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만인
남만(南蠻)은 직역하면 남쪽의 야만인이란 뜻이다. 중화사상에 따라 중국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던 이민족들을 부르던 이름. 사실 만(蠻)자는 원래 단순히 남쪽 이민족을 호칭하는 글자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남쪽 이민족에 대한 나쁜 인식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에 가깝다. 즉 기원을 따지면 폄하적 의미로 지은 호칭이 아니다.
*출처: 나무위키
2.박연
박연 (朴延, 朴燕 1595년 ~ ?) 또는 얀 얀스 벨테브레(네덜란드어: Jan Jansz Weltevree)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네덜란드인으로 인조 통치시 유럽인 최초로 귀화하였다. 1627년 제주도에 표착하였고 병자호란에도 참전하였다.[1][2] 한반도에 처음으로 유럽을 소개했다고 전해진다.
알크마르의 마을인 드레이프(네덜란드어판)에서 태어났다. 1626년(인조 4) 홀란디아(네덜란드어: Holandia) 호의 승무원으로 취업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향하였고, 1627년(인조 5년)에 사략선 아우에르케르크(네덜란드어: Ouwerkerck) 호의 Hoofdman(Captain or 과장을 의미)으로 부임하여, 중국 상선을 나포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있는 바타비아(네덜란드어판)로 항해하던 도중 풍랑을 만나 부하 두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부하 디럭 헤이스버르츠(네덜란드어: Direk Gijsbertz) 및 얀 피터르 페르바스트(네덜란드어: Jan Pieter Verbaest)와 함께 땔감과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한양에 호송되고 훈련도감에서 근무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이 남만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서야 그들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3] 훈련대장 구인후의 지휘를 받아 항복해 온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통솔 감시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조종법을 지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사람은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1648년(인조 26년) 8월 25일 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정시를 설행하여 문과에 이정기 등 9인을, 무과에 박연 등 94인을 뽑았다”라고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본조등과총목’에도 박연이 장원으로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박연은 벨테브레이로 여겨진다.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653년(효종 4년)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파견되어 하멜 등을 서울에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송되자 이를 감독하는 한편 한국의 풍속을 가르쳐 주고 통역했다고 한다.
그는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으며, 동양 각국의 풍물 및 선악(善惡), 화복(禍福)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출신을 고려할 때 개신교의 교리를 조선인들에게 설파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귀화인이 된 박씨다. 벨테브레는 네덜란드에 후손들이 있었다. 벨테브레의 아버지도 네덜란드 사람이다. 박연과 결혼한 여성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다. 단지 박연과 결혼할 위치의 집안에 대해서는 박연이 조선에 와서 살아온 행적을 보면 추측을 할 수 있을뿐이다. 박연의 집안과 박연의 부인의 가문에 대한 어떤 역사적 기록이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남겨져있지 않다. 그리고 박연과 결혼한 여자집안에 대한 추론도 결국 정확하지 못하다. 박연이 원산 박씨의 시조라고 하지만 그 계통이 후대로 연결되지 못하였는지 원산 박씨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다.
*출처: 위키백과
귀화한 남만인 우신에게 면포 등을 내리고 아내를 얻도록 하다
귀화한 남만인(南蠻人) 우신(禹信)에게 면포(緜布)·정포(正布) 각각 2필을 내려 주고, 아내를 얻도록 하였다.
제주도 표류인 김비의 등으로부터 유구국 풍속과 일본국 사정을 듣다
표류(漂流)했던 제주(濟州)사람 김비의(金非衣)·강무(姜茂)·이정(李正) 등 세 사람이 유구국(琉球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지나온 바 여러 섬의 풍속(風俗)을 말하는 것이 매우 기이(奇異)하므로, 임금이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그 말을 써서 아뢰라고 하였다. 그 말에 이르기를,
"우리들이 정유년372) 2월 1일에 현세수(玄世修)·김득산(金得山)·이청민(李淸敏)·양성돌(梁成突)·조귀봉(曹貴奉)과 더불어 진상(進上)할 감자(柑子)를 배수(陪受)하여 같이 한 배에 타고 바다로 출범(出帆)하여 추자도(楸子島)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크게 불어오는 동풍(東風)을 만나 서쪽으로 향하여 표류하였습니다. 처음 출발한 날로부터 제 6일에 이르러서는 바닷물이 맑고 푸르다가, 제 7일부터 제 8일까지 1주야(晝夜)를 가니 혼탁(渾濁)하기가 뜨물과 같았으며, 제 9일에 또 서풍(西風)을 만나서 남쪽을 향하여 표류해 가니 바닷물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제 14일 째에 한 작은 섬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미처 기슭에 대이지 못하여 키가 부러지고 배가 파손되어 남은 사람은 모두 다 물에 빠져 죽고, 여러가지 장비도 모두 물에 빠져 잃어버렸으며, 우리들 세 사람은 한 판자에 타고 앉아 있었습니다. 표탕(漂蕩)하는 사이에 마침 고기잡이배 두 척이 있어서 각각 네 사람이 타고 앉아 있다가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거두어 싣고 가서 섬 기슭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윤이시마(閏伊是麿)라고 【그곳 풍속에 섬을 일컬어 시마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인가(人家)가 섬을 둘러 살고 있고, 둘레는 이틀 길이 될 듯하며, 섬사람은 남녀 1백여 명으로 풀을 베어 바닷가에 여막을 만들어서 우리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제주(濟州)를 출발한 때로부터 큰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 파도가 이마[顙] 위를 지나고, 물이 배 가운데 꽉 차서 뱃전이 잠기지 않은 것은 두어 판자뿐이었습니다. 김비의와 이정이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퍼내고, 강무는 노(櫓)를 잡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다 배멀미를 하여 누워 있어서 밥을 지을 수가 없어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넣지 못한지가 무릇 열나흘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섬사람이 쌀죽[稻米粥]과 마늘을 가지고 와서 먹였습니다. 그날 저녁부터는 처음으로 쌀밥 및 탁주(濁酒)와 마른 바다물고기를 먹었는데, 물고기 이름은 다 알지 못했습니다. 7일을 머문 뒤에 인가(人家)에 옮겨 두고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을 하는데, 한 마을에서 대접이 끝나면 문득 다음 동네로 체송(遞送)하였습니다. 한 달 뒤에는 우리들을 세 마을에 나누어 두고 역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하는데, 무릇 술과 밥은 하루에 세끼였으며, 온 섬사람의 용모(容貌)는 우리 나라와 동일(同一)했습니다.
1. 그 나라 풍속은 귀를 뚫어 푸르고 작은 구슬로써 꿰어 2, 3촌쯤 드리우고, 또 구슬을 꿰어 목에 3, 4겹을 둘러서 1자[尺]쯤 드리웠으며, 남녀(男女)가 같이 하는데 늙은 자는 안했습니다.
1. 남자·여자 모두 다 맨발로 신이 없었습니다.
