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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里(어리)

조선 양녕대군 .

원래는 다른 남자(곽선)의 첩인데 존예라는 말을 듣고 뺐어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몇 안되는 뛰어난 미녀이다.

지금 벌어져도 어마어마한 막장인데

그 당시에도 엄청난 스캔들이었나 보다.

이름이 여기저기 많이 등장한다.

웬만한 왕비보다 많은 듯하다.

하지만 역시나 미인박명이라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된다.

 

어리를 연기한 연예인

1. 용의 눈물 - 故 유니

2. 대왕 세종 - 오연서

3. 조선구마사 - 이유비

4. 태종 이방원 - 임수현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2월 15일 임신 2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세자가 곽선의 첩 어리를 간통하여 궁중에 들여온 사건 기사

명하여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전 소윤(小尹) 권보(權堡)·악공(樂工) 이법화(李法華)·환자(宦者) 김기(金奇)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처음에 악공 이오방(李五方)이 몰래 동궁(東宮)에 들어가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의 자색(姿色)과 재예(才藝)가 모두 뛰어났다고 칭찬하니, 세자가 즉시 이오방으로 하여금 그를 도모하게 하였다. 이오방이 이에 그 무리 홍만(洪萬)과 더불어 곽선의 생질녀의 남편 권보(權堡)에게 청하니, 권보가 말하기를,

"곽선은 나와 인친(姻親)의 은혜가 있어 속일 수 없다. 그러나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그의 첩 계지(桂枝)를 시켜 어리(於里)에게 말하였으나, 어리가 응하지 아니하였다. 이법화가 세자에게 고(告)하기를,

"신물(信物)을 보내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하여, 즉시 소환(小宦)을 시켜 수낭(繡囊)을 보내었으나, 어리가 사양하는데 억지로 두고 돌아왔다. 어리가 이 일을 곽선의 양자(養子) 이승(李昇)에게 알리고 그대로 그 집에서 유숙하였다. 이법화가 달려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자, 세자가 소수(小竪)를 거느리고 대궐 담을 넘어 도보로 이오방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이승의 집에 이르렀다. 어리를 찾으니, 이승이 듣지 않으므로 그에게 강요한 뒤에야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어리와 함께 이법화의 집에 가서 자고, 그를 궁중(宮中)으로 납치(納置)한 다음, 세자가 활[弓]을 이승에게 보내고, 어리도 또한 비단을 이승의 처에게 보냈으나, 이승은 활만 받고 비단은 받지 아니하였다. 임금에게 계문(啓聞)하고자 하니, 세자가 사람을 시켜 힐난하기를,

"너는 나의 한 일을 헌부(憲府)나 형조(刑曹)에 고하려 하는가? 이 일을 어디에 고할 것인가?"

하여, 이승이 두려워서 계문하지 못하였다. 마침 전별감(殿別監) 소근동(小斤同)은 본래 김한로(金漢老)의 가노(家奴)인데 수사비(水賜婢)086) 와 서로 희롱하였으므로 김한로가 이를 알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소근동(小斤同)은 범한 것이 있으니, 청컨대, 그 죄를 물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내관(內官)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심문하게 하였더니, 소근동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어리(於里)의 일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대노(大怒)하여 즉시 이승(李昇)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승이 고하였다.

"작년 섣달에 신(臣)이 가족을 거느리고 곽선(郭璇)이 사는 적성현(積城縣)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어리가 서울[京中]에 사는 족친(族親)을 보고 싶다고 말하니, 곽선이 이를 허락하므로 즉시 신과 함께 왔었습니다. 며칠 있다가 신더러 말하기를, ‘근자에 기이한 일이 있다. 계지(桂枝)가 처음에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너를 보고자 한다.」말하더니, 나중에는 「세자가 너를 보고자 한다.」고 말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있고 얼굴도 예쁘지 않은데다 더욱이 지금은 남편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고 하였다.’ 하였으므로, 신이 놀라서 여종[婢]을 시켜 권보(權堡)의 집으로 가서 계지가 중매한 일을 말하게 하였더니, 권보가 대답하기를, ‘근일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아직 그 행방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기에 종[奴]을 불러 내다보게 하였더니, 바로 환관(宦官) 김기(金奇)이었습니다. 김기가 말하기를, ‘세자께서도 오셨다.’ 하기에, 신이 이를 듣고 황급하게 의관을 차리고 나가 뵙고 엎드렸더니, 세자께서 말씀하기를, ‘빨리 어리를 내라.’ 하시므로, 제가 부득이 그 말을 좇았습니다만, 세자께서 데리고 가신 그 뒤로는 신도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같은 큰 일을 어째서 계문(啓聞)하지 않았느냐?"

하니, 이승이 대답하기를,

"처음에 계문하고자 하였으나, 권보가 와서 말리면서 말하기를, ‘네가 계달(啓達)하는 것은 속담에 이른바, 누이 주고 형께 호소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기에, 신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즉시 계달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조말생에게 명하여, 이승에게 편(鞭)087) 1백 대를 때리고 그 직첩(職牒)을 거두게 하였다. 또 권보를 소환하여 이를 물었더니, 숨기고 고하지 아니하므로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내리고, 참찬(參贊) 윤향(尹向)·우부대언(右副代言) 목진공(睦進恭)과 형조·대간(臺諫)에 명하여 잡치(雜治)088) 하게 하였다. 지사(知事) 김사문(金士文) 공주(公州)로 보내어 이오방(李五方)을 잡아 오게 하고, 도사(都事) 양질(楊秩) 경성(鏡城)에 보내어 구종수(具宗秀)를 잡아 오게 하였다. 삼군 진무(三軍鎭撫) 인인경(印仁敬)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니, 인인경은 동궁문(東宮門)을 파수함에 조심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의정부·육조(六曹)·대간에 명하여, 권보(權堡)·이승·이오방·이법화의 죄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뒤의 사람들이 만약 세자에게 향복(享福)하게 하고자 했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함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는 세자로 하여금 불의(不義)에 빠지게 한 것이니, 반역(叛逆)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세자가 착한 일을 하도록 하신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자의 일시적 쾌락만을 얻게 하려고 했으니, 그들이 주상께 불충함도 또한 분명하니, 청컨대, 율(律)을 따라 시행함으로써 뒤에 오는 사람을 경계하소서. 세자의 전후(前後)·좌우(左右)가 모두 정직한 사람이라면 세자께서 족히 천선개과(遷善改過)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경 등의 말은 옛사람의 언론과 다름이 없다."

여러 신하가 모두 나가는데, 임금이 조말생 이원(李原)을 머물게 하여 말하기를,

"세자의 행실이 이같으니, 태갑(太甲)을 내쫓던 고사(古事)089) 를 본받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이원이 대답하기를,

"명하신 말씀은 옳으나, 세자께서는 본래 천질(天質)이 아름다우니 만약 봉영(逢迎)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정직한 사람을 골라 가르치게 한다면, 앞으로 반드시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인(舍人) 심도원(沈道源) 박은(朴訔)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이승 등의 죄를 의논하기를,

"구종수는 율(律)에 따라 처단함이 가하지만, 이승 권보 같은 자는 국론(國論)이 모두 ‘참(斬)함이 가하다.’고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박은이 말하기를,

"신이 그전에 구종수를 논할 때, 신이 죄를 청했던 것이 본래 그와 같았습니다. 만약 신의 말을 좇아 일찍 구종수를 참(斬)하였다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이 이르기를, ‘이승 등의 마음에는 주상이 없다.’고 했는데, 주상이 없다는 것은 대역(大逆)이요, 저부(儲副)090) 를 혼란에 이끌어 넣어 나라의 근본을 그르치고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는 것입니다. 주상께서 반드시 신의 말을 지나치다 할 것이나, 신 등의 생각으로는 능지 처사(凌遲處死)하더라도 가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므로, 심도원(沈道源)이 이로써 아뢰니, 임금이,

"그럴 줄 알았다."

하였다. 빈객(賓客) 변계량(卞季良)·이맹균(李孟畇)·탁신(卓愼) 등이 아뢰기를,

"세자를 이렇게 되게 한 것은 실상 신 등이 능히 교도(敎導)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세자께서 그전에 구종수(具宗秀)를 치죄(治罪)할 때에 신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내 이제부터는 반드시 이런 일들은 하지 않겠다. 만약 개전(改悛)하지 아니하고 다시 전철(前轍)을 밟는다면 성상께서 비록 부자(父子)의 지은(至恩)이라 하여 즉시 죄를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하였으므로, 신 등이 이 말을 듣고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라 기록하여 서연청(書筵廳)의 벽에 붙여 두었는데, 어찌 오늘날의 일이 또 이에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 등은 황송해 하는 것이니, 신 등이 진실로 원함은 이런 무리들을 대의(大義)로 처단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경 등의 죄가 아니다. 내가 아비이면서도 능히 의방(義方)으로 가르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경 등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그 실상을 말하면 경 등의 과실도 아니요, 또한 내 과실도 아니다."

하고, 이어서 전지(傳旨)하기를,

"옛날에 이윤(伊尹)091) 은 신하이나 태갑(太甲)을 동궁(桐宮)092) 에 거처하게 하여 인(仁)에 처하고 의(義)에 옮기게 하였으니, 태갑은 능히 고친 자라 하겠지만 세자는 고치지 못한 자라 하겠다."

하였다. 변계량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은 성상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단지 원함은 세자께서 사리(事理)에 통하시어 마음을 평정(平正)하게 세워 전하에게 지극히 효도하실 줄만 알았지 어찌 이 같은데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실로 신 등이 능히 교도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신 등의 죄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하니, 변계량에게 전교(傳敎)하기를,

"예전에 내가 임실(任實)로 갈 때 경은 세자가 정성(定省)093) 을 오래 궐하게 될 것을 말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으니,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경의 말을 듣고 고인(古人)이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도리가 있다고 했더니, 어찌하여 하늘에 맹세하기를, ‘행실을 고친다.’ 하고서 겨우 2순(旬)도 넘지 못하여 다시 전철(前轍)을 밟는다는 말인가?"

하였다. 변계량(卞季良) 등이,

"세자께서는 천자(天資)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고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같은 무리를 제거하신다면 일조(一朝)에 천선개과(遷善改過)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조(太祖)께서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신 것은 경 등이 아는 바이나, 지금 세자는 한 가지도 없으니 어떻게 조선(朝鮮) 만세(萬世)의 치욕을 씻을 것인가? 내가 태조의 일을 말함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변계량이 말하기를,

"신 등은 이미 상교(上敎)를 알고 있습니다. 태조께서 재덕(才德)이 겸전하셨던 것을 조선의 신자(臣子)로서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우부우부(愚夫愚婦)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매, 목진공(睦進恭)이 아뢰었다.

"이법화(李法華)가 말하기를, ‘전년 정월에 세자께서 밤을 타서 구종수의 집에 이르러 저를 부르기에 제가 이오방과 함께 갔었는데, 뒤이어 상기(上妓) 초궁장(楚宮粧)이 와서 노래하니, 저더러는 금(琴)094) 을 타게 하고, 이오방에게는 피리[笛]를 불게 하여 밤을 새다가 새벽에 이르러서야 초궁장을 끼고 궁중으로 들어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세자가 음률을 좋아하니, 영인(伶人) 이오방 이법화 등이 날마다 음벽(淫僻)한 일로 유인하였고, 구종수도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세자와 함께 몰래 강변에서 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구종수의 집에 가서 유숙하였는데, 초궁장이 다 따라 다녔었다. 이때에 이르러 본역(本役)에 따라 정역(定役)하니, 초궁장 황주(黃州) 기생이었다.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2월 24일 신사 3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구종지·구종유 등을 의금부에 가두고 구종수와 사통한 이숙번을 잡아오게 하다

구종지(具宗之)·구종유(具宗猷) 등을 의금부에 하옥(下獄)하였다. 처음에 구종지 등이 몰래 세자를 구종수(具宗秀)의 집에서 뵈었는데, 이어서 잔치를 베풀고 밤에 술을 마시게 되어 구종지는 비파[瑟]를 타고, 구종유는 일어나 춤을 추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세자가 허물을 고치려 하여 실지대로 아뢴 까닭에 임금이 이 일을 알고 모두 하옥시키고, 위관(委官)125) 이원(李原)·대언(代言) 이명덕(李明德)과 대간(臺諫)에 명하여 잡치(雜治)126) 하게 하였다. 또 의금부 부진무(義禁府副鎭撫) 박안의(朴安義) 연안부(延安府)에 보내어 이숙번(李叔蕃)을 잡아 오게 하였다. 처음에 구종수 등이 이숙번을 안치(安置)한 곳에서 사통(私通)했는데, 세자가 이 일도 아뢴 까닭에 이 같은 명령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권보(權堡)·이법화(李法華)·이오방(李五方)이 모두 동궁(東宮)의 연고 때문에 옥에 갇혔다. 이 무리들은 유희(遊戲)와 잡기(雜伎)로써 동궁에게 아유(阿諛)127) 하여 불의에 빠지게 하였으니 극형(極刑)에 둠이 마땅하나, 그러나 동궁의 연고로 해서 4,5인을 형벌함은 내 차마 하지 못하겠다. 이오방·구종수는 극형을 면치 못하겠지만, 나머지는 모두 한 등[一等]을 감함이 어떻겠는가?"

