일 신묘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의안백 화와 좌정승 조준 등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다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좌정승 조준(趙浚)·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니, 사은사(謝恩使) 권중화(權仲和) 이하 여러 사신(使臣)과 구육(㡱六)도 이에 참예하였다. 김사형에게 서대(犀帶)를 하사하였다.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2월 17일 경자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좌정승 조준 등이 우정승 김사형을 위하여 잔치하니 술을 쓰도록 허락하다

개국 공신(開國功臣) 좌정승 조준(趙浚) 등이 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을 위하여 잔치하니, 임금이 술을 쓰도록 허락하였다.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2월 22일 을사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잡과 시험을 쳐서 명의 8인과 명률 7인을 뽑다

고시관(考試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잡과(雜科) 명의(明醫) 8인과 명률(明律) 7인을 시험하여 취하였다.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 15일 무진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상서사 판사 조준 정도전 등이 내관(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세우기를 청하다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이 내관(內官)의 호(號)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현의(賢儀) 2인에 하나는 정1품에 견주고, 하나는 종1품에 견주며, 숙의(淑儀) 2인에 하나는 정2품에 견주고, 하나는 종2품에 견주며, 찬덕(贊德) 3인에 하나는 정3품에 견주고, 둘은 종3품에 견주며, 순성(順成) 3인에 하나는 정4품에 견주고, 둘은 종4품에 견주며, 상궁(尙宮) 3인에 하나는 정5품에 견주고, 둘은 종5품에 견주며, 상관(尙官) 3인에 하나는 정6품에 견주고, 둘은 종6품에 견주며, 가령(家令) 4인에 둘은 정7품에 견주고, 둘은 종7품에 견주며, 사급(司給) 4인에 둘은 정8품에 견주고, 둘은 종8품에 견주며, 사식(司飾) 4인에 둘은 정9품에 견주고, 둘은 종9품에 견주게 하소서."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 26일 기묘 2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좌정승 조준과 정도전·남은 등에게 초립과 옥영자 등을 내려 주다

좌정승 조준(趙浚)에게 초립(草笠)과 옥영자(玉纓子)를 내려 주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에게 초립을 내려 주었다.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5월 6일 정사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투항했다가 병선 약탈해 간 상만호를 없애어 우호 다지자며 대마도에 보낸 글

전 사재 소감(司宰少監) 박인귀(朴仁貴)를 보내어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통서(通書)하게 하였다. 그 글에 이러하였다.

"조선국(朝鮮國)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 등은 일본국 대마도 수호(守護) 이대경(李大卿) 족하(足下)에게 서신을 부치노라. 본국은 귀방(貴邦)과 바다를 격하여 서로 바라보고 있어 본래 서로 좋은 이웃으로 통했는데, 경인년 이래로 귀치도(貴治島) 일기도(一岐島) 두 섬의 무뢰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도둑이 되어, 변경을 침략하게 되니 피해가 적지 않았다.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께서 즉위하시어 백성들이 무고(無辜)하게 피해 입는 것을 불쌍히 여기사 완흉(頑凶)을 섬멸하고 변방 백성을 구제하고자 뜻하였다. 이에 연해변(沿海邊)의 주군(州郡)에 명하여 전함을 수리하게 하고 날을 한정하여 행하려 하였는데, 연전에 도적의 괴수들이 영해부(寧海府) 축산도(丑山島)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주상께서 그 내부(來附)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기고 예전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시어, 울주(蔚州)에 처하게 하고 양식을 주어 완취(完聚)하게 하였더니, 뜻밖에 스스로 의심을 품어 우리의 수신(守臣)을 겁박하여 달아났고, 금년 봄에도 와서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주상께서 전 죄를 용서하시고 변장(邊將)에게 명하여 후한 예로 대접하게 하였다. 그 부만호(副萬戶) 삼만호(三萬戶)라고 칭하는 자는 현재 서울에 있는데, 집과 의식을 주어 예로 대접하고 있으나, 그 상만호(上萬戶)라는 자는 밀양에 이르러 후하게 잔치하여 호궤하였으되, 저들이 배로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호송하였는데, 또 갑자기 의심을 내어 군선(軍船)을 겁박 약탈하고 다시 도망하여 달아났다. 얼마 뒤에 변장이 족하의 글을 상문(上聞)하매, 주상께서 아름답게 여기어 지금 전 사재 소감(司宰少監) 박인귀를 보내어 통지하는 것이다. 저 상만호란 자는 이미 우리와의 약속을 배반하고 또 토주(土主)의 뜻에 위배되었으니, 이것은 우리에게만 죄악이 찬 것이 아니라, 곧 족하의 죄인이다. 마땅히 익히 이해를 헤아려 죄인을 쳐 없애고 화호(和好)를 통하면 다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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