1. 남자는 머리를 꼬아 곱쳐서 포개어 삼베 끈으로 묶어서 목 가에 상투를 틀었는데 망건(網巾)을 쓰지 않았습니다. 수염은 길어서 배꼽을 지나갈 정도인데, 혹은 꼬아서 상투를 두어 겹을 둘렀습니다. 부인(婦人)의 머리도 길어서 서면 발뒤꿈치까지 미치고 짧은 것은 무릎에 이르는데, 쪽을 찌지 않고 머리 위에 둘렀으며, 옆으로 나무빗을 귀밑머리에 꽂았습니다.
1. 가마·솥·숟가락·젓가락·소반·밥그릇·자기(磁器)·와기(瓦器)는 없고, 흙을 뭉쳐서 솥을 만들어 햇빛에 쪼여 말려서 짚불로써 태워 밥을 짓는데, 5,6일이면 문득 파열(破裂)해 버립니다.
1. 쌀[稻米]을 전용(專用)하고, 비록 조(粟)가 있더라도 심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밥은 대나무 상자에 담아서 손으로 뭉쳐 덩어리를 만들되 주먹 크기와 같이 하고, 밥상은 없고 작은 나무 궤(几)를 사용하여 각각 사람 앞에 놓습니다. 매양 밥을 먹을 때에는 한 부인이 상자를 맡아서 이를 나누어 주며 사람마다 한 덩어리씩인데, 먼저 나뭇잎을 손바닥 가운데 놓고 밥덩이를 그 나뭇잎 위에 얹어 놓고 먹으며, 그 나뭇잎은 연꽃잎과 같았습니다. 한 덩어리를 다 먹으면 또 한 덩어리를 나누어 주어 세 덩어리로 한도를 삼으나, 먹을 수 있는 자에게 덩어리 수를 계산하지 않고 다 먹는 데에 따라 주었습니다.
1. 염장(鹽醬)은 없고, 바닷물에 채소를 넣어서 국을 만들며, 그릇은 바가지[瓠子]를 사용하거나 혹은 나무를 파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 술은 탁주(濁酒)는 있으나 청주(淸酒)는 없는데, 쌀을 물에 불려서 여자로 하여금 씹게 하여 죽같이 만들어 나무통에서 빚으며, 누룩을 사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많이 마신 연후에야 조금 취하고, 술잔을 바가지를 사용하며, 무릇 마실 때에는 사람이 한 개의 바가지를 가지고 마시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는데, 양(量)에 따라 마시며 수작(酬酢)의 예가 없고, 마실 수 있는 자에게는 더 첨가합니다. 그 술은 매우 담담하며, 빚은 뒤 3, 4일이면 익고 오래되면 쉬어서 쓰지 못하며, 나물 한가지로 안주를 하는데, 혹 마른 물고기를 쓰기도 하고, 혹은 신선한 물고기를 잘게 끊어서 회(膾)를 만들고 마늘과 나물을 더하기도 합니다.
1. 혹 쌀을 불려 보구(步臼)373) 에 찧어서 이를 뭉쳐 떡을 만들되 종려나무 잎의 크기와 같이 하고, 종려나무 잎으로 싸고 짚으로 묶어서 삶아 먹습니다.
1. 그 거처는 모두 1실(室)을 만들고, 내실(內室)이 따로 없고 창[戶牖]이 없으며, 전면(前面)은 조금 높이 들려 있고, 후면(後面)은 처마가 땅에 드리워져 있으며, 대개 띠[茅]를 사용하고 기와가 없으며, 밖에는 울타리가 없고 잠자리는 목상(木床)을 사용하며, 이불과 요가 없고 포석(蒲席)을 깔아서 사용하며, 사는 집 앞에 따로 누고(樓庫)를 만들어 거둔 바의 벼를 쌓아 두었습니다.
1. 관대(冠帶)가 없고 더우면 혹 종려나무 잎을 사용하여 삿갓 모양의 것을 만들었는데, 우리 나라의 승립(僧笠)과 같았습니다.
1. 삼[麻]·목면(木綿)이 없고,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모시[苧]를 짜서 베를 만들고, 옷을 만들되 직령(直領)과 같았으며 옷깃과 주름은 없고 소매는 짧고 넓으며, 염색(染色)은 남청(藍靑)을 쓰고, 속옷은 백포(白布) 세 폭을 써서 볼기[臀]에 매 었으며, 부인의 옷도 같았으나, 다만 속치마를 입고 속옷이 없으며 치마도 푸른 빛을 물들였습니다.
1. 집에는 쥐·소·닭·고양이가 있으나, 소와 닭의 고기를 먹지 않고 죽으면 곧 묻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르기를, ‘소·닭의 고기는 먹을 만한데 묻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더니, 섬사람들은 침을 뱉으면서 비웃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材木)이 많고, 잡수(雜獸)가 없었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오직 비둘기와 황작(黃雀)뿐이었습니다.
1. 곤충(昆蟲)으로는 거북·뱀·두꺼비·개구리·모기·파리·박쥐·벌·나비·사마귀[螳蜋]·잠자리·지네[蜈蚣]·지렁이·개똥벌레[螢]·게가 있었습니다.
1. 철야(鐵冶)는 있으면서도 쟁기[耒耜]를 만들지 않고 작은 삽을 사용하여 밭을 파헤치고 풀을 제거하여 조[粟]를 심습니다. 수전(水田)은 12월 사이에 소를 사용하여 밟아서 파종(播種)을 하고, 정월 사이에 이앙(移秧)을 하되 풀을 베지 않으며, 2월에 벼가 바야흐로 무성하여 높이가 한 자쯤 되고, 4월에 무르익는데, 올벼[早稻]는 4월에 수확을 마치고 늦벼[晩稻]는 5월에 바야흐로 추수를 마칩니다. 벤 뒤에는 뿌리에서 다시 자라나 처음보다 더 무성하며, 7, 8월에 수확합니다. 수확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근신(謹愼)하여, 비록 말을 하더라도 소리를 크게 하지 아니하고, 입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지 아니하며, 혹 풀잎을 말아서 불면 막대기로 이를 금하다가, 수확을 한 뒤에야 작은 피리[管]를 부는데, 소리가 매우 가늘었습니다. 한번 수확한 벼는 이삭을 연달아 묶어서 누고(樓庫)에 두고, 대나무 막대기로 이를 털어서 디딜방아로 찧습니다.
1. 풀과 벼를 베는 데에는 낫[鎌]을 쓰고, 쪼개거나 찍는 데에는 도끼와 무자(䥈子)를 사용하며, 또 작은 칼이 있고, 궁시(弓矢)와 부극(斧戟)374) 은 없으며, 사람들은 작은 창(鎗)을 가지고 기거(起居)하며 놓지를 아니하였습니다.
1. 사람이 죽으면 관(棺) 속에 앉혀서 언덕의 석굴[厂] 밑에 두고 흙으로 묻지 않았으며, 만약 언덕의 석굴이 넓으면 대여섯 개의 관을 함께 두었습니다.