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이 나아가,

"이같이 간녕(奸佞)128) 한 무리들은 모두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승(李昇)은 비록 장인 곽선(郭璇)의 첩을 동궁에게 바쳤다 하지만, 그러나 ‘동궁의 음희(淫戲)한 일을 누설함은 불가하다.’고 하였으니 나도 비밀히 하여 발설하지 않고자 하여 곧 지신사(知申事)에게 명하여 이승을 채찍질하고 그 직첩(職牒)을 거두게 하였다. 장차 먼 곳으로 귀양보내려다가 물음이 권보에게 미치니, 권보가 숨기고 실지대로 고하지 아니함에, 드디어 의금부에 하옥시켜 그 소유(所由)를 물었다."

유정현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하는 바는 일식(日蝕)과 월식(月蝕)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데 은휘(隱諱)하여 발설하지 아니함은 불가합니다."

하므로, 임금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집의(執義) 하연(河演)이 나아가,

"이승(李昇)이 처음은 비록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권보 등이 어리(於里)의 도모함을 받아들였고, 이미 받아들인 뒤에도 즉시 상달(上達)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동궁이 보낸 물건을 받고도 나타나 고(告)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국문(鞫問)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3월 5일 신묘 3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구종수·구종지·이오방 등을 참하고 가산을 적몰하게 하다

명하여 구종수(具宗秀)·구종지(具宗之)·구종유(具宗猷)·이오방(李五方) 등을 참(斬)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게 하였다. 의금부 도사 윤수(尹粹) 구종수 등을 조율(照律)한 계본(啓本)을 가지고 와서 바치니,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권보(權堡)가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이법화(李法華)와 함께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를 세자에게 바친 것은 세자로 하여금 성상께 아뢰게 하여 저의 몰수된 전지(田地)를 도로 받고자 함에서이고, 또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하였습니다.’ 하고, 이오방(李五方)이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어리를 세자에게 바친 것은 전일에 세자께서 저에게 옷·갓[笠]과 표피(豹皮)·당비파(唐琵琶)·피리[笛]를 내려주신 때문이며, 또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이법화(李法華)가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권보·이오방과 함께 어리를 세자에게 바친 것은 의복(衣服)을 받으려 함에서이고, 또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이승(李昇)이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그 처음에 모약(謀約)한 것은 알지 못하겠고, 세자께서 불각중(不覺中)에 집에 이르러 어리를 데리고 가신 뒤에 각궁(角弓) 하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계달(啓達)하고자 하였으나, 권보의 말 때문에 마침내 중지했습니다.’ 하였으며, 구종수(具宗秀)가 다시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매양 동궁에 나갔으며, 세자를 저의 집에 오게도 하였습니다. 하였고, 구종지(具宗之)·구종유(具宗猷) 등이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병든 어미를 뵙기 위하여 구종수의 집에 갔었는데 구종수가 말하기를, 「세자께서 오늘 밤 집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자께서 오자, 나가서 뵙고 술잔을 올렸는데, 대개 뒷날에 은혜 입을 계산이었습니다.’고 하였으니, 위에 열거한 자들을 모반 대역(謀反大逆)141) 의 율(律)에 비부하여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재산(財産)을 몰관(沒官)하게 하소서."

명하여 구종수(具宗秀) 3형제와 이오방(李五方)을 강등하여, 처참(處斬)하게 하였다.

처음에 구종수 이오방·진포(陳鋪) 등이 동궁을 근시(近侍)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맺어 몰래 세자를 알현하였다. 그 뒤, 밤마다 종묘문(宗廟門)으로 들어가 죽교(竹橋)142) 를 만들어 가지고 담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 세자와 구종수는 박희(博戲)를 하고, 이오방으로 하여금 거문고[琴]를 타게 하면서 밤새도록 나오지 아니하였다. 세자의 사물(賜物)이 매우 많기 때문에 여색(女色)으로 세자를 유인하기 시작했는데, 임금이 이를 알고서도 외부에 드러내지 아니하고, 단지 구종수·이오방만을 가두어 즉시 참(斬)하려 하였으나, 구종수의 어미가 늙은 것을 불쌍히 여겨 마침내 장(杖) 1백 도에 경성(鏡城)으로 귀양보내고, 또 이오방에게도 장 1백 도에, 공주(公州)의 관노(官奴)로 환속(還屬)시켰다. 그러나, 이제 구종수·이오방의 죄가 또 드러나 잡아 와서 추국하니, 세자는 병신년 정월에 구종수·이오방의 꾀임을 들어 밤을 타서 미복(微服)으로 밖으로 나가, 진포·이오방 등을 데리고 구종수의 집에 갔었다. 구종수 이법화, 박혁인(博奕人)143) 방복생(方福生), 상기(上妓) 초궁장(楚宮粧)·승목단(勝牧丹)을 불러 각기 그 재주를 보이게 하며, 구종수가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세자에게 올리니, 그 형 구종지·구종유 구종수의 집에 와서 알현(謁見)하고 잔치를 차려 술을 마셨다. 구종수·구종유는 일어나 춤을 추었다. 구종수가 술을 올려 세자가 마시고 나자, 구종지·구종유는 머리를 조아렸다. 구종지가,

"오늘 일은 꿈만 같습니다."

하고는, 곧 비파(琵琶)를 타면서 그 아우 구종유와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다. 구종지가 또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원컨대, 세자께서는 특히 저희 형제를 대우하여 주소서."

하니, 구종수도 그의 처(妻)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하여 밤새도록 마음껏 기뻐하였다. 구종지·구종유·구종수 등이 갓을 벗고 열배(列拜)하여,

"원컨대, 저하(邸下)께서 길이 저희를 사반(私伴)으로 삼아 주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고 옷을 벗어 구종수에게 주었다. 구종수의 처는 저사(紵絲)144) 로 만든 여자 옷을 꺼내다 초궁장에게 주고 또 면포(綿布)를 승목단에게 주었으며, 이오방·이법화 등에게는 정포(正布)를 주었다. 또 2,3일을 지나서 구종수가 세자를 또 청하여 그의 집에 다시 이르자, 맛있는 음식을 올리고 새벽에 이르러서 파(罷)하였는데, 구종유도 참여하였었다. 구종지는 지위가 참판(參判)에 이르렀지만, 이심(二心)을 품어 마침내 그 아우와 더불어 아첨으로 세자를 섬겨 불의(不義)에 빠지게 하였고, 구종수의 부도(不道)함을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도리어 통동(通同)하여 함께 그 악을 조성하였으니 죽어도 책망을 갚지 못할 것이다. 구종수 경성(鏡城)으로 귀양가자, 한 달도 못되어 야인과 교제를 맺어 사랑 받기를 형제같이 하였다. 피체(被逮)되자 손을 당기며 우는 자도 매우 많았으니, 그의 간활(奸猾)함이 이와 같았다. 이 앞서에 구종수와 대호군(大護軍) 임군례(任君禮), 소윤(少尹) 신이(辛頤)가 결당(結黨)하고 세도에 붙어 하지 않는 짓이 없으니, 그때의 사람들이 업신여겨 말하기를,

"임오방(任五方)·구오방(具五方)하니, 십방(十方)이다."

하여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구종수가 복주(伏誅)되니, 임군례도 근심이 얼굴에 나타났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3월 6일 병진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임금이 조말생에게 세자의 불의를 말하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조말생(趙末生)에게 비밀히 이르기를,

"세자(世子)가 지난 정유년에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으로 어리(於里)라고 하는 자를 빼앗아 전(殿) 안에 들이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쫓겨났었다. 어느날 청평군 궁주(淸平君宮主)163) ·평양군 궁주(平壤君宮主)164) 등이 와서 중궁(中宮)을 보는데, 내가 마침 이르니, 평양군 궁주가 말하기를, ‘세자전(世子殿)에서 유모(乳母)를 구하여 부득이 이를 보내었습니다.’고 하므로, 중궁(中宮)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게 어떤 유아(乳兒)이냐?’고 하니, 궁주가 말하기를, ‘어리(於里)의 소산(所産)입니다.’고 하였다. 그 까닭을 들으니, 김한로(金漢老)의 처가 김한로의 말을 따라서 종비(從婢)라 칭탁하고 데리고 들어가 바쳤다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조말생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세자가 어려서 체모(體貌)가 장대하여 장차 학문(學問)이 이루어지면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부탁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가르치고 깨우치는 방도에 부지런히 하였는데, 이제 이미 수염(鬚髥)이 방불(髣髴)하며, 또한 이미 자식이 있으나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황음(荒淫)하기가 날로 심하다. 역대의 인주(人主) 가운데 태자(太子)에게 사의(私意)를 가지고 이를 바꾼 자가 있었고, 참언(讒言)을 써서 이를 폐(廢)한 자도 또한 있었다. 내가 일찍이 이를 거울삼아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세자의 행동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는가? 어찌하겠는가? 태조(太祖)게서 관인(寬仁)한 큰 그릇으로서 개국(開國)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그 손자에 이르러 이미 이와 같은 자가 있으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비 오듯이 줄줄 눈물을 흘리고,

"죽은 자식 성녕(誠寧)은 우리 가문(家門)에서 얼굴을 바꾼 아이였다. 매양 중국의 사신에게 술을 청(請)할 때에는 중국 사신 황엄(黃儼) 등은 주선(周旋)하는 사이에 주의하여 보고 심히 그를 사랑하였었다. 장차 성취(成就)시켜서 노경(老境)을 위로하려 생각하였는데, 불행하게 단명(短命)하였으니 무엇으로써 마음을 잡겠느냐?"

하니, 조말생이 대답하기를,

"세자가 학문(學問)을 일삼지 아니하고 소인(小人)을 가까이 하니,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실망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이제 또 이와 같으니, 진실로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마땅히 김한로를 죄 주어서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말하였다.

"세자가 불의(不義)한 연고 때문에 죄를 받은 자가 하나둘이 아니니, 내가 실로 부끄럽다. 우선 오로지 이를 가르쳐서 스스로 새 사람 되기를 기다리고, 이 일을 마땅히 누설하지 말도록 하라."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3월 6일 병진 3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천수사 산등성이에 거둥하다

천수사(天水寺) 서쪽 산등성이에 거둥하여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박은(朴訔) 두 사람이 한경(漢京)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별(餞別)하고, 내구마(內廐馬)를 각각 1필씩 내려 주고 말하기를,

"경 등은 이 말을 타고 양경(兩京)165) 을 왕래하라."

하니,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덕(德)이 이와 같으시니, 만약 이 말을 타고 한 번이라도 불의(不義)를행한다면 마땅히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하였다. 유정현·박은 등에게 명하기를,

"지난번 간신(奸臣) 구종수(具宗秀)의 사건이 발각되던 날에 나는 우러러 조종(祖宗)의 적루(積累)한 간난(艱難)을 생각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황희(黃喜)를 불러서 구종수의 죄악과 세자(世子)의 실덕(失德)을 모조리 말하였는데, 황희가 대답 하기를, ‘구종수의 한 짓은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고, 세자의 실덕은 나이가 어린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린 때문입니다.’ 하고 두 번씩이나 말하였는데, 조금도 다른 말이 없었다. 이제 김한로(金漢老)가 세자의 장인으로서, 사직(社稷)의 대체(大體)를 생각지 아니하고 몰래 간휼(奸譎)한 계책을 꾸며서 어리(於里)를 도로 바치었으니, 이 두 사람의 죄는 마땅히 법대로 처치하여야 한다. 내가 아직도 숨기고 차마 그 일을 드러내지 못하고 세자(世子)가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니, 두 경(卿)은 마땅히 누설(漏洩)하지 말도록 하라. 만약 세자가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자취(自取)하는 것이니, 그 종말이 어찌 되겠는가? 좌의정은 나보다 나이가 적으나. 영의정은 나이가 이미 많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나이의 늙고 젊음에 관계 없으니, 두 경(卿)은 마땅히 그리 알라."

하니,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김한로 황희의 죄는 숨겨서 참을 수가 없으니, 진실로 밝게 바로잡아서 후래(後來)를 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우선 서서히 하여서 세자가 스스로 새 사람 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가(可)하다."

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박은이 오랫동안 정권(政權)을 맡아서 뇌물을 많이 받았는데, 어찌 일이 모두 이치에 합(合)하였겠는가? 이에 말하기를,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다.’고 한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10일 기미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세자에게 어리의 일로 구전에 나가 거처하게 하다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구전(舊殿)에 나가 거처하게 하였다. 세자가 임금을 알현(謁見)한 뒤로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혹은 조계(朝啓)에 참여하게 하고, 혹은 교외(郊外)로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게 하고, 또 매일 임금을 모시고 활을 쏘았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세자가 어리(於里)를 도로 받아들이고 또 아이를 가지게 하였다는 소식에 노하여, 세자로 하여금 구전(舊殿)에 거처하게 하고, 나와서 알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인하여 그 전(殿)의 내관(內官) 신덕해(辛德海)·정징(鄭澄)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이날 신루(新樓)에 나아가서 정사를 보고, 일이 끝나자 대간(臺諫)과 반열(班列)의 제경(諸卿)이 차례로 나가는데, 박은(朴訔)이 나갈 때를 당하여 임금이 말하였다.

"너희 대언(代言)들은 모두 나가라. 내가 좌의정(左議政)과 일을 의논하고자 한다."

여러 대언이 모두 나갔다. 한참 뒤에 임금이 명하여 세자전(世子殿)의 소환(小宦) 이전기(李全奇)를 의금부에 가두고, 신덕해·정징을 석방하고, 좌대언(左代言) 이명덕(李明德)을 불러 말하였다.

"지난번에 세자(世子)가 곽선(郭璇)의 첩(妾) 어리(於里)를 빼앗아 궁중(宮中)에 들이었으나, 내가 즉시 쫓아 버렸다. 이제 들으니, 김한로(金漢老)의 어미가 들어가 숙빈(淑嬪)302) 을 볼 때 어리를 데리고 몰래 들어가서 아이를 가지게 하였다. 또 세자전에 들어가 데리고 바깥으로 나와서 아이를 낳게 하고, 도로 세자전 안으로 들이었다. 김한로 등이 나에게 충성하고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인가? 아니면 세자를 사랑하여 하는 것인가? 또 들으니, 세자가 성녕(誠寧)이 죽었을 때에 궁중(宮中)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모제(同母弟)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변중량(卞仲良)의 심행(心行)이 부정(不正)하다고 하였으나, 아우 변계량(卞季良)의 마음가짐은 바르다고 하여, 세자 빈사(世子賓師)의 자리에 거(居)하게 하였다. 아비가 능히 자식을 가르칠 수 없으니, 스승이 어찌 능히 가르치겠는가마는, 그러나 세자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책임이 없을 수 없다."

이어서 변계량을 불러서 전지(傳旨)하였다.

"형(兄)이 용렬하고 경(卿)이 훌륭함은 내가 익히 알고 있다. 세자를 가르치는 데 사람을 고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卿)으로 하여금 세자 빈객(世子賓客)으로 삼아 선(善)하게 인도하도록 하였다. 이제 이처럼 불선(不善)하니, 이것이 비록 경(卿)의 알지 못하는 바이라 하나, 빈사(賓師)가 된 자로서 부끄럽지 아니한가?"

찬성(贊成) 이원(李原)을 불러서 말하였다.

"옛날 이무(李茂)를 결죄(決罪)할 때 구종수(具宗秀)가 그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어 공사(公事)를 누설하고, 그 후 궁(宮)의 담장을 뛰어 넘어가서 세자전(世子殿)에 출입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내가 이를 싫어하여 경(卿)과 황희(黃喜)에게 물으니, 경(卿)은 그 죄를 묻자고 청하였으나, 황희는 말하기를,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하고 다시 죄를 청하지 아니하였다. 경(卿)은 그 일을 잊어버렸는가?"

이원이,

"신(臣)은 잊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세자(世子)에게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종사(宗社) 만세(萬世)를 위한 계책이다. 세자의 동모제(同母弟)가 세 사람이었는데, 이제 한 아들은 죽었다. 장자(長子)·장손(長孫)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은 고금의 상전(常典)이니, 다시 다른 마음이 없으며, 여기에 의심이 있다면 천감(天鑑)에 합(合)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이 말을 의정(議政)에게 고(告)하라."

박은 이원과 더불어 청(請)하였다.

"황희가 하문(下問)에 대답하는 날을 당하여,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하였으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그 까닭을 국문(鞫問)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승선(承宣) 출신(出身)인 자를 우대하기를 공신(功臣) 대접하는 것과 같이 하기 때문에, 황희로 하여금 지위가 2품에 이르게 하여 후하게 대접하는 은의(恩誼)를 온 나라가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심히 간사하고 왜곡되었으므로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내쳤다가 지금 또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삼아 좌천하였는데, 어찌 다시 그 죄를 추문(推問)하겠느냐?"

박은 등이 다시 청하였다.

"황희가 주상의 은혜를 받고도 올바르게 대답하지 않고, 그 간사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상이 자비하여 죄를 주지 않는다면 그 밖의 간신(奸臣)을 어찌 징계하겠습니까?"

임금이,

"마땅히 나오게 하여 물어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항쇄(項鏁)303) 따위의 일은 없애라."

하고, 이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김상녕(金尙寧)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잡아 왔다. 또 말하였다.

"부인(婦人)은 지아비의 부모(父母)를 중하게 여겨야 한다. 숙빈(淑嬪)은 비록 지아비의 뜻을 따랐으나 나의 뜻을 어찌 알지 못하였는가? 어리(於里)를 몰래 들인 것을 내가 심히 미워한다."

이에 내관(內官) 정징(鄭澄)·사알(司謁) 차윤부(車允富)에게 명하였다.

"한경(漢京)에 가서 숙빈(淑嬪)을 아비집으로 내보내라. 다만 노비(奴婢)를 주어서 보내라. 그 맏딸과 맏아들은 은혜를 베풀어 전(殿)에 머물게 하여 옛날대로 공급(供給)하라. 막내딸은 그 어미를 따라가 거주하게 하고, 또 그 첩(妾)의 딸들로 하여금 숙빈(淑嬪)을 따라가 같이 거주하게 하라. 또 평양군(平壤君)이 준 비자(婢子)를 빼앗아 전(殿)에 머물게 하라. 정상을 알고 모의에 참여한 시녀(侍女) 한두 명에게 물어보고 오라."

이어서 숙빈(淑嬪)에게 전교(傳敎)하도록 하였다.

"부인(婦人)은 지아비의 집을 내조(內助)하는데, 네가 지난해의 사건 때에도 나에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책망하니 네가 대답하기를, ‘분명히 죄가 있습니다. 뒤에는 마땅히 고쳐 행동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제 너는 이 사건에서도 또 나에게 고(告)하지 않았으니, 이미 나를 속이고, 또 너의 지아비의 부덕(不德)한 것을 드러낸 까닭으로 내보낸다."

 김한로가 전날에 말미[由]를 받고 한경(漢京)에 갔는데, 이제 소환(召還)하여 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심히 미워하여 말하기를,

"주홍 두꺼비이다."

하고, 말을 재촉하여 급히 오게 하고, 최한(崔閑)·이명덕(李明德)·하연(河演)·원숙(元肅)·성엄(成揜) 등에게 명하여 묻게 하였다.

"세자(世子)가 어리(於里)를 또 들이어서 아이를 가진 사실을 경(卿)은 알았는가?"

김한로가 대답하였다

"신은 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이를 쫓아낼 때를 당하여 세자(世子)가 근심하고 괴로와하여 침식(寢食)을 편히 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그녀의 인생이 가엾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세자(世子)의 정(情)을 가련하게 여겨 그녀로 하여금 연지동(蓮池洞) 집에 와서 거의 1개월 가량 살게 하였습니다. 그녀가 집을 사서 나가서 거처하게 되자, 신(臣)이 구량(口糧)을 주었습니다. 또 날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구종지(具宗之) 등이 복주(伏誅)된 뒤 거의 한 달 만에 한 소환(小宦)이 신의 향교동(鄕校洞) 집에 와서 말하기를, ‘세자가 말하기를, 「그녀를 만나보고자 하니, 경이 주상(主上)에게 상달(上達)하여 도로 들이게 하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나, 신이 틈을 얻지 못하여 여러 날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소환(小宦)이 또 와서 이미 아뢰었는지의 여부를 묻기에 대답하기를, ‘아뢰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소환(小宦)이 신을 길에서 보고 말하기를, ‘세자가 말하기를, 「주상이 허락한다면 가(可)하지만 동념(動念)한다면 불가(不可)하니, 마땅히 아뢰지 말라.」고 하였다.’하였으므로, 신이 이를 듣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녀가 전내(殿內)에 도로 들어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명덕 등이 이에 의거하여 아뢰니, 임금이,

"경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국론(國論)이나 나의 마음으로서는 경이 실로 알지 못하였다고 하겠는가?"

하니, 김한로가 대답하기를,

"사세(事勢)로 본다면 주상의 마음이나 국론(國論)에서는 반드시 신이 알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세자(世子)에게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와 같이 엄하게 하고자 하였다. 경은 사위[壻]를 사랑하여 그녀를 살도록 허락하고, 그 양식과 간장을 주었으니, 경은 과연 덕(德)이 있다. 지난번에 경에게 명하여, 숙빈(淑嬪)에게 세자(世子)의 잘못을 고(告)하지 않은 허물을 가르치게 하니, 대답하기를, ‘과연 잘못이 있습니다.’고 하고, 이제 다시 전과 같이 나의 명(命)을 따르지 않은 것이 시아비[夫父]를 중(重)하게 여기는 짓이냐? 이제 이미 사람을 보내어 경의 집으로 내쫓았다. 내가 용렬한 자질로서 나라의 임금이 되어 외척(外戚)에게 변고(變故)가 있었고, 골육(骨肉)을 상(傷)하게 하여 부왕(父王)에게 죄를 지은 것을 나는 심히 부끄러워 한다. 그러나, 모두 나의 소치(所致)가 아니었다. 이제 또 아들의 처가(妻家) 친척들에게 감히 불선(不善)한 일을 행하고자 하겠는가? 나와 경은 어릴 때부터 교제가 두터웠고, 또 한 집안을 이루었다. 경의 나이가 61세이니, 나와 경이 사생(死生)의 선후(先後)를 대개 알지 못하는데, 세자(世子)로 하여금 어질도록 만들어야 경이 그 부귀(富貴)를 평안히 누릴 것이다. 이제 경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그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짓을 하게 하였으니, 이씨(李氏)의 사직(社稷)은 어찌 되겠느냐? 경의 한 일을 만약 바른대로 진술(陳述)하면 죄의 경중(輕重)을 내가 마땅히 처리할 것이며, 어찌 반드시 유사(有司)에 내려서 이를 묻겠는가?"

김한로가 마음으로 의심하여, 여러 번 그 말을 바꾸어서 오히려 알지 못한다고 하니, 그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김한로가 물러가자, 이명덕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이미 그 말을 듣고 그 안색을 보니, 김한로의 거짓이 드러났습니다. 청컨대,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그 정상을 국문(鞫問)하소서."

하니, 임금이,

"어찌 반드시 유사(攸司)에 내리겠는가? 너희 4대언(代言)은 이미 같이 묻고 들었고, 나도 또한 그 곡직(曲直)을 아니, 다시 청하지 말라."

하고, 또 김한로를 불러서, 여러 대언(代言)에게 명하여 정상을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를 다시 물으니, 김한로가 말하였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계집종[婢]에게 물으니, 불비(佛婢)가 말하기를, ‘지난해의 세자(世子)의 생일(生日)에 택주(宅主)가 전(殿)에 들어갔다가 도로 나올 때 한 시녀(侍女)가 택주(宅主)의 일행에 감싸여 나왔습니다.’고 하였으므로 그제서야 그 여자가 전(殿)에 들어갔다가 도로 나온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윽고 또 말하였다.

"지난해의 세자의 생일 뒤에도 시녀(侍女) 한 사람이 모친(母親)을 감싸고 나왔다고 들었으므로 불비(佛婢)에게 어떤 여자이었는지를 물으니, 불비가 말하기를, ‘뒤에 들어간 여자는, 어리(於里)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대언(代言) 등이 김한로의 말의 실마리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힐문하니, 김한로가 반박하기를,

"그 사실은 오늘 비로소 알았으니, 이에 의거하여 갖추 아뢰어 주시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옛날 초궁장(楚宮粧)이 쫓겨날 때에도 경은 머물러 두기를 청하였으니, 경이 세자(世子)를 위하여 악(惡)을 꺼리는 마음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경이 바른 대로 말하면 경의 죄는 내가 바로 상량(商量)하여 처리하겠다."

김한로가,

"발명(發明)할 바가 없습니다. 마땅히 정상을 알았던 것으로써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그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11일 경신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세자에게 단기로서 한경에 돌아가게 명하다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단기(單騎)로써 한경(漢京)에 돌아가게 하였다가, 이윽고 소환(召還)하였다. 유도(留都)한 병조 진무소(兵曹鎭撫所)에 명하여, 서연관(書筵官)·숙위사(宿衛司)에 금(禁)하여 세자전(世子殿)에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충녕 대군(忠寧大君) 대자암(大慈庵)에서 불사(佛事)하고 개성(開城)으로 돌아가다가 세자(世子)를 마산역(馬山驛) 앞 노상(路上)에서 만났는데, 세자가 노하여,

"어리(於里)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하니, 충녕 대군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서로 헤어져 4,5리쯤 가는데, 별감(別監)이 말을 달려서 소명(召命)을 전하니, 세자가 돌아왔다. 세자가 와서 들어가 임금을 보니, 다시 세자를 크게 책망하였다. 세자가 물러나왔다가 분(忿)이 몹시 나서 다시 들어가 하소연하고자 하였으나 말투가 부도(不道)하였으므로, 충녕 대군이 은의(恩誼)를 상하게 될까 두려워 힘써 만류하였다.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고 꼭 들어가서 하소연하고자 하니, 충녕 대군이 나아가서 세자(世子)의 소매를 잡고 되풀이하여 달래고 깨우쳐 주니, 세자가 자못 깨달아서 그만두었다. 세자가 한경(漢京)으로 돌아가서 전의 분(忿)함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상서(上書)하였다. 충녕 대군이 세자에게 대하여 그를 이끌어서 허물이 없는 지경에 이르고자 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거의 간(諫)한 것이 전후에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11일 경신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김한로를 의금부에 가두다

김한로(金漢老)를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의정부와 육조(六曹)·대간(臺諫)에서 김한로를 유사(攸司)에 내려 그 정상을 국문(鞫問)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김한로를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지겠느냐? 어제 이미 물어서 모두 알았으니, 비록 유사(攸司)에 내려서 묻더라도 진실로 다시 캐낼 정상이 없을 것이다. 내가 장차 그 죄를 헤아려 시행하겠으니, 다시 청하지 말라."