1. 그 지역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서리와 눈이 없고 초목(草木)이 마르지 아니하며 또 얼음이 없습니다. 섬사람들은 홑옷 두 벌을 입고 여름에는 다만 하나를 입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채소로는 마늘·가지·참외·토란[母鴟]·생강이 있는데, 가지의 줄기 높이가 3, 4척이나 되고 한 번 심으면 자손(子孫)에게까지 전하는데 결실(結實)은 처음과 같고, 너무 늙으면 가운데를 찍어 버리나 또 움이 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1. 나무는 오매(烏梅)·뽕나무·대나무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청귤(靑橘)·작은 밤[栗]이 있는데, 귤은 사시(四時)로 꽃이 피었습니다.
1. 등촉(燈燭)이 없고, 밤이면 대[竹]를 묶어서 횃불을 만들어 비추었습니다.
1. 집에는 뒷간[溷廁]이 없고 들에다 그냥 눕니다.
1. 베를 짤 때에는 성서(筬抒)375) 를 사용하는데 모양은 우리 나라와 같았고, 그 밖에 다른 기계는 같지 않았으며, 승수(升數)376) 와 추세(麤細)377) 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1. 땅을 파서 작은 우물을 만들고 물을 길을 때에는 바가지와 병을 썼습니다.
1. 배는 키와 돛대만 있고 노(櫓)는 없는데 순풍(順風)에만 돛을 달 뿐이었습니다.
1. 그 풍속에 도적이 없어서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지 아니하고, 서로 꾸짖거나 큰 소리로 싸우지 아니하며, 어린아이를 어루만져 사랑하여 비록 울더라도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1. 풍속에 추장(酋長)이 없고, 문자(文字)를 알지 못했으며, 우리들은 저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땅에 있으니, 조금은 그 말하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항상 울었는데, 그 섬 사람이 새 벼의 줄기를 뽑아서 옛날 벼와 비교해 보이고는 동쪽을 향하여 불었는데, 그 뜻은 대개 새 벼가 옛 벼와 같이 익으면 마땅히 출발하여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었습니다.
무릇 6삭(朔)을 머물고, 7월 그믐에 이르러 남풍(南風)이 불어 오는 것을 기다려서 섬사람 13명이 우리들과 같이 양식과 탁주(濁酒)를 준비해 가지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서 1주야(晝夜) 반을 가니,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소내시마(所乃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자(護送者)들은 8,9일 동안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내시마는 좁으면서 길었는데, 둘레는 4, 5일정(日程)이 될 만하였고, 그 언어(言語)·음식(飮食)·의복(衣服)·거실(居室)·풍토(風土)는 대개 윤이시마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부인은 코를 양쪽으로 뚫어 조그마한 검은 나무를 꿰었는데, 모양이 검은 사마귀와 같았고, 정강이에는 조그마한 푸른 구슬을 둘러 매었는데, 그 넓이가 수촌(數寸)쯤이었습니다.
1. 벼와 조를 쓰는데 조는 벼의 3분의 1쯤 되었습니다.
1. 수확한 나락은 가까이 있는 빈터에 쌓아 두었는데 높이가 모두 두 길쯤이었고, 같은 마을 사람은 한곳에 모여서 사는데 많은 것은 4, 50여 소(所)에 이르렀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개를 기르는데, 소는 도살하여 이를 먹고 닭고기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1. 산에는 산돼지가 있는데 섬사람이 창을 가지고 개를 끌고 가서 사냥해 잡아다가 그 털을 태우고, 베어서 삶아 먹으나, 사냥한 자만 먹고 비록 지극히 친한 자일지라도 주지 않으니, 만일 남에게 주면 잡기가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1. 과실로 유자(柚子)·작은 밤·도토리[橡栗]가 있었습니다.
1. 채소로는 토란·치과(冬瓜)·생강·마늘·가지·호박이 있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材木)이 많아서 혹은 실어내어 다른 섬에 무역(貿易)하기도 하고, 또 동백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두어 길[丈]이며 꽃이 피었습니다.
1. 마[薯蕷]가 있는데 그 길이가 한 자[尺] 남짓하고 사람의 몸 크기와 같으며, 두 여자가 함께 하나를 이고 도끼로 끊어서 삶아 먹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까마귀·비둘기·바다가마우지[鸕鷀]·갈매기·해오리·황작(黃雀)이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두꺼비·개구리·뱀·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는 달팽이를 삶아서 먹었으며, 큰 뱀의 길이는 5, 6척이나 되고 크기는 서까래와 같았으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구렁이를 보고서 아이의 발을 구렁이 등에 올려 놓고 구렁이의 꼬리를 어루만졌는데 커서 흔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윤이도(閏伊島)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무릇 5삭(朔)을 머물다가, 12월 그믐에 이르러서 남풍(南風)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과 같이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갔더니, 한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었는데 모두 다 모래와 돌로 된 땅이었고, 둘레는 소내도(所乃島)에 비교하여 조금 작았습니다. 그 언어와 의복·거실·풍토는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논과 벼는 없어서, 소내도에서 무역(貿易)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1. 밀·보리를 심고, 가을이 되면 우분(牛糞)을 사용하되 손으로 움켜서 밭에 넣고, 삽을 사용하여 흙을 일으켜서 덮으며, 2, 3월에 바야흐로 익습니다. 추수를 마치고 난 뒤에 밭을 일구어 심는데 아홉 종류의 곡식을 심고, 또 10월 사이에 파종(播種)하여 2, 3월에 수확해서 마치고, 다시 심어서 7, 8월에 또 수확하였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를 잡아 먹으나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가지·토란·마늘·박[瓠]이 있었습니다.
1. 남녀가 귀를 뚫어 조그마한 푸른 구슬을 꿰었고 또한 구슬을 꿰어서 목에 걸었습니다.
1. 재목은 없고 집을 지을 때에는 모두 다 소내도에서 가지고 와서 짓는다고 하였으며, 또 과일 나무도 없었습니다.
1. 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 달팽이를 삶아서 먹는다고 하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포라이시마(捕剌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2일정이 될 만 하였습니다. 인가(人家)는 겨우 40호 남짓하고, 언어·의복·음식·거실·토풍(土風)이 대개 윤이도와 같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그 풍속은 푸른 구슬로써 팔 및 정강이를 둘러감아 매었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었으며, 쌀은 소내도에서 무역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를 잡아 먹는데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가지·토란·마늘·박이 있었습니다.
1. 재목이 없고, 과일나무도 없었습니다.
1. 곤충은 모기·파리가 있고, 거북이·뱀·두꺼비·개구리는 없었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에 올라서 하루 낮 동안을 가니, 한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섬의 이름은 훌윤시마(欻尹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였으며, 그 언어·음식·의복은 또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는데 쌀은 소내도에서 무역한다고 합니다.
1. 날짐승은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어도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이 있었습니다.
1. 과일나무와 재목이 없었습니다.
1. 곤충은 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 달팽이를 삶아 먹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8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배를 타고 1주야(晝夜)반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타라마시마(他羅馬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며, 사람은 50여 호가 살고 있었고,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이 대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었습니다.