하니, 형조와 대간에서 다시 아뢰었다.

"김한로가 주상의 뜻을 몸받지 아니하고 여색(女色)을 동궁(東宮)에 들이었고, 또 하문(下問)할 때에 바른 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 죄를 주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다가 한참만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공조 판서 정진(鄭鎭)·형조 참판 이유(李愉)·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최사강(崔士康)·사헌 집의(司憲執義) 허규(許揆)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에서 김한로가 범한 바를 안핵(按覈)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으나, 김한로가 모두 승복(承服)하지 않고, 또 전의 말을 바꾸어서 말하였다.

"어리(於里)를 데리고 나간 것은 나의 노모(老母)가 아니고 바로 처의 소행이었습니다. 부처(夫妻)가 각각 거처하였던 까닭으로 지금에 이르도록 알지 못하였습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것은 모두 의심스러운 단서(端緖)이니, 마땅히 형(刑)을 가하여 문초하면 정상을 얻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반드시 그와 같이 할 것은 없다. 다만 그 몰래 숨겨두고 세자를 불의(不義)한 여자에게 빠지게 한 사실과, 또 양식과 물건을 준 사실을 공초(供招)받고, 가도(家道)를 바로잡지 못하여 부부(夫婦)가 각각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변고에 이르른 사실을 공초받으라."

임금이 또 세자와 김한로의 아들 김경재(金敬哉)에게 물어서 사건의 정상을 환하게 알아내고, 이에 김경재를 시켜서 아비에게 고(告)하기를,

"숨기지 말라."

하니, 김한로가 그제서야 사실대로 승복(承服)하여 공초하였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12일 신유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대간·형조에서 황희를 국문하도록 청하다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 황희(黃喜)를 머물러 두고 그 범한 바를 국문(鞫問)하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형조에 하지(下旨)하였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황희(黃喜)가 난적(亂賊) 구종수(具宗秀)의 범한 바를 가볍게 논하였고, 모든 물음에 대답하기를 또 정직하게 말하지 않아서 신자(臣子)의 도리에 어그러짐이 있었다. 마땅히 유사(攸司)에 내려서 율(律)에 의하여 시행하여야 하나, 그러나, 내가 오히려 차마 시행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묻지 않는다. 다만 직첩(職牒)을 거두고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자손(子孫)을 서용하지 말라."

조말생(趙末生)·이명덕(李明德)에게 명하여 박은(朴訔)·한상경(韓尙敬)·이원(李原) 등에게 전교(傳敎)하였다.

"여러 공신(功臣)이 있고 육조(六曹)가 있으나 홀로 삼경(三卿)을 부른 것은 친히 비밀스러운 의논을 하고자 함이다. 우리 나라의 법에는 대간(臺諫)에서 일을 말하여 임금이 따르지 않으면 강청(强請)하기를 마지 않으니, 임금으로 하여금 궤이(詭異)한 이름을 얻게 만들고, 임금과 대간(臺諫)의 사이가 기름이 물에 뜨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혹은 대간(臺諫)의 청(請)을 따르지 않는데, 어찌 죄가 있는 자를 용서하겠는가마는, 다만 죄인(罪人)으로 하여금 그 정상에 합당하게 하여 천심(天心)에 부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원수(元首)308)  고굉(股肱)309) 은 한몸인데, 대신(大臣)이 대간(臺諫)에서 일을 말할 적에 어찌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마는, 그러나 시비(是非)를 말하지 않으니, 이것이 유감이다 지금 김한로(金漢老) 곽선(郭璇)의 첩(妾)을 몰래 동궁(東宮)에 출입시켜 아이를 가지도록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마음은 대개 사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친 아비인데, 어찌 나의 아들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김한로를 없애 버렸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내게 불충(不忠)해서였겠는가? 다만 미혹(迷惑)하고 유벽(幽僻)310)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내가 김한로를 가둔 것은 대간(臺諫)의 청(請) 때문이 아니라, 문안(文案)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알도록 하고자 함이다. 죄의 경중(輕重)은 오직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또 내관(內官) 이전기(李全奇)가 몰래 그 사이에 음모(陰謀)하였으니, 동궁전 여관(東宮殿女官) 모란(牧丹)이 일찍이 아이를 가져 밖으로 나갔는데, 어리(於里)로 하여금 그 이름을 사칭하고 몰래 들어오도록 음모하였다. 내가 모두 죽이고자 한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양귀비(楊貴妃)가 화란(禍亂)의 근원이 되니, 여러 신하들이 죽이자고 청하였는데, 하물며 내가 아비로서 어찌 죽일 수가 없겠느냐?"

박은 등이 대답하였다.

"성상의 하교(下敎)가 옳습니다. 어리(於里)가 일찍이 지아비를 배반하였으니, 이 죄로 죽일 수가 있습니다. 대간(臺諫)의 언사(言辭)가 만약 의리에 합하지 않는다면 신 등이 어찌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또 전교(傳敎)하였다.

"황희(黃喜)가 이조 판서(吏曹判書)였을 때 내가 찬성(贊成)과 황희를 불러서 구종수(具宗秀) 등의 작란(作亂)한 사건을 의논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世子)가 나이가 어려서입니다. 구종수는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내가 눈물을 흘리고, 다른 날 조계(朝啓)에서 내가 황희를 보고 말하기를, ‘인신(人臣)으로 자손(子孫)을 위한 계책(計策)을 쓰지 않는 자가 없다. 임금이 늙었다고 하여 이를 버린다면 장차 어찌 되겠는가?’하니, 황희가 얼굴을 숙이고 들었다. 황희는 오랫동안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민무구(閔無咎) 등을 주멸(誅滅)하는 일을 주모(主謀)하여 민씨(閔氏) 일족과 원수를 맺었는데, 세자(世子)에게 아첨하고 교결(交結)하여서 스스로 안전할 계책을 삼고자 하였으니, 그 간사함이 심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내쫓아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가 올려서 형조 판서로 삼았는데, 그를 다시 보기가 싫어서 옮겨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삼았다. 내가 황희에게 대해서는 사람이 타인(他人)의 자식을 양육(養育)하는 것같이 하였고, 또 부모가 자식을 무육(撫育)하여 기르는 것같이 하였다. 대언(代言)에 구임(久任)311) 하였다가 전직(轉職)시켜 성재(省宰)312) 에 이르게 한 것은 공신(功臣)으로 비(比)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죽는 날에 황희가 따라 죽기를 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길재(吉再)는 전조(前朝)에 주서(注書)의 직임을 받았으나, 오히려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 조정을 섬기지 아니하였다. 나는 황희가 나에 대하여 바로 이와 같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난 임인년에 태종(太宗)이 우리 전하(殿下)313) 에게 이르기를,

"이직(李稷)·황희는 비록 죄를 범하였으나 일에 익숙한 구인(舊人)이므로 버릴수 없으니 가히 불러서 쓸 만하다."

하였는데, 드디어 소환(召還)하도록 명하여 우리 전하(殿下)가 뒤에 모두 크게 썼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13일 임술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세자에게 명하여 한경으로 돌아가게 하다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한경(漢京)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어리(於里)가 도로 들어간 것은 오로지 김한로(金漢老)의 간휼(奸譎)한 흉계였으며, 세자의 허물은 적다. 이제 세자가 돌아가는 데 의장(儀仗)과 시위(侍衛)는 한결같이 전례(前例)와 같이 하고, 서연관(書筵官)과 경승부(敬承府)315) 를 다시 두라."

하고, 정징(鄭澄)에게 명하여 세자(世子)를 수행(隨行)하게 하고, 또 서연 장무(書筵掌務) 조극관(趙克寬)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죄는 김한로에게 있고 세자의 허물이 아니기 때문에 환도(還都)하도록 명하였으니 너희들이 수행하여 돌아가라."

하니, 조극관이 아뢰기를,

"전날 분병조(分兵曹)316) 에 명하여 서연(書筵)과 숙위사(宿衛司)가 전(殿)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만약 명백한 명령이 없다면 분병조(分兵曹)에서 반드시 신 등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렇구나."

하고, 드디어 분명조(分兵曹)에 전지(傳旨)하였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15일 갑자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서연과 숙위사 장무를 가두다

명하여 서연(書筵)과 숙위사(宿衛司) 장무(掌務)를 가두었다. 의금부(義禁府) 부진무(副鎭撫) 이효인(李孝仁)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어리(於里)를 내쫓아 그 부모에게 맡겨서 세자전(世子殿)과 서로 통(通)할 수 없게 하고, 서연(書筵) 장무(掌務) 정자(正字) 조극관(趙克寬)·숙위사(宿衛司) 장무(掌務)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 조모(趙慕) 등을 잡아 와서 의금부에 가두었다. 세자(世子)가 유후사(留後司)에서 한경(漢京)으로 돌아갈 적에 조모 조극관이 따라갔는데, 세자가 빠르게 말을 달려서 한경(漢京)에 이르러 연화동(蓮花洞) 김한로(金漢老)의 집에 들어가서 숙빈(淑嬪) 어리(於里)를 만나니, 종자(從者)인 호군(護軍) 정중수(鄭中守)가 이를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었다. 정중수가 드디어 달려와서 고(告)하니, 임금이 노하여 즉시 이효인을 보내고, 또 병조 정랑(兵曹正郞) 서성(徐省) 경도(京都)321) 에 보내어 세자를 힐책하기를,

"중궁(中宮)과 자녀(子女)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말하고 나도 차마 법대로 처치하지 못하여, 너의 처부(妻父)로 하여금 가볍게 죄를 받게 하였다. 처부(妻父)가 아직 한강(漢江)을 넘지 않았는데, 네가 또 뉘우치지 못하여 바로 전(殿)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숙빈(淑嬪)의 집에 마음대로 들어갔으니, 그 마음보가 무엇인가? 정중수는 오히려 들어가 만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나에게 불효(不孝)하는가?"

하고, 이어서 서연(書筵)과 숙위(宿衛)를 파하고, 사람들이 전(殿) 안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 신하들에게 일렀다.

"숙빈(淑嬪)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를 사제(私第)로 내쫓은 것은 그 아비를 미워한 때문이다. 내가 세자가 돌아갈 적에 숙빈(淑嬪)의 일을 말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보내어서 이를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장차 환관(宦官)으로 이를 지키소서.’하고 하였으므로, 내가 꾸짖었다. 이제 김한로의 죄가 무겁고 한강(漢江)을 넘지 않았는데,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고, 또 그 집에 들어갔는데, 그 뜻이 어찌 숙빈(淑嬪)을 위한 것이겠느냐? 바로 어리(於里)를 사랑하는 때문이니, 내가 심히 이를 미워한다. 정중수는 무부(武夫)인데도 또한 그 불가(不可)한 것을 알았는데, 시종(侍從)하는 관원이 어찌 간(諫)하여 정지시키지 않았는가? 내가 이 말을 듣고 이미 사람을 보내어 조극관 조모를 잡아서 왔다. 내가 세자에게 김한로의 죄를 나라에 알리고자 한다고 말하니, 세자가 드러내지 말라고 굳이 청하였던 까닭으로 실행하지 아니하였다. 이제 내가 차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여 여러 경(卿)들에게 알리니, 경들은 이를 들어라.

내가 세자에게 말하기를, ‘시속(時俗)에서 처부(妻父)를 칭하기를 장인(丈人)이라고 한다. 너의 장인이 바르지 못하여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니, 형문(刑問)322) 하도록 하는 것이 가(可)하겠다.’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책망을 당하고 숙빈(淑嬪)의 본집에 다다르니, 숙빈(淑嬪)과 부모(父母)·조모(祖母)가 함께 있었고 어리(於里)도 또한 옆에 있었습니다. 김한로가 술잔을 잡아서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새 첩을 들인다면 서계(誓戒)를 저버리는 것이니 불가합니다. 이 여자는 전하가 아시는 바이니, 도로 들이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만약 비밀히 들이고자 한다면 가인(家人)과 우리 어머니가 전(殿) 안에 출입할 적에 계집종[婢女]인 것처럼 만든다면 몰래 데리고 출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내가 묻기를, ‘김한로가 먼저 말하였는가? 네가 김한로에게 이러한 흉계를 청하였는가?’고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어리(於里)를 보고 싶다고 말하니, 전(殿) 안에 출입하는 음모를 장인이 말하였습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간휼한 음모를 김한로가 한 것이다. 안문(按問)하기에 이르러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 김경재(金敬哉)에게 명하여 세자의 말한 바를 전(傳)하여 타이른 뒤에야 김한로가 복초(服招)하였다. 처부(妻父)로서 사위의 첩(妾)을 들여 주고, 사위로서 처부(妻父)에게 말하여 첩(妾)을 들이었으니, 심히 인정(人情)에 거슬렸다. 김한로로서 해야 할 바는 나를 칭탁하고 대답하지 않는 것이 가(可)한데, 간휼한 음모가 이와 같이 심하였다. 김한로는 나와 급제(及第)의 동년(同年)이요, 서로 안 지도 가장 오래된다. 태조(太祖) 때에 있어서는 침체(沈滯)되었다가, 내가 즉위하자 이에 승선(承宣)을 제수(除授)하여서 재보(宰輔)에 이르렀고, 또 혼인(婚姻)을 하였는데, 금일에 이에 이러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또 사람들이 모두 황희(黃喜)를 간사하다고 하나, 나는 간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심복(心腹)에 두었는데, 이제 김한로의 죄가 이미 발각되고, 황희도 또한 죄를 면하지 못하니, 지금이나 뒷날에 곧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황희는 이미 늙었으니, 오로지 세자에게 쓰이기를 바라지는 않겠으나 다만 자손(子孫)의 계책을 위해서 세자에게 아부하고 묻는 데 바른 대로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어찌 두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겠느냐? 지난번에 유양(柳亮)·이숙번(李叔蕃)이 세자를 항상 보기를 원하였으나, 내가 곧 이를 금지시키고 말하기를, ‘지금 내가 위에 있는데 어찌 세자를 섬기겠느냐?’ 하였다. 이것은 인신(人臣)의 의(義)가 아니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김한로 황희의 죄를 청하였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21일 경오 6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형조·대간에서 김한로·황희의 죄를 청하다

형조·대간(臺諫)에서 김한로(金漢老)·황희(黃喜)의 죄를 청하였다. 임금이 상소를 읽어보고 말하기를,

"아직 그대로 두라. 황희의 죄는 내가 이를 덮어두려고 하였는데, 김한로의 죄로 인하여 아울러 이를 논의함이 이미 지극한데 다시 청하지 말도록 하라. 황희의 사람됨은 나를 오랫동안 섬겨서 그가 승선(承宣) 노릇을 하였으나 나라를 속이지는 아니하였다. 근년에 이르러 그 자손(子孫)을 위하여 세자에게 아부하고자 하여 물음에 대답하기를 바르게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친근(親近)한 대신(大臣)도 또한 황희의 정직하지 않은 것을 말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 김한로의 죄는 어리석고 비루(卑陋)하기가 심하니, 구종수(具宗秀)의 일이 발각되지 아니하였을 때 변계량(卞季良)을 증인(證人)으로 삼고서 김한로가 눈물을 흘리며 갖추 아뢰기를, ‘비록 세자가 그 행동하는 바에 지나침이 있다면 감히 아뢰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이말은 순량(順良)하였으나 그 뒤에 범한 바는 심히 비루하였다. 또 바르게 대답하지 않으므로, 내가 김경재(金敬哉)의 초사(招辭)를 받아서 김한로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김경재로 하여금 돌아가서 노모(老母)를 봉양(奉養)하게 하는 것도 또한 인정(人情)이다. 그러나, 노모(老母)가 나의 노모가 아닌데, 내가 어찌 불쌍히 여기겠는가? 김경재가 근기(近畿) 지방에 거주(居住)하면 숙빈(淑嬪)으로 인연하여 내왕(來往)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른 곳에다 안치(安置)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그리 알라."

하고, 이에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마땅히 김경재에게는 전날 세자의 말을 받들어 그 아비에게 고(告)한 언사(言辭)와 그 아비가 회답(回答)한 일을 물어서 취초(取招)하고, 마땅히 이효인(李孝仁)에게는 전날 명(命)을 받들고 김한로를 선유(宣諭)한 일과 김한로의 회답한 사연을 물어서 취초(取招)하여서 후일의 고찰(考察)에 증거가 되게 하라. 그 김경재 과천(果川)의 조모(祖母) 집으로 도로 나아가도록 허락하되, 출입(出入)하지 말도록 하라. 만약 근신하지 않는 바가 있다면 성명(性命)이 가석(可惜)할 것이니, 삼가도록 하라. 김한로를 임용(任用)한 지가 오래 되고, 또 세자의 처부(妻父)이기 때문에 내가 중한 형벌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하고, 즉시 김경재에게 전지(傳旨)하니, 김경재가 초사(招辭)하기를,

"이달 12일에 세자가 나에게 공초(供招)하여 말하기를, ‘너의 아비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므로, 불가(不可)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질문에 대답하였다. 이제 내가 이미 아뢰었으니, 숨기지 말고 바른 대로 계문(啓聞)하는 것이 가(可)하다. 내가 연화동댁(蓮花洞宅)으로 나갔을 때 판서(判書)가 나와 말하기를, 「새 여자이면 불가(不可)하나, 어리(於里)는 새 여자가 아니니, 전(殿)에 들어가도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그 전(殿)에 들어가는 일은 어머니와 아내[妻]가 출입(出入)할 때 가히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지난해 나의 생일 날에 나와 어리(於里)가 같이 앉았는데, 판서가 친히 이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받들고 아버지에게 갖추 고(告)하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지난해 생일에 전(殿) 안에 들어갔다가 종전에 알지 못하던 한 여자가 장지[障子]335)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가이(加伊)에게 물으니, 가씨(加氏)가 답하기를,「이것이 그 여자입니다.」고 한 뒤에야 나도 또한 이를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나머지 사연(辭緣)은 아버지가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고, 이효인이 초사(招辭)하기를,

"이달 14일에 교지(敎旨)를 받들고 김한로를 만나서 김경재가 전하여 말하였던 말을 묻기를, ‘경은 알고 있는가? 유사(攸司)에서 전라도의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기를 청하나, 내가 이에 충청도에 부처하게 하였다. 근관(近官)이 또한 김경재 충청도의 먼 지방에 부처하기를 청하나, 내가 이에 조모(祖母)와 한곳에 부처하게 하였는데, 경은 그것을 알고 있는가?’고 하니, 김한로가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신의 죄가 열 번 죽어도 마땅한데, 장(杖) 1대도 받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내려 보낸 은혜를 한 마디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니, 대언(代言) 등이 이를 갖추어서 아뢰었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23일 임신 3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사복시에서 세자 출입시 안마를 바칠 때 임금의 명을 기다리도록 하다

임금이 명하기를,

"사복시(司僕寺)에서는 이제부터 세자(世子)의 출입(出入)에 반드시 나의 명(命)을 기다려서 이에 안마(鞍馬)를 바치라."

하고, 우빈객(右賓客) 변계량(卞季良)을 불러서 전교(傳敎)하기를,

"서연(書筵)의 빈객(賓客) 등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용(趙庸)·김여지(金汝知)·탁신(卓愼)과 신(臣)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들을 버리고 다시 달리 구할 수가 없다. 중국에서 구한다면 얻을 수 있을지라도, 본국(本國)에서 구한다면 다시 얻을 수가 없다. 옛날에 그 어미를 사사(賜死)하고도 아들을 태자(太子)로 삼은 경우가 있었는데, 김한로(金漢老)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숙빈(淑嬪)이야 무슨 죄가 있느냐? 전(殿)에 도로 들이게 하고 싶다."

하니, 변계량이,

"부인(婦人)은 남편 집[夫家]을 내조(內助)하므로 남편을 중하게 여깁니다. 숙빈(淑嬪)의 정(情)이야 어찌 세자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였겠습니까? 숙빈(淑嬪)의 한짓은 부도(婦道)에 합당하니, 숙빈(淑嬪)을 전(殿)에 돌아오게 함은 심히 지당합니다. 김한로가 비록 중한 죄를 입었더라도 숙빈(淑嬪)에게야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 뜻을 가지고 계달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아뢰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세자의 언세(言勢)도 또한 경(卿)의 말과 같았다. 옛날에도 또한 숙위(宿衛)를 많이 설치할 수 없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숙위사(宿衛司)의 속모치(速毛赤)336) 등을 혁파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상교(上敎)가 옳습니다. 숙위사(宿衛司)의 속모치(速毛赤)는 세자에게 무익(無益)하니 이를 혁파하였다가,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려서 다시 세워도 가(可)할 것입니다. 다만 오래도록 서연(書筵)을 파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니, 세자가 허물이 있다면 더욱 강경(講經)에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속히 다시 설치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내가 마땅히 다시 설치하겠다. 그 요속(僚屬)은 정밀히 선택(選擇)을 더하여 조극관(趙克寬)·조모(趙慕)와 같은 자를 차하(差下)하지 말라. 효우(孝友)와 온인(溫仁)을 가르치는 것이 가(可)하다. 세자가 병조의 관원(官員)이 전교(傳敎)하는 날을 당하여 성언(聲言)하기를, ‘백성의 집에 거처하고자 한다.’고 하였으니, 그의 불공(不恭)하기가 이와 같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입에서 족히 책할 말이 나오지 않았으나, 그러나 경으로 하여금 가서 그 허물을 말하게 하고자 하는데, 경이 경숙(經宿)337) 하면서 수고스럽게 가야 할 것을 염려하여 7월 이후로 연기하여 보내겠다. 지금은 최한(崔閑)으로 하여금 한경(漢京)에 가서 숙빈(淑嬪)을 전(殿)에 돌아오게 하겠으나, 그 본가(本家)의 노비(奴婢)는 1구(口)도 전(殿)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경은 그리 알라."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세자가 백성의 집에 거처하고 싶다는 것은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세자가 이미 사리를 알기 때문에 그가 하늘을 속이고 종묘(宗廟)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임금을 속일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원망하고 스스로 꾸짖다가 이러한 말을 발(發)하였을 것입니다. 세자가 어리(於里)에 대하여 끔찍이 사랑하다가 질고(疾苦)를 이루었다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지 않다면 먼 지방에 내쳐서 비밀히 통(通)하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와 같이 하였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삼성(三省)에서 김한로의 죄를 청(請)하는데, 내가 마땅히 법대로 처치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세자로 하여금 절연(絶緣)하여 어버이로 삼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큰 죄를 지으면 절연하여 어버이로 삼지 않는 것이 예(例)인데, 하물며 외척 장인[舅]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경의 말이 옳다. 나도 마땅히 이를 처치하겠다."

하고, 최한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숙빈(淑嬪)을 본전(本殿)에 도로 들어가게 하고, 또 명하여 서연(書筵)을 다시 열게 하였다. 최한이 이르러 빈객(賓客) 조용(趙庸)·탁신(卓愼) 등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이미 지나간 것은 허물하지 않겠으니, 비록 후회하더라도 미칠 수가 있겠는가? 세자로 하여금 속히 전날의 허물을 고쳐서 스스로 새 사람이 되는 단서(端緖)를 속히 나에게 들리게 하라."

하니, 조용 등이 서연(書筵)에 나아가서 강(講)하기를 청(請)하자, 세자가 발의 종기를 가지고 사양하였다. 굳이 청하니, 또 사양하였다. 다시 청하기를,

"비록 편찮으시더라도 잠깐 서연청(書筵廳)에 나와서 저희들[某等]의 말을 들으소서."

하였으나, 또한 병이라 하여 사양하였다. 조용 탁신과 서연관(書筵官)과 대간(臺諫)에서 사연을 같이하여 굳이 청하여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나오지 않았다. 조용 등이 또 청하기를,

"저희들에게 교지(敎旨)가 있었으니, 편복(便服) 차림으로 서연청(書筵廳)에 나오소서."

하여, 상교(上敎)를 가지고 고(告)하였으나 끝내 몸이 아프다고 하여 사양하니,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뒤에 며칠 만에 내관(內官) 김순(金淳)이 서연관(書筵官)에게 말하기를,

"세자께서 복통(腹痛)으로 능히 청강(聽講)하지 못합니다."

하니, 빈객(賓客)과 서연관(書筵官)·대간(臺諫)에서 사연을 같이하여 굳이 청하였으나 몸이 아프다고 사양하였다. 조용이 눈물을 흘리며,

"내가 빈객(賓客)의 자리에 있은 지 이미 여러 해인데도 보도(補導)한 공효가 없으니, 통분(痛憤)하고 통분(痛憤)합니다. 청컨대, 잠깐 나와서 상교(上敎)를 들으소서. 만약 저희들을 상접하지 않겠다면 저하(邸下)의 뉘우치는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니, 성상의 뜻을 움직일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세자가 마침내 병이라 하여 사양하였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30일 기묘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세자가 내관 박지생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를 상서하다

세자가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手書)347) 를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通)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臣)의 여러 첩(妾)을 내보내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차니,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하여 구하지 않으십니까? 선(善)함을 책(責)한다면 이별 해야 하고, 이별한다면 상(祥)스럽지 못함이 너무나 클 것인데, 신은 이와 같은 일이 없었던 까닭으로 악기(樂器)의 줄을 끊어 버리는 행동을 차마 할 수가 없었고, 장래 성색(聲色)을 마음대로 할 계책을 오로지 뜻에 따르고 정(情)에 맡겨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산동(山東)에 거(居)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天下)를 평정하였고, 진왕(晉王) 광(廣)이 비록 그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妾)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잃는 것이 많다고 하느냐 하면, 능히 천만세(千萬世) 자손(子孫)의 첩(妾)을 금지할 수 없으니, 이것이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이요, 첩(妾) 하나를 내보내는 것이 얻는 것이 적다는 것입니다.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어야 하는데, 신효창(申孝昌) 태조(太祖)를 불의(不義)에 빠뜨렸으니 죄가 무거운데 이를 용서하였고, 김한로(金漢老)는 오로지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을 뿐인데 포의지교(布衣之交)348) 를 잊고 이를 버려서 폭로(暴露)하시니, 공신(功臣)이 이로부터 위험하여질 것입니다.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는데 일체 죽(粥)도 마시지 아니하니, 하루 아침에 변고(變故)라도 생긴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일호(一毫)라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임금이 이를 읽어보고 육대언(六代言)과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어 보이고,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니, 이른바 ‘아버지가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내가 만약 부끄러움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 글을 너희들에게 보이겠느냐? 모두 망령된 일을 가지고 말을 하니, 내가 변명(辯明)하고자 한다."