1. 재목이 없어서 혹은 소내도에서 가져오고 혹은 이라부도(伊羅夫島)에서 취해온다고 하며, 또 과일 나무도 없었습니다.
1. 그 풍속에 저포(苧布)를 사용하여 남색을 물들여 두드려서 옷을 만들었는데, 그 빛깔은 채단(彩段)과 같았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과 가축(家畜)은 앞의 섬들과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이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이라부시마(伊羅夫是麿)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둘레는 2일정이 될 만하고,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그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고,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부인은 수정(水精)으로 된 큰 구슬을 목에 걸었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또한 벼도 있었는데 벼는 보리의 10분의 1이었습니다.
1. 작은 산골짜기가 있어서 종려나무·뽕나무·대나무가 있고, 또한 재목도 있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는데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술을 빚는 데에는 쌀 누룩[米麴]을 사용하였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갈매기·해오라기·황작·비둘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달팽이가 있는데, 달팽이를 삶아 먹고 뱀은 없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생강이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멱고시마(覓高是麿)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고, 둘레는 5, 6일정이었으며,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고,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술을 빚는 것은 이라부도와 같았으며, 벼·기장·조·밀·보리가 있었습니다.
1. 밥을 짓는 데에는 쇠 솥[鐵鼎]을 사용하는데, 발은 없고 가마와 비슷하였으며, 이는 곧 유구국(琉球國)에서 무역한 것이었습니다.
1. 부인은 구슬을 목에 걸었는데 또한 이라부도와 같았습니다.
1. 집에는 뒷간이 있었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개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어도 닭고기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1. 날짐승은 새·비둘기·황작·갈매기·해오라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은 거북이·뱀·두꺼비·개구리·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달팽이를 삶아 먹었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수박·가지·토란이 있었습니다.
1. 종려나무·뽕나무·대나무가 있고, 산에는 잡목이 많았으나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1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 2주야 반을 가서 유구국(琉球國)에 이르게 되었는데, 바닷물의 기세가 용솟음치고, 파도(波濤)가 험악(險惡)하여, 섬사람도 모두 배멀미를 했습니다.
유구국(琉球國)의 국왕(國王)이 호송인을 포상(褒賞)하여 각각 청홍 면포(靑紅綿布)를 하사(下賜)하고, 술과 밥을 후하게 먹이어 종일토록 취해 있었으며, 그 사람들은 하사받은 바 면포로써 옷을 만들어 입고 한 달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나라 사람과 통사(通事)가 와서 우리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므로, 우리들이 대답하기를, ‘조선 사람이다.’라고 하니, 또 묻기를, ‘너희들은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되어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하므로, 우리들은 같이 의논하여 대답하기를, ‘다 함께 조선국 바다 남쪽 사람인데, 진상(進上)할 쌀을 싣고 경도(京都)로 향해 가다가 바람을 만나서 여기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습니다. 통사는 우리들이 한 말을 써가지고 국왕에게 아뢰었는데, 조금 있다가 두어 관인(官人)을 보내어 와서 우리들을 맞아 한 객관(客館)에 있게 하였습니다. 이 집은 바다와의 거리는 5리(里)가 되지 못했는데, 판자로써 집을 덮었고, 문호(門戶)와 창벽(窓壁)이 있었으며, 돌 담장이 있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요, 담장에 문이 있어 밤에는 자물쇠를 걸었습니다. 또 관사(官舍)가 곁에 있었는데, 수령(守令) 두 사람과 감고(監考) 두 사람이 있었고, 따로 하나의 창고를 두어 재물(財物)·전포(錢布)·어염(魚鹽)을 저장해 두었습니다. 무릇 출납(出納)하는 데에는 수령이 이를 감독하였는데, 통사가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나라에 군읍(郡邑)의 관청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을 대접하는 데에는 매일 세 끼이고, 술도 있었습니다.
1. 한 집에서 5일의 양미(糧米)와 탁주(濁酒)와 생선젓을 관청에서 받아 대접하기를 마치면, 다음 집에서 또 받아서 윤차(輪次)로 대접하였습니다. 대개 5, 6일마다 수령이 한 번 우리들을 찾아와 술과 안주를 대접했고, 또 관인(館人)으로 하여금 상시(常時)로 풍후(豐厚)하게 대접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마침 국왕의 어머니가 출유(出遊)하는 것을 보았는데, 칠련(漆輦)을 타고 사면(四面)에 발을 드리웠으며, 멘 자가 거의 20인으로 모두가 흰 저의(苧衣)를 입고 비단으로 머리를 쌌습니다. 군사는 긴 칼을 가지고 활과 화살을 찼는데, 앞뒤를 옹위(擁衛)한 자가 거의 1백여 인이었고, 쌍각(雙角)·쌍태평소(雙太平嘯)를 불었으며, 화포(火砲)를 쏘았습니다. 아름다운 부인 4, 5인이 채단(綵段) 옷을 입고, 겉에는 백저포(白苧布)의 긴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들이 길 곁에 나가서 배알(拜謁)하니, 연을 멈추고 두 개의 납병(鑞甁)에다 술을 담아서 검은 칠을 한 목기(木器)로써 우리들에게 주었는데, 그 맛이 우리 나라의 것과 같았습니다. 어떤 소랑(小郞)이 조금 뒤에 따로 갔는데, 나이는 10여 세가 될 만하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왔으며, 머리를 뒤로 드리우고 땋지 않았으며, 붉은 비단옷을 입고 띠를 묶었으며, 살찐 말을 탔습니다. 말굴레를 잡은 자는 모두 다 흰옷을 입었고,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4, 5인이며, 좌우(左右)에서 부옹(扶擁)하는 자도 매우 많았습니다. 위사(衛士)로서 긴 칼을 가진 자가 20여 인이요, 일산(日傘)을 가진 자는 말을 나란히 타고 가면서 햇빛을 막았습니다. 우리들이 또한 배알하여 뵈이니 소랑이 말에서 내리어 납병에다 술을 담아서 대접하는데, 마시기를 마치자 소랑은 말에 올라서 갔습니다. 국인(國人)이 이르기를, ‘국왕(國王)이 훙(薨)하고, 사군(嗣君)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모후(母后)가 임조(臨朝)하게 되었는데, 소랑이 나이가 들면 마땅히 국왕이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1. 7월 15일에는 모든 사찰(寺刹)에서 당개(幢蓋)378) 를 만드는데, 혹은 채단(彩段)을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채증(彩繒)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인형(人形) 및 조수(鳥獸)의 형상을 만들어 왕궁(王宮)에 보냈습니다. 거민(居民)은 남자 가운데 소장(少壯)한 자를 뽑아서 혹은 황금 가면(假面)을 쓰고 피리[笛]를 불고 북을 치면서 왕궁으로 나아가는데, 피리는 우리 나라의 작은 피리[管]와 같고, 북 모양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크게 잡희(雜戲)를 벌이고 국왕이 임석하여 관람하였으므로, 남녀로 가서 보려는 자가 길을 메우고 거리에 넘쳤으며, 재물을 말에 싣고 왕궁으로 나아가는 자도 많았습니다.