하고, 변계량으로 하여금 답서(答書)를 짓게 하니, 아뢰기를,

"이 일은 모두 망령된 것인데, 어찌 족히 답(答)하여 줄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義)를 들어 꾸짖는 것이 가(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다. 세자는 나의 선(善)하라고 꾸짖는 말을 싫어한다. 옛날에 아들을 바꾸어서 가르쳤으니, 금후로는 대신이 이를 가르치고 나는 관대(寬大)할 것이다. 내가 옛날에 내풍류(內風流)349) 를 들이었는데, 다만 내 몸이 한가로운 데 나아가기 위함이 아니었고 태조(太祖)의 오락을 위함이었던 것을 지신사(知申事)가 알고 있는 바이다. 형세가 장차 가르치기가 어렵겠으니,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니, 조말생(趙末生) 등 5인이 모두 어리(於里)를 참(斬)하여서 그 유혹을 근절하고자 청하였으나, 변계량·김효손(金孝孫)은,

"도리어 어둡고 고집이 세기가 이미 심하여, 사세가 즉시 중지시키기가 어렵겠으니, 우선 그 여자를 돌려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육대언(六代言)의 말과 같이 한다면, 그의 원망과 혐의를 가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장차 사람을 보내어 이를 꾸짖겠다."

하고, 명하여 박지생의 공초(供招)를 받게 하니, 그 공초에 말하기를,

"세자가 금후로 만약 계문(啓聞)할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먼저 보내어 계문하고, 주상이 허락한 뒤에 예궐하여 직달(直達)하겠습니다. 식(式)에 의하여 일 이외에 입전(入傳)하거나 상서(上書)하지 말게 하고, 이와 같은 뜻을 윤덕인(尹德仁)과 전내(殿內) 내관(內官)에게 전(傳)하여 설명하여 시행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에게 감계(鑑戒)가 되게 하고, 만약 모반(謀叛)과 시사(時事)는 이 한계에 두지 마소서."

하였다. 박지생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전하여 유시(諭示)하였는데, 그 사연에 이르기를,

"일전에 내가 너에게 김한로가 여자를 바친 일을 고(告)하고, 또 말하기를, ‘이 말이 만약 나간다면 국가에서 반드시 이를 죽이고자 할 것이다.’하였고, 김한로도 또한 말하기를, ‘신의 죄는 열 번 죽어야 한다.’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김한로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신효창(申孝昌)이 왕명(王命)을 받고 태조(太祖)를 수종(隨從)하였던 까닭에 유사(有司)가 비록 청(請)하더라도 내 마음에는 미편(未便)하다고 생각하여 윤허(允許)하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신효창의 죄가 무겁다고 생각하느냐?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죄인의 딸이라고 혐의하지 아니하고 전(殿)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비록 죽더라도 내가 어찌 아까와하겠느냐? 네가 어찌 죽(粥)을 먹지 않아 변고(變故)가 있으면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하여 내 마음이 움직일까 두려워하겠는가? 사부(師傅)·빈객(賓客)이 김한로와 절연(絶緣)하여 어버이로 삼지 않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절연하여 나주(羅州)로 부처(付處)하였다. 만약 다시 청함이 있으면 그의 죽음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박지생이 즉시 경도(京都)로 돌아갔다. 세자의 사람됨이 광포(狂暴)하고, 미혹(迷惑)하고, 음란하고, 오락을 즐기고, 말을 달리기를 좋아하고, 유생(儒生)을 좋아 하지 아니하고, 학문(學問)을 일삼지 않았다. 매양 서연(書筵)에는 병이라 칭하고 나오지 않다가, 서연관(書筵官)이 두세 번씩 청한 뒤에야 혹은 나왔다. 강론(講論)하는 스승이 앞에 있으면서 전에 한 말과 지나간 행동을 이끌어다가 되풀이하여 이를 타일러도 전심(專心)하여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활 쏘고 말 타고 힘이 센 무사(武士)가 아니면 반드시 맞추는 폐인(嬖人)350) ·영인(伶人)351) 의 무리였다. 일찍이 임금이 강무(講武)로 평강(平康)에 출행(出行)하던 날에 연고를 칭탁하고 나오지 않아서 도성(都城) 문에서 배송(拜送)하는 예(禮)를 폐(廢)하였으나, 즉시 그날 그 군소배(群小輩)를 거느리고 몰래 금천(衿川)·부평(富平) 등지로 가서 말을 달려 사냥하고 매를 놓고 배를 띄워서 즐기다가 3일 만에 돌아왔다. 또 임금이 중국 조정(朝廷)의 사신(使臣)을 연회하던 날에 세자에게 명하여 시연(侍宴)하게 하니, 바야흐로 창기(倡妓)에게 빠져서 병이라 핑계하고 따르지 않았다.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훌륭한 매를 바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길에서 요구하게 하여 유혹하여 이를 빼앗고 다른 매를 대신하여 바치게 하였다. 또 4월 8일 밤에 궁(宮)의 담장을 넘어 가서 간사한 소인배의 무리와 더불어 탄자(彈子)를 가지고 등(燈)을 쏘는 놀이를 하였다. 일찍이 폐인(嬖人) 구종수(具宗秀)·영인(伶人) 이오방(李五方) 등과 몰래 결탁하여 담장을 넘어서 궁(宮)에 들어오게 하여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면서 저녁까지 이르렀고, 혹은 달밤에 군소배와 담장을 넘어 나가서 길 위에서 노닐고 비파(琵琶)를 치면서 놀이하였다. 또 이오방 등과 더불어 구종수의 집에 가서 술에 취하여 새벽녘까지 이른 적이 두 번이었는데, 그 일이 발각되자, 구종수·이오방 등이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제(禔)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으로 맹세의 글을 지어서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어리(於里) 김한로의 집에 숨겨 두고 다시 전(殿)에 들이었다가, 일이 또 발각되니, 임금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통절(痛切)히 이를 꾸짖어 거의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하였고, 또 김한로를 외방에 유배하였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2장이나 부진(敷陳)352) 하여 심히 무례(無禮)하였다. 이에 조말생에게 명하여 세자의 글을 가지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박은(朴訔) 등에게 보이고 말하였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不孝)하였으나, 그러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 낼 수가 없어서, 나는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고자 하였다. 다만 직접 그 잘못을 말하여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4일 계미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서연의 보덕 이하의 관직을 파면하다

서연(書筵)의 보덕(輔德) 이하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하였다.

"간절히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저부(儲副)를 세우고 서연(書筵)을 설치하는 것은 도의(道義)를 강명(講明)하여 바른 데로 보도(輔導)하고 사악(邪惡)을 들이지 않으려는 소이(所以)입니다. 지금 유도(留都)378) 한 빈객(賓客) 행 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 조용(趙庸)·이조 참판 탁신(卓愼)과 이하 서연관(書筵官)이 저부(儲副)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짓을 자행하게 하여 일찍이 보도(輔導)한 공효가 없었고, 또 전하께서 여러 번 중사(中使)를 보내어 경비(警備)한 것이 지엄하였는데, 저부(儲副)가 상서할 때를 당하여 짐짓 듣고도 알지 못하는 체하여 한 마디 만류하는 말도 있지 않았으니, 그 위임(委任)한 뜻에 어찌 되겠습니까? 또 악(惡)을 없애고 근본에 힘쓰는 것은 국가의 상형(常刑)인데, 금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능히 일찍이 화근(禍根)을 없애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의 항목의 서연관(書筵官) 조용(趙庸) 등의 죄를 유사(攸司)에 내려서 안율(按律)하여 시행하고, 아울러 어리(於里)라는 계집을 먼 지방에 내쳐서 화(禍)의 싹을 막으소서."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卽位)하던 처음에 저부(儲副)를 세워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즉시 문신(文臣)으로써 요좌(僚佐)를 겸하여 맡게 하여 좌우(左右)에 둔 것은, 미리 기르고 평소에 가르쳐 그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날마다 선(善)한 데로 나아가서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효를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빈객(賓客) 조용(趙庸)·변계량(卞季良)·김여지(金汝知)·탁신(卓愼), 보덕(輔德) 조서로(趙瑞老), 필선(弼善) 유직(柳直)·박서생(朴瑞生), 문학(文學) 우승범(禹承範), 사경(司經) 유구사(柳九思)·유승유(柳升濡), 정자(正字) 이사맹(李師孟) 등이 바른 심술(心術)과 밝은 도학(道學)으로써 진강(進講)하지 아니하고, 다만 아부(阿附)하고 아첨하기만을 일삼아 그저 예예 하고 무조건 따라서 세자로 하여금 불의에 빠지게 하였으니, 그 성상(聖上)이 관부(官府)를 세우고 사부(師傅)를 둔 뜻에 어찌 되겠습니까? 빌건대, 위의 항목의 서연관(書筵官) 등은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안율(按律)하여 시행(施行)하여서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임금이 명하여 빈객(賓客)은 논하지 말고 그 나머지 서연관은 파직(罷職)하게 하였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4일 계미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사헌부·사간원에서 김한로의 죄를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에서 김한로(金漢老)의 죄를 청하였다. 간원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전날 형조(刑曹)와 대간(臺諫)에서 간신(奸臣) 김한로의 죄를 교장(交章)하여 아뢰었으나, 전하께서 특별히 너그러운 법전(法典)에 좇아서 다만 나주(羅州)에 유배시키도록 하였으니, 신 등은 배나 간절히 마음 아파합니다. 간절히 생각하건대, 김한로의 죄는 천지(天地)와 종사(宗社)에서 용서할 수 없는 바이고, 대소 신민(大小臣民)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인데, 전하께서 어찌 이 일부(一夫)의 몸과 목숨을 아껴서 천지와 종사의 영혼에 답하지 않으시고, 신민의 소망을 위로하지 않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한결같이 전의 소장에 아뢴 바에 의하여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 뒷사람에게 감계(鑑戒)를 내리소서."

하고, 헌부(憲府)에서도 또한 상언(上言)하기를,

"김한로는 이미 저부(儲副)의 장인으로서 마땅히 규잠(規箴)379) 의 말을 진언(進言)하여 세자로 하여금 날로 선(善)한 데로 나아가게 하여 끝내 사악(邪惡)을 들이지 않았어야 할 터인데, 이러한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아첨하고 잘 보이기에만 마음을 써서 몰래 여색(女色)을 바쳐서 그 음욕(淫欲)을 부리는 마음을 키워 주어 그로 하여금 불의(不義)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황천(皇天)이 이를 꾸짖고 종사(宗社)에서 노여워하여 전하의 손을 빌려서 폐하여 외방에 내쳤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김한로의 죄는 천지와 종사에게 용서할 수 없는 바이니, 전하가 사정(私情)을 쓸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김한로를 밝게 법대로 처치하여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서 천지와 종사의 노여움을 푸시고, 또 어리(於里)는 마음을 미혹(迷惑)하는 화근(禍根)이요, 사람을 상하게 하는 괴물(怪物)이니, 아울러 법대로 처치하여서 자손 만세에 경계를 보이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6일 을유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문귀·최한이 한경에서 돌아와 양녕의 일을 아뢰다

문귀(文貴)·최한(崔閑)이 한경(漢京)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임금이 문귀를 보낼적에 문귀에게 이르기를,

"경은 종실(宗室)에 인척(姻戚) 관계가 있으니, 세자가 경을 본다면 반드시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경을 보내려는 것은 군신(群臣)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하다.’고 하여서이다. 경이 가서 나의 말을 세자에게 이야기하라."

하고, 인하여 통곡(痛哭)하면서 목이 메었었다. 이어서 하교(下敎)하였었다.