1. 해안(海岸)에서 왕궁과의 거리는 10여 리였는데, 우리들이 멀리 바라보자 한 전각이 매우 높으므로 물어보았더니, 곧 국왕의 거처라고 하였으며, 인가(人家)는 간혹 개와(蓋瓦)였으나 판옥(板屋)도 매우 많았습니다.
1. 남녀가 상투를 이마의 가장자리에 틀어 올렸는데, 비단으로 싸고, 서인(庶人)은 모두 다 백저(白苧) 옷을 입었습니다. 부인은 머리 뒤에 머리카락을 쪽지어 올렸고, 모두 다 백저포(白苧布)의 적삼과 백저포의 치마를 입었고, 혹은 백저포의 장옷을 입었으며, 그 귀한 자는 또한 채단을 입었고 유오아(襦襖兒)·유상(襦裳)도 있었습니다. 그 수령은 아롱지게 물들인 비단을 사용하여 상투를 싸고 백세저포(白細苧布)를 입었으며, 의대(衣帶)는 붉은 물을 들인 비단이고, 나갈 때에는 말을 타며 종자(從者)가 수인(數人)이었습니다.
1. 논과 밭은 서로 반반이었는데, 밭이 조금 많고 논은 겨울에 파종을 해서 5월에는 벼가 다 익어 수확을 마치며, 또 소[牛]로서 이를 밟아 다시 파종을 해서 7월에 이앙(移秧)하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또 수확을 하였습니다. 밭은 작은 삽으로 이를 일구어서 조를 심는데, 또한 겨울에 처음으로 파종하고 5월에 수확하고, 6월에 다시 파종하면 8월에 처음으로 이삭을 드리우고 익어갑니다.
1. 밥은 쌀을 사용하고 또 염장(鹽醬)을 사용하여 국을 만들며, 채소를 섞는데 혹은 고기를 쓰기도 합니다.
1. 술은 청주와 탁주가 있는데, 납병에다 담고 은술잔[銀鍾]으로써 잔질하며 맛은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또 남만국(南蠻國)외 술이 있었는데 빛은 누렇고 맛은 소주(燒酒)와 같으며, 매우 독하여 두어 종지를 마시면 크게 취하게 됩니다.
1. 사찰은 판자로써 덮개를 하고, 안에는 옻칠을 했으며, 불상(佛像)이 있는데, 모두 다 황금(黃金)이었고, 거승(居僧)은 머리를 깎았으며, 치의(緇衣)379) 도 입고 백의(白衣)도 입었으며 그 가사(袈裟)는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1. 밥은 옻칠한 목기에 담고, 국은 작은 자기(磁器)에 담으며, 또 자접(磁楪)380) 이 있고, 젓가락은 있으나 숟가락은 없는데 젓가락은 나무였습니다.
1. 국중(國中)에 시장이 있는데, 채단(綵段)·증백(繒帛)·저포(苧布)·생저(生苧)·빗[梳]·전도(剪刀)·바늘·채소·어육(魚肉)·소금·젓갈이 있었고, 남만국(南蠻國)의 아롱진 비단·아롱진 면포(綿布)·단향(檀香)·흰 날에 검은 씨의 면포[白經黑緯綿布]·등당(藤唐)의 푸르고 검고 흰 면포·자기(磁器) 등의 물건이 있었습니다.
1. 중국 사람이 장사[商販]로 왔다가 계속해서 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집은 모두 다 기와로 덮었고 규모도 크고 화려하며 안에는 단확(丹艧)381) 을 칠하였고 당중(堂中)에는 모두 다 의자[交倚]를 설치하였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감투(甘套)를 쓰고 옷은 유구국과 같았으며, 우리들에게 갓이 없는 것을 보고서는 감투를 주었습니다.
1. 나라 사람은 모두 맨발이고 신발을 착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통사는 반드시 일본인(日本人)으로서 그 나라에 있는 자로 하여금 하게 하였습니다.
1. 강남인(江南人) 및 남만국(南蠻國) 사람도 모두 와서 장사를 하여 왕래(往來)가 끊이지 아니하는데, 우리들도 다 보았습니다. 남만인은 상투를 틀어올렸는데, 그 빛이 매우 검어서 보통 사람보다 특이하였고, 그 의복은 유구국과 같았으나 다만 비단으로 머리를 싸지 아니하였습니다.
1. 활·화살·도끼·갈고리[鉅]·도검(刀劍)·무자(䥈子)·낫·삽·갑옷과 투구[甲胄]가 있었는데, 갑옷은 혹 철(鐵)을 쓰기도 하고 가죽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1. 군사(軍士)는 철로써 정강이를 싸고, 혹은 가죽에 옻칠을 입힌 것을 사용했는데, 행전(行纏)과 같았습니다.
1. 그 지대는 따스하기가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소나무·종려나무·대나무가 있고, 그 나머지는 잡목(雜木)인데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말·소·염소·고양이·돼지·개·닭·집비둘기·거위·오리를 기르며, 말과 소를 잡아 먹기도 하고 혹은 저자에 팔기도 하며, 또한 닭을 먹었습니다. 날짐승으로는 까마귀·까치·황작(黃雀)·매·제비·갈매기·바다 가마우지·올빼미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매화·복숭아·유자·청귤(靑橘)이 있었습니다.
1. 채소로는 토란·가지·참외·동과(冬瓜)·무우·파·마늘·아욱·박·파초(芭蕉)가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두꺼비·개구리·거북·뱀·달팽이·벌·나비·사마귀·잠자리·등에[蝱]·연가시새끼[蜱]·지네·거미·매미·빈대[臭蟲]·지렁이·개똥벌레가 있었고, 또한 메뚜기와 비슷하며 큰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잘 먹었으므로 혹 저자에 팔기도 하였고, 또 박쥐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무릇 석 달을 머물다가 통사에게 말하여 본국(本國)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통사가 국왕에게 전달하자, 국왕이 대답하기를, ‘일본 사람은 성질이 나빠서 〈너희들이〉 보전할 수가 없으므로, 너희들을 강남(江南)으로 보내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보다 앞서 통사에게 물어서 일본은 가깝고 강남은 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본국(日本國)으로 갈 것을 청하였습니다. 마침 일본의 패가대(覇家臺) 사람 신이사랑(新伊四郞) 등이 장사하러 와서 국왕에게 청하기를, ‘우리 나라는 조선(朝鮮)과 통호(通好)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보호하여 돌려보내기를 바랍니다.’ 하니, 국왕이 이를 허락하고, 또 이르기를, ‘도중에 잘 무휼(撫恤)하여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어 우리들에게 돈 1만 5천 문(文), 호초(胡椒) 1백 50근, 청염포(靑染布)·당면포(唐緜布) 각 3필을 주고, 또 석달의 양미(糧米) 5백 근, 염장(鹽醬)·어해(魚醢)382) ·왕골 자리[莞席]·칠목기(漆木器)·밥상[食案] 등의 물건을 주었습니다.
8월 1일에 신이사랑 등 1백여 인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큰 배를 같이 타고서 4주야(晝夜)를 가다가 일본의 살마주(薩摩州)에 이르렀으나, 기슭을 오르는 데에 파도가 매우 사나워서 겨우 바다를 건넜는데, 형세가 제주(濟州)와 같았습니다. 김비의(金非衣)가 포라이도(捕剌伊島)에서부터 두통이 생겨서 낫지 않고 유구국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했는데, 국왕이 이를 알고 남만국의 약주(藥酒)를 주었습니다. 신이사랑 등도 이를 보고 또 쑥으로 뜸을 뜨는 등 곡진히 치료해 주었으며, 배 가운데에 있어서는 대변이나 소변 때에도 사랑이 매양 그 종자(從者)로 하여금 붙들어 주게 하였는데, 이는 뱃머리에서 추락할까 걱정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살마주에 도착하여서는 병이 즉시 나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옛 주인집에 의탁하여 머물러 살게 하고, 술과 밥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사랑 등은 류구국(琉球國)에서 준 양식과 반찬으로 우리에게 하루 세 끼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주(州)의 태수는 두 번 우리들과 신이사랑 그 집에 초대하여 술과 밥, 떡과 안주를 대접하였는데, 모두 마다 물고기였습니다. 그 집은 판옥(板屋)으로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항상 집에 있으면서 공사(公事)를 보았고, 재산은 넉넉하고 많으며 준마(駿馬) 수필이 있었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긴 칼을 메고 있는 자 20여 인이 항상 문 아래에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9월에 이르러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서 신이사랑 등이 별선(別船)을 사가지고 우리들을 데리고서 같이 타고 연안(沿岸)으로 해서 무릇 3주야 만에 타가서포(打家西浦)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말을 타고서 우리를 데리고 육로(陸路)로 왔습니다. 김비의가 병들었다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기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말을 구하여 타게 하고 남은 두 사람은 도보(徒步)로 2일을 갔는데, 산골짜기가 매우 험했습니다. 패가대(覇家臺)에 이르니, 부관인(副官人) 좌미시(左未時) 등이 비용[盤纏]을 마련해서 해로(海路)를 경유하여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인가(人家)가 조밀(稠密)한 것이 우리 나라의 도성(都城)과 같았고, 그 가운데 저자가 있는 것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그 집에 머물게 하였는데, 대접하는 술·밥·안주·반찬이 매우 풍부하였으며, 상관(上官)·부관(副官) 두 사람이 차례로 하루 세 끼씩 대접해 주었습니다. 대내전(大內殿)에서 보낸 바 주장(主將)이 우리들과 신이사랑을 맞아서 술과 안주를 대접하였는데, 사는 바의 기와집은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뜰 아래에 시립(侍立)해 있는 자 30여 인은 모두 다 칼을 찼고, 문밖의 군사도 집을 지키는 자가 그 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주장을 보고난 뒤 그는 소이전(小二殿)을 공격하기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나갔는데, 창·칼, 작은 깃발을 가진 자가 3, 4만명이었습니다. 무릇 4일 만에 싸움에 이기고 돌아왔는데 6급(級)을 베어서 장대 끝에 효수(梟首)하고, 혹 어떤 사람은 그 이빨을 살펴서 그 사람의 귀천(貴賤)을 징험하였는데, 이는 대개 관작(官爵)이 있는 자는 이빨을 물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병란(兵亂)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도망하여 숨었던 자가 몰래 해도(海島)에 있다가 나와서 노략질을 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달을 머물다가 병란이 평정(平定)되기를 기다려, 금년 2월에 이르러 우리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 15리쯤 가서 작은 섬에 이르니, 이름을 식가(軾駕)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머물면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초저녁 어두울 무렵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기슭에 오르니, 인가가 매우 많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 주인집에 투숙시키고 가지고 온 양식과 반찬으로 우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사흘을 머물고 또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 대마도(對馬島)의 초나포(草那浦)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그 옛 주인집에 투숙시켰는데, 그 주인은 곧 신이사랑의 숙부(叔父)였으며, 가지고 온 양식과 반찬으로 대접해 주었고, 주인도 술을 대접하였습니다. 그 땅은 메마르고 밭이 없으며 백성은 모두 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 지나온 바의 여러 섬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도주(島主)가 떠나기 어렵다고 만류하기도 하였고 바람도 순조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 달을 머물러 있다가 4월 어느 날에 동풍을 만나 연안을 따라 가서 사포(沙浦)에 이르러 투숙(投宿)하였습니다. 여기서 이틀을 머물고 바람이 순조로우므로 또 기슭을 따라 가서 도이사지포(都伊沙只浦)에 정박하였으며, 사흘을 머물다가 동풍을 만나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야 염포(鹽浦)에 이르러 머물었습니다. 울산 군수(蔚山郡守)는 우리들이 감투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각각 갓[笠子]과 베 1필씩을 주었으므로, 우리들은 옷을 만들어 입고 올라왔습니다. 이상 윤이도(閏伊島) 이하 여러 물산(物産)을 우리들이 본 것은 이 정도 입니다."
하였다.
동래 부사 정양필이 일본에서 있었던 기독교인의 처치에 대하여 치계하다
동래 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치계하였다.
"가강(家康)이 일본의 관백이었을 때, 길리시단(吉利施端)019) 이라고 하는 남만인(南蠻人)들이 일본에 와 살면서 단지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만 일삼고 인사(人事)는 폐하였으며,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기뻐하며 혹세 무민하였는데, 가강이 잡아다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이 때에 이르러 도원(島原) 지방의 조그만 동네에 두서너 사람이 다시 그 술수를 전파하느라 마을을 출입하면서 촌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더니, 드디어 난을 일으켜 비후수(肥後守)를 죽였습니다. 이에 강호(江戶)의 집정(執政) 등이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제주 목사 이원진이 난파당한 서양인에 대하여 치계하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097) 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난파당한 서양인이 "하멜" 이를 남만인으로 확인한 자가 "박연"
옥당의 관원이 청대하여 표류 중국인의 처리 등을 논의하다
옥당의 관원인 이유상(李有相)·남이성(南二星)·이단하(李端夏)·박세당(朴世堂) 등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이유상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들이 표류해 온 중국인들의 일에 대해 듣고는 경악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과연 중국인이라면 의리상 차마 잡아보낼 수 없는 것이며, 만약 중국인이 아니라면 비록 잡아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청나라의 힐책이 있겠습니까. 우선 그들로 하여금 섬에 머물러 있게 하고서 청나라의 조사가 있을 경우 ‘중국인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여 지금까지 머물려 두고 있다.’고 한다면, 이 역시 변에 대처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고, 박세당이 아뢰기를,
"청나라 사람들도 역시 사람이니 이치로써 말하면 어찌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예전에 우리 나라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겼으므로 그 사람들을 차마 잡아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면 저들이 비록 조사한다 하더라도 어찌 거병(擧兵)까지야 하겠습니까."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박세당 등의 말은 몹시 사정에 어둡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뒷날 나랏일을 맡게 될 경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섬에 머물려 두었다가 남만인(南蠻人)들처럼 도망이라도 가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잡아보내자고 하고 잡아보내지 말자고 하는 것은 모두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모두가 나라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오직 내가 참작하여 정하기에 달렸다."