"너는 비록 광패(狂悖)하였으나 너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 뉘우치지 않고 개전(改悛)하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백관(百官)들이 지금 너의 죄를 가지고 폐(廢)하기를 청하기 때문에 부득이 이에 따랐으니, 너는 그리 알라. 네가 화(禍)를 자취(自取)하였으니, 나와 너는 부자(父子)이지만 군신(君臣)의 도리가 있다. 내가 백관(百官)의 청(請)을 보고 나의 몸도 또한 상연(爽然)382) 히 떨렸다. 네가 옛날에 나에게 고(告)하기를, ‘나는 자리를 사양하고 시위(侍衛)하고 싶습니다.’고 하였는데, 내가 불가(不可)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제 너의 자리를 사양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바라던 바이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은 바탕이 나약하나,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고명(高明)하기 때문에 내가 백관(百官)의 청으로 세자(世子)를 삼았다. 너는 옛날에 나에게 고(告)하기를, 「내가 충녕(忠寧)을 사랑하기를, 매우 돈독(敦篤)히 하여 비록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더불어 같이 먹고자 생각합니다.」하였으니, 이제 충녕(忠寧)으로써 너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너를 대접하는 생각이 두터울 것이다. 회안군이 병인(兵刃)을 가지고 나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내가 두텁게 대접하여 평안히 평생을 보존하였는데, 하물며 네가 충녕(忠寧)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일생(一生)을 평안히 누릴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군신(群臣)이 모두 너를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도록 청하였으나, 중궁(中宮)이 울면서 나에게 청하기를, 「이제(李禔)가 어린아이들을 거느리고 먼 지방으로 간다면 안부(安否)를 통하지 못할 것이니, 빌건대, 가까운 곳에 두소서.」하고, 나도 또한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무심(無心)하겠는가? 이에 군신(群臣)에게 청하니, 군신(群臣)들도 잠정적으로 또 따랐으므로 너를 광주(廣州)에 안치(安置)하는 것이다. 네가 백관(百官)의 장(狀)을 보면 너의 죄를 알고, 또 나의 부득이한 정을 알 것이다. 비자(婢子)는 13구(口)를 거느리되, 네가 사랑하던 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노자(奴子)는 장차 적당히 헤아려서 다시 보내겠다. 전(殿) 안의 잡물(雜物)을 모조리 다 가지고 가도 방해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옛날에 이러한 예(例)가 없었으니, 네가 가졌던 탄궁(彈弓)과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전(殿)에 두라. 오로지 너의 생활의 자량(資糧)은 내가 그것을 도모하여 부족(不足)함이 없게 하겠다. 비록 후회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가 있겠는가마는, 그러나, 지금 부모(父母)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좋은 이름이 들리면 좋겠다.’하라 그 세자의 인신(印信)·관교(官敎)·복용(服用)383) 의 모든 물건은 모두 맡은 바 관원(官員)으로 하여금 수령(收領)하게 하는 것이 가(可)하다. 경(卿)이 세자에게 전교(傳敎)하고, 최한 숙빈(淑嬪)에게 전교하라."

이때에 이르러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상교(上敎)384) 를 세자에게 선유(宣諭)하고, 또 백관(百官)의 장(狀)을 보이니, 세자가 이를 보고 읽다가 ‘분노(憤怒)’란 두 글자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것은 내 마음에 가졌던 것이 아니다. 옛날에 사양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다가 금일에 죄를 얻은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자식으로서 신하가 되어서 나와 같은 자는 세상에 살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문귀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신으로 하여금 백관(百官)의 장(狀)을 가지고 첫머리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백관(百官)들의 이름을 쓴 곳을 모두 펴 보이게 하였으니, 청컨대, 마땅히 다시 이를 보소서.’하니, 답하기를, ‘대체(大體)를 이미 알았다. 다시 펴 볼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문귀가 또 말하기를 ‘주상께서 이미 회안(懷安)385) 을 평안히 보존한 연고와, 전일에 사양하기를, 청한 말을 가지고 후일에 평안히 생(生)을 누리리라는 일을 말씀하셨는데, 어찌하여 나와 같은 사람에게 세상에 살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십니까?’ 하니, 제(禔)가 말하기를, ‘옛날에 자리를 사양하겠다는 청(請)과 충녕(忠寧)을 두터이 사랑한다는 말은 신이 아뢴 것이다.’ 하였습니다. 최한으로 하여금 전(殿) 안에서 떠들거나 우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다음날 밝지도 않아서 숙빈(淑嬪)과 함께 광주(廣州)로 갔는데, 문귀가 전(殿) 안의 잡물(雜物)을 각사(各司)에 붙이고, 종비(從婢) 13구(口) 외에 4비자(婢子)가 있으므로 그 근원을 물으니 모두 시녀(侍女)였습니다. 그러므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여 우선 전(殿) 안에 두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禔)가 비탄(悲嘆)하던가?"

하니, 문귀가 대답하기를,

"선교(宣敎)할 때에 신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하였으나, 양녕(讓寧)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비탄(悲嘆)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그러하였는지를 물으니, 문귀가 대답하기를,

"신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와 같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되었다. 어찌 허물을 뉘우치겠는가? 4비자(婢子)도 내가 장차 제(禔)가 있는 곳에 보내겠고, 어리(於里)로 하여금 또한 따라서 광주(廣州)에 가게 하겠다."

하고, 이에 내신(內臣) 홍득경(洪得敬)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4비자(婢子)를 광주(廣州)로 보내게 하였다. 원윤(元胤)이 돌아와 아뢰기를,

"양녕(讓寧) 동대문(東大門)에 이르러 신에게 묻기를, ‘경은 무슨 일로 오는가?’하므로, 대답하기를, ‘호송(護送)입니다.’하였습니다. 양녕이 또 말하기를, ‘이 땅을 다시 볼 길이 없을 것이다. 아아!’하고, 또 광나루[廣津]에 이르러 배를 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작별할 때에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성질이 본래 거칠고 사나와 보통 때에 나아가 뵈올 적에 말이 반드시 불공(不恭)하였다. 이제 이에 다시 상서(上書)한 글을 보니, 불공(不恭)하기가 이와 같았다. 죄가 심하였으나 죽지 않은 것은 주상의 덕택이니, 어떻게 보답하고 사례하겠는가? 내 성질이 겁약(㤼弱)하기 때문에 짐작(斟酌)을 잘못하여 자주 불효(不孝)를 범하였으니, 어찌 성상을 보기를 기약하겠는가?’하였습니다. 그 시비(侍婢) 13인은 나라에서 정한 숫자인데, 소아(小兒)로서 더 따라가는 자가 2인이었으므로, 신이 사계(四季) 등 2인을 빼앗아 한경(漢京)으로 보냈습니다."

하니, 임금이,

"2인은 모두 그 첩인데, 경이 빼앗은 것은 잘못이다."

하고, 즉시 명하여 광주(廣州)로 보내게 하였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1월 30일 을해 6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양녕이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다

광주(廣州)에서 달려와 아뢰기를,

"양녕이 지난밤 자정에 편지를 써서 봉해 놓고 담을 넘어 도망갔습니다."

고 하니, 상왕은 근심과 한탄으로 식사도 전폐하고 내시 최한(崔閑) 홍득경(洪得敬) 및 내금위(內禁衛) 홍약(洪約)들을 보내어 앞질러 광주에 가서 찾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곧 선지를 내리기를,

"양녕 대군 이제(李禔)는 성질과 행실이 광망(狂妄)하나, 내가 골육의 정으로써 양근(楊根) 지방에 집을 마련하고 녹봉을 후히 주어 편안히 부귀를 누리게 하려고 했는데, 요새 는 그 광망한 증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독신으로 걸어 나갔다. 이 일을 경기도 관찰사로 하여금 도내에 알리어 찾아서 거느리고 오되, 그 찾은 사람의 성명을 적어서 올리도록 하라. 나는 상주기를 아끼지 않겠다."

고 하였고, 임금도 하교(下敎)하기를,

"양녕 대군은 골육의 지친이니, 경기 감사는 심력을 다해서 찾아 주길 바란다. 찾은 자에게는 중한 상을 주겠다."

고 하였다. 상왕은 이배(李倍) 김경(金俓)에게 임소로 돌아가서 양녕을 찾으라고 명령하였다. 양녕이 달아남에 있어 상하가 다 허물을 애첩 어리(於里)에게 돌리니, 어리는 근심스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날 밤에 목을 매어 죽었다. 처음 상왕이 위(位)에 있을 적에, 임금은 잠저(潛邸)에 있었고, 양녕은 세자가 되었다. 그때 어리의 사건이 발생하여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는데, 기생[女妓] 칠점생(七點生)도 연루의 혐의로 잡혀 갇히었다. 그 기생의 말이,

"심 판서(沈判書) 댁 주인도 역시 이 일을 안다."

고 하니, 의금부는 아뢰기를,

"심온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니, 동궁의 실덕한 사실을 안다면, 당장에 아뢰는 것이 마땅하거늘, 끝내 아뢰지 않고 말았으니, 그 아내마저 데려다 문초해야 된다."

고 하였다. 세자가 일찍이 금상(今上)더러 이르기를,

"어리의 아름다움을 들은 적이 오래였으나, 그가 성 밖에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뒤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그 집에 가서 나오라고 했으나, 그 집에서 숨기고 내보내지 않으므로, 내가 강요했더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아니했으나, 그러나 한 번 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집 사람더러 말을 대령하여 태우라고 했으나, 그 집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태도였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탄 말에 태우고 나는 걸어가겠다. ’고 했더니, 그 집 사람이 마지못해 말을 대령했다. 그래서 나는 어리의 옷소매를 끌어 말을 타게 하니, 어리는 말하기를, ‘비록 나를 붙들어 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탈 작정이다.’ 하고 곧 말을 탔다. 그때 온 마을 사람들이 삼대[麻] 같이 모여 구경하였다. 그날 밤에 광통교(廣通橋) 가에 있는 오막집에 와서 자고, 이튿날에 어리는 머리를 감고 연지·분을 바르고 저물녘에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 함께 궁으로 들어오는데,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왔다."

고 하였고, 또 효령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광대 이법화(李法華)의 아들 이오마지(李吾麿智)는 나의 반당(伴黨)인데, 세자가 항상 법화의 집에 와서 혹은 자기도 하고, 혹은 잔치도 하니, 오마지는 매양 이웃사람을 속여 말하기를, ‘우리 주공(主公) 효령 대군이 우리 집에 왔다. ’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다른 반당 한 사람이 탐색해서 알고 겉으로 모르는 체하며, 오마지더러 말하기를, ‘나도 주공을 뵙고자 한다. ’고 하니, 오마지는 온갖 탈을 하고 들여보내지 아니했다. 새벽녘에 세자가 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역시 따라와 부르면서 말하기를, ‘주공을 뵙고 싶다. ’고 하니, 오마지는 말 옆에 서 있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 하였다. 의금부에서 심온과 그 아내의 죄를 다스리자는 주청이 오게 되자, 임금은 세자의 말한 바와 효녕의 말한 바를 갖추어 상왕께 아뢰고, 또 아뢰기를,

"신의 들은 바가 이러하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사대부(卿士大夫)로부터 여염집 서민들까지도 모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심온을 죄를 주자고 청한 대신도 역시 어찌 몰라서 말을 안했겠습니까. 유독 심온과 그 아내에게 죄를 주자고 한다면, 옳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왕은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

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상왕은 친히 지신사(知申事) 및 대간(臺諫)을 불러들여 임금의 아뢴 바와 같이 갖추어 말하고 또 말하기를,

"심온 충녕(忠寧)의 장인인데, 인정상 세자의 일을 어떻게 말하겠느냐."

고 하니, 하연(河演)이 때마침 대관(臺官)이 되어 면전에서 아뢰기를,

"전하의 분부가 지당하옵니다."

고 하였다. 그래서 신문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양녕이 간사한 소인들과 사통하여 동궁(東宮)에 드나들게 하니, 상왕이 알고 진무(鎭撫)한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 있으면서 살피게 하였는데, 하루는 양녕이 금상에게 이르기를,

"오늘 문을 지키는 진무가, 내가 세수할 때 잡인이 문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겉으로 검찰하는 시늉을 하며 언성을 높여 꾸짖기는 하나, 실상은 나를 두둔하는 모양 같았다."

고 하며, 성명을 말하지를 아니하였다. 대개는 권이(權頤)일 것이다. 금상이 동궁에 있을 적에, 심온이 금상에게 아뢰기를,

"조정 관원들의 떠드는 말이, 양녕이 만약 폐위를 당하지 않고 1, 2년만 지났다면, 임군례(任君禮)·권이(權頤)는 다 구종수(具宗秀)와 같이 될 것이라 한답니다."