하였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엊그제 경연 석상에서 중신이 ‘경연을 열고 소대하기를 청하는 것이 모두 형식적인 말이다.’고 하였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는 사이에 점차 이렇게 된 것으로 경연을 열고 소대하기를 청하는 것이 형식적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하자, 남이성이 아뢰기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하고, 이단하가 아뢰기를,
"경연 석상의 대화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나. 민유중 등의 상소로 보면 권세를 잡고 지휘하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두 신하는 과연 조정 신하들의 추중을 받고 있으며, 공론을 부지하고자 하여 비방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러 권세를 잡았다고 한다면 참으로 원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김좌명의 서로 협동하라는 말도 역시 좋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동래 부사 안진이, 표류해온 아란타의 문제로 왜에서 온 서신에 대해 문의하다
동래 부사 안진(安縝)이 치계하여 아뢰기를,
"차왜(差倭) 귤성진(橘成陳) 등이 역관들에게 말하기를 ‘10여 년 전에 아란타(阿蘭陀) 군민(郡民)이 물화를 싣고 표류하여 탐라에 닿았는데, 탐라인이 그 물건을 전부 빼앗고 그 사람들을 전라도 내에 흩어 놓았다. 그 가운데 8명이 금년 여름에 배를 타고 몰래 도망와서 강호(江戶)에 정박했다. 그래서 강호에서 그 사건의 본말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서계(書契)를 예조에 보내려 한다. 아란타는 바로 일본의 속군(屬郡)으로 공물(貢物)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물화를 빼앗고 그 사람들을 억류해 두었으니 이게 과연 성실하고 미더운 도리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차왜가 나왔을 때 본부(本府)와 접위관(接慰官)의 문답이 예조가 답한 서계와 다르지 않아야 될 것이다. 또 도주(島主)와 강호의 집정자 사이에 크게 틈이 났는데, 만약 서로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도주가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이른바 아란타 사람이란 몇 년 전에 표류해 온 남만인(南蠻人)을 말하는 듯한데, 이들의 복색이 왜인과 같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 무슨 근거로 일본으로 들여보내겠습니까. 당초에 파손된 배와 물건을 표류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숨길 만한 일도 없습니다. 차왜가 오면 그대로 답하면 그만입니다. 역관을 시켜 그들의 복장과 말이 왜인과 같았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고 그들의 답을 들은 다음에 만인이 표류해 온 실상을 갖추어 말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표류해 온 남만인에 대해 답할 서계의 일과 대동법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표류해 온 남만인(南蠻人)에 대해 답할 서계의 일을 물으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난해 청나라 사신이 나올 때에 남만인들이 갑자기 홍제교의 주변에 나와 갖가지로 호소하였기 때문에 전라도에 나누어 두었는데, 왜국으로 도망쳐 들어간 자들은 필시 이 무리일 것입니다."
하고,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신이 호남에 있을 때에 보았는데, 이 무리들이 연로에서 구걸하다가 신에게 호소하기를 ‘만약 저희들을 왜국으로 보내준다면 저희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도망쳐 왜국으로 들어간 것이 의심할 게 없습니다."
하자,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남만인이 타국으로 도주하였는데도 지방 관원이 아직까지 보고하지 않았으니, 정말 한심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본도에 명해 조사하여 아뢴 다음에 치죄하라고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각 관서에서 노비를 허명으로 기록하는 폐단을 한 번 정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대 조정에서 일찍이 조사하여 정리한 적이 있었으니, 지금 도감이 또한 이에 따라 국(局)을 설치하여 그 일을 맡아 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별도로 청 하나를 설치할 것 없이 본도로 하여금 문안을 수정하여 비국에 보내게 한 다음 비국의 당상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되, 비국의 당상 이외에도 이 직임에 합당한 사람이 있으면 별도로 임명하시어 그들과 상의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 산간 고을에 끼치는 대동법의 폐단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말하였기 때문에 막 폐지하였다. 그런데 지금 어사 신명규가 올린 서계(書啓)를 보니, ‘백성들이 다시 시행하였으면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의 이해가 어떠한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산간 고을에 대동법을 폐지한 뒤로 호남 사람이 심지어 신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편지를 보내 책망하였는데, 대체로 당초에 폐지하기를 원한 고을은 다만 두서너 개의 큰 읍뿐이었고 그 나머지 작은 읍들은 모두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뜻에는 폐지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었는데, 삼사의 신하가 서로 앞을 다투어 불편하다고 하였고 관찰사도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폐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민유중은 그 당시 감사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도 전일에 경솔하게 폐지하자고 청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하자, 유중이 아뢰기를,
"신이 서울에 있을 때에 이미 산간 고을에는 대동법이 불편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본도에 안찰사로 나가 죽 고을들을 돌아볼 때에 곳곳마다 하소연하는 글을 올려 모두 폐지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대동법의 편리 여부에 대해 물을 때에 민정을 자세히 열거한 다음 치계하여 폐지하자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폐지한 뒤에 또 들으니, 민간에서 도리어 불편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폐지하기 전에 크고 작은 고을들이 모두 일시에 쌀을 많이 내는 것과 목면으로 바꾸기 어려운 것을 큰 폐단으로 여기었는데, 폐지한 뒤에는 경각사(京各司)가 상납하는 공물의 값을 모두 면포로 준비하였기 때문에 상납할 때 뇌물로 쓰는 것과 툇자받는 폐단은 대동법에 없었고 공물로 바치는 베 품질이 전보다 더 정밀하고 좋아야 했으므로 사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불편하다고 한 것이며, 경각사 주인 무리들도 공물의 가격이 대동법을 시행할 때보다 못하다고 원망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백성의 소원에 따라 다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유중이 또 아뢰기를,
"단 본도의 대동법에 매긴 1결에 납부하는 13두를 올봄부터 영원히 1두를 감해 줄 것입니다마는, 12두도 여전히 너무 많다고 봅니다. 지금 1결에 11두의 제도로 정한다면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백성들이 반드시 편리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12두의 제도는 처음에 비해 감해졌는데 지금 또 1두를 감해 준다면 백성들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필시 용도에 부족한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남은 쌀을 모아 두어 불시의 수용으로 삼되, 만일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한 차례 거두어들일 쌀을 감해줌으로써 백성의 힘을 덜어 주도록 한 것은 선대 조정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때의 본 의도였으니, 지금 다시 더 감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산간 고을에 대동법을 다시 시행하기로 의논해 정하였으니, 명년 봄부터 시작할 것입니까, 아니면 명년 가을까지 기다릴 것입니까?"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명년 목화가 나오기 전에는 결코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니, 가을이 된 뒤에 받기로 기한을 물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대동의 쌀을 춘추로 나누어서 받아들이는 것은 사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서는 이에 따라 나누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리하다고 하나, 호남은 구결은 줄어들고 신결이 늘어남으로 인해 해당 관청에서 신결에 따라 두 분기에 낼 쌀을 춘궁기에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괴롭게 여긴 것입니다. 지금 호서의 예에 의하여 가을의 쌀은 구결의 수로, 봄의 쌀은 신결의 수로 나누어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각사가 공물을 상정(詳定)한 원래 수량 이외에 모두 더 적용하는 수량이 있으므로 사실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공물 주인 무리들이 날마다 하소연하자, 할 수 없어서 삼분의 일을 주기도 하고 사분의 일을 주기도 하는데, 일이 매우 구차하고 소략합니다. 대체로 그 값을 베로 계산하면 3백여 동이나 되고 쌀로 계산하더라도 5천여 석에 밑돌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이것을 백성에게 더 부과할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데서 재물이 생길 길도 없습니다. 삼가 보건대, 평안도의 전세는 으레 받아서 각 고을에다 놔두고 회록(會錄)하고 있으므로 본도에서 곡식이 많아 늘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본도의 전세로 연도를 한정하여 가져다 사용한다면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안도 전세는 연해안과 강변 그리고 직로(直路)를 제외한 그 나머지 고을들은 2년을 한도로 가져다 쓰도록 허락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도망친 남만인의 일로 좌수사 정영의 논죄를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엊그제 전라 감사의 장계로 인해 전라도에 나누어 둔 남만인이 도망쳐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본도에 공문을 보내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더니, 좌수영에 나누어 둔 남만인이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좌수사 정영(鄭韺)을 나문하여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수찬 김석주를 왜인의 접위관으로 보내다