고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은 이 사실을 다 상왕에게 아뢰었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2일 정축 3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양녕의 애첩 어리를 협박하여 목매어 죽게 한 양녕의 유모 등을 가두다

상왕은 명령을 내려 약장(藥莊)·가이(加伊)·충개(虫介)를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약장 양녕의 유모(乳母), 가이 김한로의 비첩(婢妾), 충개 어리의 몸종이다. 이번 양녕이 도망갔을 때, 약장들은 일이 어리 때문에 났다고 하여, 허물을 씌워 협박을 더하였고, 충개는 제지하지 못하고 목을 매어 죽게 한 때문이다. 옥에 가두고 문초하다가 이윽고 놓아 주었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상왕이 양녕에게 간곡히 심회를 말하고 매사냥이나 하며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다

상왕이 편전에 좌정하니, 임금은 시종하고 양녕도 곁에 있었다. 상왕은 병조 판서 조말생·참판 이명덕·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좌대언(左代言) 김익정(金益精)·좌부대언(左副代言) 윤회(尹淮)를 불러 앉히고 이르기를,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양녕을 처우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이제야 단안을 얻었다. 경(卿)들은 다 고금을 통달한 선비들이니, 나의 말을 분명히 들으라. 양녕의 하는 짓이 광태하여 가르쳐도 고치지 못하고 드디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반역을 도모한 죄는 전혀 없기 때문에 서울 근방에 두고 목숨이나 보존케 하려고 하였는데, 또 다시 오늘 같은 일이 있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 【즉 여흥 부원군.】 에 두게 했고, 병자년에 효녕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마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주상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마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그러나 세자로 봉하는 날에 있어서는 다만 적자요 장자인 때문으로 양녕을 봉한 것이며,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사정을 두었겠느냐. 양녕이 이미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행동이 착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불효한 것은 차마 말할 수가 없으니, 이 뒤로는 양녕을 의정부에 회부하건 육조에 회부하건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또 만약 법을 범한다면, 의정부가 잡아오건 육조가 잡아오건 나는 상관하지 않고 한결같이 국가의 처분만을 따를 것이며, 내시나 궁첩(宮妾)들이 감히 사정을 두고 양녕의 일을 들어 나에게 고한다면, 나는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그때 가서 나더러 잔인하다는 말은 말 것이며, 오직 연중의 정지 세시(正至歲時) 같은 명절에 부모를 보고자 하여 대궐 문밖에 와 있다면, 마땅히 불러 볼 것이며, 양녕의 몸에 만약 병이 있어 위급하여 빈사 상태에 빠졌다면, 또한 나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나와 양녕은 부자지간이라, 인정상 차마 못할 일이 있거니와, 임금과 신하에 있어서는 이와 다르다. 신하가 임금에게 진실로 명분을 범한다면, 죽음을 내리는 법이 있을 따름이니, 양녕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지만 어찌 모르겠느냐. 옛적에 당 명황(唐明皇)이 하루에 아들 셋을 죽였기로 사가[史氏]가 너무도 어질지 못하다고 꾸짖었지만, 이것은 세 아들이 죄가 없는데,  명황이 남의 중상하는 말을 듣고서 한 일이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이 참으로 죄가 있다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전위(傳位)한 것은 본시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한가롭게 지내고자 함에서이다. 유독 군사 관계만은 아직도 내가 거느리고 있는 것은, 주상은 나이 젊어 군무를 모르기 때문이나, 나이 30이 되어 일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면, 다 맡길 생각이다. 지난날 만약 여러 아들로 원수(元帥)를 삼아 각도 병마를 갈라 맡고 장사(將士)들을 접견하게 했다면, 주상이 어찌 지금까지 군무를 모르겠느냐. 그러나 내가 감히 못한 것은 저런 험상한 위인이 동궁에 있는데, 여러 아우들이 각기 병권을 잡는다면, 어떻게 서로 용납될 수 있겠느냐."

고 하며, 양녕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도망해 갔을 적에, 나나 대비는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늘 눈물을 흘리니, 주상이 곁에 있어 역시 눈물을 흘렸다. 가령 네 몸은 편안한데, 아우들이 연고가 있다면, 너는 주상의 처사와 같이 하겠느냐. 주상은 효도와 우애가 참으로 지극하여, 너희 형제가 다 같이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이 없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도주하여 불행했다면, 후일에 어찌 네가 광망(狂妄)해서 스스로 그렇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으랴."

하며, 또 말하기를,

"어리의 죽음은 진실로 슬프고 민망하다. 어리 자신이 양녕에게 들어온 것이 아니고, 양녕이 재상의 첩을 탈취한 것이며, 또 양녕이 달아난 것도 어찌 어리 때문이겠느냐."

고 하며, 또 말하기를,

"이제 양녕에게 매[鷹子] 2연(連)과 말 3필을 주어 매사냥이나 하며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겠다."

하고, 따라서 광주 목사나 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였다. 양녕이 다시 매를 길들이는 자 장립(張立) 등 3명을 청하니, 상왕은 돌이켜보며 이르기를,

"무릇 천인이 귀인을 따르는 것은, 귀인이 잘 비호해 주기 때문인데, 너는 불초하여, 네 몸도 잘 보전치 못하면서 하물며 딴 남이랴. 사람치고 누가 너를 즐겨 따르겠느냐. 또 너는 비록 다른 기술은 없으나 매를 길들이는 것은 네 자신이 능하니, 다른 사람이 필요치 않다."

고 하였다.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 2월 16일 정묘 2번째기사 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문무관 2품 이상이 봉장을 올려 양녕을 탄핵하다

정부(政府)와 여러 관청[曹]의 문무관(文武官) 2품 이상의 관원이 봉장(封章)을 올려 양녕의 죄를 청하기를,

"영의정 신 유정현(柳廷顯) 등은 말씀을 올립니다. 신자(臣子)의 죄는 불충과 불효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보건대, 양녕 대군 는 그가 전일에 태종이 강무(講武)로써 평강(平康) 등지에 행차하였을 때, 예의상 마땅히 도성(都城) 문밖에 나가서 절하고 전송해야 될 것이온데, 는 사고가 있다고 핑계하고는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더니, 몰래 금천(衿川) 등지에 가서 3일 동안 사냥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또 태종 중국 사신과 연회할 적에, 에게 명하여 연회에 배석(陪席)하도록 하였는데, 는 그 때 창기(娼妓)에게 빠져서 병을 핑계하고는 즐겨 나아가지 않았으며, 어느 사람이 매를 진상하는데 는 그 매가 좋다는 말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동문(東門)에서 기다려 이를 꾀어 취하고 다른 매로써 〈대신〉 바쳤으며, 또 4월 8일 밤에 담을 넘어 나가서 간사한 소인(小人)의 무리들과 더불어 탄환을 가지고 등불을 치며 놀았고, 또 달밤에 담을 넘어 나가서 간사한 소인의 무리들과 더불어 비파(琵琶)를 타며 길거리에서 노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밤마다 영인(伶人) 이오방(李五方)·이법화(李法華) 등을 불러들여 담을 넘어 궁궐에 들어와서 날이 새기까지 취해 마시면서 잡희(雜戲)를 하게 하고, 도 또한 그 재주를 본받아 하지 않는 짓이 없었습니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곽선(郭旋)의 첩 어리(於里)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불량배들과 더불어 담을 넘어 나가서 그 집에 가서 〈그 첩을〉 훔치고 돌아왔으며, 또 밤을 이용하여 담을 넘어 여러 소인들과 더불어 구종수(具宗秀)의 집에 가서 연회에 술을 취하여 밤을 새운 일이 두 번이나 있었으며, 의 더러운 행동이 널리 알려져 위에 들리게 되어, 태종이 이를 꾸짖으니, 가 겉으로 허물을 뉘우치는 체하며 맹세하는 글을 지어 종묘(宗廟)에 아뢰고, 또 태종에게도 글을 올려 다시는 전일의 행동을 하지 않기로 스스로 기약했는데도 얼마 안가서 다시 김한로(金漢老)의 음험한 계책을 써서 어리(於里)를 궁중(宮中)으로 몰래 불러 들여 아기를 배어 낳기까지 하였는데, 유모(乳母)를 구하다가 일이 이제 발각되었습니다. 가 맹세한 말을 저버리고 하늘을 속이며, 종묘(宗廟)를 속이고, 군부(君父)를 속인 것이 이같이 극도에 이르렀는데, 태종이 이를 꾸짖어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바랐으나, 는 임금의 뜻을 본받지 않고, 도리어 글을 올리며 내용이 심히 패역(悖逆)했으니, 전연 신하로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신료(臣僚)들은 그 죄악을 헤아려 폐하기를 청하여, 광주(廣州)로 내쫓았는데, 는 악을 쌓고 고치지 아니하였으며, 또 담을 넘어 고을 기생 두 사람을 훔쳤는데, 태종이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을 잡아 오게 하니, 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이용하여 도망해 나가서 두 전하023) 로 하여금 수라를 물리치고 울게까지 하였으며, 이미 기생을 훔친 까닭으로 두 전하를 놀라게 하고도 오히려 조금도 허물을 고치지 않고, 또 담을 넘어가서 남의 첩을 훔쳤으니, 의 허물이 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태종이 일찍이 전하와 함께 편전(便殿)에 앉아서 를 불러 전날에 행한 과실을 일일이 들어 책망하였습니다. 인하여 병조와 승정원의 신들에게 이르시기를, ‘지금 를 여러 신하들에게 부탁하니, 가 만약 국왕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옛날에도 사형(死刑)을 내리는 법이 있었다. ’고 하셨으며, 그 후에도 여러 번 신들에게 이르시기를, ‘를 여러 신하에게 부탁한다. ’고 하여,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이를 잊었겠습니까. 태종께서 주문왕(周文王)과 같이 아버지 되신 자애(慈愛)가 있고, 요제(堯帝)와 같이 자식의 사람됨을 아시는 밝은 지혜가 있어, 이미 경계하고 또 여러 신하들에게 부탁하시니, 신들은 성언(成言)을 우러러 생각하며, 어찌 감히 폐하겠습니까. 오늘날에 와서는 의 패역(悖逆)한 일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므로, 신들이 수죄(數罪)할 것을 청하는 바입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지 겨우 20일 만에,  이천(利川) 집에서 사람을 청하여 밭에 김을 매게 하면서 농부가(農夫歌)를 부르게 하고는, 그의 종자(從者)에게 이르기를 ‘즐겁다. ’고 하였으니, 그 죄가 한 가지이고, 태종의 장례(葬禮)가 겨우 마치자 마자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들판에서 마음대로 다니면서 개를 놓아 노루와 여우를 쫓게 하고, 덫을 놓아 기러기와 따오기[鵠]를 잡았으니, 그 죄가 두 가지이고, 가 수리(修理)하는 일이 있어 고을 백성을 청하여 돌을 운반하면서 소주(燒酒)를 먹여 한 사람이 운명(殞命)하게 되니, 현관(縣官) 박고(朴翺)는 공사(供辭)에 관련된 두서너 사람을 잡아 가두고 위에 아뢰니, 가 매우 분하게 여겨 위에 글을 올렸는데, 글 내용이 모두 원망하는 말이어서, 신024) 과 전하의 사이가 이로부터 소원(疏遠)해질 것이라고까지 하였으니, 그 죄가 세 가지이고, 가 종자(從者)를 시켜 남의 개를 훔치고는 일이 알려져, 전하께서 사람을 시켜 그것이 참말인가 아닌가를 묻게 하니, 가 이에 맹세하기를,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해가 위에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말을 믿고 무고(誣告)한 사람을 죄주고자 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게 하매, 일이 모두 실상이었으니, 의 맹세한 말은 다만 〈임금을〉 속인 것뿐입니다. 농부가(農夫歌)를 듣고 여우와 노루를 쫓은 일도 이로 인하여 또한 나타났는데, 전하께서 금부(禁府)의 관원으로 하여금 밖에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 개를 훔친 자에게도 또한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그를 보호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데도, 는 이에 원망하기를, ‘전하가 이 일을 버려두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전파(傳播)하게 하였다. ’고 하였으니, 그 죄가 네 가지이고, 근일에 또 종자(從者) 허금(許今)으로 하여금 작은 개를 큰 개와 교환하기를 남의 집에 구하니, 현관(縣官) 박곤(朴坤)이 이 사실을 알렸는데도, 전하께서는 그냥 두고 묻지 않으셨으며, 승정원의 신들이 굳이 청하여도, 전하께서는 아직 유사(有司)에게 내리지 않으셨는데, 때마침 의 한 집안 사람이 서울에 오는 자가 있으므로, 그 사람에게 허금을 거느리고 오게 하였는데, 명령을 받은 사람이 도달하게 되매, 가 처음에는 ‘허금이 다른 곳에 갔다. ’고 말하다가, 잇따라 ‘허금이 도주했다. ’고 말하여, 여러 방법으로 이를 숨기었으므로, 명령을 받은 사람이 굳이 청하기를, ‘내가 이미 명령을 받았으니, 그냥 돌아갈 수 없다. ’고 하매, 가 그제야 거만한 태로로 말하기를, ‘허금은 우리 집 안에 있다. 전하께서 허금을 잡아오게 한 것은 다만 개에 관한 일 때문인데, 군신(君臣)의 예(禮)가 중한 것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리오마는, 마침내 너와 함께 보낼 수는 없다. ’고 하였으니, 그 죄가 다섯 가지입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임금의 재궁(梓宮)이 빈소에 있는데도 노래를 들으면서 즐거움을 삼고, 임금의 장례(葬禮)를 겨우 마쳤는데, 짐승을 사냥하여 마지 않았으며, 원망하여 글을 올려 임금의 명을 거스렸으니, 의 불충·불효한 죄는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될 수 없으며, 종사(宗社)의 용서하지 못할 바이오니, 전하께서 사정을 쓸 수 없는 바입니다. 옛날에 관숙(管叔) 채숙(蔡叔)이 죄가 있으매, 주공(周公)은 이들에게 사형(死刑)을 내렸으니, 성인(聖人)이 사사로운 은혜로써 공변된 도리를 폐하지 않은 것은 군신(君臣)의 의리가 중한 때문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천지(天地)의 정대(正大)한 원리(原理)를 본뜨고, 선성(先聖)의 지극히 공변된 마음을 본받아, 의 죄악을 법대로 처리한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한 일이며, 신민(臣民)에게도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main/main.do)

https://www.history.go.kr/contents/contentsPage.do;jsessionid=04C706CBE394C79D3B2B3FBF4C1691BB?groupId=000000000571&menuId=000000000574&pageId=0000000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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