수찬 김석주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해 보냈다. 일찍이 갑오년에 남만인(南蠻人)의 배가 표류해 대정(大靜)의 해변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의 탄 배가 죄다 파손되어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제주 목사가 치계하여 여쭙자 그들을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병오년 가을에 그중 8명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표류해 일본 오도(五島)에 도착하였다. 오도에서 이들을 붙잡아 장기(長碕)로 보내니 장기 태수가 그들의 거주지를 물어보았는데 아란타(阿蘭陀)의 사람들이었다. 아란타는 곧 일본에 속한 군(郡)이었다. 그 사람들을 강호(江戶)로 들여보냈는데 관백(關白)이 대마 도주(對馬島主)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묻기를,
"해변에 왕래하는 야소종문(耶蘇宗門)의 잔당들을 일일이 기찰하여 통보해 주기로 일찍이 귀국과 약조를 했었다. 그런데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귀국에 도착했을 때 귀국이 통보하지 않았다. 표류해 돌아온 8명은 비록 아란타 사람이지마는 그 나머지 귀국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필시 야소의 잔당일 것이다."
하면서 여러모로 공갈하였다. 대개 야소는 즉 서양에 있는 별도의 종자인데 요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일찍이 일본과 상통하였는데 뒤에 틈이 생겨 관백이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매양 우리 나라에게 붙잡아 보내주라고 요청하였다. 이번에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일본에 도착했을 때 관백이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야소가 아닌 줄을 알고도 이를 트집잡아 권현당(權現堂)에 쓸 향화(香火)를 요구할 구실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왜(差倭)가 나와 관(館)에 40일을 머물러 있었으나 조정에서 일부러 응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석주를 접위관으로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장훤 및 표류한 중국인 문제를 논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가뭄을 이유로 허물을 인책하면서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은 나의 덕이 부족해서이다. 경이 어찌하여 사직하는가. 위아래가 서로 덕을 닦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훤(張楦)의 일로 인해서 대간이 이조의 관원을 추고하도록 청하였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규례를 정해야 한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예절로, 실행(失行)한 자의 자손은 모두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하는 것이 이미 풍속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병자 호란 때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의 자손은 사로(仕路)에 허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인조조의 규례에는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으니, 어찌 사로에 허통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병란 초기에는 그 당시 상신이었던 최명길(崔鳴吉)의 말로 인해서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왕(先王)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대각의 신하가, 잡혀갔던 아내와 이혼하고 다시 다른 아내를 맞게해 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으므로 다시 혼인한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그 자손을 사로에 허통시키지 않는 것은 그것이 예절에 해가 될까 해서인 것으로, 성상의 분부가 비록 이와 같으나 식자들의 의논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장훤의 일은 개가한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장훤의 생모는 당초에 이미 이혼하였으므로 장훤은 계모의 자식이 되었으며, 또한 계모의 아버지를 외할아버지로 써넣었으니 생모의 허물이 장훤에게는 미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 경우는 개가한 자의 자손과는 다르니, 청현직에는 허통시키지 않더라도 일반 관직에까지 허통시키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내용으로 규례를 만들어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옥당의 관원인 이유상·남이성·이단하·박세당 등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이유상이 아뢰기를,
"신들은 표류해 온 사람들의 일에 대해 듣고 경악스러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과연 한인(漢人)이라면 의리상 차마 잡아보낼 수 없는 것이며, 만약 한인(漢人)이 아니라면 비록 잡아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저들의 힐책이 있겠습니까. 우선 그들로 하여금 섬에 머물러 있게 하고서 청나라의 조사가 있을 경우 ‘한인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여 지금까지 머물려 두고 있다.’고 한다면, 이 역시 변에 대처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고, 박세당이 아뢰기를,
"저들도 역시 사람이니 이치로써 말한다면 어찌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예전에 우리 나라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겼으므로 그 사람들을 차마 잡아 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면 저들이 비록 노여워한다 해도 어찌 거병(擧兵)까지야 하겠습니까."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박세당 등의 말은 몹시 사정에 어둡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뒷날 나랏일을 맡게 될 경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섬에 머물려두었다가 지난번의 남만인(南蠻人)들처럼 도망이라도 가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잡아보내자고 하고 잡아보내지 말자고 하는 것은 모두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나라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오직 내가 참작하여 처리하기에 달렸다."
하였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엊그제 경연 석상에서 중신이 ‘경연을 열고 소대하기를 청하는 것이 모두 형식적인 것이다.’고 하였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는 사이에 어쩌다 언급된 것으로, 경연을 열고 소대하기를 청하는 것이 형식적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하자, 남이성이 아뢰기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하고, 이단하가 아뢰기를,
"경연 석상의 대화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나, 민유중 등의 상소로 보면 중신이 ‘권세를 잡고 지휘하였다.’는 등의 말로 두 신하를 배척하였다고 합니다. 이 두 신하가 비록 조정 신하들의 추중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러 권세를 잡은 것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원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김좌명의 서로 화합하라는 말은 역시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좌명의 말이 너무 날카로웠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상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좌명도 그렇게 심하게 논척하지는 않았었다."
하니, 남이성이 아뢰기를,
"지금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전조(銓曹)가 비록 제대로 일을 해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또한 어찌 두 신하에게서 명령을 듣겠습니까."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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